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남2025-06-04 00:37:30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관한 단상들
<신성한 나무의 씨앗> 리뷰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신성한 나무의 씨앗>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는 몇 가지 분기점들이 있다. 그 분기점들을 기준으로 영화는 시퀀스마다 각기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 이 분기점들과 영화에서 돋보인 몇 가지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적어 보았다.
총
이 영화의 가장 명백한 분기점은 이만의 총이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할 때이다. 이 사건 이전까지 영화는 정적인 편집과 촬영, 실내 조명에 의존한 채 단조로운 공간에서 진행되는 단순한 사회 고발 드라마에 가깝다. 의아스러울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이미지로 가득하던 이 영화는 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만이 집안을 뒤지는 장면을 현란한 롱테이크로 찍었고, 이 이후 무시무시한 장르영화로 급격하게 바뀐다.
테헤란
이 영화의 또다른 커다란 분기점은 이만 가족이 테헤란을 떠나는 순간이다. 가족이 테헤란에서 이만의 고향으로 잠시 떠나는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의 장르는 심리 스릴러에서 물리적 스릴러로, 영화의 관심사는 최소한으로 남아있던 리얼리즘에서 완전히 장르주의로 바뀐다. 가족 내의 대립 구도가 ‘보수적 부모 대 개방적 자녀’에서 ‘가부장적 아버지 대 여성들’로 변모하는 지점도 이 장면부터다.
카메라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찍고 싶어 했던 것과 찍을 수 없던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레즈반과 사나가 SNS를 통해 접하는 숏폼 푸티지 영상들이다. TV 뉴스를 위한 거짓된 카메라나 이만의 취조를 위한 폭력의 카메라에 저항하는 것으로써 이 영화가 믿는 유일한 카메라는 바로 그 거리의 카메라, 민중의 카메라뿐이다. 이란의 현실들 있는 그대로 담아낸 이 진실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가 열렬히 갈망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이 이미지들 자체가 영화가 될 수 없을 때, 혹은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을 때 그 진실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서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로 다른 두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현실적 드라마를 찍음으로서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실내 위주의 폐쇄적인 이미지로 가득찼던 것은 주인공들이 거리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실내에 있을 때에도 창밖을 내다볼 수 없거나 혹은 내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레즈반과 사나는 혹시 모를 신변의 위협을 우려한 나즈메에 의해 집 안에서조차 커튼을 다고 생활해야 한다. 또 이만은 주로 법원 안에서 생활하는 인물로 창밖을 바라볼 필요가 없거나 바라보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전반부는 진실의 이미지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물들, 곧 그 인물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카메라의 한계를 담아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장르의 언어를 빌리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제시되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 일화, 후반으로 갈수록 광기에 휩싸이는 이만의 모습, 리얼리즘적 실내 공간에서 장르주의적 사막 공간으로 바뀌는 영화의 무대, 그리고 현실적 개연성이 적용되지 않고 점점 폭주하는 서사와 같은 이 영화의 장르적 요소는 가족 간의 불신과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란 사회의 폭력성과 불안정함을 환기한다.
얼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미지는 바로 얼굴이다. 이 영화가 극영화로서의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접근하기를 시도한 한 장면은 파편이 박힌 사다프의 얼굴을 찍은 장면이다. 이 시퀀스의 시작은 나즈메와 사나가 굳게 닫혀있던 방안의 커튼을 처음으로 완전히 열어젖히는 행동이고, 이후 발생할 대립구도의 변화를 환기하는 듯 줄곧 자녀들과 사다프, 시위대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나즈메가 처음으로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순간이 바로 이 장면이기도 하다. 사다프의 이 리얼리즘의 얼굴과 직후 장면에서 등장하는 흐르는 물줄기 아래 면도하는 이만의 드라마의 얼굴, 안대 쓴 레즈반과 사나의 숨막히는 장르주의의 얼굴까지 고발 드라마와 장르주의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진실을 모색하려는 영화의 시도는 얼굴이라는 이미지로 귀결된다.
진실을 찍기 위해서 영화는 어떤 방법을 취하는가?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그 플롯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탐색의 기록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종종 느슨하고 엉성해지거나 투박해지기도 한다. 또 얼굴이라는 나름 슬기로운 모티프를 발견하여 활용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얼굴로 끝내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얼굴이 아니라 손이며, 일종의 반칙과도 같은 SNS 푸티지 영상을 전 세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사실 이 영상들로 영화를 끝내는 것은 영화가 2시간 47분 동안 해왔던 시도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다소 허무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술로프가 이러한 선택을 감행한 것은, 어쩌면 그에게 있어 현실이 영화보다 우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