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5-04-21 17:53:46
즐겁고 사랑스러운 게임들
<곤돌라> 리뷰
곤돌라가 교차하는 찰나에 서로에게 공연을 선사하는 것은 그들만의 게임이었다.
처음엔 도착지에 체스판을 두고, 말을 잡을 때마다 그것을 창 밖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새 직원은 어느 날 그녀의 형편없는 도시락을 몰래 가져다 근사한 샌드위치를 넣어 두었다. 사물함 자물쇠를 뚝딱 열어 버리는 기술은 대체 어떻게 터득한 건지, 싱싱한 야채는 어떻게 고른 건지, 그녀는 그런 걸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체통에서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서류 합격 통보 때문이었다.
그녀는 깩깩거리는 기침을 쏟아내는 낡은 곤돌라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목베개를 옆구리에 낀 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페이퍼백 소설이 진열된 서점, 물 한 병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보안요원과 나이 든 승객들… 그 안에서 기꺼이 피로하고 싶었다. 탈의실을 흘끔대고 제 기분에 따라 급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곤돌라 역장이 아니라.
대사 없이 극 전체를 진행하는 <곤돌라>는 주인공들의 심정과 풍경을 떠올리면서 언어로 그들을 묘사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인물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한 순간도 있고, 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매력적인 장면들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영화의 만듦새와는 상관 없이, <곤돌라>가 보여 주는 낭만과 친절, 관능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익살스러움을 만들어내는 쇼트들부터, 조금은 유치해도 결국은 로맨스가 되는 사건까지. 관객은 그냥 그들만의 언어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이 소재들을 감당하기엔 좀 얕은 듯한데
사이버 세상의 올드보이
이 영화의 주인공 ‘오태경’은 <올드보이>에서 최민식 배우가 맡았던 ‘오대수’의 아역 연기자 출신이다. 한 나라의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의 아역배우였다는 점은 어마어마하다가도 사소하다. 이 때문일까. 오태경이 유튜브 시장에 뛰어든 일도 역시 쉽지 않다. 배우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다. 또 한 사람의 배우로서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다. 언젠가 박찬욱 감독님에게 다시 전화 올 날 있겠지? 희망을 품고 있지만 눈앞에 있는 것들이 이뤄지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마음먹고 시작한 유튜브. 시청자는 한 자리 수다. 새로운 수를 찾는 오태경. 그가 내린 결론은 ‘구독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대수 분장을 하고 시청자가 하라는 대로 하는 오태경. 산 낙지 먹는 건 당연하다. 어느 날에는 구독자를 괴롭히는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뿅망치를 때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온갖 잡다한 일은 다 하고 있다. 진정성을 보인 덕에 구독자가 하나, 둘씩 늘어난다. 어느새 만 명대가 되었다. 물 들어올 때 모터사이클을 만들어 손수 지어야 한다. 라이브 방송을 켜는 오태경. 그런데 어떤 인물에게 슈퍼챗이 왔다. “광화문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있는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가 왜 그러고 있는지 알아와라”라는 말을 전한다. 처음엔 거절했던 오태경.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큰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 번 말 걸어보기로 한다. 광화문으로 간 오태경. 그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 구독자들을 빨아들이기까지 이른다. 과연 그는 온라인 세상에서 <올드보이>만큼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팬데믹과 유튜브
영화가 주로 담고자 했던 부분은 세태 반영이다. 우선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건 유튜브다. 주인공 태경이 유튜브 콘텐츠를 기획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럼 이 영화를 이야기로 담으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유튜브라는 배경과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의 사이버 세상 묘사다. 전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서치> 시리즈에서 봤었던 것 같은 시각효과를 가지고 왔다. 카메라도 전형적으로 누가 누군가를 찍는 형태가 아니라 컴퓨터 캠코더로 자기 스스로를 찍는 방식이다. 이 덕에 영화 자체가 평범한 스릴러/코미디물이 아니라 약간 떨어진 시각에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연출 요소가 된다. 또 이야기 자체가 유튜브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소재가 영화의 흐름을 깨면 어색해진다. 영화 전체적으로 실제 유튜브 콘텐츠를 보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진행됐다는 점도 사소한 디테일을 살리는 좋은 수가 되었다. 형식이랑 이야기가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다음 시간적 배경에 깔려있는 전제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이 코로나19라는 소재를 갖고 온 건 사실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다. 영화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생태계의 야만성에 대해 꼬집고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극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를 시간적 배경으로 주파한 셈인데, 어떻게? 에 대해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분명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냥 단순히 마스크만 달랑 쓰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야기에 중요하게 사용했다. 이 시도는 영화에서 충분히 강점으로 뽑을 만 하다.
짜기라도 한 듯이
영화의 핵심 소재가 유튜브이기 때문에 이를 구현하는 장치들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 유튜브라는 소재가 좀 안 좋게 작용하는 경우가 몇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채팅창 리액션이다. 인터넷 방송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았다. 이 영화의 큰 아이디어가 됐을 <서치>부터 시작해 <곤지암> <웅남이> <롱디> 등 많은 사례들이 이미 개봉했다. 최근 인터넷 방송과 관련한 문제들이 갑자기 많이 보였던 건 사실인 듯하다. 팬데믹 전후로 유튜브 시장이 활성화가 됐고 이에 따라 저지 않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공급자가 됐다는 의미는 그만큼 수준 낮은 사람도 관객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일까? 극 중에서 오태경이 라이브 방송을 할 때마다 나오는 채팅창 메시지들이 조악하게 느껴졌다. 요즘 누가 그런라는 말을 쓰나? 뭔가 예전에 썼던 말들이 채팅창에서 계속 나오는데 집중할 수 있는 흐름을 깨는 듯했다. 극 중에서 ‘~남’
또 이야기에서 적지 않게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부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크리에이터가 나오는 방식이 살짝 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중후반부에 이 사람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부분을 보면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리적으로도 이 분량이 없어도 그만이고 이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 전개가 갑자기 두세 단계씩 확 비약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무슨 말이냐? 인물들이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행동하는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서 이야기가 좀 얕아지다 보니 이야기보다 이 부분이 더 들어오는 것 역시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최고 단점이다.
앞 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어떤 설정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직업에 기댄 감이 있다. 이 이야기 끝까지 전부 말이 되려면 어떤 인물이 굉장히 전지전능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굉장히 멍청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 인물이 완전 절 속에 있다가 나오는 수준이어야 한다. 물론 모든 영화가 다 완벽하게 개연성이 맞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튜브에 너무 기댔기 때문에 이 모든 이야기가 흘러갔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작중에는 필요 없는 이야기 소재도 몇 있기 때문이다. 오락성을 잡는다? 그러기엔 몰입감이 아주 살짝 부족하다. 메시지를 잡는다? 그렇기엔 깊이가 얕아 보인다. 맹숭맹숭했다.
얕은 깊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문제는 하나 더 있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미스터리를 잡는 데에 있어 이 요소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에서 이 문제가 대두가 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 문제의 특성상 피해자는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영화가 좀 더 신중해야 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냥 단지 이야기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서 정리되는 문제는 또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적어도 고뇌하는 사람이나, 처벌을 받는다던가 하는 장면은 있어야 했지 않을까? 적어도 쿠키라도?
이런 사회문제애 대한 관점은 이야기가 메시지를 잘 못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다 과장되게 행동한다. 그냥 단지 크리에이터로서 인지도를 얻어야 하니까. <올드보이> 아역인 거 그냥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야기 전개 이렇게 짜야 후반부가 말이 되니까. 유명해지는 거? 유명해지고 싶으면 유명해질 수도 있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카메오와의 통화? 이 장면도 이 사람이 뭘 해서 그 전화를 받아야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분이 그런 이슈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전화를 하는 분은 아닐 것이다. 이런 얕은 깊이가 이야기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옅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 '소통 불가능성' 앞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화를 동시에 사용하는 연극을 상상해보자. 관객이야 무대 위 프롬프터에 나온 자막을 보며 극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배우들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에 느낌과 감정, 천천히 맞춰온 합으로 대사를 주고받아야 한다. 언어가 다르기에 돌발 상황에서 애드리브로 능청스레 넘어갈 수도 없다. 대사 타이밍이 살짝만 어긋나도 극의 흐름이 깨져버리는 고난도의 무대. 막막하고 두렵다.
연출을 맡은 가후쿠는 배우들이 '대체 언제 움직이며 연습할 거냐'라고 물을 때까지 대본 리딩을 반복한다. 지루하고 건조한, 몸이 근질거리는 그 시간이 반복되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배우들 사이에 무언가가 ‘일으켜지고’ 이것이 관객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쏟은 정성 들인 노력, 여기서 만들어지는 호흡은 타인의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노력과 호흡이 ‘기계적 기예’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계적 기예는 매끄러울 순 있지만 상대에게 가 닿을 순 없다.
사실 가후쿠는 두 번의 큰 상실을 겪었다. 딸은 네 살 때 폐렴으로 죽었고, 가후쿠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도 갑자기 죽었다. 아내의 죽음은 가후쿠에게 특히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딸을 잃은 상실감에 휘청이던 가후쿠가 전적으로 의지해오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듣지 못한 채 급작스레 이별한 것이다.
그런 가후쿠의 마음을 여는 건 극단에서 배정해준 운전기사 미사키다. 그녀는 어린 시절 엄마의 폭력에 시달린 후 도망치듯 도시로 나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전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이다. 가후쿠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자신이 오랫동안 길들인 차의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기를 꺼린다. 그녀가 차에 깃든 가후쿠의 내밀한 관계와 감정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긴장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꾼다. 미사키의 능숙한 운전 솜씨 때문만은 아니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그녀는 금세 가후쿠가 지금껏 차를 아껴온 마음과 이 차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알아차린다.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말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후쿠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미사키에게 내 차를 운전해달라(‘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의 요청은 인간의 소통 가능성에 관한 감동적인 제언이 된다. 기계적‧기능적 관계를 넘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내밀한 소통의 관계가 바로 이 운전을 매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이때부터다.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건네는 말(“살아가야 해.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은 언어 이전의 보다 근본적 층위에서 교감이 이뤄진 후에야 서로를 위로하고 엮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카페에 마주 앉아 서로의 사연을 나눈 후 위와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면, 이 영화가 전하는 감동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말은 그저 건조한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그 의미를 두텁게 만드는 건 진심 어린 존중으로 쌓아 올린 시간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명쾌한 말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해한다는 건 타자를 내가 가진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명제다. 하지만 소통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이 불가능성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 닿기를 갈망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냉소적‧회의적 태도는 불가능성을 사실로 확정함으로써 이 권위를 재확인하지만, 그럼에도 가 닿겠다는 처연한 의지는 불가능성에 어떤 균열을 낸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보여주는 건 이 자그마한 균열이 자아내는 감동이다. 연극이든 삶이든, 그 어떤 소통 불가능성 속에서도, 우리는 이를 거스름으로써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그러했듯이.
-
-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간이역
영화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를 보러 가서 광고로 접한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홍보 티저 영상 속에서는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 듯한 모습이 보여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이별과 성장을 다룬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시놉시스
소중한 건 기다리는 게 아니야, 찾으러 떠나는 거야!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루가 봄과 함께 사야카 곁을 떠났다. 사야카를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 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사랑하는 존재들과 이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한 역에서 이별을 받아들이고 다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아름답게 풀어낸 추억의 한 장면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사야카와 루가 행복하게 초원을 뛰오는 장면이다. 어찌보면 무미건조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슬로우 모션과 클로즈업을 활용해서 둘 사이의 행복감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는 미장센을 선보였다. 상당히 긴 시간을 사야카와 루의 행복한 모습을 담아내는데 쓰고 있었다. 대사 없이 장면으로만 쭉 이어지는 전환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그 행복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고 싶게끔 만들었던 연출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아마 누구나 어렸을 때 티없이 행복해하며 뛰놀았던 시절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회상을 하게되면서 그 장면을 흐믓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공허함을 표현하다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어린 배우가 공허함을 표현하기에는 그 감정의 폭이 얕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야카 역을 맡은 닛츠 치세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현장학습을 다녀온 사이 세상을 떠난 루를 잃은 사야카는 루와 함께 놀았던 비밀기지, 함께 기차를 보았던 기차역, 그리고 루가 있었던 동물병원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루의 흔적을 찾고, 추억에 잠긴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루가 죽었다는 말을 다시금 들으면서 클로즈업 된 사아캬의 눈에는 정말 한순간에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사람의 공허한 눈빛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어린 소녀가 그 공허함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극 중에서 닛츠 치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눈에 눈물이 차올라도 펑펑 우는 장면은 없다. 눈물을 참아내면서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분노, 우울함, 외로움, 공허함과 같이 있었던 순간을 생각하며 스쳐지나가는 즐거움, 행복, 따뜻함이라는 감정을 눈에 오롯이 표현해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감정이 배가 되어 전달됐고 관객이었던 나는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소녀의 이야기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초반에는 도대체 영화 이름이 왜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행복한 사야카와 루, 그리고 루를 떠나보낸 외로운 사야카의 모습만이 비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초반 이상할 정도로 사야카와 루가 열중해서 땅을 파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철길과 같은 곳을 열심히 파고 결국에는 이 철길이 무엇인지는 밝혀내지 못한다.
루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이 철길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바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가는 간이역이었다. 이 곳에서 사야카는 루를 떠나보낸다. 그 사이 재즈바 할아버지와 친구를 맺고 함께 여행을 가서 각각 자신들을 떠난 루와 아들을 맘나면서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할아버지 마저 병환을 돌아가신다. 사야카는 자신의 친구였던 루와 할아버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소 루스라는 새로운 강아지를 만나 현실을 살아간다. 이별 후 직면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진정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그 과정을 굉장히 담담하게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8살 소녀가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경험하면서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한층 성장하는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담담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꽤 오랫동안 심금을 울렸다. 간만에 감성적으로 촉촉하게 젖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
- 3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휴일은 잘 보내셨나요?
무료한 목요일에 활기를 더해줄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한눈에 정리해 드릴게요!
그럼, 3월 첫째 주!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
.
.
영화 <리바운드>, 드라마 <악귀>로 돌아오는 김은희
영화 <리바운드> 포스터, ⓒ 네이버 영화
<킹덤>, <시그널> 등을 통해 '장르물의 대가'로 불리는 스타 작가 김은희가 두 편의 개성 넘치는 작품으로 돌아옵니다. 먼저 영화 한 편이 4월에 개봉할 예정인데요, 남편 장항준 감독이 연출을 맡고 안재홍, 정진운, 이신영 등이 출연하는 스포츠 영화 <리바운드>입니다. 영화는 2012년 예비 선수 하나 없이 주전 5명만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부산 중앙고등학교 농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김은희 작가가 영화 각본을 쓴 건 이병헌, 수애 주연의 2006년도 작인 <그해 여름> 이후 16년 만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악귀> 공식 이미지, ⓒ SBS
이어 6월에는 SBS의 새 드라마 <악귀>를 통해 돌아올 예정인데요, <악귀>는 작가의 전매특허 영역인 장르물로 악귀에 씐 여자와 그 악귀를 볼 수 있는 남자가 다섯 가지 신체(神體: 신령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를 둘러싼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내용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합니다. 배우 김태리가 악귀에 씐 공시생 '구산영' 역을, 오정세가 재력가 집안 출신의 교수이자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염해상' 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져 더욱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배우 커리어 사상 최초로 드라마에 도전하는 ‘로버트 드 니로’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 맨> 속 로버트 드 니로, ⓒ 네이버 영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배우 커리어 사상 최초로 드라마에 도전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제로 데이 Zero Day>는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정치 스릴러 드라마로, 에릭 뉴먼과 노아 오펜하임이 제작총괄 및 각본을, <홈랜드>, <매드맨> 등을 통해 8차례나 에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레슬리 링카 글래터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드라마의 공식 로그라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로 데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위기에 처한 세상 속에서 통제 밖의 압력에 의해 조각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음모론과 속임수가 만연한 시대에, 그러한 압력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혹은 어쩌면 그저 상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로버트 드 니로가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은 '전 미국 대통령'일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즌 4 공개 앞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 하차하는 배우들
ⓒ US Weekly
올해 시즌 4의 공개를 앞두고 있는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배우들이 여럿 교체됩니다. 주인공 '오티스'의 절친이자 동성애자인 '에릭' 역을 맡았던 슈티 가트와가 시즌 5의 불참 소식을 전한 가운데 여주인공 '메이브' 역으로 인기를 얻었던 에마 매키 역시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시즌 4를 마지막으로 해당 시리즈에서 하차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에마 매키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출연과 관련해 그간의 여정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말하면서도 이제 20대 후반에 들어선 자신이 10대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극 중 '릴리' 역을 맡았던 타냐 레이놀즈, '올라' 역의 패트리샤 앨리슨, 학교 선생님 '에밀리 샌즈' 역의 락히 타크라는 시즌 4에도 등장하지 않을 예정으로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샀는데요, 새롭게 추가되는 배우들도 있습니다. 최근 영화 <애프터 양>으로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얼굴을 알린 조디 터너 스미스, <시트 크릭> 시리즈의 스타 댄 레비, 새디아 그레이엄, 마리 루더, 펠릭스 무프티 등이 시즌 4에 새롭게 출연할 예정입니다.
직접 집필, 제작한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은 ‘더 위켄드’
왼쪽부터 차례로 위켄드, 제나 오르테가, 배리 키오건, 에드워드 슐츠 ⓒ Deadline
한국에서도 두 차례의 대규모 공연을 성공적으로 펼쳤던 캐나다의 가수이자 프로듀서 'The Weekend(이하 위켄드)'가 장편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제목, 줄거리, 장르 등 영화와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데요, <웨이브스>, <잇 컴스 앳 나이트> 등을 연출한 트레이 에드워스 슐츠가 감독 및 공동 각본을 맡았으며 위켄드는 제작과 각본을 맡은 동시에 주연배우로 참여합니다. 함께 공개된 출연진 라인업 또한 대단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웬즈데이>를 통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나 오르테가, <덩케르크>와 <킬링 디어>로 이름을 알렸고 최근 <이터널스>, <이니셰린의 밴시> 등에 출연하며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는 배리 키오건이 출연을 예고해 더욱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한편, 위켄드는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가 출연한 것으로 알려져 한국에서도 관심이 뜨거운 HBO 시리즈 <더 아이돌>을 통해 먼저 팬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뤽 베송 신작 <도그맨>, 페스티벌 시즌에 맞춰 가을 공개 예정
공개된 스틸컷, ⓒ IMDB
<그랑블루>, <레옹>, <제5원소>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감독 뤽 베송의 신작 영화 <도그맨>이 올 가을에 개봉합니다. 당초 4월 19일 프랑스 개봉을 예정했었으나 일정 조율 문제로 미뤄지게 되었고, 덕분에 <제5원소> 이후 처음으로 영화제를 통해 공개되는 뤽 베송의 영화가 될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 영화는 2019년 개봉한 액션 영화 <안나> 이후 뤽 베송의 4년 만의 복귀작인 데다가 그의 커리어 초기작인 <레옹>, <니키타> 등의 작품들과 유사할 것으로 예고돼 더욱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21년 영화 <니트람>을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출연해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고 개들에게 잔인하게 던져졌으나, 오히려 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사회적 규칙, 성적 장벽을 극복해 나가는 '더글러스' 역을 맡았습니다.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SAG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수상한 양자경, 키 호이 콴
ⓒ Deadline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역인 양자경과 키 호이 콴이 현지 시각으로 2월 26일에 열린 미국 배우 조합 시상식(SAG)에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두 사람은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품에 안으며 감동적인 소감을 전했는데요, 이날 시상식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출연 배우 전체에 수여하는 최고상인 '아웃스탠딩 퍼포먼스 바이 어 캐스트' 수상작으로 선정됐으며 두 사람뿐만 아니라 악역을 맡아 연기한 제이미 리 커티스 또한 여우조연상을 수상해 SAG 어워즈 4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를 통해 해당 영화는 미국제작자조합(PGA) 작품상, 감독조합(DGA) 감독상에 이어 배우조합상까지 휩쓸어 10개 부문 11개 후보에 이름을 올린 아카데미상 유력 수상작으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4대 조합 중 하나인 미국작가조합(WGA) 시상식은 3월 5일로 예정되어 있으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수상 가능성 또한 높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막 내린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은?
수상소감 발표하는 소피아 오테로, ⓒ SBS 뉴스
지난 2월 26일,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신작 <물안에서>로 수상을 노렸던 홍상수 감독과 배우 유태오의 할리우드 진출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수상에 실패해 고배를 마셨습니다.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 <아다망다에서>는 프랑스 파리 센강 위를 부유하는 독특한 건축물 안의 정신질환자 보호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인데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고상을 받은 것은 2016년 이탈리아 영화 <화염의 바다> 이후 7년 만이라고 합니다. 주조연상은 모두 성소수자를 연기한 배우들에게 돌아갔으며 <2만 종의 벌들>에서 남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자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 스페인의 8세 아역배우 소피아 오테로가 주연상을 받아 영화제 사상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번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전도연 주연의 넷플릭스 액션 영화 <길복순>과 이주영, 판빙빙이 출연해 동성애 연기를 펼친 <그린 나이트>가 초청되어 국제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우빈, 이솜, 송승헌 출연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
<택배기사> 공식 포스터, ⓒ NETFLIX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택배기사>가 올해 2분기 공개를 예고하며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습니다. <택배기사>는 극심한 대기 오염으로 산소호흡기 없이 살 수 없는 미래의 한반도에서 전설의 택배기사 '5-8'과 난민 '사월'이 새로운 세상을 지배하는 천명그룹에 맞서며 벌어지는 일을 그릴 예정으로 김우빈, 이솜, 송승헌, 강유석 등의 캐스팅으로 일찌감치 기대를 모은 작품입니다. 김우빈은 사막화가 진행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1%의 인류에게 산소와 생필품을 배송하기 위해 오염된 대기와 헌터들의 공격을 뚫고 세상을 누비는 택배기사 '5-8' 역할을 맡았으며, 강유석은 택배기사가 되기를 꿈꾸는 난민 소년 '사월' 역할을, 송승헌과 이솜은 각각 천명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와 군 정보사 소령으로 등장해 활약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계 소식을 전달해 드렸는데요, 어떠셨나요?
공개 예정을 앞둔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아 보여서 저는 설레는 기분이 들었어요!
전해드린 이야기가 구독자 여러분들께도 즐거움을 드렸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 번뇌와 번민, 요괴로 재탄생하다
삶에서 고민이나 걱정거리는 항상 찾아온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고민들이 없이 살아가는 시간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 무수한 고민들의 해답을 찾지 못해 우울하거나 절망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 고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삶의 방향성을 찾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쉽지 않다. 불교에는 번뇌(煩惱)라는 말이 있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뜻한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를 비롯해 발생하는 자신의 마음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번뇌들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은 상태가 곧 열반의 경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찾아오는 다양한 번뇌를 각자의 방법으로 억누르거나 조절해가며 살아간다. 이것이 잘 조절되지 않거나 억눌러지지 않으면 그것은 번민(煩悶)이 된다. 마음이 답답해진다는 의미의 번민은 열반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가득 채워 괴로움을 만든다. 어쩌면 과거의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번뇌를 해결하지 못해 번민이 가득해 더욱 우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엄청난 발전을 이룬 지금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번뇌와 번민에 대한 영화 <제8일의 밤>
영화 <제8일의 밤>은 번뇌와 번민에 대한 영화다. 불교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두 단어를 어떤 기이한 존재로 형상화했다. 붉은 눈과 검은 눈을 일종의 요괴의 눈으로 설정하고 과거 부처가 별도의 장소에 각각을 봉인하여 묻어버렸는데 현재에 그것의 봉인이 풀려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봉인이 풀린 붉은 눈은 검은 눈을 찾기 위해 사람을 징검다리 삼아 조금씩 검은 눈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면서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의 맨 첫 장면부터 산스크리트어로 설명되는 요괴의 봉인 과정은 꽤 흥미롭다. 마치 불교 삽화처럼 구성된 애니메이션이 현지어와 함께 설명되며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만든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묵언 수행 중인 스님으로 등장하는 청석(남다름)이다. 등장인물 중 가장 마음의 짐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며 순수해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큰 틀에서 보면 그가 요괴의 두 눈이 다시 만나는 것을 돕기도 하고 또 그 반대로 막기도 하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꽤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과거 스님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인물인 진수(이성민)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다.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번민하는 인물인데 그 과거는 청석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에서 진수가 가진 번민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는 요괴와의 싸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 외에도 형사 호태(박해준)와 후배 형사 동진(김동영) 그리고 신비한 인물 애란(김유정)이 등장해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주요 등장인물 중 진수와 호태는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마음 한구 석에 큰 번민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둡고 심각하다. 요괴에게 희생당한 인물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쫓아가게 되는데, 진수는 그 이유와 막는 방법을 알고 요괴의 흔적을 따라가는 반면 호태는 이면에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모른 채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 동진과 애란의 경우, 요괴와 연관성 있는 인물로 그들이 요괴가 지나가는 징검다리가 되는지 여부가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번민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 진수
관객의 입장에서는 사실 진수의 시선과 입장을 주로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태도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 진수와 청석이 만났을 때는 거의 대화가 없다. 청석은 묵언 수행 중이며, 진수는 상대방과 별로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석이 자신이 생활하던 절에서 봉인된 검은 눈을 들고 내려온 후, 자신의 스승과 함께 생활했던 진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어느 순간에 청석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가 2년 넘게 하고 있던 묵언 수행이 중단된 이후 두 인물의 대화가 많아지고 교류가 시작된다. 그런 게 이렇게 대화가 많아진 이후 청석을 바라보는 진수의 눈빛은 더 큰 번민에 휩싸이는 듯 보인다.
결국 영화가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진수와 청석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인물은 진수는 자신과 연관된 청석을 지켜야 하지만 그에 대한 분노가 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영화는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영화에서는 어떤 영적인 속삭임을 통해서 전달되거나, 진수의 망설임과 표정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좋은 지점을 뽑으라면 진수와 청석의 애매한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일 것이다.
영화가 가진 번뇌와 번민의 형상화는 꽤 독특하고 괜찮은 아이디어다. 그것을 실체화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면서 불교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퇴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 퇴마사라고 불만한 인물은 없다. 진수가 그에 가장 가깝지만 완성된 요괴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요괴의 약점이 전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중간에 그에 대항하거나 싸우는 장면은 너무 일방적이어서 오히려 맥이 빠진다. 중간중간 요괴가 사람들을 옮겨 다니면서 요괴가 조종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기괴한 모습은 공포스럽지만 그 이외의 장면에서는 그런 긴장감이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호태와 애란의 경우, 영화가 꽤 공들여 이야기 속에 등장시키긴 하지만 결국 그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추진력을 잃고 자꾸 뒷걸음친다. 이 두 인물은 아마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반전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고, 또 근본적으로 번뇌와 번민의 부득이한 희생자일 텐데 그들이 영화 말미에 하는 역할은 미미할 뿐이다. 결국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진수와 청석이며, 특히 진수가 가진 번뇌와 번민을 그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느냐가 영화의 결말과 연결된다. 영화는 번뇌와 번민을 요괴로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그 요괴는 진수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밀어붙이지만 아쉬움이 많은 영화
영화 <제8일의 밤>은 사실 1일부터 8일까지의 각 날짜가 중요하지는 않다. 대부분은 8일 밤에 벌어지기 때문에 그 전의 날들은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요괴가 이동하는 단계가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날짜를 제외하고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1일에서 7일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볼 때 이야기가 많이 늘어진다. 그래서 8일에 벌어지는 일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8일 밤에 벌어지는 마지막 장면들에서는 꽤 긴장감 있는 상황들이 이어지지만 요괴들을 상징하는 검은 연기나 그래픽들이 다소 어색해 보여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의 감독인 김태형 감독은 <제8일의 밤>으로 각본과 연출 데뷔를 했다. 첫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주연 배우 이성민은 그가 가진 특유의 어두움과 과묵함으로 진수 역을 잘 소화하고 있다. 또한 창석 역을 맡은 매부 남다름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순수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어른 스님의 연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에서 단독으로 공개된 <제8일의 밤>은 극장보다는 집에서 불을 끄고 관람할 때 더욱 괴기스러움이 전달될 작은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제8일의 밤 리뷰>
-
-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4월 16일을 추모하다
8★/10★
〈너와 나〉를 연출한 조현철 감독은 이 영화가 세월호를 추모하는 영화라고 밝혔다. 그런데 영화에는 ‘세월호’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세월호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두 여고생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무수히 많이 세월호를 소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산이라는 배경, 학교, 수학여행, 배가 침몰했다는 라디오 방송 등등. 우리는 세미와 하은의 내일을 알고 있다. 두 여고생의 일상과 사랑, 지극히 사소한(그러나 그로 인해 아름다운) 누군가의 순간들이 어떻게 중단될지를 말이다.
수학여행을 앞둔 세미는 불길한 꿈을 꾼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하은이 죽는 꿈이었다. 하은에게 고백하기를 마음먹고 기회를 살피던 세미는 불안과 긴장을 안고 하은을 찾는다. 하은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상태고, 그래서 내일 수학여행도 함께 가지 못한다. 그런데 세미가 하은을 찾아가 수학여행을 함께 가자고 조른다. 다리 깁스뿐 아니라 넉넉지 않은 형편에 급작스레 비용을 마련하기도 어렵지만, 세미의 간절함은 하은에게도 전해지고 둘은 함께 수학여행에 갈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도 세미는 불안하다. 하은에게 비밀이 있는 것만 같아서다. 세미는 슬쩍 하은의 마음을 떠보기를 반복하지만 하은은 자꾸 말을 돌린다. 하은은 나보다 다른 친구가 더 소중한 게 아닐까? 하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하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일방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불안이 깃든 욕망을 하은에게 반복적으로 투영하는 세미는 마침내 오해를 풀고 하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날 밤 둘은 몇 번이고 인사하고 다시 돌아서기를 반복하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이 하기 마련인 애틋하고 다정한 인사를 나눈다. 마치 이것이 둘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둘의 마지막 인사는 하은이 입원한 병원의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한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곳에서 둘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뒤면 그들 역시 장례식장을 찾은 다른 사람들처럼 슬픔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이다. 왜 사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이 죽음과 짝을 이뤄야만 할까? 세월호 이후 많은 이를 고민케 한 질문이다. 이는 〈너와 나〉를 추동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세월호 이후와 사회구조적 문제제기 대신 참사 이전의 삶에 카메라를 돌린다. 세월호라는 예정된 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은과 세미는 어렵게 확인한 서로의 마음,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이어갔을 것이다. 〈너와 나〉에는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반드시 직접 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담겨 있다. 영화는 언젠가 우리가 직접 경험했거나 일상에서 스쳐 가며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그 또래 학생들의 풋풋함과 설렘, 평범한 나날의 고민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예정된 비극이 두 사람의 일상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우리는 자꾸만 두 사람이 빚어내는 매 순간을 흘려 보내지 못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불가능한 희망을 되뇐다. 부디 내일이 오지 않기를. 하은과 세미가 작별하지 않기를.
영화는 내내 햇살이 깃든 듯 밝고 부드러운 화면 질감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 질감은 두 사람의 일상을 다정하고 살갑게 재현하는 효과와 동시에 세미의 꿈과 어우러져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흩뜨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탁자에 걸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보이는 오브제와 만나면 비극을 예시하는 듯도 보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미래와 현재를 겹쳐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포갠다. 죽은 사람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다 떠났던 생명까지도. 추모와 애도의 의지가 깃든 이 환상 속에서 나는 네가 되어 깨어나고, 너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무수히 반복돼 메아리치는 ‘사랑해’라는 말은 떠나간 자에게 건네지 못한 말이자 남겨진 자를 위무하는 속삭임으로 승화된다. 이 중층의 포개짐으로 서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된 자들은 ‘우리’가 되어 비극으로 헤어지고 상처받은 자들을 다시 한데 모은다. 이렇게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월호를 추모한다. 매월 4월 16일, 이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날, 그리고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에 가려진 서사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그린 나이트” 후기입니다. 난해하지만 쿠키영상이 있습니다. *아래 네이버지식백과에 나온 원작시에 대한 해설을 참고하고 영화를 감상하신다면 판타지와 원작을 비교하면서 충분히 영화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
- 영화 <밀수> 티저 예고편
"던지고 건지고 속여라!" 본격 제대로 밀수판이 열린다
-
- 영화 <엘리오> 티저 예고편
2024년 봄, 디즈니와 픽사가 선사하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여러분을 소환합니다?? 지구 소년 '엘리오'의 은하계 모험 [엘리오] 티저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