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9-13 14:55:10
넷플릭스 2023 하반기 공개예정작 모음
넷플릭스 아직 구독 해지 안하셨죠?? 아직 이렇게나 많은 작품들이 남아있다구요!
넷플릭스 하반기 기대작 모아왔습니다 저장해놓고 기다리기
[경성크리처]
대의 어둠이 가장 짙었던 1945년의 봄, 생존이 전부였던 두 청춘이 탐욕 위에 탄생한 괴물과 맞서는 크리처 스릴러
[도적 칼의 소리]
"절대 예외는 없어, 자비도 없고"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빼앗는다! 와일드 액션 활극
[독전2]
용산역에서 벌인 지독한 혈투 이후, 여전히 '이선생' 조직을 쫓는 원호와 사라진 락, 그리고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난 브라이언과 새로운 인물 큰칼의 숨 막히는 전쟁을 그린 영화
[발레리나]
경호원 출신 ‘옥주’가 소중한 친구 ‘민희’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프로’ 를 쫓으며 펼치는 아름답고 무자비한 감성 액션 복수극
[스위트홈 시즌2]
그린홈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사투를 벌이는 현수와 그린홈의 생존자들, 그리고 또 다른 존재의 등장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들까지. 새로운 욕망과 사건, 사투를 그린 드라마
[이두나!]
새로운 삶과 학교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대학생 원준. 조금 특이한 사정이 있는데, 바로 화려한 K-pop 아이돌 시절을 뒤로하고 돌연 은퇴한 미모의 하우스 메이트와 산다는 것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정신건강의학과 근무를 처음 하게 된 간호사 다은이 정신병동 안에서 만나는 세상과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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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지난한 합일의 과정
<동주>, 지난한 합일의 과정
윤동주가 원래 계획했던 첫 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다. 실제 윤동주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이 시에서 화자는 병원 뒤뜰에 누운 한 여자의 슬픔에 다가가기 위해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똑같이 누워본다. 두 명의 인물과 하나의 자리, 그리고 동일한 행위. 이는 독립된 두 인물이 단일한 상태와 감정으로 합일되는 초월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윤동주가 보기에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최선의 길은 사력을 다해 타인의 마음에 가닿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동주>는 언뜻 보기에 모든 영역에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인물―윤동주와 송몽규의 전기를 대조적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인물이 하나로 포개지는 합일의 과정을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이러한 방식은 인물 설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화 전반의 형식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내레이션과 이미지가 결합하는 방식,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화법은 두 가지 개별적 요소가 하나의 형식으로 모이는 양태를 띤다. 말하자면 영화가, <병원>에서 여자의 자리에 다가가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윤동주 특유의 공감의 방식에 철저히 복무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주>는 윤동주의 인간관계론을 영화라는 예술 매체를 통해 직접 이행하려는 시도다.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의 쓸모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다. 윤동주가 자신의 이름이 ‘히라누마 도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참담한 심경을 담은 시 ‘참회록’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가 자기 내면을 반성하며 깊은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이 화면에서는 윤동주와 같은 지분으로 송몽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담고 있는 참회록 장면에서 화자는 윤동주임에도 불구하고 송몽규는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심지어 송몽규에게 윤동주와 똑같이 단독 쇼트가 배분되기까지 한다. 이는 윤동주가 자신의 치욕스러운 내면뿐 아니라 송몽규의 혼곤한 내면까지 대리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영화적 전술의 극단은 동주가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의 일본어 번역을 마쳤다는 쿠미의 전화를 받는 사이 송몽규가 혁명을 위해 친구들과 회의를 하러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벌어진다. 이때 윤동주는 송몽규의 부름을 받지 못해 홀로 집에 남게 되고, 그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듯 ‘쉽게 쓰여진 시’를 쓰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으로 시가 낭독되는 사이, 화면에서는 시를 쓰는 윤동주의 모습과 혁명을 도모하는 송몽규의 모습이 교차된다. 조국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작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 번의 합일의 과정이 더해진다. 송몽규가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윤동주에게 같이 떠나자고 제안할 때, 윤동주는 쿠미가 번역한 시집을 받기 위해 그 제안을 한시적으로 거절한다. 그때 쓸쓸히 길거리를 걷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송몽규의 모습과 윤동주의 처절한 자기 고백에 해당하는 ‘자화상’의 낭독이 아름답게 결부된다. 이때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자화상의 주체는 오히려 윤동주보다 더 많은 시간 화면에 등장하는 송몽규처럼 보인다. 이 대목부터 윤동주와 송몽규는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인물처럼 비친다.
윤동주와 송몽규 사이의 동일시 작업은 과거 회상의 서사가 현재의 신문 장면으로 모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병원’에서 화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서로 같은 공간, 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인물에게 신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니까 영화는 그 지난한 합일의 과정을 통과하며 마침내 신문 장면에 이르러 두 인물을 하나의 인물로 포개어 놓는 것이다. 윤동주의 저항시를 사랑한 송몽규와 일제에 맞선 송몽규의 용맹한 행동력을 존경한 윤동주의 마음은 이 장면에서 확실히 겹쳐진다. 그렇게 두 인물은 정반대의 맥락에서 조국을 걱정하는 애국자라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수렴된다. 어쩌면 둘은 애초에 하나의 인물에 잠재된 두 가지 자아를 표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윤동주의 것으로 독점된 듯 보였던 과거 회상 장면들이 실제 윤동주의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 모호함은 영화 전반에 걸친 과거 회상 장면들이 특정인의 시점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여기에는 윤동주의 경험과 그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혼재되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윤동주만의 경험과 송몽규만의 경험이 뒤섞여 있다. 이를 두고 윤동주가 송몽규에 대한 부재한 기억을 상상을 통해 보충했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의문은 위에 언급한 바 있는, 같은 공간에서 두 인물이 신문 당하는 현재 장면에 이르러 해소된다. 영화는 윤동주의 기억처럼 보였던 과거 회상 장면이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라 같은 곳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송몽규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서사 구조는 윤동주와 송몽규 각자의 기억을 하나의 유연한 서사로 통합시키며 그들의 합일을 기리는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심정으로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일제에 저항하는 유사 동일인이라고.
합일의 불가능성
‘병원’에서 윤동주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성취했는지에 대해선 쓰지 않았다. 과연 온전한 합일이란 가능한 걸까. 사실상 하나의 인물로 비치는 윤동주와 송몽규는 신문 장면의 막바지에 결정적인 차이를 남긴다. 둘은 독립운동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일본 경찰의 요구를 두고 해당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 처지에 직면한다. 이때 윤동주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시인이 되고자 한 과거가 부끄러워 서명하지 않고, 송몽규는 독립 투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서류에 서명한다.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두 인물 사이의 합일 과정을 묘사하는 데 힘썼던 영화는 이 대목에 이르러 완벽한 합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이 불가능이 그저 합일의 비극적 해체에 머물지 않고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무력감 앞에서 그 고통에 가닿기 위해 영화가 최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주>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흑백 화면의 정교함과 절절한 시의 낭독, 배우들의 호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 불가능을 알고서도 기어이 그것에 도달하고자 했던 영화의 숭고함에서 비롯된다. <동주>는 아름다운 실패를 통해 인간 정신의 긍정적 가치를 역설하는 숭고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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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태어나도 풀 수 없었던 '나'라는 숙제와 원죄
두 번의 결혼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야자키 현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리에와 그의 손님 타니구치다. 리에의 옆은 허전하다. 남편은 리에의 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들은 이제 이 이 세상에 없다. 텅 비어버린 삶. 혼자 정리하는 문방구에는 빈 공간이 많다. 지인들이 리에의 문방구에 도착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리에와 사람들. 그럼에도 리에의 일상이 바뀌기엔 시간이 좀 필요한 듯하다. 그녀의 문방구를 들락날락하던 손님 타니구치는 주인 리에의 어두운 그림자를 잘 알고 있다. 사실 타니구치는 리에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던 타니구치. 문방구점에서 미술도구를 사는 일로 리에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잔잔한 로맨스물처럼 보이던 영화는 갑자기 장르적인 긴장감을 덧붙인다. 리에와 타니구치는 오래 걸리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된다. 용기를 내는 타니구치. 리에 역시 마음을 열게 된다. 리에의 상처를 위로할 줄 알았던 타니구치. 리에는 이런 타니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미래. 둘은 결혼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두 사람. 큰 상처가 있던 리에에게 타니구치는 선물 같은 존재다. 어느 날. 남편 타니구치가 일 하러 나갔다. 벌목업을 하던 타니구치. 안전장비를 단단히 챙겼다. 나무를 베는 타니구치. 혼자서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사고가 벌어진다. 벤 나무가 잘못 떨어져 타니구치에게 향했다. 나무에 깔려 사망한 타니구치. 타니구치가 세상에 떠났다. 장례식 당일. 타니구치의 친형이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는 리에와 타니구치의 형. 그런데 타니구치의 형은 뭔가 이상한 말을 한다. “잠깐, 이 얼굴 제 동생 아닌데요?”
들끓는 내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핵심은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을 톺아보며 ‘어떤 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영화 제목으로 설정한 ‘한 남자’는 작품의 이야기에 대한 은유다. 이 다방면으로 등장하는 남자들은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후반부의 무언가를 암시한다. 일본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영화의 이면에 전적으로 깔려있는 것과 동시에 단지 제대로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비명이 각기 다른 인물들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 여러 인물의 내면을 한 사람으로 수렴하는 연출은 후반부까지 집중하지 않는다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주인공 키도의 시점에서 이어진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인물(키도)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다른 캐릭터는 과거에 큰 상처가 있으며 정반대로 규정지을만한 무언가 역시 키도와 이어진다는 점이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영화는 조용하다. 감정적으로 대놓고 폭발하는 장면이 없다. 하지만 진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 내적으로 품고 있는 고요함 때문이다. 이 고요함이라는 정서는 영화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속성이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속으로 평가할 때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면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 이면에 가려져 있는 것을 전부 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교류하며 살아감과 동시에 ‘지엽적인 접근’으로 행복해진다. 영화는 냉정할 정도로 인간이 가진 이 아이러니를 묘사한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 직접적인 화법보다 더 설득력이 붙는다.
따가운 피부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다. 영화는 이 그림을 초반부에 중요하게 등장시켰다. 사실상 이 그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근데 거울이 비추는 것은 뒷모습이다. 당시 유행처럼 불었던 초현실주의 화풍과 프로이트의 연구결과가 이 그림에 큰 영향이 갔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꿈, 욕망, 우연성 등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키포인트라고 봤다. 르네는 인간의 뒷모습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표현하는 단초가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앞(표면)이 아니라 뒷(이면)을 보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영화의 핵심으로도 이어진다. 그 사람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근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단지 뒷모습을 보고 키도가 어떤 인간인가 생각할 뿐이다. 영화 내적으로 일본 사회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행위가 단지 앞만 봤기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작품의 형식이 이 그림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름이라는 소재를 영화가 이야기를 함축하는 데 사용됐다는 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영화가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핵심으로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의 내레이션을 위시로 한 직접적인 감정 묘사 없이 ‘뒷모습을 보는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인물들과 거리 두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영화 중반부 즈음에 주인공 키도가 유리를 앞에 두고 누군가와 만나는 신에서 극대화된다. 사실상 이 두 인물은 거의 유사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인물 간의 거리 두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 두 사람이 어떤 히스토리를 가진 인물인지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등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부분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달려 있다. 영화가 러닝타임이 끝날 때 자연스레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의 답을 ‘금지된 재현’이라는 그림으로 한 듯하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건 사회가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영화가 어떻게 사회적인 문제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이번주에 개봉했던 <타겟>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중고거래라는 설정보다 ‘여성이 혼자 사는 것의 위험함’이 훨씬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과한 표현도 몇 보인다. <한 남자>는 감정적으로 들끓는 순간에 물음표를 친다. 그리고 인물이 처해있는 입장 역시 거리를 두면서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근거를 둔다. 그 이면에 일본 사회에 만연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알려져 있는 범죄 묘사가 그대로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된다. 이 역시 영화에서 반복되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소모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닌 이야기를 작동하는 원리가 됐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이 영화를 격렬한 스릴러/미스터리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이와 관련한 대사가 후반부에 제시되기도 한다. 영화의 편집과 음향은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장면은 그림을 그린 것처럼 통제되어 있다. 이런 연출이 영화를 문학적으로 읽히게 만드는 요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적으로 쫀쫀한 긴장감을 기대하고 가는 관객들이라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거리를 둬 관객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몰입감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안도 벚꽃을 위시로 한 배우들의 감정연기가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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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협화음이 간간히 들린 채로 광폭하게 '파묘'
LA에 사는 '그냥 부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당 화림(김고은)이다. 비행기 안. 화림은 누구에게 향하고 있다. 누구? 바로 클라이언트다. 화림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 만나러 간다. 외국인으로 바글바글한 비행기. 지금 당장 '내가 어디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사람들 다 대답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의뢰인의 집에 도착한 화림. 고객은 미국에 사는 한국계 남자 박지용(김재철)이었다. 박지용이 가진 문제는 간단했다.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찾아보는 화림. 화림은 몇 번 아이를 들여다보더니 '묫자리가 잘못됐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국에 묫자리 있죠? 그 묫자리에 들어가 있는 분 중 하나가 자기 너무 힘들다고 꺼내달라는 거예요. 그거 옮기죠."라고 말하는 화림. 고객 박지용은 당황한다. 하지만 곧 "그렇게 하기로 하죠"라며 가족과 이야기한다. 파묘를 결정한 박지용. 그렇다고 해서 뭐 OK가 나와도 혼자서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는 아저씨 둘을 부르는 화림. 그 아저씨 둘은 한국 최고의 장의사 중 하나 영근(유해진)과 업계의 베테랑 풍수지리사 상덕(최민식)이다. 친구이자 동료인 봉길(이도현)과 함께 네 명은 지용의 가족과 관련이 있는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공 4명과 지용은 몰랐다. 파헤쳐서 나온 것이 보지 말았어야 했던 험한 것이라는 걸.
오컬트 외길인생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굉장한 관심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라는 장르를 깊게 팠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컬트 불모지와도 같기 때문에 이런 외길 인생은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장재현 감독이 이 장르를 깊게 팠다는 의미는 이 오컬트 영화에서 중요한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장재현 감독은 전작 <사바하>에서 이 승부수들을 나름 잘 갖췄다.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준 것이다. 가령 영화에서 박 목사(이정재)가 추적하는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좇아갈 때 그 과정을 철저하게 만들어 놓은 장재현 감독의 주도면밀함은 <사바하>의 강점이다. 이 주도면밀함이 오컬트/호러라는 장르영화로의 특성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사바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는데, 이 핵심과도 이어지면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야기가 날림으로 만들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 <파묘>에서도 같은 강점이 그대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묘를 파헤친다’라는 디테일과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은 안성맞춤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묘를 파헤친다’라는 경험이 있는 사람? 글쓴이는 20여 년을 살면서 처음 본다. 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볼 수 없어 기괴하다. 죽은 사람을 파헤친다? 이는 곧 유령, 귀신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소재가 오컬트 향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다. 근데 이 오컬트라는 장르적인 특성과도 가까이 있나? 그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파묘>는 무덤을 파헤친다라는 모티브를 영화 곳곳에 새겨놓는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질문이 파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의 팽팽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강력한 디테일
윗 문단의 연장선상에서 <파묘>가 유지한 디테일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직업이 핵심이다. 첫째는 풍수지리사, 둘째는 무당, 셋째는 장의사다. 이 캐릭터의 직업적인 특징이 이야기를 이끄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풍수지리사 상덕은 우리 현대인으로 치면 퇴임 5분 전의 인물이다. 그만큼 이력이 많이 쌓이면 그 나름의 경험이 있겠지? 영화 곳곳에서 이 경험치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상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당 화림은 직업인으로서 가진 특징을 영화 안에서 모두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당연히 무당은 하나의 인간이다. 이 무당의 인간미를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 장재현 감독은 주변 지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솔직히 무당이 아니라 마트 캐셔라고 해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 묘사였고 그 점이 신선했다. 장의사 영길 역시 인물 개인의 입체적인 특성이 풍수사 상덕과의 연대와도 이어진다. 앞에서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파묘>는 직업인의 영화?'라고 읽을 수 있다. 이것도 당연하지만 이 디테일은 다른 측면으로도 작동한다. 무엇으로?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과도 이어진다. 파묘는 묘를 파헤친다는 의미이다. 왜 파해칠까? 이를 구체적으로 뭐다!라고 말하면 바로 스포일러와 직결되기 때문에 감상에 김이 새겠지? 다만 쓸 수 있는 건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 영화는 모티브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장르적인 디테일도 눈에 들어온다. 글쓴이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촬영과 조명, 그리고 시각화다. 우선 촬영에서 화면비를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게 설정했다. 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 모티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촬영의 형태로 구현한 듯하다. 가령 후반부 상덕과 관련된 장면들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연출이다. 또 영화가 조명을 이용해서 빛과 어둠을 통해 대상을 형상화한 방식도 흥미롭다. 전작 <사바하>가 진짜 있을 법한 소재들을 갖고 와서 장르적인 몰입감을 높인 것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재현 감독이 진짜 힘을 줬을 것 같은 건 시각화다. 영화에서 시각화는 중요하다. 핵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각화를 짠하고 보여줘야 이야기에 몰입도가 커진다. 보통 이런 오컬트물이나 판타지요소가 들어간 영화에서 CG의 이질감이 영화의 몰입도를 깨는 경우가 종종 있다(작년 추석 빅 4가 생각난다). 장재현 감독이 여기에 분명히 힘을 준 것 같은데, 아마 할리우드의 일부 감독들이 만드는 방식을 가져온 것 같다. 디테일한 묘사가 영화의 원동력이 된 좋은 사례를 <파묘>에서 찾을 수 있다.
장르 이어 붙이기
이 <파묘>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이 영화를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야기는 영화의 핵심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오컬트와 호러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장재현 감독의 영화에서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이 부분이 영화의 호/불호를 가를 구분선이 될 것 같다.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장재현 감독이 왜 <파묘>로 전성기를 갱신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쪽이지만 영화를 조금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내 의견에 반대할 것 같다. 솔직히 이 불호평에 대해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부분도 있다. 왜 그럴까? <파묘>의 후반부를 좋다고 생각하는 글쓴이 마저도 이 영화의 흐름이 그렇게 깔끔하지 못하다고 보는 쪽이기 때문에 비판을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오며 경험한 여러 가지를 다룬다. 고등학교를 거쳐오며, 또 우리 일상생활을 둘러싸인 어떤 것에 대해 다룬다. <파묘>는 이야기의 모든 순간에서 '이 것'에 대해 코멘트한다.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쓰는 것은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가 어렵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위해 이 영화가 구사해야 했던 준비물들이다. 바로 인물들이다. 이 영화 <파묘>는 마치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물 간의 동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가 세계관으로 보여주는 것을 인물의 동기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이 인물이 이런 걸 원하니까 가능하네!'라고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파묘>의 약점은 여기에서 온다. 이 영화의 플롯은 인물들과 관련한 상황만 보여주지 감정이입할 틈을 잘 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가령 이야기에서 주인공들간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뭔가 빈약하다. 다른 측면에서 이 충돌하는 영화의 장르들을 억지로 잇고 메꾼 탓에 감독의 과욕이 느껴지는 장면도 일부 있다. 이 두 부분을 '원래 그런 것 아닌가?'라고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감정선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대신 이야기를 빨아들이는 흡입력 하나는 근래에 봤던 영화 중 하나 중 압도적이다. 왜? 이야기가 쉽다. 이 영화 <파묘>는 모든 인물들의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1차원적으로 내레이션 깔고 전개하는 느낌이 아니라 두 인물의 입장을 서로 엇갈리면서 '여러 이야기를 통해 결정했다'는 식이다. '이럴 수도 있는가'를 차단하는 듯한 플롯이다(간혹 장르적 유사성 때문에 <곡성>과 비교할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 '다 설명하는 간단한 플롯'이라는 점에서 비교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플롯을 쉽게 가져가면 영화에 뭐가 좋을까?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일거양득이 된 것이다. 이야기도 쉽게 전달하고, 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구현했다.
4인 4색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끄는 최민식, 김고은 배우는 단연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최민식 배우는 직업적으로 가지각색의 연기를 해왔다. 뭐 조폭 보스의 오른팔부터 복수를 꿈꾸는 남자, 탈북민 출신의 수학자, 부패 경찰관 등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직업들이 있다. 풍수사라는 직업은 최민식의 필모그래피에서 단연 돋보이는데, 이 돋보이는 것을 섬세한 디테일까지 살리는 연기로 멋지게 소화한다. 글쓴이는 중후반부에 이 영화의 약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소화하는 힘은 역시 한국 국가대표급 명배우의 힘이 십분 발휘됐다고 볼 수 있다(다만 살은 좀 빼셔야 할 것 같다). 또 김고은 배우는 이 영화의 플롯을 사실상 함축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파묘>가 화림이라는 인물이 카리스마를 내뿜기에도 좋은 판이고 이야기의 핵심 사건을 이끄는 데 있어 중심이 된다. 화림이 이 영화에 갖는 이 두 특성 덕에 이 입체적인 인물에 관객이 이입하기 좋을 것이다. 상덕과 화림 옆에서 두 주인공을 이끄는 유해진,이도현 배우 역시 훌륭하다. 유해진 배우는 예고나 포스터만 보면 우리가 아는 유해진일 것 같지만 반대로 후반부에서 엇나갈 수도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꽉 잡는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이도현 배우는 이 영화가 가진 미스터리를 꽉 쥔 채 관객들을 이끄는데, <더 글로리>의 주여정 역이 정말 추구해야 했던 지점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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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버스로 표현한 무한한 가능성
우리는 일상을 지나면서 다양한 생각을 한다. 과거의 행동이나 모습, 현재의 행동이나 모습, 미래의 모습 같은 것들을 생각하며 때론 후회도 하고 또 잘 되었다는 생각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이 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다. 특히나 나 자신의 과거와 미래 상황에 대해서도 다양한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때, 그것을 선택한 나의 모습과 선택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과 머릿속에 그려지는 선택 이후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 결정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마다 그런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면서 지나간다.
그런 생각과 상상의 중심에는 현재가 있다. 우리가 결정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지난 이후,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어떤 결과를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재는 각자의 마음속에 아쉬움이나 뿌듯함 같은 감정을 심어놓는다. 만약 현재가 초라하다면 그동안 겪었던 많은 실패의 순간들을 후회하면서 지내게 될 것이다. 현재가 성공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결정을 하고 좋은 현재를 살고 있어도 그것에 다 만족하기는 어렵다. 현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들, 감내해야 할 쓰디쓴 일들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 주변에 자리한다. 아마도 인생은 그런 쓴 삶의 모습도 감내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기발하게 이야기하는 영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양자경)은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고 변변치 않게 보이는 남편(키 호이 콴)과 딸(스테파니 수)을 책임지고 있다. 화면에 첫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무척 지쳐있고 웃음기가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도 그렇게 좋지 않아 보이고, 딸과의 관계도 나빠 보인다. 남편은 아내 몰래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있고, 레즈비언인 딸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하고 연인관계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에블린 주변의 상황은 쓰디쓴 현재인 것 같아 보인다.
에블린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그는 경제적인 문제도 위태로운 상황이고, 가족인 남편과 딸과도 쉽게 좋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에블린은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 있는 상태다. 여기에 몸이 불편한 자신의 아버지까지 에블린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에블린이 짊어진 짐은 그가 느끼는 현재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든다. 세무조사 때문에 세무서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영화는 기묘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무척 이상하지만 모든 것이 에블린 자신과 관련이 있다.
세무서에 같이 방문한 남편에게 다른 차원의 우주에 속한 남편이 들어가고 그의 몸을 이용해 에블린에게 말을 건다. 그는 다양한 우주에는 수많은 에블린이 있고, 완전한 악의 존재가 각 우주를 망가뜨리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에블린도 그런 차원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술도 활용하고 쿵후도 배워 이상한 존재들과 대결해 나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에블린은 수많은 다른 에블린과 접속하고 그 삶을 본다. 지금의 남편과 헤어진 에블린, 쿵후를 배운 에블린, 가수가 된 에블린 등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주된 자신의 삶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한다. 영화는 이어폰과 간단한 시각효과로 차원을 넘나드는 에블린의 모습을 무척 실감 나게 보여준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표현한 멀티버스
영화에서는 에블린이 보는 다른 우주의 다양한 자신의 모습과 각각의 일생을 멀티버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다른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 지금의 직장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의 모습 같이 다양한 선택의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한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건 나 자신이 가졌던 수많은 가능성들이고, 현재 이후의 미래에도 수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과 다른 나의 모습은 수만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에블린이 보는 수많은 자신들의 모습은 다양한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한 가능성들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잠깐잠깐 보이는 다른 우주의 모습은 에블린의 일이나 가족의 위치만 다를 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편과 헤어진 에블린의 모습은 근사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회한의 감정이 느껴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탁소 주인 에블린은 그 모든 가능성을 보면서 자기 자신 그리고 남편과 딸의 다양한 모습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 영화가 훌륭한 건, 그런 에블린이 될 수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현실로 끌어와 액션과 코미디로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멀티버스를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절대악의 존재를 막아내려는 에블린의 시도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고 긴장감이 넘친다. 여기에 아주 철학적인 문제도 같이 던진다. 인생의 의미와 가족의 의미 같은 무척 심오한 이야기까지 끌어오면서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영화에서 에블린 자신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 그리고 딸의 관계도 무척 중요하다. 영화는 중반까지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후반부에는 딸과의 관계로 이야기를 전환한다. 이 영화의 빌런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한 딸은 모든 우주에서 엄마 에블린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딸은 엄마에게 도망치길 원하고 더 나아가 모든 자신과 엄마를 파괴하길 원한다. 마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영화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이야기에서 결국 주도적으로 자신의 결정을 하는 건 바로 에블린이다. 에블린은 그 모든 가능성 한가운데서 현재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고 집중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꿰뚫는다. 영화는 분명 액션 장르의 껍질을 가지고 있지만 무척 섬세한 드라마가 속을 꽉 채우고 있다.
양자경의 훌륭한 연기와 따뜻한 드라마
에블린 역할을 맡은 배우 양자경은 그가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얼굴을 모두 다 보여주고 있다. 쿵후를 잘하는 에블린부터 노래를 잘하는 에블린,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와 아내의 얼굴을 모두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큰 에너지다. 그가 이야기를 이끌고 관객의 감정까지 이끌어내면서 완벽하게 이 영화를 에블린과 양자경의 영화로 만들고 있다.
영화는 다양한 가능성의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선택들과 미래에 해야 할 선택들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현재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미래에 어떤 일이 있든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 조금 초라하더라도 지금의 내 모습과 곁에 있는 존재들이 바로 나 자신을 만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양한 가능성에 접속하느라 멍하니 상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영화는 깨어나서 지금에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발한 상상력과 따뜻함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무척 기발하면서 완성도도 높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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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비켜주실 수 있나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내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신작을 내놓았다.
바로 미국 어느 명문대 영문학과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 된 '김지윤 박사'(산드라 오)가 겪는 좌충우돌과 고군분투를 그린 <더 체어>
주인공 이름이 '지윤'이라는데 안 볼 수가 있나. 이지윤 아니고 김지윤이라 아쉬울 뿐.
1편에 30분씩 6편이라, 재미있어서인지 진짜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금방 볼 수 있다. 짧게 끝난 게 아쉬웠던 걸 보니 재미있었던 걸로. <더 체어>는 180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세대갈등, 언론과 SNS, 입양가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것들을 다룬다. (온갖 PC란 PC는 다 나온다고 보면 됨)
동양인 여성이 학과장을, 그것도 영문학과 학과장이라니. 내 편견 탓인지 몰라도 산드라 오가 영문학을 강의하는 모습은 꽤나 낯설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멋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훌륭한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윤'은 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결혼하고 계약직 시간강사가 되기보다는 결혼을 포기하더라도 학교에 계속 남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딸(주희)을 입양했는데 입양기관에서 매칭해 준 딸은 멕시코인이다. 아이는 세상을 떠난 친엄마처럼 엄마가 떠나버릴까 봐 무섭고, '지윤'은 남편도 없는 자신이 너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무섭다. 일이 많은 '지윤'을 대신해 외할아버지가 주희를 키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보여주는데 둘 다 너무 반가웠다. 민지's birthday party(돌잔치ㅋㅋ)에서는 심지어 고개 돌리고 소주 마시는 장면까지 나온다.문학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40년째 학교를 떠나지 않고 '고인 물'이 된 노교수들도 내가 학교 다닐 때 만난 몇몇 교수님들이 떠올라 흥미로웠다. 40년째 똑같은 강의를 하면서 '뭘 모르는 요즘 것들'이 수강신청을 안 해서 폐강 위기에 처할 정도인데도 기존 방식만을 고집하는 꼰대들을 보며 인생에서 만난 라떼를 외치던 많은 꼰대들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교수는 학문적 연구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가르치는 것도 함께 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그들은 교수법(가르치는 방법)도 연구해야 하지 않겠나.
세대갈등 문제의 원인 중 하나가 늘어난 수명으로 인해 기존의 윗사람들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자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싶다. 물론 다들 인문학보다는 코딩에 관심 있는 것도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음.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선배들은 대리 정도는 정말 큰 하자가 없으면 다들 어렵지 않게 진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리되기도 힘들어졌다. 아직도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체된다. 비단 어느 사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에 뉴스 보니 국회도 고령화는 마찬가지. 50대 이상이 70%가량인 조직에서 청년을 위한 정책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미친 짓처럼 느껴진다.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졌다.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긴 하지만 웃긴 장면들도 많이 나와 부담 없이 볼 수 있는데, 아래 대사가 인상 깊었다.
지윤이 수강생 5명이라 학교에서 내쫓길 위기에 놓인 엘리엇(고령의 백인 남성, 40년 전 학과장, 종신)에게 인기강사인 야즈(젊은 흑인 여성, 계약직, 종신 아님)는 트위터 팔로어도 8,000명이라 얘기하니 엘리엇 왈"예수는 제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럼 예수도 루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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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캐롤' 작가의 탄탈로스적 사랑 이야기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에바 비티야-샤이데거
[출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그의 연인, 가족, 지인들
[시놉시스] 유명한 스릴러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사적인 기록들과 가족, 연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만든 다큐멘터리. 사랑을 테마로 '정체성'이라는 것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하이스미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 (2022년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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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의 종류에는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그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처음 맞이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사랑이 결핍된 채 인생을 시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캐롤>, <리플리> 등 유명한 작품을 집필한 작가이자, <러빙 하이스미스>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애석하게도 후자에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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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ere is my diary, contain the body.
여기, 본체를 포함한 내 다이어리가 있다.영화는 하이스미스의 수십 편에 달하는 일기와 그의 생전을 알던 사람들과 영상 기록으로 남은 작가 본인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유년시절에서부터 말년까지를 살펴 볼 수 있다.
그의 삶은 분명 화려했으나 공허했다. 하이스미스는 생전에 그토록 많은 히트작을 집필하였고, 숱한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인기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부모의 사랑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받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이스미스는 매번 심술궂고 모진 말을 일삼는 어머니를 위해 소위 '결혼할 수 있는 몸'이 되고자 그토록 노력하고, 어머니가 멋대로 짝지어준 남자친구를 사귀고자 안간힘을 썼다. 공들여 집필한 두 편의 작품을 제 어머니에게 헌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텍사스(미국 남부의 한 지역) 사람이었던 그의 어머니의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 시절 하이스미스의 일기를 보면, 그가 어머니의 관계에서 얼마나 환멸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상처 받아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궁금하다’
어머니에게 하이스미스는 언제까지나 못미덥고 별난 자식이었고, 하이스미스는 그로 인해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머니가 멋대로, 가명을 써서 발간했던 <캐롤>의 작가가 다름아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라고 발설하며 그의 자식을 '커밍아웃'하게 되면서 완전히 단절되었다.
하이스미스가 별난 사람인 것은 맞았다. 그는 아직 동성애가 범죄이던 시절에 레즈비언으로 살았다. 그는 많은 밤을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레즈비안 바에서 보냈고, 숱한 여인들과 어울렸다. 많은 여인을 사귀었고, 그들과 즐거운 식단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그의 결핍을 모두 채워주지는 못한 것 같다. 연애는 언제나 짧게 끝이 났다.
그는 미국의 뉴욕과 펜실베니아,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를 전전하며 지냈다. 하이스미스는 그 숱한 곳들을 여행하면서 대단한 영감을 얻었으나, 결코 어느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어떤 사람과 장소에도 말이다. 인간으로서나 작가로서나 그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건만 그의 내면은 공허했다. 말년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여전히 위대한 작가였지만 그의 곁에는 고양이만이 남았고, 그는 세상의 많은 것을 증오했다. 가령 유대인, 흑인, 아랍인 같은 또다른 약자 혹은 이방인들을 말이다. 그가 일평생 소수자로서 고통받아 온 것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였다. 그는 점점 황폐해져 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실수의 연대기'였노라고 회고하곤 했다. 그가 발간된지 40년이 지난 <캐롤>을 실명으로 재발간한 것은, 그간 자신이 감추어 온 제 본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시도는 아니었을까?
하이스미스는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글로써 표현해낸 위대한 작가였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단 한 사람,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어머니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그는 그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몽상의 세계를 살았고, 제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들'처럼 당당한 삶의 주체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시대는 그의 본모습을 아끼지 않았고 퍼트리샤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숨기고,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갔으리라. 마치 끝없이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처럼.
나는 이 영화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보았다. 그것은 아주 내밀한 이야기였다.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갔다면 그는 덜 괴로웠을까? 그의 위대함이 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진실로 그러하기를 바라지만, 아직 세상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막연한 추측조차 담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다만 희망한다. 세상의 많은 하이스미스들이 그 자신으로서 설 수 있는 어느 시대를. 더 이상 탄탈로스가 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를 말이다.
'러빙 하이스미스', 22.08.28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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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파서블 영화 후기 / 이선빈, 김영광 케미 / 코믹과 액션 둘 다 잡으려다 아쉬움이 더 커진.. / 마지막 액션씬은 엄지척!!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미션 파서블”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엔드크레딧과 동시에 시작되는 하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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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살인 리뷰 -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다룬 용기에 박수를 (약스포, 결말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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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봄이 되면 나타났다 여름이 되면 사라지는 죽음의 병.
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영화라는 매개의 특성상 결국 극적인 연출과 전개를 끝끝내 놓지 못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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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플러스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 30초 예고편
우리 아파트에 살인범이 있다고? 추리 광 세명의 유쾌한 수사가 시작된다.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는 2월 26일 디즈니+에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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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체이탈자> 캐릭터 예고편
“누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요”
교통사고 현장에서 눈을 뜬 한 남자.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과 이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바뀌었어. 낮에도 바뀌더니 밤에도 또”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 남자.
그는 12시간마다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가 12시간마다 몸이 바뀌었던 사람들,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의문의 여자까지,
그리고, 이들이 쫓고 있는 국가정보요원 ‘강이안’.
“이제 알게 됐어. 내가 뭘 해야 되는지”
모두가 혈안이 되어 쫓고 있는 ‘강이안’이 바로 자신임을 직감한 남자,
자신을 찾기 위한 사투를 시작하는데…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본능적 액션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