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4-05 20:58:20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이어즈 앤 이어즈>, 빅토르와 이디스를 중심으로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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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처럼 되고 싶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것!
[들어가기 전에]
2024년 10월 10일, 제124회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은 한강 작가다.(짝짝짝!) 저절로 국뽕이 차오르는 이 소식은 수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예상을 깬 선정이었기에 놀라움이 더 크다. 온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베스트셀러 상위권에는 작가의 책이 이름을 올렸고, 11일 오전 유명 서점 기준 13만 부가 팔려나갔다. 미국 아마존도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서적 가운데 1,2, 4, 8위가 모두 한강 작품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 국가적 큰 기쁨과 흐름에 편승하고 싶어 한강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채식주의자> 리뷰를 올린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이 있어 조금 다듬고 추가했다. 아쉽게도 현재 OTT, VOD에서는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곧 OTT, VOD 플랫폼에 서비스되거나 재개봉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시 CGV아트하우스에서 <채식주의자>를 특별 상영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영혜(채민서)는 악몽을 꾼다. 그리고 채식을 결심한다.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한다. 그녀의 낯선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도 마찬가지다. 참지 못한 아버지(기주봉)는 억지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참지 못한 영혜는 칼로 손목을 긋는다. 이후 언니 지혜(김여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영혜. 한편, 지혜의 남편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민호(김현성)는 아내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는다. 슬럼프에 빠진 터라 새로운 영감을 찾던 민호는 아내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고민 끝에 그는 영혜에게 누드모델을 제안한다.
<채식주의자>는 하루아침에 채식을 결심한 한 여성이 남성주의 사회에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뒤로한 채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린다. 그녀의 채식 계기인 꿈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그 실마리를 전한다. 약하면 강자에게 고기로 먹힌다는 약육강식의 말처럼,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강압에 시달리며, 마치 강자에게 먹힌 고기처럼 살아온 셈이다. 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한 그녀는 육식 자체가 자신의 살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채식주의자를 선언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혜가 가진 거부감은 아버지, 남편 등 남자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
외관상으로 봐도 주변 사람들과 결이 다른 영혜는 순수성을 갖고 있다. 이는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으로 잘 나타나는데, 폭력으로 물든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로서 민호의 눈에는 영혜의 순수성이 보였을 터. 나무가 되고 싶은 그녀의 몸에 보디 페인팅을 하고, 비디오 작업을 통해 이를 담아내려 한다.
순수한 예술로서 그녀를 대하는 듯하지만, 민호의 행위는 영혜의 아버지가 행한 폭력과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민호는 욕망으로 가득차고, 형부와 처제사이라는 금기까지 넘어선다. 이처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명목아래 폭력을 눈감아주던 사회의 잔재는 멋진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목적아래 또 다른 폭력으로 전이된다. 이후 영혜는 이후 친언니의 돌봄을 받지만, 또 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영혜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들의 탐욕도 보인다.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려는 그녀는 곧 자연인 셈. 오로지 자신의 목적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녀를 착취하는 이들은 결국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원작인 한강의 동명 작품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감독은 이중 영혜와 민호의 이야기가 중심인 ‘몽고반점’을 다른 단편들 보다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온몸에 꽃을 그린 영혜와 예술이 아닌 욕망이 몸을 지배하며 그녀의 몸을 탐하는 민호의 모습은 글보다 영상 구현이 더 잘 맞아 보인다. 감독도 이런 강점을 알고 있다는 듯 비주얼 부분에 신경 썼고, 채민서는 감량, 김현성은 증량을 통해 각각 식물적, 동물적 느낌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오랫동안 빛을 발하지 못한다. 최대한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대화 지문과 상황 연출에 공을 들였지만, 캐릭터의 이미지를 너무 부각한 나머지 각 인물의 심리 묘사와 감정선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영혜는 앙상한 뼈마디와 온몸에 그려진 꽃의 이미지로 그녀의 심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역부족. 후반부 죽음보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열망도 온전히 와 닿지는 않는다. 후반부 금기를 넘어선 관계는 다소 선정적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강해 구성적으로 밀도가 높았던 원작의 팬으로서는 아쉬운 지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무가 되어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지혜처럼, 관객 또한 말라가는 영혜를 바라볼 뿐이다. 결국 인물과 이야기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완성도란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태생적으로 원작이 갖진 난해함과 비주류성의 늪에 빠진 듯한 느낌이다. 다만 원작을 읽은 이들이 상상 속으로 그려냈던 작품 속 이미지를 가시적으로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사진 제공: 스폰지
평점: 2.5 / 5.0
한줄평: 한강 작가의 텍스트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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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을 들여다 보는 미술 감독 '류성희'
영화라는 것은 어차피 허구지만, 공간이나, 어떤 한 장면의 이미지가 영화의 어떤 분위기나 이미지 그자체로 인식 될 때도 많다. 장화홍련의 꽃무늬 벽지라든가. 올드보이의 방, 헤어질 결심의 파도 벽지 같은 것들. 때로는 아름다움과 영감을 주는 영상으로 가득 찬 영화를 보고 나면, 스토리나 연출이 다소 아쉬운 영화라 하더라도, 눈이 호강했으니까 좋은 시간이었다. 하고 생각 할 때도 있다.
8월 18일 넷플릭스에서 릴리즈 되는 <마스크걸>은 화려한 출연진과 감독 만큼이나 명품제작진의 참여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특히 내가 가장 기대 하는 것은 영화 <아가씨>로 한국인 최초 칸영화제 벌칸상을 수상한 류성희 감독이 이 시리즈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벌칸상은 영화 기술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사람에게 주는 상으로, 주로 촬영부문에서 수상하고, 류성희 감독이 수상하기 전 미술 감독이 단독으로 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류성희 감독이 이 상을 수상함으로써 지금까지 감독이나,배우,촬영에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미술감독” 이라는 세계를 주목 받게 해주었다.
그에게 벌칸상을 안겨준 영화 <아가씨> 뿐 아니라 <작은 아씨들> <헤어질 결심> <암살> <괴물> <박쥐> <달콤한 인생> <올드보이> 등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화제를 모은 대부분의 영화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스토리면에서 <마스크걸>은 류감독의 전작과 비슷한 장르의 느낌이지만, 사실 웹툰의 이미지들은 등장인물위주의 드로잉으로 색이 거의 간결하고 심플한 그림체를 띄고 있어서, 영상 콘텐츠에서 어떤 분위기로 만들어졌을지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공개된 티저에서 강렬한 색채의 모미의 침실과 화려한 조명의 바 욕실의 그린빛 조명, 그리고 무엇보다 회색으로 가득 찰 것 같은 교도소에서 기도 하는 장면을 성스러운 분위기의 세트로 만든 것을 보고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기대감이 올라 오는 느낌이었다. 교도소는 라일락,보라,그린의 색 조합을 통해 판타지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고 한다.
감독이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한 장소는 김모미가 처음 살인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텔이었다고 한다. "가짜의 로맨틱 러브모텔, 벽지의 야자수가 판타지적이지만 어딘지 도달할 수 없는 노을 지는 시간부터 밤의 시간까지 표현되고, 아름답지만 슬픈 감정도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이미지 너머 ‘아름답지만 슬픈 감정’ 을 생각 하고 공간을 디자인 하는 그 지점이 지금 까지 류성희 감독이 참여한 작품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넘어선 깊은 감정에 다다를 수 있게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영상이라는 장르에서 스토리텔링은 웹툰과 다르게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 되는 것이 아니고,촬영, 조명, 음향 그리고 2차원의 공간이 3차원으로 구현되는 미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 한다. 그림과 텍스트로 이미 만들어진, 알고 있는 스토리텔링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도록 어떻게 기획하고 연출을 했을까. 기대감으로 이번 주말은 <마스크걸> 정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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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해리엇 월터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프로메테우스>, <마션>, <바디 오브 라이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등 짱짱한 배우 라인업을 보고 개봉날만을 기다린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편의상 <라스트 듀얼>과 혼용 표기)
<마션>에 이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의 만남, 그리고 <스타워즈>를 통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어 버린 배우 아담 드라이버와 최근 <프리가이>로 눈에 들어온 조디 코머, <나를 찾아줘>를 통해 알게 된, 항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배우 벤 애플렉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라니. 그것도 시대극?!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까 잔뜩 기대했다.
<듄>과 <베놈> 같은 대중적이고 커다란 작품들에 밀려 개봉 전부터 상영관 배정이 많이 부족해 보여 크고 좋은 관에서 보긴 그른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기에 개봉 전에라도 미리 보자며 프리미어 상영을 다녀왔다. 심지어 <라스트 듀얼>을 보려고 평소 팔자에도 없던 중세 시대와 봉건 제도에 대해 나름 공부까지 하고 갔다. (이 부분은 이동진 평론가님의 영상을 통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라스트 듀얼>은 근세(1500년)가 시작되기 전, 1000년 정도에 이른, 아주 길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극 중 배경은 중세 시대 중에서도 유럽에 창궐한 흑사병이 진정된 지 얼마 안 된 혼란한 시기였으며, 그 혼란함을 추스를 후세를 낳기 위해 주인공인 장이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장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장의 절친 자크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영주와 왕은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 각자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하던 장과 자크는 마지막 재판 방법인 결투 재판을 신청하게 된다.
잘잘못을 따질 수 없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됐던 결투 재판은 재판장에서 내리지 못한 결론을 하늘이 내려줄 거라, 하늘이 선한 자를 살려줄 거라 믿으며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재판이다. 말이 좋아 재판이지 사실 야만적이고 처절한 결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지배계급 사이의 주종 관계가 확연하게 정립되는 봉건 제도가 있던 시기이자 하늘과 신의 존재를 받들며 온 국민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던 그 시기에 전투 재판은 하늘의 뜻을 묻는 정당한 재판에 속했다.
영화의 제목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벌이는 결투가 실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전투 재판이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의 몰락과 왕권의 확립,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앞서 합리적인 부분을 먼저 찾기 시작한 사회와 인식의 변화와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처절했던 이 마지막 결투의 영향으로 전투 재판 제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라스트 듀얼>은 마지막 전투 재판의 기록을 인용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라스트 듀얼>은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권력과 자존심 다툼을 하는 두 남성의 까칠한 민낯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용기를 내 무고함을 소리치는 여성의 시선을 함께 담아낸다. 겉으로 보면 한 여성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두 남성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 정도의 느낌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실상은 다르다.
영화는 장, 자크 두 남성의 시선과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나눠 진행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이 박혀있던 그 시기에 살아온 장과 자크는 마르그리트를 지키거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 재판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유물을 건든 자를,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기 위해 나의 운명을, 내 소유물인 아내의 운명을 함께 건 것이다. 아내는 물론 선택권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둔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다르다. 특히 유일한 여성인 마르그리트의 시선은 이 사건을 다르게 보고 있다.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그 시절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잔인할 만큼 투명하게 보여준다.
불합리와 야만의 시대에서 여성은 아내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식모 살이와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고, 아이를 잉태하는 수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모든 여성들이 포기하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마르그리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남편 장에게 호소한다.
나는 마르그리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분위기이긴 하지만 마르그리트를 보며 올해 7월에 개봉했던 <오필리아>의 주인공, 오필리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성이 절대적이었던 사회에서 일어난 남성들의 권력 싸움과 여러 사건 뒤에 묻혀있던 여성 주인공,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담아낸 두 영화의 모습이 얼핏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시선에 따라 정의롭던 사람이 강압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희대의 바람둥이가 순수한 사랑에 미쳐버린 청년으로 변하고, 무고한 여성의 외침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사건의 진실은 신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왜 여성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남성뿐인가, 그리고 무고함에 박수받는 것 또한 왜 남성인 것인가.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보는 내내 불편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속이 답답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다. 중세 시대를 충실하게 복원해낸 세트와 의상, 미술,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그 긴 시간마저도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관객을 끌어당기는 배우들의 힘. 그리고 각자의 시선을 따라 조금씩 비틀어낸 카메라의 시선. 같은 사건을 3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같은 시간을 3번 반복해 보는 일인데,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라스트 듀얼>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보고 중세 시대의 웅장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인물들의 위엄을 보여주는 짧은 전투 장면과 두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결투는 충분히 처절했고, 단시간에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 결투 뒤에 숨겨진 진실들은 끝까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라스트 듀얼 시놉시스
부조리한 권력과 야만의 시대,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자크’는 ‘마르그리트’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자크’의 죄를 고발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는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장’은 승리하는 사람이 곧 정의로 판정 받게 되는 결투 재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장’이 결투에서 패할 경우, ‘마르그리트’는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데… 단 한번의 결투가 세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하나의 사건과 세 개의 시선
세 사람을 둘러싼 사건은 여러 가지가 아닌 단 하나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
장은 영주의 눈에 든 자크가 목숨을 살려준 자신과의 우정을 배신하고 아첨을 반복하며 권력을 얻은 놈이라 생각한다. 장은 자크가 아내 마르그리트의 결혼 지참금이었던 땅을 빼앗고, 나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던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며 무지향성으로 분노를 터트린다.
1장, 장의 시선으로 보면 자크는 분명 아첨꾼이자 배신자가 맞지만 자크의 시선으로 본 순간들은 사뭇 다르다. 자크가 난봉꾼인 건 맞지만, 그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리모주 전투에서 다른 병사들이 장의 뒤를 따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장을 뒤따라가야 한다고 선봉에 선 사람은 자크였고, 자크는 영주에게 장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한다. 자크는 권력을 얻으려고 영주와 함께 어울리긴 하지만, 꼭 장을 배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권력
하지만 막강한 권력 앞에서 두 인물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정과 이성을 가볍게 내버린다. 장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옳음 따윈 없어. 사내들의 권력만 존재하는 거야.”
장은 영주에게 인정받고, 좋은 땅을 받고, 본인 대신에 성을 물려받게 된 자크에게 분노와 열등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기로 했던 진짜 주인은 나인데,.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이 없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오가고 있는데, 기사 집안도 아니었던 친구 놈이 성에서 잘 놀고먹고 있다니. 앞서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입은 장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그래서 장은 자크를 이길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을 끝마치고 영주에게 보고를 하러 간 자리에서 장은 자신을 가볍게 부르는 자크에게 자신은 이제 기사니 존칭(Sir)을 하라고 명령한다. 자크는 공격적으로 나오는 장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선 그가 기사인 것은 맞으니 존칭을 붙여 대답한다.
기사가 되어 존칭을 받음으로써 이제 자크를 이긴 걸까 싶었는데, 장이 다시 분노할 일이 생긴다. 자크가 자신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한 것이다. 아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나의 후세를 낳아줄 값진 암말, 나의 소유물을 말이다. 장은 마르그리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자크를 벌하는 것에 더 열을 내며 마지막 전투 재판까지 참여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장이 결투에서 지면 화형에 처해질 운명을 부여받고, 두 남성이 자유롭게 칼을 휘두를 동안 발목이 묶인 채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본다. 남성들의 권력싸움 앞에서 여성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무력하게 묶여 그들의 싸움에 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여성을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본 남성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기에 남편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었고, 여성은 무슨 일을 당하든 입을 열 수 없었으며 후세를 잇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또는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집안에 보내지는 뇌물 정도로 인식된다. 여성은 그저 남편, 남성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영화의 초반, 장의 시선으로 본 장의 모습은 마치 아내를 아껴 재판까지 참여한 꽤 멀쩡한 남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본 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사건을 알게 된 순간엔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뺏겨 화가 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내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단 “나의 소유물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내거를 가져가려고 해?” 이런 마음과 비슷한 분노였다. 장은 마르그리트의 말을 듣자마자 “그놈은 왜!”라고 소리치며 나의 소유물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듯 마르그리트를 침대에 눕힌다.
여성 편력이 굉장하다고 소문난 자크 또한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만 인지한다. 그는 축하파티 자리에서 처음으로 본 마르그리트의 미모에 홀려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다. 욕심내면 안된다는 부하의 말에 자크는 “나를 향한 저 눈빛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며 일방적이고 사랑, 사랑보단 폭력에 가까운 욕망을 키워간다. 자크는 재판장에 서서도 끝까지 그것은 강제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마르그리트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고,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라고 소리친다.
거기에 얹어지는 남성 법조인들의 수치스러운 질문 퍼레이드를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 얼마나 야만적이고 지저분했던 걸까. 중세 시대라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위엄과 무게감 따위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면이었다.
우리에 갇힌 암말과 같은 여성의 지위
영화의 세 번째 시선, 드디어 마르그리트의 시선이다. 마르그리트는 국가적 배신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버지의 딸이다. 나름 돈도 많고 괜찮은 집안이었지만 배신자 딱지가 붙자 아무도 마르그리트의 집안과 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마르그리트와 혼인을 약속한 건 바로 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장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명성과 집안을 이어줄 후세를 낳는 일이었다. 장은 마르그리트 집안의 돈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마르그리트의 몸을 이용하기 위해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이한다.
장은 수차례 관계 후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 마르그리트를 보며 첫 아내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며 마르그리트를 압박한다. 장의 어머니 또한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여성은 겁탈을 당해도 아무 말 없이 집안에 있는 거라고 다그친다. 마르그리트의 친구 마리 또한 결혼의 무게감을 느끼며,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 사회가 말하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희생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던 여성,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장이 꽁꽁 묶어둔 그의 번식용 값진 암말을 보며 자신 또한 그 암말의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살아온 마르그리트는 장이 긴 전투를 떠나고 스스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하얀 얼굴이 아닌 조금은 탄 얼굴, 하인인 알리스는 얼굴이 타지 않았냐고 묻는 마르그리트에게 “얼굴에 색이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죠.”라고 답한다. 스스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남성들의 욕망을 채워줄 도구 따위가 아니다.
여성의 침묵의 대가는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뿐이고, 만일 침묵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장도 친구 마리도, 마르그리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르그리트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욕하며 자크의 편을 든다.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의 어머니는 자신도 겁탈을 당했지만 꾹 참고 견뎌 겨우 살아있다고, 재판을 진행하지 말라며 마르그리트를 말린다.
부조리한 일을 겪었음에도 여성은 침묵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찬스를 얻는 것뿐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여성은 그저 살아있을 뿐, 명예, 지위, 돈 같은 것들을 절대 탐할 수 없는 아이를 낳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르그리트가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마르그리트는 장과 자크의 결투 재판에 끼인 채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이 아닌 장의 손에 쥐어진 자신의 목숨을 반강제로 걸게 된다.
피 튀기는 마지막 결투
사실 점점 더 처절해져가는 결투를 보며 장과 자크 두 사람이 다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두 인물이 모두 미웠으니까. 하지만 발목이 묶인 채 결투를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장을 조금은 응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말을 타고 꼿꼿한 자세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처절하게 변한다. 장과 자크는 말의 죽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이내 괴성을 내며 무기를 휘두른다. 긴 창에서 도끼, 검, 그리고 단검까지. 두 사람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싸움은 더 치열하고 본능적인 모양새로 바뀐다. 장과 자크, 두 사람은 본인의 권력을 위해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운다.
신의 손, 신의 심판인 결투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건 결국 남성이었다.
신의 손,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결투 재판이지만 사실 결투 재판은 싸움을 하는 남성이 언제 지치느냐, 언제 죽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남성들에 의해 내려지는 이 재판은 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만든다.
남성들의 힘이 모든 걸 결정하는 그 결투에 자신의 목숨마저 걸라니. 마르그리트는 장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그대로 쥐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말한다.
“이게(아이를 낳는 것) 내 삶이었어요.”
“엄마에게 정의가 필요한 것보다 더,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마르그리트는 이러한 재판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재판은 과연 누굴 위한 재판이며 이 재판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장이 결투에서 승리하고 마르그리트의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가 풀리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르그리트가 아닌 신의 재판에서 승리한 장에게 집중하고 박수를 보낸다. 누구도 마르그리트의 무고함엔 관심이 없다. 이게 바로 그 시대의 진정한 민낯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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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3세가 배워야 할 여왕의 고뇌
6★/10★
〈더 퀸〉은 2022년 개봉한 〈스펜서〉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스펜서〉가 영국 왕실의 전통과 권위, 가족들의 냉대로 고통받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더 퀸〉은 다이애나 스펜서가 그토록 탈주하고 싶어 하던 왕실의 상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초점을 맞춘다.
1997년, 엘리자베스는 여러모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한 상태다. 먼저 국내 정치다. 토니 블레어가 대표인 노동당이 18년 만에 집권했다. 그가 추후 실제로 펼친 정책과 행보는 별개로 하더라도, 토니 블레어는 분명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 염원의 극적인 표출이었다. 그리고 새로움을 향한 욕망은 늘 오래된 것의 폐지 요구와 함께 부상한다.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군주제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토니 블레어는 그저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재임하던 중 선출된 수많은 총리 중 한 명일 뿐이었지만, 그의 당선을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은 엘리자베스 2세가 압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며느리이자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다이애나의 부고가 도착한 것은 바로 이때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후 활발히 자선 활동을 벌이며 이집트 재벌과 연애 중이던 그녀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파라치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왕실이 고상함, 비밀스러움의 이미지였다면, 다이애나는 다정함, 활력, 봉사활동 등을 상징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이 영국 국민에게 준 충격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토니 블레어의 집권에 이어 영국 왕실이 실의에 빠진 국민을 보듬어야 하는 연이은 도전을 마주한 것이다. 왕실이 상징하던 고루함을 향한 대중의 막연한 불만이 구체적 분노로 촉발되기 위한 모든 여건이 완벽하게 마련된 셈이다.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가 찰스와 이혼했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의를 표하지도 않고, 마땅한 예우를 다하지도 않았다. 반면 왕실과 다이애나가 서로를 불편해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영국인들은 근위대의 교대식이 어려울 만큼 많은 꽃다발을 버킹엄궁 앞에 쌓아 다이애나를 추모했다. 언론은 왕실의 무대응을 두고 날 선 비판을 연일 쏟아냈고, 총리 역시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여왕이 국민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제 모든 건 엘리자베스의 몫이다. 전통의 엄격한 적용을 고수하여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것인가, 왕실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국민적 열망에 맞춰 다이애나를 추모할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엘리자베스 2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더 퀸〉은 여왕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을 충실히 좇으며 그녀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인다. 왕실 일부 구성원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다이애나 추모사를 발표한 데에는 전통과 변화 열망을 조화하여 왕실의 역할을 이어가겠다는 그녀의 결연한 다짐이 담겼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2세가 어떻게 왕실의 품위와 국민의 존경을 동시에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스펜서〉의 다이애나가 한 여성으로서 오롯이 거듭나 자기 세계를 펼치고자 했듯, 〈더 퀸〉의 엘리자베스 역시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켰다. 적어도 이 두 영화에서만큼은 두 여성의 고군분투가 먼저고, 그것이 야기한 정치적 효과에 대한 언급은 나중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글 작성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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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한 감동을 주는 로드 무비 모음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모두들 무탈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수요일, 대리만족을 시켜줄 로드 무비 모음을 가져왔어요!
이란 영화계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대표작 <체리 향기>부터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3관왕에 빛나는 <그린 북>까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8편의 로드 무비와 함께할 준비가 되셨나요?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체리 향기(1997)
Taste of Cherry
ⓒ MUBI시놉시스
바디(호마윤 엘샤드)는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간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자신의 차에 동승할 사람을 찾는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수면제를 먹고 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앳된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단호하게 외면할 뿐. 드디어 한 노인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박물관에서 새의 박제를 만드는 노인은 그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들을 하나씩 펼쳐 놓는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는 바디. 운동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도시의 하늘 너머 펼쳐지는 저녁노을의 눈부신 빛깔. 밤이 오고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아침이 오면 그는 그토록 바라던 죽음을 얻게 될까? 아니면?
CINE PICK!
영화 <체리향기>는 1997년 칸 영화제에서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로 출품되지 못하다가 폐막 3일 전 프린트를 몰래 빼내 기습적으로 상영,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는 기적을 이룬 작품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체리 향기'는 11세기 이란의 시인이었던 오마르 하이얌의 시 구절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 향기를 맡아보라.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에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체리는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운 과일 중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체리의 향기가 삶의 환희를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게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영화는 자살을 기도하는 한 남자의 하루를 다루고 있는데요, 그가 차를 몰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출연한 배우들의 경우 모두 감독이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일반인으로, 주인공에게 삶의 기쁨을 알려주는 노인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촬영이 끝나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사라져 크레딧에도 실제 이름이 아닌 시나리오 상의 배역 이름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메이킹 필름이 짧게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극영화의 형식을 취하되, 조작된 겉모습 이면의 진실성을 잡아내려 했던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이니, 삶에 지치셨던 분들이라면 한 번쯤 꼭 보시길 추천드려요.
명대사
"좌회전해주세요."
"이 길은 모르는데요."
"난 알아요.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다워요."미스 리틀 선샤인(2006)
Little Miss Sunshine
ⓒ 네이버 영화시놉시스
본인의 절대무패 9단계 이론을 팔려고 엄청나게 시도하고 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대학 강사 리차드. 이런 남편을 경멸하며 이 주째 닭날개 튀김을 저녁으로 내놓고 있는 엄마 쉐릴. 헤로인 복용으로 최근에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전투 조종사가 될 때까지 가족과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9개월째 묵언 수행 중인 아들 드웨인. 그리고 이 콩가루 집안에 얹혀살게 된 외삼촌 프랭크는 게이 애인한테 차인 후에 자살을 기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방금 퇴원한 프로스트 석학이다. 마지막으로 7살짜리 막내딸 올리브는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하며 분주하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리브에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쟁쟁한 어린이 미인 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 출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고 딸아이의 소원을 위해 온 가족이 낡은 고물 버스를 타고 1박 2일 동안의 무모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좁은 버스 안에서 후버 가족의 비밀과 갈등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CINE PICK!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미국의 부부 감독인 조나단 데이톤, 발레리 페리스의 2006년작 영화입니다. 미국 최고의 콩가루(?) 집안사람들이 딸의 어린이 미인대회 참가를 위해 낡은 승합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며 그리는 화해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렉 키니어, 스티브 카렐, 토니 콜렛, 폴 다노, 아비게일 브레스린, 알란 아킨 등의 배우들이 출연해 호연을 펼쳤고, CF와 뮤직비디오로 명성을 얻었던 감독 부부의 연출 또한 호평을 얻었습니다. 캐스팅 과정에서 고심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독특한 가족구성원들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훌륭한 캐스팅과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연기로 완성된 깜찍한 영화랍니다.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거두며 대중들에게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명대사
"결과야 어떻든 네 힘으로 노력했다는 게 중요해."
"진짜 패배자는 질까 무서워서 시도도 안 하는 사람이란다."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단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기쿠지로의 여름(1999)
Kikujiro
ⓒ MUBI
시놉시스
모두가 기다리던 여름방학. 하지만 마사오는 전혀 즐겁지 않다. 할머니는 매일 일을 나가시느라 바쁘고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다나 시골로 놀러 가버려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 어느 날 먼 곳에 돈을 벌러 가셨다는 엄마의 주소를 발견한 마사오. 그림 일기장과 방학숙제를 배낭에 넣고 엄마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친절한 이웃집 아줌마는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는 전직 야쿠자 남편 기쿠지로를 마사오의 보호자로 동행시킨다. 왕복 600km의 여정. 그러나 그 여행은 마사오도 기쿠지로도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는데... 52세 철없는 어른과 9세 걱정 많은 소년. 그들이 마침내 찾은 것은?!
CINE PICK!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은 일본을 대표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기타노 다케시(배우로서의 예명 비트 다케시)가 연출, 주연을 맡은 1999년 영화입니다. OST이자 영화의 무드와 잘 어울리는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 독주곡인 'Summer'로 유명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이 곡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3 원소로 불리는 코미디, 폭력, 센티멘털리즘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전반에 어우러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조금 더 가볍고 천진난만한 분위기로 타 작품들보다 가볍게 시청하기 좋습니다. 뜨거운 여름날의 일본을 배경으로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명대사
"이건 천사의 종이라는 거야. 힘들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이 종을 울리면 천사가 와서 도와준대."
"다음에 우리 또 엄마 찾으러 가자."
"근데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기쿠지로다, 바보야!"델마와 루이스(1991)
Thelma & Louise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보수적인 남편을 둔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수잔 서랜든).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함께 휴가를 떠난 두 친구는 휴게소에서 그녀들을 강간하려는 한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되고, 즐거웠던 여정은 순식간에 끝을 알 수 없는 도주가 되어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사막을 달리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그녀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멕시코로 향하는 길목에서 매력적인 카우보이 ‘제이디’(브래드 피트)가 나타나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델마’를 지켜보며 ‘루이스’는 조금씩 불안감이 커진다. 한편, 강력범으로 수배가 된 그녀들은 좁혀오는 수사망과 함께 점차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CINE PICK!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1년 작품으로, 여성 주인공들을 내세운 로드 무비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으로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가 출연해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 명 모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대신 각본가 칼리 쿠리가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이외에도 촬영상, 감독상, 편집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음악은 한스 짐머가 담당하였고, 무명 시절의 젊은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준 높은 페미니즘 영화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요, 리들리 스콧이 작업 당시 전통적으로 남성이 주인공을 맡았던 버디 무비 장르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었다고 합니다. 감독의 전작인 <에일리언>에서 역시 전통적으로 남성이 맡아왔던 역할에 여성을 캐스팅하기도 했지요. 절벽을 넘어 떨어지는 자동차의 모습이 담긴 결말 씬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강렬한 장면인 만큼 여러 매체에서 오마주, 패러디되고 있습니다. 밝고 화사한 색감의 야외 씬들의 향연 또한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명대사
"별 개떡 같은 재미가 다 있군. 돌아서, 기억해 둬.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밌어서가 아니야."
"신사숙녀 여러분,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갈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주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계속 가는 거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2004)
The Motorcycle Diaries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23살의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퓨세)’는 생화학자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남미대륙 횡단을 계획한다.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사막을 건넌 후 아마존을 거쳐 베네수엘라까지 가는 것이 이들의 목표. 여행을 통해 만난 세상은 지금까지 알던 현실과 너무 다르고, ‘퓨세’와 ‘알베르토’는 세상의 불합리함에 분노한다. 청년 ‘퓨세’의 인생을 뒤흔든 생생한 기록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는 이 여행을 통해 훗날 현명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로 추앙받은 세기의 우상, '체 게바라'로 거듭난다. 열망으로 가득 찬 ‘두 청년’과 한 대의 낡은 모터사이클 ‘포데로사’. 그리고 이들이 시작한 8,000km의 여정. 인류의 역사를 바꾼 특별한 여행기가 공개된다!
CINE PICK!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그라나도와 체 게바라가 쓴 두 권의 여행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드 무비인 전작 <중앙역>으로 유명세를 얻은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로, 주인공 '퓨세' 역할은 이냐리투의 <아모레스 페로스>,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 등으로 유명한 가엘 가르시앙 베르날이, '알베르토' 역할은 <종이의 집> 속 '팔레르모' 캐릭터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가 맡았습니다. 영화는 몇 년 뒤면 '체'라는 애칭을 갖고 베레모를 쓴 혁명가가 될 체 게바라가 아직 '퓨세'로 불렸던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험한 라틴아메리카의 흙길, 그 안에서 가혹한 현실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을 보듬으며 혁명의 꿈을 키워 나가는 푸세의 성장이 마음을 울리는 영화입니다.
명대사
"본 적 없는 세상이 그리울 수도 있나요?"
"어떻게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이토록 무참히도 짓밟아버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전에는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또 다른 인류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있어요."
중앙역(1998)
Central Station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브라질의 수도 리우 데자네이루. 산업화에 실패한 도시의 중앙역. 노처녀 도라(페르난다 몬테네그로)는 중앙역 한 구석에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는 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믿음이 없는 도라는 나름대로 절실함이 담긴 편지를 아무 거리낌 없이 쓰레기통에 버린다. 습관처럼 버린 편지들 속에는 어린 아들 조슈에(비니시우스 드 올리베이라)를 홀로 키우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나의 절실함이 쓰인 편지도 있다. 아나는 편지를 부탁한 후 중앙역 건널목에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홀로 남은 조슈에는 도라의 곁에 머물고 도라는 그 조슈에를 입양소에 팔아넘긴다. 그러나 그곳이 아이들의 장기를 팔아넘기는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죄책감에 조슈에를 빼돌려 함께 조슈에의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CINE PICK!
영화 <중앙역>은 위에서 소개해드린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감독이기도 한 월터 살레스의 1998년 작입니다. 역에서 편지를 대필해 주는 일을 하던 노처녀 도라가 한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길에 동행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로, 그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월터 살레스는 브라질 출신으로 이전에는 다큐멘터리 연출을 주로 하다가 <중앙역>을 통해 주목받는 영화감독으로 급부상하였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도라'와 '조슈아'의 여정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가까이서 보여주며, 세상에 신뢰를 잃은 어른이 아이와의 우정을 통해 되찾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라' 역의 브라질의 국민 배우 페르난다 몬테네그로가, '조슈아' 역에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발탁된 신발닦이 소년 비니시우스 드 올리베이라가 출연해 가슴 따뜻해지는 연기를 펼쳤습니다.
명대사
"너희 아빠는 네 말대로 꼭 오실 거야. 우리 아빠도 좋은 면이 있었던 것 같구나."
"날 기억하고 싶을 땐 우리의 작은 사진을 꺼내보렴."
"그리운 게 너무 많다. 너무 많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자신의 꿈은 접어둔 채 16년째 ‘라이프’ 잡지사에서 포토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월터 미티. 해본 것도, 가본 곳도, 특별한 일도 없는 월터의 유일한 취미는 바로 상상! 상상 속에서만큼은 ‘본 시리즈’보다 용감한 히어로, ‘벤자민 버튼’보다 로맨틱한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어느 날, ‘라이프’지의 폐간을 앞두고 전설의 사진작가가 보내온 표지 사진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당장 사진을 찾아오지 못할 경우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 월터는 사라진 사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연락조자 닿지 않는 사진작가를 찾아 떠나는데…
지구 반대편 여행하기, 바다 한가운데 헬기에서 뛰어내리기, 폭발직전 화산으로 돌진하기 등 한 번도 뉴욕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월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많은 어드벤처를 겪으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CINE PICK!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배우와 작가, 감독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활동으로 인정받은 벤 스틸러가 처음으로 진지한 정극 연출을 맡아 감독과 주연배우로 활약한 영화입니다. 1939년에 쓰인 동명 소설(원제인 The Secert Life of Walter Mitty)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상상 멍 때리기'에만 몰두하던 월터 미티가 어디론가 사라진 숀 오코넬의 25번 필름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947년작 영화의 리메이크 버전이며,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고귀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진지한 메시지를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로 풀어냈습니다. 북유럽의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다양한 패러디와 판타지에 가까운 월터의 공상 씬들로 꽉꽉 채워져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하는 영화입니다.
명대사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지."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유령 표범처럼 아름다운 것. 월터 미티."
그린 북(2018)
Green Book
ⓒ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며 살아온 돈 셜리 박사.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한 여행안내서 ‘그린북’에 의존해 특별한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데…
CINE PICK!
영화 <그린 북>은 제43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관객상, 제76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3관왕에 이어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휴머니즘 영화입니다. 평단의 호평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에게도 인기를 얻어 북미에서 총수익 3억 416만 달러를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하였습니다. 실존인물들을 모티프로 제작되었으며, 인종차별과 화합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케미와 유머로 유쾌하고 풀어냈다고 평가받는 영화입니다.
명대사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외로워도 먼저 손 내미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성 만으로 충분하지 않죠. '용기'가 있어야 해요."
이렇게 오늘은 로드무비 7편을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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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파일럿"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과 함께 쿠키영상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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