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2025-06-29 01:16:49
시작부터 맺음까지 여성을 위한,
영화 <콘클라베>
누군가 어두운 터널 밑 도로를 지나간다. 극의 시작부터 급히 움직이는 주인공을 가까이서 좇는 카메라의 움직임, 긴장감 도는 음악으로 인해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말 그대로 ‘사건’이다. 영화의 제목부터 <콘클라베>이니 말이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톨릭 교회의 주요직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급히 걸어가던 주인공은 어느새 신자의 복장을 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빛과 가까이에 서 있을 인물을 느와르 영화 만큼이나 어둠에 몸을 담고 있는 듯 보이게 연출했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얼굴을 보이지 않던 주인공에 대한 감상을 구분해주는 건 평상복과 성직자의 옷이었다. 이후에도 교황의 예기치 않은 죽음의 전후사정에 얽힌 이들을 밝히기 위한 장면들로 인해 일종의 미스터리 사건물과 같은 연출이 종종 드러난다.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판도를 뒤집는 바깥세상의 개입, 미장센이 뛰어나다.
그 모든 사건의 흐름을 더듬어 보는 이는 바로 주인공 ‘로렌스’이다. 그는 처음부터 못을 박아둔다. 권력의 자리에는 욕심이 없다고. 교황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가늠해보기도 전에 죽음으로 인해 벌어질 권력다툼을 그의 대사로서 암시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콘클라베의 단장을 맡게 되면서부터 흐트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교황 선출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로렌스, 그의 심정을 표현하는 듯한 위압적인 기둥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무리를 형성하는 추기경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전까지는 성당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독특한 투표 속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그들의 식사이다. 100명이 넘는 인원들을 밀폐된 공간에서 평화로운 선출 과정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될 것이며,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음식은 누군가의 손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바로 여성들이다. 대외적으로 선거를 이끄는 추기경, 남자로 구성된 집단의 체계와 공간을 조성해주기 위해 수녀들이 존재한다. 바깥 소식과 완전히 단절되어 전적으로 ‘교황 선출’을 위해 돌아가는 성당 내부에는 추기경들 뿐만 아니라 수녀들도 있다. 그러나 성당 밖에 있는 이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외부인으로 인식된다. 극중 화면에서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유력한 교황 후보, 대의를 위해 교황이 되고자 하는 이와 그 자리를 원치 않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벌어지는 상황들에 속하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상할 정도로 수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아녜스’ 수녀가 외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눈과 귀를 주셨습니다” 수녀회는 암묵적으로 눈에 띄지 않아야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분명히 지켜보고 있었고 같은 공간에 있었던 그 어떤 추기경보다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극에서도 이 괴리감을 분명히 짚는다. 마치 수녀회와 추기경이 같은 공간에 없는 듯 한 화면에 함께 잡히지 않는 반면, 그 경계선을 명확히 보여준다. 요리하는 수녀들, 그 공간을 지휘하는 아녜스 수녀. 여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드는 연출 흐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콘클라베> 내에서 묘사되는 남성들의 특성과 여성들의 특성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 있다. ‘베니테스’ 추기경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특이했다. 엄중한 상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다. 그의 목소리나 행동을 보면 본능적으로 중성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교황 유력 후보자들의 부조리함이 하나 둘 밝혀지고 이야기의 끝으로 달려갈수록 우리는 베니테스 추기경보다 교황에 더 적격인 인물은 없음을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로렌스가 떠오르는 분도 있었을 거 같다. 꾸준히 중립만을 지켜온, 그 덕분에 사건의 실체와 객관적인 사실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로렌스는 오히려 교황에 적합해 보이는 어느정도의 청렴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미리 교황으로서의 이름을 정해두기도 한다. 그저 실없는 장난이었을까? 그를 비웃듯 베니테스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밝혀진다. 베니테스는 남성의 몸에 여성의 몸 일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로렌스에게만 알린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남자가 아니라고? 이대로 교황이 되어도 괜찮은가? 구시대적인 발상도 기준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정당화한다. 무의식에서조차도.
교황에게 직접 임명된 베니테스와 교황이 보살피던 거북이들, 거북이는 두 성별을 모두 담고 있는 동물로서 지혜로움의 상징이다.
아마도 감독도 예상했을 것이다. 베니테스의 고백 씬을 통해 교황 자격을 의심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베니테스의 고백을 묵인한 로렌스 덕분에 교황 선출은 문제 없이 마무리된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성당에서 로렌스는 창문 밖을 본다. 세 명의 수녀들이 웃으며 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새로운 개혁을 앞두고 있는 성당과 그 안에서 여전히 공간을 위해 살아가는 수녀들의 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에게 성당은 진정으로 열려 있는가, 우리에게는 굳게 닫힌 문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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