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4-05 20:58:20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이어즈 앤 이어즈>, 빅토르와 이디스를 중심으로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Relative contents
-
- 황야 | 범죄도시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지진이 발생한 후 폐허가 된 서울. 심지어 비도 좀처럼 내리지 않으면서 생존자들은 극심한 물부족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남산'(마동석)은 돌아다니는 동물을 사냥하며 남동생 같은 '최지완'(이준영), 딸 같은 '한수나'(노정의)와 함께 생계를 꾸며 나간다.
어느 날, 수나 앞에 '선생님'(장영남)이 나타난다. 그녀는 물과 먹을 게 풍족한 아파트에서 수나처럼 어린아이를 특별히 보호하는 기관이 있다면서 수나에게 이주를 권한다. 망설임 끝에 선생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수나. 그러나 그녀는 이내 광기로 가득한 과학자 '양기수'(이희준)의 음모에 빠지고, 남산과 지완은 또 다른 조력자 '이은호'(안지혜)와 함께 수나를 구하러 아파트로 향한다.
<황야>, 한국 시리즈물의 암(暗)
한국 영화 시장에서 시리즈물은 2010년대를 지나며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전까지는 속편 제작도 많지 않았다. 단적인 예시로 2017년까지 한국 천만 영화 16편 중 속편은 단 한편도 없었다. 설령 속편을 제작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름만 속편일 뿐, 주인공도 내용도 전편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2>, <친구 2>, <강철비 2>처럼.
<신과 함께> 시리즈와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 이후 기류가 바뀌었다. <명량>, <한산>, <노량> 삼부작이나 <베테랑 2>처럼 흥행작의 속편을 기획하는 경우가 늘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여러 편을 계획하는 시리즈물도 많아졌다. 웹소설 원작을 영화화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은 5부작,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 <호프>는 3부작 예정으로 알려졌다.
다만 부작용도 늘었다. 일례로 <범죄도시>의 경우 빌런 배우만 바꾸고 전편 내용을 되풀이한 결과, 세 번째 시리즈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객이 늘었다. 최동훈 감독의 야심작 <외계+인> 시리즈의 경우 배급사 CJ에게 수백억 대 적자를 안겼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마동석 주연의 <황야>는 또 다른 형태의 부작용을 보여줬다. 시리즈물의 핵심, 포지셔닝을 간과했다. <황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그 대가로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에서 표류한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일원으로서도 인정받기 애매하고, 독립적인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로서도 부족함을 노출하기 때문.
다채로워진 마동석표 액션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야>의 가장 큰 매력은 마동석의 액션이다. <범죄도시> 시리즈 무술 감독이자 <범죄도시 4> 연출을 맡은 허명행 감독과 합을 맞춰서인지 마동석의 괴력을 강조하는 액션은 이번에도 통쾌하다. <범죄도시>에서 관람등급 때문에 아껴둔 힘을 푼 것 같기도 하다. 디스토피아 장르고, 인간이 아닌 괴물과 싸우다 보니 목이나 팔을 절단하는 유혈 묘사도 망설이지 않는다.
<범죄도시>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도 있다. <범죄도시>의 '마석도'(마동석) 활용법은 단순했다. 긴장감이 없었다. 빌런이 누구여도 마석도가 이긴다는 사실을 관객 모두가 올고 있다는 핸디캡을 없애지 못했다. <황야>는 다르다. 치유 능력을 지닌 군인, 악어나 도마뱀처럼 움직이는 좀비로 변한 괴물을 남산의 상대로 내세웠다. 비록 액션의 끝은 비슷해도,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이나마 긴장감을 올리려 노력한 듯 보인다.
다양함도 더했다. <범죄도시>에서는 액션 캐릭터가 마석도 하나였기에 단조롭다는 인상이 짙었다. 반면에 <황야>는 세 캐릭터가 액션 분량은 나눠 가지면서 보는 재미를 늘렸다. 최지완은 원거리에서는 활을 쓰고, 근접전에서는 화살촉을 활용하며 칼을 주로 쓰는 남산과 차별화했다. 이은호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 하체나 발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또 다른 스타일의 액션을 보여줬다.
애정이냐, 집착이냐
단순한 플롯도 <황야>의 매력이다. 확실한 대립 구도 덕분에 뚝심 있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핵심은 부성애다. 남산과 양기수는 둘 다 딸을 잃은 아버지다.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지를 지녔다. 영화는 두 아버지가 각자의 상실감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대조한다.
남산은 상실감을 사랑으로 승화한다. 딸을 똑 닮은 아이 수나를 딸처럼 돌본다. 사냥에 성공하면 수나 몫을 항상 따로 챙기는 식으로. 수나가 시설 좋은 아파트로 가게 되자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수나와 수나 할머니가 위험해지자 고민 없이 구하러 간다.
반면에 양기수는 상실감을 집착으로 왜곡한다. 그는 딸 소연이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 자기가 개발한 약물 덕분에 소연이를 되살렸다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부모들의 애정을 악용해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다 허상이었다. 심장만 뛸 뿐, 소연은 절반 이상의 신체와 의식은 잃었다. 그녀는 살지도 죽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열하는 양기수가 약간 짠하면서도 몹시 불쾌하고, 그를 처리하는 남산의 모습은 통쾌하다. 진정한 사랑과 집착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덕분에 <황야>가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방치된 '콘크리트 유니버스'
보통의 액션, 디스토피아 영화라면 <황야>는 위의 두 장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황야>에게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대지진'의 발생, 황궁아파트 103동의 등장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연결점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반부에 아파트에서 갑작스레 쏟아져 나온 물을 <황야>에서는 식수와 그 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황야>를 '콘크리트 유니버스' 일원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황야>는 배경과 디자인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별개의 설정과 이야기를 펼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대지진 직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곧바로 아파트를 통제했다. 반면에 본작에서는 대지진 발생 첫날부터 군부대가 아파트를 장악한다. 다른 차이점도 있다. 전자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와의 사투가 강조된 반면, 후자에서는 유독 가뭄과 물의 부재에 주목한다.
심지어 <황야>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간대 순서를 알려주는 장치나 연결고리가 없다. 두 작품 간의 차이를 명확히 제시하는 대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 영화의 세계관이 별개고, <황야>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이 아니라는 허명행 감독의 주장에도 힘이 안 실린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 외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매한 포지셔닝의 나비효과
결국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최대 장점은 심리와 인간군상의 묘사였다. 아파트 내부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다양한 갈등을 보여줬다. '영탁'(이병헌), '민성'(박서준), '명화'(박보영), '금애'(김선영) 등 주요 인물의 입장이 제각기 달라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캐릭터의 서사와 감정선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서스펜스를 마지막 순간 일제히 터뜨리며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그에 비하면 <황야>의 전개는 우악스럽다. 특히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층 간 갈등, 인간성 상실을 다루는 대목이 어색하다. 일례로 아이를 못 만나게 하는 방침에 부모가 항의할 때, 양기수와 군인들의 대처가 너무 안일하다. 그전까지는 그 어떤 부모도 항의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수나가 도착하기 전에도 외부에서 아파트에 들어온 아이와 부모들이 더 있다는 걸 고려하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인들이 양기수의 비인간적인 실험에 동조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양기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이유도 정확히 짚어주지 않는다. 선생님에게 불치병이 있고, 이를 양기수가 악용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수나가 실험을 위해 제조한 물을 제대로 마셨는지 양기수가 확인조차 않는 대목도 반전을 위한 장치라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부실함과 기시감
포지셔닝도 애매한 가운데, 독립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미흡하다. 몇몇 장면에서는 기본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아파트 내부에서 지완과 은호가 각기 군인과 한창 싸우는 중인데, 남산의 유머가 갑자기 중간에 난입하고, 다시 싸움으로 되돌아가면서 템포를 끊는 식이다.
간단한 플롯과 명확한 갈등 구조를 위해 캐릭터를 희생하기도 했다. 남산은 마동석 그 자체이고, 지완과 수나 역시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린 남녀 커플 클리셰를 반복한다. 특히 빌런 양기수는 아파트 주민과 군인을 좌지우지하는 빌런 치고는 뻔한 음모와 계략을 반복한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캐릭터의 전형을 답습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영탁과 비교해 보면 존재감, 무게감, 입체감의 차이가 확실하다.
이에 더해 마동석표 유머도 남발한다. 이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꿀 기회를 놓치는 듯 보여서 유독 아쉽다. 마동석이 등장하거나 제작한 영화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제목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장르와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이때 <황야>가 마동석 색깔을 빼고 진한 장르물 분위기를 선보였다면 고정된 이미지를 다소 탈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황야>가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한 결정은 신의 한 수일 수도 있다.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황야>는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평범한 마동석 영화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Poor 형편없음
다시 한번 증명된 명제. 유니버스 활용은 쉽지 않다.
-
- 성공한 마에스트로의 이중성
모든 것이 다 잘될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성취했고,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서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좀 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려 할 것이고 조금은 탐미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 나갈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거만하게 주변에 자신감을 비추면서 자신이 일하는 스타일 대로 밀어붙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올라간 위치가 그 사람의 성향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그 거만함 자체는 이미 마음속 깊이 내재된 나만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성공을 위한 욕망과는 다를 것이다. 이미 성공한 이후에 찾아오는 욕망은 좀 더 직접적이다. 안정적인 배우자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고 또 데이트를 하고 다른 사람을 낮게 깔보면서 그런 욕망을 채워나간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돕던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발견되면 그 사람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찾는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성공 후에 찾아오는 이런 거만함과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공한 마에스트로 타르의 멋진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
영화 <타르>는 성공적인 위치에 있는 타르(케이트 블란쳇)가 가지고 있는 거만함을 천천히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타르는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지휘자다. 무대를 휘어잡는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그의 모습은 무척 자신감 넘치고 위트 있다. 그가 하는 긴 인터뷰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해 냈고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의 확고한 의견을 내세우고 위트 있게 청중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무척 멋져 보인다.
영화가 두 번째로 보여주는 타르의 모습은 강의실에서 특강을 하는 장면이다. 타르는 한 학생을 타깃으로 여러 질문을 하며 작곡가의 개인적인 성향과 음악 작품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척 단호하게 학생의 말에 반박하던 타르는 그 장면에서 학생에게 무안을 주고 결국 그가 교실을 나가게 만든다. 첫 인터뷰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강의 장면은 타르라는 캐릭터가 능력을 중시하고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견해가 평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동성애자로서 아내(니나 호스)와 함께 살면서 입양한 것으로 보이는 딸을 키우고 있다. 아내는 타르와 같이 필하모닉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다. 같이 일을 하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생활해 나가는 것 같지만, 타르는 이상하게 새로운 연주자에게 관심을 돌린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타르의 진짜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긍정적인 성취와 성향을 보여주는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서서히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바다 위에 솟아있는 아름다운 빙산 조각을 먼저 보여주고 점점 바닷속 어두운 곳에 있는 거대한 빙산의 뿌리 쪽으로 내려가면서 그 실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서서히 드러나는 마에스트로의 진짜 모습
다르게 이야기하면 타르의 이중성에 대한 것이다. 타르는 직업적인 성공 이후 마음에 들지 않는 조력자가 직원을 한순간에 교체하고 또 상처를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퇴사한 직원이 다시 취업할 수 없도록 모든 관련 악단에 메일을 보내 해당 직원의 정신적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런 타르의 행동은 그가 가진 자만심과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바로 쳐내기 바쁘다. 특히나 부단장이나 그의 비서(노에미 메랑)를 쳐내는 모습이 그가 주변사람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아주 느린 속도로 시작해 무척 빠른 속도로 결말에 이른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야말로 역겹게 느껴지는 타르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가 초반에 보여줬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인식 그리고 위트 있는 모습은 후반부의 진짜 모습 속에 완전히 묻혀버린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꽤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끝까지 자만심으로 가득한 주인공 타르를 자연스럽게 비웃게 만드는 멋진 장면이다.
영화 속 타르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있는 성공한 위선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공의 과정에서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고 외면한다. 완전히 자신만이 중요해지는 자아도취의 마약은 계속 자만심과 자신감 속에서 살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고 성공한 예술가인 그들은 다양한 매체에 등장해 긍정적인 이미지와 말들을 전달하지만 그 모든 공을 자기 자신이 가져간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타르는 그 자만심 가득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즉, 한 번 크게 성공한 그 인물이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경력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는 자신이 겨우겨우 다시 맡은 오케스트라 앞에서 거만하게 연설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실패 앞에서도 그가 가진 욕망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관객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온 세상 성공한 위선자들에게 전하는 일침
타르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그가 왜 최고의 배우인지를 보여준다. 성공적인 경력을 가진 자신감 넘치는 마에스트로와 굉장히 잘 어울리고, 그런 그가 조금씩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초점을 잃어가는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렇게 초점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성향을 지우지 못한 타르를 무척이나 잘 표현해 냈다. 영화를 연출한 토드 필드 감독이 타르 역에 케이트 블란쳇의 캐스팅만을 생각하면서 각본을 쓴 것이 충분히 이해 가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꽤 길다. 158분의 러닝타임이 초반에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진짜 타르의 모습이 드러나고 과연 타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될지를 쫓아가는 후반부는 꽤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타르가 가진 잘못된 욕망의 표현 방식과 거만함은 그의 주변에서 모든 사람을 떠나게 하고 관객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다. 어쩌면 이 영화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위선자들에 대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대리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
-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끝내지 못한 과거의 기억.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할 과거와 현재로 표현해 기존에 더 나아가지 못했던 길을 조금은 나아간 영화 리멤버는 10월 26일 개봉 예정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가 가족을 대신해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이고 영화 <리멤버>는 일제강점기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가 가족을 대신해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이다. 잊을 수 없었던,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그의 기억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걸까. 이성민 배우가 열연이 빛나는 영화 '리멤버' 시사회 리뷰를 시작하려 한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차마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켜야만 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기고 또 새기는 그 주름진 손이 떨리면서도 우직하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는 그 우직함이 인상적이다. 그 칼날이, 총구가 나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이 기억만큼은 끝까지 안고 가리라 다짐한다. 기억해야만 하지만 계속해서 잊히는 그 기억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계속 돌고 도는 기억 속에 잊지 말아야 할 그 기억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가족을 죽게 만든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한태주, 그는 뇌종양 말기에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기 전에 60년 동안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친해진 인규에게 일주일 동안 운전을 부탁하게 된다. 사라지는 기억을 곳곳에 새기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현재의 모습은 끝내지 못한 과거로 인해 색이 바래지고 말았다. 과거는 그저 지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는 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수많은 동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여전히 호위 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지나간 과거는 그저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에서도 성공해 존경받는 이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선동'이라는 말로 치부하며 기억이라는 단어 자체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을수록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쳐야 할 과거를 영광의 기억으로 덮으며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잊어도 누군가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힘은 무엇보다 강해서 그 힘과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을 신파로 끝맺지 않으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후반부에 흐트러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 아쉬웠다. 빠른 이야기의 전개만큼 휘리릭 지나가버린 인규의 감정과 소재로 이용되는 역사의 상처의 공백이 꽤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허탈함의 공백을 이성민 배우의 연기가 묵직하게 채우며 차분함과 건조함의 조화를 맞춰간다. 무겁지만 명확한 메시지와 타이밍이 기가 막힌 개봉일이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든다. '리멤버'. 과거가 이은 현재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또 '기억'하여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
- 류승완이 '밀수' 해온 바다 위의 한판승부
밀수를 시작하지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해안가 도시 군천이다. 주인공인 춘자와 진숙은 해녀 동료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친구들과 해녀 일을 하면서 바다생물을 채취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두 해녀의 삶에 위기가 들이닥친다. 군천 앞바다에 공장이 생긴다는 소식이었다. 공장이 들어서자 생계에 위협이 생기는 해녀들. 바다생물이 폐수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에 제품으로 판매하는 것이 쉽지 않다. 위기에 직면한 군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오랫동안 진숙과 알고 지냈던 아저씨 한 명이 있다. 이 아저씨가 진숙 부녀에게 밀수업을 제안한 것이다. 솔깃한 춘자. 하지만 진숙 부녀는 썩 내키지 않는다. 그건 단지 부녀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군천이라는 마을 자체가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밀수업 제안을 수락한다.
돈을 갈퀴에 긁어모으고 있다. 지역사회에 돈이 돌고 있다. 이제 진숙 부녀에게 생계는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문제가 아예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불안한 엄 선장. 언제 어디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는 딸 진숙에게도 마찬가지. 아버지를 항상 잘 따랐기 때문에 가족의 의중이 정말 중요했다. 동상이몽이라고, 친구 춘자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밀수업으로 돈을 버는 게 그렇게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내심 밀수업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에 속상하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마지막 밀수를 위해 출항을 나섰다. 그런데 사고가 벌어졌다. 늘 느릿느릿 출동하던 세관이 갑자기 등장했고, 해녀들이 모두 잡혔다. 과연 해녀들을 세관 찌른 인물은 누구일까? 군천 해녀들의 한판승부가 벌어진다!
최동훈이 아니라 류승완
2년 만에 돌아온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감독의 향을 맘껏 결부시킨 액션/스릴러물이다. 류승완은 이미 한국영화에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 것 같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이 <밀수>는 기존에 류승완 월드를 그대로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류승완이 그대로 유지해 온 ‘류승완 월드’는 고급스럽지 않은 척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영화는 이 기본적인 류승완 월드의 틀을 그대로 가져온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박력 넘치는 캐릭터 세팅과 이야기 구성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의 힘을 강하게 신뢰한다. 가상의 도시 군천은 물론이고 당시 시대상에 의한 ‘밀수’라는 소재가 ‘왜 이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류승완이 판을 합리적인 판을 깔아놓고 그 연계를 튼튼히 해 감독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렸다.
하지만 ‘단지 류승완 영화’라는 점은 영화의 장점이면서 단점으로도 작동한다. 우선 영화에서 장점으로 뽑을만한 것은 이야기다. 영화의 이야기 구성에 누수가 없다.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내적인 논리가 큰 흐름에서 잘 맞아떨어진다. 인물의 사용이 기능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반대로 인물의 서사를 영화 내적으로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에 대해 류승완 감독이 춘자/진숙 쪽에 분량을 많이 주는 수를 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굉장히 내밀하다고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대사로 넣었다는 점은 ‘과연 류승완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하는 구조다. 이 구조는 다른 등장인물에게도 수혜로 작용한다. 권상사/고마담/장돌이/이 계장이 두 사람과 대응한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개성이 생긴다. 두 사람의 내적 동기도 이해하니 이야기 몰입에 효과적인 것이다.
심심한 컴백
또한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동안 류승완이 견지해 온 이야기의 박력을 품고 있다. 감독의 전작인 <베테랑>의 이야기는 왠지 과잉의 에너지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특히 장윤주, 오달수 배우가 맡은 역할이 그렇다. 작중에서 조태오가 맡았던 역할만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담당 배우나 황정민 배우의 연기는 연극적이다. 이 연기 톤은 영화 내적으로 시너지가 있다. 영화 후반부까지 액션/스릴러물의 장르적인 동력으로 작동하며 관객에게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는 연기 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짝패>나 <피도 눈물도 없이>는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액션신으로 가득 찼던 작품이다. 전자 <짝패>는 이야기를 교차해서 꼬는 것이 아니라 액션으로 가득 채운 영화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여성 인물의 처절한 액션을 너절한 대사와 함께 표현한다.
이 <밀수>는 류승완의 장점을 그대로 구현한 듯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에 분기점 찍고 이야기의 톤에 박력이 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액션신은 과연 충무로 키드가 어디 안 갔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 준다. 또 후반에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관객에 따라서 신선하다고 느낄 여지가 충분하다. 영화의 단점은 ‘오히려 류승완스럽다’라는 점에 있다. 사실 이 작품의 단점은 전작 <모가디슈>와 <군함도> <베를린>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올드하다. 이야기 모든 것이 다 적당하다는 점은 무난한 선에서만 끝나지 않았던 류승완의 드라마 제작 능력을 알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모든 것에 단점이 있다지만
특히 류승완의 이야기에서 인공성이 느껴진다는 점이 이 작품에서 유달리 도드라졌다. 이야기에서 영화의 강점이 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민시 배우가 맡은 고마담이다. 이 인물은 감독의 역량이 그대로 투영된 캐릭터로 보인다(<베테랑>에서 장윤주 배우가 맡았던 역할의 연장선상인 부분이 어느 정도 있다). 이 감독의 캐릭터 투사는 인물의작위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물이 한 가지 장점에 의존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 또 이를 대사로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은 이야기의 인공성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춘자-진숙이 케미를 보여주며 빌런들을 해치우는 것이 영화가 선택한 장르적인 특성 중 하나다. 이 특성과 이 인물의 설정이 맞지 않아 중반부가 넘어가면 좀 지루하다고도 느낄 여지가 있다. 패턴이 전형적인 것이다. 또 박정민 배우가 맡은 장도리 역에 대해서는 역시 장르적인 특성을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후반부 이 인물에 대한 부분은 스릴러물로, 또 한 클리셰를 비틀기 위해 인공적으로 전개된 부분이다. 이 장도리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은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진주인공의 엄청난 퍼포먼스가 이 인물의 작위성을 어느 정도 가려준 감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사건관계가 하이라이트를 위해 전시되기만 한 건 아닌지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이야기의 후반부를 영화의 장점으로 뽑을 관객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그 중간에 변곡점 찍는 신의 액션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를 쌓아 올리는 방식에 비해 단점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곳이어야 하는 근거는 있다. 이 과정이 매끄러웠나? 에 대한 것은 의문이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매끄러웠나? 역시 의문이다. 류승완이 액션을 그동안 잘 만들어왔고 심지어 그전 장면에서 장소성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필모그래피 초반의 류승완의 기시감이 잘 안 느껴지는 지점이다. 전체적으로는 물론 이 시퀀스의 액션이 좋긴 했지만 딱 두 요소에서 영화의 단점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엔딩신은 너무 갑작스럽게 결론을 냈다.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이 이야기가 ‘류승완스럽다’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모가디슈>에서 느껴졌던 아저씨스러움과 <베테랑>의 과잉, <군함도>의 조급함이 ‘이거 류승완이 만들었던 전작을 그대로 담습 하는 것 같네’라는 아쉬움을 낳은 것이다.
재미있나요라고 물으면 네
영화 재미있다. 무난하게 뽑힌 액션/스릴러물이다. 영화의 장단점을 따질 필요 없이 작품 자체가 ‘순수한 오락영화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아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잘 만들었다’ 싶으면 들어가는 것들 다 있다. 오해, 액션, 생기발랄한 캐릭터, 빌런의 명연기, 톡톡 튀는 감초들에 무난한 이야기까지 이 작품이 관객을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점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
- 저는 남자고, 페미니즘을 공부합니다
어젯밤. 밤 9시. 느지막이 아내가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고된 몸을 말해주듯, 걸음걸이가 피곤해 보였다. 어제 아내는 5살 된 딸의 어린이집 친구네 다녀왔다. 밤늦게 도착한 아내는 겨우 아이를 씻기고, 기절한 듯 잠들어 버린다. 요즘 아내는 아침 6시에 기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고, 아침을 만든다. 아이를 깨우고, 등원 준비를 한다. 부랴부랴 아침을 먹이고, 허겁지겁 어린이집 등원시킨다. 그리고 바로 일터로 나간다.
음악치료사로 일하는 아내는 때로 학교로, 센터로, 가정집으로 출근한다. 다양한 악기를 어깨에 짊어 메고 이곳저곳을 다닌다. 때로 끼니도 걸러가며 그렇게 일하고, 딸의 퇴원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 앞에 기다린다. 아이를 데리고 바로 집에 오는 법은 없다. 장을 보기도 하고 또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돌아온다. 그리고 저녁 준비를 하고, 밥을 먹인다.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씻기고, 놀아주며, 재우 기고 집을 정리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양가의 경조사를 챙기고, 명절이면 양가에 올라가 일을 돕는다. 심지어 남편까지 챙기며 그렇게 살아간다.
코로나 백신으로 며칠간 누워있어다. 그 시간 속에 만난 책은 최승범 선생님의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다. 둘 다 여성에 대한 생각을 깊게 만들어주었고, 얀센 백신의 강력한 통증을 잊게 만들 정도로 흡입력과 몰입감, 그리고 공감대를 만들어줬다. 남자고등학교의 한 선생님이 써 내려간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페미니즘에 관한 나의 편견에 균열을 일어났다. 평생 세 남자와 함께 살아간 어머니.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며 버티고 견디는 아내, 앞으로 여자로 살아가야 할 딸의 모습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그동안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편협한 시선의 환기가 일어났다. 한국의 페미니즘 교과서라 일컫는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정희진은 페미니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 이론, 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에서..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이 삶에 주인공이 되어가기에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하여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남동생과의 차별이 있었고, 성추행을 당해도 여자로서 조심하지 않아서였고, 직장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과 재취업에 차별을 경험해야 했다. 영화의 모습 속에서 어머님이 살아온 모습, 아내와 살아가는 상황, 그리고 내 딸이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의 이해와 배움은 여성을 함께 살아가는 공존적 주체로 이해하는 측면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남자 역시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 남자가 눈물을 참지 않고, 시시콜콜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육아의 즐거움과 가사의 고단함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놀이방에서 남자아이가 인형을 만지고 남학생들이 여학생과 함께 축구와 고무줄놀이하는 공종의 삶. ‘여자라서’ ‘남 자라나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탐색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101~102 인용)이 페미니즘의 이해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의 엄마, 당신의 아내, 당신의 딸도 82년생 김지영일지 모른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겠다. 누가 뭐라 하든,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내 딸이 또 한 명의 지영이처럼 자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영화 속 지영이의 그 원망 서린 소리가 귓가에 울림을 가져다준다.
“저 벽을 돌아가면 출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벽이고,
그 벽을 돌아가도 다시 벽... 출구는 처음부터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제 잘못이잖아요. 남들은 출구를 다 찾는데 나만 못 찾으니까...”
영화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또 한 명의 지영이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배우고, 살아낼 것이다. 그래서 말해줄 것이다. 출구를 함께 찾아보자고, 니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잘못이라고, 그리고 너의 삶에 주인공은 바로 너라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가리켜 줄 것이다.
-
- 사랑으로 파리를 느끼다
사랑으로 파리를 느끼다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도시, 파리 13구. 낭만을 잃었다 생각한 그곳에서 불현듯 사랑을 만났다. 사랑을 원하는 에밀리, 사랑을 두려운 노라, 사랑이 값비싼 앰버 스위트, 사랑을 몰랐던 카미유. 흔들리고 불안했던 그 사랑이, 우리는 전부라 생각했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 도시 <파리, 13구>’
영화 <파리, 13구>는 파리 13구역에 살고 있는 4명의 인물을 통해 불안정한 삶과 사랑을 보여준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도중 카미유를 만나게 된 에밀리, 파티에서 성인 방송을 운영하던 앰버로 오해를 받다가 실제로 앰버와 가까운 사이가 된 노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각기 다른 사랑을 하는 네 사람의 모습은 파리의 13구역 안에서 어딘가 서로 닮아 있는 듯하다.
파리 13구는 파리의 20개 행정구역 중 하나로, 유럽에서 가장 큰 아시아 타운이 있는 곳이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곳은 우리가 알던 파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고층 빌딩과 아시안 식당들이 많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인다. 영화는 기존의 매체에서 등장하던 파리의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완전히 배제하고 색 또한 삭제하여 관객들이 인물들의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절제된 도시의 느낌과 배경을 통해 우리는 영화에서 파리 청춘들의 사랑, 자유, 방황, 불안정한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이 영화는 비교적 음악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음악이 등장하는 순간 그 존재감은 엄청나다. 특히 내용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하는 빠른 속도의 일렉트로닉한 사운드는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풍긴다. 겉보기에는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내면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불안한 청춘들의 이면을 음악으로 대변한 것 같아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잘 모르겠다.
돌고 돌아온 이들의 사랑은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삶은 불안하고 아름다우며 찬란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삶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방황하며 각자의 방향으로 영원히 헤맬 것이다. 영화 <파리,13구>와 함께.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
- 「스위트홈 리뷰」당신이 느꼈을 점을 세세하게 담아냈습니다ㅣ스포주의ㅣ자막을 위주로 봐주세용ㅣSweet home reviewㅣ
?"스위트홈 리뷰(*스포주의)"
뭐 저는 고민시 배우가
발레하는 거 봤으니까 만족입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박규영, 고민시, 고윤정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
#스위트홈_리뷰 #스위트홈리뷰 #스위트홈_고민시
-
- 「랑종」리뷰ㅣ여자가 예쁘고 야한 장면이 나오는 과학적 이유ㅣ스포없음ㅣ영화보는건데ㅣ공포영화 여자ㅣ
? "랑종" 으로 알아보는 공포영화의 과학원리(*스포없음)
- 랑종 정보
장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페이크 다큐멘터리, 오컬트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
각본: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제작: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원안: 최차원, 나홍진
- 랑종 스토리 시놉시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이 곳의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은
조카 ‘밍’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밍’.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리고 가족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
#랑종 #랑종리뷰 #랑종해석
-
- 영화 <듄: 드리프터> 메인 예고편
최강의 질주 액션!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우주를 수호하는 제미니 부대는 그레이 리더의 지휘 아래 에레보스 우주 전투에 뛰어든다.
간단한 보호 작전인 줄로만 알았던 미션은 어마어마한 대전투로 드러나고 설상가상,
제미니 부대는 모두 전멸하고 '아들러' 와 '헤이즐'의 함선은 어느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함선과 희박한 산소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숨통을 조여오는데...
-
- 넷플릭스 <러브 앤 몬스터스>
[2021년 4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돌연변이 괴물들이 지구를 덮치고 7년이 지났다.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버텨온 조엘 도슨(딜런 오브라이언).
그가 무전을 통해 고등학교 시절 여자 친구 에이미와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여전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녀와의 거리 135킬로미터. 이 지하 벙커에 그를 붙잡을 거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에이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렇게 조엘은 해안을 향해 떠난다.
사랑을 찾아, 희망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