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4-21 19:43:17
야당 | 도구로 버려지기 싫었던 야당의 복수극
<야당>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익숙함 속 틀린 그림 찾기
한국 범죄 영화에는 익숙한 그림이 있다. 검사와 경찰은 항상 싸우기 마련이다. 검사의 일방적인 수사 명령에 끌려다니는 경찰은 한탄을 멈추지 않는다. 과거 시점이라면 검사가 경찰의 횡포에 짜증 내는 정반대 상황도 볼 수 있다. 정치인, 검사, 언론인의 회동도 빠지지 않는 광경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위해 끌어주는 이 그림은 <내부자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에 유독 핫한 그림도 있다. 마약이다. 버닝썬 게이트 전후로 한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도 대동소이하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마약 투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재벌 및 유력 정치인 자제와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마약 수사는 부패 사건 수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베테랑>, <더 킹>, <모범택시> 등 많은 작품이 정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야당>도 익숙한 그림으로 가득하다. 정치인, 검사, 언론, 마약 조직의 연계와 부패, 비리를 고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사기관 간의 갈등, 연예인 가십 등도 빠지지 않고 활용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야당>은 뭔가 다르다. 익숙한 그림 구석구석에 틀린 그림이 숨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사건이 아닌 인물, 특히 같은 듯 다른 두 '야당'이 대조되는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
야당은 마약사범들 중 경찰이나 검찰 등의 수사 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들을 일컫는 은어다. 수사 기관과 범죄 조직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일종의 이중첩자인 셈이다. 자연히 그들의 성격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에게 그들은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수사를 위한 도구이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한 그들은 도구로써 기능하지 않으니까.
<야당>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야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수는 경찰에게 마약 조직 정보를 주고, 검거에도 참여한다. 경찰은 강수의 조력을 받아 실적을 올리고, 강수는 체포된 마약 사범의 형량 거래에 참여해 수수료를 받아간다. 둘 모두 서로 이익이 맞으니까 협력하는 경찰과 야당은 꼭 악어와 악어새를 보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악어와 악어새의 우정도 보여준다. 과거 마약 판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강수. 관희는 그에게 자신의 야당이 되라고 제안한다. 마약 조직에 잠입해 정보를 알아내면 감형해 주겠다는 것. 강수의 노력 덕분에 마약 조직을 소탕한 관희는 승진 가도를 달리고, 강수는 출소 후에도 야당 일을 하면서 떼돈을 번다. 그렇게 관희의 수단이었던 강수는 그의 목적이 된다. 커플 시계를 나눠 끼는 의형제로 발전할 정도로.
수단과 목적이 전복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야당>은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다. <야당>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전복하면서 예기치 못한 감정적 동요를 선사한다.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 관희와 강수. 그런데 대통령 후보 아들 '조훈'(류경수)이 파티에서 발견된 순간, 그들의 관계는 급반전된다. 관희는 권력을 위해 강수를 내친다. 관희의 목적이 된 줄 알았던 강수는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해서 중독자가 되고, 다리에도 화상을 입은 채 도구로서 버려진다.
또 다른 야당과의 대조를 이루면서 강수의 비참한 처지는 더 강조된다. 상재는 마약 수사 중 입건된 '엄수진'(채원빈)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마약 공급책, 마약 파티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면 풀어주겠다고. 하지만 거래는 수포로 돌아간다. 상재가 쫓던 용의자를 관희와 강수가 가로챈 것. 결국 수진은 마약 사범이 되고, 상재는 검찰과의 갈등으로 인해 소송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상재와 수진의 관계는 강수와 관희와는 달랐다. 관희에게 복수하려는 강수가 도움을 요청하자 상재와 수진은 복수심 외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협력한다. 상재는 수진과의 약속을 못 지켰다는 자책감에, 수진은 죄책감을 못 떨치는 상재에 대한 연민 때문에. 도구로서 만났지만 진정으로 아껴주는 목적이 되어주는 관계성의 변화는 수진에게 역경이 닥쳐도 상재가 끝까지 관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의외의 특별함
그래서 <야당>은 의외로 감정적이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이의 복수, 서로를 지켜주지 못했던 약자들의 연대에 집중한 덕분이다. 그저 주인공 직업이 검사나 경찰이라서 정치권 및 재계와 엮일 뿐이지,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한탄이 사회적, 정치적 교훈보다 중요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는 관희와 조훈의 관계와 피해자 세 명이 이루는 대조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욕으로만 뭉친 관희와 조훈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훈의 마약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관희가 상재가 강수를 통제하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갈등을 빚기 일쑤다. 이처럼 불협화음이 가득한 관계성 덕분에 배신당하고 버려진 자들의 연대는 더욱 빛날 수 있다.
주인공들의 관계성에 집중한 덕분에 <야당>은 덜 작위적이기도 하다. 정의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형사, 맹목적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검사나 정치인 같은 캐릭터는 없다. 대부분의 인물은 적당히 탐욕스럽고, 정의롭다. 이 양면성 덕분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도 자연스럽다. 관희가 한순간에 강수를 내치는 결단을 내려도, 악연으로 만난 강수와 상재의 관계가 동료로 전환되는 과정도 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화를 패러디하는 연출도 연장선상에 있어서 자연스럽다. 사회 비판을 위해 실화 사건을 어설프게 풍자하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은 답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전을 주는 장치로써 평연하게 활용한다. 강수는 '우병우 황제 조사 논란'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관희에게 복수한다. 정치 권력과 검찰 권력의 유착 관계를 폭로하는 이 장면은 예측과는 달라서 유효한 반전이고, 그렇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풍자라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관성을 뛰어넘는 재미
다만 <야당>은 한계도 명확하다. 관성적이라는 인상은 떨쳐내지 못했다. 캐릭터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수진은 더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다른 범죄 영화에서 단순히 마약 범죄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 역할 이상의 존재감을 뽐낸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려고 직접 움직이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런데 <야당>은 그녀를 다른 캐릭터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소비하고 말았다.
야당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 구조적 측면을 깊이 건드리지 않은 선택 또한 한계로 볼 수 있다. <야당>은 관희와 조훈의 최후만 보여준다. 그들과 결탁한 다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눈에 보이는 바퀴벌레만 잡을 뿐, 근원적인 문제까지는 굳이 건들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야당>의 사회 비판은 자칫 얄팍한 인상 비평처럼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지만 <야당>은 여전히 거절하기 힘든 영화다. 익숙한 그림을 차별화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는 잘 끓인 김치찌개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기시감이 짙더라도 먹다 보면 의외의 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마약 사건의 자극성이나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경도되지 않은 채 소재의 특성에만 집중한 스토리텔링이 되짚을수록 영리하고,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익숙한 프레임에서 틀린 그림 찾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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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갑게 몰아치는 웃음, 짙어지는 슬픔의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은 미간 사이에 삼각형 모양으로 잡히는 주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영화는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미용 업계에서 쓴다는 용어를 제목으로 쓴 걸까요?
제7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슬픔의 삼각형>은 다름 아닌 계급 전복 코미디입니다. 절로 <기생충>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죠. <기생충>도 제72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칸 영화제의 취향을 조금은 알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칸 영화제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안쪽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던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를 이제는 눈감아 줄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뜻일지도 모르죠. 칸의 선택을 받은 작품이라서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린 작품이라서든, 어찌 됐든 볼만한 작품 <슬픔의 삼각형>을 소개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슬픔의 삼각형>의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슬픔의 삼각형>은 2023년 5월 1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슬픔의 삼각형>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초호화 크루즈의 부자 탑승객들이 외딴섬에 고립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앞으로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놓을 것인지 시작부터 과감하게 드러냅니다. '발렌시아가 표정'과 '에이치엔엠 표정'을 번갈아지어 보이는 남자 모델들을 통해서 말이죠. 소비자를 내려다보는 듯한 도도한 눈짓은 '발렌시아가 표정'이고, 모두에게 편안하고 관대한 포용적인 눈짓은 '에이치엔엠 표정'입니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다른 이유는 두 브랜드가 타깃으로 삼는 소비자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인데요. 이 사실을 아는 관객들은 1초 단위로 표정을 바꿔 짓는 모델들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분명한 진실 하나를 깨닫게 되죠. '부정하고 싶어도, 현대 사회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풍자를 도구 삼아 바로 이 '현대 사회 속의 계급'을 철저히 짓밟아 나갑니다. 바다 위의 고급 크루즈와 무인도는 모두 외부와 단절된 세상, 한 마디로 갇힌 공간입니다. 갇힌 공간은 언제나 매력적인 영화의 소재로 기능합니다. 고립되는 것만으로 이 안에서 만들어지는 규칙이 속세의 법과 풍습보다 우선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특징을 활용해 감독은 갇힌 공간을 풍자극의 무대로 만들어 버립니다.
위선을 행하며 부와 재력을 과시하던 부자들은 거센 비바람에 휘청거리는 배 안에서 만찬을 즐기다가 구토와 분뇨에 뒤범벅되고 맙니다.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구토와 분뇨를 부자 계급과 연결지음으로써 품격 있던 그들은 한없이 우아함과 멀어집니다. 감독은 글자 그대로 부자 승객들을 구토와 분뇨 위에 데굴데굴 굴려버리죠. 극 중 인물들이 뿜어대는 토사물은 특수효과나 연출이 아니라 실제 배우들의 구토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구토와 분뇨는 본능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웃음 치트키'지만, 팡파르처럼 터져 나오는 토사물과 똥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게 됩니다. <슬픔의 삼각형>은 '현대 사회 속 계급'을 향해 보내는 매서운 눈초리를 더러움으로 표현하려는 듯, 상상 그 이상으로 지저분한 묘사를 해냅니다. 따라서 비위가 약하시다면 감상을 무척 주의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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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마냥 웃기기만 하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계급 차별, 인종 차별, 성 차별, 남녀 관계와 페미니즘, 자본주의의 모순 등 논쟁적 주제들이 치고 들어오는 통에 마냥 웃을 수가 없다고 해야 정확하겠습니다. '끽끽-'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면 아무리 즐거운 상황에서도 괜히 예민해지듯이 말이죠.
그렇게 약간의 불편함을 안고 영화를 보다 보면 종국에는 또 하나의 진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직 생존력만이 중요해진 외딴섬에서 사람들의 계급, 인종, 성별의 차이는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게 부자 승객들의 구토와 분뇨를 청소하던 크루즈의 청소부이자 필리핀 여성인 '애비게일'이 그곳의 우두머리이자 캡틴이 됩니다. 그녀가 이곳의 캡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돈의 가치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녀가 바깥세상에서 캡틴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그곳이 오직 돈의 가치만이 있는 세상이었기 때문이죠. 계급, 인종, 성별을 아우르는 모든 논쟁적 주제의 핵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총 3부로 구성된 <슬픔의 삼각형>에서 외딴섬의 이야기는 3부에 등장합니다. 3부는 계급, 인종, 성별을 전복하고 캡틴의 자리에 오르는 '애비게일'의 역할이 무척 중요한 파트인데요. 3부의 끝자락에서 '애비게일' 역을 맡은 배우 돌비 드 레온이 선보인 표정 연기는 이 영화의 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애비게일'의 얼굴에 강하게 드리운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있으면, 제 미간 사이의 슬픔의 삼각형이 함께 짙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기생충> 속 인디언 모자를 쓰고 '박사장'을 바라보던 '기태'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하죠.
영화는 상영 시작 후 5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슬픔의 삼각형'의 의미를 밝힙니다. 따라서 관객은 장장 2시간 30분에 이르는 상영 시간 내내 이것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되죠. 의미를 곱씹으며 영화의 여정을 따라 흘러가던 관객은 마침내 종착지에 다다라서야 '애비게일'의 얼굴에 선연하게 자리한 슬픔의 삼각형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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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슬픔의 삼각형>에는 화각을 넓게 잡아 화면 속 인물을 실제보다 멀리 보이게끔 연출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말입니다. 더불어 흔들리는 배 안을 실감 나게 연출했던 섬세한 촬영 기법도 인상적이었죠.
'애비게일' 역의 돌비 드 레온의 연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입니다. 자본주의를 죽도록 싫어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크루즈의 괴짜 선장 '토마스' 역의 우디 해럴슨, 인플루언서의 지질한 남자친구 '칼' 역의 해리스 디킨슨, 그리고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플루언서 '야야' 역의 샬비 딘까지. 그래서 지난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배우 샬비 딘의 죽음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더 많은 작품에서 펼쳐질 호연을 기대케 했던 그녀의 유작을 극장에서 꼭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Summary
호화 크루즈에 #협찬 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각양각색의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구조 대기뿐인 사람들… 이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출처: 씨네21)
Cast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출연: 우디 해럴슨, 돌리 드 레온, 샬비 딘, 해리스 디킨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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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내가 쓸모 있나요?
HOLY
Belgium/Netherlands/Luxembourg/France /2023/102min
핀 트로흐 Fien TROCH /월드 시네마
2023년. OTT 시장을 뒤흔든 작품이 있다. 바로 디즈니플러의 <무빙>이다. '무빙앓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무빙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한번쯤 해본 상상의 능력이 우리의 이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접근성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명한 명대사가 있다. 바로 초능력자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평범한 공무원이 된 남편에게 아내가 한 말.
"넌 나의 쓸모야"
영화 <HOLY>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십대소녀의 이야기다. 우리 곁에서 어디서든 볼수 있는 십대 소녀 홀리. 어느날 불길한 마음이 가득하여 학교에 가지 않는데, 이는 그날 하교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부터 그녀를 구해준다. 이러한 예지력이 있지만 학교에서는 마녀라고 취급당하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남자친구와 언니만이 유일한 대화상대이다. 그런 홀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선생님은 홀리를 자원봉사활동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거기서 홀리는 다른 사람을 만지기만 해도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켜주고, 슬픔을 경감키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나 배경이나 엑스트라 같은 삶을 살던 홀리. 놀라운 능력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홀리를 찾게 되고 그 혼돈의 시간속에서 홀리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영화의 서사는 어느덧 찾아온 가을처럼 스며들게 만든다. 이미 <썸원 엘스 해피니스><2005>를 통해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감독의 핀 트로흐는 섬세한 십대의 감성과 함께 누군가에게 주어진 능력이 축복이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한 상황을 잘 그려나가고 있다. 특별히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여 주인공으로 열연한 배우 카탈리나 게라츠의 연기는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혼돈시킬만큼 몰입하게 만든다.
감독은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단어를 던지고 싶었다고 영화전 인터뷰영상에서 언급한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 어린 위로는 상대를 믿고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만 가능한것을 이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커다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타자가 아닌 사물화 시키는 모습은 결국 인격을 말살 시켜버린다는 경고 또한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을이 오는 이 계절에 <홀리>는 타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잃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내가 당신에게 필요할까요? 그렇다면 천천히 나의 손을 잡아보시겠어요?"
어쩌면 영화 <홀리> 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쓸모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답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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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공단
위로공단
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예술 작품은 1990년대 이후로 찾아보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폭력을 휘두르던 시기와 노동운동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노동자는 1960년대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든 '산업화' 전략의 결과물이다. 그 전까지 농업국이던 한국이 경공업 제조를 시작으로 '수출입국'을 국가의 경제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독재정부와 자본가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독재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정책은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직접 타격을 가한다. 박정권은 농민의 삶에 기본이 되는 쌀값을 '저곡가 정책'으로 유지하면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와 공업단지의 노동자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든다. '저곡가 정책'은 박정권에게 일석이조의 이득이 있었는데, 농민에게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도시에 사는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은 주식인 쌀을 싸게 사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저곡가 정책'은 도시와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저임금' 구조로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태어난 세대는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로, 인구 전체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들이 성장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박정권이 산업구조를 농업에서 경공업으로 이동하던 시기였고, 농촌에는 '잉여노동'이 넘쳐나고 있었고,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경공업 분야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할 조건이 갖춰지고 있었다.
청계천 섬유 노동자 - 거의 대부분 여성이며, 어린 여성들이었다 - 들이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하면서 받는 임금은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다는 전태일 열사의 기록도 있는 것처럼, 이 시기의 노동자는 인간 이하의 처우에서 고통당하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직접적 원인도 노동조건의 열악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노동자로 처음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1975년 무렵이었다. 동네에 있는 대나무 낚시대 공장이었고, 가내수공업 규모였다. 두번째는 압핀을 만드는 공장이었고, 세번째는 유리병 만드는 공장이었다. 모두 작은 공장이었고, 노동자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노동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고, 임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저임금에 단조로운 노동으로 인간성이 말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장 노동자로 산다는 건, 자본의 노예라는 거창한 이유를 떠나 원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단조로운 노동을 오래 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심각한 고통이다. 나는 공장을 떠나 건설현장으로 옮겼다.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건설현장은 공장 노동보다 더 힘든 부분도 있지만, 공장의 부품처럼 움직여야 하는 기계적, 반복적, 단조로운 노동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면이 많은 것이 장점이었다. 게다가 임금도 공장보다 많았다.
육체노동은 힘들었지만, 한곳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율성이 상당히 있고, 숙련도에 따라 임금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어서 나에게는 공장보다 건설현장이 더 좋았다. 길지 않은 공장 생활에 질린 나는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구나 건설현장은 지방으로 다니면서 오히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보다 더 좋은 환경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 지방을 전전하며 건설노동자로 일하다 군대에 다녀왔고,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때가 1987년 무렵이었고, 나는 구로공단에 있는 작은 도금공장에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순간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목격했다. 이 시기의 구로공단은 197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은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고, 상당수 노동조합이 민주노조였다. 노동조합의 절대 수가 늘어난 것은 1987년 이후였고, 공단 주변의 닭장집, 벌집은 그때도 남아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경공업 분야의 공장에서 노동착취와 열악한 노동환경이 심했고, 그만큼 노동운동의 투쟁력도 강했다. 여성들은 약하지만, 여성노동자는 강했다. 그들은 끈질기게 투쟁했고, 온갖 물리적 폭력과 모욕을 견뎠다.
영화에서는 1970년대 닭장집이 나오고, 인분을 뒤집어 쓴 여성노동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독재를 거쳐 19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 군사독재까지 무려 27년 동안의 군부독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은 '빨갱이'로 매도당하며 처절하게 짓밟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사회는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이전했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사회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 전반의 확대와 노동자의 삶도 나아졌다. 한국전쟁 이후 수천만 명의 노동자의 피와 살을 갈아넣어 이룩한 산업화는 자본가의 배를 불렸으며, 노동자에게도 아주 적은 몫이 돌아갔다.
기업은 성장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자본가가 배를 불리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개선이었으며, 그마나도 1997년 구제금융 사태가 발발하면서 노동자의 삶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에서는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임시직, 이주노동자와 같은 수 많은 갈래와 분류가 나타났고, 이는 노동자를 쥐어짜고, 경쟁시켜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자본의 의도가 짙게 깔여 있었다.
영화에서는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고통 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기업이 외국에 진출해서 그 나라의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노동현실, 이랜드 노동자, 마트 노동자, 항공사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물리치료 노동자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육체적, 감정적 노동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데, 노동의 형태와 조건은 조금씩 좋아졌을 수 있고, 달라졌지만, 본질에서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노동자는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며, 임금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는 비자율적 존재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는, 사슬 없는 노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노동운동' 등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자본가와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하고도 노동자와 그 가족은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정작 노동자들은 자기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왜곡된 사회 체제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는 특권 계급이 되었으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임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자신들과는 다른,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기괴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오늘 날,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는 외로운 메아리가 되었다.
노동자의 분열을 가장 기뻐하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를 더 쉽게 해고하고, 임금을 낮추며, 노동조건을 나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고, 노동자는 자기들의 노동으로 번 돈이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노예 상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본이 던져주는 약간의 먹이를 받아먹으며 고마워할 뿐이다.
영화는 노동자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의 개인적 삶에 주목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어머니가 동대문에서 섬유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서 주목받았던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한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만으로 지나온 과거의 노동 조건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증언한다. 그리고 그런 열악하고 비참한 노동 조건과 현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도 말한다. 예전에는 '감정노동', '정신노동'이라는 개념도 없었지만, 모든 육체노동자는 감정노동과 정신노동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걸 자본가는 모른 채 할 뿐이다. 노동자의 인권은 과거보다 향상되고 있지만,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와 비교할 때 이중, 삼중의 차별을 받고 있으며, 저임금, 성적 학대, 동등한 기회의 박탈 같은 심각한 차별과 싸우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는 독재정권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악과 싸워야 했고, 그래서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부르주아정부와 자본은 더욱 교묘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하고 착취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단결, 투쟁하기가 과거보다 더 어렵다. 형식은 달라져도 노동자가 당하는 결과는 늘 똑같다. 일자리를 뺐기고, 돈을 벌 방법이 사라지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남지 않는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것을 아는 노동자는 두려움에 떨며 자본의 폭력 앞에 납작 업드려 죽은 듯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게 된다.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인데, 지금 '신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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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처럼 펼쳐지는 자백, 끊임없이 수렁에 빠진 진실.
리메이크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원작을 먼저 만나보고 영화 '자백'을 관람하기로 했다. 리메이크 특성상 기존 원작을 따라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영화가 굉장히 많아서 기대감을 한껏 낮추고 갔다. 막상 영화를 보니 흐름의 묵직함이 몰입감을 더하고 연극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책을 보는 것처럼 페이지가 굉장히 빠르게 넘어간다. 낯선 지역의 모습이 아닌 현실에 있을 법한 모습이 영화에 담기고 원작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이야기를 잘 풀어낸 영화 '자백'을 소개한다.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아 호텔로 향한 유민호는 그곳에서 습격을 당한다. 깨어나 보니 함께 있던 김세희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범인은 사라진 상태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그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는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을 말하는 듯 하지만 빈틈은 또다시 떠오르는 진실로 인해 끊임없이 벌어지며 두 개의 사건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와 연결된 그날의 진실은 함정일까 누명일까. '고통 없는 구원은 없다'라는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작용처럼 느껴진다.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일련의 고통인걸까 라는 물음을 뒤로한 채, 익숙한 장면에 반전을 주고 그 반전에 싸늘함까지 더해져 이야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영화의 분위기가 연기처럼 흩어지다가 어떤 형태로 머무른다.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알듯 말듯 좁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자백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것일지 거짓을 숨기기 위한 거짓일지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메이크 영화를 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원작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원작 '인비저블 게스트'는 이야기의 흐름과 선에 주목했다면 영화 '자백'은 감정에 주목한다. 따라서 원작을 감상하고 보아도 다른 느낌을 주기에 상당한 몰입감을 쥐어준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진지한 고민과 생각이 곳곳에 담겨 디테일을 살리고 원작과는 다른 부분들을 살려 몰입감을 더한다.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통해 살아 숨 쉬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감정이 너무 솟구친 탓에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중반부부터 흐트러지는 이야기에 몰입감이 깨진다. 연극 같은 영화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 빈틈을 채우면서도 뭔가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 유독 찝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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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색감과 촬영, 눈을 사로잡는 도둑 같은 영화
'이 영화 뭐지?' 예고편으로 내용을 알 수 없고, 포스터로는 더더욱 알기 힘들어서 '이 영화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보게 된 영화였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기 때문에 흥미로움이 더해지긴 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특별한 매력이나, 영화의 퀄리티 등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갖고 있는 습관 중 하나가 볼만한 영화가 생기면 이전 사람들이 남겨놓은 리뷰를 먼저 본다는 점인데 사람들 사이에서도 극한의 호불호가 나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지루한 데다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팀 버튼의 기묘한 상상력과 샤갈의 색채감을 아우러놓은 환상의 명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앤더스 감독의 작품은 <개들의 섬>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사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었던 터라 그냥 무작정 영화를 트는 것이 전부였다. 큰 기대 없이 영화를 틀고 난 뒤 100분 동안 마법같이 영화를 감상했다. 스토리는 빼더라도, 자꾸 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포스터만 보고 들어온다면 영화의 내용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로맨스나 드라마를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이게 웬 걸, 범죄 추격 스릴러에 좀 더 가까운 영화였다. 물론, 스릴러라기 보단 미스터리 모험물에 좀 더 가깝지만 말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적으로 긴박감이나 긴장감은 거의 전무하다고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다. 미스터리 모험물인데 과정이 긴박하지 않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 역설적인 장르를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의 배경이나 공간 자체를 아주 비현실적으로 비틀어놓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개를 이어간다. 게다가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기보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듯 흘러가고 각 지점마다 '막'을 만들어놓음으로써 마치 잘 짜인 연극을 감상하는 듯 한 기분을 들게 한다. 때문에 영화 중반부로 가는 데까지도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알 수 없는 영화인 데다가 현실감도 떨어지는데 어떻게 이 영화가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사랑받는 이유를 꼽자면 이 영화를 논할 때 가장 우선시되는 것. 바로 색감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바탕이 되는 분홍색과 더불어 연한 색감으로 도배된 영화는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타 영화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분홍색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오묘하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특정 장면들의 지점에서 색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하거나, 연속되는 장면들 속 전환 지점에서 색감을 유지하거나, 탈락시킴으로써 극적인 전환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속 메인이 된 '분홍색'은 사랑과 순수함을, 호텔의 유니폼인 '보라색'은 신비로움과 고급스러움을, '푸른색' 계열의 차가운 색깔은 살인이나 추격 등 스토리의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배경의 전체적인 톤은 '노란빛' 사실은 베이지에 더 가까운 색으로 구성함으로써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관객의 눈을 자극 없이 편안하게 이끌고 간다. 가히 색으로 시작해 색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되지 않을 영화이다.
색감만큼이나 다채로운 건 바로 촬영 기법이다. 대칭 구도와 평면적 화면 활용을 통해 비주얼적인 매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또한,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1인칭을 활용하거나, 줌, 트랜지션(화면 전환 효과)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인물에 포커스를 두는 장면이 유난히 많은데 전체적인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인물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스토리를 전개함으로써 상세하고도 세밀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돋보인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점은 바로 화면 비율인데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대에 맞춰 환면 비율을 계속해서 바꾸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1930년대에는 1.37:1, 60년대에는 2.35:1, 80년대에는 1.85:1로 구성함으로써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 시대 전환에 기본적인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순서에 압박받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다만, 현대 사회 영화 비율에 비해 좌우가 좁기 때문에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배경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샷이나, 여백을 많이 두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색의 대비를 통해 인물의 성격과 존재를 부여하고, 각종 소품들을 활용해 인물의 가치관과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존 영화들도 자주 사용하던 연출 방법이다. 다만, 웨스 앤더슨 감독은 더 디테일하고 치밀하게 설계함으로써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영화 속으로 은연중에 빠져들게 만든다. 완벽한 미장센의 향연과 강박증을 의심케 하는 감독의 연출은 놀랍고도 소름이 돋는다. 대칭구조만 보더라도 철저하게 각이 잡혀있는 데다가, 소품과 도구 하나하나마다 배치 위치와 카메라와 맞춘 높이 등 섬세함이 돋보인다. 영화의 연출이나 구도가 가진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의식하지도 않은 채 홀린 듯이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기법들은 영화가 가지는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색감이나 촬영만큼 스토리도 매혹적이긴 하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누명과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설정이 다소 진부하긴 하지만 이만큼 매력적인 클리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미스터리 모험물이라고 해서 으스스한 분위기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매료시키는 코미디 요소들도 영화 전반적으로 적절히 배치해놓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 한 편이다. 생각보다 놀랬던 점은 간혹 드러나는 장면 연출이 굉장히 원색적인데 손가락이나 목이 잘려 피가 튀거나, 성행위를 연상시키거나 하는 장면들이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여러 번 등장한다. 지루한 전개인가 싶어 넋 놓고 있다가 당할 수 있다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초반에는 지루한 면이 있고, 중반부까지 흐름을 읽을 수 없는 다소 복잡한 불편함이 있지만,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속도감이 붙어 부담 없이 넘겨볼 수 있도록 스토리를 구성했다. 다만, 기승전결 중 전과 결 파트가 지나치게 허무한 감이 있다. 밀당없이 당기기만 하다가 영화가 끝나버린 기분이라 아쉽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장센과 연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호'의 평은 피한 듯하다.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지만 아마 '향수'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액자 속 액자식의 구성을 따라 인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스토리 또한 아마 '과거'를 이야기하며 전해져 오는 향수에서 오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한 제로 무스타파(토니 레볼로리 분)의 '내 생각에 그의 세상은 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라졌네. 그는 그저 자신의 환상 속에서 멋지게 산 거지'의 말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향수는 결국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오며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그 안에 투과되는 진짜 삶은 현대에 존재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허상이 아닌 현실에 살아가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다. 때문에 영화 속, 향수의 허상을 벗어난 진짜 그리움을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했던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와의 실존하는 기억만을 추억할 수 있는 제로 무스타파뿐일 것이다.
클래식하고도 세련미가 넘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오래간만에 눈이 즐거운 영화를 봤다. 앞서 말했지만 100분의 러닝타임 동안 시선을 빼앗긴 채로 영화를 봤다. 다른 일을 하면서 영화를 보려고 해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장면들로 시간을 빼앗는 감각적인 영화이면서, 동시에 집중해서 보면 볼수록 뜻을 알 수 없는 호기심 가득한, 말 그대로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색감으로 시작했지만 영화 속 바니쉬 향수만큼이나 깊은 향을 남긴 영화. 여담이지만, 영상을 공부하는 나로선 이처럼 반가운 영화가 또 없다. 구도나 기법에 대해서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짜낼 때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 마지막으로 우스꽝스럽고 키치 한 감성 속에서도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영화였다. 부담 없이 보기엔 지루한 감이 있지만, 미스터리하면서도 몽환적인 극 전개를 좋아한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하게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 <The Grand Budapest Hotel>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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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 <지구가 끝장나는 날>로 이어지는, 이른바 ‘코네토 3부작’을 만들어
큰 사랑을 받았던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배우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가 현재 새로운 코미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이먼 페그는 최근 그의 집에서 라이트 감독이 3일간 머물며, 그들의 차기작을 위한 기본 콘셉트를 확정했으며,“다음 영화 찍기 전까지는 다른 코미디 안 하겠다고 에드거에게 약속했다”고 전했습니다.
현재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글렌 파월이 주연을 맡은 스티븐 킹의 소설 <러닝맨> 리부트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 2015년 파리 테러 다룬다
<어떤 영웅>으로 제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이란 영화의 거장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2015년 파리 연쇄 테러 사건을 중심으로 한 영화로 돌아옵니다.
<Parallel Tales>는 2026년 봄 프랑스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이자벨 위페르, 비르지니 에피라, 뱅상 카셀, 카트린 드뇌브 등이 출연을 확정 지었습니다.
그 중, 뱅상 카셀은 특수경찰 BRI (수색 및 개입 여단) 대장 역을 맡아,바타클랑 극장에서 테러범 진압 작전을 수행하는 인물을 연기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로버트 패틴슨, 넷플릭스 영화 <Here Comes the Flood> 출연 확정
<시티 오브 갓>, <두 교황>를 연출한 브라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신작 <Here Comes the Flood>에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을 확정지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패틴슨과 더불어 덴젤 워싱턴, 데이지 에드가-존스가 출연할 예정입니다.
은행 경비원, 창구 직원, 그리고 정체를 숨긴 도둑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며,지적이고 긴장감 있는 심리전을 펼치는 영화가 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엘리자베스 올슨, 뱀파이어 스릴러 영화 주연 합류
파노스 코스마토스 감독의 뱀파이어 스릴러 영화 <Flesh of the Gods>에 크리스틴 스튜어트, 오스카 아이작에 이어
엘리자베스 올슨이 합류 소식을 전하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해당 영화는 부유한 부부인 라울(오스카 아이작)과 알렉스(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미스터리한 여성(엘리자베스 올슨)을만나게 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위험한 여정에 오르게 되는 이야기를 다룰 예정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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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악동 히어로 당신의 ONE PICK 중2병데드풀?/사춘기동핸콕?[ONE PICK/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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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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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2> 티저 예고편
게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모두 준비되었는가? 《오징어 게임》 시즌 2, 12월 26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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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공식 예고편
옛 사랑 그녀의 얼굴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이 작은 우연이 40대가 된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반짝였던 90년대 그 시절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분노》의 모리야마 미라이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