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3-09-05 21:58:44
왔다가도 가는 건가 봐
영화 <어느 멋진 아침>리뷰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는 ‘어느 멋진 아침’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는 평범한 일과를 수행하는 아침이다. 신경의 기능이 퇴행하는 병에 걸린 아버지가 열쇠를 찾지 못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좋아하셨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화장실에 가시는 것을 돕고, 안부인사를 드린 뒤 그의 집을 나선다. 통역가로서 자신의 업무를 하고, 아이를 돌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법한 죽음이나 낯선 외계생명체의 발견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상념에 빠져 있거나 약간은 권태로워 보일지언정 대상화된 우울에 빠져 있지 않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어느 멋진 아침>은 마치 그가 생각하는 삶의 정의를 찬찬히 들려주는 영화같다. 영화 속 이야기는 긴 일대기가 아니다. 상실과 사랑을 담아내는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일년이라는 기간을 지나면서 아이를 기르는 것, 전에 알던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약간의 양심의 가책, 쾌락과 실의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어느 멋진
아침>은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연작을 비롯한 작품의 유산을 물려받은 연출과 레아 세이두의
해가 갈수록 깊이를 더하는 연기력, 붙었다가 떨어지고, 다시
연결되는 관계 구조로 들어차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를 통해 ‘멋진
아침’은 매일 찾아오는 것일수도, 방황 끝에 도달하고 싶은
목표 지점이 될 수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가도 문을 활짝 열어 두면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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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한 연민이 이어지는 밤
나는 항상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철없는 나를 보듬어 주고, 다양한 선택지를 알려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런 어른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내가 (사회적인) 어른이 된 후였다.
나는 타인의 못남을 어루만지지도, 먼저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 그저 그냥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아직도 나를 돌보기에도 능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타인을 위한 마음을 내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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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슬립, 2023> 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배우상을 수상한 독립영화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길호(최준우)와 기영(김영성)이 서로 부딪히며 함께 살아가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특별할 것 없는 캐릭터에,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새롭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그냥 지나가면서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는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과하지 않은데 따뜻하고, 얕은 것만 같은데 묘하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담배와 식물
처음으로 피식거렸던 장면은 기영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면서 식물들에 물을 주는 씬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별다른 설명 없이도 기영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핑크색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고, 앞에서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물을 챙겨주는 사람이라니.
어머니가 남겨준 식물들이 죽지 않도록 정성껏 돌봐주는 행위 그 어디에도 진한 애정은 보이지 않는다. 잘 자라길 바란다거나, 어느 식물은 어떤 주기로 물을 주어야 한다거나 그런 깊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흙이 마르면 물을 준다. 그게 다다. 그냥 거기에 식물이 있으니까, 할 만큼 한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길호에게 식물에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줄 때는 뿌듯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기영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안 느꼈을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알려주고자 한 것은 물을 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일상에 대한 사소한 부채감과 비슷한 어떤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주는 대상이 꽃에서 길호로 옮겨간 것은 기영의 성장과도 맥락이 이어진다.
#2. 야, 일어나봐
집 앞 평상에 자는 (누가 봐도) 가출 청소년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 굳이 타인과 엮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기영은 그냥 '일어나'라는 말로 길호를 툭툭 건드린다. 그리고 그냥 으레 그렇듯이 잔소리만 하고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기영이 아마 길호에게 1mm의 마음의 틈을 열게 된 건 길호가 기영이 시킨 대로 평상의 쓰레기를 싹 치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말을 따르는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티가 난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어딘가 보살펴 주고 싶은 구석이 보인다.
기영은 본가에서 반찬을 얻어오던 날 길호를 집으로 초대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기영의 본가에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버지를 돌봐주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기영은 꼬박꼬박 아줌마라고 부르면서도 겉옷을 사 입으라며 돈뭉치를 억지로 쥐어주고, 아줌마는 도망치다가도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별다른 부연 설명이 없어도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런 평범한 가족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순간적인 연민이 불쑥 커진 그날 밤부터, 기영은 길호를 조금씩 돌보기 시작한다. 마른 흙에 물을 주듯, 서툴고 천천히 양육이 시작된다.
하지만 당연히 양육은 쉽지 않다. 길호는 기영이 집을 비운 날 친구들에게 휩쓸려 집에 패거리들을 재우고 만다. 이 상황에서 길호가 잘못한 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기영이 혼자 집을 비운 것부터 부주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또 기영도 서투른 어른일 뿐이니까. 아버지의 똥을 열심히 닦고 와보니 또 길호가 똥을 싸놨다. 기영은 남의 똥을 치우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아닌데, 자꾸 주위 사람들이 똥만 싼다.
#3. 머리 위의 랜턴
영화를 보면서 랜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길호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도둑질을 할 때나, 어두운 굴다리를 걸어갈 때 주로 랜턴을 끼고 나오는데, 마치 길호의 시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랜턴이 있으면 눈 바로 앞은 밝게 잘 보인다. 내가 보고자 하는 건 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시야는 막상 가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어딜 봐야 하는지 당최 파악을 할 수는 없다. 길호도 마찬가지다. 길호의 눈앞에 당장 필요한 것은 잘 곳, 먹을 것, 그리고 있을 곳이다. (잘 곳과 있어야 하는 곳은 다르다)
하지만 길호는 랜턴을 벗고 싶어 하는 의지를 가진 아이다. 나쁜 일이란 걸 알고 있고, 벗어나고도 싶지만 랜턴을 벗으면 어둠뿐인 것을 알기에 벗지 못한다. 당장 먹고 자기 위해서라도 랜턴을 껴야만 했다, 기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영은 길호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집도 기영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라면도 있고 TV도 있고, 서로 결혼을 못 할거라는 사소한 악담도 나눈다. 마지막에 길호가 기영을 찾아가면서 친구들과 반대로 걷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고 좋았다. 드디어 길호는 랜턴을 본인이 정말로 가야 하는 길을 찾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길호가 랜턴이 필요 없는 일상을 보내기를 바란다.
#4. 연민의 확장
기영은 길호랑 지내는 기간 동안 직장에서도 한층 밝아진 모습을 보인다. 우는 모습도 못 본 척하며 무관심하던 기영은 어느새 초은(이랑서)과 조금씩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 집에 데려다준다는 전에 없던 다정한 태도도 드러낸다.
참 조그맣던 기영의 세계는 본인도 모르게 길호로 인해 조금씩 넓어지고 밝아진다. 아마 길호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길호를 내쫓은 후 기영이 일하는 모습이 첫 장면과 비슷하게 나오는데, 지게차를 모는 장면은 같은 장면을 두 번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똑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달라 보였다. 원래 사람은 잃어봐야 그게 마음에 있던 거라는 것을 알아챈다고, 사실 예전 일상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영은 많이 허전하고 공허했을 것이 분명하다. 같이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그 호수가 기영과 길호의 마음이라는 건 스크린에서 본 나도 알겠으니까. 던진 돌은 결코 다시 안 던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5. 빅슬립
기영은 길호에게 '불쌍한 척 하지마, 그럼 진짜 불쌍해지는 거야'라며 충고한다. 기영은 스스로를 불쌍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현실에 타협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 적당한 사람. 여러 사회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관객이 보기에도 그는 불쌍하지 않다. 그냥 하루를 적당히 잘 보내고, 할 만큼 하고,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사람.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다. 영화 보는 내내 여자 두 명의 이야기였으면 갈등부터 해결까지 단 하루밖에 안 걸렸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 두 명을 갖다놓으니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초은이 등장해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할 때는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으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과 꽤 높은 수준의 음향,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력이 놀라웠다.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서 몰입도를 끌어낼 수 있는 건 독립영화에서 약간 과장해서 8할은 배우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역 배우가 나온다면 연기력에 대한 기대는 사실 반쯤 내려놓고 보는 편인데, <빅슬립>의 두 배우 모두 캐릭터 그 자체로의 모습이어서 연기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앞으로도 어디에 나온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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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쌍해하지 않으면서 대가 없는 식사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내가 받았었던 약한 연민들의 순간, 그리고 그 찰나들이 지탱해 준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은 잠을 청해봐야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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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자아를 남성성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전통 서부극과 현대 서부극, 카우보이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났는지에 관하여
권총을 찬 채 말을 타고 드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소를 지키는 카우보이란 직업의 독특한 캐릭터성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쓰이기에 적합합니다. 전통 서부극을 비롯해 현대 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본질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복수하는, 전통 서부극과 같은 골자를 가진 최근의 영화까지 카우보이는 스테레오타입화되어 수많은 영화에 등장했습니다. 재밌는 부분은 개척시대 혹은 그와 가까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최근에 제작된 현대 서부극의 카우보이들은 전통 서부극의 카우보이가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일부 특징들을 비틀어서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각 영화가 가진 카우보이의 특징은 무엇인지, 그로 인해 그 영화만이 가진 특별함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는 192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당연하게 카우보이가 다수 등장하는 서부극 장르의 영화입니다. 얼핏 보면 그들은 전통 서부극 카우보이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가진 듯한 느낌입니다. 카우보이 하면 바로 떠오르는 외양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남성우월적 마초이즘·인종차별 마인드가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게 되면 <파워 오브 도그>에 등장하는 필 버뱅크로 대표되는 카우보이 또한 숨겨져 있던 비틀린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이 영화는 현대 서부극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 영화에서는 총을 사용한 액션은 찾아보기 힘든 대신, 대화와 분위기를 통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숨기거나 파헤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남성성을 중시하고 강조하면서 여성스럽고 섬세한 피터를 멸시하던 필은 역설적이게도 남성성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동성애자임을 여러 메타포를 통해 은연중에, 또는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과거 자신의 스승이었던 브롱코 헨리의 안장을 쓰다듬는 행위는 마치 애인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밴조를 음정과 박자에 맞춰 섬세하게 연주하는 모습, 카우보이 무리와 동떨어져 홀로 멱을 감고 스승의 손수건으로 자위를 하며, 남성의 나체 사진이 담긴 잡지를 비밀 공간에 숨겨놓는 등의 행위를 비춤으로써 말입니다. 마초적인 남성의 실체가 동성애자라는, 그 괴리감으로 인한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보이는 캐릭터는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착실한 빌드업을 거쳐서 드러낸 클리셰는 관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파워 오브 도그>만이 가진 특별함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통 서부극처럼 보이지만 실체는 스테레오타입을 탈피한 현대 서부극 <파워 오브 도그>, 클리셰일지라도 착실한 빌드업은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다.
나의 유일한 영혼과 자아. 개에게 잡아먹혔느냐, 저항하였느냐
개의 세력으로 직역이 가능한 영화의 제목 <파워 오브 도그>는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성경의 시편 22편 20절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왜 하필 개의 세력을 제목으로 설정하였을까? 이 구절은 자신의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게서 구해달라는, 자신의 영혼을 악(惡)에게의 굴복이라는 고난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 <파워 오브 도그>의 악은 무엇인가? 해당 시대의 사회가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권위적이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로즈와 피터에게 남성성을 내세우면서 가차없고 잔인하게 대하는 필을 보면 악을 대변하는 존재로 느껴질 법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섬세한 감수성과 높은 지능,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자아와 영혼을 악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하고 굴복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대변하게 된 나약하고 가여운 자일뿐입니다.
반면에 내성적인 성격에 가냘프고 유약해 보이는 외모, 그리고 생화로 착각할 만큼 종이로 섬세한 꽃을 만드는 등 영화 초반의 피터는 전반적으로 남성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는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토끼를 아무렇지 않게 해부하고 관찰하며, 고통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통한 살인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다른 카우보이들은 발견하지 못하던 개의 형상을 피터는 발견함으로써 필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필은 황무지에서의 생존법을, 더 나아가 사랑을 배웠던 브롱코와의 관계처럼 피터와 그러한 사제지간 혹은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합니다. 피터는 그를 따르고 지식을 습득하려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카우보이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피터는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이란 개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유일한 것,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아와 영혼을 지켜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둘 자체의 성격과 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은유하는 존재들 역시 영화 속에 치밀하게 숨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 외에도 인상 깊은 메타포 하나를 소개해 보자면, 필과 피터가 같이 여행을 떠났을 때 토끼 한 마리를 쫓게 되었습니다. 나무 더미 아래에서 당당하다는 듯 꼼짝 않는 토끼는, 실은 꺼내고 보니 다리를 움직이기 힘든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토끼에게서, 나무 더미와 같은 주변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에서는 마초적이고 당당하지만 주변 환경에서 꺼내어져 실체를 확인하였을 땐 상처 입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필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그 토끼를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 준 피터는 필 또한 동일하게 구원과 안식을 주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처럼 <파워 오브 도그>는 수많은 장치들을 통해 둘과 둘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담아냈으며,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함 중 하나입니다.
브롱코의 안장을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대하던 필과, 필이 만든 밧줄을 장갑을 낀 채 침대 아래로 밀어 넣은 피터, 악의 대물림과 끊어냄.
영화를 흘러가게 만드는 힘, 연출·배우와 소리
난해 보일 법 한 영화의 초반부 흐름과 달리 <파워 오브 도그>의 스토리는 정말 단순합니다. 부유한 카우보이 형제·동생과 결혼하게 된 과부·소심하고 유약한 그녀의 아들·그리고 모자와 형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 이 영화의 주된 골자입니다. 이 단순한 스토리를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에는 치밀한 플롯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치밀한 플롯은 누구에게서 탄생을 하였는가 하면 연출과 배우의 연기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분명히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는 드넓은 황무지를 익스트림 롱 숏으로 비추고 있음에도 그 분위기는 마치 겨울처럼 싸늘하게 느껴집니다. 또는 등장인물을 비출 때 클로즈업을 통한 감정의 묘사와,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보는 듯한 위치의 카메라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한 가지 예로, 로즈가 형편없는 실력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을 때, 2층에서 마치 그녀를 비웃는 듯 필은 동일한 곡을 밴조로 유창하게 연주합니다. 이때 위에서 내려다본 로즈는 한없이 작아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본 필은 한없이 커 보입니다. 위축된 로즈와 위압감 넘치는 필을 자연스럽고 탁월하게 묘사해 냈습니다.
아무리 감독이 연출을 뛰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배우들이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불완전한 실패한 영화일 뿐입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진정으로 배우를 위한, 배우에 의한 영화입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커스틴 던스트, 코디 스밋 맥피, 그리고 제시 플레몬스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그대로, 혹은 더 특출나게 영화에 담아냈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야 두말할 것도 없으며, 그가 맡은 배역 중에서 감히 최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컴버배치의 포스에 전혀 밀리지 않고 동등하거나 오히려 후반부에서는 그를 잡아먹어 버린 코디 스밋 맥피는 새로운 배우의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커스틴 던스트의 짓눌린 듯한 압박감과 공포로 인해 병들어가는 모습 또한 그녀 역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인 캠피온의 소리를 활용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필이 차고 있는 박차가 찰랑거리는 소리는 그의 성격과 맞물려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그에게 압도되고 공포를 느끼도록 분위기를 전환시킵니다. 게다가,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들 역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피터가 미지의 공간인 산과 황무지를 처음 탐험할 때, 처음 발을 들이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OST가 묘사를 합니다. 전통적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긴장감을 조성함에 있어 바이올린이 주로 사용되기 마련이지만 그린우드는 호른 두 대와, 커다란 공간의 잔향을 활용하여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외에도 불협화음으로 이뤄진 날카로운 피아노 소리는 로즈가 위치해 있는 장소의 분위기와 그녀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영화와 잘 어울리는 '소리'까지, <파워 오브 도그>는 눈과 귀 모두에 강한 자극을 선사합니다.
단순한 스토리를 받쳐주는 치밀한 플롯, 그 플롯을 받쳐주는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그들을 한데 아울러 감싸고 있는 불편하지만 어울리는 소리까지.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동생 조지와 피터와 달리 필은 오직 말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를 통해 필과 피터의 관계를 과거에 안주해 있는 존재와 그로부터 벗어나 현재·더 나아가 미래를 향하는 대립되는 존재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수많은 메타포와 상징이 산재해 있는 영화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을 찾아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보니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발견해 내지 못하더라도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나고 훌륭한 심리 영화입니다. 다만, 서스펜스가 형성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적지 않은 분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꼭 감상하기를 추천하는 영화, <파워 오브 도그>입니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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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풍년이 될 2023년
지난 10일 (현지 시간), 파라마운트사가 다가올 영화 <트랜스포머>와 <스타 트렉>의 개봉 연기를 발표하였습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SF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프리퀄로 제작된 <트랜스포머: 라이즈 오브 더 비스트> (Transformers: Rise of the Beasts)은 본래 2022년 6월 24일 개봉될 예정이었는데요. 아쉽게도, <트랜스포머> 속편의 개봉일은 현재 2023년 6월 9일로 약 1년 연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목조차 미정인 <스타 트렉> 속편의 개봉일 역시 2023년 6월 9일에서 2023년 12월 22일로 연기되었는데요.
이로써, <트랜스포머>의 다음 장을 열 리부트작은 정체불명의 소니-마블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날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트랜스포머>가 마블과 정면대결을 펼친다면, <스타 트렉>은 <스타워즈>의 새로운 시즌과 대결을 펼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는 <원더우먼 1984>의 감독으로도 유명한 '패티 젠킨스'로 낙점되었는데요. 이변이 없는 한, 2023년 크리스마스 시즌 극장가는 '스타'들의 싸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트랜스포머>의 속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많지 않은데요. <트랜스포머: 라이즈 오브 더 비스트>의 감독은 <크리드 2>의 감독이었던 '스티븐 카플 주니어'이며, <인 더 하이츠>의 안소니 라모스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도미니크 피시백'이 주연을 맡았다고 합니다. 영화는 1994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데요. 파라마운트사에 큰 성공을 안겨주었던 흥행 시리즈인 만큼, 차기작 역시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2007년 개봉한 시리즈 제 1편은 '샤이아 라보프'가 주연을 맡아 시리즈의 창대한 시작을 열었으며, 최근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주연을 맡은 리부트작 <범블비>(2018) 역시 평론가 사이에서 호평을 받으며, 시리즈가 건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더불어,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스타 트렉>의 속편은 제목조차 알려져있지 않은데요. 감독과 출연 배우는 물론이며, 내용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영화가 과연 <스타 트렉>의 새 길을 열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파라마운트사의 대표 시리즈의 귀환을 기다려보며
그때까지 영화로운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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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끼를 물어버린 최우식
이 글은 영화 [경관의 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에 따르면.
무언가를 결심해 새로 태어나는 주기는 꽤 자주 온다.
그것이 매주 월요일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달이 될 수도 있으며, 가끔은 벌써 시작한 지 2주 차에 접어든 새해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계기만 있으면, 가까운 시일 내라도 다른 사람이 될 각오를 다지는 날은 온다는 것이다.
다짐의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서 확답할 수는 없지만, 뭉뚱그려 말하자면 예전의 모습은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이지만 이미 잊고 싶은 과거가 되어버린 작년처럼. 마음속 인생의 암흑기를 품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인물이 영화 [경관의 피]에도 존재한다.
새해에는 외화에 밀리지 않고 박스오피스를 차지하겠다는 한국 영화의 목표까지도 이번 기회에 이룰 수 있을지 기대되는 시점이다.
전형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들 ;그리고 대사를 먹어버리는 건 왜.
사진출처:다음 영화
딱 뷔페 빕스 같은 영화다.
다른 프랜차이즈 뷔페보다 조금 비싸지만 연어 외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는. 주메뉴로 키워보려 용쓰는 스테이크마저도 가격에서도, 맛에서도 쉽게 대체품을 찾을 수 있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뷔페.
영화의 인물들은 그만큼 전형적이다. 또한 이미 정해진 영화 속 역할을 배우들이 빛나는 연기력을 십분 사용해 관객들의 머릿속에 쑤셔 넣을 뿐이다.
어느 정도 보장된 연기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만큼 편안하고 감사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정해진 틀 안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연기 외의 어떤 특이한 점도 기대할 수가 없다. 단 하나도.
분명 좋아하는 배우들이 단체로 나오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티켓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마음을 스친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봤던 영화관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몰입을 자꾸 방해하는 티켓값의 원혼 때문이었는지. 저음의 배우들 목소리가 파묻히는. 혹은 대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뭉개지는 지점이 꽤 많이 존재했다. 조진웅의 이름을 서류에 적는 장면이 없었다면 영화의 끝까지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답답함 덕에,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점점 더 떨어져갔다. 안타깝게도.
입은 옷, 맞는 옷, 어울리는 옷;옷으로 보는 최우식의 성장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최우식 배우는 [기생충]이라는 전작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을 과정이라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전작이 흥행 정도를 벗어나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으니. 아마도 최우식은 강남 스타일을 히트시킨 싸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겠지.
아무리 정해진 역할이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나오는 영화라 해도. 조진웅이라는 배우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최우식 배우는 전작의 무게와 함께 투톱 영화에서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역할인 조진웅도 넘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한 쪽에 가까웠다.
아주 잠깐 스치는 과거의 파편들로는 아무리 모아봐도 최민재의 캐릭터를 완성하기엔 역부족이고, 영화에서 유일한 입체적인 인물인 주제에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흡수되어버린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것도 주위에 떠밀리고 영향을 받아서.
캐릭터의 설명이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최민재의 정체성은 옷으로 대변하는 것만 같다.
초반의 최민재는 누가 봐도 경찰, 혹은 (자신이 선이라고 부르는) 선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박강윤(조진웅)을 만나면서부터 어색해 보이는 수트를 입게 된다. 자신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는 동안에는 그가 입은 양복은 딱 그만큼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점점 최우식은 그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옷에 익숙해져 다른 경찰들과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중간에 아주 잠시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편의 옷을 입게 되지만.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그의 확실한 정체성 시프트(Shift)와 함께 보였다면 좋았겠지만. 갈 곳 잃은 최우식은 얕은 고뇌의 연못에 빠져 익사해버리고 말았다. 멋있는 옷을 입은 채로.
선과 악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박강윤은 행복할까?
사진출처:다음 영화
박강윤은 영화 내내 미끼에 불과한 삶을 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 삶에 진절머리가 난 덕분에, 그는 요트를 타고 낚시를 하는 여생을 꿈꾼다. 자신이 판을 짜고 자신이 낚을 수 있는 만큼만 낚아도 되는 삶.
현재 박강윤의 삶은 미끼인 주제에 카드 돌려 막기까지 하고 있는 꼴이다.
언제나 발등의 불만 겨우겨우 꺼뜨리며 제자리에서 동서남북으로 방방 뛰고 있다.
20년을 갚아나가야 겨우 자신의 것이 되는 요트의 값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한 번에 끊거나 20년에 걸쳐 조금씩이라도 청산을 하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인 셈일 것이다.
박강윤은 마지막에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준 사람이 생긴 것처럼 조금은 행복해하는 미소를 짓지만.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결말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은 결국 비극으로 흐를 뻔한 그들의 인생에서 아주 잠깐 있는 빛나는 날들이다. 마치 박강윤의 집에 있던 그 많던 시계들과 넥타이들이 자신의 힘든 순간을 잠시 잊게 해주었던 것처럼. 결국 빛을 잃고 미끼로서의 매력이 다하면 낚싯줄을 잘라버리면 끝인 것처럼 말이다.
부디 그때가 최대한 늦게 오기를.
그리고 그때가 온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오래 빛났던 반짝이들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올해 첫 영화
출연진만 보면 완벽한 영화다.
어떤 영화일지 이미 눈에 보이는데도 관객들은 믿고 보는, 혹은 어느 정도의 연기력은 보장될 것을 생각하며 영화관으로 향하기 좋다.
그리고 영화는 말마따나 기본만 하는 영화에서 발전하지 못한다. 섬세한 묘사를 지닌 책 내용을 영화로 옮기는 데 있어 많은 제한이 있었을 것이기도 하고.
뜬금없는 마지막 액션신도 눈에 거슬린다. 조금 더 다듬었다면 차라리 암수 살인이나 극비 수사에 가까운 영화가 되었을 법도 한데.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이 글의 TMI]
1. 새해 들어서 커피를 줄여보기로 했다.
2. 아아가 아닌 뜨아로 바꿨다.
3. 이렇게 졸린 세상을 살고 있었다니ㅠ
4. 대신 진짜 꿀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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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My Salinger Year, 2020
드라마 / 12세 이상 관람가 / 101분
감독: 필립 팔라르도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꿈은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있다. 현실이 꿈보다 매번 먼저 우릴 찾아와 문제지.
슬프지만, 현실은 늘 꿈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다. 그래서 우린 매 순간 현실과 꿈 사이에 표류하면서 안전지대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현실도, 꿈도 모두 포함된 이상적인 공간. 그 공간을 단 한 뼘이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만큼 꿈은 우리에게 절실하며 애틋하다. 꿈꾸던 시절이 곧 '나'의 찬란한 인생의 한 겹이며, 그 투명하고 얇은 겹이 하나둘 겹쳐지면 앞으로의 나를 예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니까. 현실에서 꿈꾸는 일은 언제나 가치 있다.
조안나의 꿈은 뉴욕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아주 즉흥적으로.
남자 친구에게 버클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일방적인 말에서 왜 활기찬 희망이 느껴지는 걸까. 그렇다, 그녀는 작가란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을 선택했다. 싸구려 아파트에 살면서 카페에서 글 쓰는 유명 작가들의 노선을 경험하기 위해, 진정한 작가는 바로 그런 사소하면서도 운치 있는 환경에서 탄생한다는 학습된 환상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라면 갖고 있는, 특별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조안나에겐 그게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란 신분을 숨긴 채 전통 깊은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마가렛의 첫 번째 업무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샐린저에게 온 편지를 빠짐없이 읽고 정해진 형식에 맞춰 답장하는 일. 첫 만남에 딱 잘라 작가 지망생은 비서로 뽑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마가렛의 말에 조안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마가렛의 비서가 냉정하다 못해 서늘한 직업이라 느껴졌지만, '작가의 세계에 다가간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만족했다. 그러니 편지를 읽고 답장하는 일도 자신의 글쓰기에 분명 좋은 영감을 줄 거라 막연하게 여겼던 그녀였다.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편지를 분쇄기에 넣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무시하고 있다는, 나아가 '작가'로서 독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였기 때문이다. 정해진 양식으로 독자에게 답장하는 일은, 독자가 존재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작가로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못 할 짓이었다. 그때부터 조안나는 마가렛이 준 임무를 말도 안 되는'허튼소리'라 명명한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그러나 조안나는 새내기였다. 꿈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을 것을 과감히 선택했으나 사회생활이라 말하는 사회 구조의 한 일원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의 뚜렷한 기준 갖고 마가렛의 비서로 일하는 건 나쁘지 않은 자세였지만, 그녀는 직원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 작가 에이전시에서 독자에게 똑같은 편지 형식을 고수하는지, 왜 소속된 작가의 작품을 '감상'이 아니라 '판매'에 중심을 두는지, 왜 슬러시 파일(개인 출판사가 없이 활동하는 작가들의 원고)을 대부분의 헛소리로 평가하는지... 조안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이고 강압적이며, 열정적인 마음을 식게 하는 부정적 시선만을 눈여겨봤을 뿐이다. 그녀는 작가 에이전시가 지금까지도 그런 메마르고 인정머리 없는 감성을 고수하고 있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직원으로서 말이다.
조안나가 못 박은 허튼소리는 법률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수많은 경험과 데이터가 쌓아 올린 최소한의 울타리이자, 가장 안전한 지침이었다. 답장 하나를 마음껏 할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처지를 '비서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애석하게도 조안나는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비서'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해야 할 일을 잘 해냈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란 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변화시킬 길이 있다면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는 말인데, 다들 알다시피 뭐... 그게 어디 쉽나. 다 실수를 해봐야 아는 거지.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고심하던 조안나는 결국 회사의 타자기를 훔쳐, 허튼소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쓰고 독자에게 정성스럽게 답장한다.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기둥처럼 받쳐주던 관계들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새로 사귄 남자 친구(돈)와의 관계, 냉정한 사장 마가렛과의 관계, 전 남자 친구(칼)와의 관계 마지막으로 내 꿈과 내 현실의 관계까지. 귀중한 관계들이 하나씩 엉키면서,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샐린저의 전화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또 반응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내가 뭘 하려고 했었더라?'
점차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언제부터 제멋대로 선을 넘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감정이 확 솟잖아요!'라 소리치던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답장이 기계적인 편지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 불이 꺼지기 시작한 관계는 다시 보살피고 필요 없는 관계는 단호히 잘라내면서 마침내 "그들의 편지가 저를 바꿨죠."라고 읊조릴 수 있게 된다. 과거의 나를 책임질 줄 아는 '내일의 조안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만의 속도로, 또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매력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자기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즐겁게 춤추고 뛰어다니며, 끝까지 나를 잃지 않는 힘까지 갖게 된 조안나.
이제 그녀는 샐린저의 외투에 몰래 독자들의 편지를 넣어버리는 걸 들켜도 예전처럼 움츠러들지 않게 됐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마가렛에게 진심이 담긴 말을 듣는 사람이 됐다. 그녀는 처음 뉴욕에 눌러앉으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기 싫다 말했었다. 반드시 특별해지고 싶다 했다. 하지만 더는 자신이 평범하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됐으며 이를 불안해하지 않게 됐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한 나를 이끌어낼 방법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든 특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평범하다는 말속에 잠시 나를 위로하고 돌보는 거지.
조안나,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기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지금도 열심히 꿈꾸고 있는 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조안나를 통해, 꿈을 위해 현실을 이용하는 당차고도 용기 있는 자의 현재와 현실과 꿈의 괴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구현해낼 줄 아는 자의 미래를 모두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긴 여운을 남기는 좋은 응원이 될 것이다.
현실이든 영화든 당연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당연하지 않은 게 세상을 움직이는 법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처럼, 조안나처럼, 앞으로의 우리처럼, 그리고 오늘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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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나 있을 법한 현실적인 가족 이야기, 영화 '남매의 여름밤'
“빨리 내 방으로 와 봐! 급해!”
“왜?”
“불 좀 꺼줘^-^”
남매들의 밤은 항상 치열하다. 서로 아웅다웅 괴롭히고 못 살게 군다. 사실 남매라는 관계는 형제나 자매에 비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해님 달님' 속 오누이 같이 다정한 사이가 있는 반면, 좋아하는 게 달라서 서먹서먹하거나 얼굴만 봐도 으르렁 거리기도 한다. 때론 자신의 남매보다 ‘엄마 아들’ 혹은 ‘아빠 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릴 때도 있다. 제목부터 이렇게 복잡한 단어를 넣은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들을 어떤 관계로 그리고 있을까?
영화 ‘남매의 여름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아빠(양흥주)와 함께 작은 지하방에서 살던 남매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는 할아버지(김상동)가 계시는 2층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고모(박현영)까지 같이 지내게 되며 한 지붕 아래 두 남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제24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감독 조합상, 시민 평론가상, 넷팩상, KTH상을 수상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후 제49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밝은 미래상 수상,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상 수상, 제8회 무주 산골영화제의 대상으로 불리는 뉴비전상을 연이어 휩쓸었다. 평론가의 선택이 반드시 관람할 이유가 되지 않지만,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관객들이 공감할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현실적인 가족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 흠칫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느 집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가족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관계를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빠, 가출한 고모, 질풍노도의 시기가 시작된 ‘옥주’,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은 막내 동주’까지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대화하고 행동한다.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밥 먹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수저를 건네는 모습이나 ‘콩국수 동주한테 덜어줘.’, ‘이거 맛있다,’ ‘포도가 햇빛을 많이 받아서 달아요.’ 등의 대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 위주가 아닌 식사 장면 전체를 촬영해서 실제 가정의 식사시간을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사용된 할아버지의 생신 축하 장면은 핵심 장면으로 꼽힐 만큼 가족 간의 소중한 순간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은 영화의 첫 시사회에서 식사 장면에 대한 질문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말 그대로 가장 일상적인 식사 장면을 담고 싶었다. 옥주의 가족이 처음 할아버지의 양옥집에 왔을 때는 주방에서 고모가 왔을 때는 거실에서, 동주와 옥주는 2층에서 식사를 하는데 가족들이 어떤 위치에서 식사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답했다.
영화의 배경인 할아버지의 2층 집도 현실적이다. 담금주와 각종 살림살이가 쌓여서 창고가 된 작은 방과 오래된 재봉틀은 그곳의 세월을 가늠케 한다. 인천에서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을 빌려 촬영했으며, 영화의 시나리오도 집에 맞춰 일부 수정했다고 한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할아버지 집 마당은 관리 안 된 텃밭이 있는 걸로 설정했지만, 촬영 장소에 맞춰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추억을 쌓는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시간적 설정인 ‘여름’의 분위기가 한층 강조되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14살 ‘옥주’
영화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극적이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처럼 영화의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정리된다. 화면도 감성적인 색감을 사용해서 따뜻한 느낌을 준다. 담담하게 그린 가족의 일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고 잔잔한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담백한 표현 방식에는 주인공 ‘옥주’의 영향이 크다. 주요섭 작가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를 순수한 아이의 시선에서 담아낸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도 마찬가지다. 14살 ‘옥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어른들의 현실적 어려움이나 불편한 상황이 많은 부분 생략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옥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있다.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아이이자 또래 친구들처럼 외모와 이성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한 사춘기 소녀다. 하지만 어른들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채고 그들의 대화를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옥주’는 어른의 세계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변화를 겪으며 관계와 감정에 혼란을 느낀다.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앞으로도 ‘옥주’네 가족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옥주’와 ‘동주’는 계속 싸울 거고 아빠와 고모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껄끄러운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러면서 괜한 자존심과 미안함에 부끄러운 모습을 숨길게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들은 같은 식탁에 앉아 별 거 아닌 이야기에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내면의 민낯까지 솔직하게 보여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지내던 여름밤처럼 말이다. 어느 가족의 현재이자 추억할 과거, 견뎌야 할 미래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보며 가족의 의미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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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격감 최고! 다시 돌아온 마형사, 범죄도시2
?Rabbitgumi 입니다!
마형사가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범죄인도 때문에 베트남에 가면서 벌어지는 일인데요.
거기서 장첸보다 더한 악당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 영화는 마형사의 액션감을 극대화하고 유머도 레벨업을 했는데요.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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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죽을 날을 알려준다면 당신은 4% 안에 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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