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5-04-30 09:40:24
우주의 먼지임을 인정하지 않고 '나대는' 인간의 이야기
미키 17
이 영화의 배경은 비교적 간단하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고, 그 세력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지만 돈에 쫓겨 우주로 도망온 한 남자가 있다. 그저 사채업자에게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설명서를 읽지도 않고 매일 같이 죽는 선택을 하게 되는 미키, 여기서부터 그의 삶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죽음으로서 새로이 시작한다는 아이러니, 그를 보고 있자면 0이라는 숫자는 없다는 뜻도 될 수 있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키는 제로베이스의 인간의 표본 같았다. 그의 제로베이스 인생은 그의 제로에 가까운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삶을 이렇게 생각없이 사는 인간도 있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1.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
미키가 자신의 생명을 팔아 도망간 우주 행성을 가는 과정도 참 험난했다. 행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수많은 마루타 실험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쳇바퀴같은 죽음을 통해 그는 매일 새로이 태어난다. 그는 관념적 인간의 삶으로서는 죽은 것이 맞지만 과학기술이 너무 발전하다 못해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그의 정신은 죽었지만 육체는 복사할 수 있게 되어 복사한 육체에 데이터화된 정신을 주입시켜 하나의 멀쩡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메모리와 같은 것이고, 몸은 프린터기에 복사되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그런 개념으로 인간을 다시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다시 태어날 것이기에 죽음이 더 이상 슬프지 만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당장 내가 차에 치여 죽더라도 내일이면 나의 삶은 다시 시작될 것이기에, 하루하루 삶도 대단히 소중해지지도 않고, 매일 매일이 가지는 의미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유한성이다. 세상의 시간은 무한하지만 인간의 삶 속의 시간은 유한하다. 나의 육신이 다할 때까지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키처럼 내일 죽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아니면 안되는 일 같은 건 없어진다. 삶에 대한 간절함과 기한이 사라지니 삶을 사는 낙이 없어질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무형의 가치들이 의미가 없어진다면, 인간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저 존재로서 의미가 있지 않고, 미키처럼 도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에 미키를 보면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한다. 애초에 미키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뜻인데, 인간성이 상실해가는 인간의 세상에서는 상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케네스 마샬과도 같은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겠지. 선동과 옐로우 저널리즘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연극적인 설정, 하지만 그래서 더 명확한, 하지만 그래서 더 진부할 수도 있는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나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상 속 캐릭터들은 굉장히 단면적이다. 생각보다 입체적인 심리를 그리는 작품을 하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모든 인물이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 못해 단편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데, 항상 그 지점을 인지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중에도 내가 그걸 단점이라고 인지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미치자, 왜 그럴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본다면, 그의 영화는 일종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아서, 캐릭터들의 깊은 심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서사 안에서 역할이 가진 존재 이유가 명확하다. 빌런은 처음부터 끝까지 빌런으로 남고, 주인공은 자신의 퀘스트를 깨는 것에 집중한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잘 짜여진 정말 각본 그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선인은 선인으로서 존재하고, 악인은 악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답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사 서사의 이유가 깔끔하니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감정이입을 하면 되는 타이밍에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소위 어렵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특화되어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항상 그의 영화에 흥미를 느껴왔었고 진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공식이 따로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방식이 반복되다 보니, 분명히 재밌게 잘 보고 나왔고, 후련한데 뭔가 아쉬운 느낌이 남는 것은 이런 감독의 공식이 내 머릿속에 박혔기 때문일까. 이건 확실히 관점의 차이인 것 같다. 분명히 재밌게 보고 나왔음에도 한 켠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감독의 스타일을 간파하게 되었다는 나의 오만 때문일까. 이 생각을 하는 내가 오만하긴 한 것 같지만서도 어딘가 아쉬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총평
인간이 가장 악한 이유가 이 영화에 다 있다. 어딜가든 인간이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행성에 가서도 침입자인 주제에 원주민을 더럽게 생각하는 그 오만, 하층민은 다이어트시키면서도 상류층은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계급주의 가스라이팅의 향연, 이걸 보면 인간은 이렇게 모두가 종잡을 수가 없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면 인간이 종교에 빠지는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정성을 해소해줄 절대자를 언제나 찾아왔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불안정성을 해소시켜준 사람 혹은 이전에 해소시켜줬다는 전해지는 사람 등의 말을 잘 믿어버리고 이들이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절대자의 말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구원할 수 밖에 없는 건 본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며 그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모두 사이비종교에 홀린 사람들 같았고 그 중 미키의 여자친구와 같은 반란세력은 그 종교의 허점을 알고 비로소 자신을 삶을 주체적으로 보기 시작한 세력 같았다. 마치 사이비종교의 실체를 알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다만, 이들의 경우 우주선은 타버렸고 지구도 별반 희망을 걸 게 없으니 지도자는 몰아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몇 가지 키워드가 생각나는데 하나가 해학이다. 그의 작품은 사회현상을 해학적으로, 재치 있게 다룬다. 이번 영화도 그랬다. 그래서 다음 영화도 개봉하면 보러는 갈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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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과 스토리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습니다.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로드하우스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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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 매버릭, 실감나는 전투기 액션을 담다!
?Rabbitgumi 입니다!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습니다.
1986년에 1편이 나온 이후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이죠.
톰 크루즈의 매력이 돋보였던 1편인데, 이번 2편에는 그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요?
전투기 액션이 많이 담겼고 실제로 배우들도 전투기를 조종했다고 하죠.
여러가지 제약이 많았을텐데 과연 멋지게 담아냈을까요?
제가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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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블패티>
세상을 향한 이들의 뒤집기 한.판.승!
입 찢어지게 햄버거를 먹던 너냉삼에 소맥을 찰지게 말던 너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이들의멋진 도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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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포자들> 메인 예고편
- “핸드폰이 사라지고, 나는 N번째가 되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남자 ‘도유빈’(박성훈) 자신의 오랜 친구 ‘공상범’(송진우)의 유혹에 이끌려 클럽에서 잊지 못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사라진 전날 밤의 기억과 핸드폰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수화기 너머 범인은 3천 3백만 원을 구해오지 않으면 ‘그’ 영상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하는데… 오늘 밤,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잠금해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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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하게 일상을 담는 카메라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던 박강아름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만들었다. 촬영 중 성만과 인연이 닿아 부부로서의 삶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아름은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싶었고 성만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하지만 프랑스에 적응한 아름과 다르게 성만은 낯선 타지에 적응하지 못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고 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사 노동뿐이었다. 결국 주부 우울증이 생긴 성만을 위해 아름은 집에서 운영하는 ‘외길식당’을 제안한다. 외길식당을 찾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아름에게 결혼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게 했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금 카메라를 든다.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싱글을 졸업한 박강아름 감독이 가족으로서 새 출발을 담고 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시작한 새 출발이지만 매번 즐거운 일만 있을 순 없다. 특히 사적 다큐멘터리를 다루는만큼 박 감독의 작품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까지 카메라의 담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넘어선 진실함을 느끼게 된다.
박강아름 감독은 <박강아름 결혼하다>로 30대의 자신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담을 예정이다. 자녀 보리와 반려견 슈슈의 이야기인 ‘슈슈와 보리’라는 차기작 또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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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나사렛 예수>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비교
영화「Jesus of the Nazareth」와 「Jesus Christ Superstar」비교 분석하기
영화「Jesus of the Nazareth」(1977)와 「Jesus Christ Superstar」(1973)는 모두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전자는 예수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으며, 후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7일 전부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 편의 영화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형식, 그리고 성서와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해석의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고전에 현대적 입맛을 약간 가미한 현대 클래식 음악과 고전을 철저하게 현대적 관점에 따라 과감하게 변용한 록 음악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두 작품은 성서라는 하나의 원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각각 영화의 의도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썩 재미있는 비교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성서 속의 인물들이 각각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였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사랑받아온 예수와 온 세상 사람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갸롯 유다였다.
Jesus: 신의 아들이냐, 비극적 인간 영웅이냐!
먼저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Jesus of the Nazareth」의 예수는 성서 속 인물과 꽤 일치한다. 그는 거룩하고 자애로우며 자비심이 넘친다.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설파한다. 제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그의 숭고함에 매료된다. 이를테면 그는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다.
반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그려진 예수는 이와 닮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그는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나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비탄 속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권세와 소임을 버거워한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Heal yourselves!’라고 외치는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기 만한 성자로서의 예수와는 썩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러한 막대한 책임에 고통스러워한다.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유일한 위안을 청한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도리어 그에게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 심지어는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통해 예수라는 존재와 관객 혹은 신자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예수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하나님에게) ‘왜 제게 독잔을 내리시나이까!’하고 원망한다. 죽음 앞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그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극을 내리는 주체인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야기한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죽음과 삶 속에서 갈등하던 햄릿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예수는 단순히 인간의 껍질을 쓴 신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신성성과 인간성이 양립하는 어떤 비극적 영웅으로서 재탄생한다.
Judas: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한편 2천여 년의 세월에 걸쳐 악인으로 기록되어온 갸룟 유다에 대한 두 영화의 해석 역시 흥미롭다.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유다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성서 속에서 은전 30닢에 눈이 멀어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긴 도적이었던 유다는 영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악인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탈바꿈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의 유다는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예수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극 중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보면 유다의 예수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다가, 이내 베드로가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예수는 '네가 가장 복이 있구나'하고 베드로를 껴안는다. 이때 유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베드로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유다가 말이다. 이후 카메라는 점점 그들을 멀리 비추고, 스크린 너머에는 예수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유다, 오른쪽에는 베드로라는 극명한 대비가 보여 진다. 하나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죽어서도 예수의 뜻을 이어받은 가장 거룩한 성인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배신자, 다시 말해 가장 사악한 악인으로 기록되니 무척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유다의 시선은 흡사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승인 예수를 향한 유다의 순수한 숭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필자는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을 유다의 예수에 대한 ‘유아적인’ 애정과 지나치게 순진했던 이상에서 찾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다는 예수에 대한 어떤 어린아이 같은 애정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수가 설파한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앞으로의 유대가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그를 통해 이룩될, 해방된 유대를 그린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에 더욱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훌륭함과 거룩함을 증명해보이기를 바란다.
언뜻 그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이나 사실 이는 무척 단편적인 발상이다. 어린아이가 제 아버지의 유능함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의 시야는 좁았고 마음은 급했다. 한시바삐 유대의 평화적 해방을 도모하고 싶은데, 예수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만 갔으니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학자 출신이었던 것은 이러한 견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극 중에서 이야기했듯 그는 ‘목수와 어부의 일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태어나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하는 예수의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뜻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 유대백성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의 장기적인 안목을 유다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라’던 예수의 말씀은 유다의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서 속 유다의 악인으로서의 면모는 실제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제라’라는 새롭게 창조된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는 이러한 교활한 제라라는 인물을 통해 유다가 선인이었으며 제라를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의 음모에 넘어간 불쌍한 인물로 나타낸다. 예수가 잡혀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본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전 30닢을 돌려주겠으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를 조소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그가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Jesus Christ Superstar」의 유다 역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마찬가지로 유다를 동정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유다는 「Jesus of the Nazareth」에서보다 자신의 이상에 반하는 예수를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유다는 예수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몸을 닦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예수를 질책하는 한편, 예수의 존재로 인해 유대의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등, 다소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예수의 태도와는 대비되는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신적 존재가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인간(그 것도 예수를 배신한 악인으로 알려져 있는)이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앞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유다가 선인으로 표현되기 위해 ‘제라’라는 인물이 삽입되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유다는 ‘신(Jesus)의 뜻에 의해’ 예수를 죽이게 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인물로서의 자신을 어필한다. 으레 다른 성서를 기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수를 죽이게 된 죄책감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이때 "Poor Judas!"라고 외치는 앙상블이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이 영화의 전반에 울려 퍼지는 유다의 고뇌와 (배신의)결단, 그리고 후회 혹은 신에 대한 원망의 노래는 이러한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잘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 진실된 사랑을 행한 여성제자
이 밖에 성서나 「Jesus of the Nazareth」의 내용과는 달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것 또한 인상 깊었다. 전자의 작품에서 다소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마리아는 후자에서 예수에게 가장 진심어린 위로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그에게 가장 진실 된 사랑을 느끼는 여인으로 승격된다. 그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사람이자, 여느 열두 제자보다도 예수를 믿고 따랐던 여성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녀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는데, 마리아가 수행한 여러 가지 역할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애정은 아마 신에 대한 신앙과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과 인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리라고 사료된다.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인 감정으로 해석되기에는 그녀의 행동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비교: 클래식과 록 오페라
두 작품의 형식적인 차이는 이러한 각기 다른 관점의 해석에 걸맞게 나타난다. 「Jesus of the Nazareth」는 기독교 문화를 전도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성서의 내용을 살려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영화는 장장 6시간에 걸쳐 다소 엄숙하고 거룩한, 그러나 예수의 위대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려냈다. 이때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 약 하루 간 갈등하는 장면, 영화를 위해 창조된 인물인 제라, 선한 인물로서의 유다 등 영화적 장치와 현대적 재해석에 의한 약간의 변용이 나타난다.
한편, 「Jesus Christ Superstar」에서는 록 오페라의 이색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보다 대중이 성서에 접근하기 쉽도록 성서의 내용을 각색했다. 흥겨운 노래와 춤들, 그리고 현대적 복장과 소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리로 가게끔 한다. 이 과감한 시도는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과 맞물린다. 이때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현대적 요소들(건축물, 소품, 복장 등)은 스크린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가 현대의 이야기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데, 이는 분명히 의도된 장치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흰옷의 입은 유다는 예수의 존재와 희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는 비단 예수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두 작품에서 나타난 예수와 유다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놀랄만하다. 두 작품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선과 악의 차원에서의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성서의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번 상상해보자. 또 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밖에도 성서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것은 서양 문화권에서 그만큼 기독교 문화가 깊게 뿌리 박고 있음에 기인한다. 수 많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예수가 되기도 하고, 유다가 되기도 하며, 때론 막달라 마리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혹은 성서 그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서양 사회 전반을 즐겁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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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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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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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떠나야 하는, 떠나고 싶은, 떠나길 주저하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인구 200만이 채 안 되는 다민족 국가 코소보(Kosovo), 그저 ‘포효’하는 것이 최선인 세 암사자들 삶을 담아낸 영화 <암사자들의 포효하는 언덕>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감히 엿보려 한다.
ⓒ IMDb
영화는 제목처럼 스스로를 ‘암사자들’이라 칭하는 세 명의 여성이 포효하며 시작된다. 이들이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코소보’의 한 작은 외곽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 각자의 삶을 통해 뒤이어 보여진다. 영화에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가정 내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예타’와 가부장적 남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정에서 동생을 지키며 살아가는 ‘체’, 그리고 언뜻 화목한 것처럼 보이는 가정 속에 살아가며 현실에 순응해버린 ‘리’는 코소보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하여 각자의 가정을, 마을을 떠나고자 한다.
이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가족의 집에서, 본래의 의미를 잃은 버려진 수영장에서, 길가의 거친 언덕에서 만나 일상을 보낸다. 하릴없는 일상을 보내던 이들 앞에 파리 출신의 또래 여성 ‘레나’가 나타난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그녀가 평화롭게 읽고 있는 책은 ‘행복을 맛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의 '행복'을 맛보지 못한 이들은 현실을 벗어날 유일한 수단,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결국 "암사자들"이라는 이름의 갱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과 함께 마치 한 마리의 사자처럼 담을 기어오르는 이들의 모습은 그 어떤 사자보다 대담하고 강렬하다. 마을 여성들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매춘’을 택하지 않은 것 역시 이들의 투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대범하고도 무모한 ‘갱단’ 활동을 통해 세 명이 떠날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이 모였다. 그들은 이제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리’는 그 돈으로 마을에서 수근거릴 법한 고가의 차량을 구입한다. 마치 떠나길 주저하는 듯하다. 이들은 ‘리’가 무책임하게 구입한 재규어를 타고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꿈이었던 세계 여행은 ‘상황극’으로만 펼쳐질 뿐이다.
우리는 ‘암사자들’의 끝을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자유, 행복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이들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갱단’을 결성하고, 마트에서 카트를 타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바람을 맞는 등의 행위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말하는 ‘예타’와 어디든 여기보다 나을 거라 말하는 ‘체’, 역시 돌아올 거라 말하는 ‘리’. 떠나야 하는, 떠나고 싶은, 떠나길 주저하는 세 암사자들은 포효하는 잔상만 남긴 채 다시 '무리'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코소보의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른 영화였다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이 코소보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예시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한 여성이 식장으로 에스코트 당하고 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있는 결혼식장은 마치 동네 축제 같다. 코소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결혼식 현장은 코소보의 현실임과 동시에, 주인공들의 미래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코소보의 현실의 굴레는 코소보인들은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TV를 보고 편한 얼굴로 잠을 자는 모습만 비춰지는 ‘리’의 남동생들과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예타’의 여동생을 통해, 이 현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같은 시대의 다른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풀타임>은 24/7 투쟁하며 살아가는 ‘쥘리’의 삶을 통해 프랑스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멋진 세계>는 감옥에서 출소한 야쿠자 ‘미카미’가 사회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통해 차별이 가득한 현실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를 직시하지 않는 이상, 이 현실이 곧 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창'이기도 하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매분 매초 만들어지는 국가와는 달리,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의 배경이 되는 '코소보'와 같은 국가의 창은 희소하며 그 크기도 작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배우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2001년생의 젊은 감독의 첫 장편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를 통해 우리는 드디어 문제를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보여주고자 한 현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며, 코소보 혈통의 그녀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르와나 바즈라미
코소보, 프랑스 | 2021 | 84min | 15 + | DCPcolor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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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2023년의 관객에게 묻는 전쟁의 의미
마지막 전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순신(김윤석)이다. 어느덧 전쟁 7년 차. 조선과 왜 나라(일본) 이젠 지쳤다. 희생자가 많은 조선. 이는 조선과 연합을 맡은 명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선조와 궁궐 안. 문신들은 전쟁을 금방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조선 내부에서 전쟁에 대한 온갖 논의가 오간다. 하지만 대부분 ‘전쟁 후 조선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뿐이다. 답답한 이순신. 이 왜 나라 무리들을 그대로 놔두다간 화가 돌아올 것 같다. 이순신의 동상이몽이 조선 궁궐 내부의 신하들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고니시(이무생)와 시마즈(백윤식)는 다이묘의 입장에서 대립하는 관계다. 이 둘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있는 군대를 철수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시마즈와 고니시. 둘은 이순신만은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조선과 연합을 맺은 명나라의 장수들도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 의리라면 죽고 못 사는 등자룡(허준호). 등자룡은 조선에게 우호적이었지만 진린(정재영)은 뭔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전쟁을 지속하는 게 맞을까? 진린의 머릿속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전운이 감도는 조선. 세 나라의 마지막 전투가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다!
신선한 시도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느꼈던 가장 큰 장점은 신선함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전작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의 첫 번째 목표는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르다. 짜릿한 액션 쾌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처럼 멋진 이순신 장군이 나쁜 놈들 때려잡는 액션물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영화의 목표는 뭘까? 바로 반전(Anti-war) 영화다. 이 목표 아래에서 본작은 전작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가령 전작에서 1부는 2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후반부 액션과 거북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본작은 다르다. 본작은 사실상 1,2부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사들의 생사여부가 장군들 몇의 판단에 따라 달렸다는 아이러니를 묘사해야 하고, 이 ‘이순신 3부작’의 핵심 키워드인 ‘의’라는 가치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작이 단순히 서사의 인과관계때문에 사용된 것과는 정반대다. 그리고 이 1부가 전개되는 도중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선택이 흥미롭다. 이 캐릭터들은 전쟁을 형상화하고 있다. 입체적인 특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전쟁 이기면 승리에 기쁠 것 같지만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복잡미묘함을 묘사한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
이 영화가 반전영화로 기획된 근거를 다방면으로 읽을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는 카메라 시점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이순신 장군의 전략가적인 면모에 강세를 두지 않는다. 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를 처음 기획할 때에 제작하는 입장에서 염두한 부분일 것이다. 일단 전작 2편과는 다르게 이 노량해전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난중일기>에서 전장의 상황을 직접 묘사하던 이순신 장군이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 적다는 한계가 영화의 흐름과도 이어진다. 이야기 안에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많이 들어가는데, 빈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흐름을 상상력을 통해 영화의 에너지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묘사하는데도 안성맞춤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타국 병사들을 해치우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들어간다면 영화의 접근이 1차원적이게 된다. ‘임진왜란은 나쁜 놈을 때려잡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감동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따라간 것이 전작 <명량>과 <한산 : 죽음의 바다>다. 영화가 굳이 같은 방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라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최후까지 무게감 있게 연출하는 것이 나을까? 영화는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생명의 무게감을 후반부까지 잇는 것이다.
비단 카메라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개 상으로도 반전영화를 가리키는 소재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전작 두 편의 진주인공이었던 어떤 것이 등장/퇴장하는 방식, 병사 개개인에게 동기부여가 들어간 것, (아마 불호 평이 압도적으로 많을) 북과 꿈, 영화의 가장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캐릭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등 이 영화는 전쟁의 비참함을 내내 머금고 있다. 이는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이라는 위인으로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읽힌다. 글쓴이는 이 시도가 신선했다고 생각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나 <1917>에서 봤던 서양 전쟁 영화의 씁쓸함이 이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하는 존재감
이 영화의 시마즈와 진린의 존재감은 주인공 이순신만큼 강력하다. 시마즈는 고니시과 함께 이 영화를 이끄는 빌런이다. 영화는 이 시마즈를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악마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특별하다. 우리가 아는 악마는 어떤 존재일까? 일단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악은 우리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마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이 특성을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시마즈가 조-명 연합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 입 밖에 내는 대사와 이 인물의 마지막 장면은 완벽하게 대비되는데, 이를 염두하고 영화를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정재영 배우가 맡은 진린 캐릭터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순신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진린이 주인공을 묘사한다?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문장이지만 글쓴이는 다른 측면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취한 전략가적 면모를 적군이 아닌 동맹의 연합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린의 과제다. 그리고 정재영 배우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영향받은 모습을 강한 감정표현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글쓴이는 이 캐릭터 사용법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전작 <한산 : 용의 출현>에서 변요한 배우가 맡은 ‘와키자카’와 비슷하다. 다만 등장인물이 처한 처지가 적군과 동맹군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연기하는 방식도 차이점이 있다. 변요한 배우의 와키자카가 순수한 전쟁광을 맡았다면 진린은 기회주의적이지만 그 근거가 어느 정도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차이점이다. 글쓴이가 두 캐릭터 중 더 정이 들었던 건 진린이다. 와키자카가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던 반면 진린은 조선 입장에선 박쥐 같은 느낌이지만 명의 입장에선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물 연출에 있어서 김한민 감독이 더 좋은 방식을 고른 지점이다.
다만 글쓴이는 등자룡의 캐릭터가 진린과 시마즈에 비해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이 인물의 작중 행보는 실제 인물을 그대로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인물을 이렇게 묘사했던 것도 나름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이야기상에서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면 이 캐릭터가 주는 정서의 힘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냥 이순신과 친해서? 그래 보이진 않다. 뭔가 가치관과 어그러지는 것이 있어서? 그런 묘사도 없어서 글쓴이가 상영관에 있을 때는 갑자기 전개가 빨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안에서 이 캐릭터가 겪는 사건은 거대한데 마음은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니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의’가 ‘왜?’가 되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가진 단점 중 하나가 사족이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에서 김한민 감독이 진짜 전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 사족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며 이런 요소들이 이순신 장군이 가진 숭고함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겠다는 김한민 감독의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령 이순신이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누군가에게 서찰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한다. 이 서찰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인물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이순신 장군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또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소리, 러닝타임 다 끝나고 올라가는 쿠키영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반복되는 소리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듯 이순신 장군의 직업윤리가 후세대에도 빛을 발했다는 것을 청각적인 요소로 보여준 것이다. 또 쿠키 영상 역시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이 쿠키 영상도 역사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쿠키 영상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지를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를 보는 폭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김윤석의 이순신
김윤석 배우의 이순신은 3부작 중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민식 배우와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은 장군으로서의 위엄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이다. 가령 <명량>에서는 이순신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군대를 격려하는 장면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산 : 용의 출현>에서는 정적인 구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 정적인 구도는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이다. 멋진 박해일 배우와 진부한 플롯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작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는 정적이고 감정전달의 폭이 넓고 깊은 이순신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에서 ‘신파극이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부분이 있다. 이 부분 연기도 김윤석 배우가 보여준 역량이 아니었다면 정말 신파극처럼 보이기 쉬웠다. 그리고 김윤석 배우는 목소리 톤을 내는 방식으로도 이순신을 표현한다. 진린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런데, 일정한 톤으로 이순신의 결기를 표현하는 좋은 연기였다. 이는 아수라장인 전쟁터에서 감정표현이 드물다는 인물의 특성을 통일성 있게 끌고 가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걸 기대하고 간다면
이 영화에 대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액션이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반전이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출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김한민 감독과 (나와 같은) 일부 영화팬들의 입장이다. 당연히 이순신, 그것도 김윤석의 이순신이 멋진 액션으로 왜 나라를 해치우는 액션물을 기대하고 갔다면 실망한다. 롱테이크? 조명? 촬영? 다 처절한 병사들의 모습만 보여줄 뿐 엄청난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글쓴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대중적으로 큰 흥행을 할 영화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 전작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에서 구사했던 간단한 플롯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김한민 감독이 두는 선택이 좀 오그라들 수도 있다. 1부는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지루하게 느끼기 쉽다. 그러나 후반부는 또 다르다. 쿠키와 엔딩이 그런데, 약간 과해보이기도 하다. 글쓴이도 이 부분은 감독이 놓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명량>에서 국수주의적 대사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김한민 감독이, 과연 이 선택 말고 다른 건 없었을까? 싶다면 글쓴이 입장에서도 ‘아니요’다. 차라리 그냥 존재만 언급하고 끝난다면 더 이야기가 입체적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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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과 스토리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습니다.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로드하우스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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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 매버릭, 실감나는 전투기 액션을 담다!
?Rabbitgumi 입니다!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습니다.
1986년에 1편이 나온 이후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이죠.
톰 크루즈의 매력이 돋보였던 1편인데, 이번 2편에는 그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요?
전투기 액션이 많이 담겼고 실제로 배우들도 전투기를 조종했다고 하죠.
여러가지 제약이 많았을텐데 과연 멋지게 담아냈을까요?
제가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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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블패티>
세상을 향한 이들의 뒤집기 한.판.승!
입 찢어지게 햄버거를 먹던 너냉삼에 소맥을 찰지게 말던 너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이들의멋진 도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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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포자들> 메인 예고편
- “핸드폰이 사라지고, 나는 N번째가 되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남자 ‘도유빈’(박성훈) 자신의 오랜 친구 ‘공상범’(송진우)의 유혹에 이끌려 클럽에서 잊지 못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사라진 전날 밤의 기억과 핸드폰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수화기 너머 범인은 3천 3백만 원을 구해오지 않으면 ‘그’ 영상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하는데… 오늘 밤,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잠금해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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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하게 일상을 담는 카메라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던 박강아름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만들었다. 촬영 중 성만과 인연이 닿아 부부로서의 삶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아름은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싶었고 성만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하지만 프랑스에 적응한 아름과 다르게 성만은 낯선 타지에 적응하지 못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고 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사 노동뿐이었다. 결국 주부 우울증이 생긴 성만을 위해 아름은 집에서 운영하는 ‘외길식당’을 제안한다. 외길식당을 찾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아름에게 결혼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게 했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금 카메라를 든다.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싱글을 졸업한 박강아름 감독이 가족으로서 새 출발을 담고 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시작한 새 출발이지만 매번 즐거운 일만 있을 순 없다. 특히 사적 다큐멘터리를 다루는만큼 박 감독의 작품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까지 카메라의 담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넘어선 진실함을 느끼게 된다.
박강아름 감독은 <박강아름 결혼하다>로 30대의 자신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담을 예정이다. 자녀 보리와 반려견 슈슈의 이야기인 ‘슈슈와 보리’라는 차기작 또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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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나사렛 예수>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비교
영화「Jesus of the Nazareth」와 「Jesus Christ Superstar」비교 분석하기
영화「Jesus of the Nazareth」(1977)와 「Jesus Christ Superstar」(1973)는 모두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전자는 예수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으며, 후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7일 전부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 편의 영화는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형식, 그리고 성서와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해석의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고전에 현대적 입맛을 약간 가미한 현대 클래식 음악과 고전을 철저하게 현대적 관점에 따라 과감하게 변용한 록 음악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두 작품은 성서라는 하나의 원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각각 영화의 의도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썩 재미있는 비교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성서 속의 인물들이 각각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였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사랑받아온 예수와 온 세상 사람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갸롯 유다였다.
Jesus: 신의 아들이냐, 비극적 인간 영웅이냐!
먼저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Jesus of the Nazareth」의 예수는 성서 속 인물과 꽤 일치한다. 그는 거룩하고 자애로우며 자비심이 넘친다.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설파한다. 제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그의 숭고함에 매료된다. 이를테면 그는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다.
반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그려진 예수는 이와 닮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그는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나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비탄 속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권세와 소임을 버거워한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Heal yourselves!’라고 외치는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기 만한 성자로서의 예수와는 썩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러한 막대한 책임에 고통스러워한다.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유일한 위안을 청한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도리어 그에게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 심지어는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통해 예수라는 존재와 관객 혹은 신자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다.
예수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하나님에게) ‘왜 제게 독잔을 내리시나이까!’하고 원망한다. 죽음 앞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그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극을 내리는 주체인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야기한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죽음과 삶 속에서 갈등하던 햄릿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예수는 단순히 인간의 껍질을 쓴 신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신성성과 인간성이 양립하는 어떤 비극적 영웅으로서 재탄생한다.
Judas: 어느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이야기
한편 2천여 년의 세월에 걸쳐 악인으로 기록되어온 갸룟 유다에 대한 두 영화의 해석 역시 흥미롭다.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유다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성서 속에서 은전 30닢에 눈이 멀어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긴 도적이었던 유다는 영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악인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탈바꿈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의 유다는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예수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극 중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보면 유다의 예수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다가, 이내 베드로가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예수는 '네가 가장 복이 있구나'하고 베드로를 껴안는다. 이때 유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베드로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유다가 말이다. 이후 카메라는 점점 그들을 멀리 비추고, 스크린 너머에는 예수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유다, 오른쪽에는 베드로라는 극명한 대비가 보여 진다. 하나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죽어서도 예수의 뜻을 이어받은 가장 거룩한 성인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를 배반한 배신자, 다시 말해 가장 사악한 악인으로 기록되니 무척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유다의 시선은 흡사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승인 예수를 향한 유다의 순수한 숭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필자는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을 유다의 예수에 대한 ‘유아적인’ 애정과 지나치게 순진했던 이상에서 찾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다는 예수에 대한 어떤 어린아이 같은 애정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수가 설파한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앞으로의 유대가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그를 통해 이룩될, 해방된 유대를 그린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에 더욱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훌륭함과 거룩함을 증명해보이기를 바란다.
언뜻 그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이나 사실 이는 무척 단편적인 발상이다. 어린아이가 제 아버지의 유능함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의 시야는 좁았고 마음은 급했다. 한시바삐 유대의 평화적 해방을 도모하고 싶은데, 예수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만 갔으니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학자 출신이었던 것은 이러한 견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극 중에서 이야기했듯 그는 ‘목수와 어부의 일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태어나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하는 예수의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뜻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 유대백성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예수의 장기적인 안목을 유다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라’던 예수의 말씀은 유다의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서 속 유다의 악인으로서의 면모는 실제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제라’라는 새롭게 창조된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Jesus of the Nazareth」에서는 이러한 교활한 제라라는 인물을 통해 유다가 선인이었으며 제라를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의 음모에 넘어간 불쌍한 인물로 나타낸다. 예수가 잡혀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본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전 30닢을 돌려주겠으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를 조소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그가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Jesus Christ Superstar」의 유다 역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마찬가지로 유다를 동정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유다는 「Jesus of the Nazareth」에서보다 자신의 이상에 반하는 예수를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유다는 예수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몸을 닦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예수를 질책하는 한편, 예수의 존재로 인해 유대의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등, 다소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예수의 태도와는 대비되는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신적 존재가 인간적으로 그려지고 인간(그 것도 예수를 배신한 악인으로 알려져 있는)이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앞서 「Jesus of the Nazareth」에서 유다가 선인으로 표현되기 위해 ‘제라’라는 인물이 삽입되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유다는 ‘신(Jesus)의 뜻에 의해’ 예수를 죽이게 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인물로서의 자신을 어필한다. 으레 다른 성서를 기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수를 죽이게 된 죄책감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이때 "Poor Judas!"라고 외치는 앙상블이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이 영화의 전반에 울려 퍼지는 유다의 고뇌와 (배신의)결단, 그리고 후회 혹은 신에 대한 원망의 노래는 이러한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잘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 진실된 사랑을 행한 여성제자
이 밖에 성서나 「Jesus of the Nazareth」의 내용과는 달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진 것 또한 인상 깊었다. 전자의 작품에서 다소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마리아는 후자에서 예수에게 가장 진심어린 위로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그에게 가장 진실 된 사랑을 느끼는 여인으로 승격된다. 그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사람이자, 여느 열두 제자보다도 예수를 믿고 따랐던 여성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녀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는데, 마리아가 수행한 여러 가지 역할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애정은 아마 신에 대한 신앙과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과 인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리라고 사료된다.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인 감정으로 해석되기에는 그녀의 행동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비교: 클래식과 록 오페라
두 작품의 형식적인 차이는 이러한 각기 다른 관점의 해석에 걸맞게 나타난다. 「Jesus of the Nazareth」는 기독교 문화를 전도함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성서의 내용을 살려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영화는 장장 6시간에 걸쳐 다소 엄숙하고 거룩한, 그러나 예수의 위대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려냈다. 이때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 약 하루 간 갈등하는 장면, 영화를 위해 창조된 인물인 제라, 선한 인물로서의 유다 등 영화적 장치와 현대적 재해석에 의한 약간의 변용이 나타난다.
한편, 「Jesus Christ Superstar」에서는 록 오페라의 이색적인 형식을 차용하여 보다 대중이 성서에 접근하기 쉽도록 성서의 내용을 각색했다. 흥겨운 노래와 춤들, 그리고 현대적 복장과 소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리로 가게끔 한다. 이 과감한 시도는 성서 속의 인물들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과 맞물린다. 이때 「Jesus Christ Superstar」에서의 현대적 요소들(건축물, 소품, 복장 등)은 스크린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가 현대의 이야기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데, 이는 분명히 의도된 장치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흰옷의 입은 유다는 예수의 존재와 희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는 비단 예수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두 작품에서 나타난 예수와 유다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놀랄만하다. 두 작품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선과 악의 차원에서의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성서의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번 상상해보자. 또 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밖에도 성서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것은 서양 문화권에서 그만큼 기독교 문화가 깊게 뿌리 박고 있음에 기인한다. 수 많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예수가 되기도 하고, 유다가 되기도 하며, 때론 막달라 마리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혹은 성서 그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서양 사회 전반을 즐겁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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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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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