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15 19:51:54
6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2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7월에 제작 시작
📮 6월 2주차 2번째 씨네뉴스가 도착했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7월에 제작 시작!
한 인터뷰에서 에밀리 블런트가 드디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
관한 소식을 조심스럽게 밝혔는데요!
올해 7월부터 제작에 돌입한다고 합니다!
2026년 5월에 개봉 예정이니
20년만의 귀환인데요…
개인적으로도 너무너무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
🗞️
❶ 에밀리 블런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 관해 이야기했다
❷ 호아킨 피닉스 주연, 아리 애스터의 ‘Eddington’ 예고편 공개
❸ 유현목 감독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영상자료원에서 개최
❹ 레나테 레인스베, A24 신작 공포 영화 ’The Backrooms‘ 합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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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편지' 이야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편지 쓰는 걸 좋아하시나요?
디지털 기기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은 많지 않지만,
화면 너머의 정갈한 글씨보다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글씨에서 더 진심이 느껴질 때가 있죠.
그래서일까요? 여전히 많은 영화에서 '편지'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쓰이곤 한답니다.
오늘은 가슴 절절한 연애편지부터 인생의 지혜를 전해주는 따뜻한 편지까지!
다양한 편지가 등장하는 아름다운 영화 5편을 소개해 드릴게요.
시월애(2000)
A Love Story
ⓒ 익스트림무비
우편물을 부탁하는 편지로부터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까지
감독: 이현승
출연: 이정재, 전지현 등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판타지
러닝타임: 94분
단역 전문 성우 은주(전지현)는 1년간 살던 바닷가의 집 '일마레'를 떠나며 우편함 안에 다음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긴다. 그러나 그 편지는 시간을 거슬러 은주보다 먼저 '일마레'에 살았던 건축가 성현(이정재)에게 전달되고,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사이가 된 두 사람. 급기야 성현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은주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미래의 은주는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하고 과거의 성현에게 자신과 그가 헤어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은주를 사랑하게 된 성현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하게 되고, 성현이 자신의 부탁 때문에 사고를 당함을 알게 된 은주는 사고를 막기 위해 성현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가 늦지 않게 그 편지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영화의 제목 '시월애'는 한자로 썼을 때 '時越愛'로, 직역하면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비주얼로 호평을 받은 동시에 영화제, DVD 등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2000년대 초에 한국영화 팬덤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손꼽히며, 2006년 할리우드에서 <레이크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성현에게 보내는 은주의 편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람들이 가까워지면
점점 더 기대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들 너무 멀리 있어요.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요?
그냥 약속을 잊으신 거면 좋겠어요.84번가의 연인(1987)
84 Charing Cross Road
ⓒ MUBI
도서주문 편지에서 시작된 20년의 우정
감독: 데이비드 휴 존스
출연: 앤 밴크로프트, 안소니 홉킨스, 주디 덴치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0분
가난한 작가인 헬레인 헨프는 대단한 독서광으로 읽고 싶은 고전들을 싸게 사 보기 위해 영국 런던 84번지에 있는 중고책방에 편지로 책을 주문한다. 이를 계기로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과 평생을 정신적 교류를 나누는 정신적 연인이 되어 편지로만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때론 귀한 책 한 권에 함께 감동하고 때론 분노하면서 사소한 주변 얘기도 곁들며 가며 인생을 논할 수 있었던 건 프랭크, 헬레인 두 사람 다 따뜻한 인간애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정신, 여유롭고 유머가 풍부한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프랭크가 죽기까지 영국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헬레인은 프랭크가 죽고 난 후 어느 날 문득 그녀가 그토록 동경했던 그 서점에 가서 감상에 젖는다.
뉴욕의 무명작가와 런던의 고서점 관리인이 실제로 1949년부터 무려 20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영화의 대부분이 두 사람 간에 오간 편지글로 채워져 있으며, 긴 세월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영화 속 사건들에 당대의 역사 또한 고스란히 녹아 있어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랭크에게 보내는 헬레인의 편지
전 고전 작품을 즐겨 읽는 가난한 작가인데
이곳엔 제가 원하는 책이 없어요.
있어도 가격이 비싸죠.
찾고 있는 책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5달러 이하의 책이 있다면
이 편지를 주문서로 여기시고
그 책들을 제게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헬레인 헨프 드림.윤희에게(2019)
Moonlit Winter
ⓒ 네이버 영화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 나도 네 꿈을 꿔.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김소혜, 나카무라 유코 등
장르: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105분
"윤희에게, 잘 지내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데…
여러 단편영화들을 통해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임대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두 번째 장편영화.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굵직한 내공을 보이고 있는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가 주연으로 함께했으며, 개봉 이래로 팬덤 '만월단'까지 만들어내며 호평일색을 받았다. 국내의 여러 퀴어 영화들 중에서도 젊은 세대가 아닌 부모 세대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장점이다.
윤희에게 보내는 쥰의 편지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 네이버 영화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
감독: 데이비드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등
장르: 판타지, 멜로/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166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뉴올리언스, 80세의 외모를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버튼. 부모에게 버려져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던 그는 자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12살이 되어 60대의 외모를 가지게 된 그는 어느 날 6살 소녀 데이지를 만난 후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잊지 못하게 된다. 청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간 벤자민은 숙녀가 된 데이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비로소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벤자민은 날마다 젊어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가는데…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집필한 단편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을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아름다운 영상미와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작품이다.
딸에게 보내는 벤자민의 편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너무 늦은 건 없단다.
내 경우엔, 너무 이른 건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꿈을 이루는 데 시간제한은 없단다.
원한다면 언제든 새롭게 시작해도 돼.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혹시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 바라마.캐롤(2016)
Carol
ⓒ 네이버 영화
단 한번, 겨우 전한 진심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등
장르: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118분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재능 있는 리플리>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범죄 소설의 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인 <소금의 값>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며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영화의 계절적 배경인 겨울만 되면 재상영을 할 정도로 국내 팬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테레즈에게 보내는 캐롤의 편지
우연이란 건 세상에 없어요.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에요.
차라리 일찍 이렇게 된 걸 감사히 여겨요.
당신도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그날이 오면, 그곳에서 당신을 반겨줄 나를 떠올려 줘요.
영원한 일출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삶과 함께.
하지만 그때까지는 만나지 않기로 해요.
난 할 일이 많아요. 당신은 훨씬 많겠죠.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요.
당신을 놓아줄게요.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헤어져야만 했던 캐롤과 테레즈.
그런데 이런 영화의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편지지 세트가 있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지금 바로 텀블벅에서 진행되고 있답니다.
바로 영화 취향 커머스 플랫폼 [클로저]에서 기획한 [클로저 투 캐롤] 프로젝트!
잠깐! [클로저]는 또 뭐고, [클로저 투 캐롤]은 또 뭐냐구요?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바~로 설명해 드릴게요!
[클로저]는 영화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만지고, 향을 맡고, 맛을 보기도 하며,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나누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영화로 발견하는 취향 커머스 플랫폼'이에요.
[클로저] 팀에게 <캐롤>은 선물 같은 작품이라고 해요.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갖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클로저 투 캐롤]은 클로저 팀의 이러한 마음을 듬뿍 담아서 구성품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특별하답니다. 영화 <캐롤>의 팬이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을 상품들을 지금 바로 소개해 드릴게요.
https://tumblbug.com/closertocarol
오늘도 유용한 정보가 되었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따뜻하고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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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34년으로 갈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쿵쿵 울리는 비트, 깜빡이는 조명과 함께 요란한 생일파티가 벌어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 날 잠에서 깨어 숙취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집이 아닌 집에 돌아가면 비키는 어제 입었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을 것이다. 둘 사이 대화는 없고, 다음 날과 또 그 다음 날도 이들은 계속 이 집에만 살고 음악만 듣고, 담배를 피우기만 할 것이다.
비키는 노동조차 클럽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그곳은 파티장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하오하오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한다면서 서로에게 관심은 없다. 그래도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은 집에 붙어 산다. 오늘과 내일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 버리고, 밤 밖에 남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밤, 마시고 피우고 일어나면 또 밤이다. 비키는 멍해져 있다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마주하고, 점점 해가 뜰 때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해가 뜨면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밤에 번 돈을 생존에 다 써야 하고, 전날 마신 것을 게워 내야 하고, 훔친 물건을 물어내야 한다. 영화의 후반에 가서야 그녀는 말한다. “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그러나 관객은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안다. 떠나는 것.
비키가 자유가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90년대의 낭만, 음악, 술과 마약도 다 흰 눈에 덮여 사라진다. 그녀는 90년대를 떠나 겨울로 갔다. 그리고 무사히 2011년에 도착했다. <밀레니엄 맘보>가 낭만으로 남아 반짝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거기에 도착하여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서사시나 스펙터클이 아니라, 한 세대가 통과해 나온 터널처럼 보인다. 비키는 통과해 나왔지만, 돈도 음악도 뭣도 선택 못하는 하오하오는 낭만 속에 빠져 허덕이다 그 안에 영영 갇혔을지도 모른다. 혹은 몸만 2011년으로 옮겨와 회의주의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밀레니엄 맘보>의 색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2024년의 관객이 결코 쥘 수 없는 멋진 낭만이다. 그리고 우리가 겨울로 나아가든, 24년도에 갇혀 있든 계속 달아오른 채 깜빡일 과거의 불빛이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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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과정보다 결과로 말하는 걸까
지난 3월 - 화창하지만 약속 없는 토요일에, 모처럼 일찍 눈이 떠졌다. 당당히 나와 놀아주는 날을 오랜만에 시전 했다. 평온한 요가 타임을 거쳐,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서점으로 갔다가 내 아지트인 한글 책 서점이 공간 재정비 중임을 깨닫고 근처의 영화관으로 향했다. 보고 싶었던 영화는 에드리언 브로디 배우 주연의 '브루탈리스트 : The Brutalist'. 아카데미 시즌이기도 해서 봤던 콘클라베 (Conclave : 나는 '브루탈리스트'를 보기 전에는 콘클라베의 랄프 파인즈가 남우 주연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측했다!)를 어쩌다 보니 두 번이나 봤고, 데미 무어의 화제작 서브스탄스(Substance)도 출장 중에 비행기 안에서 봤던 터라 시간도 맞고 볼 만한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송구한 러닝 타임의 (총 3시간 35분, 인터미션이 15분 정도 포함되어 있고 이 마저도 영화의 일부다) 긴 장편 영화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건축 사조를 일컫는 말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남자 주연배우가 연기했던 2003년작 영화 '피아니스트'를 너무 좋아해서, 비슷한 전쟁 배경에 그가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었다. 위키피디아에는 이 영화를 다음 단락의 인용문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사조는 흔히들 잘 아는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사용하는 빛, 물, 콘크리트 등을 전반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만든 북해도의 교회는 못 가봤지만, 최근 서울 마곡나루에 생긴 LG 아트센터는 가 봤다. 지하철에서 센터로 연결되는 동굴 같은 구조를 그가 설계한 것이라고 하던데, 새로운 세계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의 시작도 그러하다. 헝가리에서 취조를 받는 그의 조카 조피아와 상반되게,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에드리언 브로디 분)는 미국 망명에 성공하며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보여준다. 거꾸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헝가리인 건축가가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제목의 브루탈리스트는 건축 사조 브루탈리즘을 따르는 주인공을 의미한다."
라즐로는 망명 뒤, 미국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사창가를 거쳐 (여기서 영화가 21세 미만 관람 불가인 점과, 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영화 전반에 걸쳐 인간의 영혼에 각인한 상처를 표현하는 도구로 쓰이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복선과도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사촌인 아틸라가 정착한 필라델피아로 향한다. 그리고 아틸라부부가 운영하는 가구점 쇼케이스 뒤편에 위치한 작은 창고 같은 방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한다. 그들은 라즐로를 위하는 척 하지만, 당연히 그가 아내인 에르자벳과 조피아도 망명시키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타박을 준다. 아틸라의 가구점 고객인 부유한 뷰렌가 자택의 독서실 개조 프로젝트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초과된 예산 때문에 외래 쫓겨나는 라즐로. 믿을 자 없는 타지 생활에서 노숙자 숙소와 건축 잡부 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독서실의 주인인 뷰렌이 찾아와 그의 재능을 사고 싶다고 한다. 온갖 아름다운 것을 탐닉하는 부자인 그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지만..
뷰렌의 부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마약과 술, 담배에 찌든 그러나 건축가적인 재능으로 빛나던 라즐로에게 뷰렌은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교회 겸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그의 도움으로 에르제벳과 조피아의 망명도 성공하고, 그는 뷰렌가의 집에 세 들어 살며 건축 설계도를 완성해 나간다. 전쟁의 상처로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에르제벳은 옥스퍼드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재원으로 저널리스트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모든 면에서 우월함을 대화로 표출하려는 뷰렌과, 자신들이 믿는 가치만으로 아름다운 라즐로와 에르제벳 부부.
이들에게 닥친 시련은 뷰렌이 운영하는 철도 운송회사에서 건축 자재를 수송하다가 큰 사고가 난 다음, 해고된 것이다. 돈 앞에서 미학적인 가치를 단숨에 내던지는 사람과, 역시 자신의 믿음 속에서 일해 나가는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상반된다. 몇 년 뒤에 뷰렌은 다시 이들을 불러들여서 건물을 완성시키고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부부에게는 전쟁이 준 상흔과 미국 생활의 고단함에 지쳐가는 시절이었고, 감정의 대폭발은 뷰렌이 라즐로를 '강간'하는 과정에서 터진다. 라즐로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코가 부러졌지만 치료를 못하고 대마에 의존하며 미국으로 망명했고, 에르제벳 또한 전쟁 수용소에서 수차례 성고문/폭행당해 휠체어에 의지해왔을 몸으로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틀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대마를 통해, 강간을 당하며 다시금 상처를 열어젖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끝에 과연 라즐로가 설계한, 태양 빛에 따라 십자가가 내부 대리석에 반사되는 교회당의 건물이 완성될 것인가? 라즐로는 유대계이며 그가 설계한 건물은 그 완성으로 인해 그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게 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조카인 조피아의 입을 빌려서 말이다. 영화의 끝에서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판단은 관객의 몫.
나는 시오니즘 (zionism)이라는 말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무위키를 빌리면 이 단어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t) 운동이다. 시온(Zion)이란 원래 예루살렘 시가지 내의 언덕 이름으로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인의 땅을 의미한다'. 싱가포르에도 Zion Road라는 곳이 있으며 다양한 종교를 지원하는 나라 사정상 유대교가 존재할 것으로 사료된다.
영화에서도 라즐로가 유대교의 미사에 참여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나는 그가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민족성, 종교, 가치를 추구했기에 더 많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이 전쟁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듯이, 그리고 독립투사들이 아주 가혹히 지탄받았듯이 - 유대인인 그도 홀로코스트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는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상처받기 쉬운 유리그릇 같다. 부부에게는 아름다울 수 있는 '성' 행위 또한 전쟁 속에서는 너무나 잔혹한 폭력이다. 영화는 이런 아픔들을 표면에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건축물이나 대화,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 찾아오는 여운은 더 크고 아프다. 오늘도 인류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 상처 주고 싸우고 후에 그로 인해 고통받을지 어떨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양심 앞에서, 내가 믿는 가치 앞에서 떳떳한 마음으로, 당당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내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감사하면서도 마음 아팠던 영화의 기록과 나의 오늘을 적는다. 나는 과정이 중요한 사람인가, 결과가 중요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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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과 외면 사이
<퀴어(Queer)>(루카 구아다니노, 2024)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본문의 원작 인용들은 윌리엄 S. 버로스의 <퀴어> 2020년 번역본과 <정키> 2009년 번역본에서 가져옴 (모두 펭귄클래식 코리아 발행, 조동섭 옮김)
윌리엄 리와 윌리엄 리
안드레 예치먼이 <그해 여름, 손님>에서 엘리오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경험, 생각과 감정은 편견과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부모님도 완전한 안전지대는 아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엘리오의 심리나 올리버의 퀴어쉐임 등을 모호한 비언어적 표현에 함축하고 나머지는 미화하는 각색을 택한다. 영화의 엔딩, 모닥불 앞에 있는 엘리오가 회상하는 기억을 재현함에 가까워 보인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화면에는 풍화된 그대로 아름다운, 그 여름 두 사람이 본 유물 사진이 흐른다. 리와 유진의 흔적이 남은 소품을 나열하는 오프닝을 연출하는 <퀴어>는 언뜻 그와 유사한 방향을 따르려는 듯하다. 허나 그 사이에는 -윌리엄 버로스가 리의 공포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지네가 기어다닌다. 실제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미화된 기억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환상과 환각을 구현해 수면 아래의 모순된 상태와 정서를 드러내는 <퀴어>는 어쩌면 처음부터 나란히 두고 보기 어려운 영화들인지도 모른다.
“너 퀴어 아니지? You’re not queer, right?” 화면에 등장한 리가 가장 처음 뱉는 대사다. 이미 스스로 부정의 답을 짐작하는 의문문에 담긴 단어, “queer”, 영화 <퀴어>에 대해 말하려면 이 표현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 속 “퀴어”는 일단 게이를 일컫는 당시 멸칭,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보단 ‘남성과 늘 자고 싶어하는 (비정상적인)남성’에 가까운 뉘앙스의 말이다. 허나 모욕하고 공격하려는 의도로 밖에서 안으로 꽂히는 언어와, 내가 그렇다고 드러내기 위해 발화하는, 혹은 커뮤니티 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아주 같지는 않을 테다. 남들이 아무리 ‘퀴어’가 무엇이라 떠들어도, 퀴어로 정체화했거나 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개인 각각의 경험은 다른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니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윌리엄 리와 그 친구들이 자신과 주변인을 일컫는 “퀴어”는, 말하자면 수치심, 혐오, 자기학대, 갈망와 미세한 자긍심의 꼭짓점을 이은, 회전하고 변형되는 비대칭의 도형 가운데에 놓인 복잡한 정체성의 언어다. 이를테면 조는 남성들과 맺은 관계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자꾸 상대방이 물건을 훔쳐가게 (사실상) 내버려두고, ‘그린랜턴’의 “screaming fags”(이러한 표현들은 오히려 원작의 것을 순화한 편이다.)를 낮잡아 이른다. <퀴어>는 이런 상태와 감정, 역사를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출발해 리를 이해해보자. 거의 모든 배경음악은 리의 심리를 반영한다. ‘이래서 퀴어와는 친구하기 어렵다’던 두 남자의 뒷말 후 늘어지던 음울한 음악은 곧 ‘Come As You Are’(Nirvana)로 이어진다. 이 강렬한 곡이 유진과 마주치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까닭은, 그 찰나의 경험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번져 리를 물들여서다. 유진과 함께 걷던 도중 흘러나오던 재즈(변주가 많은, 틀린 음은 없다는)는 리가 거실 전등을 켜자마자 뚝 끊겨버린다. 리가 테이블에 도구를 늘어놓고 익숙하게 약물을 준비하는 긴 숏에서 흐르는 것도 처음엔 정적이다. 약을 주사하면 들리는 것은 ‘Leave Me Alone’(New Order). (흥미롭게도 <본즈 앤 올>이 뉴 오더의 전신 조이 디비젼의 ‘Atmosphere’를 삽입한 것과는 사뭇 구별되는 쓰임이다.) 화면 사이드에 우울하게 머무르던 리의 얼굴이 컷된 후 뒤따르는 건 술병과 잡동사니가 널린 거실 전경. 인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밀어내는, 자신을 돌보기를 거부하는 상태. 리의 손이 늘 지저분한 건 단지 ‘중독자라서 물을 기피하는 탓’(-<정키>)만은 아니다. 그가 자주 장황한 스토리텔링을 전시하는 건 나르시시즘보단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그가 뱉은 “homosexual”을 듣고 옆 테이블 여성이 기겁하는- 리는 그런 취급을 유도하며 자신을 공격한다. 한편으로 그는 교감을 바란다. 리가 ‘보보’를 인용한, “지식과 성실과 사랑으로 편견과 무지와 증오를 극복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원작에서 보보의 끔찍한 죽음에 관한 묘사로 이어진다. 그 묘사를 잘라내고 인용하는 영화 <퀴어>가 다다르는 곳은 버로스의 자학적 ‘공연 무대’도 아니고 <네이키드 런치>(1991)가 같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끄는 장소와도 다르다.
윌리엄 버로스가 쓴 ‘대사’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가져온 <퀴어>가 추측하거나 각색하는 중요한 지점은 리와 유진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다. 먼저 버로스 자신은 리의 사랑을 의심했고 유진은 애초에 퀴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1985년에 덧붙인 프롤로그에서 유진을 “유령 같은 존재”, 리가 고른 “실패할 대상”으로 묘사한다. “리가 앨러턴에게서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 “앨러턴은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들에 찬성하는 뮤즈의 역할을 떠안은 채 그 안에서 당연히 불편해한다.” 버로스는 리의 갈망은 사실 유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적는다.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성적 접촉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리는)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p.14~19)
<퀴어> 이전 리의 약물 중독을 다룬 <정키>에서 버로스는 동성애를 은근히 그리고 꾸준히 약물 중독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지 않는 무리’를 관찰하듯 서술된 이 경멸들은 반사돼 그 자신을 겨냥하는 것처럼 읽힌다. 영화 <퀴어>, 리의 어떤 환각에는 팔에 주사를 꽂은 여성의 나체 상반신이 등장한다. 리의 손이 몸을 쓰다듬자 그는 비웃으며 묻는다, “당신 퀴어 아니야?”, 리의 손은 답한다, “난 퀴어가 아니야, 그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지.just disembodied.” 자신을 퀴어라고 전시하는 리는 내심 성적인 이끌림을 “정신과 분리된” 육체적 욕구로 좁혀 인식하며 약물중독에 비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는 사랑을 느끼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제 사랑을 의심하고 그것을 깎아내리는, 모순된 상태에 놓여 있다. 초반 영화는 펍에서 조의 이야기를 듣던 리가 홀로그램화되는 초현실적 연출을 넣은 바 있었다. 이 꾸준한 disembodiment의 감각에 숨은 심리는 버로스 자신의 글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정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약의 효과는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 어쩌면 나는 내가 마약과 대마초와 코카인에서 찾고 있었던 것을 야헤에서 찾을지도 모르겠다.”(<정키>, p.258) 구아다니노와 커리스케츠는 이 모호한 서술에 닿아 있는- 리의 동성애가 약물중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기성사회가 비정상으로 낙인찍은 자신을 달리 바라보려는 시도,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의 발현 중 하나가 약물 사용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다시 오프닝 크레딧으로 돌아가면, 그 마무리에 리가 쓴 글은 삼차원의 반투명한 결정으로 형상화된다. 평면 종이에 쓰인 소설 결말부에 위치한 입체적 미궁, 스스로도 ‘<퀴어>를 쓴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다’는 버로스의 고백, 영화 <퀴어>는 그런 실마리들을 발견하고 풀어내, 리와 유진을 어쩌면 원작자가 의도한 바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으나 그의 무의식과는 포개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물들로 재구성하고 있다. ‘퀴토에서 산 단검을 갈러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린’(p.23) 버로스의 경험을 영화는 나체 여성 이전에 배치된 꿈 안에 레퍼런스한다. 하지만 버로스가 유진을 바로 그 (리가 자신을 찌르는) 칼에 비유했던 반면, 영화에서 리의 꿈은 상징들을 경유해 유진의 얼굴로 수렴한다.
<퀴어>(2024)
윌리엄 리와 유진 앨러턴
<퀴어>의 베드신들은 리의 심리, 리와 유진의 관계 역학을 드러낸다. 전갈 목걸이를 한 젊은 남자는 리를 바라보며 옷을 벗지만, 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옷을 벗는다. 섹스 후 남자가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리는 주저하며 몰래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가 다시 넣는다. 남자는 인사를 건넨 후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간다. 서로 원해서 보낸 하룻밤인데 리는 상대방과 자신이 동등하지 않다고 느낀다. 첫눈에 반한 유진을 대할 때도 이런 감각은 늘 자리한다. 리는 유진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유진은 나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어느 정도 단정한다. ‘유진을 어루만지는 상상의 손길’은 이미 일부 단념한 와중 어쩌지 못하는 이끌림을 시각화한다. 이들이 실제로 닿는, 유진이 리에게 기꺼이 응하는 섹스들은 유진이 술이나 잠에 취해 있을 때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첫 베드신엔 이들의 관계 역학이 묻어난다. 리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오럴 섹스를 해주는 반면, 유진은 리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애무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유진이 담배를 물자 리가 성냥을 긋고, 유진이 리의 바지 지퍼를 천천히 열면, 얼어 있던 리가 끝까지 탄 성냥을 서둘러 끈다. 리는 늘 어쩔 줄 모르고, 먼저 스킨십을 주도하더라도 유진의 눈치를 보며 불붙인 성냥을 쥔 듯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른 장면에서 유진은 리가 키스하려 하자 초연하게 응한다.(“If you insist.”) 이들이 키스한 직후 영화는 행위의 묘사를 생략하고 리가 기다리는 가운데 유진이 이를 닦는 숏으로 넘어간다. 리와 키스했기 때문에 이를 닦는 듯한 편집, 이는 아마도 리의 관점이다. 여행중 관계 후 “너도 이 모든 걸 조금은 즐기는 거지?”라고 물으며 흐느끼는 리와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답하며 몽롱하게 미소짓는 유진, 영화는 그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맞닿은 시선을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마주놓인 얼굴들은 어쩐지 어긋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나눈’ 후에 리는 늘 유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하지만 유진은 둘만의 공간을 기피하거나 리의 손을 걷어내곤 한다.
허면 리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유진 앨러턴은 무엇을 느끼는가. 앞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대부분 미화된 엘리오의 기억이라고 적었다. 허나 영화에는 그 ‘대부분’에 해당하지 않는, 엘리오의 시선 사각지대에 머무는 올리버의 순간들이 있다. 올리버, 그리고 <본즈 앤 올>의 리, 이들은 일인칭의 소설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상대방의 자리를 얻는다. 약혼으로 인해 관계는 종료되지만 올리버는 엘리오의 기억으로 흡수되고, 자신의 요청으로 먹힌 리는 매런 안에 상징적으로 살아남는다. 리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지는 <퀴어>의 유진은 이들과도 구별되는 위치에 있다. 전지적 작가가 서술하는 원작의 유진은 리가 그 심리를 파악하는 자, 리의 반영이고 자기학대 수단이었던 반면, 영화 속 유진은 모를 존재다.
앞서 언급한 첫 베드신엔 다른 포착도 있다. 리는 유진이 침대 가에 놓아둔 안경을 저도모르게 떨어뜨리게 만드는 자다. 영화는 이렇듯 작은 언행들을 섬세하게 각색하고 추가하며 원작과 별개의 유진을 쉐이핑한다. 원작 속 여행 중에 찾은 해변에서 유진은 물에 들어가길 거부하지만, 영화에서 누워 있는 리를 물로 끌어들이는 건 유진이다. 원작에서 리가 춥지 않냐고 묻자 유진은 춥다고 답한 후 (자신도 추우므로, 마지못해) 곁으로 오라고 하지만, 영화에서 유진은 춥지 않음에도 리를 곁에 오게 해준다. 저절로 움직인 다리로 건드리는 안경, 미처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 언어로 설명되지 않고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찰나들을 영화는 포착한다. 유진이 리를 만날 때 곧잘 느끼는, “기분이 나쁜데도 그 이유를 꼬집을 수 없는”(p.47) 상태를 영화는 리의 탓이 아니라고 재해석한다. 리에 대한 유진의 맞사랑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단, 유진이 계속해서 낯선 감각을 느끼면서도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육체이탈/불일치”로 투명해지는 느낌, 그것은 야헤를 흡입한 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보는 리와 유진에게서도 관찰된다. 유진 역시 리에게 “Lee, I’m not queer, just disembodied.”라고 말한다. 이것은 리의 내면의 반사일까, 아니면 리가 겪은 것과 유사한- 유진의 모순된 심리일까. 시청각이 차단된 채 춤추는 그들을 담는 화면에는 다만 시각화된 촉각만이 남는다. 살이 엉겨붙고 유기체처럼 움직여, 이내 각자의 심장을 뱉어낸 두 사람은 심장 모양으로 웅크린 한 덩어리가 된다. 이 “talking without speaking”은 앞서 바다에 들어간 두 사람이 물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접촉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 직후 베드씬을 삽입했고, 그 다음으로는 유진이 리를 밀쳐내는 상황을 이은 바 있었다. 이 흐름처럼, 야헤에서 깨어난 리가 눈물을 흘리며 유진을 부르자 유진은 ‘자라’며 대화를 차단한다. 유진의 감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리에게 닿지 못한다. 유진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은 그의 시점숏도, 텔레파시 고백도, 어쩌면 그들의 초현실적 댄스조차 아니다. “네가 어젯밤 널 봤어야 했는데”라며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닥터 코터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 늘 여유로운 미소만 짓던 그가 불안과 경계심을 내비치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퀴어>가 원작을 초월해 짐작한 유진의 솔직한 ‘목소리’다. 영화는 무방비한 유진을 잠깐 화면에 묶어두었다가 이내 놓아준다. 정글에서의 모호한 분리 이후 등장하는 유진 혹은 유진에 관한 말들은 실제의 유진이 아니다.
본인조차 스스로를 완전히 모르는 자이기에, 유진은 무언가의 투영이 아닌 온전한 상대방이다. 그는 리의 환상이 건축한 폐쇄된 공간에서 리가 쏜 총에 맞아 죽고 나서조차 증발한다. 허나 좀처럼 파악되지 않던 상대방이 건넨 실제의 터치 하나, 그것만은 리에게 남는다. <퀴어>가 주목하는, ‘리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촉각은 오히려 성적인 의도가 그다지 없는 접촉에 의한 것이다. 금단현상 탓에 덜덜 떨던 리의 가장 못난 찰나를 감쌌던 유진의 다리. 남성들과 맺는 관계를 일종의 ‘중독’과 연결지었던 리의, (애초에 분리돼 있지 않았던)‘정신’과 ‘육체’를 이어주는 매개가 그 사소한 접촉이었던 게 아닐까. 화면에서 사라진 유진 안에 어떤 감각이 살아남아 있을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퀴어>의 엔딩은 리에게 있어서는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고, 유진에게는 열려 있다. “한 번 문을 열면 돌이킬 수 없어. 외면하는 수밖엔 없지.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어?But why would you?”(-코터) 어떤 ‘인정’은 안락함에서 벗어나는, 불편함을 응시하는 행위다. 사랑과 욕망을 인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고 부정하게 되는 리와, 감정과 정체성을 외면하기에 편안하게 존재하는 동시에 ‘까닭없이 불편해지곤’ 하는 유진, 일치와 불일치 사이 간극에서 방황하는 두 인물을 탐구하는 <퀴어>는 사실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 영화가 아닐까.
<퀴어>(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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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대보름에 보기 좋은 '달' 관련 영화 추천
안녕하세요 여러분!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바쁘게 달려온 한 주를 뒤로하고, 어느새 기다리던 주말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이번주 일요일이 어떤 날인지 알고 계셨나요?
저는 깜박 잊고 있었는데, 이번주 일요일은 바로 한국의 전통 명절 중 하나인 정월대보름이에요!
음력 1월 15일을 의미하는 정월대보름은 오늘날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지만, 우리 조상들은 정월 대보름 이튿날을 실질적인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명절이라고 해요.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운수를 점쳤던 것도 설이 아닌 정월 대보름이었다고 하네요.
오늘은 그래서 정월대보름에 보기 좋은 '달'과 관련된 영화들을 추천해 드리려고 해요.
달을 배경으로 했거나 달을 소재로 한 영화들, 지금 바로 만나 보실게요~!
1. 달세계 여행(1902)
감독 | 조르주 멜리에스
출연 | 조르주 멜리에스, 빅토르 안드레, 블로에 베논 등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바르방퓨이 교수는 어느날 과학의회를 통해 대포를 타고 달 탐사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설득 끝에 다함께 달 탐사를 떠나게 되고, 마침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달에 착륙하게 된다. 그러나 달에는 셀레나이트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교수와 일행은 그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CINE PICK!
인간이 달에 최초로 착륙하기 무려 60년 전에 제작된 <달세계 여행>은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원작으로 하여,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조르주 멜리에스가 감독, 각본, 주연을 모두 맡아 만든 영화입니다. 마술사였던 멜리에스는 뛰어난 상상력과 손재주를 바탕으로 합성화면이나 디졸브와 같이 후에 널리 사용하게 되는 편집방법들을 컴퓨터 작업 없이 연극 장치만으로 만들어 냈는데요, 그 결과 영화는 최초의 낭만주의 영화, 최초의 SF 영화, 방향의 일치를 통한 연속 컷팅을 최초로 사용한 영화 등 각종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거머쥐며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2분 정도의 단편영화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14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또한 매우 큰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2. E.T.(1984)
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 헨리 토마스, 드류 베리모어, 로버트 맥노튼 등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식물학자 외계인들이 평화적인 연구 목적으로 지구를 방문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나타나자 서둘러 지구를 떠나게 되고, 뒤쳐진 한 외계인이 홀로 남는다. 방황하던 외계인은 엘리엇이라는 이름의 꼬마와 만나게 되고, 엘리엇은 외계인에게 E.T.(Extra-Terrestrial)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E.T.는 엘리엇과 함께 지내며 끈끈한 우정을 쌓아 나가지만, 길어지는 지구에서의 생활로 인해 그만 병에 걸리고 만다.
CINE PICK!
<E.T.>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2년 SF 영화입니다. 홀로 지구에 남게 된 외계인 E.T.와 미국 소년, 소녀들과의 우정어린 교류를 감동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받았는데요, 자전거를 타고 만월을 가로지르며 하늘을 나는 장면은 두고 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지요. 개봉한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친근한 이미지의 외계인, 혹은 인간과 교류하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떠올렸을 때 바로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음악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잘 맞춘 OST 또한 <E.T>의 큰 매력이랍니다.
3. 문라이트(2017)
감독 | 베리 젠킨스
출연 | 알렉스 R. 히버트, 에쉬튼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 마허샬라 알리 등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달빛 아래 검은 소년들은 푸르게 보인다."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푸르도록 치명적인 사랑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CINE PICK!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문라이트>는 베리 젠킨스 감독이 전작 <멜랑콜리의 묘약> 이후 8년만에 연출한 작품으로,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의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원작으로 했다고 합니다.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마약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1970년대~80년대에 태어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샤이론의 생애를 어린 시절, 청소년기, 성인기 세 부분으로 나눠 묘사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감각적인 연출과 인물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4. 퍼스트맨(2018)
감독 | 데이미언 셔젤
출연 | 라이언 고슬링, 클레어 포이 등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이제껏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도전한 우주비행사 닐(라이언 고슬링)은, 거대한 위험 속에서 극한의 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전 세계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 이제, 세계는 달라질 것이다.
CINE PICK!
영화 <퍼스트맨>은 <위플래쉬>, <라라랜드>, 그리고 최근 개봉한 영화 <바빌론>의 감독 데미언 샤젤이 연출한 닐 암스트롱의 전기 드라마 영화입니다. 제임스 R. 한센의 전기 소설 《First Man: The Life of Neil A. Armstrong》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다녀왔던 우주인 닐 암스트롱의 1961년~1969년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을 거머쥐기도 했는데요, 과학영화라기보다는 인간 암스트롱의 이야기와 심리가 샤젤 감독 특유의 뛰어난 연출력과 각본을 통해 탄생한 완성도 높은 드라마 영화입니다. 감독의 전작인 <라라랜드>의 음악을 감독했던 저스틴 허위츠와 다시 한 번 협업하여 OST 또한 큰 호평을 받았으며, 주연 배우인 라이언 고슬링이 그리는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이니 잔잔하지만 울림 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5. 더 배트맨(2022)
감독 | 맷 리브스
출연 | 로버트 패틴슨, 폴 다노, 조 크라비츠, 앤디 서키스 등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고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담의 엘리트 집단을 목표로 잔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가 나타나자, 최고의 탐정 배트맨이 수사에 나서고 남겨진 단서를 풀어가며 캣우먼, 펭귄, 카마인 팔코네, 리들러를 차례대로 만난다. 사이코 범인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면서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고, 리들러에게 농락 당한 배트맨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웅과 악당, 정의와 복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CINE PICK!
어두운 밤에 활동하는 히어로 배트맨! 달과 관련된 영화를 떠올렸을 때 빼놓을 수 없죠. 배트맨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 작품인 <더 배트맨>은 <렛 미 인>, <혹성탈출: 종의 전쟁> 등을 감독한 맷 리브스가 연출하였으며, 각종 예술영화와 블록버스터를 넘나들며 필모를 쌓고 있는 로버트 패틴슨이 브루스 웨인을 맡은 <더 배트맨 시리즈>의 첫번째 영화입니다. <더 배트맨>은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전개와 차별되는 느긋하고 묵직한 누아르식 전개가 특징인데요, 배트맨 원작이 갖고 있는 추리물로써의 정체성, 배트맨 캐릭터에 대한 미숙하면서도 희망을 지키려는 인물로써의 재해석이 호평을 얻었습니다.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와 꼭 맞아떨어지는 OST 또한 인기였습니다. 시작과 끝에 흘러나오는 미국의 전설적인 락밴드 너바나의 <Something in the Way>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흥얼거리게 된다는 것!
정월대보름을 맞아 달과 관련된 영화를 여러 편 소개해 드렸습니다!
마침 이번주 일요일은 하늘도 무척 맑다고 하니 소중한 사람과 달구경도 하고,
정월대보름이니 만큼 팝콘 대신 부럼을 까먹으며 화면 가득 둥근 달을 감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따뜻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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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미 지구는 종말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너희들을 위해
스포일러 있습니다!
감독 : 라두 주데
출연진 : 일린카 마놀라케. 니나 호스 외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이 영화의 주인공 안젤라는 루마니아의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오늘도 취재에 여념이 없는 안젤라.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에 정신이 없다. 시내 밤낮을 누비는 안젤라. 직장 상사가 전화로 쪼아대고 있다. 누구는 열심히 일 안 하나? 일상의 대부분을 운전하는데 쓰고 있다. 안젤라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직장에서 산업 안전 영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손가락이 없고 또 어디를 다쳤고 하는 사연이 안젤라의 귀에 들어온다.
사실 안젤라는 이런저런 일들에 관심이 없다. 모름지기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다. 손가락 다친 남자에게 ‘안전모는 똑바로 썼냐’라는 질문만 할 뿐이다. 쌓이는 스트레스들. 안젤라가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부캐’를 만드는 것이다. 안젤라는 며칠 전부터 틱톡에서 조회수를 꽤나 끄는 소셜 미디어 스타였다. 닉네임은 보비타. 안젤라는 머리가 대머리가 되고 눈썹이 진해지는 필터를 사용해서 우악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영화는 안젤라/보비타를 설명한다. 그리고 안젤라가 직접 에세이를 쓴 것처럼 그녀의 일상을 조명한다.
유려하지 않은 수필을 쓰듯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라두 주데는 전작 <배드 럭 뱅잉>부터 에세이 같은 시네마를 고수했다. 수필 같은 시네마라는 뜻은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이 일반적인 이라고 함은 1,2,3막으로 구성되거나 기-승-전-결로 짜인 이야기를 뜻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선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그럼 인물에게 투영된 욕망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영화들은 이 문제에 부지런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와 해준의 욕망은 분명하다. 서래는 살인 용의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해준은 권태로운 일상이 지겨웠다. 하다못해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욕망은 분명하다. <물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우리의 하루>에서 시인 의주는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이야기 구조를 쓰지 않는 홍상수 감독마저도 이 ‘욕망’이라고 한 것에 집중한 것이다.
<배드 럭 뱅잉>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주인공의 욕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의 욕망은 인물들이 자기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 <배드 럭 뱅잉>에는 부부끼리 찍은 포르노가 인터넷에 유출되고 난 다음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후자는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 심한 직장인 안젤라가 중심이다. 이런 기본적인 설정을 생각해 보면 감독이 주인공의 욕망을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 포르노사이트를 고발하거나 직장상사에게 응징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당연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감독의 분신으로서 제작자의 욕망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됐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두 주데의 영화와 에세이가 공통점을 가진다. 에세이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담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공이 ‘나’가 아닌 작가의 지인일 수도 있다. 라두 주데는 이 접근법을 사용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이야기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쓰는 것이다. 이 감독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활용된다. <배드 럭 뱅잉>의 형식이 그랬고, 이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을 보여주고 이 세계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실제로 두 영화의 형식이 흥미롭다. <배드 럭 뱅잉>에서 1부는 주인공의 일상만 보여주고 대단한 문제해결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2부는 이야기의 흐름만 본다면 1,3부와 관련이 없다(하지만 영화 내적으로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3부는 영화의 엔딩을 연이어 보여준다. 직선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주인공 안젤라가 처한 상황을 미디어의 병폐를 묘사하기 위한 준비물로 사용한다. 가령 안젤라 서사에서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인물이 있다. 1부에서 주인공 안젤라는 흑백처리되어 있다. 반대로 1970년대로 돌아가 안젤라와 입장이 비슷했던 택시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이 택시기사가 굳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 택시기사가 등장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감독이 루마니아의 노동 실태를 꼬집으며 ‘과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떤 것이 변했는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두 주데는 영화 안에 넣고 싶은 것들을 최대치로 욱여넣었다. 현상을 꼬집기 위해 인과관계가 확실한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대신 곁가지를 중심에다 붙였다. 이 곁가지가 문제 원인을 얼마나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느냐가 영화 형식의 핵심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니나 호스가 맡은 마케팅 디렉터 역할이 후반부에 등장한다. 줌(zoom) 비대면 화상회의를 진행한다. 이 화상회의는 매끄럽지 못했다. 화면이 일그러진다. 이 인물은 심지어 중요하지도 않다. 단순히 웃기려고 이 인물을 넣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또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보비라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안젤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비라로 변신한다. 이 변신한다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혐오 발언을 굳이 반복해서 넣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보비라가 혐오 발언을 분출하는 플랫폼은 또 어디인가? 틱톡이다. 이런 요소들이 이야기의 문제해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설정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또 차 운전하는 모습은 수도 없이 나온다. 하이라이트로 기능하는 엔딩신도 이와 비슷하다. 심지어 중반부에 들어가는 십자가라는 소재도 글쓴이는 개연성을 뭉개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와 이게 여기서 들어가네' 싶어서 감탄했다. 온갖 요소들이 들어가되 그것들이 이야기에서 소모적이지 않은 것이다.
안전모는 끼셨나요
영화가 담고 있는 두 가지 현실이 흥미롭다. 첫 번째로 틱톡이다. 보비라가 왜 틱톡커인가라는 점에서 더 자세한 걸 살펴보면 깊게 알 수 있다. 이 카메라는 안젤라가 여성인 걸 숨기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 숨기는 과정이 절대 정교하지 않다. 필터가 풀렸다가 적용됐다가 번갈아가며 묘사한다. 사회문제에 대해 저열한 메시지를 뿜어대는 인물이더라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비라가 하는 여성 혐오적 메시지도 틱톡에 최적화되어 있다. 만약 보비라의 멘트가 120분짜리 장편영화로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100명쯤 봐도 많은 축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세한 것을 따지기 이전에 기본적인 인과관계만 봐도 영화의 핵심을 알 수 있다. 보비라가 왜 틱톡커일까? 안젤라가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니까 분출하고 싶어서다. 이 인과관계만 봐도 틱톡커라고 설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불에 기름 뿌리듯 커지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가 자극적인 메신저와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사회 구조가 서로 이어져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틱톡커'라는 비유는 안젤라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적용된다. 하이라이트 신에서 안젤라는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고 조종한다. 우리가 아는 정보마저도 어떤 이의 이해관계를 위해 곡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안젤라가 '나 보비라야!' 하면서 지나간다. 영화에서 보비라가 저열한 메시지를 드러낸다는 점을 본다면 전문가의 손을 거친 뉴스마저도 맹신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영화에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이유나 뤼미에르의 영화가 삽입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여과 없는 순수한 자료처럼 보이지만 현대사회의 많은 것들은 이해관계에 의해 편집됐다는 관점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다음 현실은 '안전모는 끼셨나요?'다. 영화가 기묘하게 품고 있는 남 탓이 있다. 이 영화가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의 착취 문제다. 실제로 안젤라가 취재하는 첫 번째 가족은 추가근무 동안 손가락을 다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답으로 '안전모는 끼셨나요?'라고 답한다. 손가락을 다쳤는데 안전모를 꼈나 묻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도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영화의 핵심이다. 문제의 원인과 잘못된 해결이 영화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16시간 동안 일만 하는 안젤라에게 '커피나 마셔라'라고 답하는, 현재 노동시장에서 벌어질만한 일들을 빠짐없이 묘사한다. 이 모티브를 염두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모티브는 이야기의 동력으로서 난잡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난잡할 수밖에 없는 극의 분위기가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걸 찾아본다면 집착에 가깝게 감독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4k/휴대폰 액정/카메라/방송국/소셜 미디어 가릴 것 없이 '문제의식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거나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망가지고 있다'는 조롱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지만 영화의 색다른 측면에서의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의 형식만으로도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웃긴 건 덤이었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는 10월 11일 오후 4시 30분에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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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1월 4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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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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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이후 7년 만의 만남! 신세계 2편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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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박정민'추격자' '황해' '내가 살인범이다'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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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성 미술감독#다만악에서구하소서 #다만악에서 #다만악에서구하소서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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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문자> 예고편
27살의 일리야 고류노프는 감옥에 수감된 동안 줄곧 자신을 수감시킨 러시아 연방 마약통제반의 젊은 장교 표트르 하진과 대면하길 꿈꿔왔다.
일리야는 어머니, 여자친구, 그리고 절친한 친구가 그를 집에서 맞이하기를 기대했지만,
그가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가 원하던 삶은 파괴되었고 일상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표트르와의 만남에서 일리야는 성급한 행동을 취하고,
그의 스마트폰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표트르의 사진과 동영상, 부모님과 여자친구 니나와의 문자, 위협과 암시로 가득찬 동료들과의 이상한 문자가 가득하다.
잠시 동안 모든 사람들은 핸드폰 문자를 통해 일리야가 표트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