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2025-05-27 20:48:39
"내가 불쌍하지 않아?" 피해자는 보이는데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 이유
[짧은 감상] 영화 <그녀가 죽었다> 리뷰
‘보여주기’와 ‘들여다보기’. 언뜻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쾌락을 좇는 이들.
그러나 감추고 싶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려는 순간 쾌락은 공포와 분노로 분한다.
당연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 여자, 자신의 정체는 숨긴 채 남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던 남자.
그들의 이해관계는 극 중에서 필연적으로 상충하며 갈등의 끝을 달린다.
결국 매한가지인 것은 둘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의 비밀은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것. 저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쾌락을 좇으면서도, 정작 상대방의 쾌락을 목격하며 정신이 나갔다며 고개를 저어댄다. 한국판 <나를 찾아줘>를 연상케 하는 범죄 스릴러 <그녀가 죽었다>는 어느 쪽에도 공감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두 인물상을 통해 익숙한 맛으로도 관객의 몰입을 배가시킨다.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상대방이 ‘미쳤다’는 것. 그들은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급급하다. 누구도 자신이 끼친 피해에는 반성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내가 피해자요, 나는 불행하노라 외쳐대며 서로를 삿대질한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들. 그렇게 가해자로서 ‘나’의 죄의식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피해를 호소하는 억울한 ‘나’뿐이다.
그녀가 죽었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그녀의 죽음’으로 상정되는 피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선악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 실체는 사라지고 없다. 그들이 아무리 피해를 호소해도 관객의 뇌리에 남는 것은 그들의 가해다.
시체는 있었는가? 아니, 온데간데없다.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명백한 가해자였으므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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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가 되어 덮친 솔직함
파도가 되어 덮친 솔직함
영화 리뷰 <더 웨일>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시놉시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자신의 과오로 이혼한 뒤 그는 엘리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는 자신을 버린 아빠 찰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찰리는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스포일러 유의#
한 사람의 감정이 파도가 되어 덮치다
영화 더 웨일은 변화해가는 찰리의 감정을 따라간다. 초반 찰리의 하루는 글쓰기 강사로서 온라인 강의를 하며 시작한다. 찰리는 논리적인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틀이 필요하고, 이것이 제약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틀은 좋은 글을 쓰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의 글을 읽고, 밥을 먹고, 티비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하지만 때때로 스트레스에 못 이겨 폭식을 하고 만다. 폭식을 하면 할수록 찰리의 건강상태는 계속해서 안 좋아진다. 그리고 이를 자각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찰리는 또 폭식을 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처럼 찰리는 초반 굉장히 강한 자기부정의 단계를 보인다. 선교사 토마스가 왔을 때도 자신을 좋게 볼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그럴 수 있다고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난폭함을 보이면서 토마스에게 자신의 꼴이 역겹지 않냐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더불어 매일 저녁 피자를 시키며 배달원과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로나마 친근감을 느낀 찰리와 배달원 댄. 서로에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찰리의 거구를 본 댄이 놀라며 사라지자 찰리는 자신의 상태를 비관하면서 더욱더 가학적일 정도로 폭식을 시작한다. 자기 비난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결국 이 스트레스는 글쓰기 수업을 하는 학생들에게 틀은 상관없으니 제발 솔직한 글을 쓰라며 욕이 섞인 메일을 보내게 된다. 솔직한 글을 받아본 찰리는 드디어 자기 인정의 단계로 들어온다. 수업을 하면서 절대 카메라를 키지 않고 자신을 가리던 찰리는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솔직한 글은 그 어떤 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마지막 말을 전해준다.
글쓰기에서 솔직함이 가장 중요한 무기이듯, 인생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봄에 있어서 솔직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찰리의 감정변화를 통해 3가지 단계로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간단하게 3가지로 압축해서 말하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다채롭게 찰리의 감정이 표현된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이 거실을 벗어나지 않음에도 모든 화면이 너무나도 비슷한 배경임에도 전혀 지루함이 없이 찰리라는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한 인간이 감정적 좌절을 겪고, 어떻게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지 그 감정의 서사를 너무나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블랙스완에서도 한 인간의 욕망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무너지고 솔직해지는 인간의 용기와 그 감정을 파도가 덮쳐오듯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결국 앨런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찰리는 딸 엘리를 만나면서 그동안 자신의 마음 속에서 걸어 잠궈 두었던 엘런의 기억을 떠올린다. 272kg이라는 거구가 되기 전 찰리는 이렇게까지 초고도비만이 아니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학교에서 남자 학생 앨런을 만나게 되고, 제자였던 앨런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부인과 자녀가 있는 상태로 말이다. 앨런은 이단교회를 믿는 아버지를 둔 학생이었는데, 그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교회에서 버려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찰리와 함께하면서도 그 불안함에 못이겨 식음을 전폐하다 사망하고 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찰리는 자신이 앨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면서 점차 살이 찌기 시작했고, 초고도비만이 되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어지자 더욱 더 세상을 거부하며 악순환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딸 엘리가 집에 온 뒤 퉁명스럽게 자신을 버리고 간 그날의 상황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고, 찰리는 자신이 왜 순간 앨런을 선택했는지, 자신과 엘리에게 솔직해진다. 찰리는 그 솔직한 용기로 그간 걸어 잠궜던 앨런과 함께 쓰던 방을 열어본다. 엉망이 되어 있는 자신의 방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앨런과 함께 쓰던 방. 그 때의 추억에 잠기며 찰리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불을 키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전등을 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앨런이 읽던 성경책을 발견하지만 이 역시 손에 닿지 않아 읽지 못하고 결국 찰리는 앨런과 함께 쓰던 방의 문턱을 넘지 못한채 돌아 나온다. 찰리는 앨런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은 ‘그림자’와 ‘닿지 않는 물건’을 통해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충분히 솔직해졌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과거를 들여다 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완벽하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함과 사회의 제약
찰리는 8살 이후 엘리를 직접적으로는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저 엄마 메리를 통해 엘리의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찰리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마다 반복하면서 읽고 들은 글은 딸 엘리의 모비딕 비평문이었다. 다들 찬양해 마지 않는 모비딕에 대해 15살 아이의 눈으로 정말 솔직하게 쓴 문장들이었다.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이유로 엘리는 8살 이후 그 모든 화를 세상을 향해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에서는 낙제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었고, 친구들은 없었으며. SNS에서는 이상한 글미과 날선 조롱이 섞인 문장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엘리와 함께한 엄마 메리는 그런 엘리를 보면서 엘리는 악마라며 찰리에게 털어놓는다. 오랜시간 엘리의 일탈과 비행을 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거의 10년만에 본 찰리의 입장에서 엘리는 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소녀였을 뿐이다. 남들이 다 좋아해주는 표현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할 줄 아는 엘리는 아빠이자 글쓰기 강사인 찰리의 입장에서는 눈부신 아이 그 자체였다. 자신 역시 글쓰기 강사로서 틀을 강조하며 세상의 시각에 맞춘 제약을 가르쳐왔지만 결국에는 글스기의 무기는 솔직함이라며 마지막 수업 때 모든 틀을 무시하고 솔직한 글을 쓰라고 이야기했듯이 엘리는 사회의 틀에서 보면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일지 몰ㄹ라도 어느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세상과 대면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엘리를 보면서 자신을 감추며 더더욱 거구가 되어갔던 찰리는 솔직하게 자신을 마주하며 결국 엘리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화해를 하는 아빠와 딸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함이라는 무기와 이를 막는 틀이라는 사회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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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작품인지 모를 슬래셔 무비
<70년대 작품인지 모를 슬래셔 무비>
텍사스 전기톱 학살 The Texas Chainsaw Massacre (1974, 토비 후퍼) 리뷰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상영작 ‘스트레인지 오마쥬’
프로그램 노트
다섯 명의 십대들이 낡은 밴을 타고 텍사스의 한적한 마을을 지나 여행을 떠난다. 이 마을은 일행 중 한 명의 조부모가 과거에 살았던 곳이자, 묻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예상치 못하게 기름이 떨어진 아이들은 조부모의 옛 집에서 잠시 머물기로 하고, 근처에 낡은 자동차들과 가스 발전기가 돌아가는 의문의 집을 발견한다. 기름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찾은 순간부터, 이들은 끔찍한 식인 가족에게 차례로 사냥당하는 악몽 같은 공포에 휘말리게 된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은 토비 후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극히 적은 예산과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후퍼 감독은 연출뿐 아니라 각본과 음악 작업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아가 이후 수많은 슬래셔 영화의 전범이 된 이 작품은, 살인 도구의 활용, 연쇄 살인마 캐릭터의 정립, 피해자 묘사 방식 등 장르의 공식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오늘날까지도 가장 충격적인 공포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강렬한 비주얼과 음산한 분위기로 관객의 신경을 끝까지 곤두서게 만든다. 심약한 이들이라면, 각오하고 볼 것. (남종석)
70년대 작품인지 모를 슬래셔 무비
등장인물들은 차례대로 식인 가족의 집에 스스로 찾아 걸어 들어가게 된다. 잦은 줌 인, 하이/로우 앵글과 빠른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컷 전환이 불안을 고조시킨다. 등장인물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이 앵글에서 등장인물들이 자꾸만 ‘눌리는’ 느낌을 주는 로우 앵글 구도의 전환이나, 묘하게 어긋나는 컷 전환이 시각적으로 위협을 증폭시킨다.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샐리(마릴린 번즈)가 식탁 앞에서 공포에 질려 눈동자를 굴리는 장면은 가히 강렬하다. 적은 제작비와 70년대 작품이라는 표현의 한계에도 83분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광기의 가족
스스로 손을 베는 히치하이커 남성, “기름이 없다”라고 말하는 주유소 남성, 그리고 텍사스 전기톱으로 인간을 도축하는 남성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의 가족이자 사냥의 동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기묘하다는 점이다. 소를 도축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해 자랑하기도, 실실 웃으며 칼을 들이밀기도 하며 남들과 다른 기묘한 분위기를 내비친다. 기름이 없어 주유소에 들린 아이들에게 뜬금없이 고기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건 이들에게서 일말의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인 가족에게 살인은 일상의 연장선이다. 비인간적인 행위조차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이는 공포의 핵심을 일상성에 내재한 광기로 끌어낸다. 영화 속 식인 가족은 쇠락한 미국의 농촌에 대한 잔혹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 초반부, 달리는 차 안에서 망치로 한 번에 머리를 내려치는 기술을 가졌다는 도축업자 이야기를 하며 이제는 기계가 이를 대체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도축업을 하는 히치하이커 남성이 차에 올라탄다. 후반부, 식인 가족은 노쇠한 할아버지에게 전설의 실력을 보여달라며 샐리의 머리를 붙잡고 망치를 들린다. 하지만, 망치를 잡을 힘조차 없는 할아버지는 도축에 실패한다. 영화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도태된 ‘옛 질서’가 어떻게 괴물화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축업과 실직 등의 사회적 배경이 가족의 광기와 역사에 설득력을 더한다.
암묵적 룰을 깨부수는 잔혹함
‘휠체어를 탄 사회적 약자는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암묵적 룰을 과감히 깨부순다. 뚱뚱하고 휠체어에만 의존해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는 다른 친구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당한다. 그는 자신의 칼로 스스로 손을 베는 히치하이커 남성이 대단하다는 동경을 내비치며, 친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신경질적으로 입방귀를 뀌며 흉내를 낸다. 관객은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최종 생존자는 아마 그일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잔혹하게 사냥당한다. 캄캄한 풀숲에서 샐리와 함께 친구들을 찾으러 나서다 맞닥뜨린 텍사스 전기톱 남성에 무차별하게 당하고 만다. 구성원들 살해 장면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묘사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 시점부터 관객은 깨닫는다. 이 영화에는 일말의 희망도 없다는 것을. 모두가 식인 가족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것이라고.
사라진 제리, 파이널 걸 샐리의 탄생
사냥 도중에 사라진 제리(알렌 덴지거)는 구조를 뒤흔든다. 제리의 시체는 끝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조차 생략된 퇴장은 관객에게 극도의 긴장을 심어준다. 이는 샐리(마릴린 번즈)가 합심하여 복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지만, 그 예상은 무너진다. 남녀가 힘을 합쳐 도망친다는 슬래셔 공식을 부수고, 이후의 이야기는 샐리 혼자 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생존극으로 치닫는다. 피투성이가 되어 미친 듯이 웃으며 도망치는 샐리의 표정은 해방이라기보다 생존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 결말 이후 수많은 호러 영화의 ‘파이널 걸’이라는 여성 캐릭터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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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와 현실은 이어진다.
“영화는 일상의 지루한 부분들을 편집한 인생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낭만적인 명언을 본 적 있었다. 어느 독립영화관 유리창에 붙어있던, 마치 그 말에 증명이라도 하듯 불규칙적이고 역동적으로 휘갈겨진 문구에는 큰 감동이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유리창을 한참 바라보며, 어둡고 차가운 유리창 너머의 현실을 동시에 느끼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고, 더욱 깊이 빠져들수록 영화는 현실을 위한 예술이자 그만큼 공부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가치는 조금씩 변질되어 이내 현실에서 도피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나를 최종적으로 기다린 것은 패기 있는 문구의 그림자가 씌어진 차가운 현실이었다. 특히나 대학교 졸업을 앞둔 현재 영화 속 인물들의 고민은 더 이상 허구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선택은 하나부터 신중해야 하며, 그 반대로 현실적인 고민은 유예 없이 불어나고 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영화는 <결혼, 하겠나>였다.
<결혼, 하겠나>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영화다. <결혼, 하겠나>의 주인공 선우는 언젠가 교단에 올라설 것을 목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년이다. 녹록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선우는 평생 사랑할 사람을 만났고 이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작은 것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는 그 둘은 상상으로나마 큰 것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상상이 망상처럼 불어나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이 웃을 수 있었다. 선우의 아버지가 급작한 뇌출혈로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이때부터 <결혼, 하겠나>는 자수성가형 이야기를 뛰어넘어 특정한 장르적 요소를 더해간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선우는 기초생활수급자 제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제도에 선정되기까지 하나둘 차질이 생기며 웃음을 유발한다. 간발의 시간차 혹은 딱 하나 중요한 물건을 놓쳐서 차질이 생기기도 하고, 의식불명인 아버지나 첫째 바라기인 할머니와의 답답한 의사소통은 재미를 주면서도 동시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힘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웃음이 속 시원하게 나오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일종의 해학적인 웃음일 뿐, 영화 속 현실과 그 현실에 살짝씩 겹치는 나의 모습에서 그 웃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역설적으로도 <결혼, 하겠나>는 재난영화의 모습 역시 갖춤으로써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재난영화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극단적 상황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 원인불명의 공포, 그리고 고유의 시각적인 경험까지 주로 언급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명과 암이 있기 마련이지만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 입체적인 면모란 사치로 오해되기 쉽상이고, 되려 극단적인 사상이 극단적인 상황에 맞물려 힘을 얻고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타인의 색깔을 배척한다. 오랜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리고 그것의 성찰 역시 순환의 역사이듯 우리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일상적 재난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의 근간인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서로의 갈등마저 부추기는 태도,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외치는 상황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 모든 이면을 담아낼 열정을 가진 예술인들은 가지가 잘려 나가고 있다. <결혼, 하겠나>는 그중에서도 ‘가난’이라는 재난에 주목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전제가 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고 자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선택의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를 판가름하기 위해 무게를 재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뿐이고 우리는 갈등한다. 타인의 선택을 가로막으면서까지. <결혼, 하겠나>에서 다행이면서도 무서웠던 점이 있었는데, 작중에서 악인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본인의 욕심 이상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음은 물론,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공감하고 그것의 무게를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난 앞에선 모두가 제 몫이라도 챙기는 데 급급할 뿐이다. 그 좁은 선택의 폭에서 타인이란 얼마나 중요할까. 마치 수년 전 우리가 직접 겪었던 팬데믹처럼. 재난영화 특유의 원인불명의 공포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등장인물들은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시달리듯 서로의 거리를 물심양면으로 유지한다. “모질지 못하면 계속 가난하게 산다”라는 선우의 큰아버지 대사처럼.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결혼, 하겠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여자친구 지은의 상상 속 결혼식이었다. 꽃이 가득한 언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둘러싸인 둘의 모습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고, 앞으로의 걱정 따위는 별일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듯 당당한 발걸음조차 너무나도 아름다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극이 시작될수록 현실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고 조금씩 웃음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쓸쓸한 진리를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결혼식 장면은 허구이다. 그 허구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고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었기에 영화를 다 본 시점에서 결혼식 장면은 비극처럼 보였다. 과연 허구란 망상일 뿐이고, 비극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우리는 허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허구는 현실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 심지어 허구의 그림자를 담은 이 영화조차 허구인데. 현실을 허구로 대체하려는 삶은 얼마나 위태로울까. 하지만 동시에 허구이기에 가능한 것들도 있다. 현실이 아니기에 부담 없이 꿈을 펼칠 수 있고 완벽한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방향은 되어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그것이 예술이라면 큰 부담 없이 현실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렇게 세상의 다양한 각도를 경험하고 공감하며, 때로 비판함으로써 풍부한 자아를 갖추게 된다. 물론 이 모든 창작의 긍정적인 면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균형이 중요하다. 나의 삶과 예술의 균형, 상상과 괴리의 불의에도 당연한 이치라고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자세 말이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사회의 사각지대에 주목하려는 그 힘은 이 세상에 실존하고, 영화에 위로받고 공감하고 힘을 얻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계절만 맞으면 쉽게 볼 수 있는 핑크뮬리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들에서도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다. 상상 속의 결혼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현실이 길을 가로막을지 결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꿈을 간직한 채 서로를 믿고 나아가기로 한다. <결혼, 하겠나>는 팍팍해진 삶 속에서 예술을 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를 포함해 불안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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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은 5월 셋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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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연이은 할리우드 영화 개봉 소식과 함께
5월 셋째 주 주말 관객 수 1,315,176명을 기록한 극장가!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는 지난 주말 동안 약 6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개봉 동시 정상의 자리를 지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38만명의 수치로 2위를 차지 했으며,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극장판:짱구는 못말려>는 3,4위의 기록하였습니다. 지난 주말 6위였던 <스즈메의 문단속>은 다시 5위의 순위로 상승하였습니다.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 (new)
2001년에 시작하여 현재 시리즈 10번째 영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가 17일 개봉 동시 5일 연속 1위 자리를 놓지 않으며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누적 관객 수는 84만 명으로 곧 100만을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CGV 골든에그지수 94%, 롯데시네마 평가 8.9점, 메가박스 8.9점 등 각종 실관람객 지수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며 앞으로의 흥행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2.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
여전히 식지 않는 열기로 꾸준한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가.오.갤!
개봉 이후 줄곧 1위 차지하였으나 <분노의 질주>가 개봉 이후 상승세를 보이며,
주말 관객수 약 38만 명, 2위를 차지했습니다. 누적 관객 수는 334만 7346명입니다.
3.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2023년 개봉작 중 최초로 글로벌 수익 10억을 돌파해 화제를 모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또한 4월 26일 개봉하여 지속적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4.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동물소환 닌자 배꼽수비대> (-)
지난 4일 개봉한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동물소환 닌자 배꼽수비대> 는 주말관객 수 68,549명 누적 관객 수 60만2278명을 기록했습니다.
5. 스즈메의 문단속 (+)
지난 주 주말 스코어 6위를 차지했던 <스즈메의 문단속>은 다시 5위를 석권하였으며 <문재인입니다>, <드림>, <슬픔의 삼각형>은 각 6,7,8위를 차지하였습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5월 셋째 주 북미 박스오피스 역시 ‘Fast X’인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19~21일 북미에서 6750만 달러, 북미 외 나라에서 1억9980만 달러를 벌어들여 총 수익 2억6730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북미 또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2,3위를 차지했으며 국내 6월 7일 개봉 예정인 <북 클럽: 넥스트 챕터>가 4위를, 국내 개봉 미정인 공포영화 <이블 데드 라이즈>가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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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5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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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야"
씨네랩으로부터 언론배급시사회를 초청받아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개봉 전 <웬디>를 관람하였다.
피터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6월 30일에 개봉한 영화 <웬디>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인 '피터'가 아닌 '웬디'의 시선으로 바라본 '피터팬'을 그려낸 작품이다.
<웬디>의 감독 벤 자이틀린은 어린 시절부터 재미와 자유를 추구하는 피터팬을 꿈꿨지만, 영화 <비스트>를 연출한 후 삶 전체가 바뀌는 경험을 하여 이를 계기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바로 '피터팬'을 각색한 <웬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든 싫든 성장하고 변화하게 되며,
이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어린 시절 품었던 확신들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 벤 자이틀린 감독
기찻길 옆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살고 있는 웬디에게는 쌍둥이 남자 형제인 더글라스와 제임스가 있다. 이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의 마음 속에는 호기심과 모험심, 수갈래로 뻗어나가는 꿈들이 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모험에 대한 꿈을 꾸던 날 밤, 웬디는 기차를 타고 있는 소년 '피터'를 발견한다. 더글라스, 제임스와 함께 기차에 탄 웬디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로 살아갈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웬디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낯설다'였다.
내가 어렸을 때 관람하고 지금 어렴풋이 기억하는 영화 <피터팬>의 분위기는 동화같은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웬디>는 동화라기보다는 '야생', '거칠다', '생생하다', '스릴 넘친다'라는 단어들이 더 어울리는 영화이다.
어른들이 없는 세상 속에서 어린 아이들은 여기저기를 모험한다. 동시에 방황한다.
여러 사건사고를 겪는 아이들이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서툴다. 불안정하다.
마치 알게 모르게 점점 몸과 마음은 자라지만, 아직 내면에 '아이로 남고 싶다'라는 생각이 존재하여 생기는 불협화음같다.
그리고 이러한 불협화음은 웬디의 불안한 시선을 통해 잘 전달된다.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랐고, 감탄한 점은 아역배우들의 연기였다.
'웬디' 역할의 데빈 프랑스, '피터' 역할의 야슈아 막, '더글라스' 역할의 게이지 나퀸, '제임스' 역할의 개빈 나퀸 등 모든 아역배우들이 영화와 하나가 되는 연기를 선보였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섬이 주요 배경이기에 아역배우들이 영화를 이끌었는데, 이질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이 섬에서는 희망을 잃으면 늙게 된다. 더 이상 아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섬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모두 희망과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이었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쌍둥이 형제 중 제임스는 항상 함께 하던 더글라스가 섬에서 없어지자, 깊이 절망한다.
"희망을 버리면 안 돼. 그게 널 늙게 하는 거야."
웬디는 제임스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제임스는 결국 희망을 잃고 점점 노화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 나는 수없이 많은 꿈과 희망을 가졌다가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꿈을 하나둘씩 포기한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 동안 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오곤 했었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이 '나 스스로 나의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주체적이고 활동적인 웬디는 용맹하게 모험을 주도한다. 노화가 시작된 제임스를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이어나간다. 희망을 잃고 어른이 된 사람들에 대항하고, 바닷 속 '어머니'의 존재를 깨닫기까지의 모든 여정의 주체는 '웬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야."
웬디는 '자연스럽게 나이가 드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늙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웬디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간 웬디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레 늙어가며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피터는 섬에 계속 남아 있는다. 피터는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란 것이다. '나이 듦'의 가치를 깨달은 웬디와 상반되는 결정을 하였다.
"마법은 피터의 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부터 피터의 이야기는 잠자리 이야기에 그쳐 있다."
웬디가 겪은 '피터가 사는 섬'에서의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가 되어 웬디의 아이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희망과 꿈이 가득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모험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불어넣는 '잠자리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 또다시 피터가 탄 기차가 찾아온다. 어린 웬디를 닮아 강한 모험심과 호기심을 간직한 웬디의 딸은 이 기차를 탄다.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웬디의 딸이 '나이 듦'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과연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지, 아니면 영원히 어린 아이가 되어 그곳에서 살아갈지.
'잃어버린 꿈과 희망, 그리고 동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 영화였다.
어린 시절 나는 정말 무수한 꿈을 가진 아이였으며, 항상 희망찬 아이였다. 하지만 커가면서 자연스레 이 꿈과 희망들은 사라졌다. 포기했다기보다는 '사라졌다'라고 표현해야 적절한 것 같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점점 현실을 깨닫고 이에 적응해가며 자연스레 내가 가진 (조금 무모하다고도 생각되는) 꿈은 사라져갔다.
이런 꿈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되어 현실에 치여 힘들게 살아갈 때 문득 떠오르곤 한다. '아 그땐 이런 꿈을 가졌었지', '그땐 참 순수했지', '어릴 땐 겁도 없었다' 등의 생각처럼 말이다. '어렸던 나 자신'이 그립다기보다는 '어릴 때 내가 가졌던 순수한 꿈'이 그리운 것 같다. 순수했던만큼 많은 열정을 가졌고,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종종 그립다.
하지만 '피터'가 나타나서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는 섬에 가자는 제안을 한다면 거절할 것 같다.
현실세계에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많이 힘들고 버티기 어렵다. 언제 진짜 어른이 될지도 불확실하다. 마냥 불안정한 시기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면적으로)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마냥 순수하기만 하던 꿈이 아닌, 앞으로 살아가며 '진짜 이루고자 하는', '진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지게 된다. 이 꿈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 속의 '웬디'처럼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가며 얻는 지혜만큼 값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피터의 섬'에서 겪는 일들이 아무리 재미있고 뜻깊다 해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린 아이들보다는 다소 지친 현실을 살고 있거나 때때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혹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를 겪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이 모험을 하며 우리는 여러 감정을 겪고 이를 통해 또다른 교훈을 배우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또다른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피터의 섬 안에 줄곧 있으면서 이런 흥미진진한 모험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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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킹덤 : 아신전
줄거리
조선을 뒤흔든 좀비 사태, 그 시작에는 아신이 있었다!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숨은 의미 찾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해석이니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 읽어주세요*
조선의 북녘 끝자락, 압록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번호부락.
애매한 위치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도 애매하다. 그들은 100년 넘게 조선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여진족이라 불리고, 여진족에게는 동족을 배신한 무리라고 손가락질당한다. 추성훈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 불리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 불린다던.
아신전은 킹덤에서 내내 언급되던 '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타합은 성저야인이 모여 사는 번호부락의 대표자이자 백정이다. 도축을 하는 백정은 천민 계급 중에서도 멸시당하던 계급이었다. 고기를 사러 온 조선인은 타합이 자신들의 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대는 물론이고, 아이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이 짧은 장면에서 번호부락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흙이 묻은 고기를 집어 드는 타합의 손에 피가 흐른다.
그것은 조선인의 것도, 여진족의 것도 아니다.그들은 영원히 조선에 섞일 수 없다. 그리고 섞이지 못함은 죄가 된다. 어떻게든 곁다리를 걸쳐보려 해도, 공물을 바치고 온갖 충성을 다해도 타합에게는 관직 하나 내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조선인과 여진족 사이에 고립되어 존재를 부정당한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타합은 결국 파저위에게 ‘피를 배신한 밀정’이라고 낙인찍혀 죽임 당하고 번호부락은 몰락한다. 어떻게든 조선 땅에 머물고 조선인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홀로 남은 아신은 ‘독한 년’ 소리를 들어가며 그저 묵묵히 살아남는다.
아신은 아버지와 달리 ‘파저위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설정한다.
조선에 속하고 인정받는 일 따위는 그녀에게 관심 밖의 일이다. 그저 복수 외에 그녀는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예를 자처해 아무 대가 없이 궂은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저항 한 번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에게 ‘사람 대우’ 받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타합이 첫 장면에서 돼지를 썰던 것, 아신이 돼지우리를 거처 삼아 자던 점을 생각하면 고통이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호 부락은 끝끝내, 죽어서까지도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오랑캐 마을’ 일뿐이다. 추파진에게 타합과 아신의 희생은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사실 아신은 계속 괴물이었다.
가족과 마을을 잃은 날, 아신의 마음에는 분노의 싹이 텄다. 저 대신 복수를 해달라고 민치록을 찾아갔으나, 민치록 역시 자신이 복수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신은 꾹꾹 눌러 담아 참아오던 분노를 터트린다. 복수를 시작한다.
“조선땅과 여진 땅에 살아있는 모든 걸 죽여버리면, 나도 당신들 곁으로 갈 거야.”
괴물로 변한 번호부락 사람들은 아신의 내면을 그대로 표출한다.
추파진 군사들이 아신이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모조리 묻고 왔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은 아신이 생사초를 먹였다가 모두 괴물로 변한 상태였다. 그 사실이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이유도 아신의 심경변화에 있다. 그녀는 산짐승을 잡아다 주며 그들을 보살펴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사람의 피와 살이었다.
마찬가지로 아신은 조선이 파저위에게 복수를 해줄 것이란 헛된 희망과 믿음으로 자기 내면의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나름대로는 분노가 튀어나오지 않게 참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것은 번호부락을 몰락에 빠트린 모두의 피와 살이었던 것.
음식을 나눠먹고 웃음이 가득하던 번호부락은 더 이상 없다. 아신 역시 안다. 행복했던 그 시절은 그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뜨거운 분노와 차가운 복수심뿐이다.
아신은 생사초를 먹지 않았으나, 결국 피와 살을 취하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번호부락의 ‘번호’는 ‘울타리 번’, ‘오랑캐 호’ 자를 쓴다. 이를 의역하면 ‘북방 경계에 울타리를 이루고 사는 오랑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번호부락이라는 단어조차 그들을 오랑캐로 낙인찍고, 그들을 울타리에 가둬 북방에 고립시키며, 조선인과의 선을 긋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아신을 괴물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냐고.
진짜 울타리에 갇혀있던 것은 누구였느냐고.
피의 역사, 그 시작
감상평
이창과 서비를 만난 아신을 기대했는데,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킹덤 프리퀄이라니 재미없을 수가 없다. 이쯤 되니 작가 양반 진짜… 이 모든 걸 설계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빨리 킹덤 3도 내놔요.
아, 올 때 시그널 2도 같이…어쨌든 킹덤은 ‘피’라는 단어가 늘 관통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이창과 아신의 만남이 기대되는 이유도 그렇다. 쉽게 비유하자면 해원 조 씨가 슬리데린 같이 적법한 혈통, 순수 혈통을 중요시하는 편이라면 이창은 그리핀도르 타입이랄까.
마땅히 권력을 잡아야 할 핏줄이 없다고 믿는 이창이니만큼, 마땅히 죽어야 하는 핏줄 또한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창이 아신과 대립하더라도, 분명히 아신을 괴물로 여기지만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선다.
아신전은 피의 역사, 그 시작을 향해 간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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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주 최신 개봉영화(건파우더 밀크셰이크, 쇼미더고스트, 리스펙트, 좋은 사람, 내가 날 부를때)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건파우더밀크셰이크 #쇼미더고스트 #리스펙트 #좋은사람 #내가날부를때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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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우렌의 결혼 - 완성도보다는 힐링과 성장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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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꿈꾸며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연출 ‘승주’. 하지만 현지의 고려인 감독 ‘유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예정된 결혼식을 놓치게 되며 다큐멘터리 촬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연출을 해서라도 다큐를 완성해 오라는 압박을 가하는데... 이때 ‘승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던 ‘유라’ 감독의 삼촌 ‘게오르기’는 가짜 신랑, 신부를 구해서 결혼식을 찍자고 하며 ‘승주’가 신랑 ‘다우렌’이 된다. “지금부터 가짜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다큐 찍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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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경고> 메인 예고편
친구의 부탁으로 조카를 봐주기로 한 아이작.
어마어마한 보수에 수락했지만 기묘한 조건이 붙는다
#1. 이동을 제한하는 사슬 조끼를 입을 것
#2. 조카의 방에 들어가지 말 것
#3. 허락 없이 집을 떠나지 말 것
외딴섬에 위치한 미로 같은 집과 석궁을 들고 다니는 조카, 섬뜩한 토끼 인형까지…
이곳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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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위트 투스: 사슴뿔을 가진 소년> 티저 예고편
[2021년 6월, 넷플릭스 공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슴. 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소년.
그 아이가 종말 이후의 세상을 가로질러 위험한 모험을 시작한다.
퉁명스러운 보호자와 함께, 어딘가 있을 새로운 시작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