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6-17 11:50:26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인사이드 아웃2>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 돌파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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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자의 길을 택하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운이 필요하다. 그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에서 얻어볼 수 있는 일종의 보너스 점수 같은 것이다. 그렇게 운이 조금 따라줘야 자신이 원하는 운명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이 들어오는 때를 알기 위해 사주나 점을 보고 기도를 한다.
그런 식으로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우리는 그렇게 좋은 시기나 불운의 시기를 듣고 해당 시기가 되면 그것에 맞추어 행동한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처럼 준비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진짜 사주나 점에서 들었던 것과 같이 비슷한 결과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넘기지 못한다. 자꾸만 신경 쓰고 또 신경 쓰면서 좀 더 나은 미래가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영화 <듄> 시리즈의 주인공 폴(티모시 샬라메)은 미래에 대한 환영을 본다. 꿈속에서 혹은 스파이스가 몸속으로 들어갔을 때마다 특정한 장면들을 보고 그것이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좋은 모습, 나쁜 모습이 모두 있는 그 환영은 폴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그런 미래의 비전이나 신호에 예민하다. 마치 자신들이 느끼는 혹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미래의 예언이 모두 실현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 의해 각기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감정 - 폴 무앗딥 우슬 아트레이데스의 두려움
폴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폴, 무앗딥, 우슬, 아트레이데스 같이 그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많다. 그만큼 그에게 많은 짐이 주어졌다고 볼 수 도 있다. 몰락한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복수를 하고 그 이후 다시 가문을 일으킬 때까지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다. 게다가 그는 사막에 사는 일부 프레멘들에게 예지 된 구원자일 거라는 기대도 받는다. 그가 어렵게 살아남은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가문에게도, 프레멘들에게도 구원자가 되라는 보이지 않는 강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꿈에서 미래를 본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결말이 찾아오는지. 미래의 모습에서 전쟁을 보고 민중들의 고통을 본다. 그건 결국 자신이 전면에 나서 복수를 하고 우주 전쟁들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이 예지자로서, 조직의 영웅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굉장히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건 자신이 가져올 질병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그 미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일종의 질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폴은 분명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영민하고 용기가 있다. 무엇보다 모든 일에 침착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안다. 이야기 속에 폴이 등장할 때마다 그가 좋은 리더라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런 마음과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가 좋은 영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어떤 계시를 받고 전면에 나선다. 그리고 그가 예지에서 본 여러 상황들을 미리 예측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사람들을 전쟁 속으로 이끈다.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그의 뒤를 따르지만, 그건 결국 파멸의 한가운데로 모두를 던져놓는 건 아니었을까? 폴이 느끼고 있던 그 두려운 상황처럼 말이다.
두 번째 감정 - 레이디 제시카의 두려움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는 아들 폴을 지키려 애쓴다. 그녀는 암막에서 모든 가문을 조종하고 있는 베네 게세리트다. 베네 게세리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프레멘들에게 언젠가 구원자 리싼 알가입이 나타나 모두를 구원할 거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마치 종교적 믿음처럼 그것은 남부 지역의 프레멘들에게 신앙이 되었다. 그 상황 속에서 등장한 폴은 그들에게 거의 완벽한 구원자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코넨 가문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외지인, 그리고 사막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정신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폴은 그런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증명하고 있었다.
레이디 제시카는 자신의 아들을 잃을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두려움은 <듄> 1편에서 폴이 헬렌 모히암(샬롯 램플링)에게 능력을 시험받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제시카는 아들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까 봐 손을 벌벌 떨며 기도한다. 이 두려움은 파트 2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녀는 프레멘들이 머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바로 프레멘들의 대모가 되기 위해 일종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녀는 신비한 물을 마시고 어떤 비전을 본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는 단호함이 있다. 그 단호함을 만드는 건, 자신의 아들인 폴을 살려야겠다는 위기의식이다. 아들을 진짜 예언된 영웅으로 만들지 않으면 폴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제시카는 아주 단호하게 아들에게 영웅이 되는 길을 가라고 이야기한다.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깨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이 두려움의 큰 축을 지탱하고 있다. 폴과 제시카 모두 미래를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런 미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세 번째 감정 - 챠니의 두려움
챠니(젠데이야 콜먼)는 사실 구원자 혹은 영웅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는 폴이 처음 프레멘 집단에 들어올 때부터 그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적응 능력과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믿을 수 있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연다. 챠니는 폴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지만 챠니에게 폴은 구원자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프레멘 집단에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폴이지만 챠니에겐 그저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폴이 가진 두려움에 대해서 챠니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하코넨을 이겨내려면 결국 폴이 원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챠니도 승리를 위해 같이 공격을 하길 원하지만 폴이 본격적으로 신적인 구원자의 행동을 보이자 챠니는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하는 폴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고 그건 반항으로 이어진다. 모든 프레멘이 폴을 구원자로 인정했지만 챠니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영화 후반부 챠니의 눈빛은 실망감으로 가득하다. 결국 폴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구원자의 신화에게 연인을 빼앗겼다는 분노. 챠니의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에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폴의 복수가 완성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서 챠니는 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건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동정심과 분노가 섞여있다. 어쩌면 챠니의 이 복잡한 감정이 앞으로 이어질 다음 이야기에서 폴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폴을 이해하고 또 사랑하는 챠니는 폴의 미래를 그렇게 받아들인다.
영화 <듄 파트 2>는 장엄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이번 파트 2에서 주인공 폴과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구원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폴은 자신이 그 두려움을 직접 감당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든다. 영웅이 짊어져야 할 짐이 꽤나 무겁게 느껴진다. 그의 두려움은 뛰어난 미장센과 좋은 상상력으로 구성된 세계에 그대로 담겼다. 여기에 영화음악을 담당한 한스 짐머의 웅장한 음악이 그 장엄한 분위기를 더 고조시킨다.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폴 아트레이데스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그가 꿈속에서 보던 장면들이 그대로 이어질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다른 결말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암울한 미래를 보고서도 결국 그 길을 선택한 폴의 결정을 보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가 이내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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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넷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조지밀러 감독 - "분노의 도로가 성공한다면, 나는 다른 두 개의 스토리가 더 남아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9년 만의 신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 X 크리스 헴스워스 극강의 조합!
조지밀러 감독의 광기의 액션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비롯한 신작 같이 만나보아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Furiosa: A Mad Max Saga
개요: 액션 | 미국 | 148분
감독: 조지 밀러
출연: 안야 테일러 조이, 크리스 햄스워스
개봉: 2024.05.22.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시놉시스
문명 붕괴 45년 후, 황폐해진 세상 속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풍요가 가득한 ‘녹색의 땅’에서 자란
‘퓨리오사’는 바이커 군단의 폭군 ‘디멘투스’의 손에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가족도 행복도 모두 빼앗기고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퓨리오사’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생 전부를 건 복수를 시작하는데... ‘매드맥스’ 시리즈의 전설적인 사령관 ‘퓨리오사’의 대서사시 마침내 분노가 깨어난다!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18x2 Beyond Youthful Days
개요: 멜로/로맨스 | 일본 | 124분
감독: 후지이 미치히토
출연: 허광한, 키요하라 카야
개봉: 2024.05.22.
배급: ㈜쇼박스
시놉시스
“만일 그때 너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면 지금의 난 달라졌을까?” 18년 전의 대만 타이난.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 ‘지미’는, 배낭여행 중 잠시 일자리를 찾아 온 일본인 ‘아미’를 만난다. 천진난만한 그녀와 지내는 동안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이 자라는 ‘지미’. 그러나, 돌연 ‘아미’가 귀국을 하게 되고 갑작스런 이별에 충격을 받은 ‘지미’에게 ‘아미’는 서로의 꿈을 이룬 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떠난다.
“나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 시간이 지나 현재. 타이페이에서의 성공한 삶에 지쳐 고향에 돌아온 ‘지미’는, 예전에 ‘아미’로부터 받은 그림엽서를 발견한다. 첫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나고 자란 일본으로의 여행을 결심하는 ‘지미’. 도쿄부터 가마쿠라, 나가노, 니가타 그리고 ‘아미’의 고향 타다미로 향하는 도중 예기치 않았던 소중한 만남을 되풀이하며 ‘지미’는 ‘아미’와 보냈던 그 여름의 나날들을 떠올린다. 이윽고 다다른 ‘아미’의 고향에서 ‘지미’가 알게 된 18년 전 ‘아미’의 진짜 마음이란...
별처럼 빛나는 너에게 더무비-일섬일섬량성성
Shining for One Thing
개요: 판타지, 멜로/로맨스 | 중국 | 107분
감독: 진소명, 장반
출연: 굴초소,장자닝 등
개봉: 2024.05.22.
배급: 워터홀컴퍼니㈜
시놉시스
2010년 여름, 온 우주가 네 눈에 숨어있어. 짝사랑해 온 ‘린베이싱’과 함께하기 위해 달착륙 기원 콘서트 자원봉사를 하게 된 ‘장완선’. 수능이 끝난 후 ‘장완선’은 드디어 ‘린베이싱’에게 고백할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 둘 추억을 쌓으며 가까워지던 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친다. 슬픔에 빠져 있던 ‘장완선’은 휴대폰 속 ‘린베이싱’의 이름을 찾아 그녀에게 보내지 못했던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그 순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엇갈린 시공간 속 너의 곁에 머물고 싶어.
스텔라
Stella. A Life.
개요: 드라마 | 독일 | 121분
감독: 킬리언 리드호퍼
출연: 폴라 비어, 야니스 니에브외너 등
개봉: 2024.05.22.
배급: ㈜뮤제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미국 진출을 꿈꾸던 촉망받는 재즈 가수에서 신분증 위조 브로커, 나치의 비밀 요원까지. 1940년대 독일을 집어삼킨 광기 속에 극한으로 치닫는 한 여인의 일생. 빛나던 별에서 죽음의 블랙홀이 된 ‘스텔라 골드슐락’. 그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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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성범죄를 다루는 윤리적인 방식
6월 15일,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신도림 테크노마트는 여전히 조용하지만 12층 씨네큐는 제법 소란했다. 어린이영화제인만큼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어린이들을 많이 봤다.
앞서 <키즈 크리에이티브2>를 관람하고 나와 라운지에 앉아 있었는데, 대략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내렸다. 어린이영화제에 어린이가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임에도, 어른 사회에 절여진 탓인지 '이 어린이들이 무슨 영화를 보는 거지, 나랑 같은 영화는 아니겠지' 등의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그러고서 아, 이건 어린이영화제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이혐오를 했구나 싶었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는 '노 키즈 존'이 만연한 이 땅에서, '예스 어린이 존'을 표방한다. 우리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하다고 해서 얼마나 이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치부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내가 가는 카페, 영화관, 식당에 와서는 안 되지만, 뭔가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0린이'라고 부르는, 모순적이고 자기애적인 어른들도 이제는 좀 성장해야 할 때이다.
<오팔>은 카리브해 출신의 알랭 디바르 감독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러닝타임이 85분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다. 영화의 배경은 카리브해처럼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왕국은 마법으로 유지되는데, 마법의 근원은 공주 '오팔'에게 있다. 오팔이 행복하면 마법의 기운도 세지고, 불행하면 마법의 기운이 약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꽃들이 시들시들 죽어간다. 세계를 관장하는 신, 이로코는 마법의 힘이 약해진 것은 공주에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주는 성에 갇혀 있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지만, 나가는 것은 열쇠를 가진 자만 가능하다. 공주에게는 열쇠가 없다. 매일 탈출 계획을 세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공주가 탈출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밤중에 공주의 방에 찾아와 마법을 훔쳐간다. 공주는 고통스러워하며, 빌고 애원하지만 아버지는 그래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괴물과 싸우려면 너의 마법이 필요하다, 네가 마법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등의 이유로 공주의 마법을 훔친다.
영화 시작 전 감독 인터뷰가 짤막하게 나왔는데, 감독은 이 영화가 친족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영화에서의 마법, 그것을 빼앗아가는 아버지는 친족성범죄의 알레고리(우화)이다.
친부, 계부, 친오빠, 사촌오빠 등의 성폭행 사례는 당장 포탈사이트에 검색해보아도 오늘, 어제, 이틀 전, 일주일 전, 끊임없이 쏟아진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를 버릴까 두려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가정이 깨질까봐, 자기 때문에 모든 걸 망칠까봐 어디다 털어놓지도 못한다. 범죄자 아버지여도 아이들은 부모를 쉽게 사랑한다.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지 않은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온전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음을 상처로 품고 사는 어른들이 많다.
오팔은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만, 엄마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오팔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며, 오로코신 앞에 오팔이 불려갈 때도 입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 말을 들은 오팔은 아무일 없다고 하지만, 신이 오팔에게 선물한 인형에는 눈과 입이 있어 모든 것을 목격한다. 이 역시 낯선 현상이 아니다. 친부, 계부, 또는 오빠의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딸의 입을 틀어먹는 엄마들이 숱하게 많았다. 자아를 남편, 아들에 의탁한 여자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그 전에,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오팔이 무의식으로 들어갔을 때이다. '지하감옥'인 줄 알았던 그곳은 사실 오팔의 무의식이다. 그곳에서 그동안 억압해왔던 슬픔, 분노, 죄책감, 수치심, 좌절감 등을 만난다. 그들은 마치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들처럼 살아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괴물'은 그들을 잡아먹는다. 그들이 잡아먹힐 때마다 오팔은 억압해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끝내 오팔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력해지도록, 더 이상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때, 오팔은 잠에서 깨어난다.
*아직 <오팔>을 볼 수 있는 OTT는 없는 것 같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6/22(수)에 재상영하니, 관심이 있다면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마법'은 다양한 사건으로 치환될 수 있다. 감독이 의도한 친족성폭행 문제일 수도 있고, 친족이 아닌 성범죄일 수도 있고,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상처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아픈 기억은 무의식 속에 숨겨놓고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며, 오히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프로이트식 방어기제이다.
영화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으로 접근하는데, 영화 도중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글자가 수수께끼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모든 수수께끼는 마지막에 가서야 풀린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하여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에 가까운 과정을 볼 수 있고, 우리는 직접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지만 영화를 통해 대리경험을 할 수 있다.
'날것'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자극적인 영화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 성폭력을 다룬 영화도 부지기수이다. 지금까지 성폭력을 다룬 영화들은 대개가 성폭행 장면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다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동안 영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강간 장면을 목도하였나. 그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피해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고민 없는 연출인가.
<오팔>의 미덕은 성폭행의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의식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봤으면 좋겠다. 특히 그루밍범죄에 노출된 아이들, 어른들로부터 상처받은 어린이들이 보아야 할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받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어른들 또한 <오팔>을 보고 치유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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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전 떠들석했던 어린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86분의 러닝타임 내내 아이들은 무척 정숙했고, 진지하게 영화를 보았다. 내 앞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앉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그들끼리 제법 진중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은 어쩌고 저쩌고 해도 대개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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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입니다만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말하게 되는 부분인데 픽션을 볼 때에는 어느 정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미나리>를 보고서 '우리의 뿌리는 소박하지만 위대했다' 같은 결론을 내린다던가, 결국 제이콥과 모니카가 같이 잘 살았을까 같은 해피엔딩을 유추한다던가, 냉전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베이비부머들처럼 '부모님들이 저렇게 고생해서 우릴 키웠다'라고 눈물을 훔친다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런 감상들을 느낄 수야 있겠으나 어느 정도 영화를 꽤 많이 봐 온 일정 나이 이상의 성인이라면 그런 개인적 감상과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 분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요즘의 픽션들의 트렌드인 것 같기도 한데, <미나리> 또한 어떤 특정 페이소스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역사의 이야기를 사뭇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한다. 그 가운데에서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격동은 있지만 그것이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가졌는지 작품 속에서 굳이 풀어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거진 "심심하게 끝났다" 혹은 "결말이 의아했다" 같은 평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이민자들에게는 좀 더 감정적으로 건드려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입장이 아니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자뭇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가 아니라 스티븐 연의 연기다. 윤여정과 한예리가 정말로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의 연기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반면 스티븐 연의 한국어는 그냥 교포 말투 그 자체다. 정이삭 감독의 묘사와 연출이 얼마나 정확하냐면, 그렇게 어눌한 번역투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스티븐 연의 연기를 통해서도 땅과 자기 일(그니까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사업 그 자체)에 집착하며 개인적 만족과 자아실현을, 자신이 꾸려놓은 가정보다 우선시하는 답 없는 구시대 한국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 정확하게 전달했다는 점이다. 제이콥의 모습을 보며 사업 트라우마에 시달린 한국 가정 구성원들이 아마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나리>는 굉장히 한국 문화의 일종의 헤리티지를 예리하게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노릇을 하는 제이콥의 모습 외에도 외할머니가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거나 혹은 아예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키워주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보육 형식인 나라도 아마 한국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적인 문화적 습성 때문에 한국에서는 부계 쪽 조부모들은 어떤 집안의 문화나 재산을 물려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모계 쪽 조부모들은 보육이나 가사 등 좀 더 노동에 가까운 자원을 제공해 주는 조력자로 인식되곤 한다. 흔히 '헤리티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래서 어떤 가풍이나 그의 뼈대가 된 재산과 성씨를 물려받은 집안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외가댁은 이런 집이었다, 정도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사실 따져 보면 외할머니가 어릴 때 키워준 사람들 손 들어 보라고 하면 최소 10명 중 4명은 손 들지 않을까 싶은 한국에서 정말로 가족의 헤리티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외할머니를 포함한 모계 조상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호랑이>는 <미나리>에 비해 좀 더 '아시아적'인 서사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어려서 효도하지 않던 아들이 엄마가 돌아가신 후 후회막심에 눈물 흘린다는 전래 동화는 유치원 때부터 동양인들이 지겹게 들어오던 것이다. 어쩌면 그 전래동화의 21세기 형 리메이크려나. <종이 호랑이> 뒤로 이어지는 수 많은 단편들에서도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중화권 문화에 기반한, 완전한 당사자의 입장(authentic)보다는 이민자가 느끼는 몇 다리 건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을 묘사한다.
판데믹 시대에 아시안(이라는 단어로 하나로 묶이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에 대한 인종차별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원래부터도 꾸준히 이야기돼 왔던 것이지만 자극적 사건이 터져야만 주목하는 대중들의 성격 상 2020년~2021년이 기점으로 느껴진다. <기생충>과 <미나리> 같은 영화들이 미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것도 그렇다. 그들은 무엇이 '아시안 헤리티지'를 대변하고, 그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아시안 헤리티지'란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서부터 메타적으로 차별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1 세계에서 아시안이라는 단어에 코카서스인인 인도, 중동 사람들까지 포함해 부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백인들을 대상으로 아시안들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정답은 '아무것도'다. 꼭 아카데미를 타지 않아도(나도 <기생충> 재밌게 봤음, 쿨병 걸린 매국노 아님) 그래미를 수상하지 않아도(BTS 좋아함 다이너마이트 완창 가능), 그러니까 "꼭 K-문화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지 않아도"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다. <벌새>가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페미니즘 서사였던 것처럼,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집단의 영혼을 대변할 수 있다. 아카데미와 그래미가 아니더라도, 논밭에 집착하는 한국 아버지와 마사지샵에서 일하는 한국 어머니도 문화의 일부고 집단의 속성을 대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변은 그 누구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냥 존재일 뿐 타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아시안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들 및 다른 여타 소수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윤여정 배우님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면 한국인 여성으로서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나리가 아카데미 무관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고 아쉬울 것도 없다. 애초에 백인 할아버지들이 만든 시상식이 영화계를 과잉 대표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도 정론이 된 지 오래인데, 한국인들의 귀염둥이이자 아시안 스피릿의 수호자가 된 봉준호 감독도 오스카는 로컬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수상 결과에 기뻐하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에 맞거나 평생을 더 가난하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몇 억 명인 세상에서 우리가 그들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이 더 세상을 바꾸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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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종류의 눈물
네 가지 종류의 눈물
<위대한 개츠비>,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여수의 사랑>, <성경>
어떤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다 잠근 줄 알았던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처럼,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속을 이미 적셔놓고 밖으로 흐르는 눈물이 우리 삶에는 있다. 그런 눈물을 삶의 누수라고 하면 좋을까. 그런 눈물은 그야말로 새어 나오는 것이어서, 눈물이 흐른 흔적만큼 우리 삶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 삶이 이만큼 비어있던 것이구나. 이 공간만큼 내가 결여를 느꼈던 것이구나. 흘려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 삶의 여백을, 눈물은 증거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앎이 있다. 삶의 누수 같은 눈물을 라캉 식의 구분법으로 해석해보자면, 그건 단연 후자다. 나는 내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그동안 (알면서도) 몰랐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고, 그랬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삶에서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므로, 나는 대신 영화와 책에서 그런 사례를 추려봤다.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 네 가지 눈물이 흐르게 된 상황적인 요인, 맥락은 제각기 다르지만,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삶에 진실했고 또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그런 눈물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두 편, 문학에서 두 편이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Tonu Takitani, 2004>가 있고, 문학에서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12>과 오래된 책인 <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위대한 개츠비>
먼저 <위대한 개츠비>. 첫사랑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나타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자신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데이지와 재회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그녀를 데려와 구경하게 한다. 데이지의 감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속으로 자신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는 복층 위로 올라가 자신의 영국제 셔츠 수십 벌을 꺼내 장난스럽게 데이지에게 건네는데, 그녀는 셔츠들을 보면서 돌연 울음을 터뜨린 것. 데이지는 왜 울었을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김영하,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241쪽) 그러니까 데이지의 눈물은 그야말로 허영에 가까운 눈물이었다는 것.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무구한 반응처럼 데이지의 눈물은 그런 반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영으로 자신 삶의 허망을 견디고 있으니까.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끔찍한 고독에서 건져내 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토니는 아내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대신 입어줄 사람을 구한다. 간신히 찾은 여자(히사코)에게 아내의 드레스룸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를 들은 토니가 방으로 들어가 왜 우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많은 옷을 처음 입어봐서 그런가 봐요.” 이 눈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지의 경우에서처럼, 허영이 깃든 무구한 반응의 극치인 걸까. 무수한 오해로부터 그녀를 구할 길은 먼저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니가 찾은 여자는 실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하루 먹고사는 고민으로 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한순간 거대한 아름다움과 대면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남루함과 세상의 거대한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로부터 오는 기묘한 정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내 삶은 이토록 남루하구나 라는 쓸쓸한 자기 인식. 그러니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는 이윽고 응결되어 새어 나온 것은 아닐까.
<토니 타키타니>
굳이 새삼스럽게 적지 않아도, <위대한 개츠비>와 <토니 타키타니>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을.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또 고향이 어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여러 도시들을 떠돌던 자흔은, 다만 명료한 증거 하나만을 토대해 유추할 뿐이다. 자신이 2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때부터 보호기관에서 자랐다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은 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그녀는 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에게 언젠가 자신의 고향(이라 추측되는) 근처를 갔을 때의 일을 말한다.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중략)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등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중략)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자흔은 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자흔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흔의 눈물은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아늑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그 아늑함의 이면에는 단순히 고향에 왔다라는 차원을 초월해, 불분명했던 ‘자기 정체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거기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
세 가지 목록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성경>의 ‘이사야서’다. 세 종류의 경우처럼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상의 감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앉으신 보좌, 그리고 둘러싼 천사들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표준새번역 <성경>, ‘이사야서 6장 5절) 이사야는 눈물 흘리지는 않았지만 세 종류의 눈물만큼이나 선뜻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을 한다. 어째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성에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경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난감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나 누추하고 얼룩처럼 죄가 묻어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이가 내게 찾아오다니. 두 번째의 눈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반응이다.
나는 네 종류의 반응이,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대체로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허영으로 여기기도 하고(데이지),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각인시켜주는 자신의 남루한 처지를 쓸쓸해하면서(히사코), 누군가는 예술이 나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깊이 헤아려준다는 느낌에 위로와 안도감을 감각하기도 하면서(자흔), 눈부신 경이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절망하기도 하던(이사야), 저마다 흐른 삶의 누수들. 우리는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체로 알고 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라캉의 말이 옳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우 알아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이정식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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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리듬감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라면 카메라가 놓일 공간과 조명의 위치로 인해 인물 동선과 장면화의 많은 제약들이 애니메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른데 픽사, 디즈니,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 모두 그들만의 독특한 리듬감이 전달하는 감흥은 꽤나 아름답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봇 드림> 또한 그 특유의 리듬감이 꽤나 아름답다. 하지만 이 리듬감에는 독특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어떤 확신에서 오는 감흥일 것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많은 오마주들을 확인시켜준다. <이터널 선샤인>, <오즈의 마법사>은 감독이 인정한 레퍼런스고 관객들은 <A.I>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뮤지컬 영화인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오즈의 마법사>와 동시에 떠오른 이 뮤지컬 영화가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외에도 <첨밀밀>이나 <라라랜드>, 자크 타티 영화의 면면들이 보이고, 핼러윈 날에는 <샤이닝>, <나이트메어>, <뱀파이어> 등이 보인다. 물론 <사이코> 같은 영화들은 분명하다. 이 레퍼런스들은 단지 씨네필들을 위한 숨은 그림 찾기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로봇 드림>에서 대사는 들어오지 않는다. 무성 영화의 리듬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그와 로봇의 움직임과 쇼트들의 결합은 꽤나 인상적이다. <Septepber>가 흘러나올 때의 몽타주 시퀀스는 흥미롭다. 특히 이 음악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 생일이 9월이어서 사용한 음악이라고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가사에서 명확하게 가리키는 날짜가 9월 21일이고, 감독의 딸 생일도 9월 21일이다. 영화에서 해수욕장이 폐장되는 건 9월이다.
우선 영화 제목부터 보자. 로봇 드림. 로봇의 꿈.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이 제목에 의아했다가 수긍했다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도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외로운 도그, 옆에 있어줄 누군가를 찾다가 로봇을 주문한다. 로봇은 친구가 되고, 특이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 뒤로는 도그와 로봇의 시간을 각각 보여준다. 하지만 제목이 로봇 드림인 것은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오는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의 질문이었다.
복기해 보면 로봇의 첫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지만 도그가 집에 없다. 두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서 그를 보게 되지만 그는 다른 로봇과 있다. 세 번째 꿈은 위에서 언급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처럼 뮤지컬 시퀀스로 진행되면서 하나의 화폭 안의 꽃들이 도그의 형상으로 끝맺음을 한다. 혹은 <오즈의 마법사>로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이 꿈들을 이어붙여보면 도그를 찾아갔지만 없었고, 배신당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도그를 기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그의 꿈은 어떠한가. 도그의 꿈은 로봇의 꿈보다는 훨씬 꿈처럼 느껴진다. 눈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 볼링을 치러 간다. 볼링장에서 웃음거리가 된 도그는 꿈에서 깬다. 마치 악몽을 꿨다는 듯. 도그의 꿈엔 로봇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원하지만 미끄러진다. 이건 마치 도그가 로봇과 헤어진 뒤에 겪는 일들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도그는 로봇의 구조를 실패한 뒤 스키장에서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덕이라는 멋진 오리를 만나 사랑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여기서 <로봇 드림>의 제목이 왜 도그 드림이 아니라 로봇 드림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지만 로봇은 도그를 사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잔인함 중 거의 대부분은 로봇이 당하는 폭력에 맞춰져 있다. 로봇은 다리가 잘리고 폐기처분된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살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인데 그렇게 잔혹한 행위에서 자신을 살려낸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애인(?)이다. 로봇은 아직 도그를 그리워하지만 새로운 사랑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봇은 이제 꿈을 꾸지 않는다. 상상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가정을 한다. 자신이 도그와 재회를 하게 된다면 관계가 꼬일 것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렇기에 로봇은 도그와의 재회를 포기한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플래시 포워드는 그들이 함께 했을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로봇의 가정은 그들이 함께 한다면의 미래를 그린다. 함께 한다면이라는 가정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위험한 혹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왜 배경이 1980년대 뉴욕인가. 감독은 왜 뉴욕에 보내는 러브 레터라고 이야기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곱씹어 보면 이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들과 예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불길한 이미지들 몇 가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히치콕의 <사이코>,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리즈를 낳은 <나이트메어>의 이미지들과 함께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우디 앨런의 <맨해튼>이 나왔던 것도 빼놓을 순 없겠으나 감독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여기에다가 하나 더. <Septepber>는 9월이다. 9월과 세계무역센터. 그리고 80년대는 중동의 전쟁이 미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그때가 아닌가.
미국의 1980년대는 60년대부터 이어진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 안정된 시기로 일컬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백래시 현상부터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지닌 시기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로봇 드림>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또 하나의 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로봇이 해수욕장에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태어난 아기 새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한다. 이 희망찬 동화 아래에는 물질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는다. 이제 곧 고물상이 다가와 로봇을 수거해 만신창이를 만들고 분해할 것이다.
도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멋진 덕을 만난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멋있게 질주를 한다. 게다가 성격도 아주 쿨하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떠나버린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 결국 도그는 생명체를 만나지 못하고 방수 로봇을 구입(!) 한다. 이 영화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고 동물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동물과 로봇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한다. 만약 로봇이 생명체라고 인지되었다면 그는 폐장된 해수욕장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다리가 잘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분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든 즉각적인 생각은 성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4인의 결합은 불가능 한가였다.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인간 세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인데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는 불만에 툴툴거렸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알겠다. 4인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곳이 뉴욕이기 때문이다. 도그가 로봇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 도시의 규율 때문인 것처럼 로봇은 뉴욕의 규율 때문에 도그와 재회하지 못한다. 80년대 뉴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굉장히 엄격한 곳이다. 희망찬 곳이었지만 눈물이 들어찰 공간이다.
2024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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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 팬들이 뽑아본 판타스틱4 캐스팅
#판타스틱4 #마블캐스팅 #페이즈4
2021. 05. 24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판타스틱4 가상 캐스팅
00:36 미스터 판타스틱 (리드 리처즈)
02:51 인비저블 우먼 (수 스톰)
05:07 휴먼 토치 (조니 스톰)
06:09 씽 (벤 그림)
07:12 여러분의 캐스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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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설계자 The Plot> 티저 예고편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완벽한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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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악마의 다이어리> 예고편
어느 날 밤 오우자 판자를 가지고 놀다가 악마의 공격을 받은 레베카 클락슨.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동안 자신의 웹캠에 비디오 일기 형식으로 그녀의 경험을 기록한다.
고조되는 일련의 사건들, 그림자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점점 소름이 끼치기 시작한다.
초자연적인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레베카는 마침내 악이 그녀의 몸을 점령할 때까지 악마적인 힘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는다.
레베카는 악마를 물리치고 영혼을 보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