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artist2025-06-23 01:21:39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를 가족으로 꾸릴 때, 그런 나도 결국 누군가의 가족이었음을.
영화 <걸어도 걸어도> 리뷰
지나고 보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말. 너무도 많이 들어본 거 같아 좀처럼 듣기도 싫고, 잔소리로만 느껴지던 그 말들이 어쩌면 그 횟수만큼 중요했기에 반복되었음을 왜 난 미처 알지 못했을까. 결국 닥쳐야만 깨닫는 못난 자신이 밉고 싫어진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집 가(家)자에 족 족(族)자로 이루어진 말로, 한 집에 모여 사는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의 집에서 무리를 이루며 짓는 사람들. 세상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되어주려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소홀해지고 무뚝뚝해지는게 가족이라는 사실을 스크린 속 비춰지는 허상의 가족을 보며 깨닫는다. 결국 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그리고 나에게 말 한 마디라도 더 걸고 싶었으나 차마 당신도 받아본 적이 없어 결국 손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누구나 경험했을 평범한 가족의 독특하지 않은 순간을 비범하게 다루어낸 걸작이다. 나약하고도 위태로워보이는 가족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고, 겉으로는 연약해보이기만 한 영화의 모든 씬들이 결국 스크린 속에서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나를 발견한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로케이션 헌팅에 '집' 만큼이나 고심을 기울인 곳은 계단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시작되고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토시코'와 첫째 딸 '지나미'를 뒤로한 채 산책을 떠난 할아버지 '쿄헤이'는 계단의 아래로 향해갔다. 계단 그리고 육교의 밑으로만 내려가던 그는 저멀리 바다를 보게 되고 금세 자리를 뜨고야 만다.
영화는 아래로만 향하는 쿄헤이를 촬영하는 데에 있어 익스트림 롱쇼트로 담았는데, 그 결과 쿄헤이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연약함을 눈치챌 수 있게 한다. 더군다나 그가 일본의 한 시골 동네 의료원을 운영하다 이제는 그만둔 전직 의사라는 점은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인상깊은 점은 본 장면과 닮아있는 나머지 씬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계단을 둘째 아들인 '료타'와 손자인 '아츠시'와 내려가던 장면 속 느릿하게 걷던 지난 씬들과는 달리 가족의 보폭에 맞추려 힘겹게 디디는 노인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난 후라면 그것이 그만의 사랑법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영화의 종반부, 1박2일 동안 함께했던 료타 내외를 바래다주고, 쓸쓸히 집으로 항하던 쿄헤이와 할머니 '토시코'의 뒷모습에서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 축 쳐진 어깨와 등을 볼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들던 찰나, 뒤따라 나오는 료타의 보이스 오버는 그렇게 두 노인이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화면은 잠시 어두워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카메라 각도는 교과서대로 각 인물들을 객관적이고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그 효과는 책 속 이야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게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괴물> 등의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의 선조격인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그의 이러한 다큐멘터리적이면서 실험적인 카메라 앵글의 첫단추였을지 모른다.
영화는 어린 소년을 구하려다 결국 자신이 바다에 빠져 익사하게 된 장남의 기일에 맞춰 모두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가족의 모습이 비단 명절 겸 오랜만에 모인 여느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료타의 가정은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린 '유시코'와 료타 그리고 아들 아츠시로 이루어졌지만 영화는 본 요소를 영화의 반전이나 플롯의 핵심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가족의 특이사항 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특별하고 혹은 특별하게 연출해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 방법이 있는 반면, 너무도 평범히지만 그 속에서의 변주와 공감을 통해 관객을 이끄는 방법이 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후자의 속하며, 그 변주는 배우의 열연과 이를 지탱해주는 각본에 있다.
영화의 모든 순간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비범했지만 특히 뜨개질을 하던 토시코와 료타가 나눈 장면 속 토시코의 연기는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장남인 '준페이'는 물 속에 빠진 어린 '유시오'를 구하려다 그만 소년을 살리고 자신이 사망케 된다. 사고 이후 매년 준페이의 기일이 되면 토시코는 유시오를 불렀고, 그런 유시오가 고통스러워 보였던 료타는 그만 부르자고 말한다. 하지만 토시코는 유시오가 고통스럽길 원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라 웃으며 대답하고 다시 정색하며 숨을 한번 삼킨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떠나보낸 아들에 대해 차마 원망할 없어 그 대신 살아남은 이에게 고통을 함께 느껴보라며 부르던 그녀의 표정 속에서 안타깝게도 통쾌함을 찾을 수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 분명 잘못되었음을 알면서 차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터져나오는 양심의 숨을 토시코는 힘겹게 삼켜낸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고함도, 괴성도 없이 고통스러움과 애절함, 비통함을 표현해낸 이 장면은 경이롭다.
토시코의 연기만큼이나 할아버지인 쿄헤이의 연기 또한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있고, 그런 가족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으나 해본 적이 없어 방에 혼자 있던 쿄헤이는 딸이 오는 듯하자 급하게 두리번댔다. 이제 남은 아들이라고는 하나 뿐인 료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싶으나 결국 그에게 가장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고른 쿄헤이에게서 가부장적이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사랑하는 법을 몰라 그저 서툴렀던 우리의 아버지들을 보는 듯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었던 장남을 잃은 바다를 가지 못해 지켜만 보다 돌아선 것은 아버지의 슬픔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손자가 바다로 가자고 하자 아들과 함께 바다를 보러갔던 것 또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후 료타 내외가 떠나자 다음 명절에나 볼 수 있겠지 하며 아들 부담스러우니 다음부터 손을 잡지 말라는 둥 핀잔을 주던 말은 아버지의 그리움이었다. 쿄헤이는 말수가 적은 인물로 작중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쿄헤이의 연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빛, 한 번의 행동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추측하건대 영화관 속 작품을 관람하던 모든 관객들은아마도 료타의 모습을 보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저러면 안 되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되돌아보며 부끄러움 내지는 반성을 느꼈을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향해 집을 나갔지만 결국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게 되고 차마 그런 모습을 부모 앞에 보일 수 없어 거짓말하던 료타의 모습 속 우리가 보인다. 인상적에이게도 료타는 그토록 싫어하고 어렵던 부모의 모습, 특히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별 말 않다 터뜨려버린 고함과 손짓의 모습은 당신의 모습이요, 공유하는 추억이 많지 않아 운동 이야기만 줄곧 늘어놓는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불어 호랑나비를 보며 아츠시에게 호랑나비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는 료타의 모습은 이전 장면 속 어머니와의 대화 장면을 오버랩된다.
작품 속 료타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있다. 죽음으로 인해 가족이 모인 자리에 죽음으로 인해 결성된 가정이 찾아온다. 역설적이다. 친아들이 아닌 아들에게는 쩔쩔매며 이름조차 '료짱'이라 불리는 것을 넘기지만 친아버지에게는 한 없이 방어적이다. 역설적이다. 의사가 되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결국 미술을 하겠다며 집을 나간 료타는 미술품을 복원하는 나름의 '의사'가 되어있다. 역설적이다. 영화는 쿄헤이와 토시코의 모습에서 부모의 감정, 가족으로서의 연민을 느끼게 한다면 료타를 통해서 가족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풀어내는 듯하다.
아츠시는 영화의 초반부 죽은 토끼를 보며 토끼를 쓰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웃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사망한 이에게 편지를 써봤자 어차피 모를 것이라며 대답한다. 그런 아츠시가 시골 생활을 마치며 자기는 생부의 직업이었던 피아노 조율사가 될 것이며, 만약 안 된다면 할아버지의 직업이자 새 아버지의 어린 시절 꿈인 의사가 되겠다고 밖에 나가 누군가에게 전하듯 말한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생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결국 아츠시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 즉 영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남은 이들의 가슴 속으로 삶의 흔적이 이전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이 생겨나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장손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가족이 때되면 모일 수 있었으며,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새로운 가정이 생겨날 수 있었다.
영화는 이처럼 가족의 의미, 부모와 자식 간의 미묘한 감정과 틈 그리고 삶과 즉음에 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대단히 유기적으로 담아내 관객을 설득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요란스럽다기 보다 조용하기에 설득하지 않고, 관객을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전혀 저항조차 못한 채 영화의 감동과 여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필자에게 누군가가 전한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필자에게는 아직도 큰 충격이다. 영화는 관점의 예술이기에, 아무리 진실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다루어도 주관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역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배운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는 훌륭한 교본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의 그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나의 경험이란 관점의 결과인데 그렇다면 과연 경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역사를 진실로서 다루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과연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실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각 속 자신의 관점을 찾는 과정이 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영화를 통해 인생과 가족을 배운다. 누군가는 영화로 인생과 가족을 배우는 건 새삼 어리석은 짓이라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라면, 그 중에서 특히 <걸어도 걸어도>라면 그건 어리석은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한 방법일 것이라 확신한다. 인생과 가족에 대해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갈고 닦은 감독의 마스터피스를 관람한다. 그의 작품 속 세상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가족의 연대와 '가족이니까' 넘어가고 무심해지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이에 대한 교본이다.
작품은 죽음을 다루면서 신기하게 단 한번도 눈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의 눈물은 무더운 날씨 묘비에 뿌려지는 물로 대체되었을지 모른다. 영화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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