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평2025-05-24 16:06:54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영화 <브릭레이어> 리뷰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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