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글다2025-07-25 23:51:52
난 우주 공주인데 전 여자친구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레즈우주공주>
레즈, 우주, 공주!
주인공 ‘사이라’는 사랑하는 애인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데…. 라는 진부한 주제를 <레즈우주공주>는 개성 넘치게 비틀며 시작한다. 전 애인 ‘키키’를 구하기 위한 클리토폴리스의 레즈비언 공주 ‘사이라’의 24시간의 우주 여정(사실은 24시간보다 조금 안되는)이라니, 개성 넘치는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영화의 비틀기는 <레즈우주공주> 속 기나긴 여정의 추진력이 되며, 관객의 입꼬리를 간지럽힌다.
비틀기에서 시작된 유머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세심하게 계획되어 있다. 그래서 <레즈우주공주>에는 비난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 키키를 납치한 ‘이성애자 백인 악당들’은 특색이 없다 못해 단순한 흰색 네모로 그려진다. 물론 영화 속 ‘악당’이니 관객으로서는 화가 나는 행동들이 있긴 하지만, 희화화된 모습의 그들은 엉성하다 못해 순수(?)하다. 마블 이야기를 하면 여자가 진짜 좋아하는 줄 아는 악당을 보여주며, <레즈우주공주>는 성소수자 혐오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성애자 백인’이라는 성소수자들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유쾌함 속에 공존하는 모습은 혐오를 이기는 것이 혐오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러나 동성연인 관계인 여성 감독 ‘엠마 허프 홉스’, ‘릴라 바르기스’의 자전적인 (성소수자라면 한번쯤은 겪어보았을) 경험들이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있기에, 갑자기 등장한 실사화의 남자성기를 상징하는 모형을 깨부시는 장면에서는 어떠한 강한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변신! 마법공주!
사이라가 마법소녀처럼 ‘라브리스’를 꺼내는 핑크핑크한 장면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마법소녀물의 변신장면이 연상되지만 주로 비춰지는 가슴이 아닌 하체 실루엣을 부각하고, 배에서 라브리스가 꺼내지는 모습은 실제로도 감독님들이 틀을 깨기 위해 의도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브리스를 꺼낸 후 사이라 머리 위의 왕관도 함께 커진다. 공주지만 배척 당하던 사이라가 라브리스와 함께 진정한 레즈비언 왕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라브리스는 ‘자기정체성’, 왕관은 ‘자존감’을 의미하는데, 사이라의 내면이 성장하는 모습을 ‘마법소녀 변신’이라는 컨셉에 잘 스며들게 표현한 모습이 재치있게 느껴졌다. 그 외에도 부정적 자아상을 거대한 진흙인간으로 표현하는 것과,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나타나 사이라를 압도하는 모습, 정신분석 카우치 등 영화 속에 심리와 관련된 장치들이 많이 숨어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다만 사이라가 광장공포증이 있다는 정보는 고증 오류로 추정된다)
<레즈우주공주>는 유머와 동시에 위로도 놓치지 않았다. 사이라가 과거를 이겨내고 자신을 수용하며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많은 공감이 될 것이고, 어머니들과 키키와의 불안정 애착에서 벗어나는 모습에서는 후련함을 느낄 것이다. 꼭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연인이 없어도 상관없다. <레즈우주공주>는 레즈이자 우주에 사는 공주의 이야기도 맞지만, 그저 성장하는 존재인 사이라의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보호막이 필요 없어지는 날까지
윌로우가 케이팝이 아니라 ‘게이팝’ 아이돌 출신이라는 것과, 손재주가 좋은 사이라의 손가락만 5개라는 사실, 그리고 사이라의 몸속에서 라브리스가 나오는 위치까지 <레즈우주공주>는 허투루 그려진 것이 없다. 이성애자들이 존재하는 우주로 가기 위한 통로이자 범우주적인 호색의 유머러스한 통통 튀는 감초 역할의 보호막도 그중 하나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이라의 시선에서) 끔찍한 것들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면에는 그곳에서도 그들이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을 암시한다.
마냥 즐거울 것만 같은 <레즈우주공주>의 우주 속에서도 성소수자들의 보호막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이 든다. ‘사이라’의 우주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우주에서도 성소수자들을 위한 보호막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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