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2025-06-16 14:36:55
단어를 잊는 시인의 여백으로 매운 시
시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미자는
시를 써보고 싶다.
자꾸만 단어를 잊지만
단어들을 주섬주섬 기록한다.
병원에서 본 어떤 사건,
그녀의 손자가 저지른 어떤 사건,
이후 그녀가 해야 할 어떤 사건들이
겹쳐지며 이야기를 잇는다.
단어를 잊는 시인의
이야기는
끝내 함구하며 이어지는데,
그 여백이 만든 운율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여백이 가득한 이 영화는 암울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며 패러프라이징되는 이야기들은 또 다른 운율을 만든다.
예컨대, 병원에서 우는 여자와, 밭일을 하는 여자, 사과를 받는 여자의 세 이미지는 병치되고 반복되며,
같은 여자에게서 전혀 다른 얼굴들을 발견케 한다.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는 것
하지만 그에 딱 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것
반복되는 시도와 실패는
이 영화를 시적이게 한다.
Relative contents
-
- 경성크리처 2 | 의도가 느껴지려면 일단 맛있어야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에 몸을 던진 후 나진이 뇌에 파고들어 초인적인 괴력과 불사, 불로의 능력을 갖게 된 '윤채옥'(한소희).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타인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낸다. 대신 그녀는 능력을 살려 실종자를 찾아주는 뒷거래로 생계를 꾸린다. 어느 날, 의뢰를 받아 몰래 들어간 모텔 방에서 윤채옥은 놀라운 사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옛 연인 '장태상'을 똑 닮은 '장호재'(박서준)를 발견한 것.
절친한 형 '권용길'(허준석)과 함께 흥신소 일을 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장호재. 밀린 월세에 의해 압박받던 그는 의뢰를 받아 향한 모텔 방에서 의뢰인 대신 사체와 윤채옥을 발견한다. 윤채옥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나머지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호재는 윤채옥을 찾아 진상을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장호재와 윤채옥은 미처 몰랐던 진실과 그들을 노리는 과거의 적에게 한 걸음씩 다가선다.
맛을 빼먹은 의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성황리에 끝났다. 시청자도 많았고, 수많은 밈을 만들어냈다. '의도가 느껴져야 한다'는 안성재 셰프의 일관된 심사평도 그중 하나다. 음식을 먹는 순간 셰프의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져야 활용된 기술이 유의미하다는 그의 미식 철학은 공감 혹은 의문을 자아내며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안성재 셰프의 말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기본적으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2>는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듯한 드라마다. 창작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전편이 일제의 만행을 장르적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현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문제는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의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치게 힘을 쏟은 나머지 밑바탕이어야 할 맛, 곧 드라마의 재미를 놓쳐 버렸다.
분명한 의도
<경성크리처 2>가 겨냥하는 대상은 확실하다. '토착왜구'다. 일제를 미화하거나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입장을 옹호하는 한국인 혹은 그러한 현상을 비판하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친일파가 급변하는 세태에 발맞춰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과 현실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악역 캐릭터만 봐도 의도가 보인다. '마에다'(수현)와 옹성병원 위에 지어진 전승제약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일본군 장교와 일본인, 친일파의 후손이 협력해 과거의 연구를 이어가는 이 조직은 토착 왜구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들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일제 패망 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혼란했던 한반도. 마에다는 그 틈을 타서 장태상과 그의 동료들을 제거하고 재산과 영향력을 되찾았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재건한 일본과 혼란을 틈타 과거를 씻어냈던 몇몇 친일파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정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권준택'(위하준)의 자손은 임대료 걱정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다는 모습도 현대사의 비극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대사에는 친일파, 뉴라이트,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반영되어 있다. 마에다는 양아들이자 시즌 1 막바지에 사망한 명자의 아들 '승조'(배현성)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장태상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이제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속삭이기도 한다.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을 필두로 한 일본 측 사관을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의도만 남은 디시
에피소드 7개에 꽉꽉 눌러 담은 메시지는 사실 비판하기 어렵다. 피식민지국 국민 입장에서는 항상 관심을 갖고 염두에 둬야 할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공조 긴밀해지는 만큼 한국, 일본, 미국의 협력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성크리처 2>가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메시지를 뻔하게 만드는 기제다. 기시감이 강한 클리셰의 반복은 의의가 중요한 의도마저도 거부감이 느껴지게 한다. 극 중 분량이 상당한 액션이 대표적이다. 나진을 맞은 이들의 초인적 괴력과 속도를 활용한 연출은 돋보이지만 구성은 식상하다. 한국 드라마 중에서는 <기생수>와 유사하고, MCU의 <시크릿 인베이젼>과도 흡사하다. 팔을 대신하는 촉수를 활용하는 식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크리처물'을 표방하지만 전편의 세이싱 같은 괴물의 비중이 거의 없다. 크리처물에게 기대할 법한 시각적 쾌감이 사라지면서 차별점도 잃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퀄리티도 아쉽다. 어두운 복도, 공터, 폐공장에서 주로 액션이 펼쳐지다 보니 회차가 지날수록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인상이 짙다. 경성의 화려함과 옹성 병원의 스케일을 강조하며 눈을 즐겁게 한 지난 시즌과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멜로는 살았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를 지켰다는 점은 위안이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해진 덕분에 로맨스의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 사실 지난 시즌은 장태상과 윤채옥의 멜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첫눈에 빠진 운명적이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답습했고, 둘이 사랑을 싹 틔우는 과정도 못 보여줬다.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옹성병원에 갇힌 채 각자 사투를 펼쳤으니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에 자연히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시즌 2는 두 주인공 간의 감정선을 영리하게 그려냈다. 10부작에서 7부작으로 분량을 줄이고, 각자의 서사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시키면서 아련함을 극대화했다. 전반부는 윤채옥이 이끌어 나간다. 그녀는 어머니 세이싱으로부터 나진을 이식받아 불로 및 불사의 존재로 79년간 홀로 지냈다. 시즌 1에서의 첫 만남과 같은 구도로 이뤄지는 윤채옥과 장태상의 재회는 그녀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극대화하고 뇌리에 각인시킨다.
중반부부터는 장태상이 극을 이끈다. 그는 마에다가 억지로 투여한 나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겨우 나진을 적출하고 기억을 잃은 채로 1년간 장호재로 살아왔다. 과거의 악연과 비극을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윤채옥과 재회한 후로 점차 기억을 되찾고 끝내 장태상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전승제약이 잡아간 윤채옥을 구출하러 간다.
그 끝은 다크 초콜릿 같다. 윤채옥은 나진을 제거당하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평범한 대학생활을 영위한다. 반면에 장태상은 장호재라는 이름으로 죽지 못하는 삶을 홀로 살아간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 서로 맞바꾼 삶의 궤적은 한눈에 들어온다. 해피엔딩 같지만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한 쌉쌀한 멜로를 완성한다. 이러한 결말은 <경성크리처 2>가 최소한의 몫은 해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경성크리처 2>는 예술 작품의 본질을 간과한 여러 작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은 창작자가 미적 감각 속에 의도를 숨겨서 전달하고, 수용자는 미적인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도를 발견 혹은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성크리처>는 창작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미적 감각과 기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머지 역효과가 발생한 듯 보인다.
이는 쿠키 영상대로 시즌 3가 나오더라도 기대가 크지 않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쿠키 영상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시즌 3은 나진이 세상에 퍼짐으로써 그 유산을 비로소 사람들이 직시하고 맞서는 전개를 보여줄 듯 싶다. 나진을 현재까지 남은 일제의 유산이나 저주로 이해한다면, 지난 두 시즌 동안 보여준 의도의 연장선상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즌 3만큼은 철저히 장르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반일이라는 가치와 메시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 달리 말해 두 주인공의 멜로와 액션, 그리고 크리처물의 정체성만 살아나도 작가의 의도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반일이라는 의도를 감싸지 못한 액션과 크리처물의 맛
-
- 사신이 추는 칼춤
강아지 한 마리 죽음으로 발생한 나비효과는 과연 어디까지 퍼지는가. <존 윅> 시리즈는 액션 장르의 고점을 갱신하는 액션 영화라고 치부한다. 후속 편이 나올수록 화려하고, 고도화되는 액션의 질은 고혹하기까지 하다. 검은 방탄 슈트를 입으며 적들을 피로 물들게 하는 모습이 마치 피어오른 붉은 꽃이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하게 한다. 바바야가, 존 윅, 조니, 조나단, 부기맨 등 별명도 참으로 많은 사신(死神) 존 윅이 추는 라스트댄스 <존윅 4>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 윅 4> 스틸컷
<존 윅 4>라는 제목이 다가오는 느낌은 <존 윅> 시리즈를 끝맺는 수미상관을 보여준다. 1편 제목이 <존 윅>이었던 반면, 후속작 2,3편은 각각 '리로드', '파라벨룸'이라는 부제가 있었다. 킬러들의 세계관에서 최고 회의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아무도 얻지 못할 자유를 통해 '헬렌'의 다정한 남편이 되고자 한다. <존 윅 4>는 <존 윅> 시리즈의 끝맺음이다. 애초에 영화가 끝맺음을 짓기 위해 흘러간다. 이들도 아무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사람을 죽이고, 최고 회의 간부를 몇 차례 죽인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도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 속에서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보여줄 수 있는 액션 장르를 있는 힘껏 선사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사막에서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과 마지막 플롯에서 케인(견자단)과 권총 한 자루로 자웅을 겨루는 일대일 장면은 웨스턴 장르에 자주 등장하는 액션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리고 <존 윅:파라벨룸>에서도 등장했던 동양 무술을 이번 영화에도 선보이는데, 오사카 콘티넨탈 호텔이라는 장소에 맞는 일본식 검술도 등장하여 동양 무술 액션에 폭을 넓혔다. 심지어, 이번 등장인물에 동양 무술영화의 대가인 '견자단'까지 등장하니 깊이까지 더한다. 배우 견자단이 맡고 있는 '케인'은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비슷하듯 비슷하지 않다. 케인(견자단)은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적들을 소탕한다. 칼과 총, 주먹으로 해결하는 케인이지만, 존 윅은 이번 편에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다. 특히, 쌍절곤을 활용한 액션이 기억이 남는데, 이소룡이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자 동양 무술의 폭을 넓혔다는 취지에 어울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윅> 시리즈는 장소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액션으로 활용할 줄 안다.
그러나 <존 윅:리로드>부터 장소의 특징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감과 조명이 가미된 장소에서 선보이는 액션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고도화된 액션 장면들은 오직 <존 윅>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미장센이 돼버렸다. 그러나 감각적인 색채와 조명을 배경으로 벌이는 액션이 재미는 더하지만, 자칫 관객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존 윅 4>는 로테이션 액션 촬영에 더 비중을 중요시했다. 후반부 프랑스 시내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또 한 번 신선함을 선보인다. 프랑스 이름 모를 시내 내부와 개선문,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성당까지 가기 위한 222 계단 등에서 펼치는 액션은 장소 특징을 살린 것과 동시에 자연광이 비치는 풍경의 미학까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
- 너의 이름은 감독 '스즈메의 문단속' 후기
스즈메의 문단속
(23.03.08 개봉 예정)
감독: 신카이 마코토
더빙: 하라 나노카, 마츠무라 호쿠토 등
'스즈메의 문단속' 개봉 전 진행한 프리미어 상영회에 다녀왔어요~
너의 이름은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얻고 있는데요
저 역시 너의 이름은 광팬이라 ㅠㅠ 완전 기대한 채로 관람!
미리 말씀드리자면 살짝 실망했다는 게 저의 총평입니다 ,,,
스즈메는 문을 찾아 여행 중인 소타를 만난다.
스즈메가 폐허에서 발견한 낡은 문을 열자
마을에 재난의 위기가 닥쳐오고
가문 대대로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를 도와 간신히 문을 닫는다.
재난을 막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수수께끼의 고양이 다이진이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꾸고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는 여정에 떠난다.
'스즈메의 문단속' 줄거리
'스즈메의 문단속'은 지브리 같았어요
남자 주인공 소타의 내외적 모습은 하울 같고, 작화 및 모션은 모노노케 히메를 떠올리게 하고,
지진 등의 재난(환경 문제) 소재를 이야기하는 것까지
분위기를 따라한 거 같다기보다는...... 그냥 지브리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느낌...? ㅎㅎ
그래도 시각적으로는 정말정말 최고였어요
웅장한 미미즈의 등장부터 대박적...!
미미즈는 뒷문을 닫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라 스즈메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인데요
미미즈가 온세상을 뒤덮었다가 한순간에 싹 사라지고 그때의 그 정적... 잊을 수 없어요
애니메이션만큼은 너의 이름은보다 뛰어났어요!
아 근데 이렇게 절정일 때 OST 쫙 뿌려 줄 줄 알았는데 엔딩 크레딧에만 좋은 노래가 나와서 . . .
고게 아쉬웠어요
신카이 마코토 작품은 OST 듣는 맛인데 ㅠㅠ
웅장한 미미즈를 시각으로 즐기라고 그랬나 청각적 즐거움은 1도 주지 않았더라고요
제가 아쉽다고 느낀 건 스토리 부분이에요
'스즈메의 문단속'에 캐릭터가 아주 많이 등장하거든요
스즈메 / 소타 / 다이진 / 사다이진 / 엄마 / 이모 / 소타의 할아버지 / 소타의 친구 / 이모를 짝사랑하는 남자까지...
씬을 많이 차지하는 인물만 놔도 이 정도예요
그런데 이 많은 캐릭터의 스토리를 모두 보여 주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결국 모두의 기승전결이 망가진 느낌?
스즈메가 자신의 과거를 위로하는 엔딩이었기에 스즈메-엄마의 과거 그리고 현재 이야기는 꼭 나왔어야 했는데
스즈메가 소타와 사랑에 빠진 후부터 엄마 스토리는 아예 생략되고... 마지막만 훅 등장하거든요
이걸 주요 스토리 라인으로 가져가는 거였으면 계속해서 스즈메 엄마 이모 이 관계가 나오게 했어야 해요
그리고 소타 할아버지가 하는 역할이 없어요
스즈메에게 의지를,, 심어 주긴 했지만,, 마지막에 죽는 것도 아니고 스즈메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는 캐릭터??
그리고 이모를 짝사랑하는 미노루가 있는데요
계속해서 이모를 좋아하는 씬을 넣길래 스즈메를 도와주며 마지막엔 이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이게 웬걸 . . . 스즈메와 이모를 돕는 건 소타 친구 토모야예요
그렇다고 토모야랑 잘 되는 것도 아님 왜 등장하죠?
굉장히... 이유 없는 캐릭터가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만큼은 주된 내용이 로맨스가 아니니까......
조금 더 환경, 혹은 가족 쪽으로 끌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해요
스즈메와 소타 둘의 시점으로 진행하려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못 잡고 엉성해진 케이스
아 고양이 너무 귀여워요!!!!!!! 자막판 목소리 완전 포뇨예요 ㅠㅠ
뒷문을 막는 요석인 다이진인데요 고양이로 변해서 막 스즈메를 쫓아다녀요
'스즈메 다정해', '스즈메 나랑 놀자'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저는 자신을 요석으로부터 탈출시켜 준 게 스즈메니까 집착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스즈메에게 열린 뒷문 위치를 알려 주는... 오히려 주인공을 돕는 그런 존재였어요(??)
'스즈메의 문단속'이 지브리 같았다고 했는데
저는 지브리의 의도, 스토리를 잘 이해 못해서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거든요... ㅎㅎ
그래서인지 '스즈메의 문단속'도 막 완전 좋다 이건 아녔어요
웅장하고 큰 사건 있는 애니메이션 좋아하시는 분들은 너무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
-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4)
*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4)
감독: 팀 밀란츠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왓슨 등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98분
국가: 아일랜드
개봉일: 2024.12.11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석탄 사업을 운영하며 다섯 딸과 아내를 착실하게 부양하고, 직원들과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 줄 아는 따뜻한 아버지이자, 남편, 이른바 좋은 어른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면, 가족들을 마주하기 전에 석탄을 나르느라 새카매진 손을 깨끗하게 씻는 세심함을 가졌고, 직원들의 식사를 풍족하게 챙겨주거나 길가에서 만난 이웃집 어린 학생에게 잔돈을 나눠줄 정도로 사려가 깊어 주변으로부터 잔걱정을 사기도 한다.
화목한 가정 속에서, 보통의 중산층 가정처럼 적당히 살림살이나 걱정하며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을 줄 알았던 빌. 하지만 현실의 비참함을 나타내는 듯한 장면들을 몇 차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그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고 어딘가 불편해하는 듯한 모습을 계속 비친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던 소녀, 추위에 떨며 음식을 찾아다니는 얇은 옷차림의 어린 남자 아이, 술 주정뱅이 부친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딸 아이의 친구. 자꾸만 안타까운 순간들이 눈에 밟히고, 이는 새벽 같이 깨어난 그의 눈앞에 선연한 잔상으로 나타난다.
말 없이 사색에 잠긴 그가 회상하는 장면들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다. 빌의 어머니는 부유한 윌슨 부인의 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혼모였고, 윌슨 부인은 빌을 가족처럼 보살폈다. 어디까지나 주인댁에 얹혀사는 입장이었기에 어린 빌의 표정과 행동거지가 편안해 보이진 않았지만, 윌슨 부인도,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일을 돕던 하인 네드 아저씨도 어린 그에게 따뜻함을 베풀었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나왔으나 아내인 아일린이 그에게 어려움을 모르고 살지 않았느냐고 언급한 것을 보면, 윌슨 부인은 빌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돌봐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빌이 이따금씩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시점의 먼 과거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빌은 그때 그 수녀원에서 석탄 배달을 하던 중 눈물로 고통을 호소하는 소녀, 세라를 만난다. 임신한 몸으로 석탄 창고에 갇혀 있던 세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눈물이 맺힌 눈동자에는 고통 어린 진실이 숨어있는 듯했다. 세라를 데리고 수녀들을 찾아가 수녀원 구석구석을 둘러보게 된 빌은 오랜 시간 마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수녀원에 감춰진 이면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엔딩에서 막달레나 세탁소로 밝혀진 이곳은 미혼모, 성매매 여성, 성폭행 피해자 등 성적 윤리에 어긋난 여성들을 데려와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 갇힌 채 바닥을 닦고, 세탁을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노동에 동원되고 있는 수많은 소녀들.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기쁨도, 행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녀원의 원장은 빌로 인해 이곳의 어두운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걱정했다. 원장은 빌을 따뜻한 집무실로 안내해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물론, 세라에게 친절을 베풀 것이라는 행동들을 의도적으로 전시한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편지와 함께 현금을 두둑이 챙겨주며 그에게 침묵을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원장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던 빌은 못 이기는 척 선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빌은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풍족한 생활과도 거리가 먼 중산층의 가장이며, 그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여섯이나 있다. 수녀원과 척을 졌다가는 학교를 다니는 딸들에게 피해가 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의 사업 운영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의 아내와 가까운 지인들도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일이 있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빌을 타이른다. 하지만, 빌은 여전히 그 소녀를 구하고 싶다는 미련을 놓지 못한다.
빌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던 소녀에게서 어머니를 떠올린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이름 또한 세라다.) 그의 어머니 또한 미혼모였고, 윌슨 부인 같은 선량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가족에게 버림 받은 채 이런 곳에서 강제 노동의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추위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자신을 향해 구출을 빌었던 세라가 그의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빌은 더욱 소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타인이 내밀어 준 사소한 손길 덕분에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던 그이기에, 자신이 세라에게 베풀 수 있는 행위가 가진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빌은 소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그녀의 고통을 외면했지만, 그만큼은 윌슨 부인과 네드 아저씨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사소한 선의를 전해보기로 한다. 훗날 갈등을 불러올지도 모를 행동으로 인해 본인 앞에 힘든 나날들이 이어진다 할지라도, 그 작은 손길이 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바꿔줄 수 있을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몸소 겪어 보았기에 현실 속 어른들의 사정은 뒷일로 미루기로 한다. 고통 속에 파묻힌 한 아이에게 빛이 들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그 용기는 분명 가치있는 것일 테니까.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 벌새
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
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2월 19일 월요일
연말이 되면서 나날이 바쁘기만 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보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숫한 상념들이 나의 감정을 흔들었다. 이제 일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짧은 글이라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글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린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제 서서히 1994년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꼭 정리를 하지 않아도 힘겹게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신문의 활자를 키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가끔 그 속으로 나타나는 햇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사건과 사고가 줄을 이어 터지고 김영삼 정권은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만큼 저질이다.
사무실을 얻기는 8월부터 얻었지만 출근은 9월부터 했다. 사무실 출근이 하루를 규칙성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다. 매달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일을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사무실 유지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는 편이다. 함께 지내고 있는 이00 씨와 00희 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조금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약간의 양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고 참여했다 떨어져나오는 모임도 수없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반복은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른글을 정리하고 새해에는 사람을 정리하고 맺는 관계를 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고 널린 관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 '양보다 질'이었다.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이 사귄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잘 정리를 해야 하겠지만 일과 관계된 것도 잘 정리를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쓰는 실용서 단행본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빨리 소설로 돌아서야 한다.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일까.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열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음 속에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거의 모두 작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내용들 뿐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보게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이 나의 감정에 분노와 짜증을 일으킨다.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양이 없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주장으로 전당포 노파와 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교양이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론적으로 이미 나와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는 경제적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질적인 수준은 결국 경제문제에 달려있다고 본다.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양있게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주장을 믿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저열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다만 사회의 제도, 교육, 빈부의 격차, 권력의 억압, 착취, 계급제도 등 각가지 모순들이 인간들을 기형으로 만들어 갈 뿐이다.
현상은 왜곡된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이기적인 인간, 조잡스러운 인간, 한심한 인간, 사악한 인간,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 음흉한 인간, 불쌍한 인간, 교활한 인간 등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독버섯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조건 희생자인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품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품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품성의 미덕은 분명 있다. 권력을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는 결국 민중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중은 권력자와 자본가를 대상으로 언제나 대립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민중의 단결되지 못한 현실을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산업예비군, 실업율, 대학의 경쟁, 학력중시, 심지어는 지방색까지 만들어서 가능하면 민중들의 단결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가 번지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민중의 삶을 피폐하고 메마르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의 경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국가 전체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여 모든 노력을 경제부흥에 쏟았다. 경제발전 속에서 최소한의 인권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단지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본가와 권력자는 민중을 계속 파편화하고 우매하게 묶어두기 위해 '성'과 '스포츠'를 도입했다. 초기의 권력도 파쇼이고 80년대의 권력도 파쇼임에는 갖지만 경제의 발전정도에 따라 민중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악법과 국가보안법 등 탄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채찍은 언제나 동일했다.
'개발독재'로 불려진 70년대 파쇼의 시절을 지나 대외 수출이 호황을 맞이하던 80년대와 90년까지 경제의 토대는 성장했다. 대중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민중의 기본 삶은 조금 나아졌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소외는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이 나아진 만큼 씀씀이도 커지고 경제의 개념이 소비 위주로 바뀌면서 생활 문화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일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한다. 직장과 직위,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갑작스러운 변수, 이를테면 질병, 사고와 같은 변수가 생기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의 복지제도가 기본으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또한 일정한 수입은 소비문화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 공무원의 범죄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그래서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공무원 뿐 아니라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한탕주의에 빠져든다. 마약의 밀매, 매춘, 인신매매, 성을 파는 모든 서비스업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은 경제력으로 대체된다. 아파트 평수와 고급 승용차, 월 수입 등이 지위와 권위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무차별하고 단순한 비교로 심한 박탈과 소외를 느낀다.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물질로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근본에서 잘못된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시되고 필요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든 가장 성공한 분열방법이다. 사회에 범죄가 극성이고 온갖 사고, 사건,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가족끼리만 다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단위의 중심이기도 하다. 부(물질)의 승계가 가부장제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가가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단위는 소비문화의 주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소비문화가 대중을 유혹하고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족(주로 가부장)은 고급 주택, 아파트를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사고, 외제 의류를 철마다 사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을 하고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 결국 자본가이겠지만 가부장의 존재가 가족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가족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최소한의 경제단위일 뿐이다. 가족은 부모와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 구성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혈연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는 단적인 몇 개의 예만 들어도 충분하다. 비록 자본가라 할지라도 그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 고유한 의미에서 혈연공동체나 평등한 관계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 아침이면 뿔뿔히 흩어져 공장이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오는 가정을 어떻게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하면 가족은 해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가족의 모습 역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이해관계, 희망, 욕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본주의 제도, 경쟁, 수입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부모가 넉넉한 수입이 없다면 자녀는 제도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제도교육을 일정하게 받지 못하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이것은 결국 수입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만 거의 모든 민중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은 가난함때문에 가족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살며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단칸방에서 서너 식구가 끼어 자야하는 주거생활이 그렇고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상생활이 그렇다. 여기에 가족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그 가족은 거의 궤멸에 이른다.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며 생활비 등 들어가야 할 돈은 평소보다 몇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책이 없다면 빚을 짊어져야 하고 이 빚은 그 가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살아가야 할 일이 막막해지면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도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편법과 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범죄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며 여성은 매춘을 한다. 3차 산업의 발달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 산업은 성을 상품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 투여되는 여성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유흥업이나 각종 서비스업에는 매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여성의 경우 매매춘을 통해 인간성의 황폐화와 경제적 이익을 바꾸게 되고 남성은 극심한 노동이나 범죄의 방법을 찾게 된다. 가족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흩어지게 되며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
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가족에게 변곡점이 된다. 은희 개인에게도 가족의 문제와 함께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고 답답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는 성적 위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다.
부모는 아들 대훈이 학교 전교회장을 하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에게는 살뜰하지 않다. 수희는 남자 친구와 어울리느라 학원에 가지 않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소리나 지른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섯 명 모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은 아침 밥먹을 때 잠깐이다. 은희가 '왜 우리 가족은 모래알 같을까'라고 묻는 마음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다니던 은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이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재미있니, 성적은, 어느 대학 가야지, 같은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 아닌, 좋아하는 게 뭐지, 왜 좋아하지, 요즘 무슨 생각해, 같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른,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영지 선생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은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지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상태인데, 그가 부른 노래, 그의 책장에 있던 책으로 보아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고, 어쩌면 수배 당한 상태였을 수 있다.
은희의 부모는 90년대 한국 부모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고, 엄마는 가게 일과 집안 일을 하느라 남편, 아이는 물론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다. 언니는 학업보다 남자 친구 만나며 노는데 신경을 쓰고, 오빠는 부모의 기대로 심한 부담을 진 채 학교를 다닌다. 은희는 아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어린 영혼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세계는 아직 좁고, 부모, 학교, 학원 그리고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데, 은희가 세계를 깨고 나오게 되는 계기가 영지 선생의 죽음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은희가 살고 있는 대치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강남의 중심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여서 은희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자본주의 욕망이 응집된 강남에서 제한 없는 경쟁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모와 그 부모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지만, 이런 지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영화에서 은희를 비롯해 왼손을 쓰는 인물이 여럿 있다. 주인공이 왼손을 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왼손잡이는 소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 사회의 소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낸다. 은희와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오히려 소수에 속하고, 은희는 학교에서 소수이며, 영지 선생도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은희와 영지 선생이 여성이라는 점 또한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1994년의 한국사회 속에서, 중학생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악한 사람은 없지만, 악한 행동을 하고, 선한 사람도 때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인간의 다면성은 의도가 필요 없는 삶 그 자체에서 나오는 모습이며, 은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은희의 아버지도 은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은희를 때리던 오빠 대훈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수희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기득권을 공기처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폭력성을 내재한 채,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중하층 가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두 장면이 나오는데, 떡집에서 강남 '사모님'이 은희 아버지가 만드는 떡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에 반박했다는 은희 아버지의 말과, 은희가 남자 친구와 시완과 함께 있을 때, 시완의 엄마가 나타나 시완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시완의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은 딱 한 대사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르주아와 중하층 상인의 가족을 가르는 선으로 드러난다.
어떻든, 은희의 가족은 '생존'한 가족이다. 수희가 성수대교 붕괴에서 살아온 것도 생존이지만, 강남에서 떡집을 하며 어렵게 세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의 열성 덕으로 은희, 수희, 대훈 모두 살아남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5년에는 강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보다 이 사건은 은희에게 더욱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강남에 살고 있고, 삼풍백화점에 갔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더구나 은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1997년 말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고,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데, 이 가족이 과연 그때도 무사히 생존하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이렇게 1994년 이후, 한국, 특히 강남에 불어닥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은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1994년, 은희의 수학여행에서 끝나지만, 영지 선생의 죽음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꺼지지 않는 불을 간직하는 것이리라.
-
- 10월 넷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2024년 최대 기대작이었던 <조커: 폴리 아 되>의 부진으로 또 다른 대형 영화인 <베놈: 라스트 댄스>의 성적은 어떻게 될 것인지 주목받고 있습니다. <베놈: 라스트 댄스>는 북미 개봉 첫 주에 7천만 달러의 수익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작인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의 9천만 달러와 시리즈의 첫 영화인 <베놈>의 8,020만 달러보다는 낮은 수치이지만, 기대 이하였던 <조커: 폴리 아 되>의 성적을 감안하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7천만 달러의 개봉 성적이 유지된다면, <베놈: 라스트 댄스>는 2024년 두 번째로 높은 오프닝 성적을 기록한 코믹북 영화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작들의 각본을 쓴 켈리 마르셀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아 감독을 맡은 <베놈: 라스트 댄스>는 오는 10월 23일 국내 개봉 예정입니다.
베놈: 라스트 댄스
Venom: The Last Dance
개요: 액션 | 미국 | 109분
감독: 켈리 마르셀
주연: 톰 하디, 치웨텔 에지오포, 주노 템플, 리스 이판
개봉: 2024.10.23.
배급: 소니 픽쳐스
줄거리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환상의 케미스트리의 에디 브록(톰 하디)과 그의 심비오트 베놈은 그들을 노리는 정체불명 존재의 추격을 피해 같이 도망을 다니게 된다. 한편 베놈의 창조자 ‘널’은 고향 행성에서부터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지구를 침략하고 에디와 베놈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마지막 운명을 건 대서사의 클라이맥스 우리는 끝까지 함께한다!
마이펫의 컴백홈 어드벤처
Gracie and Pedro: Pets to the Rescue
개요: 애니메이션 | 캐나다 | 87분
감독: 케빈 도노반, 고트프리드 루트
주연: 빌 나이, 수잔 서랜든, 브룩 쉴즈, 알리시아 실버스톤
개봉: 2024.10.23.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줄거리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품격 있는 강아지 ‘그레이시’와 장난기 많은 스트릿 출신 고양이 ‘페드로’가 공항 수화물 사고로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상상 이상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와일드한 바깥세상에 던져진 그레이시와 페드로, 과연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못 말리는 사고뭉치 콤비,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뭉쳐야만 한다! 멍X냥 크로스!
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
개요: 드라마 | 미국 | 107분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주연: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개봉: 2024.10.23.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줄거리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오래전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절친한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다.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처한 현재의 문제에 대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중요한 순간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어프렌티스
The Apprentice
개요: 드라마 | 캐나다 | 122분
감독: 알리 아바시
주연: 세바스찬 스탠, 제레미 스트롱, 마리아 바카로바
개봉: 2024.10.23.
배급: ㈜누리픽쳐스
줄거리
세입자들에게 밀린 집세를 받으러 다니는 뉴욕 부동산 업자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는 어느 날 정·재계 고위 인사들을 변호하며 정치 브로커로 활동하는 변호사 ‘로이 콘’을 만나게 된다. 성공을 향한 강한 야망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는 불법 수사와 협박, 사기, 선동으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불리는 ‘로이 콘’을 스승으로 삼고 더욱 악랄한 괴물로 거듭나는데!
-
-
- 압도적인 액션 / 역시 퓨리오사 / 안야 테일러 조이의 강렬한 카리스마 / 아역 배우의 독기어린 눈빛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으로 엔드크레딧 전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영상이 잠시 나옵니다.
엔드크레딧 후에는 있나 싶은 허무한 영상 하나 있습니다.
-
- 영화 <나일 강의 죽음> 메인 예고편
황홀한 여행, 완벽한 살인 그리고 11명의 용의자..
-
- 넷플릭스 <먹보와 털보> 공식 예고편
의외의 찐친 먹보(비) X 털보(노홍철) 전국을 누비며 릴랙스! 좌충우돌 찐우정 로드트립 버라이어티 《먹보와 털보》 12월 1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