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5-23 08:04:57
속내 모를 괴물 CIA, 플롯의 손쉬운 알리바이
영화 〈브릭레이어〉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CIA가 자신들의 비밀 활동을 비판, 추적해온 유럽의 저명한 기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이 돈다. 그리스의 유력 정치인 코스타스는 기자 살해 사건의 배후를 밝힐 필요가 있다며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 사이에서는 반미 정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정치적으로 응집된다. CIA에게 덧씌워진 혐의는 그럴듯하고, 이에 반발하는 유럽 대중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그리고 이 소동의 핵심에는 한때는 CIA의 협력자였으나 이제는 원한에 사로잡힌 적이 된 빅터 라덱이 있다.
전직 CIA 요원 스티브 베일이 다시 현장에 복귀해달란 요청을 받는다. 라덱은 베일이 현직일 때 가장 가까이 지낸 요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즈니스를 넘어선, 우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CIA가 라덱에게 코스타스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라덱은 CIA가 부여한 여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그가 위험천만한 현장을 떠나 가족과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는 날은 자꾸 미뤄지기만 했다. 정치인 코스타스 암살 명령이 떨어진 건 이때였다. 라덱은 이 일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CIA는 라덱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다. 이 사건으로 ‘흑화’한 라덱은 CIA 내부의 배신자와 결탁해 거대한 공작을 벌이고,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CIA가 자신에게 요구한 임무인 코스타스 살해 명령을 뒤늦게 수행하려고도 한다. CIA가 코스타스를 죽인 것처럼 꾸며 복수하기 위해서다.
은퇴 후 벽돌공으로 일하던 베일은 신입 요원 케이트 배넌과 짝을 이뤄 유럽으로 가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 초반의 액션 몰입감은 꽤 괜찮은 편인데, 정작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힘이 달리는 듯해 아쉽다.
라덱을 저지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두 사람은 모두 CIA를 떠난다. CIA가 보편적인 선악 기준이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에, 즉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직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근육과 싸움 실력을 가진 베일의 직업이 하필 벽돌공(bricklayer)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벽돌공이 구체적인 삶에서 무언가를 차근히 쌓아감으로써 성취를 얻는다면, CIA는 추상적 조직 논리로 조직원을 추동한다. 베일과 배넌이 CIA와 합을 맞춰 라덱을 막는 데 나섰다고 해서 이들이 CIA의 논리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지향은 오히려 ‘타락’한 라덱의 분노, 울분에 가깝다.
첩보, 액션 영화에서 정보기관은 늘 이렇게 재현된다. 무지막지하고, 조직 논리가 최우선이며, 사람이 죽어 나가고 혼란이 초래되는 데 무심하다. 이를 벽돌공의 소박하고 투박한 이미지와 대조하는 건 진부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주제를 적나라하게 각인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방식의 대립 구도를 보고 싶다. 속내 모를 괴물이라는 CIA의 은유는 일정 부분 적확하겠지만, 첩보 액션 영화에서는 너무 오래 플롯의 손쉬운 알리바이로 활용되어왔다. 장르 문법을 탁월하게 반복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새로운 서사의 모험이 유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뜬금없지만, 베일 역의 아론 에크하트의 얼굴을 보며 내내 그의 대표작 〈다크 나이트〉가 생각났다. 〈다크 나이트〉에서 그는 배트맨의 재력과 초인적 힘이 아닌 법과 상식으로 세상을 구하려다 조커에게 휘말려 흑화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법이 아닌 주먹으로 흑화한 옛 동료를 눈물을 머금고 때려잡는다. 흑화와 정의 구현의 역할이 뒤바뀐 셈이다. 그에게 선한 얼굴과 선득한 얼굴이 공존하기 때문일 터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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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녀에겐 그 무엇보다 대화가 필요해
3일의 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박복자(김해숙)이다. 복자는 휴가를 앞두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복자. 유령인 채로 3일간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 휴가의 내용이다.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복자는 현실세계의 그 어떤 인물과 대화할 수 없다. 단지 현실세계의 기억만 머릿속에 포착하는 것이 휴가의 목적이다. 주저하지 않고 딸 진주(신민아)에게 향하는 복자. 딸이 미국 UCLA에서 교수 일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던 복자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가 살던 고향 집에, 그것도 혼자 살고 있는 딸을 본 것이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답답해 죽을 것 같은 복자. 유령인 복자는 딸이 처한 처지를 옆에서 바라보며 그녀의 휴가를 완성한다.
이거 달라는 거 맞지
<3일의 휴가>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이 영화의 목적은 가족영화로서 감동을 주는 것과 음식을 다룬 영화로서 관객들의 허기짐(?)을 유발하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 영화가 취한 전략은 ‘김해숙’이다. 김해숙 배우는 이 영화에서 순박한 어머니상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그 중 글쓴이가 기억하는 장면은 후반부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이 장면에 오기까지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박복자가 딸 진주에 대해 깨닫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보여준 김해숙 배우의 표정연기는 진한 울림을 준다. 또 복자 역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딸 진주와의 대화 씬이다. 이 대화들은 영화 안에서 중요한 과제가 있다. 관객들이 ‘내가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해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김해숙 배우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연기지만 그래도 이 몫을 충실히 이행한다. 물론 상대역의 신민아 배우도 훌륭했다. 신민아 배우가 맡은 진주는 가족과 관련한 어두운 상처가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이 인물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이를 체화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데, 대표적으로 이 인물의 평소 말투는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또 이 영화는 음식을 잘 다룬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배고픈 분들은 이 영화 보면 안된다. 대표적으로 화사한 조명으로 온기를 살린 촬영 방식은 음식의 생동감을 살리는 좋은 연출이었다. 심지어 요리하는 과정도 영화에 등장한다. 글쓴이는 멸치국수를 만드는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면도 예쁘게 배열하고 국수도 푹 우려서 만드는데, 이 영화에서 가족영화로서의 특징뿐만 아니라 이런 '먹방'요소도 담고자 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음식 종류도 현실감이 있어 좋았다. 보통 이런 음식 영화(그것도 한국영화)들은 고기류를 잘 안 다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스팸김치찌개나 멸치국수 같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우리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이 등장해서 리얼리티를 높인 것이다. 물론 이야기 도중에 음식이 등장하는 이유도 타당하다.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는 영화인 만큼 음식이 인물간의 대화를 만드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줬어
<3일의 휴가>에 대해 변론을 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영화가 너무 신파극이다’라는 코멘트다. 물론 이 영화가 익숙한 공식을 답습하는 감은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상황을 억지로 짜 맞춰서 관객을 울리지는 않는다. 윤리적인 거리를 붕괴시켜 관객을 억지로 울리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또 반대로 2023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3일의 휴가>를 보고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 거야’ 예측하지 못할까? 글쓴이는 어떤 관객이든 이런 전개를 예상할 것이라고 본다. 두가지를 고려해서, 글쓴이는 마음을 열고 이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찾는 것이 영화를 즐기는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이 윤리적인 문제, 그러니까 소재를 어떻게 존중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은 잘 지켰기 때문에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카페에서 핫초코라떼를 주문하고 ‘왜 이거 달아요’라고 사장님에게 물으면 뭔가 이상하잖아?
1차원적인 관계
당연히 이 영화의 단점도 느껴졌다. 일단 진주와 복자의 모녀관계다. 이 영화의 모녀관계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어떻게 요약할 수 있냐?’가 중요할 텐데, 한쪽이 일방적이면 다른 쪽은 받아주기만 한다. 이게 지나친 탓에 글쓴이는 두 사람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보통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다 져주는 관계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심지어 어머니 복자가 유령이 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서로 물고 물리며 어머니로서, 딸로서 성장하는 서사를 가졌다면 관객 입장에서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름대로 이 모녀가 서로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의 연출이 그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와닿지 않았던 것이 아쉽다.
사실 복자 캐릭터는 모녀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아니더라도 아쉬웠다. 바로 복자가 인물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복자는 유령이기 때문에 딸 진주와 대화할 수 없다. 이를 복자 입장에선 초반에 파악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리액션을 반복한다. 글쓴이는 이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굳이 복자가 이렇게 행동할 필요 없는 것이다. 아예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었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불안정한 마무리
다음으로 아쉬웠던 점은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인과관계를 무너트린다는 점에서 아쉽다. 영화 후반부가 되면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한참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이것과 상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면 가이드(장기영) 캐릭터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반대로 이 인물이 이 선택 중 다른 것을 골라도 영화 마무리에는 큰 차이가 없을 듯 싶다. 또 인물이 이 선택을 고른다는 것에 감정선이 얕기 때문에, 후반부를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글쓴이는 인물의 이 선택이 과연 정말 딸을 위한 길이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또 이 영화만의 개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콘셉트는 특이했다. 딸과 엄마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대화할 수 없다 / 음식을 바탕으로 가족 간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라는 점이다. 영화가 이 목표 말고 나머지에선 다 실패하고 있다. 모녀관계를 얕게 탐구해서 개성이 느껴지지 않고 코미디로 보기엔 애매하며 힐링물로 받아들이기엔 이웃들의 캐릭터가 아쉽다. 두가지 요소 말고 나머지 것들이 얕기 때문에 영화의 많은 요소들이 기존 작품들의 연장선상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모 영화도 생각나고, <사랑과 영혼>, <리틀 포레스트>가 연상된다. 이런 영화들을 접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신선하다고 느끼겠지만 이외의 사람들에겐 이 <3일의 휴가>가 진부하게 들릴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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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위플래쉬>? 형만 한 아우 없네
스포츠 스릴러를 표방하는 영화 〈더 노비스〉는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성취 대상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드는 인물의 심리를 스릴러 장르와 접목했다는 점이 그렇다. 주인공은 경쟁과 강박이 몸에 새겨진 듯 보이는 알렉스다. 학업‧조정을 병행하며 두 영역 모두에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은 놀랍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은 광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항상 자신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알렉스. 처음에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부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알렉스는 자그마한 부분에서라도 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불쾌함‧열등감을 표출하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정은 팀 스포츠다. 동료들과 팀이 되지 못하면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소리다. 알렉스가 목표에 몰두할수록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스릴러의 긴장감을 자아내고자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노력과 반비례하는 결과물을 마주하는 알렉스의 괴로운 심리를 비춤으로써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어떤 공감‧몰입의 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완〉, 〈위플래시〉보다 이 영화가 더 새롭고 강렬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도대체 알렉스가 왜 이토록 학업‧조정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경쟁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첫 번째 문제다. 두 선배 영화가 이를 영화 전반에 자연스레 녹여냈다면, 〈더 노비스〉는 다소 뜬금없는 대사만으로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려 든다. 때문에 알렉스는 팀원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점차 멀어진다. 아무도 동참하지 않는 광기 어린 질주는 긴장이 아닌 아리송함을 자아낼 뿐이다.
빈약한 서사‧개연성 말고도 이 영화의 흠은 더 있다. 일정하지 않은 호흡이 한 예다. 긴장감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에 갑자기 이완시켜버리는 엇박자 연출이 반복되어 완급조절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스릴을 배가하기 위해 공들여 선택한 듯 보이는 OST도 엇박자만 내며 어떻게든 끌어 모은 긴장감을 깨기 일쑤다.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눈도장을 찍은 이사벨 퍼만이 〈더 노비스〉에서도 호연을 펼쳐 강렬한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커진다. 강렬한 캐릭터만으로 진부함, 엉성함을 돌파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꼴 영화를 표방해 마케팅 포인트로 잡았다면, 최소한 그들만큼의 완성도는 보여줬어야 한다. 괜한 비교로 관객의 기대만 성급히 키워 실망을 만들어낸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이번에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맞았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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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부도의 날, IMF 경제 위기 속 다양한 인물의 군상을 보여주다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했을 때 김혜수 배우가 출연하다기에 보러가고 싶었으나(사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영화를 보러 가는 편이다) 내용이 굉장히 무거울 것만 같아서 포기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97년 경제 위기를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영화관이 아닌 집에서 보기 때문에 그 어두움이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 상황을 가볍게 풀어내지 않아서 그 선을 굉장히 잘 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시놉시스
모든 투자자들은 한국을 떠나라. 지금 당장. 1997년,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때, 곧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건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정부는 뒤늦게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을 꾸린다.
한현,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기의 시그널을 포착하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 금융맨 윤정학은 국가부도의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 갑수는 대형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대책팀 내부에서 위기대응 방식을 두고 시현과 재정국 차관이 강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시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IMF 총재가 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한다.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랑, 그리고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 1997년,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당 시놉시스는 네이버 영화 정보를 참조했습니다.
위기에 대처하는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군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에 휩쓸리는 사람, 위기를 이용하는 사람,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갑수는 IMF체제에 경제적으로 몰락하며 직원들에게 친절하던 사정에서 직원들을 일하는 기계로 보는 사장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그러고 이러한 경제 위기에서 그나마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려 동분서주하는 인물 시현과 그 대척점에서 현재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면 상관없다는 재정부 차관, 대한민국이 붕괴되는 순간에도 경제흐름을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종학의 모습까지.
한 나라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뿐 아니라 역으로 엄청난 경제적 부를 얻는 사람의 모습까지 다양하게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색감의 변화를 활용하다
1997년이라는 현재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낀 색감은 ‘차갑다’ 였다. 블루톤의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고 조명 자체를 차갑게 써서 해당 시기가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지를 시각적으로 확 다가오게끔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블루톤의 이미지만 활용했다면 그 느낌이 크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갑수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오렌지톤의 이미지를 주면서 굉장히 따뜻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도 같은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살을 결심할 때는 너무나도 창백한 블루톤의 이미지를 활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를 통해 갑수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고위급 관료들만이 있을 때는 따뜻한 조명들을 활용해서 이들이 경제 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해당 위기를 국가적 재난으로 봤던 한시현이 등장할 때는 같은 공간에서도 약간 채도가 빠진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러한 섬세한 조명의 사용 덕분에 캐릭터별 감정이나 해당 위기를 인물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잘 드러내 줬던 것 같다.
판단은 관객의 몫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생각보다 강하게 기득권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 때 IMF 체제를 선언했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현재 어디 회장 어디 명예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식으로 당시의 위기 상황과 해결 방식을 사실 위주로 전달하고 있었다.
IMF 체제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 감정적으로 다루는 거시 아니라 자막으로 처리를 해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영화 자체가 평가를 많이 자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게 누구를 비판해야 되는지 유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 작품이 아쉽게 다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좋았다. 현재 관객들의 각자 상황 속에서 어떤 인물에 더 집중을 해서 볼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어떻게 할지 순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관객의 사회적 위치와 가치관이 변화할 때마다 보면 이입을 할 수 있는 캐릭터와 등장하는 다양한 군상들에 대한 가치 판단이 달라지는, 관객의 입장에서 역동성 있는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족스러웠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영화의 구성원을 가르기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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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 더 무비 | 가장 상업적으로 빚어낸 질주의 낭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때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끔찍한 사고로 F1®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은퇴해야만 했던 드라이버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온갖 레이싱 대회를 섭렵하며 트랙을 떠나지 않았던 소니를 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루벤 세르반테스'(하비에르 바르뎀)이 찾아온다. 신생 F1팀이자 최하위 팀인 APXGP의 구단주인 루벤은 소니에게 그가 이루지 못한 꿈, F1 드라이버 자리를 제안한다.
F1에 복귀한 소니에게는 남은 9번의 그랑프리에서 한 번은 우승해야 한다는 임무 주어진다. 그러지 못하면 루벤은 팀을 매각해야 하기 때문. 소니는 어떻게든 팀의 전력을 끌어올려서 승리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천재적인 신이자 팀 동료인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와 거듭 갈등을 빚는다. 타 팀으로 이적할 생각으로 가득한 그는 소니의 전략에 협조하지 않고, 그렇게 루벤과 소니의 도박은 실패할 위기에 처한다.
돈과 낭만 사이에서
최근 OTT와 스트리밍 서비스의 스포츠 중계권 경쟁전이 치열하다. OTT 입장에서는 중간 광고를 도입하고, 고정 시청자층의 이탈 우려도 적으며, 매년 안정적으로 수급할 콘텐츠 중 스포츠만큼 적절한 대상이 없기 때문. 스포츠 입장에서도 게임을 비롯한 경쟁자에 맞서서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기에는 OTT만큼 확장력과 접근성이 좋은 수단이 없다. 이에 여러 스포츠 종목 중계권이 케이블 방송사로부터 OTT로 속속 넘어가고 있다.
다만 스포츠와 OTT의 밀월은 스포츠만의 가치를 위협다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4,785. That's How Much It Costs to Be a Sports Fan Now'라는 뉴욕타임스 칼럼에 따르면 미국인 한 명당 주요 스포츠 경기 시청에 필요한 연간 구독료가 2,634달러(약 360만 원)를 웃다. 이처럼 스포츠 접근성이 파편화되면 지역적 자부심과 세대 간의 유대처럼 공공의 자산로서 스포츠가 지닌 가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제리 브룩하이머와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탑건: 매버릭>(이하 <탑건 2>)에 이어 뭉친 <F1 더 무비>(이하 <F1>)도 상술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낭만 넘치는 드라이버의 레이스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상은 철저히 상업적인 의도로 가득하기 때문. 최근 F1은 북미 시장을 적극 공략 중이다. 넷플릭스와 함께 다큐멘터리 <본능의 질주>를 2018년부터 매 시즌 제작했고, 미국 중계권도 넷플릭스에 넘긴 상황이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애플 스튜디오, 브래드 피트와 손잡고 레이싱 영화를 제작했다. 7회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 루이스 해밀턴 경이 크레디트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을 만큼 적극적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대응법이다. <F1> 내재한 모순을 향한 원천 차단하려 한다. 익숙한 이야기 위에서 마치 F1 드라이버가 된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하며 눈과 귀를 현혹하는 이 속임수는 일견 거의 완벽하다.
전투기에서 F1머신으로
<F1 더 무비>의 기본적인 얼개는 제작자와 감독의 전작인 <탑건 2>와 매우 유사하다. 캐릭터의 성격, 인간관계 모두 복사, 붙여 넣기를 한 수준이다.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 든 파일럿은 베테랑 드라이버가 됐다. 매버릭과 소니는 둘 다 팀워크를 모르는 반항아다. 그저 비행과 운을 즐기는 게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매버릭은 명예로운 진급을 포기했고, 소니는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다음 레이스를 위해 정처 없이 떠돈다.
그들에게는 뒤를 봐주는 든든한 친구가 있다. 매버릭에게는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이스맨'(발 킬머)이, 소니에게는 APXGP의 구단주, 루벤이 있다. 그들은 나이 들었지만, 경험이 풍부한 친구를 필요로 한다. 어린 파일럿은 작전에서, 드라이버는 대회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경륜을 그들로부터 배워야 하니까. 두 베테랑은 젊은이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끝내 진정한 드라이버와 파일럿으로 길러내는 데 성공한다.
선후배, 선생과 제자가 같은 트라우마를 매개로 한 팀이 된다는 전개도 동일하다. 매버릭의 윙맨이자 '루스터'마일스 텔러)의 아버지였던 '구스'(앤서니 에드워즈)의 사망은 둘이 싸우는 원인이자 화해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소니와 조슈아도 다르지 않다. 레이스 도중에 앞차를 추월하려다가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고, 13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 덕분에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서 APXGP 팀의 원투펀치로 거듭난다.
기계로 대체 못 하는 낭만
그런데 결정적인 대목에서 두 작품은 차이점을 노출한다. 파일럿과 드라이버의 본질과 낭만을 보여주는 점은 공통점이지만, 그 방식은 정반대다. <탑건 2>는 인간과 기계를 대비한다. 전투기를 무인 드론으로 교체하려는 사령관 앞에서 매버릭은 인간 파일럿의 필요성과 유효 가치를 역설한다. 그는 최후반부 도그파이트에서 고물 전투기로 최신형 전투기를 격추하며 자기 말을 증명한다.
반면에 <F1 >은 기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레이스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드라이버보다 좋은 차가 우선이라는 F1의 승리 공식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는다. 30년 만의 복귀전을 치른 소니만 해도 기계의 역량 차이를 인간의 잠재력을 뒤집는 기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는 코너를 돌 때 크게 흔들리는 차의 약점을 기술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사력을 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계를 인정한 덕분에 <F1>은 <탑건 2>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만의 낭만을 보여줄 수 있다. F1 세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조슈아는 우승하기 위해 더 우수한 차를 타려고 하고, 더 돈이 많고 기술력이 뛰어난 타 팀으로의 이적을 추진한다. 그 목적으로 그는 언론과 SNS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협찬사 파티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이적에 유리한 친근한 이미지를 조성한다.
소니는 그에게 일갈한다. 더 좋은 차나 이미지가 드라이버의 본질이 아니라고. 트랙 위에서 달리는 그 순간에 몰입하고, 뒤차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고 전투를 불사하는 의지가 전부라고. 그 본질에 충실하면 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승과 팀 내 1번 드라이버 자리, 언론과 스폰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소니는 다친 몸으로도 데뷔 후 처음 포디움에 오르며 자기 말을 손수 증명한다. 매버릭이 그랬던 것처럼.
스포츠의 낭만과 가치
온몸을 던져서 소니가 조슈아에게 건넨 날카로운 충고와 격려는 그저 한 드라이버에게만 유효한 말이 아니다. F1의 세계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본질까지도 꿰뚫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설령 F1이 가장 비싼 광고와 협찬으로 도배되는 스포츠라 한들, 그 세계는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낭만과 열정이라는 가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APXGP가 진정한 한 팀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낭만으로 가득하다. 팀 구성원 사이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테크니컬 디렉터 '케이트'(케리 콘던)도, 수석 엔지니어도, 피트 스탑 크루도 경험이 짧으 호흡이 맞을 수가 없다. 소니는 이 오합지졸을 뭉치게 한다. 레이스 전 함께 조깅하면서 팀 문화를 만들고, 성적 관계없이 다음 경기를 위한 발전적인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며 그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는다.
그렇기에 소니의 트로피를 루벤과 케이트, 팀원들이 차례로 들어 올리는 결말에서는 특별한 감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승리를 향한 열망, 열정, 노력으로 묶인 공동체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경기장 안팎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국가대항전에서 국기를 보며 눈물을 쏟는 애국심, 축구 리그에서 승격이 결정되면 팬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오는 애향심. 이는 소니의 팀이 맛본 환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자본이 스포츠 산업에 돈이 집중되는 시대이기에 뻔할 수 있는 소니의 조언과 그의 드라이빙이 남긴 울림은 더 감동적이다. F1 드라이버를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이 지역민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주역 혹은 세대를 뛰어넘는 공동체의 존재를 온몸으로 현현하는 상징이 아니라면 명예와 부가 그들에게 쏠리지는 않을 테니까. 현대 사회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스포츠의 낭만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더 인상적인 이유다.
실망스러운 짜임새
그런데 <F1>은 자칫 상술한 메시지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지 못할 뻔했다. 평면적이고 편의적인 극본으로 인해 상업적인 기획 의도가 스포츠의 본질과 낭만이라는 주제 의식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F1>의 스토리라인은 너무 단순다. 불의의 사고로 은퇴한 재능 넘치는 신인이 방황 끝에 베테랑으로서 무너지는 팀을 되살린다는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고스란히 재활용한다.
소니가 30년이 지나도록 레이싱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만화적일 정도로 뻔하다. 트랙 위에서 달릴 때 차와 자신이 한 몸이 되는 희열감을 한 번만 다시 느끼고 싶다는 이유는 진부하다. 트랙을 그라운드나 코트로 바꾸면 어떤 스포츠 영화에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클리셰다. 이러한 전개가 155분 동안 이어지다 보니 <F1 더 무비>의 적 완성도는 또 다른 레이싱 영화 <포드 V 페라리>에 비할 수 없다.
구조적으로도 한계가 명확하다. 작전 하나에만 집중하는 <탑건 2>와 달리 9개의 그랑프리를 모두 다뤄야 하니 리듬이 자주 끊긴다. 자연히 레이스 자체에 대해서도, 팀 내부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도 얕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자본이 스포츠의 본질을 침탈하는 방식도 단순하게 과시할 수밖에 없다. 팀 매각을 둘러싼 정치 싸움에 관한 복선이나 암시를 뿌려둘 여유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정적인 순간은 매번 회피한다. 회식 자리에서 13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소니와 조슈아. 앙숙이었던 두 선수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전환점일 수 있었지만, 영화는 이를 그저 흘려보낸다. 그 결과 정작 둘이 한 팀으로 거듭나는 전개에서는 깊이가 부족해진다. 소니 외의 다른 캐릭터는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고, 감정선이 희미한 영화가 마치 뛰어난 OST를 자랑하는 뮤직비디오처럼 보이는 이유다.
눈과 귀를 현혹하다
<F1>은 이처럼 소니의 서사에 실린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온갖 브랜드의 간접광고가 낭만적인 메시지를 압도하는 자기모순을 넘어서야 했다. 흥미롭게도 <F1>은 가장 상업적인 방식으로 자본과 낭만의 긴장 관계를 가린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투입된 기술력은 관객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그들을 드라이버의 낭만 속에 빠트린다.
우선 F1머신의 묵직한 엔진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 가운데, 곧이어 현란한 카메라 워크가 눈을 매료한다. 시속 300KM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레이싱카를 드라이버 시점에서 보여주다가, 180도 회전해서 드라이버 얼굴을 보여주고, 다시 시점을 옆으로 돌려서 경쟁하는 레이싱카를 화면에 담는다. 일련의 컷이 불과 2~3초 안에 전환되고 있으니, 극장은 F1 중계 화면으로도 느끼기 힘든 현장감과 박진감으로 가득해진다.
그 덕분에 다소 부족한 심리 묘사나 개연성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소니가 마지막 레이스에서 체크 플래그를 받는 순간, 그의 환희감에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의 고양감은 <탑건 2>에서 매버릭이 작전 후 항공모함에 착륙하는 장면 그 이상이다. 이렇게 관객 개개인이 마치 드라이버가 된 듯한 독보적인 경험을 선사하면서 <F1>의 메시지는 자본의 맥락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아 숨 쉴 동력을 확보한다.
그렇기에 <F1>은 전략과 기술력은 마법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스포츠의 가치, 드라이버의 낭만, 그리고 F1의 쾌감과 자연스럽게 연결 짓게 만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마법이다. 지극히 상업적인 목적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마술이기도 하다. 주요 선수와 감독이 줄줄이 카메오로 출연할 정도로 F1 측이 공들인 <F1 더 무비>의 기획 의도는 이토록 멋지게 적중하는 듯 보인다.
2% 부족한 마법
그런데 <F1>의 속임수는 한 끗이 모자란다. 관객들을 극도의 현장감과 몰입감에 빠트리려다가 F1의 본질을 훼손한 나머지 자기 마법을 스스로 깨버리기 때문이다. 소니는 30년 만에 돌아와 곧바로 영웅이 된다. 고의로 차에 부딪히고, 다른 사람들을 들이받는 식의 전략을 최하위권 팀을 우승권 팀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준다.
문제는 얼핏 보기에 영리한 그의 전략이 F1의 본질적인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 다른 선수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거나,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 세이프티카나 레드 플래그를 유도해 이득을 보는 행위는 F1 세계에서 단순한 스포츠맨십의 결여가 아니라 승부조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FIA(국제 자동차 연맹)는 2008년에 발생한 승부조작 사건, '크래시게이트' 관련자들을 영구 제명한 바 있다.
즉, 소니를 영웅적으로 묘사하려던 시도가 영화적 허용의 범위를 넘어서 버린 셈이다. 이 영화로 F1을 처음 접하는 일반 관객에게 F1은 부정행위가 만연한 스포츠라고 소개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 이는 더 많은 관중과 팬을 유입하기 위해서라면 해당 스포츠의 근간을 파괴해도 무방하다는 사고방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스포츠의 본질보다는 수익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끝내 멋진 포장지를 찢고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결과 <F1 더 무비>의 낭만과 메시지가 선사하는 울림은 <탑건: 매버릭>과 달리 잘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이상의 수준에 올라서지 못한다. 기술적으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고, 특별관에서 보면 압도적인 몰입감을 느낄 수 있으며, 기획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한 번 사라진 마법을 되찾을 수는 없으니까.
Acceptable 무난함
마지막 순간 무위에 그친 돈으로 낭만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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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습하면서도 독특했던 5년만의 '봉준호스러운' 금의환향
예술은 자기만의 색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노란색에도 개나리 노란색이 있고, 연노랑색이 있고, 진한 노란색이 있듯, 같은 계열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디테일과 각종 포인트들을 통해서 각 분야의 예술과 그 안에서 예술을 행하는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찾고, 만들어나간다. 영화예술을 현 시대의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최정점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예술만큼 그 색깔이 진한 예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테일, 구도, 연결 이음새의 모양, 세트를 만들 때에나 CG처리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할 때 등 형언하기 힘들만큼 많은 부분들에서 영화예술가들, 특히 감독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제작하여 이 점을 의식하든, 무의식적이었든, 본인이 만들어낸 예술품에 자연스레 녹여들게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감독님 중 항상 1순위로 꼽히는 감독님 중 한 분이신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론, 감독론, 그만의 색깔은 결코 따라하기도, 흉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감독님 스스로도 그게 본인의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뚜렷하면서 미학적인 색깔에 새로운 터치를 가미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의 특장점들만을 모아 그만의 색깔을 표출해낸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또다른 어떤 색깔을 통해 표현해내려 하는지, 또 그걸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식으로 풀어내려 하는지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같기도 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구조와 "미키"의 물아일체(物我一體)
영화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소설 원작 '미키 7'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등장인물들을 두고 있지만, 봉준호 감독님만의 색다른 이야기와 영화적으로 추가한 캐릭터들을 통해 감독 본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추가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걸까? 죽는 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영화 내에서 인물들의 입과 대사,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이를 영화적 구조, 연출적 방법을 통해서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인 "미키 17"이 크레바스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다시 깬 상황을 보여준다. 이윽고 "미키 17"을 구하러 와준 줄만 알았던 친구 "티모"가 화염방사기만 챙긴 후 '넌 다시 재생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전한 후 버리고 떠나기 전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야?'라고 질문한다. 인상적인 건, 이 지점부터 "미키 17"의 목소리가 나레이션, 보이스 오버되고, 영화적 구조는 루핑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쩌다가 "미키 17"이 재생형 인간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거사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의 종반부,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키 전 일종의 트라우마가 상기되듯 다시 한번 루핑되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의 아내 "일파"를 만나게 되는 씬에서 반복된다.
영화는 루핑을 통해 영화 자체에 순환적 구조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주인공 "미키 17"이 죽음 이후 재생되는 삶, 반복되는 삶을 영화적으로도 구조화한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런 순환적인 구조를 영화의 극초반부와 극후반부에만 배치해두고, 정작 본 이야기에서 영화는 순환을 그리 사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는 "미키"의 죽음이 가볍게 처리되고, 소비되는 극초반부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죽음을 맞닥뜨린 "미키"의 이야기를 다룬 본 이야기에 극명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를 구조적으로도 표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또 하나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보이스 오버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보게 되면 본 작품만큼 보이스 오버를 빈번히 사용한 작품이 또 없다. 이런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에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에서의 주인공인 '기택 가족'을 영화는 주로 비추고, 그들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서 서사를 풀어나가지만 결코 그들의 이야기가 오로지 영화의 메시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이 행하는 행동들, 겪게 된 순간들로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함축시키고, 관객들은 이를 통해 세 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영화 <기생충>의 기본 틀이다. 영화 <미키 17>은 그와는 달리, 오로지 "미키"라는 인물이 그동안 겪어왔던 시련들과 아픔들을 비추고, 사건을 헤쳐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보다 주관적이고, 1인칭 시점스러운 관점에서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시시각각 이야기의 배경사를 알려주고,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관객에게 소개하듯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는 관객을 인물에게 몰입시켜 "미키"리는 인물이 변하게 되는 과정을 온전히 느끼게 한다.
- '봉준호'식 블랙코미디로 사회를 꿰뚫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솔직히 셀 수 없지만 그 중에서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블랙 코미디'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보게 되면 한번쯤은 어느 포인트에서라도 웃게 하고,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통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서 사회적 통념을 꿰뚫게 하고, 유머가 지속되다 순간 바뀌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에게도 영화의 메시지와 질문을 반문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봉준호 감독님만의 영화적 센스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영화 <미키 17>은 이전 필모들과는 굉장히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고, 또한 특유의 재치와 유머에 사랑스러움까지 입혀져 이전 작품들에선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의 감정까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이런 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리 사회를 직시하게 하고, 마치 현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적 문제, 형언할 수 없는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번 작품, 영화 <미키 17>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 심지어 후반부까지 "미키"에게 죽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물어보는 인물들을 마치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관객에게 이 질문에 대해 결코 잊지 말라는 듯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그들 중에선 진심으로 그 감정이 궁금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대부분 이 점을 통해 "미키"를 비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생각해볼 점은 "미키"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맞지마 익스펜더블을 만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지구에서의 상황이 채무로 인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어서 다른 선택을 하기 힘들었기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남들이 기피했던 익스펜더블을 선택했고, 극한직업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먼저 해주는 개척자이면서 희생자이고, 영웅이기도 한 인물이 바로 "미키"이다. 그를 추대하고, 영웅처럼 모시지는 못할 망정 그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어차피 다시 재생되기 때문에 처분해도 된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매몰시키고, 버리는 행위들을 "미키"에게 일삼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점이 영화를 관람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 이주 지역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도 필요했기에 그 역할을 만들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역할로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직업을 택한 사람마저 무시하고, 천대하고, 끝까지 실험용 쥐로서 사용하려는 영화 속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는 영화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지금도 그러한 인식과 시선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 험한 일까지 도맡아 고생해주는 이들에게 오히려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끔 한다.
영화 <미키 17> 속 "미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바로 니플하임 총사령관 "마샬"과 그의 아내 "일파"이다. 리더십도 없고, 본인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하려는 듯한 생각도 없어보이는 "마샬"과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미키"와의 식사 중 고통에 몸부림칠 때에도 본인의 카펫의 보존만이 중요했던 "일파"는 어찌보면 니플하임 행성 개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젯거리로 보인다. 쓸데없이 큰 돌을 가져와서 하는 거라곤 돌 안에 이름을 새겨 기념을 하자는 얼토당토않은 행사를 개최하고, 탐사 중 동료가 눈 앞에서 죽은 대원들에게, 특히 "미키"에게 '너가 죽었어야지.'라는 말을 일삼으며, 심지어 대원 중 한 명인 "카이"에게 끔찍한 제안까지 건네는 "마샬"은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최악의 리더의 표본이면서 동시에 그런 그의 죽음은 그런 리더의 말로는 이러함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면 작품 속 "마샬"보다도 "일파"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러한 데에는 그들이 대화를 하거나 "마샬"이 무언가 연설을 하던 와중에도 "일파"가 자료를 주거나 연설 내용을 바꾸고,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그녀가 '소스'에 극도로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그토록 소스에 집착했던 이유, 이를 영화에 연출한 이유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일파"는 소스를 첨가하는 건 그 행위 자체로 본인들의 고결성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사람이 먹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음식을 제공받아 먹는 대원들과 달리 신선한 과일, 신선한 육류로 만든 무언가를 먹으면서, 심지어 소스까지 더해먹는 본인들은 평범한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고 싶고, 군림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 소스를 첨가하는 이들이, 정말 남들과는 다른, 그래서 차별받고 무시받는 "미키"를 더 가세해서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 자체가 소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맛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신선한 원재료들로 만들어진 디쉬 위에 올려간 소스는 맛을 증폭시키고, 배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음식이라고 표현하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일파"의 과거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았지만 사실 "일파"라는 인물은 남편인 "마샬"이 니플하임의 총사령관이 아니었다면, 혹은 "마샬"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그토록 무시하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마샬"을 뒤에서 조종하고, 종속시켜 스스로의 뜻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정작 구속되고, 종속되어있는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일파"는 원재료와 디쉬의 메인에서 벗어나지 못해 메인을 더 밝게 비춰줄 수 밖에 없는 소스에 불과하다.
니플하임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지구에서 온 인간들. 맞닥뜨린 불명의 존재에게 그들은 '벌레'를 뜻하는 "크리퍼"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에게 본인 마음대로 '인디언'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을 해하려고도, 침범하려고도, 위해를 가하려하지도 않았던 "크리퍼"들은 미지의 존재에 그저 놀라 공포에 휩싸인 인간들에 의해 공격받아 한 마리가 죽게 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영화적으로 연출된 상황이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리가 역사적으로 꽤 반복해왔던 일들이다. 영화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외계인인 상태에서 이미 정착해있던 원주민들, 토착민들에게 외계인이라는 별칭을 부여하게 되는 우리의 습관, 이는 인간의 오만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인지, "마샬"의 행동, 그가 내리는 어리석은 지령들, 사람들의 "크리퍼"에 대한 인식들에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 속에도 깨알같이 이를 녹여내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재밌는 건 작중 시점이 2054년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 재생장치가 개발된 시점이라는 걸 감안하고 본다면 우주선 내부나 니플하임 속 개발 상황이 굉장히 최첨단이고, 하이 테크놀로지스러운 분위기를 취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고, 노출 콘크리트 카페와 같이 배관이 그대로 들어나고, 각종 가스들이 여러 군데에서 분출되는 배경을 보여주어어 스스로를 굉장히 우아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그 오만함을 깨뜨리는 또 다른 독특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 반복되는 죽음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가 되어 성장하다.
16번의 죽음을 맞은 "미키". 어느날 기계의 오류인지, 과학자들의 실수인지 살아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의 본인이 복제되어 "미키 17"과 "미키 18"이 공존하게 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가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미키 17"이 죽는 것이 아직도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시간이나 목숨이나, 삶이나, 죽음 등을 뒤바꿀 수 있는 여타 영화들에선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그 반복되는 상황을 또 한번 맞닥뜨리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리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두려움을 느껴도 내색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영화 <미키 17>에서의 주인공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 16번째의 죽음이 이어졌음에도 아직까지도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점에 대해 영화가 직접 답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 <미키 17>이 SF의 장르를 띄는 특징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장르를 차용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성장 영화'의 장르를 띄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나 영화 <보이후드>처럼 성장 영화가 서사의 주를 잡고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전부 보고난 후면 영화가 성장 영화의 한 축을 서고 있음을, "미키"라는 인물이 성장했음을 그리고 최초에 영화가 타이틀을 보여줄 때 '미키 17~19'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종반부에서 '미키 반즈'로 변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사고로 인해 "미키 17"과 "미키 18"은 공존하게 되었고, 이 둘은 '멀티플'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미키 17"의 온순하고, 착하면서 다소 멍청한 성격과는 달리 "미키 18"은 다혈질에 항상 화가 나있는 성격을 가졌다. 영화가 성장 영화적 특성을 지닌다는 특징은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격 차이 그리고 그 성격 차이가 결국 서로 융화되어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에서 드러난다. 항상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미키 18"의 최초 살해 타겟은 바로 "미키 17"이었다. 당연히 멀티플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 하나는 죽어야 둘 다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있어 "미키 17"은 늘 겪는 죽음이라 괴롭고, 공포스럽지만 이에 순응할 줄 알았으나 인상적인 대사 하나를 던지게 된다. '이번에 죽으면 정말 죽는 것만 같다.' 동일 인물이고, 두 인물 모두 하나의 몸에서 재생되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미키 17"이 죽는다면 "미키 17"으로서의 재생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에 남겨져 있는 "미키 18"이 그 삶을 이어나간다는 사실은 굉장히 복잡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서로를 죽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 "미키 17"이 "마샬"에게 받은 수모를 듣던 "미키 18"은 "마샬"을 죽이자는 결론에 도달하여 죽이려 다가가는데, 이 지점으로부터 영화의 변화가 시작된다. 계속해서 서로를 죽이려 하고, 서로의 존재를 탓하던 둘은 결국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의 존재에 위안이 생겨 서로의 공통된 타겟인 "마샬"을 죽여야 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이러한 인물의 관계의 변화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성격마저 변하여 결국 성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미키 17"과 "미키 18"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인물처럼 비춰지게 되고, 외양만 같지 사실은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미키 17"의 고통을 다혈질적이고, 욱하는 성격의 "미키 18"이 공감하고, 위안하려는 모습, "미키 18"의 분노서린 성격을 억제하여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바치려 하는 쭈굴이었던 "미키 17"의 변화가 이어진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격발하게 된다. "마샬"은 급기야 "크리처"들과 전쟁을 펼치려 했고, 이를 저지하여 세상을 구하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키 17"과 "미키 18"은 밖으로 향한다. 각종 사투를 벌이다 스스로를 영웅 추대하러 나온 "마샬"을 죽이러 "미키 18"은 달려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때 버튼 한 개만 누르면 "마샬"을 죽이는 동시에 본인도 함께 죽을 수 있는 상황과 부딪히다. 잠시 죽음에 망설이던 찰나, 그는 "미키 17"을 쳐다보고 버튼을 눌러 그를 희생해 세상을 구하게 된다. 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혈안되었던 "미키 18"이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삶이 마무리되는 장면 은 "미키 18"이라는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미키 17"에게도 변화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준다.
"미키"의 여자친구이자 작중 가장 강단있고, 리더십이 있는 "나샤"가 위원장이 되어 더이상의 익스펜더블은 존재하지 않음을, "미키"도 익스펜더블로서의 무시와 멸시에서 벗어나 인간들을 구한 영웅임을 선포했다. 재생장치 폭파 버튼을 손에 쥐고 있던 "미키"는 빨간색 버튼을 보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는 어릴 적 본인이 빨간색 버튼을 잘못 눌러서 엄마가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누가 생각해도 억지라고 하겠지만 "미키"만큼은 너무도 이에 대해 진지해서 아직도 트라우마에 빠져있다. 생각에 잠긴 "미키"는 다시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재생장치 앞에 서 있다. 그곳엔 소문으로 자살했다고 했던 "일파"가 있었고, 폭발로 사망한 "마셜"이 재생되고 있었다. "일파"는 그에게 너무도 심한 모욕서린 말들을 내뱉었고, 그녀의 손으로 붉은 피들이 모여 버튼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그녀는 본인의 특제 소스이니 한번 먹어보라고 전한다. 아마 그녀는 "미키"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모두 "미키"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트라우마들이 모여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키 18"을 만나 세상을 구하고, 희생을 배우고, 다름을 알아가며, 본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에 기쁨을 알게 된 "미키"는 "미키 18"에게 배운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버튼을 눌러 재생장치를 폭파시킨다. 영화는 최종장에 이르러 "미키"라는 인물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성장하게 되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결론을 짓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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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추어 | 프로답지 않다는 개성 혹은 실망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CIA에서 데이터 분석관 겸 해커로 근무하는 '찰리'(라미 말레). 어느 날, 그에게 정보원 '인퀴린'(카이트리오나 발페)가 보낸 첩보 하나가 도착한다. CIA의 '무어'(홀트 맬컬러니) 본부장이 잘못된 작전의 경우 투입된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인명피해도 축소하는 식으로 작전 보고서를 조작해 오고 있었다는 것. 이에 더해 일부 테러리스트들과 손잡고 있었다는 의심까지도. 찰리는 이 첩보를 상부에 보고할지 말 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다음 날 찰리는 마음을 굳힌다. 런던 출장 중이던 아내 '사라'(레이첼 브로스나한)가 4명의 테러범에 의해 살해당한 가운데, 정작 CIA는 테러리스트를 추적하거나 사살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 이에 찰리는 기밀 정보를 무기 삼아 무어 본부장을 협박하고, 아내의 복수를 직접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설령 컴퓨터나 두들기고 사람 한 번 죽여 본 적 없는 ‘아마추어’라고 무시당하더라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나누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 돈이다. 프로는 돈을 받고 일한다. 아마추어는 업이 아니라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단어의 어원만 봐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어휘 'amator'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마추어는 실력을 평가하는 어휘로도 활용된다. 프로 축구 선수에게 아마추어 선수보다 능력이 없다는 혹평은 돈값을 하지 못한다는 모욕이다.
그런데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어떤 일을 하는 태도에 따라 갈리기도 한다. 프로 같다는 표현은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에게 붙는 경우가 많다. 냉철하게, 능률적으로 과업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 반면에 일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자주 동요하는 사람에게는 아마추어 같다는 표현이 활용된다. 돈이라는 대가와 목적보다 사랑과 열정이라는 동기에 충실한 사람이 아마추어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세 번째 기준은 흥미롭게도 첩보 영화에서 클리셰로 자주 활용된다. 처음 임무에 나서거나, 임무를 받는 요원에게는 꼭 사람이나 동물 등 생명을 죽이는 과제가 주어진다. 살인이라는 행위가 유발하는 혼란, 두려움, 망설임 같은 온갖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지, 즉 프로인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인 셈이다. 이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도, <킹스맨> 시리즈에서도 스파이가 되는 마지막 단계였다.
<아마추어>도 마찬가지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 어떤 첩보 영화보다도 아마추어 첩보원과 프로 스파이를 가르는 심리적 경계선에 주목한다. CIA 사무직인 찰리가 아내를 죽인 테러범에게 복수할 때 직접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지, 그의 심경 변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달리 말해 그가 아마추어로 남을지, 프로가 될지를 지켜보는 재미가 <아마추어>를 차별화한다. 아마추어스러운 완성도가 그 묘미를 묻어 버리는 게 문제일 뿐이다.
복수에 성공한 아마추어 첩보원
<아마추어>는 본격적인 찰리의 복수극을 시작하기에 앞서 프로 스파이와 아마추어 첩보원의 차이를 명확히 짚는다. 무어 본부장을 협박해서 현장 요원 훈련을 받게 된 찰리. 그의 훈련이 끝날 때쯤 '헨더슨'(로렌스 피시번) 대령은 그에게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을 알려준다. 밤중에 찰리를 깨운 그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라고 윽박지르고, 끝내 방아쇠를 못 당긴 찰리에게 결코 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일갈한다.
프로 첩보원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순간에 아무 고뇌 없이, 기계처럼, 그저 훈련받은 대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어야 임무도 완수하고, 생존할 수 있으니까. 그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현장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여전히 아마추어다. 테러범 4인 중 처음으로 찾아낸 여성 테러리스트가 무방비로 등 뒤를 내주었는데도 찰리는 그녀에게 총을 쏘지 못한다.
하지만 찰리는 아마추어라는 한계를 깨지 못하면서도 목적을 착실히 달성한다. 상대방에게 직접 총알을 박아 넣지는 못하더라도 아마추어스럽게 아내의 복수를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꽃가루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질식시키거나, 옥상 수영장을 붕괴시켜서 사고사로 가장하는 식이다. 테러범들을 하나씩 찾아 죽이면서 찰리는 아내를 직접 죽인 네 번째 테러범의 은신처에 대한 정보도 직접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찰리의 복수는 아마추어스럽다. 그는 마지막 테러범을 직접 죽이지 않는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불가피한 살인이었다고 프로답게 자신을 변호하는 그를 해커다운 방식으로 인터폴과 경찰에게 넘겨 버린다. 이처럼 아마추어의 경계선을 넘지 않는 찰리의 복수극은 특히 순정적으로 느껴진다. 아마추어 첩보원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내의 복수를 하겠다는 진심이 유달리 강조되기 때문이다.
찰리의 내면을 열어볼 두 열쇠
<아마추어>는 찰리의 진심과 순정에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을 두 가지 열쇠로써 열어준다. 우선 찰리의 내적 서사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한다. 일례로 초반부는 부부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지 않은 찰리를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런던 출장 겸 여행을 같이 가자는 사라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일하느라 바쁘다면서 마지막 통화도 그냥 끊어버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찰리의 소극성은 그의 죄책감을 극대화한다. 사라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말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회한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강조하기 때문. 이는 아마추어 첩보원으로서 찰리의 정체성을 부각한다. 테러범 체포, 사살에 적극적이지 않은 조직에 환멸을 느낀 그의 첩보 활동은 누구보다도 아마추어적이다. 복수심도 열정의 일종이라면, 아내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열정만이 그의 원동력이 되어주니까.
또 다른 열쇠는 찰리의 주변 인물이다. 이스탄불에서 찰리에게 기밀 첩보를 제공하던 정보원 인퀴린 그가 아마추어라서 돕기로 결심한다. 그녀 역시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프로 스파이였던 남편과 사별한 후에 그를 잊지 못한 나머지 그의 코드네임을 이어받아서 첩보원으로서 활동한 그녀는 찰리에게서 자신을 본다. 돈이나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첩보원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반대로 중요한 역할처럼 보이던 현장요원 '곰'(존 번설)은 끝내 맥거핀으로 활용된다. 일반적인 첩보물이라면 성공적인 작전 수행 후에 그가 찰리를 어떻게 비밀리에 지원했는지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찰리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으니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추어>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찰리의 아마추어스러운 복수극에 끼어들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프로페셔널한 스파이이기 때문이다.
구시대적 배경에 의존하다
문제는 이처럼 '아마추어'의 미덕에 충실한 첩보물을 너무나도 아마추어스럽게 구성했다는 것. 주인공이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로 남은 이유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와는 별개로 영화의 완성도는 프로다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세 가지 부재가 문제다. 바로 신선함, 역경, 짜임새의 부재다. 우선 <아마추어>는 구시대적인 소재를 답습한 나머지 찰리의 서사를 더 깊이 느끼거나 들여다볼 유인을 제공하지 못한다.
정보기관이 일반 시민 개개인을 모두 감시하고 있고, 그 정보를 독점한 뒤 국익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위법적인 작전과 활동을 벌이면서 시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소재는 이미 여러 첩보 영화가 활용한 바 있다. 또 엇나가는 첩보 요원을 잡기 위해서 서로 다른 첩보 기관이 제각기 그를 쫓아 나서는 것.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과 암투. 이 부분 역시 뭐 새로운 것은 없다.
특히 <제이슨 본> 시리즈의 흥행과 스노든의 NSA 기밀자료 폭로사건 이후로는 위와 같은 소재를 반영하지 않은 첩보물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애초에 로버트 리텔의 소설 <아마추어>가 원작인데, 원작부터가 1981년작이라는 점이 반영된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새롭거나 신선한 소재나 주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 극 중 활용되는 최첨단 감시 및 경비 장비들 덕분에 식상함이 더 두드러지기도 한다.
고난이 없는 아마추어
역경의 부재도 문제다. <아마추어>는 액션이 아닌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조성하려고 애쓴다. 천재적인 기술자라는 찰리의 두뇌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상술했듯이 다양한 작전으로 테러범들에게 복수를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찰리가 어떤 작전을 활용할지 지켜보는 재미만으로는 120분을 끌어가지 못한다. 그가 작전을 너무 잘 짜고 복수를 너무 잘해버리는 나머지 긴장감이 없기 때문이다.
찰리는 두 적과 싸워야 한다. 그가 죽이려는 테러범은 물론 그를 쫓는 CIA와도 맞서야 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현장에서 작전을 직접 입안하고 실행하는 찰리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테러리스트와 CIA 요원들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움직인다. 자연히 영화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전개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찰리의 기발한 아이디어보다는 영화의 허술함, 편의적인 전개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셈이다.
이는 '아마추어'라는 제목에 담긴 함의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극 중 찰리는 총을 잘 못 쏜다는 것만 빼면 너무 프로페셔널하게 할 일을 잘 해낸다.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라는 어휘에 내포된 사랑과 열정이라는 의미를 먼저 떠올리지 않는 이상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아마추어'인지는 물음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라미 말렉만 돋보인다
더 나아가 전체적인 구성과 서순도 적절하지는 않은 듯하다. 영화는 부패한 CIA를 먼저 제시하면서 찰리 대 CIA, 개인 대 조직의 대립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조직을 농락하다 보니 조직에게 배신당하고 쫓기는 압박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테러범과 CIA의 접점을 마지막까지 숨기면서 알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서스펜스를 강화했다면 첩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이 극대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빌런 활용법도 아쉽다. 빌런과 찰리의 대립각이 날카로울수록 그의 복수가 남기는 쾌감은 더 커질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빌런을 제외하면 게임 미션처럼 한 번 밟고 넘어가야 할 대상처럼 몰개성 하게 묘사되다 보니 복수의 끝은 다소 싱거운 감이 있다. 초반부에 찰리가 느낀 고통과 자책감에 비하면 빌런을 제거했을 때의 시원함이 부족한 것. 결과적으로 영화가 잘 짜여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결국 <아마추어>는 평범한 할리우드 첩보물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정 수준의 재미는 갖췄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을 뽐내지는 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을 활용한 스토리텔링도 온전히 꽃을 피우지는 못한 채로 흐지부지 끝난다. 구시대적인 주제의식은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볼거리와 상충한다. 그저 아내를 잃은 남편이자 살인의 무게감을 견뎌내는 요원으로 변신한 라미 말렉의 연기력이 인상적일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아무리 그래도 완성도는 프로페셔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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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한국사#여성독립운동
3월달 역사컨텐츠 2편을 만들어 봤습니다. 1편에 이어지는 내용이니 1편을 시청하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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