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5-04-04 09:02:07
영화 <귀신들> 리뷰: 인간과 AI의 불안한 동거
<귀신들>
씨네랩의 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귀신들>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황승재 감독과 배우 이요원, 강찬희, 정경호, 오희준이 무대 인사를 했다. 영화 <귀신들>은 가까운 미래, 인간을 형상화한 인공지능(AI)들이 인간과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작품이다.
황승재 감독의 <귀신들>은 다섯 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를 통해 인간과 AI의 경계를 흐리는 미래 사회의 불안을 그려낸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AI가 인간에게 가져올 충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기술이 가져올 불안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영화는 AI가 인간의 외형뿐만 아니라 감정과 기억까지 모방하는 세상을 그리며, 과연 AI 시대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구조 덕분에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영화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공포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AI와 공존하는 미래가 마치 귀신과 함께 하는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진다. AI가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귀신과 유사성을 가지니 영화의 제목이 왜 <귀신들>인지 추측하게 한다.
우리가 마주할 미래 사회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력과 심리적 긴장감이 돋보이는 <귀신들>은 공포영화를 넘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을 남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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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고, 달려라! '야없날'을 위한 야구 영화 9선
어느새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을 맞아, '야없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야구를 보지 못해 쓸쓸할 이들을 위해 야구 영화 9선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벌써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기분이지만,
영화를 보며 새로운 시즌을 함께 기다려보아요!
다시 개막하는 그날까지 잠시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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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모성에 관해
- 케빈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대도 관객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케빈과 어머니인 에바와의 유대감이 부족했다는 점 하나로 이 영화를 부족한 유대감이 만들어낸 파멸을 묘사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보통 부모와 유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멸적이거나 극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은 않기 때문이겠다.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케빈에 대하여>를 거꾸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애초 영화는 이야기를 뒤집어 서사를 전개한다. 영화는 케빈의 어머니인 에바가 케빈을 낳기도 전, 즉 결혼 그 이전의 시간부터 현재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의 순간까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는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 속 서사로 봤을 때는 이 영화의 종반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핵심적 사건이 가장 먼저 삽입되어야 한다는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보통은 큰 줄기에서 시작해 곁가지를 뻗어 내는 구조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재미있는 지점은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이지만 이 영화를 서술해 내는 주역이 케빈이 아니라 에바라는 점이다. 지극히 어머니의 시선에서 케빈과 그를 둘러싼 상황들을 전개한다. 이쯤에서 질문을 꺼내어볼 수 있다. 케빈의 시선에서 서사를 전개했다면 관객은 그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아마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케빈이 어렸을 때부터 보인, 어쩌면 이상행동이라 부를 수 있을 그런 행동들을 보이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은 에바의 시선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결국은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는 케빈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어머니의 시선으로 케빈을 생각하도록 한다. 에바는 이 영화 속에서 어떤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크게는 영화 속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점과 영화가 강조하는 ‘색’의 의미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에바는 행복해 보일 수 없다. 남들과 같은 평범하거나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대뜸 그녀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다. 또는 그녀가 사는 집 외관과 승용차에 빨간색 페인트를 흩뿌려 버린다. 장을 보기라도 하는 날이 되면, 그녀가 사려고 담은 달걀 한 판을 모두 박살 내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에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낙인과도 같은 화살들을 담담히 지고 나아가려고 한다.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집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붉은 페인트를 벗겨내려고 하는 것조차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케빈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케빈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 부모와 가족까지 증오하고 그들의 삶마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들어내려고 하는 전복적 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케빈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재활하게 됐지만 우연히 에바를 만났을 때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케빈에게 해를 당했음에도 에바를 증오할 마음 없는 그 당사자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결국은 모성만이 남는다. 모성의 형태가 어떻다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어떤 일이 있든 그를 이해하려 하는 마음 자체를 모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았지만 찾아온 케빈이라는 존재를 결국 낳았고, 후회했지만 결국 길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난관이 찾아왔지만, 에바는 포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감옥에 수감된 케빈이지만 에바는 그를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랬으며,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그렇지만 케빈은 여전히 에바에게 명백한 답을 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닐까.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아야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고. 그렇게 흐릿한 마음과 시선을 안았지만, 모성을 숨기지 않으며 에바는 살아간다. 모험가로서 책을 출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과거의 경험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한다. 예전의 호화로운 저택은 더 이상 없지만 작은 주택에서 케빈을 다시 맞이하고자 한다. 이웃들이 자신에게 찍은 낙인을 지워내기 위해 조금씩 그 흔적들을 지워낸다. 영화는 에바를 주인공으로 선정함으로써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시선으로 서사를 읽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모성에 관한 서사를 에워싸는 빨간색이 있다. 모험가이던 시절, 토마토 축제에 가서 자유를 만끽했던 순간의 빨강. 섣부른 판단으로 남편과 관계하고 아이를 가지게 됐던 순간 디지털시계가 시간을 알리던 그 빨강. 케빈이 에바의 개인 공간을 물감으로 더럽혔던 순간의 빨강. 그리고 케빈이 학교 친구들을 학살했던 그 순간을 목격한 에바를 감싼 빨강. 그 순간을 회상하고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빨간색이 있다.
빨간색은 후회와 불안정한 과거에 대한 에바가 ‘속죄해야 할 것’들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에바 자신을 칭칭 감아버린다. 후회에 둘러싸인 에바는 케빈이 일으킨 사건을 회상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화살을 맞고 죽는 것처럼 붉은빛 속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케빈에게는 그런 붉은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케빈은 후회하고 속죄하지 않기 때문일까. 모든 죄를 에바가 짊어지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일까.
결국 에바는 속죄하기를 택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쏟아낸 혐오와 증오를 받아내고, 집과 자동차에 뿌려진 낙인과도 같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이내 파란색으로 그 흔적을 덮어낸다. 그 과정에서 케빈을 만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종반부에서 그 대화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여전히 에바는 이해하지 못하고 케빈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일말의 여지마저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고 에바는 케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의 한편에 있는 방을 과거 케빈의 방과 똑같이 꾸미고, 케빈의 옷을 다려 가지런히 캐비닛에 넣는다. 케빈이 어떤 행동을 하고 모습을 갖던, 에바는 있는 그대로 케빈을 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에바는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케빈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에바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감싸지 못한 것이다. 사랑했기에 자신의 관심으로 그를 덮으려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너무나 쉽게 망쳐버린 케빈의 흔적을 쉽게 뜯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에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작 중에서 에바 자신마저도 그런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기 자신을 ‘그 현장’으로 다시 소환시킨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한다. 케빈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케빈이 영원히 에바가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이어간대도 에바는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에바가 케빈을 ‘섣불리’ 낳았던 것에 대한 참회일 것이며 ‘서투르게’ 케빈을 교육했던 것에 대한 나름의 속죄다.
그러나 에바에게 그 속죄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지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사회에서 흔히 중범죄의 가족은 ‘연좌제’의 개념으로 낙인찍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고루한 개념이 돼 사라져 버린 그 연좌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정말 납득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에바가 짊어질 수 있는 그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아야 할까. <케빈에 대하여>는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미스터리를 다시 한번 전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겠느냐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때다. 우리는 에바와 케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케빈이 악한이 된 것에 대해 에바에게 그 짐을 모두 짊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에바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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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것은 챔피언처럼 임하는 자세
아주 오랜만에 늦은밤까지 열정적으로 올림픽을 보는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남자양궁 단체전에서 김우진 선수와 엘리슨 선수의 경기는 그야 말로 심장을 뛰게 하는 경기였다. ‘ 어? 대한민국이 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슛오프에서 4.9mm차이로 금메달을 딴 순간은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영화관계자인 지인이 ‘이게 현실인데, 이렇게 시나리오 쓰면 욕먹을 것 같다.’ 고 말할 만큼 감동적이고 울컥한 순간이 많이 연출된 올림픽. 그래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올림픽의 스토리는 자주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우리 생애의 최고의 순간>은 국민적 무관심 속에 출전한 여자 핸드볼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명승부를 펼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올림픽 2연패의 주역인 최고의 핸드볼 선수 미숙, 그러나 온 몸을 바쳐 뛴 소속팀이 해체되자, 그녀는 인생의 전부였던 핸드볼을 접고 생계를 위해 대형 마트에서 일하게 된다. 이때 일본 프로팀의 잘나가는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던 혜경은 위기에 처한 한국 국가대표팀의 감독대행으로 귀국한다. 팀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라이벌인 미숙을 비롯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노장 선수들을 하나 둘 불러모은다.
실제로 영화의 모티브였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은 소집부터 난관이었다. 당시 여자 핸드볼 실업팀은 5개, 국가대표 선수 일당은 2만 원에 불과했는데, 선수가 모자라 은퇴한 선수까지 불러들여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일본에서 여자 핸드볼 감독으로 활약 중이던 임오경 선수 투입을 시작으로 오성옥, 오영란 선수 등이 합류해 훈련에 돌입했다고 한다.
혜경은 초반부터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전력 강화에 힘쓰지만 그녀의 독선적인 스타일은 개성 강한 신진 선수들과 불화를 야기하고 급기야 노장 선수들과 신진 선수들간의 몸싸움으로까지 번진다. 이에 협회위원장은 선수들과의 불화와 여자라는 점을 문제 삼아 혜경을 감독대행에서 경질시키고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 안승필을 신임 감독으로 임명한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중요했던 혜경이지만, 미숙의 만류와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감독이 아닌 선수로 팀에 복귀해 명예 회복에 나선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뒤로하고 이제 감독으로의 성공적인 전향을 꿈꾸는 승필. 그는 선수들을 배려하지 않은 과학적인 프로그램과 유럽식 훈련 방식을 무리하게 도입해 한국형 핸드볼이 몸에 익은 노장 선수들과 갈등을 유발하고 오히려 대표팀의 전력마저 저하시킨다. 심지어 혜경과의 갈등으로 미숙 마저 태릉을 떠나버리고 대표팀은 남자고등학생 선수들과의 평가전에서도 졸전을 펼친다. 미숙의 무단이탈을 문제 삼아 엔트리에서 제외하겠다고 공표하는 승필. 안타까운 혜경은 불암산 등반 훈련에서 자신이 먼저 완주하면 미숙의 엔트리 자격 박탈을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한다. 혜경은 미숙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승필은 그런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는데… 결국 혜경을 비롯한 노장 선수들의 노력으로 미숙은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고, 승필과 신진 선수들도 그녀들의 핸드볼에 대한 근성과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꿈에 도전하려는 투지를 인정하게 된다. 마침내 최고의 팀웍으로 뭉친 그들은 다시 한번 세계 재패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한다.
그렇게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리 여자 배구 선수들은,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7경기에서 맹활약을 보여주며 마지막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는 19번의 동점과 2번의 연장전을 치르며 온 국민에게 투지를 보여줬고, 마지막 승부 던지기까지 숨 막히는 승부를 보여주며 값진 은메달을 따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이미 결말을 알고 보기 대부분이기 때문에, 스토리라인으로는 호기심을 주기가 어렵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문소리, 김정은 등의 여배우들이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로 완벽하게 변신, 경기 장면을 역동적으로 재현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어떤 메달을 받던지 색에 상관없이 축하하고, 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묵묵히 견디며 지나온 시간을
응원하지만 예전에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죄인이 된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당시 여자핸드볼 선수단의 은메달은 그 과정자체가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금메달과 은메달의 색이 무슨 차이가 있나. 무슨 소용이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4 파리 남자양궁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딴 엘리슨 선수의 인터뷰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슛오프에서 김우진이 간발의 차로 이겼다고 속상하지 않다. 오랫동안 꿈꾸던 경기였다. 김우진과 나는 챔피언처럼 쐈고 그게 중요하다.” 메달의 색으로 나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나를 인정하고 안아주고, 기나긴 시간을 묵묵히 지나온 경쟁자이나 동료인 상대선수의 최선 또한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 진짜 챔피언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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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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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그때의 힘
실패의 느낌을 나는 통각으로 기억한다. 무언가 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덜컥 접할 때,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라든지 실연당했을 때라든지 뭐 그런 때. 몸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는 어딘가 갑자기 주사기가 꽂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부터 아릿하게 통증이 퍼지고 눈물이 고이는 그 기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하겠지만 사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그런 느낌이 있다. 실패감과 자괴감, 무력감과 절망감이 몸을 뒤덮는 아픔.
그리고 그게 두렵기 때문에 때로는 올인해야 하는 순간에 주춤거리게 되기도 한다. 있는 힘껏 몸을 던져야만 공중그네를 탈 수 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서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다음 그네를 잡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는 순간의 아찔함이 자꾸 뇌리를 울려와 뛸 수가 없는 그런 마음.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있는 힘껏 뛰어야 한다. 공중그네를 잡지 못하고 떨어진다면 그 이유는 분명 그 두려움이니까. 그러니까 못 할 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될 일도 그르친다고, 그러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말이야 쉽지. 모든 희망의 말에 냉소적이 될 만큼, 나는 계속 그런 두려움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 주세요.
이 영화가 너에게 많은 힘을 줄 것 같아.
나한테는 그런 영화였거든.그때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주연 배우는 마리옹 꼬띠아르라 했다. 그럼 시놉시스는? 복직을 앞둔 직원 산드라의 회사 동료들이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중 보너스를 택했고 산드라에게는 이제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작업반장이 협박조의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결정된다. 산드라는 16명의 동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그들을 설득해 보려 하고, 주어진 시간은 주말 이틀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deux jours, une nuit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이고, 또 다른 제목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이게 논술 문제라고 하면 차라리 뭘 좀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영화 시놉시스라니 별로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름답고 강한' 마리옹 꼬띠아르라면, 아마 부당한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런 영화가 아닐까. 꼿꼿한 인물이 투쟁을 하는 모습이 감동적인 그런 영화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 지 5분 만에 내 예측은 무참히 깨졌다. 푸석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다가 받은 전화, 전화를 받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오븐에서 타르트를 꺼내고 칼로 자르는 그 일상적 허드렛일의 느낌... 거의 도망치다시피 뚝 전화를 끊은 산드라의 얼굴에는 마리옹 꼬띠아르가 보여주는 강인함도 아름다움도 없었다. 다만 실패의 통각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얼굴이었다. 억지로 신경안정제를 꾹꾹 눌러 삼키는 건 또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울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저 표정을 지을 때의 마음과 생각과 얼굴 근육이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일 것이다.
영화는 단조롭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주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입장의 사장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함께 내 준 동료도 있고, 전화 한 통으로 바로 산드라의 복직 찬성에 표를 던지겠다고 말해준 동료도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산드라가 주소를 알아내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산드라의 대사는 계속 똑같이 반복된다. 이런 상황이고,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재투표를 할 거고, 쉽지 않겠지만 날 위해 투표해 주면 좋겠어. 매번 벨을 누르기 전에는 긴장하고, 잘 되면 얼떨떨해하면서도 환한 웃음이나 감격의 눈물이 나오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또다시 나락으로 빠진다.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감정만큼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니 오히려 그간의 노력을 다 수포로 돌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인지 점점 더 괴로워한다.
그만 하고 싶어, 그냥 관둘래,라고 말하며 울기도 여러 번 한다. 심지어 남은 신경안정제를 모두 다 한 입에 털어 넣기도 한다. 산드라는 많이 아팠고, 아프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아직도 건강하지 않다. 희로애락을 가파르게 오고 가야 하는 이 시간, 잘못한 게 없음에도 머리를 숙여야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조르듯이 부탁해야 하는 이 입장이 산드라에게는 쉽지가 않다.
절망과 희망을 오고 가다 산드라가 주저앉을 때마다 붙잡아 주는 건 그 남편 마누다. 마누는 산드라의 아픔에 같이 한숨 쉬고, 단조로운 몇 마디 말을 건네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산드라가 울면서 그냥 다 관두겠다고 할 때도, 신경안정제를 한번에 먹어 버렸을 때도, 병원에 누운 산드라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도, 마누는 그렇게 단조롭고 평면적이다. 산드라가 걱정하는 일들이 마누에게도 큰 걱정거리일 텐데도, 산드라가 신경안정제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산드라를 신경 써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가사가 잘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줄일 만큼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톤을 고요하게 유지한다. 마누는 반짝반짝 웃는 얼굴로 희망을 말하지도 않고, 대본에서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도 않을 단조로운 몇 마디 말만을 한다. 그러나 그 말과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가 산드라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 그러나 산드라가 그 힘을 직접적으로 느끼거나 그런 마누가 빛을 발하는 장면 같은 건 없다. 그냥 산드라는 허덕이는, 절망에 빠진 사람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사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건 엄청난 대형 사건보다 매일 반복되는 것들일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를 그런 일상에서 구원해 주는 것도 그런 사소함이다. 공원에서 같이 먹는 아이스크림, 점심 먹고 고르는 커피 한 잔, 뭐였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는 매일 비슷비슷한 반찬과 이불 무늬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계속 함께 있는 사람들. 마누는 산드라에게 그런 사람으로 있어 준다.
주변 인물이 마치 게임 속의 성직자처럼 몇 번 힘을 부어주고, 그러면 주인공이 빙의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으랏차차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버리는 구도는 사실 만화 속에나 있다. 우리 사는 세상에 그런 슈퍼히어로는 몇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고, 그러니 이 영화도 구태여 말하지도 강조하지도 않고 슥 담았다.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이라고 해서 "1박 2일"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절망에 빠져 날려버린 한 번의 밤을 제외한 이틀이었다. 산드라는 계속해서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동료들의 상황과 사정도 모두 다르고, 입장도 모두 다르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영화는 동료들을 범주화하지 않으려고 공 들인 느낌이 물씬 난다. 동료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는 것은 물론이다. 전화로 간단하게 찬성표를 약속한 동료조차도 이름이 카데르라는 걸 몇 번이나 불러준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입장을 말하는 동료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료들 중에는 공교롭게도 이혼을 결심한 여자 동료가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지금 생활을 버리고 남자친구와 새 출발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며 딱 잘라 거절한다. 다른 한 명은 남편이 절대 안 된다고 돈이 빠듯하다며 펄펄 뛰는 걸로도 모자라 산드라에게 뻔뻔하다고 욕하는 걸 두고 그 집을 나와 버린다. 그리고 산드라를 위해 투표하겠다고 하며, 같이 차를 타고 가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클럽에라도 간 것처럼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시원한 장면이다. 이 영화에 음악이 강조되는 부분은 자동차에서 음악을 듣는 두 장면뿐인데, 각각 가사를 유심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이민계 동료들도 있다. 부득이하게 둘 다 집을 비운 상황이다. 휴일이라고 쉴 수 없는, 다른 일을 또 해야 하는 고단한 생활이고 그러니 더더욱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한 집에서는 동료의 아내가 집을 비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산드라가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들의 언어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고는 짤막하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나가는 길에 급하게 물을 사던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박스를 나르고 있던 그는 여전히 불편해하면서도 도저히 안 된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다른 동료는 축구장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을 하고 있던 참이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와서는 준비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놓는 산드라에게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런 투표를 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고, 찾아와 주어 고맙다고, 당연히 네 복직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이야기한다. 미쟝센에 정말로 햇빛이 많았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서 이 장면은 축구장의 잔디밭 위로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장면처럼 기억되어 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를 노스탤지어를 자아냈다. 그의 이름은 티무르였는데, 나는 막연하게 그의 먼 선조를 상상해 보았다. 집에 들어온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벙글벙글 웃고 있었을, 그의 머나먼 조상의 삶에 비하면 오늘 그의 삶은 얼마나 빠듯하고 이방인의 것이 되었나. 그럼에도 그 풍족한 마음은 잃지 않아서 그는 산드라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인사하며 눈물 흘릴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전의 동료가 보인 불편한 표정도 이 눈물과 다르지 않다고, 내가 상상한 선조 대였다면 분명 그도 넉넉하게 웃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산드라에게 벌컥 화를 낸 사람도 있고, 생활에 지친 얼굴로 삶의 경비를 헤아려 보며 안 된다고 조곤조곤 설명한 사람도 있었고, 산드라 복직의 당위성 자체를 못 느끼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 없는 척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제롬의 집에서 산드라만큼이나 어려운 제롬의 선택을 듣는다. 산드라의 복직에 찬성해야겠지만, 그러면 계약직인 제롬은 계약 연장을 하지 못하게 될 게 뻔했다.
아, 계약직. 70-80년대 노동의 아픔이 집약된 단어가 저임금이라면 오늘날의 아픔은 계약직이라는 단어로 수렴되는 거 아닐까. 그 아픈 단어까지도 동료들 안에 담아낸 이 넓은 스펙트럼. 제롬의 말투가 덤덤해서 더 곤혹스러웠다. 아무튼 산드라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월요일 아침 8시, 작은 회사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누구도 악역은 없는데 누구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협박조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는 작업반장조차도 산드라에게 자기 정말 그런 적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진실일까?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두세 명만 돌아와도 이야기는 와전될 수 있고, 입장의 차이가 첨예한 이런 때도 물론 예외는 아닐 테니까. 아무튼 작업반장까지 포함해 절대악은 없지만 피해는 생기는 괴로운 상황이 되었다.
투표의 결과는 8대 8. 최선을 다했지만 과반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산드라의 복직은 성사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소식, 누군가에게는 괴로운 소식, 누군가에게는 복잡 미묘한 심경이 드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산드라는 담담하다. 오히려 선심 쓰듯 산드라에게 '계약직 기간이 끝나면 복직시켜 주겠다'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어날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회사를 빠져나가며 마누에게 전화를 걸고 씩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맞다. 산드라는 싸웠다. 동료를 설득한 게 아니라 삶과 싸웠다. 그리고 이건 패배일까 승리일까? 객관적인 지표가 변하는 건 별로 없다. 처음에 산드라가 울면서 이야기했던 괴로운 일들이 다 일어날지도 모른다. 임대 아파트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고, 생활은 더 빠듯해질 것이며, 대출 이자에 허덕이는 날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마누의 한숨이 늘고 산드라가 눈물을 훌쩍거리는 날들이 또 있을 수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은 정말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었다. 산드라는 그 시간 동안 건강해졌다. 복직은 하지 못했지만 다른 일을 구해서 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여태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한 번 병원균에 맞서 본 몸은 항체를 만들어낸다. 한 번 싸워본 사람은 싸움의 감각을 익힌다. 그렇게 우리는 연약한 와중에 실패와 싸우며 역설적으로 강해진다. 실패한 사람도, 실패가 두려워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도 다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 대단한 업적이나 따스하고 예쁜 말이 아닌, 별 거 아닌 일상성으로 다르덴 형제는 우리를 위로한다. 나도 당신도 약하고 두렵지만 분명 그렇게,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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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씨는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 역을 맡은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로 출연한 배우가 화제이다. 장애 당사자가 직접 다운증후군 역할을 맡아 열연하였는데, 화면에 등장하는 초상화 그림을 모두 직접 그렸음이 알려지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본명은 정은혜이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태로 담은 <다섯 개의 시선, 2005>의 단편 극영화 <언니가 이해하셔야 해요>로 데뷔하였다. 1990년생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 영화를 찍었고, 다큐멘터리 영화 <니 얼굴>은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들어서는 초상화 작가 정은혜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영화 <니 얼굴, 2020> 포스터
<얼굴은 가장 처음 남에게 보여주는 나의 정체성>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이 보편화되어 남들에게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현저히 줄었지만, 얼굴은 가장 처음 남에게 보여주는 나의 정체성이다. 은혜의 얼굴은 은혜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은혜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각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꺼내 이리저리 조합해보며 판단하는데, 머릿속에 다운증후군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생채기를 내는 오류를 산출하기도 한다.
은혜는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으면 휴대폰 카메라로 사람들의 얼굴부터 찍는다. 그리고 약 20분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종이 위에 선으로 옮긴다. 북한강이 보이는 양평 문호리 리버 마켓에서 비, 바람, 눈과 맞서며 손이 툼툼(!)해질 때까지 더운 날에는 시원한 것으로, 추운 날에는 따뜻한 것으로 속을 달래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가 그린 초상화는 2000장을 넘겼고, 아직도 매일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은혜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관계의 부재로 외로웠던 시간들을 20분씩 달랜다. 20분 동안 은혜를 채워준 사람들은 은혜의 눈으로 본 각자의 얼굴을 보며 꽤 오랫동안 은혜를 떠올릴 것이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리며 성장한다.
<신파 없이 장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
다운증후군은 혈액 검사를 통해 비교적 쉽게 진단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임신 중에도 검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예비 엄마들은 다운증후군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졸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약간의 확률로 다운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수치를 받아 들면 아직 태어난 아이에게 세상의 빛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법적으로 다운증후군인지 아닐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확률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된 태아는 죽어도 괜찮은 생명이다. 확실히 다운증후군인 아기가 어쩌다 운이 좋게 죽음을 면하고 엄마 뱃속을 나온다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들은 울음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발전된 의학 기술을 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며 엄마의 게으름과 무능을 탓하는 말을 먼저 내뱉을 수도 있다.
영화 <니 얼굴>은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희생이나 비장애 형제자매의 상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다니다 무너져 내린 가정 경제 시스템 등이 보이지 않는다. 은혜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러다가 자연히 딸려 나와버린 것들은 잔가지 쳐내듯 잘라내 버렸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화, 영화, 글, 시위 등으로 이미 이전에 충분히 세상에 이야기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아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일 뿐.
영화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 2006>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
1996년 제49회 칸 영화제에서 다니엘 오떼유와 파스칼 뒤켄이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다니엘 오떼유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파스칼 뒤켄은 벨기에 출신으로 칸의 장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영화 <제8요일, 1996>에서 비장애인과 다운증후군 장애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사회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파스칼 뒤켄은 배우라는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다운증후군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성찰을 약속하는 박수로 화답하였다. 대한민국은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업주가 의무고용률에 못 미치는 장애인을 고용한 경우 장애인 고용 부담금을 납부하도록 법에 명시하였다. 2021년 한 해 동안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대신 정부에 납부한 돈이 모여 7000억이 넘었다. 장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을 달라고, 가족들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 달라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느라 은혜 엄마는 하얗게 세는 머리를 기를 새가 없었다.
정은혜 작가가 삽화를 그린 발달장애인을 위한 <보람씨의 행복한 직장생활>
앞으로 은혜씨는 청소 담당 직원, 작가, 배우, 크리에이터 등의 사회적 언어로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힘들 때는 짜증을 내고, 신이 날 때는 소리 내어 웃고, 마음이 복잡할 때는 폭풍 뜨개질을 하는 별 것 아닌 것들을 보고 우리들은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면 된다. 인기가 많아서 피곤한 셀러브리티의 숙명을 은혜씨는 투덜대면서 즐길 것이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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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우렌의 결혼 - 완성도보다는 힐링과 성장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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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꿈꾸며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연출 ‘승주’. 하지만 현지의 고려인 감독 ‘유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예정된 결혼식을 놓치게 되며 다큐멘터리 촬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연출을 해서라도 다큐를 완성해 오라는 압박을 가하는데... 이때 ‘승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던 ‘유라’ 감독의 삼촌 ‘게오르기’는 가짜 신랑, 신부를 구해서 결혼식을 찍자고 하며 ‘승주’가 신랑 ‘다우렌’이 된다. “지금부터 가짜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다큐 찍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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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티저 예고편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뚜렷한 꿈도 목표도 없이
지루한 삼수 생활을 이어가던 ‘영호'(강하늘),
오랫동안 간직해온 기억 속 친구를 떠올리고
무작정 편지를 보낸다.자신의 꿈은 찾지 못한 채
엄마와 함께 오래된 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천우희)는
언니 ‘소연’에게 도착한 ‘영호'의 편지를 받게 된다.“몇 가지 규칙만 지켜줬으면 좋겠어.
질문하지 않기, 만나자고 하기 없기 그리고 찾아오지 않기.” ‘소희'는 아픈 언니를 대신해 답장을 보내고
두 사람은 편지를 이어나간다.
우연히 시작된 편지는 무채색이던
두 사람의 일상을 설렘과 기다림으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영호'는 12월 31일 비가 오면 만나자는
가능성이 낮은 제안을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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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위쳐 시즌 2> 티저 예고편
[2021년 12월 17일, 넷플릭스 공개]
전설이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