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4-21 19:43:17
야당 | 도구로 버려지기 싫었던 야당의 복수극
<야당>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익숙함 속 틀린 그림 찾기
한국 범죄 영화에는 익숙한 그림이 있다. 검사와 경찰은 항상 싸우기 마련이다. 검사의 일방적인 수사 명령에 끌려다니는 경찰은 한탄을 멈추지 않는다. 과거 시점이라면 검사가 경찰의 횡포에 짜증 내는 정반대 상황도 볼 수 있다. 정치인, 검사, 언론인의 회동도 빠지지 않는 광경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위해 끌어주는 이 그림은 <내부자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에 유독 핫한 그림도 있다. 마약이다. 버닝썬 게이트 전후로 한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도 대동소이하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마약 투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재벌 및 유력 정치인 자제와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마약 수사는 부패 사건 수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베테랑>, <더 킹>, <모범택시> 등 많은 작품이 정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야당>도 익숙한 그림으로 가득하다. 정치인, 검사, 언론, 마약 조직의 연계와 부패, 비리를 고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사기관 간의 갈등, 연예인 가십 등도 빠지지 않고 활용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야당>은 뭔가 다르다. 익숙한 그림 구석구석에 틀린 그림이 숨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사건이 아닌 인물, 특히 같은 듯 다른 두 '야당'이 대조되는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
야당은 마약사범들 중 경찰이나 검찰 등의 수사 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들을 일컫는 은어다. 수사 기관과 범죄 조직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일종의 이중첩자인 셈이다. 자연히 그들의 성격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에게 그들은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수사를 위한 도구이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한 그들은 도구로써 기능하지 않으니까.
<야당>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야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수는 경찰에게 마약 조직 정보를 주고, 검거에도 참여한다. 경찰은 강수의 조력을 받아 실적을 올리고, 강수는 체포된 마약 사범의 형량 거래에 참여해 수수료를 받아간다. 둘 모두 서로 이익이 맞으니까 협력하는 경찰과 야당은 꼭 악어와 악어새를 보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악어와 악어새의 우정도 보여준다. 과거 마약 판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강수. 관희는 그에게 자신의 야당이 되라고 제안한다. 마약 조직에 잠입해 정보를 알아내면 감형해 주겠다는 것. 강수의 노력 덕분에 마약 조직을 소탕한 관희는 승진 가도를 달리고, 강수는 출소 후에도 야당 일을 하면서 떼돈을 번다. 그렇게 관희의 수단이었던 강수는 그의 목적이 된다. 커플 시계를 나눠 끼는 의형제로 발전할 정도로.
수단과 목적이 전복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야당>은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다. <야당>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전복하면서 예기치 못한 감정적 동요를 선사한다.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 관희와 강수. 그런데 대통령 후보 아들 '조훈'(류경수)이 파티에서 발견된 순간, 그들의 관계는 급반전된다. 관희는 권력을 위해 강수를 내친다. 관희의 목적이 된 줄 알았던 강수는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해서 중독자가 되고, 다리에도 화상을 입은 채 도구로서 버려진다.
또 다른 야당과의 대조를 이루면서 강수의 비참한 처지는 더 강조된다. 상재는 마약 수사 중 입건된 '엄수진'(채원빈)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마약 공급책, 마약 파티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면 풀어주겠다고. 하지만 거래는 수포로 돌아간다. 상재가 쫓던 용의자를 관희와 강수가 가로챈 것. 결국 수진은 마약 사범이 되고, 상재는 검찰과의 갈등으로 인해 소송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상재와 수진의 관계는 강수와 관희와는 달랐다. 관희에게 복수하려는 강수가 도움을 요청하자 상재와 수진은 복수심 외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협력한다. 상재는 수진과의 약속을 못 지켰다는 자책감에, 수진은 죄책감을 못 떨치는 상재에 대한 연민 때문에. 도구로서 만났지만 진정으로 아껴주는 목적이 되어주는 관계성의 변화는 수진에게 역경이 닥쳐도 상재가 끝까지 관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의외의 특별함
그래서 <야당>은 의외로 감정적이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이의 복수, 서로를 지켜주지 못했던 약자들의 연대에 집중한 덕분이다. 그저 주인공 직업이 검사나 경찰이라서 정치권 및 재계와 엮일 뿐이지,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한탄이 사회적, 정치적 교훈보다 중요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는 관희와 조훈의 관계와 피해자 세 명이 이루는 대조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욕으로만 뭉친 관희와 조훈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훈의 마약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관희가 상재가 강수를 통제하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갈등을 빚기 일쑤다. 이처럼 불협화음이 가득한 관계성 덕분에 배신당하고 버려진 자들의 연대는 더욱 빛날 수 있다.
주인공들의 관계성에 집중한 덕분에 <야당>은 덜 작위적이기도 하다. 정의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형사, 맹목적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검사나 정치인 같은 캐릭터는 없다. 대부분의 인물은 적당히 탐욕스럽고, 정의롭다. 이 양면성 덕분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도 자연스럽다. 관희가 한순간에 강수를 내치는 결단을 내려도, 악연으로 만난 강수와 상재의 관계가 동료로 전환되는 과정도 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화를 패러디하는 연출도 연장선상에 있어서 자연스럽다. 사회 비판을 위해 실화 사건을 어설프게 풍자하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은 답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전을 주는 장치로써 평연하게 활용한다. 강수는 '우병우 황제 조사 논란'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관희에게 복수한다. 정치 권력과 검찰 권력의 유착 관계를 폭로하는 이 장면은 예측과는 달라서 유효한 반전이고, 그렇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풍자라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관성을 뛰어넘는 재미
다만 <야당>은 한계도 명확하다. 관성적이라는 인상은 떨쳐내지 못했다. 캐릭터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수진은 더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다른 범죄 영화에서 단순히 마약 범죄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 역할 이상의 존재감을 뽐낸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려고 직접 움직이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런데 <야당>은 그녀를 다른 캐릭터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소비하고 말았다.
야당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 구조적 측면을 깊이 건드리지 않은 선택 또한 한계로 볼 수 있다. <야당>은 관희와 조훈의 최후만 보여준다. 그들과 결탁한 다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눈에 보이는 바퀴벌레만 잡을 뿐, 근원적인 문제까지는 굳이 건들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야당>의 사회 비판은 자칫 얄팍한 인상 비평처럼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지만 <야당>은 여전히 거절하기 힘든 영화다. 익숙한 그림을 차별화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는 잘 끓인 김치찌개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기시감이 짙더라도 먹다 보면 의외의 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마약 사건의 자극성이나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경도되지 않은 채 소재의 특성에만 집중한 스토리텔링이 되짚을수록 영리하고,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익숙한 프레임에서 틀린 그림 찾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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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명대사가 최근엔 드라마 <굿 와이프>로 전이된 느낌이다.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그만큼 이혼과 불륜이 만연되어 있다는 걸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속에서 대사가 전하는 의미는 이혼숙려기간인 4주, 30일 동안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인가? 2023년 추석에 개봉해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30일>은 뻔하고 예상가능하며, 기시감 넘치는 로코이지만, 사랑과 기억에 대한 생가할거리를 준 코믹한 결혼 보고서다.
결혼식 날 나라(정소민)은 버진 로드 대신 식장 출구로 뛰쳐나간다. 그 이유는 백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친 정열(강하늘)에게 가기 위해서다. 정열 또한 선배(윤경호)의 술집에서 한탄만 하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서 나라에게 달려가던 참이었다. 이들의 마음은 통했는지, 술집 문 앞에서 마주쳤고,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에 골인했다.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룬 이들은 결말은 해.피.엔.딩. 이라고 하면 오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 보단 전쟁이 펼쳐지고, 이내 이들은 이혼을 결심한다. 가정법원에서 나와 30일 동안 이혼숙려기간을 보내야 하는 둘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입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나라와 정열. 근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서로 결혼한 사이라는 것까지.
<30일>은 영화처럼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 이후 180도 변화가 되는 관계에 놓인다는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져온다. ‘결혼하니 배우자가 변하더라’ 하는 이 말을 오롯이 옮겨놓듯 연애할 때 좋았던 그 모습이 결혼 후에는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초반에 깔아놓는다. 법원에서 이혼 사유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마주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어디서 보고 들은 듯한 이 이야기는 기시감이 느껴질지언정 공감대를 확실히 형성한다. 보통의 부부보다야 좀 더 과장되고 과격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건 연애와 결혼의 차이에 한 번쯤 겪었을 답답함. 웃픈 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교통사고 이후 벌어지는 황당한 이들의 동거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만든다.
남대중 감독은 기존 로코와의 차별화 포인트를 위해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상상력을 펼쳤다고 말한 바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이 없어진다면 죽일듯이 미워한 배우자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 뭐 이 또한 다수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관객이라면 충분히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연애 시절 당시 서로에게 반했던 순간과 포인트에 다시 물들고, 이내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는 나라와 정열의 모습을 보면, 왜 인간은 오류를 범했음에도 또 다시 오류를 범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답하는 듯 하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에서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마음을 전하는 매게체로 사용되는 건 야구공이다. 마치 투포수를 연상시키듯 공을 던지고 받고, 다시 던지는 듯한 이들은 최고의 합을 맞춰가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매번 포수의 사인에 맞춰 투수가 정확한 공을 던지지 못하고 실투도 하고, 그러다 홈런을 맞고 위기를 맞을 때도 있지만, 9회까지 진행하는 야구는 그만큼 다시 던지고 받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순간이 많다. 그만큼 영화는 야구처럼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는 <30일>의 정체성은 코믹이다. <위대한 소원> <기방도령> 등 꾸준히 코믹 영화를 만든 남대중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만의 코믹함을 첨가한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만큼 B급 코믹은 줄였지만, 관객들을 웃기는 게 주 목표로 말하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끝까지 밀고 간다.
그 중심에는 배우들의 몫이 크다. 강하늘, 정소민의 코믹 케미는 최고라 말할 수 있는데,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듯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난 이들의 코믹 연기는 그 자체로 폭소를 터뜨린다. 깐족거림과 비아냥, 뒷끝 작렬인 강하늘의 찌질함과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행동파로서 망가짐을 주저하지 않는 정소민의 연기는 매력 그 자체다. 코믹과 로맨스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여기에 조민수, 김신영, 윤경호, 황세인 등 조연들의 코믹 앙상블도 그 자체로 재미를 전한다.
로코의 공식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빗는 웃음과 가족애는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나게 웃으면서 결혼이란 대 환장극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의의를 둘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개봉한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마누라 죽이기> 최민수, 심혜진 주연의 <결혼이야기>와 비교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과정인 동시에 가장 행복한 과정이라는 걸 느껴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마인드마크
평점: 3.0 /5.0
한줄평: 이혼이 트렌드가 된 세상 속 코믹한 결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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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에 귀천 없듯 액션 연기에도 마찬가지
연애도 스턴트맨처럼 하면 어떡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스턴트맨 콜트(라이언 고슬링)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 콜트. 콜트는 좀 특별하다. 바로 스턴트맨이다. 몸값이 비싼 할리우드 배우들의 대역으로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콜트. 하지만 이런 콜트도 사람이다. 옆구리가 시린 콜트. 마땅히 기회(?)가 없으니 그냥 소같이 일만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 조디(에밀리 블런트)다. 영화 제작 스태프의 일원이었던 조디. 조디와 콜트는 서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린다. "끝나고 뭐 해요?" 작업 거는 콜트. 조디와 콜트, 서로 사랑하기 5분 전이다. 마지막 액션 신만 찍고 나면 1일 시작이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했다. 허리를 크게 다친 콜트. 위축된 자신의 처지에 자존감이 급락한 콜트는 이내 잠수이별을 고한다. 화가 난 조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콜트가 잘 아는 제작자(해나 매딩엄)가 콜트에게 전화를 건다. "일자리가 들어왔는데. 조디가 감독인 영화야. 팀에 들어올래?"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뛰어나갈 기세다. 신난 콜트. 하지만 콜트에겐 문제가 생겼다. X를 구하려다 X 되게 생겼다. 영화 하나 찍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고추장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이 영화를 장르적으로 구분한다면 액션/로맨스물이지만 내실을 따져보면 다양한 재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선택은 영화의 이야기 줄거리 외/내적으로 좋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외피로 두르고 있는 로맨스/액션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의 흐름 상 콜트와 조디의 로맨스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사건의 배경이 두 남녀의 첫 만남이 있었고 콜트가 어떤 사건을 겪고 느닷없이 잠수를 탄다. 이후 ‘잠수를 탔기 때문’에 쌓여있는 인물 간의 오해가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이 오해를 풀고 싶은 것이 콜트의 핵심이다. 그냥 단지 ‘직업이 스턴트맨이니까’라고 보기엔 중반부 찍고 넓어지는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하니 영화가 안전장치를 둔 것이다. 심지어 중후반부를 보면 영화의 로맨스적인 특성을 대놓고 드러내기도 하는데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지는 플롯을 로맨스라는 장르적인 특성으로 연결했다. 쉽게 말해서 '그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있으니까!'로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야기 상에서 액션이 등장하는 이유도 필연적이다. 직업이 스턴트맨이니까 액션을 보여주는 과정이 당연하다? 물론 제목과 직업에 대한 부분도 크게 작동하지만 중구난방으로 튈법한 영화 속 사건을 잇는 장치가 액션이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이 <스턴트맨>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다. 이런 플롯을 설정한 이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과정을 보여주면 당연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지? 이 과정에서 스태프들의 노고도 나오고 영화감독과 제작자 사이의 관계도 재미있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중에 더 중요한 것. 이 영화의 제목은 ‘스턴트맨’이다. 스턴트맨은 일종의 대역으로서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존재다. 그러면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하든 뭘 하든 이 직업군들에겐 중요한 제약이 있다. 이 배우들의 목숨은 하나고 역시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 점을 보여주려면 ‘목숨이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지? 그러려면 액션이 들어가는 것이 필연적이다. 연기로 몇 겹을 쳐도 목숨이 하나인 걸 두각한 연출을 보여줬다.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장르를 소비한 것이 아닌 셈이다.
이 영화의 장르적인 내실을 까보면 온갖 것이 섞여있는 영화 전주비빔밥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쓴이가 각본을 잘 썼다고 느끼는 지점 중 하나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할리우드의 역사를 영리하게 훑으며 긴 시간 동안 있어왔던 ‘스턴트맨’의 존재를 비추고 있다. 이것은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왜? 할리우드가 어떤 장르를 만들든 간에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이 부분을 강조하듯이 호러, sf, 코미디, 미스터리, 애니메이션, 판타지 등등 여러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포용한다. 그리고 스턴트맨 콜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결하니 안 본 분들 입장에서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거친 부분이 있다.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2시간으로 압축시킨다? 당연히 매끄럽지 못하다. 이 부분은 영화의 호불호가 될 수 있다. 가령 주인공의 중요한 과제 톰 라이더를 찾는 부분에서 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만한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소재는 영화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떻게’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고 하고 싶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이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콜트가 직접 겪는 개고생이 영화의 역사가 앞으로 계속 진보되어도 잊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참기름도 있다구
이 영화는 또 오마주로 가득 찬 영화이기도 하다. 왜 오마주가 필요했을까?를 써보자면, (위에도 쓴 내용이지만) 현재를 넘어 과거의 스턴트맨에 바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도야 충분히 좋다. 하지만 스턴트맨’만’ 중요하다고 하면 그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 우선순위가 부여된다면 영화감독이 직업인의 윤리에 있어 어긋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스턴트맨>은 예전 영화들을 끊임없이 호명함으로써 연출가로서의 윤리를 살렸다. 스턴트맨의 헌신도 물론이지만 그만큼 노력했던 선배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턴트맨 출신이었다가 영화감독이 된 감독의 당사자성을 살려 이야기를 만든다면 "왜 내가 스턴트맨에서 영화감독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갈 만했는데, 이 영화의 감독이 좋아할 만한 장면을 오마주 했으니 만드는 사람의 진정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런 특징을 살려 영화에는 한 페이지로 적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오마주들이 들어가 있다. 어느 단계에서 어느 장면이 오마주다!라고 쓰면 영화의 재미가 급감하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만 서술해 본다. 영화 첫 번째 장면이 콜트가 스턴트맨 일을 하다가 사고를 겪는 장면이다. 이 장면 보면 <미션 임파서블> 1편이 연상된다. 그리고 영화 안 극중극은 콜트 역의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맡았던 영화 중 어느 작품을 연상되게 한다. 시각적인 부분도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이것저것 가져온 듯한 걸로 이루어져 있다. 또 조디라는 인물 역시 할리우드의 누군가가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연출로 중요하게 강조시키는데 오마주한 인물이 할리우드에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영화가 할리우드의 현재를 보여주려고 했던 의도가 보인다.
<거미집>과의 공통점, 차이점
이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은 작품은 작년에 개봉한 <거미집>이다. <거미집>의 서양판이 이 <스턴트맨> 같을 정도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주인공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김열/조디)이라 그 내용이 전적으로 들어갔다는 점, 시대적인 맥락(1970년대/2024년 현대의 할리우드)이 들어간다는 점이 그렇다.
이 공통점의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거미집>의 김열(송강호)과 <스턴트맨>의 조디가 만드는 창작의 의미가 각각의 영화 안에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가령 <거미집>에서 김열이 방구석에서 보여주는 모든 장면은 이상의 ‘날개’가 연상될 정도로 개개인의 욕망을 더 깊숙하게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 안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김열이 촬영장의 리더로서 겪는 온갖 개고생이 핵심이다. 웃음도 여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은 전미도(전여빈)이다. 전미도는 김열의 창작을 지원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미도가 풍기는 광인의 포스는 이야기가 미진하다고 느낄 즈음에 등장해서 영화를 이끈다. 반대로 <스턴트맨>의 조디가 만드는 영화는 후반부의 장면이 인물들의 상황과 겹치는 되는 지점이 있다. 심지어 기존 영화들의 오마주를 그대로 활용해서 인물의 내면과 감정적인 하이라이트가 겹쳐지게 하는 장면까지 있다(심지어 제목으로도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안의 로맨스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와도 닿아있다. 어느 장면을 넘어서 영화와 현실이 무너지는 분기점이 있는데 이 부분은 감독이 의도한 바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 영화는 현실의 업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둘째로 시대적인 맥락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공통점을 읽을 수 있다. 전자 <거미집>에선 1970년대의 맥락이 등장한다. 당시 김열이 직면한 여러 애로사항 중 하나는 당시 행정부가 예술가들에게 제약을 둔다는 것이다. 이 장애물은 스트레스 한가득이었던 김열의 창작물에 장애물이 되며 인물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거미집>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카메오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면 그 모든 속박보다 창작자에게 깊고 크게 다가오는 장애물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왜? 이 장면이 일어나는 전후맥락에는 문공부라는 시대적인 맥락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장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카메오가 김열에게 창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시대적인 맥락이 없다면 이 장면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에 대한 문제를 시대적인 맥락도 가져와 보충한 것이다. 하지만 <스턴트맨>은 이것과는 살짝 다르다. 이 영화에는 2020년대 할리우드에 있던 사건 중 가장 인상 깊은 스캔들이 등장한다. 또 특정 소재는 2024년의 현대사회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 두 요소가 왜 굳이 등장했을까? 바로 2024년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 너희들 봐라!라는 의미다. 영화 외적인 요소를 굳이 안으로 가져와서 이야기의 구분선을 흐린 것이다.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타겟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리얼리티를 높인다. 사실 이렇게 영화가 외적인 맥락과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병치시켜서 우리에게 와닿게 설정했다는 것 자체는 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왜 스턴트맨일까? 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영화배우의 노고에만 감탄하며 액션영화를 보곤 하지만 이들 아래에 수많은 스턴트맨이 있었다. 스턴트맨에서 스턴트 하다 다치면 영화 내적인 사건이 외적으로 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얼버무리고 넘어가
이 영화의 단점은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이다. 스턴트맨에 대한 헌사도 보여줘야 하고. 성공한 덕후가 된 감독의 덕질 역사도 보여줘야 하고. 주인공과 관련한 메인 플롯도 보여줘야 하고. 조디가 영화 만드는 이야기도 보여줘야 하고. 현재의 할리우드도 묘사해야 한다. 적어도 이 모든 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려면 희생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어떤 조건 몇 개는 생략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초반 조디와 콜트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부분을 느꼈다. 단지 그럴 수도 있다고 느끼면 크게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을 더 길게 늘여도 이야기 흐름에는 큰 문제없지 않았을까? 투박한 이야기 이음새가 인물의 동기를 더 공고히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졌다.
또 어떤 두 캐릭터는 이 영화의 기획의도에 의해 희생됐다고 생각한다. 아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캐릭터들은 아니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배경은 나름 합리적이고 꼼꼼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하지만 이 인물이 엄청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냥 영화의 핵심만을 전달해 주는 분량만 있었다. 이 부분은 <스턴트맨>의 뒷맛을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 장면에서 그게 꼭 들어가야 했을까? 사실 그게 굳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다 전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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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습니다.
비록 흥행세는 다소 꺾였지만, 누적 관객수는 163만 명에 도달했습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일으켰던 콘서트 실황 다큐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이 <사랑의 하츄핑>을 밀어내며 3위에 올랐고
<파일럿>이 누적관객수 450만 명을 돌파하며 2위에 머물렀습니다.
한편 국내에서 190만 여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던 <데드풀과 울버린>이 북미에서 1위를 유지했고 누적 수익 12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2위, <잇 엔드 위드 어스>가 3위를 차지하며 전주와 동일한 순위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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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미국/2007)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사막처럼 건조한 염세주의자의 목소리
만드는 영화마다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코엔 형제는 퓰리쳐상 수상작가 코맥 메카시의 동명 소설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영화화했다. 미국 개봉 후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며 2008년, 제80회 아카데미상 8개 부문(작품상 포함)에 노미네이트되었고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석권하여 화제작이 되었다.
줄거리는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세 남자가 이끌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황량한 사막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모스는 영양 사냥을 하고 있지만 총알은 자꾸만 빗나갈 뿐 별로 수확이 없다. 한편 보이스오버로 에드 톰 벨 보안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자꾸만 흉악하게 변해간다는 그의 느릿느릿한 사투리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고 문장에는 수식어도 없다. 건조하다. 사막의 열기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증발해버린 듯하다.
문득 모스의 눈에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어떤 물체가 들어온다. 망원경으로 보니 자동차들이다. 날렵한 동작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다가가니 멕시코인들끼리 대단한 총격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거래에 실패한 마약더미와 저만치 떨어진 나무 아래 앉은 채로 죽어있는 사내 옆에 돈가방이 놓여있다. 실패한 하루의 사냥과 대조적으로 돈가방은 그에게 큰 행운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상을 입고 물 한 모금을 원하는 한 명의 생존자를 뒤로한 채 돈가방만 챙겨 하우스 트레일러로 돌아온 모스는 생존자를 버려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다. 새벽에 물 한 통을 들고 다시 현장으로 가보니 그 생존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고 마약거래와 관계 있는 갱단이 도착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만 그들에게 발각되고 만 코스는 트럭을 버리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아내 칼라(켈리 맥도널드)를 친정으로 보낸 뒤 자신은 돈가방과 함께 달아난다. 그런데 가방에는 추적장치가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참혹한 범행현장에서 모스의 트럭을 발견한 보안관 벨, 갱단에게 고용되어 추적장치를 따르는 청부살인업자 쉬거, 돈가방을 든 모스 등, 세 남자의 쫓고 쫓기는 복잡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스크린은 거듭되는 살인으로 지옥 같은 이미지를 담아낸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우 문학적이다. 아마도 소설을 영화화했기 때문이겠지만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은유적인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힘입은 바도 클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 그 사막에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돌아서는 카우보이 모스는 무척 닮아있다. 불모의 사막에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로 장면이 바뀌어도 인간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관심이나 배려 등, 사랑을 표현하는 그 무엇도 담지 않는다. 기쁨의 웃음도 감동의 눈물도 배제한다. 그대신 건물들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건축한 건물들 속에서 하나, 둘, 잔인하게 죽는다.
그들의 죽음에 꼭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청부업자 쉬거의 의무는 그를 고용한 사람에게 돈가방을 찾아주고 가방을 훔친 모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가 필요해서,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어서, 혹은 그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 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무기, captive bolt pistol(혹은 cattle gun)이다. 이는 주로 가축을 도살하기 전에 고통을 덜어주고 피흘림을 막아 좋은 육질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쉬거는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 그에게는 효과적으로 그리고 단번에 상대를 죽임으로써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남기지 않는 효율성이 중요할 뿐이다.
쉬거의 앞에서 그에게 득이될 거래를 제시하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생명 부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쉬거에게는 두 번째 기회를 용납하는 관대함이 없으며 생명을 중시하며 가치판단을 하는 도덕적 잣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예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쉬거라는 인물은 절대적인 악, 혹은 악마로 그려진다.
쉬거의 추격을 받는 모스에게서는 자유의지를 가졌으되 많은 선택의 가능성 사이에서 계속 실수를 저지르는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절대적으로 악하지도, 또 선하지도 않다. 다만 어쩌다가 양심과 도덕을 무시하고 욕심을 따르는 잘못된 선택을 한 후 결국 댓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남은 용접공이기도 한 모스는 어쩌면 그를 따라붙은 쉬거라는 인간쯤이야 그가 물리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로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대개 운명을 만만하게 보듯이 말이다.
벨은 아버지에 이어 보안관직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악을 응징하겠다는 위대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에 그의 열정이 어쩌면 모두 말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루하루의 평화를 바라며 은퇴를 기다리고 있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가 모스의 뒤를 쫓는 이유는 같은 마을 주민을 보호해야겠다는 최소한의 의무감 때문이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벨은 그의 직업에 필요한 상식,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자꾸만 악해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는 도덕성,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경험으로 얻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건을 추리하는 전문가로서의 능력 등은 지녔으나 악에 맞서 싸우려는 열정과 끈기, 육체적 강인함 등은 없다. 악이란 끈질기게 싸워서 물리쳐야하는 대상인데도 말이다. 평화를 원한다고 악으로부터 피하면 피할 수록 악의 영역만 넓혀주게 될 뿐이다.
아무튼 악에 맞서 싸우기에 벨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고 또 나이만큼 지친 것 같다. 실력에는 도덕성, 전문성, 열정, 건강 말고도 신념 및 목표를 이룰 때까지 '지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은퇴 후 벨은 아내에게 그가 꾼 두 가지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꿈에서 벨은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준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두 번째 꿈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눈 덮인 산에서 말을 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머리를 숙이고 불을 든 채 벨을 지나쳐 앞서 갔다고 했다. 아마도 어둡고 추운 곳에 벨이 도착하기 전에 불을 피워놓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추측을 덧붙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벨처럼, 지켜야할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코엔 형제는 어쩌면 지독한 반어법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단정적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다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뜨겁고 건조한 사막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인생에 지친 벨 같은 노인들이야 점점 거세지는 악에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하더라도, 아직 기운 있는 젊은이들에게서만큼은 악을 상대하여 이겨내려는 끈질김, 열정들을 기대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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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적인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일
영화 <문라이트>를 두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다는 것은 작품을 겉도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문라이트>는 서정성 짙은 퀴어 영화로, 이 영화가 서정성 짙은 퀴어 영화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있습니다. 때문에, 굳이 저까지 이미 나와있는 수많은 좋은 평론들위에 비슷한 한마디를 거드는 것보다는 비록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훌륭한 작품은 답을 정해놓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며, <문라이트>는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아도 이미 다양한 화두를 제시하는 훌륭한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회, 방임된 채로 자라는 빈민가의 아이들, 다름의 이유로 받는 차별의 시선과 폭력, 그리고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문라이트>를 이야기할 때 다룰 중요한 이야기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눈길이 갔던 이 영화의 화두는 ‘정체성’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정해주는 ‘나’, 내가 정의하는 진짜 ‘나’에 관한 정체성말입니다.
영화는 이 정체성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졌습니다. Nomen est omen, 이름은 곧 운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의 성장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보여주는데, 이 세시기에 샤이론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세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주인공 ‘샤이론’과 각각의 삶을 보자면, 각각의 샤이론과 그에게 붙여진 이름을 통해서 샤이론이 폭력적인 세상속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ⅰ, Little
유년기의 샤이론은 가장 작은 존제, ‘Little’이란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덩치도 작고 키도 작은 샤이론은 또래 아이들에게 쫓겨 마약 소굴인 15번가로 도망쳐 온 후 어두운 폐가에 숨어듭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폐가로 친구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숨은 샤이론. 그리고 그런 폐가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돈 후안(마허샤마 알리)입니다. 이 시기 샤이론은 특히 말이 없습니다. 가장 작은 존재이자 약자인 샤이론이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침묵을 지키면서 세상을 관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Little’은 그의 또래들 사이에서 샤이론을 부르는 별명인데, 이 별명은 또래들보다 덩치가 작은 샤이론을 빗대어 비하하는 말입니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은 샤이론을 낮춰 부르지 않고 그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줍니다.
케빈
그는 샤이론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Little’이라고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어떤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우정의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샤이론의 친구 케빈입니다. 케빈은 영화 <문라이트>에서 샤이론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인데, 이 시기 케빈이 샤이론에게 해준 “왜 당하고만 있어?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라는 말은 샤이론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돈 후안.
돈 후안과의 만남은 첫 만남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유년기 시절 돈 후안과의 짧은 만남과 교류는 영화 <문라이트>를 관통하는 주제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특히 해변가에서 둘이 나눈 대화는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유년기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만난 돈 후안은 아버지가 없는 샤이론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며,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마.”
D : “한번은 어떤 할머니를 지나쳐 가고 있었어.”
D : “미친 듯이 들떠서 뛰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잡고는 말했어.”
D :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C : “그럼 아저씨의 이름은 블루인가요?”
D : “아니...”
D :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마.”
ⅱ, Chiron
청소년기의 샤이론입니다. 샤이론은 이제 ‘리틀’이라는, 자신을 놀리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샤이론’으로 불려지길 원합니다. 샤이론은 성장했고, 이제 세상 모든 일에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고 약해보이는 몸은 여전합니다. 때문에 차별의 시선과 폭력앞에서 샤이론의 저항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이름, ‘샤이론’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샤이론. 그것은 샤이론의 이름이긴 해도 샤이론이 선택한 이름은 아닙니다. 때문에, 샤이론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성장의 과도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의 중반에 있기에 적합할 것입니다.
케빈
이 시기 만난 케빈은 샤이론과 깊은 관계로 진전됩니다. 우정처럼 보였던 케빈과 샤이론의 관계는 이 시기에 애정으로 변합니다. 샤이론에게 학교에서 관계를 맺었다며 가볍게 말하는 케빈의 눈빛은 가볍고 철없으며, 목소리와 성대모사는 경박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남성성을 과장하여 드러내어, 또래들에게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샤이론을 대할때만큼은 케빈의 눈빛은 깊고 진지합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 이 시기 샤이론을 괴롭히는 동급생, 테렐은 케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옵니다.
블랙.
학교의 화단 앞. 테렐은 궁지에 몰린 초식 동물을 공격하려는 맹수처럼 누군가를 응시하며 그 누군가를 중심으로 한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테렐이 이빨을 들어내고 달려든 것은 샤이론이 아닌 케빈입니다.
“이봐 케빈. 저 새끼 갈겨. 패버려.”
“그래 저 호모새끼말이야.”
테렐은 겁먹은 케빈을 다그칩니다. 케빈의 앞에 서있는 것은 샤이론입니다. 케빈은 테렐과 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반면, 샤이론은 고개를 높이 들고 그들 앞에 당당하게,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맞을때마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지만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서 똑바로 일어서서 자신을 향한 폭력과 차별의 시선에 마주합니다. 아마 이 순간에, 샤이론은 이제 자신이 겪은 아픔의 크기만큼 성장했을 것이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블랙. 냉수에 얼굴을 담았다가 고개를 들어올린 샤이론의 모습은 말 그대로 블랙입니다. 상처에서는 선혈이 붉게 빛나고, 피부는 검정색이지만,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투영되는 샤이론의 영혼이 가진 색은 더없이 맑고, 밝게 빛납니다. 그의 빛나는 눈빛에는 순수한 결연함과 용기가 녹아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자신의 운명을 찾은 것처럼, 그의 눈빛은 진중합니다.
ⅲ, Black
샤이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테렐을 향한 폭력은 단순한 복수의 감정도 있지만, 케빈을 위한 희생이자 용기이기도 합니다. 케빈은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보이는 세상과 시선에 주눅들어 자신을 감추는데 급급했던 반면, 샤이론은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케빈을 위해 기꺼이 용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당시 경찰에게 연행된 샤이론과 케빈이 나눈 시선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세상과 맞선 자’와 그러지 못한 자의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케빈의 시선에는 어떤 분함이, 샤이론의 시선에는 흐릿한 안정감과 평화가 언뜻 읽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샤이론은 이젠 완벽한 성인이 되었고, 이 시기는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시작하는 한편의 꿈. 유년기 시절 ‘폴라’가 샤이론에게 했던 말, “쳐다보지 마!”라는 고함과 함께 잠에서 깨며 블랙의 삶이 스크린에 나타납니다. 꿈에서 깬 블랙은 세면대에 받아놓은 얼음물에 얼굴을 담았다가 꺼내는데, 이때 그의 피부는 달빛이 아닌 인공 조명의 빛을 받아서 푸르게 빛납니다. 이 두 개의 컷은 샤이론이 더이상 과거와 같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습다. 이 두 장면은 자신의 검은 피부를 인공 조명의 푸른 빛으로 물들이는 ‘부정’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푸른 빛을 뒤집어 쓴 샤이론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푸른 빛은 그의 본래 색위에 덮어 씌워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는 그가 가진 본래의 피부 색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겉모습을 근육질로 다부지게 만들어도 오랜만에 만난 옛 사랑과 엄마의 말 몇마디에 눈물을 흘리는 그의 변하지 않는 여린 내면처럼, 지워질 수 없는 그의 검은 피부색 위에 블랙은 푸른색을 덧칠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이름.
흐릿하게 보이는 잔상. 푸른 바다, 푸른 달빛. 도대체 누가 푸른 달빛아래에서 흑인아이들도 모두가 푸른 빛을 낸다고 했던가요? 아이들은 푸른 세상에서 모두가 자신의 색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연스럽게도, 푸른색이 그보다 더 짙은 검정색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죠. 이 잔상은 샤이론이 점차로 세계속에서 자신의 색을 되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되찾은 색은 그의 이름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누군가가 지어준 것이지만, 동시에 그가 선택한 이름입니다. 바로 케빈이 샤이론을 부르곤 했던 별명, ‘블랙’입니다.
영화는 샤이론의 세 시기를 보여주며 그의 성장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시기, 샤이론을 칭하는 이름의 의미는 모두 다릅니다. ‘리틀’은 샤이론을 둘러싼 세계가 정해준 이름. ‘샤이론’은 태어나기전부터 부모가 정해주었으며, 샤이론 역시 옳다고 생각하는 이름. ‘블랙’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인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며 선택한 이름입니다.
영화 <문라이트>가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사랑’의 역할이 크다는 데에 있습니다. 리틀은 돈 후안과 테레사의 사랑으로 샤이론으로 성장했고, 샤이론은 케빈과 테레사의 사랑으로 성장했으며, 블랙은 폴라와 케빈의 사랑으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정의하는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며, 그들의 사랑속에서 위로받고 한 뼘 더 성장해갈 것입니다.
푸른 빛의 상흔, 지워지지 않는 블랙
이 영화는 어린 리틀을 다시 호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푸른 달빛아래,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 온통 푸른 세상속에서 홀로 서 있는 아이. 온통 푸른 세상이지만, 아이는 그 안에서 여전히 자신의 색을 유지하고 꼿꼿이 서있습니다. 군데군데 푸르게 빛나는 아이의 피부는 아름답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푸른 빛이 아이가 가진 검은색의 피부위에 침투해있기에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아니, 그렇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르죠. 검은 피부위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은 세상이 애정어린 손길로 샤이론에게 칠해준 아름다운 반사광이 아닌, 세상이 폭력적으로 모두에게 칠해버린, 일종의 상흔입니다.
때문에, 달이 세상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칠해놓은 푸른 빛과 자신의 본연의 색을 함께 갖고 있는 샤이론의 모습을 담은 <문라이트>는 폭력적인 세계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켜내는 인간상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온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도 세상과 당당히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서정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문라이트>의 이전과 이후로 한동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데미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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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선택한 소녀
모아나
줄거리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고, 드넓은 바다가 사방 천지에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섬, 모투누이.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족장의 딸 '모아나'는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유일하게 쫄지 않았던 아이이기도 하다. '테 피티'여신의 심장을 훔친 '마우이'라는 영웅을 찾아서 '테카'를 잠재우고 심장을 돌려놔야 한다는 옛 이야기. 사람들은 다 그거 헛소리라고 해도 할머니는 모아나에게 너가 바로 바다에 선택된 아이라며 얼른 배 타고 나가라고 꼬신다.(물론 진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을 뿐.) 할머니는 모아나가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도, 그러면서도 바다 근처를 서성거리며 망설여도 그저 바라보고 모아나의 선택을 존중한다.
모아나는 물론 너무나 바다로 나가고 싶지만, 완강한 아버지는 모아나가 족장의 자리를 지켜서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난리다. 그러나 책임감 스웩 넘치는 아빠도 언젠가부터 섬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을 감지한다. 할머니는 이 때다 하면서 심장을 돌려놓지 않아서 저주가 온 거라고, 모아나에게 원래 이 부족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일깨워준다.(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뭐, 예상하겠지만 결국 모아나는 바다로 떠난다. 바다가 나를 선택했다는 것 하나만 믿고!
책임지는 방식에 대하여
숨은 의미 찾기
디즈니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고전적 공주들로 큰 흥행을 거두었지만, 그 공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공주의 상은(이보시오, 관상쟁이 양반. 내가 공주가 될 상인가? feat.이정재) 아니었던 것 같다.
모법답안처럼 여겨지는 옛 공주들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새로운 공주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시도를 통해 '포카혼타스/ 뮬란/ 미녀와 야수/ 벅스라이프의 개미공주' 같은 공주들 말고도 '타잔의 제인/ 인어공주의 딸/ 인크레더블의 헬렌' 처럼 여러 여자주인공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해서 정착한 공주들이 바로 '공주와 개구리/ 라푼젤/ 메리다와 마법의 숲' 속의 공주들이었다. 여기서 잭팟 터진 게 바로 '겨울왕국의 엘사(feat.레리꼬)'였던 것이고. 그러나 디즈니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있는 더 많은 공주들을 발굴하고자 한다. 그런 시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모아나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대를 잇거나, 가문을 책임지거나, 책임을 지는 것은 보통 남성의 역할로 도드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극성 부모님을 만나면 누구나 다 똑같을 거다. 마치 모아나처럼. 이렇게 말하니 마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모아나는 분명 '디즈니가 최종적으로 다다랐던 공주들'과는 다르다.
보통 주인공에게 어떤 책임이 주어지면 '책임 vs 자유'의 구도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책임을 분배하는 방식이 이분법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엘사와 모아나의 구도를 비교해보자면,
엘사 :'왕국에서 자신의 힘을 숨기고 훌륭한 여왕이 되는 것 vs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모아나 :'족장이 되어 사람들을 바다로부터 지켜서 책임지는 것 vs 바다로 떠나 섬의 저주를 풀어 사람들이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책임지는 것'
이라는 상황에 놓인다. 엘사와는 달리 모아나는 '책임 vs 책임'의 구도를 갖는 것이다. 거기에 바다로 떠나는 것이 자신의 자유임과 동시에 부족의 정체성을 찾는 모험이기도 하다. 모아나는 아빠가 찾지 못했던 새로운 책임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번에 디즈니가 말하고자 한 것은 '책임지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전에 인크레더블 2를 리뷰할 때, 제작진이 세대교체를 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특이한 것은, 모아나를 격려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조언하는 것이 할머니라는 점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모아나를 흔드는 것이 바로 아빠다. 이로써 두 종류의 어른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자신의 편견에 휩싸여,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른은 진실을 알려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가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결국 공생하며 서로를 돕고 도움 받으며 살아야 한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지혜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세상은 변한다. 문제에서 도망쳐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회피하고 그저 참기만 하던 옛날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부딪히고, 직면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전세대에게 말하고 있다.
젊은 층에게 자리를 양보하되,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짜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선택받은 게 아니다
감상평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단연 90년대생이다. 세대교체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세대를 무시하거나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꾸려나갈 준비를 해야한다. 그 방식이 설령 믿을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시도조차 못하게 막는 것은 이전세대의 권력남용이다. 늘 새로운 것은 비난받았지만, 세상을 바꾼다.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아직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마우이'는 '모아나'와 같은 처지이다. 전설의 영웅이라 불리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철부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모아나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길을 선택했지만,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막막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은 마음이 통하는 동료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족한 점을 배우고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함께' 결말을 만들어낸다. 뱃머리가 약간 삐그덕거려도, 거센 물살에 가끔은 심하게 흔들릴 지라도, 배가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 모아나는 관객을 하나의 지점으로 이끈다.
우리 인생은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가끔은 큰 파도를 만나서 다치기도, 누군가를 잃기도 한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배를 만나고 무인도를 찾고,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항해를 멈출 수는 없다. 가끔씩 지독한 인생의 파도에 너무나 지쳤을 때, 내가 발견했던 땅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물론 너무 마음에 드는 땅이 생긴 사람은 그곳에 정착할 수도 있고, 뭍보다는 파도의 스릴을 즐기는 사람은 땅에 발 디딜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 수도, 땅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영화 속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뭉친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한 바다라는 모험을 즐기고, 그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결국 모아나가 책임진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마우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졌다.
때로 항해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어디로 끌리는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언젠가는 바다 위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답은 언제나 나에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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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스타일 리메이크 / 로코의 정석 /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진영 다현 / 대만 원작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드크레딧과 함께 사진들이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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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퍼스> 메인 예고편
고립된 섬에 나타난 시체와 금괴
그날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육지와 동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작은 무인도.
이 섬의 등대를 관리하는 ‘토마스’, ‘제임스’, ‘도널드’는
난파된 보트에서 남자의 시신과 금괴가 든 나무상자를 발견한다.
시신을 없애고, 금괴를 나누어 가지기로 한 세 사람.
그러나 상자를 찾아 낯선 사람들이 섬에 나타나고,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100년간 풀리지 않은 ‘그날’의 미스터리
숨겨진 진실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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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스펙트> 30초 예고편
내면의 폭풍을 이겨낸 강한 여자
세상을 바꾸고 영혼을 위로한 환상의 디바
아레사 프랭클린.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