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 승연2025-06-10 17:02:22
모두에게 오는 끝을 준비하는 자세
영화 <룸 넥스트 도어>
눈은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음울한 중부 평야의 구석구석에도, 나무 없는 구릉지대에도 내리고, 앨런의 늪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더 멀리 서쪽으로 섀넌 강의 어둡고 거친 물결 위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그 쓸쓸한 교회 부속묘지의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기우뚱한 십자가와 묘석 위에도, 작은 출입문 위의 뾰족한 쇠창 위에도, 그리고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그가 눈이 온 세상에 사뿐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최후의 종말의 강림처럼 눈이 모든 산 이와 죽은 이들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의 영혼은 서서히 스러져갔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 중
당신은 상실에 얼마나 초연한가? 모든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동시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다. 만약 당신이 상실에도 절망하지 않고 무던할 수 있다면 그건 좀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모두,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생에 죽음이 개입하는 순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이를 잃는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깊은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올해 초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예기치 못한 죽음과 이별을 경험하기에,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 마음의 두께를 단단히 만들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면,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런 나의 생각이 무의식에 적용된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연달아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형을 잃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 부터, 부검을 통해 죽은 자들이 남긴 말을 산 자들에게 전하는 법의학자들의 드라마 언내추럴.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이야기할 작품이자, 존엄사를 선택한 친구 마사와 그를 지켜보는 친구 잉그리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이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소개 및 줄거리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스페인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이며, 2020년 발간된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 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 등급의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 상영 시 1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신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내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첫 상영되었고 10월 23일 공식적으로 영화관 개봉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부국제에서부터 궁금했던 터라 개봉 다음 주에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출간 기념 사인회를 위해 뉴욕 맨해튼을 찾은 유명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가며 시작된다. 이후 잉그리드는 뉴욕에서 마사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마사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안락사 계획을 밝히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옆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마사(틸다 스윈튼)의 부탁을 들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충격에 빠진다.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지만 뉴욕주는 그 일부가 아닐뿐더러, 잉그리드는 저서를 통해 '생명이 어째서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만큼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는 그녀에게 부탁하기 전 이미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살에 동조할 수 없다'라며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잉그리드가 느꼈을 두려움은, 만약 내가 친구에게 같은 부탁을 들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시한부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탁은 충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죽음이 목을 조이는 생생한 감각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투병(鬪病)이라는 단어에는 싸울 투에 병 병 자를 사용한다.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질병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치열하게 질병과 맞서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며 병을 완치하는 것이 싸움에서의 승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영화 속 말기 암 환자이자 마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암 환자가 계속 싸워주길 바라고, 투병 결과에 따라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굴욕스러운 고통 속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선언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마사의 대사 중
감독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고 싶은 마음도 당연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탄생과 죽음이 선과 악처럼 나누어져 있는 것을 꼬집는다. 살아있음은 옳은 것이고 죽음은 부정한 것일까? 모두가 삶의 끝에 죽음을 만난다는 것만 봐도 무리한 가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글의 도입에서 언급한 일본의 드라마 <언내추럴> 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죽는 것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 목숨을 잃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쩌다 살고 있는 겁니다. 어쩌다 살고 있으니까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선 안돼요."
마사는 종군 기자였다. 평생 살아있음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터를 다니며 남겨진 사람들을 만나왔다. 삶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이미 죽음은 두려워하기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터 속에서 그녀는 어쩌면 삶이 그저 '남겨지는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10대 때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친구 프레드를 만나 아이를 임신하지만, PTSD에 시달리던 프레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며 떠난다. 시간이 흘러 마사는 친부의 존재를 추궁하는 딸을 위해 그의 근황을 수소문하고 화재 현장에서 살려달라는 환청을 듣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후 딸 미셸과도 점차 멀어진다. 살아냈지만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남겨진 프레드. 자신보다 일을 우선순위에 두는 엄마와 존재도 모르는 아빠를 용서하지 못하고 탄생을 저주했을 미셸. 그리고 혼자 남겨져 치열한 삶을 전쟁처럼 치러냈던 마사까지. 이들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그 누구도 패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으로 설득하는 페드로의 미장센
다채로운 미술은 시한부나 죽음 같은 소재를 슬프고 우울한 동정 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세련된 미감과 선명한 색감이 만드는 페드로의 미장센은 감각이 모든 서사를 선명하게 심지어는 아름답게 인지하도록 돕는다. 모든 로케이션과 장면이 아름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마사가 죽음을 준비하며 샛노란 자켓과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각자의 속도가 조금씩 다를 뿐. 끝을 향해 가는 이 여정을 얼마나 다채롭게 채우느냐는 모두가 가진 숙제일 것이다.
미술과 의상은 그 자체로 페드로의 언어다. 페드로의 드높은 미적 감각은 배우를 즐겁게 한다. 페드로는 내가 녹색 터틀넥을 입으면 틸다는 푸른 재킷을 입게 했다. 이미 그 대비만으로 멋진 구도인데 카메라까지 켜지자 ‘세상에, 우리가 페드로의 세계로 들어왔어! 우리가 페드로의 머릿속에 있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페드로의 세계는 마법 같고 또 동화 같다. 우리의 눈이 회색빛으로 일상을 본다면, 페드로의 눈은 총천연색의 테크니컬러로 세상을 감각한다. 그 세계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고, 말초적이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이 내 깊은 뿌리를 자극한다. 관객이 페드로의 영화에 느끼는 반응과 비슷하다. 일상의 삶과 거리를 두는 상상적인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의 근원만은 관객의 마음에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가닿듯 말이다.
줄리안 무어의 씨네 21 인터뷰 중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을 언급하며 은유적으로 사용한 점도 흥미롭다. 에드워드 호퍼의 1960 작 <People In The Sun> 도 그중 하나이다. 도시 속 인간의 고독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 속에서 오마주 되어왔다. 대표적으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이 그 예이다. <룸 넥스트 도어> 에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함께 떠난 숙소에서 해당 작품의 모작이 걸려있는 것으로 직접 언급된다. 또한 의자에 기대어 같은 방향의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은 구조로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오마주 하였다. 영화 속에서는 숙소 테라스의 선베드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에는 집이 오른쪽에는 자연이 위치한 것도 동일하다.
영화에서 선베드는 자주 비춰지며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된다. 마사는 이 장소를 아름답다고 표현하며 마음에 들어 한다. 같이 외출할까 하고 묻는 잉그리드에게 마사가 좀 더 여기에 있고 싶다고 하는 장면도, 닫힌 문을 보고 마사가 죽었다고 생각한 잉그리드가 무너지는 장면도, 끝내 마사가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도, 그리고 마사와 똑닮은 딸 미셸(틸다 스윈튼)과 잉그리드가 누워있는 위로 눈이 내리는 엔딩 장면도 모두 이 테라스의 선베드에서 이뤄진다. 같은 장소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결국에 동시대에 살고 같은 것을 겪더라도, 탄생과 죽음이 고유하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고유하며 각자의 자아로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걸 체감했다. 그러니 인간이 느끼는 필연적인 외로움이 안쓰럽다가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삶은 임시적이고 끝은 반드시 온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끝'의 존재가 그저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마사의 질병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언급도 감독이 다루는 종말 중 일부이다. 가장 먼저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뉴욕의 분홍색 눈이 그 예이다. 본격적으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오래전 만났던 애인이자, 환경 전문가인 데미언은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악화되는 기후 위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도 없는 회의론자이다. 아들 부부의 출산에 화를 낼 정도이다. 페드로 감독은 데미언의 입을 빌려 진지하게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설명한다. 그 또한 우리가 지금 혀끝에 있지 않아 외면할 뿐인 또 하나의 종말이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야.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잉그리드 대사 중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내러티브를 환기시키는 건 바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라는 인물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잉그리드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삶의 대척점에 두며 '생명의 적'으로 여겼던 잉그리드는 결국 마지막 순간 옆방에 함께 있어 달라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한다. 갑자기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가고 상실은 숨 막히게 아프지만 삶이 일시적이며 끝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마사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각기 종말을 준비하는데, 그중 잉그리드의 태도만 다른 점이 인상깊다. 비관적인 미래에 대해 말하는 데미언에게 잉그리드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마사의 선택에도 용기를 내어 기꺼이 손을 잡아준다. 부모와 손절한 채 살아온 미셸에게는 엄마인 마사를 용서할 수 있는 다리이자 숨구멍 역할을 해준다. 끝을 잘 준비하는 것만큼, 삶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기에 잉그리드는 최선을 다한다.
페드로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를 만들기 한참 전, 살아있는 무언가가 (특히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 인터뷰를 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잉그리드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다른 인물들을 강인한 따뜻함으로 포용하는 잉그리드는 감독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닐까. 종말이라는 비극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몇 번이고 무너지고 쓰러지지만, 결코 비극에 휩쓸리거나 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 말이다.
안락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러기지 의견과 논란이 많다. 영화 하나만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아니다. 극 중 주인공인 마사는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기에 영화는 존엄사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이 모든 서사 속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고 싶다. 영화 중간에 소설 <죽은 사람들>의 구절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글 맨 처음을 그 구절로 시작했다. 영화 마지막은 그를 인용한 잉그리드의 대사로 끝이 난다.
- 눈이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나와 네 딸 위로.
마사의 죽은 자리에 앉은 마사와 똑같이 생긴 딸 미셸 위로, 함께 걷던 숲속 위로 내리는 눈처럼 죽음은 평범한 삶 곳곳에서 언제나 존재한다. 오늘도 누군가의 옆집에서는 생명이 죽고, 같은 날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죽은 자의 온기가 남은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규칙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배운다. 언젠가 또다시 상실의 고통에 잠식되는 날이 오더라도 맘껏 슬퍼하고 그리워하지만서도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힘을 잔뜩 주어 긴 글을 적었다. 끝에 대해, 상실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의연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인상적인 영화였다. 아름다운 페드로의 연출에 그리고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 1
- 200
- 13.1K
- 123
- 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