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17 09:39:16
영화로 만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Cinelab Curation]❣️
이번 주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을 만나보려고 하는데요!
원작에 충실한 작품부터 현대적으로 또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색한 작품까지!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꾸준히 영화화되고 있죠.
고전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만나러 가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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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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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피커] 촬영팀 세컨드 / 촬영팀 추천 영화
Q. 7월의 씨네피커 촬영팀 형정훈님의 마지막 에피소드인데요. 촬영감독으로써, 촬영 추천 영화를 소개해주세요.
추천 영화가 많은데, 우선 첫 번째는 종류를 따지자면 기술적으로 정말 촬영이 잘 된 영화를 보고 싶다면 로저디킨스나 엠마누엘 루베스키 감독 영화를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그리고 <1917> 이런 롱테이크를 다룬 영화들이 아무래도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라서 촬영에 대해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번째로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로 생각을 했을 때는 저는 봉준호 감독님 영화가 진짜 좋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기생충>도 그렇고 <옥자>도 좋았고 <마더>도 그렇고 저는 다 카메라가 인상 깊게 분석을 하면서 봐야 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 카메라를 분석하면서 봤을 때 정말 많은 이야기와 그 의도들이 보인다면 공부를 많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또 여러모로 촬영이 인상깊었던 작품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그리고 <버닝> 이 두 작품인데요, 말하다 보니까 한경표 감독님의 작품이 좀 많네요. 촬영 감독을 꿈꾸는 분들이라면 작품들을 보고 자신만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Q. 촬영 감독을 꿈꾸는 분들에게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촬영 감독은 좀 책임감이 정말 많이 필요한 직업인 것 같아요. 그 책임감을 갖고서 작품을 완성해냈을 때 그 또 다른 뿌듯함이 정말 큰 직업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직업들이 많지만, 저는 카메라 감독도 그런 직업이라고 생각을 해요. 시나리오를 보고 어떤 이미지를 형상화시키면서 담아내는 작업을 하는 게 촬영 감독이니까요. 일을 하다 보면 정말 힘들고 무너질 때도 많고 그리고 세상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 또한 경험이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본인의 노하우가 생기고 하면 좋은 작품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혹시 촬영감독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면 저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계속 노력하고 많은 작품들을 보게 된다면 좋은 촬영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다크홀> <배드 앤 크레이지> <더 글로리><마당이 있는 집> <유괴의 날> 현재 방영중인 <감사합니다> 까지 차근 차근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형정훈님의 촬영추천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영화를 보고 공부하며 단단하게 준비해오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에서 유로, 글에서 영상으로 자신의 색을 가진 콘텐츠를 만들어갈 미래의 촬영감독님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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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마지막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 "
AMOUR 아무르
음악가 출신의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평화롭고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내는 금슬 좋은 부부다. 제자의 공연을 보고 온 다음 날 아침, 안느는 식사를 하던 중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버린다.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만, 간단한 경동맥 수술에 실패해 반신불수가 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안느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소방관들은 집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시체가 부패하는 죽음의 냄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언제나 불쾌할 수밖에 없다. 지독한 악취와 대조적으로 곱게 누워있는 늙은 여성의 시체 다음에 영화의 제목 'AMOUR(사랑)'가 조용히 떠오른다. 첫 시퀀스에서 감독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아름답고 유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는 것, 삶도 사랑도 죽음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금 불편하겠지만 똑바로 담담하게 담아보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엿보인다.
태엽이 전부 돌아가버린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안느의 마비는 오른쪽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변을 해결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안느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조차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몸이 잠깐 멈추는 것, 의식이 잠깐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의식과 육체의 정지가 반복되다 이내 완전히 멈추어 버리면 그것이 죽음이다. 안느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갈수록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힘들게 해야 하는 상황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어떻게든 살려두고자 하지만 이 역시 힘겨운 상황이다. 조르주가 안느와 한 마지막 약속은 절대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것이다. 조르주는 이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안느도 조르주도 이 힘겨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여기서 안느가 건강하게 살아나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영화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앞으로 겪게 될 어떤 장면들을 미리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듦과 병듦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과제이지만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의 문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을 담는 그릇, 집
부부는 음악가지만 영화에서 음악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다. 안느의 제자가 치는 피아노 연주와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전부다. 고요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안느의 이상을 느낀 조르주가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들리던 싱크대의 물소리 같은 것이다. 카메라는 안방에서 조르주를 비추고 있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한 화면에 있지 않아도 두 사람과 집안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 초반에 제자 알렉상드르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신을 제외하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 안에서 두 사람을 담고 있다가 누군가 외출을 나서면 이후 외출에서 돌아오는 인물로 바로 이어진다. 병원을 갔다 온 안느와 장례식에 다녀온 조르주를 카메라는 집에서 함께 맞이한다. 조르주가 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꿈으로만 그려진다.
조르주는 안느에게 죽음을 고하고, 그제야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선다. 그들이 두고 온 안느의 차가운 육신만이 집이라는 관 속에 고이 남겨져 있다. 집에는 이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사랑과 추억, 고통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르주와 안느의 삶과 사랑과 죽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이 꺼져갈 때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편하게 해주어야 할지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러워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욕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인물과 감정을 깊숙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영화의 관음적인 속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느의 고통과 시들어 가는 모습은 현실적이며
조르주가 내린 결정은 사랑과 책임감을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적이다. 사랑하기에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남자와 자신과 남편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의 마지막은 결국 그런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선뜻 비난할 수는 없다.
안느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실제로 그것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살고자 하는 힘없는 버둥거림만 보였을 뿐이다. 영화는 마지막 조르주의 결단에 동의할 수 있게끔 그의 입장을 충분히 말해주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연민은 우리의 미래에 건네는 자기변명과도 같다. 우리는 조르주와 안나 둘 중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갖는 거리감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모든 것을 관객에게 남겨두고 등장인물들을 함께 퇴장시킨다. 부모님이 떠난 집에서 검은 옷차림으로 홀로 앉아 있는 딸 에바는 조르주와 안나의 삶과 사랑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남겨진 존재이다. 우리는 텅 빈 집에 홀로 앉아있는 에바처럼 적막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생각한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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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영화 [서브스턴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는 가상의 상황에서 편지를 받았다고 제발 믿어주라(?)
사진 출처:다음 영화
리지 씨에게.
안녕하세요.
우선 너무 늦게 당신의 이야기를 영화관에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저 역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는 같잖은 헛소리를 최근까지도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먼저 영화를 본 친구들은 분명 징그럽고 피 튀기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막상 영화관을 나올 때 저를 지배했던 감정은 당신을 향한 슬픔과 동병상련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의 부조화는 마치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의 관계처럼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마음이 꽤 오랫동안 복잡했어요. 어쩌다 거울 속의 당신을 스스로가 미워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에 제가 감히 답을 낼 수도, 내기도 어려웠거든요. 저의 얕은 생각과 비루한 기억력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가서. 그 미움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를 더듬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답(?)이 나오더라고요.
단 한마디였습니다. 당신의 빛남(sparkle)을 가져간 것은. 타인. 그것도 당신보다 더 나이가 들었으면 들었지.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남자의 단 한마디. 아마도 당신은 여태껏 스스로 빛을 내는 별(항성)인 줄 알고 살아왔을 텐데. 그 비수는 참 힘이 세서. 당신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던 핵융합의 심장부에 꽂혀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당신 안의 반짝임을 스스로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평판을 반사해야만 빛나는 행성이 되어버린 순간이라고 할까요. 아, 그리고 저는 당신이 새우를 씹던 하비의 입을 찢어놓지 않았다는 그 절제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저였으면 포크로 아마 콧구멍을 후벼 팠을 거예요.
사진 출처:다음 영화
한국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은교]에서는 이런 문장(대사)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분명 당신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패배감과 상실감.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 빛날 수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없으니 반사되어 빛나기라도 할 수 없다는 초조함이 아마도 수의 탄생을 부추기는 힘이 되어버렸으리라고 생각해요.
나였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역시 또 다른 나의 탄생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과연 누가 당신의 선택에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그리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차라리 저는 수의 탄생 이후에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어쨌거나 서브스턴스 제공사(?)측의 말처럼 당신과 수는 하나였으니까. 두 사람 간의 균형이 지켜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당신이 멍하니 TV앞에 앉아서 수의 탄생 전 보다 더 슬픈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과의 데이트에 앞서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이라도 하듯 립스틱을 빡빡 닦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는 듯한 당신의 모습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언젠가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물론 그 어떤 위로도 당신에겐 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수를 탄생시킨 것은 당신이고.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고 싶었던 것도.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지만. 어쩌면 당신에겐 가장 필요했을 하비의 인정을 바랐던 것도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다시 한번 더 빛나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이 이토록 큰지. 당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욕망이라는 게.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깊이의 우물 같은 것이니까요.
사진 출처:다음 영화
육신이라는 게 참 덧없지요.
분명 미워해 마지않던 50대의 당신이었잖아요. 하지만 그마저도 수에게 하루 이틀, 야금야금 빼앗기고 난 후의 당신의 눈빛은 참 아팠습니다. 그리워하고 있더군요. 커다란 액자 속 스스로가 미워했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절박감은 수에게도 찾아왔죠. 그녀가 늦게 깨달은 것인지. 당신이 일찍 깨달은 것인지. 줄 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의 치아가 뽑혀나가는 그 순간만큼은 그저 한 사람의 절박함과 공포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의 정중앙에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록되어야 할 그 순간에. 피를 흘리다 못해 분사하는 당신의 모습은 여태 하고 싶었던 본심을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괴물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괴물인가. 아니지, 우리 모두 괴물인거지.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어요. 마치 영화 [샤이닝]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괴기스럽기도, 또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장면에서. 저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당신의 살점과 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어요. 주변 세탁소에서 기함을 토하며 그냥 이 옷을 버리라고 말할 것 같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꼭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 물론 정상적인?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피를 그만큼 흘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만큼 흘리면 명예의 전당까지 기어갈 힘도 없겠지만. 이것은 저의 직업병이며 영화적 허용이라 보고 넘어가도록 하죠(?)
사진 출처:다음 영화
마지막 인사를 뭐라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이 망설였습니다.
당신은 그래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한다 라는 뭉뚱그린 말로도 그간 입은 상처를 다 보듬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동안 외로웠죠.라는 개똥철학도 건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힘내라는 뻘소리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최후는 바닥에 묻은 케첩의 말로처럼 참 처참했지만. 그러면서도 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끝나버렸죠. 이 모든 것이 아 시발 꿈처럼 느껴지는 마지막이었기에 더 어떤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당신이 겪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절대 없어지지 않겠죠. 두 번째 당신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저 역시 그 푸른 드레스를 입은 살덩어리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 제가 제일 먼저 도망갈걸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기억될 거예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이죠. 그게 정말 당신이 원했던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신.
그…. 주삿바늘은 한 번쓰고 버리신 거 맞죠? 어우.. 제발..
[이 글의 TMI]
1. 이렇게 자도 될까 싶을 정도로 연휴 내내 자는 중.
2. 이럴 거면 그냥 겨울잠을 자라.
3. 노동요 추천받습니다.
#영화리뷰 #최신영화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서브스턴스 #데미무어 #영화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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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송 / Special Delivery, 2020
흐릿하지만, 포스터에 보이는 차량만으로 "제이슨 스타뎀"이 나왔던 <트랜스포터2002-09>가 연상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특송>과 비교하여, 운전을 잘한다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데요. (성별과 머리카락의 유무만 다를 뿐...)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베이비 드라이버2017>만으로도 "운전자"가 기깔난 운전으로 경찰들을 따돌리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이는 국내 박스오피스 1위라는 결과표로 증명되었습니다만...주말을 기점으로 다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게 다시 1위를 내주며, 그 기간을 5주로 늘려나갔습니다.
전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와 경쟁한 <경관의 피>, 개봉일에 1위를 했으나 누적 관객수 37만명(주말 관객수: 26만명)으로 이내 2위로 밀리고 말았는데요.
<특송> 역시, <경관의 피>와 다를 바가 없지만 누적 관객수 23만명(주말 관객수: 16만명)으로 큰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물론, "오미크론 변이"에 따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성적만 두고 본다면 아쉬움이 남는데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특송>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우체국에서 받지 못하는 물건을 비롯해 사연 있는 물건들을 배송하는 "은하"는 이 분야에서 특출난 실력자입니다.
그날 밤도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 정체불명의 수하물과 함께 "은하"는 경찰과 국정원의 타깃으로 지정되는데요.
과연,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을까?핸들링 좀 볼까?
1. 잘하는 것을 두고서, 왜?
앞서 말했듯이 영화 <특송>은 연상되었던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와 비교해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시작을 보여줍니다.
범죄자들을 자신의 차량에 태워 현란한 핸들링과 발재간으로 관객들의 애간장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시가전 레이스'는 몸까지 움찔하게 만듭니다.
어찌 보면, 뻔하디 뻔한 장면이지만 저를 포함해 <특송>을 보려는 관객들에게는 이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점에서 <특송>은 제 기대치에 걸맞은 장면으로 그 활약을 기대하게 만듭니다.근데, 어째 헛도는 느낌이지 말이야
그리고 앞서 제시한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처럼 이번 <특송>도 예상치 못한 인물과의 관계를 제시합니다.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의 주인공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향후 일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전개처럼 <특송>은 "은하"와 "서원"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처럼 <특송>의 전개도 앞선 두 작품과 다를 것이 없지만, 받아들이는 느낌은 앞선 두 작품과 정반대입니다.2. 2개밖에 못해요.
영화 <특송>은 '범죄자들을 태우는 운전자'와 '예상치 못한 관계'라는 '클리셰'로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로 큰 차이를 두지 않으며, 이에 묶을 '공통분모'에 둡니다.
그렇기에 받아들이는 느낌도 다르지 않아야 하지만,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헛헛함을 지울 수가 없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상대적으로 늦게 나와 "신선함"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서드(3번째) 피치"의 부재가 있습니다.3번째 구종은 뭐야?
이에 '굳이, 3번째 구종이 있어야 하나?'싶겠지만,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트랜스포터>는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 "정장"으로 멋들어진 액션을 선보였고, <베이비 드라이버>는 자신만의 선곡 리스트로 익숙한 장르에 "차별화"를 두었습니다.
무엇보다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의 러닝 타임이 평균 90분과 113분임을 생각하면, 108분의 <특송>에게도 반드시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 2017>와 다르게, <특송>에게 '제3의 구종'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3. 잘하지도 못하면서...
2개의 구종으로 4가지의 경우가 생긴다면, 3개의 구조만으로 9가지로 2배가 넘는 5개가 생깁니다.
여기에 타자에게 넣는 스트라이크 존을 9개로 구분 짓는다면, 36개와 81개로 5개의 차이는 45개로 급증하니 관객들로써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영화가 복잡해지니 이에 대한 항변으로 경우의 수를 차단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냥 2개의 구종을 맘대로 "스트라이크존"으로 넣을 만큼 확실하다면 굳이 3번째 구종은 필요하지도 않을 거고요.근데, 미숙하네?
하지만 <특송>은 2개의 구종 중 가운데, "은하"와 "서원"의 관계가 설득력을 주지 못합니다.
보통 인물들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공통점을 제시하며 시작하는데요. - 특히, "인생이 힘들다"라는 '서원'의 대사로 미뤄볼 때 영화는 <레옹>의 '마틸다'를 의식했을 겁니다.
그러나 보여주는 "서원"과 달리, "은하"의 이야기는 "텍스트"로만 진행되어 애초 시작부터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레옹> 혹은 "모자(母子) 관계"로 바라보기엔 무리였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문제가 <트랜스포터2002-09>시리즈와 <베이비 드라이버2017>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다만, 부각되지 않은 이유에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카 체이싱"으로 장르적인 쾌감으로 단점보단 장점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4. 이걸 이렇게, 연결한다고?
그렇기에 극 시작과 함께 보여준 "시가전"만 하더라도, 영화 <특송>은 "카 체이싱"에 뚜렷한 장점을 가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런 "카 체이싱"은 전무할 정도로 없습니다.
물론, 이후 주차장과 폐차장에서 보여주기는 하지만 "카 체이싱"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의 아쉬움이 마지막 액션에서 개연성에 대한 의문이 드러납니다.
앞서 "은하"의 이야기는 "텍스트"로만 진행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어느 부분에서 "액션"과 관련된 이력은 듣지 못했습니다.처음부터 다시 읽어주세요.
그저, '피칠갑이 되어 탈출했다'라는 정도인데 이게 "전투력"과 연관되어 후반 전투신으로 보이는데요.
이에 대한 퀄리티가 나쁘지만은 않지만,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그냥 넘긴 느낌이었습니다.
그냥 이야기의 실패를 "액션"으로 급하게 막아보려는 느낌 같은데,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리고 악당에 있어서도 "연기"는 논할 수는 없으나 이야기를 쌓아나가는데, 자극적인 행동에만 집중되어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특별하지도 않았고 평범하지도 못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 쿠키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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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언어
수용소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언어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감독] 바딤 피얼먼
출연]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라르스 아이딩어, 레오니 베네쉬
시놉시스]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원하는 독일군 장교 ‘코흐’. 살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유대인 ‘질’. ‘질’은 살아남기 위해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고 매일 밤 거짓으로 단어를 만든다. 깊어져가는 의심 속 페르시아어 수업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시사회에 초청을 받았을 때 전쟁이야기기도 하고 시간이 나지 않아서 보지 말까? 했었으나 그래도 회사랑 가까우니 보러가자는 마음에서 별 기대 없이 찾아갔던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하지만 마지막에 몰려오는 감동과 안타까움이 강하게 들면서 굉장히 잘 만들어진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던 작품이었다.
당시 처참했던 유대인의 상황을 보여주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굉장히 다큐같다는 점이다. 당시 유대인을 비롯해 수용소로 끌려가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이들을 이송하면서 입맛에 따라 죽이고 살리는 군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죽인 뒤 처리하지 않는 시체와 벌거벗겨진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아 이동시킨 후 태우는 장면까지 영화의 내용 상 이러한 부분들에 많은 시간이 할애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만행되었던 나치의 모습을 영화 속에 군데군데 녹여내고 있어서 정말 참혹했던 시대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과오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수용했던 유대인들을 몰살하거나 다른 수용소로 옮기고, 그들의 기록들을 모두 불태우는 등 그들의 기록마저 다 지워버렸던 과거 나치의 모습들을 보면서 남겨진 기록의 중요성과 이 기록이 사라짐으로써 피해자와 이 유가족들이 더 큰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로 언어를 만들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한 남성이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bgm 처럼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용소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나요?" 그 이후 시점은 철길을 걷던 남성이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으로 이동한다. 처음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왜 이 장면을 가장 첫 장면을 선택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질문은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질은 프랑스인이지만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페르시아인이라고 군인들을 속여 간신히 살아남는다. 장교에게 페르시아어 수업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살아난 그는 알고 있는 페르시아어가 하나도 없지만 당장 다음날부터 페르시아어 수업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업무였던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신상을 적는 업무에서 이름을 변형해 페르시아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수용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아침 배식을 하며 물어보고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하나씩 변형해서 자신만의 페르시아어를 만들기 시작한다.
질은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장교에게 2400여개가 넘는 단어를 만들어 수업을 진행하는데, 그 말은 최소 한 수용소에서 2,400명이 넘는 유대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왔다는 말이 된다. 장교는 독일이 패전을 앞두자 자신을 가르쳤던 질을 빼내주며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본인은 페르시아로 떠난다. 그렇게 풀려난 질은 UN군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2,400여개의 페르시아어를 기록하며 다 태워져버린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동료들의 이름을 활용해 페르시아어를 만든 질. 그 이름 덕분에 질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료들의 죽음 위에 혼자 살아남은 질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죄책감이 복합적으로 들지 않았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질은 죽어간 동료들의 이름 덕분에 살 수 있었고, 수용소에서 스러진 이들은 질을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말이지만 감동적이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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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고 돌아 마음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행복과 마주한다.
1977년, 일본의 야마다 요지 감독은 홋카이도를 풍경으로 한 로드무비, <행복의 노란 손수건>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지와의 조우>로 우주를 떠다녔다. 할리우드에서 우주선이 날아다닐 때, 한적한 홋카이도에서는 빨간 차 한 대가 달달달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던 것이다. 그 시대의 고뇌와 청춘의 방황을 담은 이 영화가 자그마치 50년의 세월을 건너 2025년 한국의 극장에 걸렸다. 그렇다면 50년이 지난 지금, 현시대의 관객은 <행복의 노란 손수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21세기의 시점으로 바라보기에 불편한 요소들이 많다. 일단 주연 중 한 명인 킨야의 캐릭터성 자체가 ‘변태’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 그러하다. 킨야는 영화의 시작부터 직장에서 쫓겨나 무능력한 상태로 차를 한 대 뽑는다. 차를 뽑은 이유는 단순히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다. 이런 목표 의식에 알맞게도 킨야는 홋카이도에 가는 길, 그리고 홋카이도에 도착한 이후 마주한 모든 여성에게 작업을 건다. 그때 넘어온 아케미는 킨야와 여행하는 과정 속 몇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 심지어 성폭행 직전까지 다다른다. 분명한 거절에도 계속 들이대는 킨야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유머를 형성했다는 점, 유사쿠를 영원히 기다리는 미츠에의 수동적인 여성성 등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불편한 요소들이 이 영화에는 분명 존재한다.
또한 미츠에의 남편인 유사쿠는 영화의 진짜 주연이라고 볼 수 있는 역할인데 범죄자다. 유사쿠에게는 정당 방위적인 사유가 있지도 않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 생활을 하지도 않는다. 물론 기다리던 아이의 유산이라는 촉발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술에 취한 채 취객과 시비가 붙어 취객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인 무뢰한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뜻 유사쿠는 호전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으로 킨야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선지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부인에게도 돌아갈 자신이 없는 겁쟁이다. 영화는 그런 유사쿠에게 멋대로 면죄부를 선사한다. 이로써 범죄자 미화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적 차이를 인지하되, 그것에 매몰되진 말아야 한다. 영화의 한 가지 요소일 뿐인 스토리에 묶여 영화의 진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야마다 요지는 킨야를 결코 미화하지는 않는다. 킨야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해야겠지만, 영화 속 킨야는 항상 벌을 받는다. 불순한 의도를 품을 때마다 킨야는 넘어진다. 나막신이 벗겨지고, 턱에 걸려 넘어지고, 게에 찔리기도 하고, 차에 끼어 자빠지기도 한다. 유사쿠도 그러하다. 유사쿠에게 행복은 불확실하고도 먼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고사한다. 죄책감과 후회스러운 그의 마음은 영화의 중반부부터 관객에게 지겨울 정도로 전달된다. 그렇다면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가진 진가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진가를 관객이 함께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여정이라고 보았다. 삶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관객은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갑작스럽게 마주한다. 그들의 일평생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작정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 행복만 담겨있지는 않다. 차가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좋은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길에 시비가 붙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 때문에 따뜻한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기도 하고,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끈끈해지기도 한다. 길을 떠날 적 홀로 자리하던 외딴 벚나무는 어느새 무리를 지어 일행을 반긴다. 오직 마지막 엔딩을 위해서 달려왔다고 볼 수 있을만큼 아름답게 펄럭이는 장대한 노란 물결은 이들을 섬세하게 위로한다. 그제야 우리는 방황해도 괜찮다고 말하게 된다. 돌고 돌아 마음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행복을 마주하게 된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행복의 노란 손수건> 시사회에 참석한 뒤 작성하게 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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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게임) 6가지게임 위주 완벽정리/몰아보기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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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식물카페, 온정> 메인 예고편
종군 사진기자로 일했던 주인공 ‘현재’는
파키스탄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퇴사 후 다시 찾은 할아버지의 수목원에서
어린 시절 느꼈던 식물과의 특별한 교감을 떠올린다.
식물로부터 살아갈 용기를 얻은 ‘현재’는
도심 속 <식물카페, 온정>을 운영하게 된다.
본인의 반려식물과 함께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카페를 찾은 손님들에게 ‘현재’는 병든 식물은 물론
병든 마음에 필요한 그만의 식물 처방전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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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리버 색스 : 그의 생애> 30초 예고편
2015년 1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올리버 색스는 "나의 생애"란 에세이를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의학계의 시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한 베스트 셀러 작가, 인간의 뇌라는 경이로운 우주의 탐험가 등 수많은 수식어들 사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