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4-30 19:02:12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레이디 맥베스>
그녀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또 아닌 이유에 대해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영국 | 드라마 | 2017.08.03 개봉 | 청소년 관람불가 | 89분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 <레이디 맥베스>
경건하게 울리는 찬송가와 고풍이 흘러넘치는 교회 안. 그런데 어린 신부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기 바쁜 신부 캐서린. 세상 모든 이에게 축하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4면이 돌로 세워진 교회 안에서 캐서린이 느낄 수 있는 건 차디찬 냉기와 어딘가 모르게 공포스러운 바람소리뿐이다. 그래서 캐서린은 자꾸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쓴다. 두 눈을 열심히 굴려가며 상황을 관찰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남편의 옆모습에 철저한 무관심을 느끼고, 아무 감정 없이 입을 벌려가며 찬송가를 부르는 시아버지와 목사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면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의 숨통을 쥐고 흔들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만다.
이 단 한 장면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정되어 버린다. 인물들의 비열하고 저속한 속내는 어김없이 카메라 사각틀에 드러나고, 진행될 사건들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강한 확신과 함께. 따라서 한동안 허공을 맴돌던 신부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남편에게로 향할 때, 우린 단번에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예상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남편의 무관심은 결혼식 첫날밤을 기점으로 경멸과 조롱으로 얼룩진다. 한 침대에 몸을 뉘어 함께 자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닌 남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캐서린에게 그대로 자신의 분노를 지배로 치환해 행사한다. 캐서린과 함께 사는 이유는 딱 하니다. 아내를 아버지가 돈 주고 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캐서린에게 바라는 것도 딱 하나다. 조용히 집 안에서 기생하면서 아내의 본분을 지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아내의 본분은 '본인 아버지가 말하는 아내의 본분'을 말한다. 결국 남편에게 캐서린은 처음부터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며, 버릴 수 없어 마지못해 세워두는 마네킹이었다.
집 안에서 하녀(애나)의 시중을 받으며, 완벽하게 외면을 치장하고, 보기 좋은 인형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캐서린. 그런 그녀 앞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세바스찬이 등장한다. 창고 안에서 애나를 위에 매달아 놓고 성추행을 일삼는 세바스찬을 보고 캐서린은 욕망을 가감 없이 분출하는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몸에 잔뜩 묻은 흙도 꾀죄죄한 얼굴도 땀 냄새도 전부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겐 금기를 깨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것을 캐서린은 '진정한 사랑'이라 스스로 칭하며 세바스찬에게 "내 마음을 의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억압과 무관심, 조롱에서 벗어나는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자유를 품은 아름다운 관계로 인식했을지 모르나, 사실 캐서린의 행위는 오직 피지배자를 향한 잔인한 지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디 맥베스>의 긴장감과 재미는 캐서린의 살인보다도 그들을 조용히 따르는 두 하인, 애나와 세바스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애나는 자신을 짐승 취급한 주인(캐서린의 시아버지)이 캐서린이 쓴 독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관한다. 명백한 살인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 뿐, 주인을 구하지 않는다. 사실 애나 역시 하인의 본분을 다하라는 주인의 강압적 명령에 세뇌된 사람이었고, 당연히 인간적 대접은 받아 본 적 없었으며 그 결과 쌓이는 울분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마치, 캐서린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후 일어나는 2건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주인이 죽은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충분히 증언할 수 있었음에도, 심지어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애나는 역시 침묵한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처럼 대저택에서 쫓겨나는 애나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캐서린의 차이는 신분만 있지 않다. 그 신분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결정적 마음이 애나의 결말을 비극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했다. 반항과 의심, 자기주장과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캐서린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는 세바스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캐서린의 지위와 권력에 눈이 먼 하인일 뿐이다. 입어보지 못한 옷과 앉아보지 못한 의자와,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흥분한 하인. 캐서린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부했으나, 어림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캐서린이 남편의 머리를 가차 없이 막대기로 내려친 후, 혼자 주인의 시신을 땅에 묻는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주인을, 사랑하는 애인이 대신 죽였을 때 느꼈던 희열과 평생 실종된 주인 자리에서 대신 부를 누리며 살 설렘에 사로잡힌 채 말이다. 살인을 방조하고, 오히려 범죄를 덮는 일을 도우면서, 죄책감과 죄의식에 괴로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도 자신을 하찮은 하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따르는 일은 당연하다는 인식과 믿음이 본인의 순수하고도 귀한 인간성마저 훼손한 것이다. 영화는 애나와 세바스찬의 결정을, 캐서린의 결정과 붙여 의도적으로 더 대비해 보여준다. 마치, 무엇이 더 잔인하고 아픈지 결정하라는 듯, 세 사람의 결정이 담인 얼굴을 계속 클로즈업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세바스찬의 설렘은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끝이 난다. 캐서린 남편의 혼외자(어린 아들)가 순식간에 대저택의 주인이 되자, 그는 자신이 누린 부가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을 닦달한다. 닦달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빌미로 그녀를 밀어낸다. 이에 캐서린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이까지 죽여버리고 세바스찬과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자, 그녀는 총 3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한 집 안에서, 자신을 억누를 위치에 있는 남성들의 목숨을 전부 단번에 끊었다. 첫 살인부터 계획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애나는 첫 번째 살인을 함께했고 세바스찬은 나머지 2건의 살인을 동조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살인을 한 3명은 모두 살인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인물은 오직 캐서린뿐이다.
사랑을 확인했으나, 끝까지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바스찬은 캐서린과 함께 살인을 했음을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부에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평생 누더기 옷을 입고, 괄시와 무시가 당연한 하인이었기에 세바스찬의 고백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발아래로 추락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잠시 잊고 있었던 캐서린의 지위가 불쑥 튀어나온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기 지위가 가진 힘을 또 한 번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세바스찬의 배신에 악에 받친 눈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애나와 세바스찬의 살인 공조로 사건을 종결 내버린다. 실어증에 걸린 애나에게서 어떠한 반전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신한 채 말이다. 모두 시아버지와 남편이 말한 '가진 자의 본분'을 너무나 잘 습득한 덕이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비 맥베스>의 희한한 매력은 영화 내내 캐서린만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애나와 세바스찬의 선택과 행동에 이상하리만큼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점은 꼭 생각해 봐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대저택 주인들에게서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오직 캐서린만 홀로 반항하고 반기를 들었고 살아남았다. 그녀만 비인간적인 상황들에 순응하지 않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비극의 원인인 남성 우월주의 사회를 무너트렸다. 그것도 아주 소름 끼치고 잔인한 방식으로 말이다. 알몸으로 세워두고 홀로 잠을 자던 남편의 조롱과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했던 시아버지의 경멸적 태도가 캐서린을 끔찍한 괴물로 만들었고,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상류층에게서 배운 괴기스럽고 소름 끼치는 지배력이, 그녀를 살인을 일삼아도 괜찮은 특권의식을 가진 괴물로 탄생시켰다.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세 인물들이 전부 본인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자기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가진 고귀한 마음과 도덕적, 윤리적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로 모두 파괴되는 순간을 맥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인물들. 따라서 소파에 앉아 가만히 관객을 응시하는 캐서린의 마지막 행보는 잊을 수 없다. 하인들마저 다 떠난 대저택에서 홀로 남아, 어떠한 후회도, 절망도 하고 있지 않음을 관객들에게까지 확인시키는 차갑고 매서운 그 표정.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힐끗대던, 두려움에 떠는 열일곱 소녀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테고.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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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군분투
- 이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관람하지 않은 분들은 영화를 보고 읽어주세요.
우리 모두에게 큰 보호막이 되어주는 가장 중요한 존재는 엄마일 것이다. 출산 전 엄마의 자궁에서 10개월을 보내며 생명을 지원받고, 태어나서는 먹고 마시고 잠에 드는 그 모든 과정의 보살핌을 받는다. 태어난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부모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그때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전까지 엄마라는 큰 울타리가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이다. 심지어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 전보다는 영향력이 줄어들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한 사람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해주는 모든 보살핌은 일종의 봉사라고 할 수도 있을것이다.특별한 대가 없이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그 아이를 향한 마음은 그것의 대가가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지속된다.아이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아이가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또 다른 지원을 해주려고 노력한다.어떤 경우에는 그 마음이 강해져 아이를 향한 집착이 되기도 하고, 그 집착이 지속되면 아이와 대립하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아이가 청소년기가 되었을 때, 그 대립은 커지고 서로에 대한 애증은 심화된다.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런>
영화 <런>은 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는 딸 클로이(키에라 엘런)와 함께 살고 있다. 당뇨병, 천식, 하반식 장애 등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딸을 돕기 위해 다이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클로이는 극 중에서 내년이면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된 상황이고 원하던 대학의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런 클로이에게 다이앤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자신을 보살피는 엄마에게 의지하면서 고마움을 느끼는 인물이다.
클로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그래서 집 안에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시설과 계단을 편하게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다. 영화 초반 집안에서 클로이와 다이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실제로 장애가 있는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어떤 모습일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실 영화 초반 클로이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목적도 있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집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집의 구성과 배치, 그리고 클로이의 생활 동선을 미리 알고 있는 관객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에 더욱 긴장하게 된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 엄마 다이앤의 출산 장면을 보여준다. 사산이 될 뻔한 아이를 겨우 살려내 인큐베이터에 넣었으나 그 아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사실 스릴러 영화 장르를 많이 본 관객들이라면 그 아이의 생존 여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런>은 다이앤이 의료진들에게 아이가 살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장면이나, 현재 다이앤이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을 때, 자신의 딸에 대한 의견을 낼 때 건조한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 등을 통해 후반부 다이앤의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변화될지에 대한 암시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엄마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딸
클로이가 엄마가 장을 봐 사 온 물건들을 뒤적거릴 때 처방받은 약통을 발견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그 약은 클로이가 아플 때 먹던 약이 아니다. 게다가 그 약통의 겉에는 엄마 다이앤의 이름이 쓰여있다. 작은 초록색 알약이 야기한 마음의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클로이가 계속 그것에 대해 추적하게 만든다. 엄마의 활동 일정과 동선을 알고 있는 그는 영리하게 엄마가 추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약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애쓴다.
사실 많은 관객들은 다이앤에게 동정과 위로를 주고 싶을 것이다. 장애아를 키웠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해할 정도로 그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했다. 그런데 엄마가 딸을 위해 했던 모든 행위들이 드러난 이후, 심지어 딸을 방안에 가두었을 때 관객들의 마음은 요동친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우리가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실제로는 흔히 생각하는 선한 존재가 아니었을 때, 집이라는 공간은 지옥이 된다.
장애를 가진 클로이가 집안에서 최선을 다해 엄마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은 꽤 긴장감이 있다. 그가 창문을 기어서 넘어가고 또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다른 방으로 탈출하는 모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엄마에게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사실 클로이 입장에서 엄마를 벗어난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그간 받았던 모든 지원들을 포기해야 하며, 혼자 세상 밖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그 존재로부터 탈출을 결심한다.
독립 직전의 딸과 엄마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을 긴장감으로 표현한 영화
영화 <런>은 독립하기 직전의 딸과 엄마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20년간 자식 뒷바라지를 했던 엄마가 아이의 독립을 바라보며 기대감과 아쉬움을 한꺼번에 느끼고, 아이는 그저 독립된 생활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사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을 볼 때 그런 복잡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복잡해진 엄마를 보는 아이는 그렇게 변한 엄마가 무섭고 두려워질 수도 있다. 자신의 자유로운 독립을 막는 존재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엄마와 딸 간의 애증의 시기를 아주 단순하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 장르에 대입에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이앤 역할을 맡은 사라 폴슨은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나 넷플릭스 <래치드> 같은 시리즈에서 두각을 보였던 배우다. 그는 차갑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또 반면에 여리고 지적인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연기가 가능한데, 특히 차가운 악역 연기는 단연 발군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차가운 엄마 연기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어 영화의 긴장감을 높인다. 딸 클로이 역을 맡은 키에라 엘런은 독립을 원하는 딸 역할을 맡았는데, 실제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동하는 모든 장면은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스릴러 영화로 약간의 반전과 좁은 공간에서의 추격 장면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abbitgumi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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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들의 추억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그리움’이란 감정
<로봇 드림>은 1980년대, 동물들만 사는 뉴욕을 배경으로 ‘도그’와 ‘로봇’의 우정을 다룬 영화이다. 원작에서부터 이어진 단순한 그림체와 동화 같은 분위기로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영화는 이별과 그리움에 대한 마냥 가볍지는 않은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그 중 ‘그리움’이란 감정으로 관객들의 추억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도그가 살고 있는 80년대가 단순한 설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냉전이 완화되고 경제 호황이 시작된 희망과 격동의 시기. 엠파이어 스테이트에서 우뚝 솟은 쌍둥이 빌딩이 보이던 80년대는 많은 미국인에게 황금기로 기억된다. 걱정 없이 센트럴파크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코니아일랜드에서 하루 종일 해수욕하는 도그와 로봇의 모습은 그 당시를 살아간 미국인들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한다.
영화는 시대와 더불어 영화산업 자체를 추억한다. 인터뷰에서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이 ‘이야기로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로 돌아가고 싶다’고 언급한 것처럼, 이제는 과거의 전유물이 된 무성영화를 <로봇 드림>을 통해 재현한다(정확히 따지자면 이 영화는 무성영화가 아니다). 특유의 과장된 몸짓의 유머 코드와 무성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슴슴한 감칠맛은 과거의 무성영화들을 추억하게 한다. 특히 꿈에서 도그의 집이 판낼처럼 쓰러져 로봇을 덮치는 장면은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 <스팀보트 빌 주니어>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공식 포스터의 <원스> 오마주부터 <오즈의 마법사>, <맨하탄> 등 <로봇 드림>에는 많은 영화의 흔적이 숨어있다.
영화의 주제가 ‘September’도 빠뜨릴 수 없다. 앞서 말한 내용들은 관객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면, 이 노래는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전하는 것에 더 가깝다. 감독의 의도처럼 둘의 관계에 딱 맞는 노래이기도 하면서, 특정 냄새나 소리로 과거 현상을 기억하게 하는 ‘프루스트 효과’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September’를 듣는 순간 도그와 로봇은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춤을 추며 추억 속으로 들어가고, 둘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노래 속에 남게 된다.
<로봇 드림>의 다양한 감각을 가지고 와 관객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모습은, 마치 관객의 추억을 넣어 미완성인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대사가 없는 영화에 자신의 추억 속 목소리를 집어넣고, 단순한 그림체로 그려진 둘의 얼굴에 자신의 추억 속 얼굴을 그리면서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개’와 ‘로봇’이라는 명칭에 가까운 이유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각자의 추억을 담아 완성한 두 번째 이야기는 도그와 로봇의 이야기처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그저 추억하길 바라며 영화의 엔딩크래딧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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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I'll Take Care of You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고
거기엔 아주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p.194그냥 무난하게 살아도 공들일 것이 참으로도 많은 삶. 여기, 양쪽의 세계를 넘나들다 어느 한쪽도 놓지 못하고 더욱더 지극하고 괴로울 공들임을 자청한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SYNOPSIS
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있는 10대 네지마. 그런 네지마의 인생이 라이벌 패거리의 지나를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비밀리에 연인 관계를 맺는다. 네지마는 조직원으로서의 자아와 지나를 향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그 누구도 이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네지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 본 작품은 감독의 창작 의도에 따라 2:1 화면비로 제작되어 상영 시 스크린 상하좌우에 여백(윈도박스)이 포함됩니다.
감독
마리옹 드세뉴라벨
출연
리나 엘 아라비, 에스테르 베르네-롤랑드 등
노랗고 어둑한 상영관 안이 까맣게 물들고, 까만 화면이 빛을 품은 이미지로 발현한다. 귓전을 때리는 음악과 화면 중앙을 크게 채운 이름들. 인물의 뒷모습을 바스트 샷으로 잡은 첫 씬이자 첫 컷, 그리고 엔딩크레딧 같은 롱테이크를 보며 생각했다. 어, 나 이거 좋아할 거 같아. 동시에 용두사미로 끝날까 봐 커지는 기대만큼 괜히 조마조마해지는 마음. 간단한 시놉시스만 읽고 보는 영화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네지마. 서로를 굉장히 잘 아는 듯 얼굴만 봐도 웃음부터 나오는 사이였다. 여름 바캉스를 어디로 떠날 작정으로 일상을 평화롭게 보내던 중 네지마의 시선이 문득 멈춰 선다. 복도에 가득한 짐. 짐의 크기나 규모로 보아서는 이사를 온 것 같다. 왠지 모를 호기심인지 네지마는 짐의 주인이 내는 소리를 홀린 듯 따라간다. 그리고 보았다. 앞으로 자신에게 온갖 혼란을 안겨줄 여성, 지나를.
학교. 반주 소리만 듣고 무슨 노래인지 맞추는 게임에 학생들은 치기 어린 경쟁심을 부렸다. 네지마도 눈을 반짝이며 소리에 집중하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도발에 은근히 응한다. 그 공간에는 지나도 있었는데, 네지마는 그와 슬쩍슬쩍 눈을 맞춘다. 그러다 완전히 지나에게로 시선이 쏠리게 된다.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이미 엘리베이터 안에서 엇갈리듯 끝없이 닿았던 시선. 둘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눈빛으로 모든 게 통하는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내고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지나가 속한 무리는 네지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네지마는 지나에게 사적인 마음을 품었고, 양쪽에서 티 나지 않게 줄타기를 하려 든다. 네지마 무리가 늘 차지하던 벤치에 떡하니 누워있는 지나를 말로 설득해 내쫓으려는 식으로, 친구들이 지나와의 접점을 만들지 않게.
그러나 네지마는 서툴다. 설명이 불충분했다. 무작정 나오라고,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우리 자리라고 하면 누가 설득이 될까. 애석하게도 네지마의 마음을 모르는 친구들은 지나를 위협하면서까지 그 자리에서 쫓아낸다.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사촌 지나가 다쳤으니 지나 무리도 가만있을 리 없다는 게. 두 집단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친구들의 도 넘은 행동에 지나는 크게 상처받고, 둘 사이는 시작도 하기 전에 갈라선 것 같지만 풍덩, 시원한 물이 둘의 갈라진 틈을 메운다. 서로 한 번씩 아픔을 주고받은 셈이다.
네지마는 아파트 복도에서 저도 모르게 지나에게 입을 맞추고, 그 자리를 도망친다. 샤워하면서 입술을 벅벅 문질러봤자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 사라질 리 없다. 자꾸만 걷잡을 수 없이 깊어가다가 둘은 자신들만의 비밀 아지트를 옥상에 만든다. 비치 타월 같은 러그를 깔고, 가볍게 먹고 마실 음식물을 두고. 우리가 자유롭게 누비는 땅에 비해서는 협소한 공간이지만, 사방이 뻥 뚫렸기에 마냥 자유로워 보인다. 둘만의 바캉스 같기도 하고.
아지트 안에서의 안전함이 현실에서도 무난히 넘어갈 줄 알았는지, 순간 넋이 팔렸는지, 그들은 처음 입맞췄던 복도와 비슷한 파티장에서 입을 맞춘다. 시작은 몰래였지만 계단에서 올라오는 네지마의 친구들은 둘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목격하고, 네지마를 힐난한다. 배신이라고.
이 배신은 단순히 사랑을 숨긴 것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네지마는 알제리에서 온 사람이고, 알제리는 국교가 이슬람교이니 주변의 매몰찬 반응은 당연하기도 하다. 동생마저 언니인 네지마를 외면해서 완전히 홀로 고립된 네지마, 유치원 때부터 함께 알고 지낸 남자인 친구만이 네지마를 두둔하는 동시에 네지마를 공격했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며.
네지마는 스쳐가는 말처럼 지나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다 쿨한 줄 안다고. 그래서 그런 척을 해야 하는데 너한텐 솔직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지나를 택하는 순간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꽉 막힌 틀 밖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유일한 사람인 지나를 외면하고 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지마는 서툴다. '남들이 알고 있는 네지마'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고 욕구를 참아왔으니.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10대인 이 두 사람이 뭘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은 도망치는 것으로, 한 사람은 계속 연락을 시도하는 것으로 각자의 방향만 추구하다가 뜻밖에도 지나의 사촌 언니가 홀로 있는 네지마를 찾아온다. 겁주거나 경계하려는 게 아니고 조언을 하고자. 이렇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선택을 하라고.
그리고 끝내 네지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정반대인 양쪽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옥상에 자그마한 텐트를 설치하고, 지나를 불러다가 이곳을 보여주고, 밖에선 서로를 싫어하는 것처럼 굴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솔직하게 있자고.
아파트 복도에서 옥상, 그리고 옥상의 작은 텐트까지. 그들이 솔직해질 수 있는 자유의 범위는 점점 좁아져만 갔다. 그럼에도 현실과 바람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최대한 융화하고자 했던 네지마의 노력이 잔상에 남는다.
아직은 아늑하고 비좁은 세계일지라도 소중한 둘의 세계가 현실과 맞닿을 수 있기를. 희망을 버리기엔 네지마의 선택이 무척 희망차므로, 나 또한 그 희망에 물들고 싶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8/25(THU) ~ 9/1(THU)
2022-08-28 | 17:00 - 18:2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2022-08-31 | 16:30 - 17:5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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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 100% 초콜릿 선물처럼! <웡카>
달콤하고, 달달하다. <패딩턴> 시리즈의 폴 킹이 연출을, 티모시 샬라메가 주연을 맡은 <웡카>는 초콜릿처럼 예쁘게 싼 포장지를 뜯어 한 입 먹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로얄드 달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로서 원작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는 동시에 잘 빠진 가족 뮤지컬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북미 보다 늦게 국내 개봉을 한 탓에 시즈널한 느낌이 덜하지만, 그 달달한 매력은 유효하다.
마법사이자 초콜릿 메이커 웡카(티모시 샬라메)는 7년간 7대양 일주를 끝내고, 디저트의 성지 달콤 백화점이 있는 런던에 도착한다. 이곳에 자신만의 초콜릿 가게를 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꿈은 창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백화점에 도착해 환상의 초콜릿 시연을 보여준 것도 잠시,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으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게다가 여관 겸 세탁소를 운영하는 스크러빗(올리비아 콜맨)과 블리처(톰 데이비스)의 계략에 빠져 순식간에 빚더미에 오르고, 이를 갚기 위해 지하 세탁소에서 일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웡카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관 고아 소녀 누들(칼라 레인), 세탁소 동료들과 꿈을 이루기 위한 비밀 작전을 세운다.
<웡카>의 당도를 표시한다면 달콤 100%. 보기만 해도 달달한 맛이 일품인 <웡카>는 그 자체로 기분 좋은 맛이 입안에 맴돈다. 로얄드 달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프리퀄이라는 점에서 폴 킹 감독은 <패딩턴>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동화적 색채를 강조하며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는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느꼈던 다른 결의 판타지다.감독은 웡카의 직업이 초콜릿 메이커인 동시에 마법사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늘을 나는 초콜릿은 물론, 동물원에 몰래 들어가 기린과 대화를 통해 젖을 얻거나, 달콤 백화점 내 팝업 형태로 자신만의 초콜릿 왕국을 보여주는 등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영화적 세상이 펼쳐진다. 여기에 뮤지컬 요소가 삽입되어 마치 관객이 하늘을 나는 초콜릿을 먹은 것과 같은 (긍정적인) 붕 뜬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달콤함만을 주는 건 아니다. 원작 소설과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처럼 부자들이 독식하고, 노동자들에게는 행복을 누리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비판 어린 시선은 존재한다. 극 중 돈처럼 쓰이는 초콜릿으로 성직자와 경찰을 매수하는 기업, 꿈을 가진 이들을 말도 안 되는 계약서로 노동을 착취하는 일들, 상상만으로도 벌금을 부과하는 경찰의 모습은 현실적인 자본주의 폐해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특히 웡카와 함께 지하에서 일을 하는 이들을 보면 인종은 유대인, 흑인이거나 직업은 배관공, 전화 교환수, 심지어 생산력이 낮다고 판단하는 개그맨이다.
이런 현실적 부분이 첨가된 영화에서 웡카와 동료들의 연대는 그들의 꿈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가 되는 동시에, 더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전하는 힘이다. 후반부 웡카와 친구들의 활약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눌 수 있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이 또한 달콤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진행되며, 나눔의 미덕이란 메시지를 전한다.
진부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크게 다가오는 것 중 하나는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 덕분이다. 특유의 소년미와 더불어 아무리 풍파를 겪어도 해맑게 웃으며 꿈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그의 표정은 영화가 지닌 긍정성을 배가시킨다. 특히 티모시 샬라메는 이 작품에서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부분을 보고 싶은지 아는 듯한 느낌으로 연기하며 영화를 이끄는데, 달콤한 상상과 비루한 현실을 적절히 배합하는 초콜릿 메이커처럼 손수 자신이 완성한 연기를 관객에게 확실히 전한다. 노래와 춤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웡카의 안티이자 조력자인 움파 룸파 역의 휴 그랜트는 멋진 씬 스틸러의 위용을 자랑한다. <모리스> <노팅 힐> 등 왕년의 꽃미남 배우의 모습이 아닌 녹색 머리에 붉은 얼굴로 앙증맞은 춤사위를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패딩턴 2>의 악당 피닉스 때보다 더 귀여운 밉상 캐릭터를 완성한 느낌이랄까.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올리비아 콜맨은 전형적인 악역이지만, 그 역할에 딱 맞는 연기를 보여준다.
<웡카>가 가진 동화 같은 분위기와 긍정성이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어려운 이 시기에 영화의 메시지인 ‘나눔’의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아마 설 연휴에 개봉하는 우리나라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북미 등 다수의 국가에서는 이 의미가 더 크게 오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에겐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영화가 지닌 선한 달콤함은 유효하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입 안엔 기분 좋은 달콤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사진 제공: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평점: 3.0 /5.0
한줄평: 콩도 초콜릿도 나눠야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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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소희야, 미안해
Summary
춤을 좋아하는 씩씩한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을 나가게 되면서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 사건을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자취를 쫓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언젠가 마주쳤던 두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그 애를 만난 적이 있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Cast
감독: 정주리
출연: 김시은, 배두나 외
저는 종합고등학교의 인문계 학생이었습니다. 종합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실업계를 함께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실업계 학생들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학생들의 이름만큼은 매일 목격할 수 있었죠. 학교 정문에 붙은 플래카드에 '김OO(2학년) OO은행, 최OO(3학년) OO기업...'과 같은 취업 현황이 항상 적혀 있었거든요.
어쩌면 우리 학교에도 플래카드를 걸기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소희'가 있었을까요? 복잡한 마음을 안고, 현장실습생의 죽음 이면의 진실을 그리는 영화 <다음 소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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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에서는 현장실습에 투입된 고등학생 '소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스트레스가 관성이 된 콜센터라는 공간에서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적 압박과 악성 고객 대응을 견디는 현장실습생의 현실을 '소희'의 관점에서 보여주죠. '소희'는 사무실 여직원이 된 기쁨에 열성을 갖고 일해보지만, 점점 고통받으며 메말라가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2부에서는 형사 '유진'이 '소희'가 떠나간 자리를 살피며 현장실습생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어나갑니다. 자살자에 대한 예의 정도로 수사를 시작했던 '유진'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현장실습생들의 현실을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하죠. 1부와 2부를 모두 깊이 있게 다루다 보니 영화는 2시간 20분가량으로 꽤 긴 편입니다. 그러나 과하거나 넘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완동물관리과 학생이 오직 취업률을 위해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통신회사에서 일합니다. 부당한 이중계약을 통한 노동력 갈취는 당연한 절차처럼 여겨집니다. 저임금으로 고강도 감정 노동을 시키면서도 어떠한 존중과 배려도 없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에게는 '취업률을 떨어뜨린 복교생'이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어린 사회초년생을 괴롭히는 사회구조가 어떻게 이렇게 공고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만두었으면 됐잖아."라는 말을 쉽게 던지지만, 그 누구도 그만둘 수조차 없었던 '소희'의 상황을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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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춤추는 '소희'에서 시작해서 춤추는 '소희'로 끝납니다. 연이어 춤 동작에 실패하는 '소희'로 시작해서 끝끝내 춤 동작을 완성해내는 '소희'로 끝납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소희'로 시작해서 더는 현실에 없는 '소희'로 끝납니다. 실패하더라도 심기일전해서 일어날 만큼 활기와 열정이 있던 '소희'가 한겨울의 저수지에 몸을 던질 만큼 메말라가는 모습을 관객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소희'가 분명히 존재했던 공간들을 되짚어가는 '유진'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관객과 같은 무력감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유진'은 스마트폰 안에 담긴 '소희'의 유일한 유산(춤 영상)을 보며 분노, 회의, 좌절, 그리고 죄책감의 눈물을 흘립니다. 관객은 '소희'를 지키지 못한 '유진'의 허망함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게 되죠. 이것이 영화가 '소희'의 현실을 묘사한 1부에서 그치지 않고, '유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2부를 마련한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많은 영화가 흥미와 재미를 높이기 위해 플롯을 이리저리 꼬곤 합니다. 그러나 <다음 소희>는 복잡한 플롯 대신 흘러가는 시간순으로 '소희'와 '유진'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냅니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당사자인 '소희', 그리고 관찰자인 '유진'에게 더 깊이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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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영화 곳곳에 숫자와 이름이 가득한 실적표를 배치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과잉 경쟁과 지나친 효율우선주의를 시각화합니다. 콜센터에서는 현장실습생의 실적을 비교하고, 본사에서는 지역별 콜센터의 실적을 비교하고, 학교에서는 반별 취업률을 비교하고, 교육청에서는 학교별 취업률을 비교하고, 교육부에서는 교육청별 취업률을 비교합니다. 효율만을 따지는 현장에서는 실습생들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죠. 과잉 경쟁과 효율우선주의 끝에는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학생이 있습니다.
'소희'의 현장실습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모든 사람은 과잉 경쟁과 효율우선주의로 점철된 시스템만을 탓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이 문제인 걸 알면서도 비판 의식 없이 시스템을 따르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모른 체 하고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면, '소희'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소희'를 죽인 가해자인 셈입니다.
실제로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이 벌어진 뒤, 정부는 고등학생 현장실습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하지만 곧 고졸 학생의 취업 길을 막는다는 반발이 이어지면서 1년 만에 부활했죠. 현장실습 제도 폐지는 옳은 대처가 아니었습니다. 제도만 없애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음 소희'를 지키려면 모두가 책임지고 바꿔내야만 합니다.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일자리로 내모는 짓을 멈춰야 합니다. 과잉 경쟁과 효율우선주의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를 해소해야 합니다. 어린 사회초년생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합의를 마련해야 합니다. 현장실습생을 비롯해 모든 노동에 대해 정당한 임금과 대우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음 소희'를 지킬 수 있습니다.
⊙ ⊙ ⊙
플래카드에 적힌 취업 현황을 보며 먼저 취업하는 또래들을 부러워했던 어린 날의 제가 떠오릅니다. <다음 소희>를 보고 나니, 그때의 제 생각이 활활 불타고 있던 우리 사회의 경쟁 시스템에 마른 장작 하나를 더 집어넣은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듭니다. 관객들의 마음이 담긴 포스터처럼, '소희'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을 마칩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Schedule in SIWFF2023.08.27(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19:00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 08월 24일 -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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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번 실패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
나는 지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에 끼지도 못한다. 방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서 젤리를 먹고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벌였던 뻘짓거리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항상 무언갈 수습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면 상대방도 다 알게 되어있다. 난 이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어 항상 후회를 한다. 그게 심각한 잘못까지는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나 자신에게 솔직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순간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었다가 줘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구린 인간이 됐다.
이런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 때면 가끔 누군가가 날 따라오는 것 같다. 언젠가 아이언맨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언급했던 아이언맨이 내 주위에 있는 것 같다. 그냥 하지 마. 어차피 다 너를 떠나게 될걸. 토익? 그렇게 오래 붙잡으면 실력이 느냐? 너는 그냥 머리가 안 좋지 않아? 걱정을 뭣하려 해. 네가 바라는 거 다 안 이루어져. 온갖 폼은 잡지만 넌 결국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지. 그동안 헛짓거리 한 거 기분이 어때? 아이언맨은 비브라늄으로 만든 슈트를 입고 있어서인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잡념의 시작은 내 이상한 행동에서 왔다. 무슨 글을 쓰고 어떤 방식으로 날 위로해도 많은 게 날 떠났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미련과 후회를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문득 나 자신을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다. 지워버릴 수 있다면. 미안한 이들이 꼭 행복할 수 있다면. 아예 없던 일로 돌아갈 순 있을까. 창문을 열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버드맨>은 자아의 회복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마이클 키튼이 리건으로 나온다. 리건은 왕년에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름 꽤나 날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위치는 퇴물 그 자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으로 세상에게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당연히 쉽지 않다. 나오기로 한 배우의 머리 위에 조명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함에 따라 대체 배우를 구해야 했던 리건. 제레미 레너나 마이클 패스밴더를 호명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기 때문에 연극 대타에 호응해 줄 리가 없다. 유명 배우 마이크 샤이너를 섭외한 리건. 샤이너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성은 파탄이지만 연기력이라면 둘째 가면 서러워 처음 대본 리딩 때도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대타의 연기력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리건. 그러나 연극에서 변수가 생겼다.
연극에 베드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급발진을 해버린 마이크가 상대 여자 배우에게 연기가 아닌 실제로 해보자!라고 말한 것이다. 술 한 병 마시고 연극에 들어간 게 화근이 됐다. 어쨌든 연극은 잘 끝났지만 상대역 레슬리는 상처를 받았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돌발변수에 화가 나버린 리건은 마이크를 해고하려 한다. 그러나 마이크가 가진 티켓파워가 있어 그것마저도 쉽지 않고, 이어진 딸과의 말싸움에서 '아빠는 트위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멘탈이 무너질법한 상황들이 하나하나 쌓이다가, 뉴욕 한복판에서 팬티만 입고 후다닥 달리는 상황까지 겪게 된다.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연극 준비 과정에 무언가 깨달은 듯 리건은 공연 당일날 뭔가를 결심한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그는 결국 마스터피스를 완성해 세상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버드맨. 직역하면 '새(같은) 남자'라는 뜻이다. 새는 날개를 통해 하늘을 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거의 날지 못한다. 비행기 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그건 아마 사람이라는 동물의 특성상 그럴 것이다. 팔로 부채질 몇 번 한다고 해서 그게 감당이 되나? 당연히 아니다. 건장한 팔다리와 뇌가 있으니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은 사람의 본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거야 당연히 밖으로 걷지 못하면 맛있는 것들을 갖고 오지 못하니까. 이를 반영하듯 난 아닌 밤중에 배가 고파서 세븐일레븐에 허니버터 칩을 사러 갔다. 원래 사람은 배가 고프거나 졸리면 참지 못한다. 되게 당연한 명제이기도 하다. 근데 그 본질적인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이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난 가끔 나에게 물어본다. 왜 그걸 쓰고 있냐고. 나는 돈 많이 벌고 싶다. 엄마 아빠한테 효도하면서 내 인생 잘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옳은 선택을 하는지 증명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그건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40여 편의 글을 썼던 이유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이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시각이 넓어지고, 또 작품과 관련 없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난 나 자신에게 이 두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고 되뇌었고 몇 달 동안은 실제로 그러고 있다. 직업적인 무언가와 정서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건 별게 아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창작의 동기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나 역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똘똘이, 다른 이에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멍청이더라도 나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영화 <버드맨>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사랑받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아니다. 사람 마음 얻는 건 손 꼽힐 정도로 어렵다. 근데 막상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 무슨 말이냐? 우리는 필연적으로 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뜻이다. 난 잃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무언가를 탓해왔었다. 이는 모두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관 계고 영화고 예술이기 때문에 좋은 것 나쁜 것 다 각기 개성이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 좋은 것을 탓하며 시간을 보내다 정신 차려보면 나는 한 꺼풀 성장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내가 얻은 것도 분명한데 잃은 것에 대해서만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버드맨>은 제안 하나를 건넨다. 무대에 올라서라는 뜻이다. 겁을 먹었건 원래 대인기피라 사람들 앞에 못 나서건 상관없으니 일단 뒤로 숨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인생을 살면서 내가 바랐던 것 오 전부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완성의 존재라 무언가를 실수할 수밖에 없고 가끔 우리는 이를 실패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원래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인생 전부를 근사한 순간으로 채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뭔가를 잃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연극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극은 삼라만상의 인간형을 반영하는 예술이기에 나쁜 사람, 안 맞는 사람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이에 따라 각자의 배역이 다르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연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었는데 연기를 소재로 했다는 건 난 분명히 연기와 현실을 동일시 키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연극배우로 나서는 극 그 자체나 이 <버드맨>이 누군가의 연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분명하게 대칭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더 있다. 드럼과 롱테이크다. 드럼 연주자는 극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막 등장한다. 마치 이냐리투 감독이 '이건 대놓고 허구예요'라고 넌지시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서의 현실고 연극의 구분선이 얕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롱테이크 역시 '인물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따라 한 갈래로 나뉜다. 현실은 롱 테이크고 숏 테이크고 그런 거 없다. 일단 눈 떠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롱테이크인 셈이다. 마치 이 영화의 카메라 촬영 기법처럼. 영화는 이 두 가지 소재를 뒤섞은 후 이 극과 현실의 공통점을 뽑아내서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영화 후반부 리건의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를 추론만 할 수 있는데, 나는 감독이 쉬운 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난 애초부터 이냐리투 감독이 키건의 선택에 대해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포트라이트를 주면 그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린다. 이 사람이 왜 죽었을까. 우리는 이 선택에 대해 논의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명예회복에 성공한 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이냐리투 감독은 처음부터 죽음을 빼버렸다. 아니 사실 누가 봐도 죽을법한 상황에 죽음을 생략하는 과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후반부의 죽음을 생략하는 수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 건 영화의 메시지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에서 내포하는 주요한 메시지는 인생의 역설이다. 세상에게 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그가 골랐던 선택지가 무엇인가. 연극이 그 선택의 전부였을까? 물론 그의 명예회복에 연극이 좋은 매개체가 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다. 팬티바람으로 뉴욕 한복판을 달려가거나 총으로 했던 자살시도가 그의 명예회복을 도운 것들이었다. 완전 대놓고 드러나는 아이러니다. 연극을 통해 사랑받고자 했던 그는 연극 외적인 요소가 내부의 관심으로 환기되는 경험을 했다. 영화는 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생은 연극과도 같다. 싹수없는 후배 놈이 내 연극을 망쳐가며 퀄리티를 떨어트릴 수도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것 외의 요소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인생을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넘어져야 한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기본적으로 역겹고 모순적이다. 아닌 사람 있나? 내가 무언갈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즉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 무조건 아름답지는 않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키건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요. 창문 밖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스스로의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질 것인지, 아니면 실패가 두려워 사람들 앞에 숨을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우리 인생은 기본적으로 모순덩어리라 사랑받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그랬고, 당신이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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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촌지 요구로 시골분교로 부임하게 된 선생 김봉두
1년만 버티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임해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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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클린 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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