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2025-04-29 20:21:35
불편한 웃음도 웃음이다, <조용한 가족>
한국영화리뷰 2 - <조용한 가족> (김지운, 1998)
<조용한 가족> (김지운, 1998)의 포스터에는 ‘코믹잔혹극’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그 문구와 참 잘 어울리는 잔혹한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부모님과 삼촌, 3남매로
이루어진 여섯 명의 가족은 이장의 추천으로 산장을 싸게 매입하여 영업을 실시한다. 파리만 날리던 산장에
드디어 첫 손님이 찾아오지만, 그는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다. ‘아버지(박인환 役)’는 산장의 영업에 지장이 갈 것을 우려하여 시체를 몰래
묻어 버리자고 한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여러 가지 일들이 가족을 덮친다.
이 ‘조용한’ 가족은 죽음을 비밀로 묻어 버리기로 하고, 시체도 묻어 버린다. 그리고 일은 눈덩이가 눈밭을 굴러가듯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인물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행위에 점점 과감해지고 익숙해지며 가벼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악행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땅에 묻었던 시체들은 비가 쏟아지면서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땅을 파헤치는 도로 공사가 산장 주변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도 가족들은 여전히 검지를 입술에 댄 채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관객들은 여전히 침묵을 요구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복잡한 심경으로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이 영화의 재미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소는 블랙코미디 장르의 불편한 웃음이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인물들이
범죄 행위에 점점 익숙해지며, 범죄와 일상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영민(송강호 役)’은 바닥에 고인 피를 밟고 미끄러지고,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보고
시체를 발견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던 처음과 달리, 이내 살인이나 매장을 농담삼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악행에 무뎌지는 모습을 보인다. 영민의 삽질 실력은 점점 늘고, 와중에 다른 가족들은 영민의 실력을 칭찬하며 함께 웃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
볼 만한 점은 가족들이 내부인(가족 구성원)과 외부인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다. 처음 가족들이 죽음을 묻기로 한 것도 가족들의 생계와 직결된 산장 영업을 계속하기
위함이다. 영민은 동생 ‘미수(이윤성 役)’를 강간하려는 남성과 몸싸움을 하다 남성이 절벽에서 떨어지게
하고, ‘어머니(나문희 役)’는
시체를 묻고 귀가한 가족들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하면서 든든한 밥상을 차려 준다. 영화의 후반부, 산장에서 청부살인까지 발생(하려고)했을
때에도 시체 두 구를 본 가족들은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진 영민을 위해서만 의사를 부르고, 병원에 가는
영민을 걱정하며 자신들의 봉고차까지 끌고 나선다. 그리고 잠시 뒤, 같은
계단에서 이번에는 외부인이 떨어져 죽자 가족들은 한 번 더 죽음을 감춰 수습하려고 한다. 영화는 이렇듯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에 차이를 두면서 아이러니를 통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웃음 또한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가족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는 장면은 이 영화에
꽤 자주 등장한다. 웃고 있는 가족의 모습, 그리고 그 인물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죽음을 맞는 외부인의 상황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또 가족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무장 간첩’들의 모습을 보며 ‘생매장을 시켜 버려야 한다’는 식의 농담을 하면서 즐겁게 웃기도 한다. (이때의 ‘간첩’은 한국
사회의 외부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외부인의 죽음에 등을 돌린, 또는 익숙해진 인물들의 모습 또한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를 고르자면, 역시 배우들의 조합과 호연일 것이다. 박인환, 나문희, 최민식, 송강호
등 하나의 작품에서 뭉치기 힘든 배우들이 한 가족을 연기하며 만들어내는 호흡은 인상적이고 확실한 재미 요소가 되어 준다.
잘 만들어진 한국형 블랙코미디라는 말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가족 중심 문화, 내부인-외부인의 관계(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간첩 등) 등 한국 문화의 중요 코드를 과장하기도
하고 끼워 넣기도 하며 극적으로 활용한, 잘 빚어진 한국 영화라고 생각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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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까운 작품에서 빛나버린 배우들의 연기력
어떠한 정보도 없이 조승우가 나오는구나! 사극이구나! 라는 점만 알고 왔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 작품이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이야기인 줄 꿈에도 모르고 봤다. 극이 시작하면서 민자영이 어쩌고 이래서 민,,,자영,,? 명성황후? 하고 뒤늦게 깨달았고, 역사왜곡은 이해하더라도 과연 그 입장 차이를 잘 풀어낼 수 있을지 불안해 하며 본 작품이었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시놉시스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은 어느 날,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피비린내에 찌든 자신과 너무나 다른 여인, 자영을 만나게 된 것. 하지만 그녀는 곧 왕후가 될 몸으로, 며칠 후 고종과 자영의 혼례가 치러진다. 무명은 왕이 아닌 하늘 아래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면, 자영을 죽음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입궁 시험에 통과해 그녀의 호위무사가 되어 주변을 맴돈다.
한편, 차가운 궁궐 생활과 시아버지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자영은 무명의 칼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외압과 그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자영의 외교가 충돌하면서 그녀를 향한 무명의 사랑 또한 광풍의 역사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왜곡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개연성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재현은 언제나 역사왜곡 논란이 거듭된다. 왜냐면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개혁 개방 정책을 한 왕후를 좋게 보기도 하지만 그 방향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 방법은 옳지 못했기에 나쁘게 평가를 하기도 한다. 더불어 을미사변으로 시해됐을 때 목격자들 마저 모조리 몰살당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 소재는 미디어 재현으로서 굉장히 적합한 소재이면서도 역사 왜곡이 너무나도 쉽게 될 수밖에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이처럼 논란이 많은 명성황후, 민비를 소재로 택햇기 때문에 역사 왜곡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왜곡을 한다 하더라도 그 왜곡된 내용 안에서는 개연성이라도 갖춰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보는 내내 도대체 저 둘은 왜 사랑에 빠진 것인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봤는데...? 수애 정도의 미모면 물론 한 눈에 반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까지 목숨바쳐 사랑할 일인가? 저렇게까지 식음을 전폐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큰 주제 자체에서 이미 개연성을 잃어버려서 영화를 보는 내내 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던 작품
주제 자체로도 개연성이 없는데 장면장면도 개연성이 없었다. 불필요한 장면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무명이 자객이고 무술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굳이 저렇게 티나는 CG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휘영청 달빛이 쏟아지는 바다 위 쪽배에서 칼로 싸우는데,,, 무슨 만화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물 마시며 보다가 사례 들릴 뻔 했다. 그리고 연희장에서 뜻하지 않게 펼쳐진 대련에서 갑자기 빙판 CG라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격동적이고 화려한 무술을 보여주고 싶다면 저런 CG 말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게 훨씬 더 임펙트가 있었을텐데 안타까웠다.
또한, 무명을 의식하기 시작한 고종이 무명의 자존심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일부러 무명을 침실밖에서 호위를 하게 하고 자영과 관계를 갖는다. 굳이,,? 이런 질투유발작전을 펼칠 이유가 있었을까? 이렇게 정말 쓸데없는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잇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작품에서 빛나버린 배우들의 연기력
이렇게 안타까운 작품에서 더 안타까웠던 점은 저렇게 평면적인 캐릭터들을 배우들이 너무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 진짜 너무 안타까웠다. 어떻게 조승우, 수애를 데리고 와서 이런 작품에 출연시킬 수 있었을까? 솔직히 조승우, 사극, 액션, 멜로 이 조합을 보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손발이 오글거리고 대본을 보고 출연을 결심한 것이 맞을까? 어디 누구한테 협박당해서 출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작품은 정말 안타까웠지만 그 와중에 배우들은 무명과 자영의 캐릭터에 온전히 녹아들어서 그들은 빛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난다고 해도 이 영화는 추천할 수가 없다. 킬링타임용으로도 아까운 작품이니 말이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조승우 필모 깨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보지 않았을 작품이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고 씁쓸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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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집 남편 괜찮다!
결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이미지들은 아마도 성장과정에 가정에서 보고 배운 바를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첫문장은 아직까지도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톨스토이가 이 책을 쓰던 1800년대에도, 지금까지도 수많은 가정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현세대의 결혼기피현상을 집값으로 뭉뚱그려 보는 사람이 많다. 정말 돈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걸까?
남성의 입장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물들도 수컷이 둥지도 없이 암컷에게 구애하지는 않을 테니까.
반면 여성의 경우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결혼적령기 여성들은 부조리한 가정 상황을 목도하며 자라왔고, 그것이 내 일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비혼을 말한다.
나도 그런 쪽이다.
이를테면 맞벌이를 하지만 요리청소빨래 집안대소사 모든 것을 감당하는 엄마와, 새벽 5시에 엄마가 일어나서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엄마가 차린 저녁 먹고 TV에 나오는 외화를 보다가 술 한잔 하고 자는 아빠. 그걸 다 치우고 녹초가 되어 잠든 엄마.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느라 집에 안 오는 아빠. 친구도 없는 엄마. 그리하여 온몸의 관절에 관절염이 왔으나 아직도 일하는 엄마와 단지 술로 인해 병든 것 외엔 건강한 아빠.
나는 결코 엄마의 삶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구한 차별의 역사쯤이야 일이 년만에도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악습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전복시켜버린 여자가 있다. 이름은 박강아름.
#역할전복
박강아름은 진보당 활동을 하던 정성만을 만나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먼저 결혼하자고 하고, 공부를 해야겠으니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이미 결혼을 해버렸으니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비혼주의자였던 정성만은 한국에서 요리보조로 일하며 소설을 쓰던 사람이었다.
박강아름과 달리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박강아름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를 낳았다.
프랑스에서의 출산과정은 지난했다.
커뮤니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도와줄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박강아름은 모든 걸 감내한다. 어차피 아이를 낳는 건 본인 몫이니까.
그렇다. 아이를 낳는 건 여자의 몫이다.
토하고, 쓰러지고, 입원하고, 뼈와 근육이 제멋대로 놀고, 출산 후 손목 통증이 가시질 않고. 젖을 물리는 내내 젖꼭지에 피가 난다.
그러므로 출산에 관한 선택은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
정성만은 무엇을 하는가 하니, 살림을 한다.
박강아름의 표현에 따르면 '독박살림 독박육아'다.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는 모든 역할을 정성만이 한다.
박강아름이 학교에 다니고 작업을 하는 동안 정성만은 박강아름의 보조, 정성만의 표현에 따르면 '식모'다.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가 아닌가.
남편을 따라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아이를 낳고, 밥을 짓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고, '식모' 같다고 느끼는 삶.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요새 맞벌이 안 하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돈도 벌고, 애도 키우고, 집안일도 하고. 결혼 전과 돈 버는 건 같은데 노동의 양은 몇 배로 증가한다.
또는 수 년간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내, 엄마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러려고 공부하고 일한 건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 사람들은 웃는다.
성만이 살림할 때, 본인을 '식모'라고 부를 때, 살림의 고달픔을 토로할 때, 혼자 김장을 하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말을 걸 때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과연 그 반대였더라면 웃음 포인트가 되었을까?
그저 일상적인 풍경을 보면서 웃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재능있는 여자들이 예술가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재능을 갖다 버리는 걸 수도 없이 보고 듣고 겪었다.
#외길식당
이들 부부는 프랑스에 와서 자아가 없어진 성만을 위해 가정집 원테이블 식당을 열기로 한다.
원래도 요리를 잘했던 터라, 성만은 내심 기뻐 보인다.
부부의 식당에는 가난한 유학생, 집밥을 그리워 하는 유학생들이 찾아온다.
그릇을 사고, 좋은 재료를 고르는 성만의 표정이 밝다.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는 사람은 고립되기 마련이다.
성만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름 뿐.
뜨겁게 사랑하다 보면 세상에 너랑 나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을 거라고 말하게 되지만, 실제로 세상에 단둘이 남겨지면 미쳐버릴지 모른다.
고립되어 가던 성만은 외길식당을 차린 후에, 한식부터 일식, 중식, 양식까지 뚝딱 만들어내며 자신의 쓸모를 다 한다.
하지만 집안 살림에 식당 영업까지, 아름은 작업에다 손님 대응까지 하려니 힘에 부친다.
결국 외길식당은 문을 닫고, 이사를 몇 번 다닌 후에야 다시 문을 연다.
이유는 역시나 그들의 고립 때문이다. 고립된 채 서로에게만 의지하는 부부에게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넌 이런 부분이 이기적이야, 너는 늘 이기적이야. 그래서 아름은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외길식당2에 다녀간 여러 형태의 커플들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민들을 안고 산다.
결국 아름은 외길식당2에서도 답을 얻지 못한다.
#덩케르크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는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이 전부인 그들.
아름은 영화제작 기금을 받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그런 그들도 여행이라는 걸 떠난다.
덩케르크 해변으로 가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성만은 왜 비오는 날 바다에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아름은 바다에서 찍고 싶기 때문에 가는 거라고 한다.
이들 부부의 주도권은 대부분 아름에게 있다.
성만은 투덜대지만 어쨌든 간다.
해변에 도착하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날은 잔뜩 흐려 옥빛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모래사장으로 유모차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결국 성만이 앞에서 지고, 아름이 뒤에서 들고 바다 앞까지 간다.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는 전쟁 상황과 대비하여 바다가 너무 예뻤다.
영화관에 앉아서도 그 대사를 떠올렸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조국(Home)."
<덩케르크>를 볼 때도 그 부분에서 속으로 으악... 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던 기억이 난다.
덩케르크 씬은 마치 조국 그 자체, 프랑스에 있어도 부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성만 같은 남편이 있다면 한번쯤 결혼을 해봄직도 하다.
어쩌면, 행복한 가정의 서로 닮았은 모습이 박강아름과 정성만, 정보리강 가족에게서 보였던 것 같다.
*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박강아름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보니, 한편으로는 홈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애니메이션과 가수 이랑의 노래가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서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옥랑문화상 수상 및 국내외의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로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2020년 한 작가의 오토픽션(자전적 소설)이 문단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카톡으로 나눈 대화의 전문을 작품에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조근식 감독이 <품행제로>를 촬영할 때 1980년대 본인이 살았던 동네의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작품이 되느냐, 한 개인의 일기장이 되느냐는 개인적 관점이 전체를 관통할 때가 아닐까.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뭘까' 싶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런 관점과 용기와 행동력을 가진 여성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에서도 이미 여성의 몸에 관해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했던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보고 듣기 쉽지 않았던 여성의 자궁과 질, 출산과 모유수유, 예쁘게 꾸미지 않은 여성의 몸을 여성이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직면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현 시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응당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남자 주인공 다미앵은 어느날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성중심사회로 간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는 픽션이다.
그러나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리얼리티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 시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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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라이트만 담백하고 나머지는 어수선한
전설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자 서윤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부분이다.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 하지만 우승의 기쁨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시상식에 올라가는 손기정. 입고 있던 옷에 그려있는 일본 국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다. 뒤집힌 조선 총독부. 손기정을 겁박한다.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닌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는 말을 마지못해 기록한다. 손기정의 육상선수 커리어는 그때 끝났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1947년에서 시작된다. 냉면집에서 서빙 일을 하는 서윤복은 돈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손기정은 나라가 일제에게 벗어났다 하더라도 영 즐거운 일이 없다. 아들과 떨어진 일상. 매일을 술로 보낸다. 국민적인 영웅이라 ‘손기정 상’ 같은 시상식에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친한 동료 남승룡, 냉면집 아르바이트생 서윤복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대회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3년 후의 <쉬리>로 당시 한국영화 관객 신기록을 경신한다. <쉬리>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일이라 당시의 충무로도 반향이 컸다. 이렇게 강제규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분야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감정적으로 진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큰 규모의 신을 찍을 때 인물들을 깔끔하게 정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필수적이다. 격렬하고 광폭한 전쟁이 이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인물들은 전쟁의 광기에 혹해버렸다. 광기에 취한 인물들이 전투 도중이나 군 막사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 장면을 시각화하는 방식에도 감독의 장기가 들어가 있다. 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 장면은 좋은 의미에서 너절하다. 후반부 진태(장동건)가 피 흘리며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다음 장면은 깔끔하게 씻은 진석(원빈)이다. 심지어 진태가 처절하게 싸우는 반면 진석은 누군가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한다. 당연히 진태의 상황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데, 두 인물 간의 시각적인 대비로 전쟁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칙칙한 색감, 깔끔한 인물 동선, 처절한 전장의 분위기를 카메라로 담으며 한국전쟁이라는 지옥도를 구현한다. 이 지옥도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후반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신이 감동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 강제규 감독의 신작 <보스턴 1947>는 강제규 감독의 장기들이 알차게 들어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 신은 당연히 마라톤 장면이다. 이 장면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핵심이 되어 한국사회의 강인함과 서윤복의 단단한 내면을 상징한다. 인물이 뛰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방식이 영화의 몇 사건을 비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는 주인공 3인방을 보스턴에 곱게 보내지 않는다. 몇 가지 위기를 만드는데, 그 위기 이면에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47년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시기였다. 한국정부가 들어서기 전이라 대회 참여의 금전적, 행정적 부분에서 지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응하는 과정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마라톤과 유사하다. 사실상 1부의 초중반부와 2부의 후반부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암시하는 서윤복의 마라톤은 영화의 웅장함에 안성맞춤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글쓴이를 포함한 적지 않은 관객들이 '또 억지로 눈물 쥐어짜는 요소 넣었겠네' 우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는 이 우려를 무색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인간의 결기와 의지를 영화 후반부에 방점 찍어 마무리했다. 이 장중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강제규 감독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보스턴의 날씨를 구현하기 위해 호주에서 촬영한다거나, 임시완, 배성우 배우가 러닝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나 400여 명의 외국 배우와 함께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화라는 양날의 검
이 영화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세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야기 안에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는 설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1,2부의 이야기 이면에 깔려있는 시한폭탄임과 동시에 강제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국민성을 보여주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정직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초반부 주인공 3인방은 선수 엔트리 등록을 위해 관련 부처를 찾아간다. 이 장면에서 담당 공무원이 손기정 일행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은 사실적이다.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손기정 선수와 관련한 부분이 몇 등장하는데, 이 문제와 1947년의 보스턴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원 없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 봐도 비슷한 예시가 몇 있다. 또한 궁핍한 한반도를 보여주는 방식도 극 중 등장인물들이 마라토너라는 점에 잘 어울린다. 신발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영화는 신발을 수급하는 문제를 무작정 으쌰 으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길 만큼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이 현실성과 관련한 부분은 2부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에는 역사의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은 꼼꼼함이 느껴진다. 영화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후일담을 찾아보면 이 인물들을 꽤나 잘 살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마라톤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약간 영화적인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1947년의 보스턴에서 실제로 이뤄졌던 일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가 실화라는 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실화라는 틀에 안주한 흔적이 아쉽다. 어쭙잖은 신파극을 가볍게 벗어난 후반부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더라도 플롯의 나머지 부분들은 예상가능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인물들이 납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은빈 배우가 맡은 역할은 이야기에서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단지 서윤복에게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다. 박은빈 배우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전의 작품이 아니었어도 이 인물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어렵게 대회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어. 그럼 곱고 순한 여성 캐릭터는 영화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가? 이 문제의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또 영화 1, 2부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무례하다. 구체적으로 2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어떤 두 미국인이 갖고 있는 비중이 크다. 이 두 인물은 관객들에게 '빨리 화 내!' 겁박하는 느낌마저 든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1947년이라지만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더 차갑고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서윤복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기를 했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리 이 부분을 구현하는 게 이야기의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희생된 인물들이 아쉬웠다.
슬렁슬렁 넘어가다
영화는 인물들의 욕망과 관련한 문제를 손쉽고 전형적으로 해결한다. 먼저 이야기할 것은 주인공 서윤복이다. 서윤복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서윤복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초반부에서 영화는 서윤복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서윤복은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다. 서윤복이 초반부에 달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몇 번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주인공이 마냥 이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화의 1부가 가진 큰 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를 굉장히 쉽게 해결한다. 물론 그 사건이 이 인물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그건 인물의 동기부여에 대한 문제인거지 실제 이 인물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이 문제는 2부에서 원인만 달라진 채로 반복된다. 영화 2부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1부의 어설픈 마무리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남승룡의 경우에도 문제를 맺고 끝는것이 불확실하다. 이 인물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하지만 이 욕망을 가진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남승룡은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단 조금의 과정도 없이.
영화가 가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통일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가장 큰 이물감 두 개는 배성우와 하정우 배우다. 우선 배성우 배우와 하정우 배우는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정우 배우가 맡은 손기정 역은 <수리남>의 강인구와 별 차이가 없다(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손기정과 남승룡이 아니라 하정우와 배성우 배우 각자가 대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는 임시완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달리는 신이 아닌 선에서, 이 영화에서 본 임시완 배우는 어쩐지 <미생>과 <불한당>에서 본 기시감이다. 김상호 배우도 이 배우가 등장했던 사극의 어느 장면처럼 연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인물들이 2부에서 밥을 먹는 신이 있다. 배우들의 일상연기에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져 강제규 감독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비단 연기 말고도 편집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신파극에 대한 반발심리를 너무 의식해서인지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특히 남승룡의 서사에서 더 느껴진다. 아마 배성우 배우의 개인적 에피소드 때문인 듯). 이것 덕분에 뚝뚝 끊긴다. 심지어 인물이 오롯이 대사를 칠 때에도 컷전환이 캐릭터를 방해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표적으로 손기정이 남승룡, 서윤복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서로 대화하는 신인데 말 중간에 시점이 바뀐다. 그동안 강제규 감독이 규모가 큰 신을 깔끔하게 연출했다는 점과 반대로, 소수의 인원이 대화하는 신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밑반찬이 아쉽네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스포츠 신파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관객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장면은 멋진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등장인물을 콘셉트 아래에 가둬놓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큰 덩어리들은 있는데 중간단계들이 좁고 얕다. 이 얕은 깊이 덕에 영화 자체가 올드하게 느껴진다. 정작 영화가 우려하는 점은 다 보완했지만 이를 덮기 위한 수가 반대로 단점이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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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과 영문 제목 사이의 괴리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치가 싫었던 인권 변호사 문재인은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청와대 5년, 그는 왜 권력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사저 시위대의 욕설 속에서 그는 왜 묵묵히 꽃만 심었을까? 그를 지켜본 이들이 한 조각씩,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는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시절은 왜 '대통령 문재인'을 원했을까?' 그 퍼즐이 비로소 완성된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양날의 검
노이즈 마케팅. 가장 많이 알려진 마케팅 기법 중 하나다. 이 기법의 핵심은 이슈다. 자극적이거나 부정적이어도 좋다. 사람들의 입에만 많이 오르내리면 된다. 품질에 관계없이 관심을 끌고, 일단 제품을 알리는 것. 노이즈 마케팅의 핵심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입니다>는 노이즈 마케팅의 정수를 보여줬다. <사이에서>, <길위에서>, <목숨>, <노무현입니다>를 연출한 이창재 감독의 신작은 공개 전부터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정치적 갈등을 초래할만한 발언이 담긴 영상을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 258회에서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영상은 본편에 포함되지 않았다. 제품 품질과 무관하게 관심을 끈다는 목적을 120%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은 양날의 검이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구설수를 호평으로 바꾸지 못하면 역효과가 난다. 제품 품질에 대한 평가가 구설수에 먹힐 수도 있다. <문재인입니다>도 마찬가지다. 메시지에 쏠려야 할 관심이 정치적 공방에 묻혀 버렸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안타깝다. 지지 정당이나 정치인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문재인입니다 This is the President>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헤치다
이창재 감독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노무현입니다>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이창재 감독을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하다. 정치적 성향을 지우고 나며 그의 작품에 깃든 독특한 세계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매개체는 달라져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일관적이다.
<사이에서>는 신내림과 속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무속인의 삶을 그려낸 영화다. <길위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통해 속세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관찰한다. <죽음>과 <노무현입니다>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에 대해 묻고, 한 시대의 얼굴이 되었지만 죽음을 선택한 대통령을 그려낸다.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삶과 운명의 관계를 찾으려는 사색으로 가득하다.
<문재인입니다>도 같은 길을 걷는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퇴임한 한국 대통령은 이상한 존재다. 그 자체로 운명과 인간적 삶이 충돌하는 아이러니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모든 국민이 아는 정치인이어도, 가장 유력한 후보도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당선될 수 없다.
하지만 끝은 가혹하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현직 못지않게 무겁다. 죽거나, 망명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자살하거나... 누구 하나 희극을 맛본 이가 없다. 그러니 퇴임 후 조용히 잊히고 싶다는 대통령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마모되고 부서지기 일쑤인 자리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지지와 비난이 맞닿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문재인입니다>는 그 삶의 의미를 찾는다.
대통령의 두 얼굴, 아틀라스와 프로메테우스
영화는 대통령이라는 운명을 마주한 인간을 둘로 쪼개 카메라에 담는다. 한쪽에는 아틀라스가 있다. 지구만큼이나 무거운 과업을 5년 동안 수행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쪽에는 헤라클레스를 만난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그는 마침내 형벌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았다.
처한 상황이 상이한 만큼 두 이미지를 묘사하는 분위기도 다르다. 오랜 변호사 동료와 임기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의 진술은 아틀라스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이들의 증언은 단순한 '문비어천가'가 아니다.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특징을 나름 객관적으로 들려준다. 인내하는 사람, 듣는 사람, 과묵한 사람의 장단점이 빠르고 날카로운 리듬으로 제시된다.
그 과정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도 등장한다. 주한미군 방위금 문제, 일본과의 무역 전쟁, 조국 사태 등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정치적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굵직한 현안을 헤쳐 나오는 주인공의 습관과 태도, 정치 방식을 전할 뿐이다.
반면에 자유로워진 프로메테우스는 평화롭다. 대통령 퇴임 직후 그가 아내와 비서진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가꾸는 일상을 보여준다. 반려 동물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산책에 나서는 모습이 뒤따른다. 전 대통령의 일상은 긴 템포로, 차분하게 전시된다. 물론 운명의 무게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반대파의 외침이 그의 집을 감싼다. 과거의 결정이 최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조롱과 욕설에 침묵하며 농사짓고 반려 동물을 돌보는 삶. 이 전원생활을 보다 보면 천성적으로 정치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난리 끝에도 조국 전 장관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동정과 비난 사이로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이는 <문재인입니다>가 영화적으로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한 듯 보이는 이유다. 아틀라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프로메테우스가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 과중한 운명을 마주한 인간의 두 얼굴을 성공적으로 포착한 셈이다.
국문과 영문 제목의 괴리감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문재인입니다>의 영화 외적인 선택은 더욱 의아하다. 마케팅을 비롯한 선택 하나하나가 영화의 본질을 가리고 불필요한 논쟁과 소모전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제목부터가 문제다. 물론 전작 <노무현입니다>와 이어지는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열망이 읽히기는 한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 분량도 일부 있다.
하지만 <문재인입니다>라는 제목은 내용이나 메시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영화는 문재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한 한 인간을 살핀다. 그런데 매개체에 불과한 문재인이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는 한국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논쟁이 함축되어 있다. 이슈 하나하나가 찬반이 격돌하는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남북관계, 탈원전, 한일관계 등. 즉, 문재인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역으로 영화의 참뜻을 가려 버린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영문 제목인 <This is the President>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본질에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다가간다. 잘못 번역된 외국 영화 제목이 오해를 초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문재인입니다>는 보기 드문 반대 사례인 셈이다. 국문과 영문 사이의 괴리감은 영화 외적 요소가 평가와 해석, 감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어떤 이유 때문이든 과소평가한 결과처럼 보인다. 감독의 전작이나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Poor 형편없음
의도는 흥미롭다. 그러나 방해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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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용감한 한 걸음
"자신의 몸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낸시'와 자신의 몸과 쾌락을 탐색하고 추구하는 '리오 그랜드'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또는
"자존감이 없어진 '낸시'와 쾌활한 모습 뒤에 어딘가 감춰진 면이 있는 '리오 그랜드'.
이 둘이 서로 만나 어떻게 변화할까?"
저는 영화 <굿럭투유, 리오 그랜드>를 보면서 이 두 가지 부분에 중점을 두어 봤는데요.
여러분도 영화를 보기 전에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보셔도 되고, 영화가 끝난 후에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ㅎㅎ
평생을 규칙적인 삶에 길들어져 공허하게 살아온 '낸시'와 사람들에게 퍼스널 서비스를 해주며 해방감을 갖도록 해주는 '리오 그랜드'.
궁금하시지 않나요?
낸시: 규칙적이고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 싶어.
영화 속 '낸시'의 모습 중 가장 돋보이는 점은 바로 자신감과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인데요.
유독 자신과 자신의 몸을 바라볼 때면 그녀는 금새 주눅들고 말죠.
어쩌면 자신의 몸을 아니꼽게 바라본 것일지도요.
낸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올곧은 선생님으로, 항상 규칙과 올바른 마음가짐 및 자세를 강조하며 살아왔어요.
그 어느 것도 정해진 범주 밖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여겼죠.
전화가 오면 바로 받아야 한다든가 등등.
그랬던 그녀가 자신이 늘 강조해왔던 단정한 삶에서 탈피하여 큰 용기를 내는데요.
바로 퍼스널 서비스를 받아보는 것이었죠.
낸시는 퍼스널 서비스를 받기 전, 그를 기다리면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데요.
자신이 늙으면서 변해버린 몸이 그녀의 자존감을 더욱 떨어뜨리게 했죠.
그녀는 옷으로 자신의 몸을 꽁꽁 가린채 그나마 자신 있는 부분은 종아리뿐이라며 말하곤 해요.
이 장면은 낸시가 자신을, 자신의 몸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한 그녀가 '리오 그랜드'를 만나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하게 될까요?
리오 그랜드: 사람 간의 행해지는 육체 관계와 소통은 힘이 있어요. 사람들이 저를 통해 이 점을 알아가면 좋겠어요.
'리오 그랜드'는 쾌활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있으며 개방적인 인물이에요.
낸시가 서비스를 요청한 사람이 바로 리오 그랜드이기도 하고요.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람들이 성적 욕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직업 만족도가 최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성관계는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어 도움을 주고, 그로 인한 소통은 큰 힘이 되어준다고 생각하죠.
리오 그랜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서비스를 통해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하고요.
그런 리오 그랜드도 유쾌한 모습 뒤에 어딘가 어두운 면이 자리잡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는 어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자신의 일에 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족에게는 사실대로 말하고 있지 않아요.
낸시가 얼핏 가족 얘기를 꺼내면, 리오 그랜드는 밝았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는 모습을 자주 비추죠.
그는 어렸을 적 친구들과 뒤엉켜놀며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는데요.
그때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이 갑작스럽게 집으로 들어오고, 이 광경을 맞닥뜨리게 돼요.
그 이후부터 엄마는 자신의 아들인 리오 그랜드를 무시하며 사람들에게 아들은 죽었다며 없다며 말하고 다니죠.
리오 그랜드가 수백 번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런 아픔이 있었던 리오 그랜드는 차마 가족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리오 그랜드도 굉장히 예민하고 아픔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뒤섞여 있어요.
그런 그가 낸시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 저는 <굿럭투유, 리오 그랜드> 영화가 관계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이루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성관계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꿔주게 만드는 영화더라고요.
사람 간의 소통과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중 저는 영화 속 몇 가지 포인트 및 매력에 관해 얘기해볼까 해요.
1. 소통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과의 마주침
저는 낸시와 리오 그랜드, 서로가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뀐 점이 왠지 모르게 뿌듯했어요.
덩달아 흐뭇해졌다고 할까요.
둘은 첫 만남때부터 성급히 관계를 맺지 않고 대화로 풀어나가는데요.
관계를 맺고자 해도 낸시는 끝내 머뭇거리는 등 관계보다는 아무래도 대화를 우선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하늘로 떠난 남편과도 관계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낸시에게 있어 관계는 아무래도 조금은 두려웠을 거예요.
이 둘이 관계가 우선이 아닌,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그런 다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 가장 인상 깊었고 동시에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되었어요.
첫 만남, 두 번째 만남, 세 번째 만남, 네 번째 만남 모두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맞춰가는 과정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요.
낸시와 리오 그랜드 모두 각자 자신이 속으로 품고 있던 부정적인 모습이나 감정을 소통을 통해 힘들어도 부딪혀보려고 노력했으니까요.
그 결과, 그들은 과거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비로서 웃음을 되찾게 되죠.
낸시는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게 되었으며,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자신감을 되찾고 나서 거울을 봤을 때 자기 자신의 몸을 대하는 태도가 뒤바뀌었다는 점을 알 수 있어요.
리오 그랜드 역시 낸시가 자기 정보를 캐고 엄마 얘기를 꺼냈을 때 아주 민감했다면, 소통을 통해 모두 털어놓은 이후부터는 마음의 여유와 안정감을 되찾았다는 게 그의 웃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2. 공간
영화의 주 공간 배경은 '호텔'인데요.
영화의 첫 시작부터 거의 마무리될 때까지 호텔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쭉 이어진다는 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간이 여러 번 다채롭게 바뀌지 않고 한 공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오히려 그 둘의 속사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들의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더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요.
호텔이라는 한 공간에서 주로 이어진다고 하니 지루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런 걱정도 잠시 영화를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에서 또 개인의 취향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요.)
저는 영화가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편에 속하는데요.
제가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건, 공간의 역할도 한 몫하지 않았나 싶어요.
성에 관해 바라보는 관점이 영화를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용감해진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장 눈여겨 봤던 점!
=> 낸시와 리오 그랜드, 서로가 만나 어떻게 변화했는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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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긴장감의 서부극!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작은 긴장감이 늘 자리한다. 혼자 있는 시간만 있다면 그런 긴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그리고 직장 동료와 보내는 시간 등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이라는 그림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의 시간 속에는 크고 작은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긴장이 작으면 보통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불편함이 커지면 큰 긴장이 따라오고 평상심을 잃게 만든다. 우리가 평소에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긴장은 시종일관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삶에 영향을 준다.
다른 어떤 관계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긴장감이 일상에 배어들어있다. 부모와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아이가 자라나는데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가족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각 가족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긴장의 정도도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관계의 모습과 미래도 다르다. 그 긴장을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이고, 그것일 시답잖은 것으로 느끼면 무시하고 외면할 것이다. 각자가 느끼는 긴장감에 따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나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각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일상 속에 스며든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다. 1925년 미국 몬태나를 배경으로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고 있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비치)와 조지 버뱅크(제시 플레먼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영화 초반에 필과 조지가 일 때문에 로즈가 운영하는 숙박 업소에 방문하게 되면서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대할 때 만들어지는 그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시선을 잡아놓는다.
이들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다, 필은 호탕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다. 반면 그의 동생 조지는 좀 더 섬세하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인물로 필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는 로즈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을 받는 로즈는 남편을 잃은 이후 아들과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숙박업과 식당을 운영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아들인 피터는 조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손으로 하는 세심한 작업들을 잘한다.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감성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이 네 인물이 만나게 되고, 그중에서 조지와 로즈는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데 어찌 보면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가족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가 좀 더 집중하는 건 각 인물들의 감정과 표정이다. 비록 로즈에게는 재혼이긴 하지만 조지의 관심을 받은 그는 결국 조지를 선택하면서 그의 가족 일원이 되는 선택을 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고 안정적인 일이 있었던 조지를 택한 로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조지의 형인 필의 시선은 무척 좋지 않다.
로즈와 피터가 필과 조지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간단히 보여주던 영화는 피터를 대학에 보낸다는 설정으로 잠시 이야기에서 제외시킨다. 그 이후 집중하는 건 조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로즈의 감정이다. 비록 시부모님이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조지의 형인 필은 남성주의적인 성향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리에 들어온 여성인 로즈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 그는 로즈를 무시하고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조지는 로즈가 부담스럽지 않게 최대한 애쓰지만 로즈는 말이 없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그는 술에 의지해서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로즈가 술에 의지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면 속 로즈의 얼굴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런 로즈의 심리를 무척 세세하고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의 서부극
사실 이 독특한 서부극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상하기는 무척 힘들다. 초반 조지와 로즈에게 집중했던 영화는 로즈와 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가 다시 피터와 필의 관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서부극이었다면 분명히 총을 이용한 격투가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등장했을 테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비슷한 장면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을 무척 잘 활용하고 있다.
영화 속 로즈의 아들인 피터는 영화 중반 이후에 학교의 방학기간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필은 피터의 여리여리한 모습과 취미를 조롱하고 무시했던 인물이다. 그렇게 시작된 피터에 대한 조롱은 로즈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구도는 영화 후반부에는 완전히 깨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피터의 모습을 보던 필은 어느 순간 그에게 따뜻한 말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조금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른 남자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피터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필과 피터가 먼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개 모습의 그림자를 같이 봤을 때 무언가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 중반부까지가 로즈와 필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후반부는 필과 피터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감정이 될 수도 있고, 두 사람 간에 남아있는 앙금과 적대적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어떤 인물에 감정을 대입하는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과 피터가 다시 만난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것은 적대적인 긴장이지만 둘 사이에 어떤 사건 이후로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바뀌는 긴장으로 변경된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필로 인해 발생한 관계의 긴장에서 로즈는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술에 의지한 방식인데 그것에 의존하면서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소심하게 필의 심기를 건드린다. 즉 그가 가진 힘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방식이 조금은 무력해 보이는 방식인 것이다. 반면 피터는 필에게 느껴지는 친숙감을 이용해 둘 간의 신뢰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에게 만들어진 동질감은 피터가 필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게 되는데 두 사람 각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각자가 서로 적대감을 갖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도의 심리전이 바탕에 깔려있다.
조화로운 세 가지 : 훌륭한 연출, 좋은 영화음악 그리고 뛰어난 연기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절대 마음을 놓고 볼 수 없는 서부극이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굉장히 효과적이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는 그룹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여러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작곡을 하기도 했다. <펜텀 스레드>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 음악에 참여했는데 음악으로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심리를 음악을 통해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영화 음악 역시 각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음악을 통해 극대화시켰다.
영화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은 영화 <피아노>로 20대 미혼모의 이야기와 그의 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을 했었다. 이후 <여인의 초상>과 같은 영화를 연출했었는데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어서 연출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번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여성을 비롯해 남성의 심리를 꿰뚫는 연출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필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 비치의 연기가 훌륭하고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의지한 채 망가져가는 로즈 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도 무척 실감 난다. 또한 인물의 실제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인 피터를 연기한 코디 스밋 맥피의 연기도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연출,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무척 독특하고 몰입감 있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의 제목인 <파워 오브 도그>는 성경의 구절인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라는 말에서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영화 속 필과 피터가 함께 보는 산등성이의 개의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던 해석은 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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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makOjhOAw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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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4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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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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