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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2025-06-11 22:01:52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영화 <퀴어> 리뷰


퀴어 (Queer, 2025)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개봉일: 2025.06.20.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37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드류 스타키, 레슬리 맨빌, 제이슨 슈왈츠먼, 엔히 자가

 

개인적인 평점: 3.5 / 5

 

쿠키 영상: 없음

 

 

 

 

나에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는 딱 이 한 문장으로 정립되어 있다. ‘펄떡이는 것들로 그득한, 살아있는 영화’. 들끓는 욕망과 한순간 솟아오르는 치기, 따가운 햇살, 뜨끈한 피, 생생한 피부의 촉감. 온갖 감각이 넘치는 그의 영화는 매번 내 둔해진 감각을 새롭게 재생시킨다.

 

이 모든 감각들의 시작점엔 바로 ‘사랑’이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그리는 사랑은 맹렬하고 솔직하기에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고 외롭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나의 루카 구아다니노 최애작 또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로도 온전한 소유를 목적으로 한 카니발리즘 로맨스 <본즈 앤 올>, 세 주인공 사이의 다자간 사랑의 랠리 <챌린저스>처럼 여러 독특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쉼 없이 발표했고 나는 그때마다 그의 뜨거운 욕망과 변태력에 큰 박수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 어떻게 한 번 더 안 되는 걸까…’하는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퀴어>를 정말 오래 기다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채.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다. “뭐지? 이건 또 봐야 알 것 같은데?”


 

<퀴어>는 언뜻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아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본격적으로 영화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느낌을 기대하고 있는 감독의 팬들에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언제 떠올려도 아름다울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퀴어>는 마음을 걸어 잠가도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 같은 꿈이라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생생한 감각들을 떠밀어주는 영화라면 <퀴어>는 스스로 인물의 감각을 더듬어내야 하는 버석한 영화에 가깝다고.

 

 

 

 

<퀴어>는 동명 소설 [퀴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기존 질서에 반항하고 기행을 일삼았던 비트 세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작자 ‘윌리엄 버로스’는 다이내믹했던 자신의 생을 그대로 투영한 문학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퀴어]는 그중 한 편으로, 약물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그가 멕시코에서 한 청년을 만나며 겪은 경험을 담은 책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기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화 <퀴어>는 원작에 비해 주인공의 감정이 비교적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이야기 사이 공백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던 원작에 비해 갈피가 잡혀있는 편이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 모두, 한 번 놓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어지러운 작품이니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대략 피곤한 날 관람은 피하시라는 말이다.)

 

 

 

 

영화 <퀴어>의 주인공인 작가 ‘리’는 마약 단속을 피해 미국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주한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인생을 함께할 짝을 찾는 중이다. 그런데 곱게 말해 ‘짝을 찾는다’고 표현한 거지, 그는 사실 아름다운 청년들에게 열심히 추파를 던지는 중이다. 하지만 리에게도 명확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퀴어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리와 같은 퀴어, 그것도 진심으로 사랑을 나눌 퀴어를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등장하는 앳된 청년은 퀴어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퀴어임이 확실해 정사를 나눈 청년은 육체적인 사랑. 그 이상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더해 퀴어가 아닌 이들은 리를 대놓고 괄시하니 리는 항상 사랑을 하면서도 외롭다.

 

 

 

그러던 어느 날, 열기 가득한 길거리. 리는 수많은 인파 너머로 지나가는 유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노골적인 표현과 거짓말까지 동원하며 유진의 옆자리를 사수한다. 리는 지금껏 다른 청년들에겐 퀴어인지, 퀴어가 아닌지. 말과 몸을 동원해 거침없이 질문해왔지만 유진에겐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그렇게 설레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한 날들이 지나가고 리는 온갖 노력 끝에 유진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몸을 맞췄으니 이제 마음을 맞춰갈 순서가 아닐까. 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유진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유진의 태도는 점점 미스터리하게 변하고 유진을 향한 리의 갈망과 애정. 외로움은 쉼 없이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그것에 짓눌린 리는 유진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된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Queers가 아닌 Queer

 

 

 

영화의 중심인물은 리와 유진, 두 사람이고 영화의 사건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이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퀴어들(Queers)’이 아닌 ‘퀴어(Queer)’다. 그 이유는 리의 이야기 속에서 동성인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 퀴어는 리뿐이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유진의 신체, 행동, 젊음은 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지만 리의 모습은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 리는 유진에게 욕망을 느꼈지만 유진은 리에게 진짜 욕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이 퀴어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후, 리는 유진이 퀴어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그의 몸에 손을 얹는다. 유진은 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밤을 보낸다. 리는 이를 유진이 퀴어이고 자신을 허락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진은 리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유진을 향한 리의 마음이 사랑이라면 리를 향한 유진의 마음은 호기심에 가깝다. 유진에게 리는 ‘가보지 않은 다른 동네 퀴어바’ 처럼 그저 궁금한 것. 딱 그 정도인 거다.

 

 

 

유진은 리와의 관계를, 퀴어와의 관계를 체험한다. 그는 리와 나란히 앉아 함께 술을 마시고, 같은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발을 맞춘다. 하지만 리가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 지나간 후, 유진의 호기심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유진은 첫 정사 이후 리가 여운에 빠져있는 사이 리의 성기에 닿았던 손을 리의 셔츠에 닦거나 키스를 나눈 후 입술을 닦거나, 더 이상 리와 같은 메뉴를 먹지 않는 -첫 정사 이후 장면들에선 리 앞엔 술. 유진 앞엔 콜라가 놓여있다.- 등 거리를 두는 행동을 보인다. 금전으로 얽힌 2장 이후의 관계는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한눈에 봐도 건조하고 일방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실제인지 리의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영화의 끝에 가선 유진이 ‘저는 퀴어가 아니’라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첫 정사 전, 저녁 식사 장면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리가 식사를 미뤄두고 진지하게 퀴어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동안 유진은 리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게걸스레 식사를 이어간다. 이 때 카메라가 식당 밖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컷에선 유진이 앉아있는 쪽은 벽으로 가려져 있고 리가 앉은 쪽만 유리로 되어있어 마치 리가 앞에 앉은 유진이 아닌 두꺼운 벽에 대고 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는 영화 내내 통할 수 없는 벽, 유진을 향해 열심히 사랑을 이야기했고 또 자신과 같길 바랐다. 하지만 유진에게 리와 리의 사랑은 구토를 불러오는 술 같은 존재였다. 유진은 리의 집으로 가던 날 밤. 리에게 맞춰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리가 직접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결국 토를 하고 만다. 리는 ‘술은 별로 안 마시지 않았나?’라며 유진을 걱정함과 동시에 약간의 의아함을 가진 채 화장실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리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리 유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유진은 리가 건넨 술과 사랑을 구역질과 함께 뱉어낸다. 그렇게 유진이 사랑을 뱉어내는 동안 리는 유진이 그어놓은 선 밖에서 괴로워할 뿐이다.

 

 

 


무한히 새로 시작되는 잘못된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진심

 

 

 

리는 유진을 위해 자신이 그어놨던 선을 하나 둘 넘는다. 리는 첫 번째로 만난 청년에겐 “너 퀴어 아니지?”라고 물으며 그를 추궁하고 청년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판단한 후 자리를 뜬다. 두 번째로 만난 청년과 밤을 보낸 후엔 돈을 줘서라도 그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지갑을 닫는다. 그런데 유진을 처음 본 후, 리는 거짓말을 쳐 유진을 십아호이에 불러내고,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에게 집을 털렸다는 친구 조에게 “털리기 싫었으면 집이 아닌 모텔로 가지.”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유진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유진에겐 지갑을 여는 걸로도 모자라 십아호이의 일부를 인수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리는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식물, 야헤에 집착하고 다시 약에 손을 대며 또 다른 선을 넘게 되는데 이 모든 건 유진과 얽힌 사랑, 외로움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리는 선을 넘으면서까지 진심으로 사랑을 쟁취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 리와 유진이 여행을 떠나기 전, 1장의 후반부에서 리는 메리와 함께 있는 유진에게 찾아가 돈을 줄 테니 자신과 함께 남미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유진은 그의 제안에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때 메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리와 유진 사이에 있는 체스판에 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금 전에 리가 손댔던 체스 말을 옮기며 “이거 여기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둘 곳이 아닌, 두면 안 되는 칸에 자리를 잡은 체스 말처럼 리는 ‘퀴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유진의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리는 유진을 포기하지도, 그를 죽이지도, 자신을 죽이지도 못한다. 유진을 미워하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리가 마지막으로 본 환상 속엔 방 안에 누워있는 유진과 ∞ 모양의 지네 목걸이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빨간 뱀이 나온다. 이 뱀은 꼬리를 삼키는 자 ‘우로보로스’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는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와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리의 사랑은 이 뱀과 지네처럼 시작과 끝이 영원히 반복되는 ∞ 모양을 따라 움직인다. 리는 지독한 외로움에 벌벌 떨다가도 무심히 얹어진 유진의 발에 안정감을 느끼고 환상 속에서 유진을 죽이고도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기에 미치도록 증오스럽고 사랑하기에 감히 죽일 수도 없었던 외로운 그의 사랑은 매일같이 부서졌다가 또 새롭게 시작된다. 심지어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말이다.

 

리는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유진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왼쪽으로 돌아누운 리의 발 위로 같은 방향으로 누운 유진의 발이 겹쳐지고 리는 마지막 숨을 뱉는다. 과거 현실에선 벌벌 떨면서 허락을 받고 나서야 겨우 자신을 등지고 있는 유진과 발을 한 번 겹칠 수 있었는데.. 리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유진과 자신의 자리를 바꿔본다.

 

 

 

 

사랑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여행의 끝

 

 

 

리에게 남미 여행은 사랑을 지킬 마지막 기회였기에 그는 여행에 최선을 다했고 죽을 때까지 이 여행을 잊지 못한다. 반면 유진에게 이 여행은 당시 하고 있었던 신문사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일 정도로 인식된다. 그래서인지 유진은 여행이 마무리되자마자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여행의 결말은 1장에서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함께 봤던 영화 <오르페>의 흐름과 비슷하다. <오르페>는 장 콕토의 영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과 에우리디케가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는다. 슬픔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신에게 아내를 돌려달라 간청해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앞서 신이 걸었던 조건을 잊고 실수를 저지르고 또 한 번 에우리디케를 잃는다. 유진을 얻었다 잃고, 다시 그를 얻기 위해 야헤가 있는 정글로 뛰어들었지만 영영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리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

 

 

 

의식을 한 겹 깨부수고 심장을 토하고도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은 파편화된 감정만을 남긴다. 혼자 남은 남자, 리는 그 파편들을 끌어안는다. 그것들은 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정말 끝 맛까지 참 쓰디쓴 드라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작성자 . 혜경

출처 . https://blog.naver.com/hkyung769/223896189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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