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6 12:29:13
[JEONJU IFF 데일리] 그 땅에 영화가, 사람이 있다
영화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리뷰
DIRECTOR. 가자의 영화감독들
SYNOPSIS.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는 팔레스타인 영화감독 스물두 명이 전쟁 중인 가자 지구에서 그들 각자의 삶을 포착한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픽션의 혼합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인간 정신의 굳건함을 강력하게 증언한 작품.

“내가 죽는다면, 세상에 울림이 있는 죽음이 되길 바란다. 그저 한 줄 속보에 실리거나, 희생자 숫자로만 남고 싶지는 않다. (…) 나는 세상이 듣는 죽음,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묻히지 않을 불멸의 이미지로 남고 싶다.”
지난 4월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자택에 있던, 이스라엘군의 로켓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 파티마 하수나(25세)의 말이다. 그는 사진 기자인 동시에 다큐멘터리 작가로, 그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칸영화제 독립영화 병행 섹션에 초청된 다음 날 사망했다. 일곱 명의 일가족이 함께. 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보며 얼마 전 보도로 접한 그의 소식을 떠올린 건, 마치 그에 이어지는 느낌의 편지로 이 영화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상정한 <셀카>는,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편지가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멋지게 살았던 걸 알아 줬으면 해. 그곳의 삶과 사랑을 사랑했음을.”이라는 말은 파티마 하수나의 말에 화음처럼 울린다.

사실 22개의 작은 이야기 조각이 모여 있는 <그라운드 제로> 자체가 거대한 화음처럼 울려퍼진다. 뉴스 보도 속 숫자와 통계, 머나먼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 쉬운 가자의 소식은 22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는다. 그 중에는 땅에 떨어진 밀가루를 두 손으로 주워담으며 스스로의 삶을 비참하다 말하는 순간, 폭격으로 시신이 분해될 경우에 대비해 아이들의 팔과 다리에 이름을 굵직하게 남기며 우는 엄마들의 마음 (그리고 그건 이름이 아니라 죽음임을 알고 함께 우는 아이들의 마음), 24시간 안에 3번이나 폭격을 당해 몇 번이나 구조된 사람의 마음, 종일 줄을 서고 또 서도 물과 음식과 전기를 얻지 못한 하루를 보내는 마음, 건물 잔해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울부짖는 마음, 심지어 가족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영화 촬영을 멈출 수밖에 없던 감독의 코멘트로 영화를 닫는 (그야말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마음…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 깊은 절망과 참담함도 있다.
이 절망은 아주 거대하지만 동시에 아주 미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폭격을 피해 도망가느라 두고 갔던 고양이를 다시 만났을 때 터지는 눈물, 좋은 평가를 받았던 미술 과제들을 먼지 덮인 잔해 속에서 하나씩 끄집어내는 착잡한 손길,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기분이 들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인공들의 상황에 자꾸 내 상황이 겹쳐 보이는 공포, 설거지와 목욕과 청소 마지막으로 변기 물까지 한 동이 물을 여러 차례 재활용하는 손길…

재난은 언제나 거시적인 동시에 미시적이다. 산불 피해가 닥쳤을 때 사라진 건 집과 과수원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가자지구를 덮친 전쟁은 건물을 부수고 가족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당장 얼굴에 바를 로션이 없는 것, 피난하느라 두고 온 책이 생각나는 것, 아침에 마실 차 한 잔이 없어진 것, 북적거리는 텐트 한가운데서 아침을 맞는 것… 삶에서 사라진 것들을 추어 보면 언제나 손끝에 닿는 작은 것까지 변해 있다. 그곳에서 절망은 일상 언어이고, 현실이 악몽처럼 느껴지는 날들은 너무나 많다.
22개의 작품 절대 다수가 3개 로케이션으로 거칠게 요약되는 상황은 이 제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건물의 잔해로 덮인 길거리, 텐트촌, 그리고 잃어버린 시절을 상징하는 듯한 바다. 허락된 장소가 없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가자지구 사람들의 삶이 집약된 장소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화인들은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달려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고, 모든 것이 한정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삶이 어떠한지, 가자지구가 지금 어떠한지를 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여주려 애썼다. 다큐멘터리도, 극영화도, 아이들과 함께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나 인형극도 모두 마찬가지다.

22개 중 편지를 상정한 <셀카>를 상영 첫머리에 넣은 것은 아무래도 이 영화가 하나의 유리병 편지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의미 아닐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차라리 기억을 잃고 싶을 만큼 끔찍한 현실, 악몽 같은 현실, 눈뜬 이곳이 어제의 미래인지 과거인지 헷갈리는 현재를 노래로 덮으며 마무리한다. 평화와 꽃, 음악과 예술 안에서 아이가 천천히 글쓰기를 배우고 노래는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하나의 선언이다. 그 땅에 영화가 있다. 목소리가 있다. 사람이 있다. 너와 나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 목소리, 이 선언은 더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목소리는 기이하리만큼 그 비극에 대해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생명과 가장 먼 이야기를 끌어오며 과장된 크기로 발화되고 있지만… 이제는 이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e untold stories from Gaza”, 가자 지구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이제는 말해져야 할, 이야기들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1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160)
2025.05.05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519)
2025.05.09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906)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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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크로이처의 <코르사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이 쓴 <트라우마>에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악의 상태는 자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악의 상태는 아무런 능동적 행위 없이 수용소의 흡수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코르사주>는 엘리자베트 황후에 대해서 다룬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발탁(?) 된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외모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인형처럼 서있기를 바랐다. 누구라도 황후에 대한 환상은 있겠지만, 알려진 것처럼 왕이나 왕비는 생각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서론에서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대해 언급한 이유 중 하나가 신체적 자유에 대한 문제다.
물론 황후의 자리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을 비슷한 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그들은 저항해야 한다. 저항해야만 주체적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여성 서사들은 주체성이 가장 큰 이슈처럼 보인다. <코르사주>도 어김없이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코르사주>가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주체적 인간의 자리에 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엘리자베트는 첫 번째로 낳은 딸이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와 깊은 갈등이 있었으며, 1889년 아들 황태자가 자살했고, 60세에 살해당한 비운의 황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영화에서 그녀는 40살에 생을 마감했고, 그 이후의 삶은 그녀의 대리자가 이어간 것으로 그린다. 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40살의 엘리자베트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 시기부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한 시기라고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도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정신병에 관심이 많았고, 영화 속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축일 선물로 완벽한 시설을 갖춘 정신 병원을 원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디테일을 계속해서 쫓아가야 한다. 영화 속에서 정신 병원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시기적으로도 히스테리가 주목을 받기 직전의 시기였을 것이고, 고증을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설정이다. 정신병원에 누워있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간통으로 정신을 놓았고, 또 다른 여자는 아이를 잃었다. 엘리자베트는 두 여자가 각각 겪은 경험을 지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진다. 죽음에 대한 첫 몸부림. 그리고 그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딸과 여행을 가겠다는 요청에서 딸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자 창밖으로 투신한다.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몸부림. 하지만 그녀는 미치지 않고 끝내 정신을 붙들고 있다. 히스테리란 무엇인가. 정서적 충격을 해소할 수 없을 때 우리의 몸이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증상을 발현하는 방어기재라고 프로이트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엘리자베트는 정서적 충격을 온전히 주체적 몸짓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 그런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은 충동적인 것이며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전적으로 의식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끊임없이 투쟁하여 행위 자체를 이성적 판단에 의해 끌어올렸을 때 우리는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이성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윤리라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마약을 하는 것 또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런 비관적인 행동이 어떻게 주체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묻는다면 영화가 대답해 줄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단발머리를 하고 마당에 앉아 다른 이들과 음악을 들을 때 그녀가 느끼는 해방감을 바람으로 표현한다. 그 바람은 그곳에 앉아있던 이들 중 엘리자베트에게만 향한다. 이 쇼트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처연함은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몸을 파괴할지라도 그건 그녀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쩌면 그 선택은 그녀에게는 의무라고 일컬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세 번째 자살 시도는 성공으로 끝난다(고 생각 한다). 영화가 따라온 것은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자살 시도는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에서는 황제이자 남편에게, 그리고 딸과의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 직후에 시도하지 않는다. 편안하고, 우아하게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나면 그녀의 우아하고 자유로운 춤이 이어진다.
202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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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대 제임스 본드
초대 제임스 본드이자, 제임스 본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20세기 영화의 아이콘! 숀 코너리 경은 188cm라는 큰 키와 체격으로 '미스터 유니버스' 중량급에서 3위를 차지하며 창대한 연기 인생의 막을 열었는데요. 아직까지도 영국의 많은 배우들이 일명 '엘리트 코스'를 밟은 데에 반해, 숀 코너리 경은 정식 연기수업을 받지 않은 채 데뷔에 이른 배우인데요.
그러던 1962년, <007 시리즈> 제1편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이후 5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하며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 그 자체를 구축하였습니다. 시리즈 출연 편수로는 3대 본드 '로저 무어'에게도 밀릴뿐더러, 6대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당시 007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있었음에도, 지난 2020년 8월 북미에서 진행한 팬투표에서 '숀 코너리' 경은 최고의 제임스 본드 자리에 오르며 '제임스 본드 = 숀 코너리' 라는 공식을 입증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리우드 대표 배우가 된 그가, 4,000억 원에 달하는 개런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이는 지난 1999년, 그가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역을 거절하면서 발생하였는데요. 당시 제작사였던 뉴 라인 시네마는 숀 코너리 경의 출연료를 영화 수입의 5~10%로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숀 코너리 경은 뉴질랜드 현지에 18개월을 머물러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이후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전 세계에서 초대박 행진을 이어가며, 그가 받을 뻔한 출연료는 4,000억 원에 달하게 된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아직까지도 SF 판타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명작인데요! 막대한 제작비와 긴 촬영 끝에 만들어진 만큼,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관련된 트리비아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을 '환상'으로 이끈 <반지의 제왕> 속 흥미로운 사실들을 '숫자'로 한 번 살펴볼까요?
잇츠 CINE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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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모두 확장판으로 보면 총 681분(11시간 21분)이 소요된다.
2.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총 제작비 2억 8100억 달러 (3,200억 원)으로 29억 8100억 달러 (3조 4,000억 원)의 글로벌 수익을 냈다.
호빗족
1. 프로도는 호빗족의 특징인 지나치게 큰 발을 갖고 있음에도 시리즈 촬영 기간 동안 39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2. 호빗족은 breakfast, 2nd breakfast, elevenses, luncheon, afternoon tea, dinner, supper 순으로 하루 총 7번의 식사를 한다.
기사
1.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 역의 크리스토퍼 리 경은 총 282편의 영화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IMDB 기준)
2. 초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 경은 간달프 역을 맡으면 영화 수입의 15%를 개런티로 지급한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약 4,00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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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의 주인공인 프로도와 간달프는 단 한 번도 같이 씬을 찍은 적이 없다.
2. 시리즈 촬영에 쓰인 300마리의 말 중 단 한 마리의 말도 다치지 않았다.
J.R.R. 톨킨
1. 1969년, 원작 소설의 팬이었던 비틀즈는 존 레논(골룸), 폴 매카트니(프로도), 링고 스타(샘), 조지 해리슨(간달프)로 영화화를 꿈꾸며 직접 톨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톨킨은 편지로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 원작자인 J.R.R. 톨킨은 1,2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단 두 손가락으로 쳤다. 일명, 독수리 타법.
OTT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2020년 2월, 반지의 제왕의 드라마화를 시작했다. 1조 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작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최고의 대서사시로 불리는 <반지의 제왕>.
그 뒤를 이을 대작 <듄>이 바로 오늘 개봉하였는데요.
<듄>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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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번 자라나는 풀잎들처럼
더운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졌다. 앞의 남자는 요즘 유행하는 나이키 덩크와 아이앱 후드를 입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는 서울 덩크를 신었다. 나도 집에 저런 거 있는데
.항상 어디서 일을 하면 무언가를 사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는 나는 돈 쓰는 것에서 재미를 찾아야 했다.근데 요즘은 또 다르다. 익숙한 것들에서 아무 재미도 찾지 못하겠다. 뭘 원해서 이렇게 살았던 걸까? 열심히 외웠던 단어도, 대비하고 싶던 파트 5도 영 시원찮으니 하루 사는 낙이 뚝뚝 떨어졌다. 영화도 재미가 없다. 돈이 있어도 하루에 쓸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뭐 좋은 것 사도 입을 일이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모든 게 식상해진 나는 늘 항상 하던걸 한다. 위로가 되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소울>을 볼까 생각한다. 아. 이거만 있으면 안 되지. <꿈의 제인>도 있다. 막상 재생하려니 손이 안 간다. 리뷰를 한번 더 써볼까? 할 말은 많은데 다루고 싶은 작품이 없다. <중경삼림>과 <노매드랜드>가 같은 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써내려 보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다른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운동도, 공부도,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천히 걸었다. 찬바람이 드는 가을 왠지 모르게 시든 풀잎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건 다 정해져 있다. 영원한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한 개소리고, 많이 사랑한 사람은 무조건 지게 되어있으며 영화는 러닝타임이 있어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다. 모든 생의 과정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나는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풀잎들>은 식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나간다. 영화는 이 감독의 초기작들처럼 인물의 위선이나 욕망을 조명하지 않는다. 홍상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끝이 난 후의 정서다. 이후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는데, 이는 끝이 난 다음의 사람들과 흑백영화라는 연출 의도가 버무려져 시너지를 낸다. 홍상수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데 능한 예술가라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깨달은 인물인 것 같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거대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물론 매력 있지만 홍상수는 이와는 반대로 셔츠에 와이드 슬랙스만 입고도 조곤조곤한 톤으로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풀잎들> 이런 특장점이 더 부각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장면 변환도 잘 없고 롱테이크가 주요하다. 간단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식물들도 이 특성들이 적용된다. 식물을 오랫동안 째려보면 일단 눈이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풀들은 조용히 부대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풀잎들처럼 잔잔하다. 조용히 러닝타임 1시간이 지나간다.
근데 이 영화는 절대 조용한 사운드만 품고 있지는 않다. 첫 번째. 두 남녀는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클래식 소리만큼이나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란 말이 들린다.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큰 소리가 오간다. 마음이 아파 카페 밖을 나가는 남자. 밖에서 담배 한 개비를 핀다. 아름은 그걸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는 아름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겠지? 아름은 혼잣말을 한다. 사연이 있겠지. 누군 없을까?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마치 우리에게 반문하듯 내레이션을 읆는다. 다음 사연이 비친다. 중년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세상을 뜨려고 했었나 보다. 원인은 누군가와의 사랑이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갔는데도 남자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 악물고 대화 파트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하던 남자. 같이 대화하던 중년 여자는 당연히 거부한다.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정리를 해야 할 때'에 관해 논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어차피 끝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인 셈이다. 아름은 이 중년 남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하다. 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남자를 보며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체념한다. 카메라는 다음 두 사람으로 넘어간다. 다른 중년 남자와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고 있다. 남자는 배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남자의 제자쯤 되는 것 같다. 여자는 웃으며 남자에게 '저 연애해요'라고 답하고 남자는 환하게 '그래,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다 사랑이 안 돼서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금 남자는 아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대시한다. 둘이 같이 동거하자는 제의다.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나 보다. 아름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아름은 가는 동안 제일 처음 지켜봤던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휙 지나간다.
동생 커플을 만난 아름. 아름이는 동생과 이야기하다 갑자기 화를 낸다. 사랑은 개뿔. 누군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하니? 갑자기 동생 커플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그 옆자리에선 젊은 여자와 중년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년 남자의 친구는 교수고, 이 여자와 불륜관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교수의 친구는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 교수의 친구가 여자에게 '당신은 그 사람을 갖고 놀았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시선 피하며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바로 다음 장면. 카페 밖에서 중년 남자와 만났던 여자가 느닷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마치 올라가서 봤던 것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여자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다.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여자. BGM으로는 클래식이 나온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서 아름은 동생을 호명한다. 뒷골목에서 동생에게 화를 내는 아름. '넌 누군지 알고 걔를 만나는 거니?'라고 말한다. 동생은 누나에 대해 '좀 힘든 구석이 있어'라고 말한다. 아름은 어느 가게에 들어와서 앞의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맥북에 글을 쓴다. '사람들이 만나는구나. 서로 감정이 부딪히고. 서로 힘을 내고. 서로 같이 서서 있게 되는구나. 숨겨서 먹는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있을까. 왜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까. 저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귀하고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라고 답한다. 다시 첫 번째 남녀로 돌아간다. 한바탕 불타오르고 난 후 둘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둘은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같이 한 잔 들이켜게 되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클래식과 함께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아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지금은 너무 귀한 거니까. 너희들이 부럽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 내가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 아름의 독백이 끝나고 카메라는 동생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줄거리에 대해 쭉 썼다. 사실 이것은 그냥 내가 노트북을 가져가서 카페를 관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상은 이렇게나 심심하고 별 것 아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영화를 좋아하는 모두들은 이미 우리 삶에서 반전 같은 건 드물다는 걸 알고 있다. 전적으로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래 필연적인 결말이 있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감정을 쓴다. 맛있는 건 언젠가 다 먹게 되어있고 돈도 다 쓰게 되어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난다. 빛나던 커리어도 언젠가 끝이 있다. 그걸 애써 부정하면 나 자신만 추해지는 것이다. 근데 나는 항상 더 욕심을 냈다. 결과는 참혹하다. 번번이 좌절한다. 이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타인은 어쩌겠는가. 내 아빠가 대통령이건 법무장관이건 검찰총장이건 원래 자식들은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사실 우리 아빠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안다는 게 원래 그런 거고, 우린 절대로 타인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지나가다 본 풀잎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엄연히 남이기 때문이다. 갈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치가 아닐까. 우습게도 우리는 이런 삶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듯 초반부터 죽음에 대해 제시한다. 근데 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다방면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남녀는 '죽은 후에도 함께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이라는 키워드로 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남녀는 '죽었어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남녀는 '죽음이 드리우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남녀는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남녀를 제외하곤 이 들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 남녀는 이내 커플이 되어 서로의 굳건한 사랑을 재확인한다. 네 번째는 후의 미래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함께 동석을 하며 술을 마신다. 그러니까 후회와 미련으로 보냈던 사람들의 후는 보여주지 않은데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동석을 시켜 엔딩부에 풀잎들과 함께 노출시킨 것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홍상수가 허무함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쪽이다. 간단하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은 쪽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미래가 없고, 큰 사건이 있는 후에도 본인의 모습과 변함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 후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칭을 이루는 것과도 닿아 있다.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한 남녀’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누나인 커플’로 전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름이 ‘잘 알아보고 연애를 해야지’라는 훈수를 뒀다. 완벽한 대칭이다. ‘주변인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상대를 잘 모르면서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동격으로 놓인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정확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그런 홍상수의 세계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감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었으니까. 그리고 이 첫 번째 연출 의도와 두 번째 연출 의도는 병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두 남녀 중 세 번째, 김새벽과 정진영 배우가 나온 부분들을 보자. 둘은 현재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글은 원래 혼자 쓰는 거예요. 사랑이 최고야. 뭐 이런 주제로 말을 이어간다. 이 현재를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 중 여자가 극의 중반부 즈음에 느닷없이 계단을 왔다 갔다 한다. BGM은 바그너가 만든 ‘탄호이저’와 관련된 음악이 나오는데, 나는 이 탄호이저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행위도 연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일단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사실 되게 해석하기 쉽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런 필멸의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거겠지? 또 바그너가 쓴 탄호이저 극본은 ‘희생에 의한 구원’이 주요 모티브라고 한다. 한 여성이 타락한 남자를 위해 희생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것도 이 <풀잎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아닌가? 현재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기에 현재에 있는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뭐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첫 번째 ‘원인에 대해 모르면서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죽음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 홍상수는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롭게 끌고 가는 감독이었는데, 이런 부분 역시 풀잎이라는 식물의 속성과 계단이라는 도구의 특징을 활용해서 삶에 은유했다. 참으로 홍상수스러운 연출법과 감정 활용이다.
후반기의 홍상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심심할 정도로 잔잔하지만 지켜보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세지를 전한다. 당신은 풀잎이 될 것인가, 지는 꽃이 될 것인가. 우리는 사실 이 답을 알고 있다. 모두 다 언젠가 다시 사라질 운명인데 항상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 아니, 홍상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꿈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미련 가득한 과거였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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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새로운 캡틴과 함께 돌아온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국내 누적 관객 수 79만 명,
북미 누적 수익 약 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국내와 북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왕좌에 올랐습니다.
다만, 최근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첫 주 1위를 기록한 후, 빠르게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 로튼 토마토에서 평균 51%의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이번 신작이 과연 이 순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국내 박스오피스 2위는 누적 관객 수 71만 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인 8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리메이크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차지하였고, 누적 관객 수 246만 명을 돌파한 <히트맨2>가 3위입니다.
한편, 북미에서는 국내보다 한 주 앞서 개봉한 <패딩턴: 페루에 가다>가 2위를 기록하였고,
밸런타인데이를 겨냥한 슬래셔 무비인 <하트 아이즈>가 3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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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영화 문법에서 기출변형을 시도한 영화 <모가디슈>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천만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 <모가디슈>. 모가디슈가 처음에는 무슨 말일까 도대체 뭘까 했는데 소말리아 수도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아마 이제 소말리아 수도는 모가디슈라는 것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강렬했던 작품이었고, 만족스러웠던 영화였다.
영화 <모가디슈> 시놉시스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모가디슈.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생존이다!
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린다. 목표는 하나, 모가디슈에서 탈출해야 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모가디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왜 이렇게 찝찝할까?
제목만 보면 뭐지 재미없나?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 좋은 의미로 찝찝하다. 분명히 아주 시원하다 못해 추운 영화관에서 쾌적하게 영화 <모가디슈>를 보고 있는데 마치 내 몸이 땀으로 끈적끈적 한 것 같고, 정말 찝찝했다. 얼른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배경이 후덥지근한 소말리아다 보니 배우들이 땀을 흘리고 전기가 다 나간 상황에서 에어컨도 선풍기도 키질 못한 채로 여러 명이서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아주 깝깝하다. 영화 <모가디슈>는 이러한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렸다. 불이 나는 화마 속에서는 그 매케함이 한 여름밤 에어컨고 선풍기가 없는 곳에서는 훅훅 찌는 그 습함이. 장면장면 공간의 분위기를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들어서 굉장히 신기했다.
카체이싱이 대박인걸?
영화 <모가디슈>에서 명장면을 뽑자면 바로 ‘카체이싱’이다. 반란군의 공격을 피해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가는 과정이었다. 이제까지 여타 다른 영화에서 봤던 카체이싱은 정말 성능이 좋은 차나 그래도 웬만큼 구동은 하는 차량으로 쫓고 쫓기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그런데 영화 <모가디슈>에서는 와,, 저 똥차를 가지고 카체이싱을 한다고?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심장 쫄리는 장면이었다.
분명 차량 성능상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것은 아닌데 게다가 총알을 피해보겠다고 여기저기 덕지덕지 책과 문짝들을 달아놔서 엄청 볼품이 없는데 세상 박진감이 넘친다. 4대의 차량들이 졸졸졸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는데 한 5-10분 되는 시간의 그 카체이싱을 아마 잊지 못할 장면이 될 듯 싶다.
액션영화의 흐름을 그래도 타지만 조금씩 변형을 주다
영화 <모가디슈>를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액션 영화의 흐름을 그대로 타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기출 변형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 다 어디선가 본 장면들이다. 카체이싱이며 배우들 간의 액션이며 등장인물간의 반목과 화합. 그리고 동료의 죽음. 다 한번쯤 한국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영화 <모가디슈>는 한번씩 본 장면들을 ‘내가 더 잘해’ 라는 식의 화려함으로 풀어내지 않았던 것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허름한 차로 진행하는 카체이싱이라던지, 배우들 간의 액션신도 소박-하게 집안에서 끝난다. 이렇게 무언가 자! 우리가 이만큼이나 할 수 있어! 불여줄게! 잘 봐! 이런식으로 화려하게 힘을 주는 형식이 아니라 와,, 저걸로 액션을 한다고? 저걸로 카체이싱을 해서,,, 박진감이 만들어진다고? 가다 다 죽는거 아닌가? 이럴 정도로 허술하고 빈구석을 보여주면서 결국 성공으로 이끄는 스토리라인이 기존 액션 문법을 지키면서도 허술한 빈틈이라는 변형을 주어서 재밌고, 긴장감 넘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 <모가디슈>는 정말 보는 내내 모든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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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의 정리] 너 자신을 알라
[마거리트의 정리]
2보다 높은 짝수, 그러니까 ‘4 6 8 10 ~’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742년, 프로이센 수학자 골드바흐는 오일러에게 편지로 자신의 추측을 전달했다. 4는 2+2로 표현할 수 있고, 6은 3+3, 8은 3+5와 같이,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로 짝수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 리뷰에 짧은 수학 지식을 가져온 이유는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 영화 내내 주인공 마거리트가 세계의 난제인 ‘골드바흐의 추측’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이것이다. 관객에게 어떤 수학적 정보나 이해를 도울 예시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작을 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똑같이 어려운 비유였다. 마작이란 게임을 알고 계신 관객은 중간마다 놀라움을 표현하시기도 하셨다. 부끄럽지만 수학을 놓고 산지 아주 오래전이라 영화 속에 나오는 다양한 수학 기호와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편할지 걱정된 적은 또 처음이다. 공포영화는 온 힘을 다해 부술 텐데.
하지만 수학적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알고 있다. 영화에서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늘어지는 작업이자 붙잡고 있던 서사의 긴장감을 끊어버리는 행위다. 영화가 굉장히 어려운 난제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보여줄지 고민을 한 흔적이 이곳에서 느껴졌다. 애초에 수학적 지식을 나열하는 단순함은 짧게 보여준다. 대신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벌어지는 드라마에 가까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서사를 부여한다. 즉,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평소 수학과 밀접한 연관이 없는 사람도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사실 조금 걱정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확인하고 주인공 마거리트의 모든 행적을 걱정했다. 상업 영화가 아니며, 칸 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매번 긴장한다. 독특한 소재로 관심을 얻었으나 눈이 피곤할 정도로 선정적이거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PC요소로 재미가 반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애초에 처음부터 각오하고 보았기에 놀라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건 정말 갑작스레 행동하거나 튀어나오는 억지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마거리트’는 스스로 위대한 행보를 걷는다. 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것처럼 격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매혹적인 상대에게 집중하기도 한다. 마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던 암탉이 담장 밖 세상에서 다양한 생물과 환경을 만나는 것처럼 ‘마거리트’는 세상을 경험한다. 재밌는 점은 마거리트가 경험하는 일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인인 마거리트는 이미 클럽에서 춤을 춘다는 정보는 알고 있는 상식이다.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도박은 불법이며 도박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본 마거리트는 믿음, 배신, 사랑이란 감정들에 대해서 머리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골드바흐의 추측’을 해결할 열쇠지, 인생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떠올랐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도 누구나 경험했을 일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수학과 암호 해독을 좋아해서 일반인이 자주 하는 일상을 보내지 않은 것과 똑같았다. 보통 영화에서 묘사하는 천재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강박’이다. ‘마거리트’는 수학에 대한 강박을 가졌고, 이것은 자연스레 오로지 학교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하는 단순함으로 이어진다. ‘실내화 신은 수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 일련의 사건으로 학교 밖을 자의적으로 나간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이 세상에서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 조안, 휴 같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마거리트는 실내화 대신 운동화를 신으며 앞서 언급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다. 심지어 수학 천재답게 머릿속으로 마작의 모든 수를 세며 도박판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기도 한다. 반드시 연구 논문을 마치고 교수님의 애제자로서 성공해야 했던 그녀에게 이런 일상은 가혹한 일탈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춘기 늦바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로지 숫자에만 매몰된 그녀의 눈을 뜨게 해주는 휴가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면 바보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책이나 대중 매체로 알고 있던 미술 작품이나 자연경관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 말이다. 그래서 마거리트가 음습한 수학 천재 모습 대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파리의 대학생 같은 행동을 할 때 반가웠다. 의외로 많은 관객이 그녀의 엉뚱한 행보에 웃으셨다.
드라마 ‘퀸즈갬빗’은 1950년대 체스 천재 베스가 세계 정상에 올라가는 과정을 다룬다. 천재가 어떻게 주목을 받으며,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대해 주인공을 극한으로 내몰며 뼈저리게 알려준다.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도 마찬가지다. 113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무수히 많은 시련이 몰아친다. 퀸즈갬빗에서 느꼈던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체스 경기’와 같이 이번에도 ‘영화 자체가 하나의 수학적 증명 과정이다’라고 느꼈다. 영화 초반부 증명에 실패한 마거리트가 몇 걸음 물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정보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하나하나 다시 인생 전체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관객으로서 증명 과정 전체가 독특해서 즐거웠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련을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며 흔들리는 것에서 인간적인 공감을 느꼈다. 비록 그녀가 어떤 난제를 풀어가는지 그 과정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치도록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거리트의 욕망, 결심, 뛰어남을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아마 전국에 계신 수학 선생님들이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 전, 남는 시간에 틀어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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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플레이스2#존크래신스키#콰플2
00:00시즌 1 이야기
02:28시즌 2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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