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rewr2025-06-13 07:44:50

금기를 위반하는 '낙오자 연대'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1.jpeg7★/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모든 혁명가가 감옥에 갇힌 사회에서는 감옥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유가 피어오른다. 이 영화에서 감옥에 갇힌 음악가들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합창하는 것처럼. ‘샤라비’는 음악이 금지된 사회다. 완전한 금지는 아니다. 모든 곰은 단 하나의 음으로만 연주할 수 있다. ‘도’ 이외의 음계를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곰은 모두 경찰에 체포된다. 다른 음계는 모두 반역이다. 당연히 감옥은 미어터질 것이다. 그러나 ‘반란 분자’들이 한데 모인 곳에서는 종종 통치자의 의지를 거스르는 사건이 발생하고는 한다. 법과 경찰력을 주요 통치 수단으로 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모순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게 모든 불순분자가 모여 무슨 꿍꿍이를 벌일지 모를 장을 제공한다는 데 말이다.

 

 

 

2.jpeg

 

 

 

  곰 어네스트와 쥐 셀레스틴은 절친한 친구 사이다. 이들은 어네스트가 거리에서 연주하고 받은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셀레스틴이 실수로 어네스트의 바이올린을 망가뜨리고 만다. 어네스트의 고향 샤라비에 있는 바이올린 장인만이 망가진 바이올린을 고칠 수 있다. 그래서 두 동물은 샤라비로 향한다. 그러나 샤라비는 어네스트의 기억과 많이 달라진 상태다. 음악을 자유롭게 즐기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음악하는 자들을 모두 체포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네스트는 이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자신이 가정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샤라비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현실을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어제까지는 음악을 즐겼더라도, 오늘부터 법이 음악을 금지한다면 음악을 멈춰야만 한다. 그런데 음악 금지법은 도대체 왜 생긴 걸까? 어네스트가 가업을 잇기를 거부해서다. 어네스트의 선조는 대대로 판사로 일했다. 어네스트도 당연히 판사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샤라비에서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니까. 하지만 어네스트는 부계의 운명을 거부하고 음악가로 살기로 결심한 후 샤라비를 떠났고, 이후 샤라비에는 어네스트에 대한 괘씸죄로 음악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3.jpeg

 

 

 

  샤라비의 변화를 목격한 어네스트는 괴롭다. 그냥 자신이 포기하고 가업을 이었다면 샤라비는 음악을 계속 즐길 수 있었을 테고, 그토록 많은 곰이 투옥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네스트는 법복을 입고 판사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려 한다. 셀레스틴이 다시 한번 어네스트의 진짜 욕망을 일깨워주고, 실은 어네스트뿐 아니라 모든 곰이 가업을 잇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다는 걸 고백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셀레스틴은 감옥에 갇힌 어네스트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경찰들이 악기를 숨겨두는 곳을 알게 되고, 결정적 ‘반란’을 함께 도모할 다른 혁명가 곰들과도 접촉한다. 상술했듯, 혁명가를 한곳에 강제로 모아두면 뜻밖의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네스트의 친구 셀레스틴은 이를 역이용해 어네스트를, 그의 가족을, 나아가 샤라비를 구한다. 종속적 운명과 자율에 관한 따뜻하고 유쾌한 우화에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4.jpeg

 

 

 

  도대체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 어떤 관계인지, 두 동물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길 법하다. 2014년에 개봉한 전작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에 그 답이 있다. 각각 지상과 지하, 서로를 적대시하는 곳에서 지낸 둘은 곰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셀레스틴의 엉뚱한 상상력에서 출발해 조금씩 우정을 다져나간다. 두 동물이 각각 무리의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네스트는 길거리를 부랑하며 먹을 것을 구하는 가난한 음악가다. 수시로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고, 부자 곰들은 그를 늘 적대한다. 보육원에서 자란 셀레스틴은 곰이 괴물이라며 무서워하는 다른 쥐들과 생각이 다르고, 치과의사가 되라는 권유에 마음이 동하지 않아 무리에서 소외된다. 이 불온한 소외감으로 둘은 친구가 되었다. 여기에 소속된 무리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예술가 정체성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더해진다. 그리하여 결국 둘은 ‘곰과 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금기를 무너뜨린다. 기존 체제의 근본적인 질서를 깨버리는 것이다.

 

 

 

  이 ‘낙오자 연대’의 진득한 우정이 일관되게 금기를 위반한다는 게 참 좋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림체 이면에 해방과 구원의 우정이 있다. 이 둘의 우정은 동질적인 집단에서 자신과 같은 친구만 사귀는 요즘은 좀처럼 생겨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점에서 더욱 귀하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464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