제이바다2025-09-13 13:11:39
벗어날 수는 없어도 견뎌내야 할 ‘혐오스런’ 인간의 굴레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리뷰
▷한줄평 :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의 비극, 그것은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굴레
▷평점 : ★★★★★
▷영화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년
저명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서두에서 “삶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인생의 고통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성숙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불행의 반대말은 ‘일상’이다”라는 말처럼, 특별한
일 없이 평온한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저 거기에 충실히 살아가는
단순한 일조차 수많은 난관과 힘겨운 고통이 따른다.
그렇기에 마츠코의 일생을 불행으로 가득 찬 어떤 한 특별한 여인의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렵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의 불행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겪는 삶의 패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츠코의 ‘시시한 인생’은 바로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삶이 아니던가? 이 영화는 이런 우리네
삶의 부조리를 폐부를 찌르듯 정면으로 드러내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 인생을 ‘시선투쟁’의 과정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내는 주체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권위와 규범, 관습 등의 사회적 폭력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 폭력적 ‘시선’ 앞에 굴복하며 치욕적인 선택을 하곤 했던가.
마츠코의 굴곡진 인생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녀를 무너뜨린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결국 그녀의 ‘시선투쟁’의 실패는 평생을 옭아매는 덫이 되었다.
비극적 종말을 맞이해야 했던 마츠코는 어떤 계기로 ‘혐오스럽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던 것일까?
표정은 습관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되었다
마츠코는 아픈 여동생에게만 마음을 쓰던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얻기 위해 어릴 적부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뚝뚝하던 아버지는 그런 마츠코를 볼 때마다 활짝 웃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표정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 되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다급한 어떤 상황에서는 무의적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되어 버렸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마츠코는 아빠의 시선이 늘 그립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마츠코의
익살스러운 표정은 왜곡된 자아를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부조리, 불행은 왜 연속해서 오는가?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점차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의존하는 성격으로 굳어졌다.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수동적, 자학적 자아를 만들어냈다.
마츠코는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며 뭇 남성들에게 헌신했지만, 돌아온 것은 폭력과 배신뿐이었다.
절도 혐의를 감싸주었던 중학교 제자 류 요이치의 배신, 교감이라는 권력 앞에 거부할 수 없었던 성추행,
끊임없는 폭력을 일삼던 작가 지망생 연인 야메카와의 갑작스런 자살, 육체만을 탐닉하던 불륜남 오카노와의 결별, 윤락을 강요하다 그녀에게 살해당한 오노데라,
옥살이 중 엇갈린 시마즈와의 짧은 사랑, 야쿠자가 되어 돌아온 제자 류 요이치와의 행복했던 시간과 외면…. 그녀의 관계는 언제나 파국으로 끝났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모래성과 같은 연약한 사랑을 토대로 상대방을 갈구하고, 헌신하고, 그러다 배신당하고 무너지고, 퇴락하는 마츠코의 일상을 그려낸다.
급기야 유독 자신에게만 이런 파국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마츠코는 오열과 함께 부르짖는다.
“왜?, 왜?, 왜?”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몇
번이고 모든 걸 바쳐 사랑한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뒤 했던 말
죽어야 끝나는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굴레
결국 사람들을 피해 은둔하던 마츠코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다시 삶을 붙잡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본 옛 친구 메구미의 도움으로 이 암흑에서 벗어날 희망의 끈을 잡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우발적 폭행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렇게 불행은 마지막까지도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의 책임이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자학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주하던 빌라 담벼락에 이렇게 남겼다.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낙서
영화는 그렇게 한 여인의 폭력적 상황을 애써 외면하며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라고 절규라도 하는듯하다.
“왜?”라는 질문마저 무색해지는 우리 인생의 근원적 비극적 좌절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인간의 굴레일
뿐이다.
“어릴 땐 누구나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 따윈 하나도
없이 늘 괴롭고, 한심하기만 하죠”.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중
벗어날 수는 없어도, 견뎌내야 할 ‘혐오스러움’
그렇기에 죽음 이후 하늘을 향한 계단 끝에서 마주한 동생과 아버지의 환한 웃음은 더없이 애절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죽음 뒤의 환대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장면에서 가슴이 미어지고 슬픈 눈물이 흐른다. 영화는 끝까지 인생을 억지로 가치 있는 것으로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마츠코가 겪은 ‘혐오스러움’은
사실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할 인간의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더 이상 애써 찡그리지 않아도 되는 마츠코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부조리 앞에 무기력하게 나를 내어주고 지배당하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자신의 삶의 중심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인생은 없다.
벗어날
수는 없어도, 끝내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서글프지만 어쩔 도리 없다. ‘혐오스러움’은 극복되지 않지만,
이겨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때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속 소냐의 독백이 작은 위로가 된다.
“바냐 아저씨,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길기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견뎌내야죠.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시련을 꾹 참고 버티는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때가 오면, 그 땐 죽음을 공손히 받아들이고 무덤 저편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는지 또 얼마나 슬펐는지 다 말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겠죠. 그날이 오면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되겠죠. 그리고 마침내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독백 (일부 의역)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고통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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