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5-09 19:50:11
애나의 선택
<메모리>(2023)
<메모리(Memory)>(2023, 미셸 프랑코)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새 사랑을 찾은 주인공의 십대 자녀는 ‘방해’ 요소로 그려지기 쉽다. 반대로 부모의 연인이 십대 주인공이 겪는 갈등의 주 원인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메모리>의 애나는 엄마 실비아의 연애를 응원한다. 엄마의 연인 사울에게 제 방을 내어주고,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자 이모 집에 묵겠다고 하며, 나중엔 사울을 몰래 엄마에게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줄거리만 기계적으로 나열한다면 마치 해피엔딩을 위해 작가가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에서 관람하면 ‘그럴 만 하다’고 받아들일 확률이 높고, 더 나아가 애나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메모리>가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살필 필요가 있다.
오프닝 씬은 대조 메테리알에 가깝게 다가온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찍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 같기도 하다. 실비아의 금주 13주년을 축하하며 경험이나 심경을 털어놓는 AA(Alcoholics Anonymous) 미팅 맴버들의 옆얼굴과 함께 그들의 감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배경은 이 다음에야 등장한다. 이후 <메모리>의 장면들은 대개 공간을 먼저 파악하고 발화자 클로즈업을 자제한다. 실내라면 고정된 롱테이크로 촬영하는 일도 잦다. 미셸 프랑코의 전작들에서도 자주 관찰되며, 때로는 감독 “자신도 놀라게 만드는” 관계 역학을 포착하는 방법이다. 이를 테면 <크로닉>(2015) 속 환자를 돌보는 데이비드를 비효율적으로 오래 촬영하는 씬들은 일상적인 노동과 더불어 방안에 쌓이는 유대를 담아낸다. 긴 숏이 이어지는 동안 화면에 드나드는 환자의 가족은 손님처럼 보인다. 와중 화면 구석이나 바깥에 몸을 숨기는 데이비드의 행동에서 그가 환자와 맺는 실질적 관계와 형식적 관계 사이 괴리가 나타난다. <메모리>는 비혈연 관계의 친밀함을 인식하는 <크로닉>보다 본격적으로 ‘선택 가족family’을 탐구하며, 공간을 기준으로 구성된 롱테이크에 가족relative 내 위화감을 담는다. 실비아의 동생 올리비아의 집이 대표적인 장소다. 올리비아의 가족과 애나가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화목한 거실을 예로 들어 보자. 실비아가 들어오면 그와 다툰 상태의 애나는 짐짓 모른척한다. 엄마가 선물을 건네자 활짝 웃지만, 순간 올리비아의 남편 로버트의 낯에 한숨이 지나간다. 그는 아내가 실비아에게 종종 돈을 빌려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애나의 어린 사촌들은 별안간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침묵과 응시 또한 장면의 구성 요소다. 카메라는 발화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정된 채 모든 인물을 균일하게 촬영한다. 감독의 말을 변형해 빌려오면 “관객이 감각하고 생각할 공간을 남기는” 연출, 각 인물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어긋나는 것들을 담는다.
영화가 남겨둔 공간에서 중요하게 감각되는 것은 ‘방을 읽는read the room’ 애나다. 영화 후반 올리비아의 집에 방문한 실비아는 엄마 사만다와 사고처럼 마주친다. 그가 아빠의 성폭력과 엄마의 적극적인 방관을 폭로하는 와중 거기 있는 모두를 가만히 바라보며, 카메라는 애나와 함께 방을 읽는다. 실비아가 과거 가정과 학교에서 견뎌 온 공기를 가늠하고,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아동 성폭력을 사만다가 모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한참 만에 전환된 숏에는 줄곧 카메라에 등을 보이고 있던 사만다의 정면이 포착된다. 그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아할 얼굴이다. 죄책감,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2차 가해를 무방비하게 드러내며, 영화는 인물의 악마화를 지양하는 동시에 ‘관계 회복’은 늦었음을 설득한다.
애나는 거실 구석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다. 그는 할머니의 입장을 엄마의 폭로보다 먼저 접했다. 사만다가 자신이 하는 (‘휠체어 기증자를 찾는’) 일을 애나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보여주고자 하는’ 영상 자료는 클로즈업되고, 이어 사만다는 실비아에 대한 선입견과 자기변호를 말한다. 애나와 사만다가 대화하는 장면들에서 영화는 스크린에 둘만 남겨놓거나, 여럿과 함께 있더라도 오로지 둘에게만 선명한 포커스를 둔다. 손녀가 제 말만을 듣기를 원하는 사만다의 심리, 위선을 은유하는 연출일 수 있다. 애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물로, 상대방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연히 드러난 것’에 주목한다. 엄마의 트라우마를 알게 된 후 ‘집에 들일 가족’을 결정하는 이는 애나다. 실비아가 올리비아의 집을 뛰쳐나가며 뒤틀린 혈연에서 한 차례 벗어난다면, 애나는 집 현관에서 올리비아를 막음으로써 그 관계가 자신과 엄마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다.
다음으로 애나가 하는 선택은 친동생과 조카에 의해 자택에 감금된 ‘친구’ 사울을 구출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실비아가 우울해하며 침대에 파묻혀 있을 때 애나가 음식을 가져다주는 씬이 있었다. 그 구도는 사만다와 대립하고 귀가한 실비아를 애나가 꼭 끌어안고 있을 때 사울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씬의 것과 유사하다. 이 찰나에 애나는 어쩌면 ‘다른 가족’의 그림을 보았을 수도 있다. 하나 더, 애나는 엄마의 통제가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사울과 실비아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다면,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대가로 애나는 약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해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실비아와 애나의 상호 보호 관계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실비아는 타인을 들이기를 주저하며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곤 했다. 엔딩에서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을 활짝 열어두고 청소기를 돌린다. 애나와 사울이 도착한다. 실비아는 빽빽한 소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애나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뒤돌아 깜짝 놀란다. 재회를 예상치 못했던 실비아와 여기까지 이른 과정을 잊은 사울은 포옹하고, 애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실비아의 시끄러운 기억에 애나와 사울은 틈을 만든다. 애나는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을 잇는다. 포스터에는 둘만이 있지만 주제에 가까운 스틸을 고른다면 이쯤이다. 최선이나 이상이 아닌 하나의 안, 해피엔딩보단 열린 결말이다. 여기서 영화가 ‘작은 곤란’의 찰나들을 놓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사울은 실비아의 집 앞에서 쓰러졌고, 실비아는 사울과 처음 사랑을 나눌 때 응하면서도 불편해했다. 애나는 옷 입기를 잊은 사울을 목격하고 놀랐고, 사울은 한밤중 화장실에 다녀오며 어느 방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주저앉았다. 위험과 불편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채로, <메모리>는 현재 이들이 찾은 집home은 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미셸 프랑코는 꾸준히 ‘정상 가족’의 분열에 관한 인상을 표현해 온 감독이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선택의 사례를 제안한다. 피가 항상 물보다 진한 것은 아니며, 너무 진한 피는 때로 독이 된다. 이 잔잔한 치유의 멜로드라마에는 택하지 않은 가족의 끈을 끊어내는 칼이 숨어 있다. 가장 마지막에 그 자루를 쥐는 이는 다름아닌 애나다.
* 참고 인터뷰
https://filmhounds.co.uk/2024/02/i-never-over-direct-them-director-michel-franco-talks-memor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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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발신제한 후기 / 조우진 원톱 / 부산을 배경으로 펼치는 추격전 / 로드무비 / 한국에도 폭발물 처리반이?! / 김창주 감독님 데뷔작 축하합니다!!!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발신제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스릴러, #드라마,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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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님 단편영화 이렇게 만드는거 맞죠..?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영화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끼리 결국...!! 영화 제작까지 도전 합니다 ٩(๑• ₃ -๑)۶
많.관.부 ◟( ˘ 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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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력한 운명의 적과 마주하게 된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미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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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 플로리다 주 남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사고에 휘말린 쿠죠 죠린.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돌로 만들어진 바다와 같은 교도소. 스톤 오션에 갇힌 죠린은 과연 그 바다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뒤엉킨 운명으로 인해 수백 년간 싸워온 죠스타 가문 사람들과 디오. 이제, 마지막 대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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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활한 코스믹 호러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부모의 DNA를 이어받아 작은 존재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길을 걷게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먹고, 자라며, 배우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족 유지라는 학문적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살아가는 본능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며, 계속해서 그 본능을 이어갈 뿐이다.
이러한 생명체의 본능적인 삶은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SF 호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이라는 세 가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본능을 지닌 존재는 바로 에이리언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본능적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생존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인간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환경은 무척 열악하다. 부모들은 일하다 죽거나 병에 걸리며, 아이들은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중심에는 레인(케일리 스패니)이 있다. 레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이 우울한 행성에서 벗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를 꿈꾼다. 이 여정에서 레인과 인조인간 동생 앤디(데이비드 존슨),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버려진 회사의 함선을 타고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함선에 숨어있던 에이리언들이 그들의 여정에 큰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첫 번째 감정] 인간 레인의 희망
레인은 직접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걸 보고 싶어한다. 종일 비가 내리는 식민행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이후 열심히 일하는 시간을 채워 다른 행성 이주를 꿈꿨지만, 정부에서 그것조차 허가하지 않는다. 레인의 희망은 태양이다. 태양을 볼 수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작은 희망의 조각이다. 레인은 자신이 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왜 살아가야하는가.
그 의문이 레인을 움직이게 만든다. 레인 뿐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버려진 함선에 가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방법은 조금 위험한 일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레인 역시 고민하지만 그 일을 해보려고 한다. 태양을 꿈꾸는 그녀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인에겐 동생이 있다. 기능 오류로 버려져있었던 인조인간 앤디다. 레인에겐 정말 동생같이 챙겨줘야하는 존재이고, 레인이 힘들어보이면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레인에게 위로를 준다. 인조인간 앤디 역시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다. 바로 레인을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 인조인간 앤디의 미안함
앤디는 스스로를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자주 느낀다. 그의 몸이 고장나고, 움직이지 못할 때마다 레인이 그를 리부트해 주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는 앤디가 자신의 한계에 대해 느끼는 미안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에서 앤디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더 강력한 인조인간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앤디는 점차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가지만, 그의 본질적인 존재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목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앤디의 이러한 존재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등장했던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철학적인 고민과도 닮아 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존재다. 앤디 역시 인간적인 감정과 기계적인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탐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미안함과 혼란은 단지 기계적 오류를 넘어서, 그가 가지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앤디가 다시 원래의 고장난 앤디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가족처럼 레인을 생각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난 그 자체가 바로 가족을 위해서라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인조인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다.
[세 번째 감정] 에이리언의 본능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본능을 가진 존재는 에이리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에이리언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는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살아남고, 더 많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 그들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이 에이리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폭력성에 경악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 역시 생명체로서 자신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이 점에서 에이리언들의 존재는 인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이러한 본능적인 생존에 대해 인간과 에이리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이리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본능은 그 자체로 생존의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인간은 그 존재를 넘어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결국에는 에이리언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 더 강력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는 결국 더 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시도에 불과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돌아온 코스믹 호러
영화를 연출한 페데 알바레즈는 <맨 인더 다크>와 같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스릴러와 호러 장르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 감독이다.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도 그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로 에이리언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알바레즈는 공포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며,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심리적인 공포를 강조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포 영화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깊이를 담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알바레즈가 기존의 에이리언 시리즈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 설정들을 재구성하면서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에이리언의 원초적인 공포를 유지하면서도, 우주적 공포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 기존 시리즈의 코스믹 호러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에게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전달했다.
케일리 스패니가 연기한 레인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이 그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도록 만든다. 인조인간 앤디를 연기한 데이비드 존슨 역시 기계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며, 그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단순한 생존 영화가 아니다.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의 대립을 통해 생존의 본질과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이 결코 에이리언의 위협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극악의 존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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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이라는 소름끼치는 무게
<로스트 도터>는 헐리웃에서는 작년 공개되어 아카데미 시상식 3개부문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이제야 개봉하면서 모성을 다룬 <브로커>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다.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고작은 아니라거나 소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호불호가 갈리는 악재마저 겹친 <브로커>는 모성에 대해 전통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제작한 이후 '여성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피드백을 받고 고심했고 그 결과 탄생한 이야기가 <브로커>라고 밝힌 바 있다. 소영(이지은 분)이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정을 그렸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소영은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신인 여성감독 매기 질렌할의 <로스트 도터> 속 모성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레다(올리비아 콜먼 분)는 성인이 된 딸들을 언급하기만 할 뿐 스크린으로 소환하지는 않는다. 레다의 딸들은 스크린 상에서 어린 아이들로서만 존재하며 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 레다의 커리어를 방해하고 레다를 괴롭히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천착해온 주제인 가족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드러나는 가족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고레에다 감독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어느 가족> 속 가족은 현대화된 핵가족의 틀조차 거부하고 시간을 거슬러 대가족의 형태를 두팔벌려 환영한다. 이들은 혈연이 아닐 뿐 전형적인 엄마와 아빠, 할머니,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브로커> 속 가족 또한 배경을 부산으로 옮겨왔을 뿐 친모이자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소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나눠맡는 동수(강동원 분), 아빠이자 가장 혹은 할아버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현(송강호 분) 그리고 아기 우성의 형으로 기능하는 해진으로 구성된다. 고레에다 감독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가족 내에서 희생해야 하는 여성이나 가장의 무게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다. <브로커> 속 가족은 아기 우성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역할을 구성하지만 각자의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현의 세탁소는 문 닫은 채 남겨져도 괜찮은 것인지, 동수가 찾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인지, 해진 또한 새로운 가족을 찾을 수는 없는지, 소영은 우성을 되찾거나 놓아준 후 자신만의 삶을 구축할 수는 없는 것인지 영화는 답해주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드러나는 각 캐릭터의 모습은 이들을 뒤쫓던 형사 수진(배두나 분)마저 우성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게 만든다.
반면 <로스트 도터>는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어머니에 집중한다. 레다는 가족여행 대신 홀로 휴가를 온 교수이고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삶에서 남편을 지운 것처럼 보인다. 레다가 마주치는 어머니들에게 레다는 인사치레로라도 긍정적인 말을 거의 해주지 못한다. 육아의 기쁨에 대해 설파하는 대신 임산부에게 '자식은 끔찍한 부담이에요'라고 경고하고 가족 파티를 하겠다는 가족에게 자리조차 비켜주지 않는다. 자식이 태어난 후 떠나버린(아마도 컬럼비아 대학으로 교수 발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남편의 빈 자리를 힘겹게 메꾸며 홀로 가정을 받쳐온 레다에게 가족 파티란 어머니의 희생을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조차 남성들이 아닌 임신한 여성에게 전가되고 거절하는 레다 옆에서 남자들은 무례하게 욕이나 내뱉을 뿐이다. 가정의 허상을 깨달은 지 오래인 레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상황에 대한 사과도 여성에게 미뤄지고 레다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듯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리를 피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레다의 등에 떨어진 솔방울은 가족 혹은 자식의 무게를 대변한다. 어느날 갑자기 레다에게 주어져 상흔으로 남지만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는 솔방울 흔적은 두번 떨어지면서 레다의 두 딸을 비유한다.
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아이라는 무게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다른 두 시각을 드러내는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감독의 성별이다. 상대적으로 육아 참여도가 낮은 동아시아의 남성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는 주로 어린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담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사람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동시에 어른에게서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한다. 반면 <로스트 도터> 속 아이들은 때로는 무심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애정으로 오인되는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하여 <로스트 도터> 속 엄마들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육아에 지친 니나(다코타 존슨 분)와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 분)의 표정은 엄마이길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성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기 위해, 혹은 스스로 우성을 키우기 위해 분투하는 소영과는 달리 니나와 레다는 아이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얻길 원한다. 감독의 반성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브로커>조차 단독 육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눈으로 본 이상적인 모성이 반영된 반면 <로스트 도터>는 현실적인 모성에 기반한 이야기에 가깝다. <브로커>와 <로스트 도터>는 각각 모성에 대한 환상과 현실을 반영하며, 어느 쪽에 이입할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브로커>의 흥행 스코어와 평을 볼 때 모성의 환상에는 관객이 크게 공감하지 못한 듯하다.
레다가 아이에게서 훔친 인형은 제목과 맞물려 레다의 딸들인 비앙카와 마사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다가 망가진 레다의 인형에 대한 대체품으로 그 이미지를 옮겨간다. 비앙카가 망가뜨리고 자신이 창 밖으로 내던져 산산조각난 인형은 출산과 육아로 한계에 다다른 레다 그 자신을 반영한다. 결국 레다가 훔친 인형은 레다 그 자신이며,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도망가 자기 자신을 추스른 레다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깨끗이 씻기고, 새 옷과 신을 사서 신긴 인형은 서사 내내 레다의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입에서 벌레를 뱉어낸다.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딸들을 떠나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형상화된 벌레는 인형의 입에서 기어나오며 내면의 오물을 모두 걷어낸다. 레다는 니나에게 끊임없이 인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데 이는 결국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육아는 언젠가 끝나고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엄마 선배로서의 조언이다. 하지만 인형을 돌려받는 니나는 아직 육아의 도중이기에 레다의 조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레다를 공격한다. 같은 위치에 놓인 여성, 엄마 동지조차도 그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기 전에는 모성의 굴레와 그 끔찍함에 대해 공감할 수 없음을 영화는 잔인하게 설명한다.
동시기 개봉한 모성에 관한 두 영화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허상과 실재를 보여준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확실한 것은 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부성의 무게와는 전혀 다르며 겪어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피로와 상처로 해안가에 쓰러진 레다가 다시 벗겨내는 오렌지 껍질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피로와 상처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고 딸들과 통화하는 레다의 모습은 자식 앞에서 삶의 무게를 내색할 수 없는 부모의 무게를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성인이 된 딸들과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레다는 마음 한 켠으로는 내려놓고 싶은 모성의 소름끼치는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브로커> 이미지는 네이버영화 출처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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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투게더> -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해피 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
개봉일 : 1998.08.22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관숙의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다시 시작하자” 보영의 한마디에 아휘는 흔들린다. 보영과 아휘는 연인이지만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깨지고 짧은 한마디로 겨우 다시 접합해놓은 사랑.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균열을 풀칠 몇 번으로 이어온, 어쩌면 지겹게도 느껴지는 사랑. 충분히 아프고 또 아팠으니 이 또한 사랑이었겠다.
1995년.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흘러가고 있던 시간을 이 영화를 통해 붙잡아본다. 저녁 8시, 도시는 바쁘게 반짝이고 보영과 아휘는 작은 집안에서 몸을 밀착한 채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갈라서고, 다시 시작한다.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낯선 도시에서 다시 돌아갈 고향을 꿈꾸며 아휘는 보영을 놓지 못한다.
보영 역을 맡은 장국영과 아휘 역을 맡은 양조위의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펼쳐지는 97분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며칠 전 4월 1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로 영혼을 탈탈 털어가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잡아탄 택시 라디오에서 장국영의 To You가 흘러나왔고, 저녁 7시 반쯤이 되어서야 알았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사실 난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다. 그는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근데 난 왜 성장기를 같이한 것도, 동시대를 살아본 것도 아닌 저 먼 곳에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이 묘하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대를, 발 한번 붙여보지 못한 도시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랑의 형태를 내가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아련하고 반짝이게 표현해낸 영화였다.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고,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아프게 가슴을 찔렀던 사랑이 속절없이 절벽 밑으로 추락한다. <해피투게더>는 그 사랑의 단편적인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해피투게더 시놉시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다시 시작하자”
보영은 속절없이 깨져버린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시작하자.”.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다 길을 잃은 이별을 선택하지만 보영은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 아휘는 당연하게도 보영의 한마디에 휘둘린다. 사랑하니까, 잊을 수 없으니까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휘는 보영과 이별을 하고 탱고바에서 일하며 보영보단 고향인 홍콩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때 두 사람의 순간들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아휘의 곁을 맴돌던 보영이 아휘의 삶으로 다시 들어온 순간, 화면에 청록빛의 색채가 드리운다.
보영은 아휘에게 담배를 빌리고, 아휘의 담배로 불을 붙이고, 아휘의 침대를 차지한다. 아휘는 보영을 집에 들이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자신은 소파에, 보영은 침대에. 크지 않은 집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명확히 나눠 두려 한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가 집을 비운 사이 침대와 소파를 붙이고, 좁은 소파에 누운 아휘의 옆을 파고든다.
보영과 아휘의 사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갑과 을에 가까웠다. 헤어지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보영의 뜻이었고, 아휘는 그에 따를 뿐이다. 근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휘는 손을 다친 보영을 보살폈고, 돈이 없는 보영에겐 아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휘는 보영의 옷 안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숨겨놓는다. 보영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아휘의 영역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휘는 보영을 보살피며 지겨울 만큼 끈덕진 사랑을 느낀다. 감기 몸살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날에도 밥이 필요하다는 보영의 한마디에 일어나 밥을 볶았고, 밤중에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보영의 말을 듣고 선반에 담배를 한 움큼 쌓아놓는다. 탱고바에서 일하는 게 싫다는 보영의 말에 설거지 일을 구했고, 아픈 보영을 보살피는 게 행복했다. 손이 낫고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차라리 보영의 손이 낫지 않았으면 하는 슬픈 바람도 가져본다.
“넌 항상 제멋대로 하잖아.”
여러 번 깨어진 사랑에 단단한 신뢰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아휘는 여권을 찾는 보영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권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휘는 처절하게 사랑의 환부를 잡아보지만, 보영은 그를 외면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이별을 맞이한다. 몇 번째 이별이었을까.
“네가 불행한 게 느껴져.”
아휘의 친구이자 동료인 ‘장’은 어릴 때 눈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곧 일을 관두고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에 갈 거라는 목표를 가진 청년이다. 장은 아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픔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는 연인도 들어주지 않았던 아휘의 슬픔. 장은 그것을 담아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 등대에 도착한 장은 아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음기를 틀어본다. 녹음기 안에 담긴 건 흐느끼는듯한 소리뿐이었다. 그 흐느낌이 말하고 있는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은 아휘의 흐느낌을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휘가 이별의 아픔을 담은 흐느낌을 녹음기 안에 담아내고 있을 때, 보영 또한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끝났다. 아휘는 도살장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물로 씻어내며 보영의 지겨운 에피소드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완전한 끝을 맞이했음을 알게 된 보영은 담배를 잔뜩 사들고 아휘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휘는 떠난 뒤였다. 보영은 담요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휘는 보영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그대로 내려놓은 채 혼자 이과수 폭포로 떠난다. 테이블에 놓인 이과수 폭포 램프 안엔 다정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있지만 진짜 이과수 폭포 앞엔 아휘 혼자 서있다. 반짝이는 이과수 폭포 램프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휘는 보영을 생각하며 슬픔을 말한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서로의 스텝이 맞춰지지 않은 탱고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지만 아휘는 스텝을 자꾸 헷갈린다. 보영은 그런 아휘에게 다시 연습해보라며 홀로 연습할 시간을 주고, 다시 탱고를 춘다. 보영과 아휘는 손을 맞잡고 사랑하다가도 스텝이 엇갈리면 가차 없이 손을 놓았고, 아휘가 다시 스텝을 맞춰오면 잠시 함께 춤을 췄다가, 엇갈리면 다시 놓았다. 지금껏 아휘가 보영의 스텝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휘가 그 노력의 끈을 놓은 순간, 사랑은 정말 끝나버린다.
사랑은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 한마디로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좋다고,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 한마디를 왜 그리 아꼈던 것일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지독하게 아픈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엔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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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을 기다려 깨달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약간 스포 있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연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매한 유리병을 통해 정령 지니를 깨운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단 세 번.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경고가 담겨 있다'라며 그에게 소원 빌기를 거부하는데........ 지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병에 갇혀 있었으며 알리테아는 무슨 소원으로 지니를 구원할까?
1. 내용은 많지만 어딘가 빈약한 스토리 라인
이 영화의 장점은 옛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려낸 미술에 있다. 전설 속 시바 여왕의 이야기부터 페르시아의 왕가의 생활상, 제피르의 발명품 등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배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영화의 ost도 정말 좋아서 다시 듣고 있다.또한 이 영화에는 '알라딘'처럼 지니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램프가 아닌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도 재미있다.
여기서 지니는 정령으로서 등장하는데 알리테아는 정령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기에 지니가 등장했을 때 그는 지니의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게 왠걸 알리테아의 소원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대한 기대가 하락한다. 이 때부터 갑자기 지니와 알리테아의 로맨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 뜬금없이 지니에게 사랑 고백을 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나를 사랑해달라'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어떤 관객 분이 '엥?' 하시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 이 의아함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이후 두 캐릭터가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된다. 고백씬이 뜬금없어서였는지 뒤이어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알리테아와 지니의 일상 장면에서도 이들의 사랑에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었다.
2. 사랑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예상해본다면 '인생에서 사랑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라는 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듯하다. 그래야 상대를 자신의 열등함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니가 유리병 속에 3번이나 갇혀 있었던 이유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바 여왕에게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한 번은 죽을 운명이었던 한 페르시아의 시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한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제피르를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소원을 말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하지만 지니를 가두었던 세 여자들 모두 궁극적으로 지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의 사랑은 그들의 갈망을 이뤄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고 그들의 목적은 지니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 여자들은 지니를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 속에서 을일 수밖에 없었던 지니는 항상 관계에서 패배해 유리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니는 소원을 통해 남을 구원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그를 사랑하겠으니 나를 사랑해달라는 직접적인 고백만이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랑 빼고 모든 것을 이룬 알리테아 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것 빼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그녀였기에 지니를 더이상 도구로써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의 이해 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3.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상대에게서 찾으며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은 이런 사람들이 찔릴 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부족함을 상대에게 채워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결국 알리테아와 지니가 나눈 길고 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상대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일어서고 자립할 것, 그것부터가 사랑의 시작이다.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 관객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찾아보려고 한다. 왠지 내가 놓친 영화의 메타포가 있을 것 같고 정령인 지니가 전자파로 이뤄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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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담은 한 노인의 기억과 회한
개봉 전 시사회에서 먼저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가족과의 관계를 시작해 여러 또래 친구들을 만들어가며 다양한 소통을 이어나간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성인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원래의 가족에서 독립하지만 다시 자신만의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을 키워나가기 위해 일을 하거나 집안 일을 돌본다. 그렇게 자신의 가족과의 관계에 얽메어 보내는 시간은 많지만 그 시간은 덧없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가족에 신경쓰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 덧 나이가 들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자식들은 독립하여 나가고, 남은 배우자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배우자 마저 세상을 등지게 되면, 결국 혼자가 된다. 그렇게 남겨지는 건 나이든 모습이 되어버린 자신 뿐이다. 우리 주변에도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노년층이 많다. 그들은 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산책을 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간다. 어쩌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외로움의 무게를 좀 더 잘 참아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강하게 자신을 옭아매었던 가족들에게 해방되는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 매일매일 찾아오는 하루의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다.
75세 노인 모모코의 이야기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이제 75세가 된 모모코(다나카 유코)의 이야기를 담는 영화다. 현재의 모모코와 과거 젊은 시절의 모모코(아오이 유우)가 교차로 보여지며 그가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와 함께 현재 노인이 된 모모코의 모습이 펼쳐진다. 영화는 아주 담담하고 때론 유머러스하게 모모코의 생활을 보여주는데, 사실 상 영화의 대부분은 모모코가 혼자 보내는 시간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해먹고, TV를 보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들을 보여주면서 그가 떠올리는 기억들이 이어진다.
모모코의 남편(히가시데 마사히로)는 몇 년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들과 딸은 모두 독립했다. 그나마 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교류가 없다. 그래서 영화 초반 모모코의 모습은 왠지 외로워 보이고 어딘가 아파 보인다. 영화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모모코의 또다른 자아 혹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모코가 과거를 떠올릴 때나 혼잣말을 할 때 어김없이 그들이 등장하여 모모코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 처럼 혼자 있을 때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머리 속으로 자신만의 대화를 하는 것을 화면으로 옮긴 것 같다. 조금은 정신 없지만 꽤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모모코가 병원에서 어떤 그림을 봤을 때 혹은 어떤 특정 장소나 상황을 경험할 때, 과거의 일들이 플래쉬 백으로 이어진다. 가끔은 영화 속 현재 시점에 모모코의 과거 모습이 그대로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과거나 과거의 모습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무수한 과거의 추억과 기억들은 차례차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떠올랐다 지나가곤 한다. 그것처럼 모모코도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남편과 만났던 시간 그리고 어떤 때는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영화는 결국 나이 듦에 대한 영화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웬디>도 나이 듦에 대한 영화였는데, <웬디>는 나이 듦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였다. 반면,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나이가 든 노인의 일상과 마음을 담는데 보다 집중한다. 혼자가 되었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는 과정이 여러가지 연극적 장치들로 표현되고 있고 노인이 되어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먹는 모습 등을 통해 그들이 겪는 일상이 보여진다. 모모코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보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등 남편과 사별한 이후 혼자된 일상에서 작은 자유를 누린다. 그것이 남편이 자신을 남겨둔 이유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영화 속 모모코는 그렇게 나이 듦과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모모코가 가진 기억과 회한을 아름답게 담다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은 모모코가 혼자 등산을 가는 장면일 것이다. 조용히 도시락을 싸서 물통을 들고 산으로 향한 그는 산에 올라가는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만난다. 꼬마의 모습을 한 모모코를 만나 대화를 하기도 하고, 20대의 모습을 한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젊은 모습을 한 남편을 만나 손을 잡고 걸으며 대화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모두 등산을 하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일텐데 그 모습이 꽤 감동적이다. 마치 나 자신의 추억과 대화하는 것처럼 과거와 만나는 모모코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 모든 추억과 기억들을 만나 하나씩 둘러본다.
그는 시골에서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도망쳐 도시로 왔기 때문에 부모와의 추억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결혼 후 50년 넘게 같이 생활한 남편과 가족에 대한 기억들은 마음 구석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다. 비록 지금 독립하고 관계가 소원해진 아들과 딸 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아들과 딸을 보는 젊은 모모코는 늘 웃는 모습이다. 남편을 보는 모모코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웃는 모습이다. 그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름대로 행복했지만 너무 가족만 보다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처음 도시로 와서 원했던 자유로운 신여성이 되지는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에게 작은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여러가지 작은 것들을 하려고 하는 모모코의 모습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은 우주가 만들어지고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하여 진화하는 순간들이 애니메이션으로 펼쳐진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을 보며 공부하고 메모하는 내용들이다. 어쩌면 치매예방을 위해 해나간다고도 볼 수 있는 그 내용들은 이미 모모코의 머리 속에 자리하여 그의 기억이 되었다. 영화는 모모코가 치매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모모코가 큰 문제없이 잘 살아갈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려준다. 영화의 말미 모모코와 손녀의 대화에 보여지는 모모코의 얼굴은 그가 살고 있는 그 삶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 아카타케 치사코의 소설을 영화화한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아주 정적인 영화다. 등장인물이 거의 없고, 특별히 어떤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스토리 전개라고 할만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모모코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을 담을 뿐이다. 한 노인의 정신과 마음을 온전히 담은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에서 과거와 만나고 추억을 회한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모모코의 모습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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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책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에 나타났다
- 6명의 등장인물Six CharactersCast감독: M.L. 뿐드헤바놉 데와쿤출연: 마리오 마우러, 탁손 팍숙차레른, 케마닛 짜미콘, 나타폰 떼미락, 챠이야폴 줄리언 포우파르트, 빠껀 찻버리락Synopsis긴장감이 감도는 영화 세트. 호러영화를 촬영하려는 감독은 무척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제멋대로인 배우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와중에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여섯 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죽은 작가가 남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독은 낯선 이방인들을 비웃지만 결국 그들이 말하는 치명적인 가족의 이야기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출처: 부산국제영화제)Review부산국제영화제에 태국 영화의 등장이라, 재밌어지겠네.드라마 <상속자들>의 대사 ‘사학루등’을 아시나요?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라, 재밌어지겠네.” 드라마가 종영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센세이셔널한 대사인데요. 감히 이 대사를 패러디할 정도라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된 태국 영화를 향한 제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느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태국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탓인지, 좌석이 매진되어 하마터면 영화를 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상영 직전에야 겨우 표를 구할 수 있었죠. 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부산 영화의전당 소극장에 들어섰습니다. 낯선 태국어만큼이나 생경하고 신선한 영화 <6명의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 ⊙감독, 배우, 그리고 인물(Character)의 이야기<6명의 등장인물>은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작품을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키워드로 소개하는데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인 감독과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죠.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바로 이야기 속 인물들입니다.이 영화의 골자는 원작과 유사합니다. 죽은 작가의 등장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준비 중인 연출진과 배우들 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삶을 설명하고 호소하죠. 극을 이끄는 건 감독과 배우여야 마땅하나, <6명의 등장인물>의 흐름을 쥐고 흔드는 건 책 속에만 존재해왔던 인물들입니다. 연출진과 배우들은 어느 순간 관객이 되어, 배우보다 더 배우처럼 격렬하게 무대를 장악하는 인물들을 그저 지켜봅니다. 누군가에 의해 표현되어야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그들은 고삐 풀린 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토해냅니다. 독자 또는 관객의 흥미에 따라 외면되곤 했던 인물들의 숨은 사정을 조명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 ⊙원작의 철학을 녹여내는 이 영화만의 방법영화 촬영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6명의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스토리텔링되는 사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 관객을 향한 독백 같은 대사,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들과 짐짓 꾸며낸 듯한 과장된 제스처와 말투까지. <6명의 등장인물>은 어찌 보면 조악한 연극 같아 보입니다. 극의 전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데가 하나 없습니다. 영화를 찍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영화를 찍기는커녕, 어디선가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들의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버리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원작자 루이지 피란델로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철학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영화의 접근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헛되고 실체가 없다”고 말한 피란델로는 인간의 부조리를 내용으로 하는 작품을 많이 썼거든요. 작가가 정해놓은 대로 살아가는 인물들마저도 진실의 일면만을 설파하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내려 한다는 ‘의붓딸(6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의 고백에서 피란델로의 철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무의미하고 불합리함으로 점철되어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느 것이 현실이고, 이야기인지, 누가 배우이고, 인물인지 끊임없이 모호하게 하는 <6명의 등장인물>. 아마도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과한 연극적 요소와 조악함, 불합리함 등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을 영화적 방법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선택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만한 상상에 인간의 부조리에 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더한 작품, <6명의 등장인물>. 이야기 속 인물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상상은 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태국어 원제 <มายาพิศวง>를 안 살펴볼 수 없죠. มายา는 기만이나 속임, พิศวง는 기이하게 느끼거나 의혹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기이한 속임, 의심스러운 기만으로 풀어볼 수 있는데요. 이 영화에 대한 한 줄 평을 해야 한다면 딱 저 제목을 빌리고 싶습니다. “기이한 속임과 의심스러운 기만.” 6명의 등장인물의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혹시 기만은 아닌지 의심하다 보면, 진실과 거짓, 현실과 이야기를 오가는 기이한 속임을 경험하는 작품. 제목처럼 묘하고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Schedule in BIFF2022.10.06(목)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16:302022.10.07(금) 영화의전당 소극장 12:302022.10.09(일)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13:30부산국제영화제 기간: 10월 04일 -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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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발신제한 후기 / 조우진 원톱 / 부산을 배경으로 펼치는 추격전 / 로드무비 / 한국에도 폭발물 처리반이?! / 김창주 감독님 데뷔작 축하합니다!!!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발신제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스릴러, #드라마,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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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님 단편영화 이렇게 만드는거 맞죠..?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영화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끼리 결국...!! 영화 제작까지 도전 합니다 ٩(๑• ₃ -๑)۶
많.관.부 ◟( ˘ 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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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파이널 예고편
가장 강력한 운명의 적과 마주하게 된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미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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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죠죠의 기묘한 모험 : 스톤 오션> 공식 예고편
2011년, 미국 플로리다 주 남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사고에 휘말린 쿠죠 죠린.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돌로 만들어진 바다와 같은 교도소. 스톤 오션에 갇힌 죠린은 과연 그 바다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뒤엉킨 운명으로 인해 수백 년간 싸워온 죠스타 가문 사람들과 디오. 이제, 마지막 대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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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활한 코스믹 호러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부모의 DNA를 이어받아 작은 존재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길을 걷게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먹고, 자라며, 배우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족 유지라는 학문적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살아가는 본능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며, 계속해서 그 본능을 이어갈 뿐이다.
이러한 생명체의 본능적인 삶은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SF 호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이라는 세 가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본능을 지닌 존재는 바로 에이리언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본능적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생존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인간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환경은 무척 열악하다. 부모들은 일하다 죽거나 병에 걸리며, 아이들은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중심에는 레인(케일리 스패니)이 있다. 레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이 우울한 행성에서 벗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를 꿈꾼다. 이 여정에서 레인과 인조인간 동생 앤디(데이비드 존슨),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버려진 회사의 함선을 타고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함선에 숨어있던 에이리언들이 그들의 여정에 큰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첫 번째 감정] 인간 레인의 희망
레인은 직접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걸 보고 싶어한다. 종일 비가 내리는 식민행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이후 열심히 일하는 시간을 채워 다른 행성 이주를 꿈꿨지만, 정부에서 그것조차 허가하지 않는다. 레인의 희망은 태양이다. 태양을 볼 수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작은 희망의 조각이다. 레인은 자신이 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하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왜 살아가야하는가.
그 의문이 레인을 움직이게 만든다. 레인 뿐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버려진 함선에 가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방법은 조금 위험한 일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레인 역시 고민하지만 그 일을 해보려고 한다. 태양을 꿈꾸는 그녀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인에겐 동생이 있다. 기능 오류로 버려져있었던 인조인간 앤디다. 레인에겐 정말 동생같이 챙겨줘야하는 존재이고, 레인이 힘들어보이면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레인에게 위로를 준다. 인조인간 앤디 역시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다. 바로 레인을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 인조인간 앤디의 미안함
앤디는 스스로를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자주 느낀다. 그의 몸이 고장나고, 움직이지 못할 때마다 레인이 그를 리부트해 주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는 앤디가 자신의 한계에 대해 느끼는 미안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에서 앤디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더 강력한 인조인간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앤디는 점차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가지만, 그의 본질적인 존재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목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앤디의 이러한 존재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등장했던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철학적인 고민과도 닮아 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존재다. 앤디 역시 인간적인 감정과 기계적인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탐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미안함과 혼란은 단지 기계적 오류를 넘어서, 그가 가지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앤디가 다시 원래의 고장난 앤디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가족처럼 레인을 생각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난 그 자체가 바로 가족을 위해서라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인조인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다.
[세 번째 감정] 에이리언의 본능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본능을 가진 존재는 에이리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에이리언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는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살아남고, 더 많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 그들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이 에이리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폭력성에 경악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 역시 생명체로서 자신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이 점에서 에이리언들의 존재는 인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 역시 생존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이러한 본능적인 생존에 대해 인간과 에이리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이리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본능은 그 자체로 생존의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인간은 그 존재를 넘어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결국에는 에이리언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진화하고자 하는 욕망, 더 강력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는 결국 더 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시도에 불과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돌아온 코스믹 호러
영화를 연출한 페데 알바레즈는 <맨 인더 다크>와 같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스릴러와 호러 장르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 감독이다.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도 그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로 에이리언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알바레즈는 공포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며,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심리적인 공포를 강조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포 영화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깊이를 담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알바레즈가 기존의 에이리언 시리즈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 설정들을 재구성하면서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에이리언의 원초적인 공포를 유지하면서도, 우주적 공포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 기존 시리즈의 코스믹 호러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에게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전달했다.
케일리 스패니가 연기한 레인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이 그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도록 만든다. 인조인간 앤디를 연기한 데이비드 존슨 역시 기계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며, 그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단순한 생존 영화가 아니다. 인간과 인조인간, 그리고 에이리언의 대립을 통해 생존의 본질과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이 결코 에이리언의 위협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극악의 존재로부터 오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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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이라는 소름끼치는 무게
<로스트 도터>는 헐리웃에서는 작년 공개되어 아카데미 시상식 3개부문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이제야 개봉하면서 모성을 다룬 <브로커>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다.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고작은 아니라거나 소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호불호가 갈리는 악재마저 겹친 <브로커>는 모성에 대해 전통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제작한 이후 '여성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피드백을 받고 고심했고 그 결과 탄생한 이야기가 <브로커>라고 밝힌 바 있다. 소영(이지은 분)이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정을 그렸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소영은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신인 여성감독 매기 질렌할의 <로스트 도터> 속 모성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레다(올리비아 콜먼 분)는 성인이 된 딸들을 언급하기만 할 뿐 스크린으로 소환하지는 않는다. 레다의 딸들은 스크린 상에서 어린 아이들로서만 존재하며 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 레다의 커리어를 방해하고 레다를 괴롭히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천착해온 주제인 가족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드러나는 가족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고레에다 감독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어느 가족> 속 가족은 현대화된 핵가족의 틀조차 거부하고 시간을 거슬러 대가족의 형태를 두팔벌려 환영한다. 이들은 혈연이 아닐 뿐 전형적인 엄마와 아빠, 할머니,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브로커> 속 가족 또한 배경을 부산으로 옮겨왔을 뿐 친모이자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소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나눠맡는 동수(강동원 분), 아빠이자 가장 혹은 할아버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현(송강호 분) 그리고 아기 우성의 형으로 기능하는 해진으로 구성된다. 고레에다 감독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가족 내에서 희생해야 하는 여성이나 가장의 무게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다. <브로커> 속 가족은 아기 우성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역할을 구성하지만 각자의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현의 세탁소는 문 닫은 채 남겨져도 괜찮은 것인지, 동수가 찾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인지, 해진 또한 새로운 가족을 찾을 수는 없는지, 소영은 우성을 되찾거나 놓아준 후 자신만의 삶을 구축할 수는 없는 것인지 영화는 답해주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드러나는 각 캐릭터의 모습은 이들을 뒤쫓던 형사 수진(배두나 분)마저 우성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게 만든다.
반면 <로스트 도터>는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어머니에 집중한다. 레다는 가족여행 대신 홀로 휴가를 온 교수이고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삶에서 남편을 지운 것처럼 보인다. 레다가 마주치는 어머니들에게 레다는 인사치레로라도 긍정적인 말을 거의 해주지 못한다. 육아의 기쁨에 대해 설파하는 대신 임산부에게 '자식은 끔찍한 부담이에요'라고 경고하고 가족 파티를 하겠다는 가족에게 자리조차 비켜주지 않는다. 자식이 태어난 후 떠나버린(아마도 컬럼비아 대학으로 교수 발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남편의 빈 자리를 힘겹게 메꾸며 홀로 가정을 받쳐온 레다에게 가족 파티란 어머니의 희생을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조차 남성들이 아닌 임신한 여성에게 전가되고 거절하는 레다 옆에서 남자들은 무례하게 욕이나 내뱉을 뿐이다. 가정의 허상을 깨달은 지 오래인 레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상황에 대한 사과도 여성에게 미뤄지고 레다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듯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리를 피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레다의 등에 떨어진 솔방울은 가족 혹은 자식의 무게를 대변한다. 어느날 갑자기 레다에게 주어져 상흔으로 남지만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는 솔방울 흔적은 두번 떨어지면서 레다의 두 딸을 비유한다.
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아이라는 무게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다른 두 시각을 드러내는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감독의 성별이다. 상대적으로 육아 참여도가 낮은 동아시아의 남성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는 주로 어린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담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사람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동시에 어른에게서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한다. 반면 <로스트 도터> 속 아이들은 때로는 무심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애정으로 오인되는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하여 <로스트 도터> 속 엄마들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육아에 지친 니나(다코타 존슨 분)와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 분)의 표정은 엄마이길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성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기 위해, 혹은 스스로 우성을 키우기 위해 분투하는 소영과는 달리 니나와 레다는 아이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얻길 원한다. 감독의 반성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브로커>조차 단독 육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눈으로 본 이상적인 모성이 반영된 반면 <로스트 도터>는 현실적인 모성에 기반한 이야기에 가깝다. <브로커>와 <로스트 도터>는 각각 모성에 대한 환상과 현실을 반영하며, 어느 쪽에 이입할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브로커>의 흥행 스코어와 평을 볼 때 모성의 환상에는 관객이 크게 공감하지 못한 듯하다.
레다가 아이에게서 훔친 인형은 제목과 맞물려 레다의 딸들인 비앙카와 마사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다가 망가진 레다의 인형에 대한 대체품으로 그 이미지를 옮겨간다. 비앙카가 망가뜨리고 자신이 창 밖으로 내던져 산산조각난 인형은 출산과 육아로 한계에 다다른 레다 그 자신을 반영한다. 결국 레다가 훔친 인형은 레다 그 자신이며,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도망가 자기 자신을 추스른 레다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깨끗이 씻기고, 새 옷과 신을 사서 신긴 인형은 서사 내내 레다의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입에서 벌레를 뱉어낸다.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딸들을 떠나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형상화된 벌레는 인형의 입에서 기어나오며 내면의 오물을 모두 걷어낸다. 레다는 니나에게 끊임없이 인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데 이는 결국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육아는 언젠가 끝나고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엄마 선배로서의 조언이다. 하지만 인형을 돌려받는 니나는 아직 육아의 도중이기에 레다의 조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레다를 공격한다. 같은 위치에 놓인 여성, 엄마 동지조차도 그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기 전에는 모성의 굴레와 그 끔찍함에 대해 공감할 수 없음을 영화는 잔인하게 설명한다.
동시기 개봉한 모성에 관한 두 영화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허상과 실재를 보여준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확실한 것은 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부성의 무게와는 전혀 다르며 겪어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피로와 상처로 해안가에 쓰러진 레다가 다시 벗겨내는 오렌지 껍질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피로와 상처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고 딸들과 통화하는 레다의 모습은 자식 앞에서 삶의 무게를 내색할 수 없는 부모의 무게를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성인이 된 딸들과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레다는 마음 한 켠으로는 내려놓고 싶은 모성의 소름끼치는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브로커> 이미지는 네이버영화 출처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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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투게더> -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해피 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
개봉일 : 1998.08.22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관숙의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다시 시작하자” 보영의 한마디에 아휘는 흔들린다. 보영과 아휘는 연인이지만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깨지고 짧은 한마디로 겨우 다시 접합해놓은 사랑.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균열을 풀칠 몇 번으로 이어온, 어쩌면 지겹게도 느껴지는 사랑. 충분히 아프고 또 아팠으니 이 또한 사랑이었겠다.
1995년.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흘러가고 있던 시간을 이 영화를 통해 붙잡아본다. 저녁 8시, 도시는 바쁘게 반짝이고 보영과 아휘는 작은 집안에서 몸을 밀착한 채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갈라서고, 다시 시작한다.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낯선 도시에서 다시 돌아갈 고향을 꿈꾸며 아휘는 보영을 놓지 못한다.
보영 역을 맡은 장국영과 아휘 역을 맡은 양조위의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펼쳐지는 97분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며칠 전 4월 1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로 영혼을 탈탈 털어가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잡아탄 택시 라디오에서 장국영의 To You가 흘러나왔고, 저녁 7시 반쯤이 되어서야 알았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사실 난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다. 그는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근데 난 왜 성장기를 같이한 것도, 동시대를 살아본 것도 아닌 저 먼 곳에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이 묘하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대를, 발 한번 붙여보지 못한 도시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랑의 형태를 내가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아련하고 반짝이게 표현해낸 영화였다.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고,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아프게 가슴을 찔렀던 사랑이 속절없이 절벽 밑으로 추락한다. <해피투게더>는 그 사랑의 단편적인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해피투게더 시놉시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다시 시작하자”
보영은 속절없이 깨져버린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시작하자.”.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다 길을 잃은 이별을 선택하지만 보영은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 아휘는 당연하게도 보영의 한마디에 휘둘린다. 사랑하니까, 잊을 수 없으니까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휘는 보영과 이별을 하고 탱고바에서 일하며 보영보단 고향인 홍콩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때 두 사람의 순간들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아휘의 곁을 맴돌던 보영이 아휘의 삶으로 다시 들어온 순간, 화면에 청록빛의 색채가 드리운다.
보영은 아휘에게 담배를 빌리고, 아휘의 담배로 불을 붙이고, 아휘의 침대를 차지한다. 아휘는 보영을 집에 들이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자신은 소파에, 보영은 침대에. 크지 않은 집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명확히 나눠 두려 한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가 집을 비운 사이 침대와 소파를 붙이고, 좁은 소파에 누운 아휘의 옆을 파고든다.
보영과 아휘의 사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갑과 을에 가까웠다. 헤어지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보영의 뜻이었고, 아휘는 그에 따를 뿐이다. 근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휘는 손을 다친 보영을 보살폈고, 돈이 없는 보영에겐 아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휘는 보영의 옷 안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숨겨놓는다. 보영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아휘의 영역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휘는 보영을 보살피며 지겨울 만큼 끈덕진 사랑을 느낀다. 감기 몸살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날에도 밥이 필요하다는 보영의 한마디에 일어나 밥을 볶았고, 밤중에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보영의 말을 듣고 선반에 담배를 한 움큼 쌓아놓는다. 탱고바에서 일하는 게 싫다는 보영의 말에 설거지 일을 구했고, 아픈 보영을 보살피는 게 행복했다. 손이 낫고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차라리 보영의 손이 낫지 않았으면 하는 슬픈 바람도 가져본다.
“넌 항상 제멋대로 하잖아.”
여러 번 깨어진 사랑에 단단한 신뢰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아휘는 여권을 찾는 보영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권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휘는 처절하게 사랑의 환부를 잡아보지만, 보영은 그를 외면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이별을 맞이한다. 몇 번째 이별이었을까.
“네가 불행한 게 느껴져.”
아휘의 친구이자 동료인 ‘장’은 어릴 때 눈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곧 일을 관두고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에 갈 거라는 목표를 가진 청년이다. 장은 아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픔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는 연인도 들어주지 않았던 아휘의 슬픔. 장은 그것을 담아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 등대에 도착한 장은 아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음기를 틀어본다. 녹음기 안에 담긴 건 흐느끼는듯한 소리뿐이었다. 그 흐느낌이 말하고 있는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은 아휘의 흐느낌을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휘가 이별의 아픔을 담은 흐느낌을 녹음기 안에 담아내고 있을 때, 보영 또한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끝났다. 아휘는 도살장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물로 씻어내며 보영의 지겨운 에피소드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완전한 끝을 맞이했음을 알게 된 보영은 담배를 잔뜩 사들고 아휘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휘는 떠난 뒤였다. 보영은 담요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휘는 보영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그대로 내려놓은 채 혼자 이과수 폭포로 떠난다. 테이블에 놓인 이과수 폭포 램프 안엔 다정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있지만 진짜 이과수 폭포 앞엔 아휘 혼자 서있다. 반짝이는 이과수 폭포 램프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휘는 보영을 생각하며 슬픔을 말한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서로의 스텝이 맞춰지지 않은 탱고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지만 아휘는 스텝을 자꾸 헷갈린다. 보영은 그런 아휘에게 다시 연습해보라며 홀로 연습할 시간을 주고, 다시 탱고를 춘다. 보영과 아휘는 손을 맞잡고 사랑하다가도 스텝이 엇갈리면 가차 없이 손을 놓았고, 아휘가 다시 스텝을 맞춰오면 잠시 함께 춤을 췄다가, 엇갈리면 다시 놓았다. 지금껏 아휘가 보영의 스텝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휘가 그 노력의 끈을 놓은 순간, 사랑은 정말 끝나버린다.
사랑은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 한마디로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좋다고,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 한마디를 왜 그리 아꼈던 것일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지독하게 아픈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엔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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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을 기다려 깨달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약간 스포 있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연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매한 유리병을 통해 정령 지니를 깨운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단 세 번.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경고가 담겨 있다'라며 그에게 소원 빌기를 거부하는데........ 지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병에 갇혀 있었으며 알리테아는 무슨 소원으로 지니를 구원할까?
1. 내용은 많지만 어딘가 빈약한 스토리 라인
이 영화의 장점은 옛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려낸 미술에 있다. 전설 속 시바 여왕의 이야기부터 페르시아의 왕가의 생활상, 제피르의 발명품 등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배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영화의 ost도 정말 좋아서 다시 듣고 있다.또한 이 영화에는 '알라딘'처럼 지니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램프가 아닌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도 재미있다.
여기서 지니는 정령으로서 등장하는데 알리테아는 정령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기에 지니가 등장했을 때 그는 지니의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게 왠걸 알리테아의 소원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대한 기대가 하락한다. 이 때부터 갑자기 지니와 알리테아의 로맨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 뜬금없이 지니에게 사랑 고백을 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나를 사랑해달라'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어떤 관객 분이 '엥?' 하시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 이 의아함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이후 두 캐릭터가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된다. 고백씬이 뜬금없어서였는지 뒤이어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알리테아와 지니의 일상 장면에서도 이들의 사랑에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었다.
2. 사랑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예상해본다면 '인생에서 사랑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라는 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듯하다. 그래야 상대를 자신의 열등함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니가 유리병 속에 3번이나 갇혀 있었던 이유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바 여왕에게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한 번은 죽을 운명이었던 한 페르시아의 시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한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제피르를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소원을 말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하지만 지니를 가두었던 세 여자들 모두 궁극적으로 지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의 사랑은 그들의 갈망을 이뤄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고 그들의 목적은 지니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 여자들은 지니를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 속에서 을일 수밖에 없었던 지니는 항상 관계에서 패배해 유리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니는 소원을 통해 남을 구원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그를 사랑하겠으니 나를 사랑해달라는 직접적인 고백만이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랑 빼고 모든 것을 이룬 알리테아 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것 빼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그녀였기에 지니를 더이상 도구로써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의 이해 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3.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상대에게서 찾으며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은 이런 사람들이 찔릴 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부족함을 상대에게 채워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결국 알리테아와 지니가 나눈 길고 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상대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일어서고 자립할 것, 그것부터가 사랑의 시작이다.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 관객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찾아보려고 한다. 왠지 내가 놓친 영화의 메타포가 있을 것 같고 정령인 지니가 전자파로 이뤄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