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2025-03-31 12:33:46
패딩턴_페루에가다
폴 킹의 빈 자리



프로듀서 로지 앨리슨는 존 루이스 백화점 크리스마스 광고로 유명한 CF/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두걸 윌슨에게 연출을, 그리고 〈숀 더 쉽〉의 마크 버튼에게 각본을 맡겼다. 초반부부터 CF처럼 상큼하게 시작한다. 영국 시민이 된 패딩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방인의 포용, 통합을 강조한다. 패딩턴의 숙모 루시가 머물고 있는 은퇴한 곰을 위한 요양원의 수녀원장(올리비아 콜먼)이 보낸 편지로 인해 그녀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된다. 딸은 대학입시에 바쁘고, 아들은 게임에 푹 빠져 있어 외로운 메리 브라운(에밀리 모티어)는 페루로의 여행이 가족이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다며 환영한다. 한편 신중한 헨리 브라운(휴 보네빌)은 새로운 상사의 조언에 따라 위험에 감수한다. 브라운 부부의 동의하에 패딩턴(벤 위쇼)은 루시 숙모를 찾기 위해 열대우림의 정글에 도전한다.
〈인디아나 존스〉식의 어드벤처와 가족 코미디 영화 그 중간 지점에서 헤매던 영화를 살린 것은 두 가지 덕택이다. 첫 번째는 페루와 콜롬비아에서 촬영된 풍광을 CGI로 보정했지만,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는 해방감을 안긴다. 둘째는 연기다. 예를 들어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엘도라도에 목숨 건 조상의 혼령에 시달리는 선장을 연기하고, 올리비아 콜먼이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를 패러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가 영국을 벗어나면서 브렉시트 이후의 난민 문제로 생긴 반이민정서를 꼬집는 부조리 개그가 사라져 아쉬웠다. 대신에 고향 페루에 돌아간 패딩턴이 자신을 길러준 친부모 같은 루시 숙모를 찾는 모험은 자신의 뿌리를 제확인하는 것이다. 성년에 가까워지며 서로 멀어져 가던 브라운네 식구들이 함께 고난을 헤쳐가며 결속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아동 관객을 위해 유머를 설명하느라 템포가 처지고 개그의 밀도가 낮아졌다. 그 점이 아쉽다.
그렇지만 파블로 그릴로와 시각효과 팀의 애니메이션 기술은 놀랍다. 실사 피규어를 적절히 사용해서 이물감을 줄여서 그런지 그럴싸해 보였다. 〈아프리카의 여왕〉, 〈블리트〉, 버스터 키튼에서 착안한 액션/슬랩스틱 시퀀스로 존경의 의미를 표한다.

총평하자면 《패딩턴_페루에 가다》은 전작보다 아쉽다. 그러나 〈패딩턴〉 시리즈가 가진 요소들, 이를 테면 이방인의 포용, 팝업 그림책 스타일의 영상미, 예의범절의 중요성,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존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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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리뷰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0>은 델리아 오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올리비아 뉴먼 감독 하에서 제작되었다. 드라마 장르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살인사건이 발생한 1960년대의 미국 캐롤라이나를 주 무대로 삼으며,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운 영상미로 관객들의 시선을 거침없이 사로잡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카야 클라크(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어릴 적부터 마을과는 동떨어진 습지에서 나고 자랐으며,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 결국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지만, 카야만큼은 고향에 남았다. 결국 아버지마저 집을 떠나던 그 순간에도 카야는 습지 안에서 잠들었고 또 눈을 떴다.
외부인과의 접촉이 철저히 격리된 공간에서, 아버지로부터 타인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카야지만 그의 삶이 지루했다고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이트 워커(테일러 존 스미스)와 애정을 쌓기도 하고,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점핑의 부인인 메이블 매디슨(마이클 하이얏) 덕분에 학교를 가보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건 어째서인지 상처뿐이다. 최소한의 접촉을 제외한 은둔 생활을 다시 이어지던 중 카야는 체이스 앤드루스(해리스 딕킨스)와 연인이 되었지만, 글쎄,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살인사건은 바로 체이스의 죽음이었다는 걸 상기해 보자. 이런 배경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외톨이 신세였던 카야에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과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수군거림 뿐이다. 심지어 그의 집을 수색하던 보안관은 이렇게 발언한다. 과학자야, 마녀야?
드라마장르라고 명명되었지만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영화에는 서스펜스적 요소가 존재한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카야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과 관객이 가진 정보량의 격차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차 벌어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카야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에게 이입하게 되고, 자연스레 그의 무죄를 외치는 변호사 톰 밀턴(데이비드 스트라탄)이 승리하길 원하게 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영화는 그 과정에서의 긴장을 추구하지도, 촉망받는 쿼터백 체이스를 살해한 용의자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파헤치지도 않는다. 그저 카야의 삶과 자연의 풍경에 집중한다. 마치 체이스의 죽음은 곧 사라질 바람이었다는 듯이. 카야가 법정에 서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고, 최악의 경우 사형을 선고받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왜일까.
사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현대인이 카야, 아니, 습지로 대변되는 야생(혹은 자연)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한 그렇기에 그 과정엔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분류한 선악의 개념도,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규정된 윤리적 규범도 없다. 학교가 아니라 자연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고 자처하는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습지는 늪이 아니며, 그곳엔 빛이 있다고. 다만, 습지가 늪을 품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다, 늪은 습지의 빛을 잠식하는 어둠이 아니며 우리가 관습적으로 진흙탕과 진배없이 부정적인 공간이라 상상하고 두려워한 늪은 습지의 전부가 아니다. 빛이 쏟아지는 저지대와 늪이 어우러진 습지라는 공간은 생태계의 한 면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습지인가. 습지는 본디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김태철, 2007)” 경계적 공간이다. 이러한 습지의 속성은 이름 있되 이름 없는 자, 세금을 낸 적 없어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도 주체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웠던 자, 그러하므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였던 캐서린 카야 클라크의 속성과 겹친다. 특히 카야가 자신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가족조차 잊고 살았다는 사실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아 슬퍼했던 모습을 보이는 씬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뿌리를 상실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동시에 그가 얼마큼 습지(자연)에 가까운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사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모더니티가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는 습지를 결국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았던 것처럼, ‘습지 소녀’로 불리며 배척받았던 카야 역시 마을사람들에게 자아성찰의 계기가 된다.
습지와 카야가 동화되었음을 반증하는 외부인은 비단 마을 주민뿐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미국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는 카야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카야와 일면식이 없는 사회복지과 주민은 그를 여성 전용 주거 시설로 보내려 한다.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외부인의 시선과 계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카야는 그의 권유로부터 달아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는 제 뿌리를 옮기는 순간 자신이 말라죽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버림받은 소녀는 용기 있게 자립하여 삶을 일궈내는 자가 되어, 오래전 자신의 곁을 떠난 어머니를 기다린다. 습지는 그런 곳이다. 버려진 자신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고 키워준 곳이자, 가족들이 언젠가 다시 모일 지 모른다는 소망이 숨겨진 곳. 이렇듯 그 터전은 카야의 뿌리이자 인생이기에, 카야는 옮겨질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시선은 다르다. 국가 권력은 ‘젊은 여성’이 ‘습지에서’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마을 사람들은 듣기 거북한 소문을 퍼뜨린다. 심지어 습지를 말려 호텔을 지으려 한다는 자본주의가 밀어닥치기도 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지와 여성은 단죄의 대상이며 질서를 통해 교화가 필요한 대상, 즉 정복이 필요한 대상이기에.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갑각류의 껍질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잊고 있다고. 카야는 습지를 자신의 입맛에 있게 변형시키려는 문명의 시도에 분노할 때 특별한 까닭을 읊지 않는다. 개발하지 않는 것이 사회에 더 도움이 되리라는 협상을 하지도 않으며, 생태계의 교란을 심각하게 걱정하며 성명을 내지도 않는다. 카야의 분노는 순수하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려는 시도 자체에 분개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자연과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 주는 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회복시키는 것도,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그저 우리가 그동안 분명한 목소리를 지녔던 자연과 여성을 얼마나 도외시했던지를 통렬하게 시사한다. 하지만 이에 따라 영화에서 아쉬운 면모를 찾을 수도 있었는데, 습지 구석구석에서 삶과 생존의 처절한 흔적을 읽어낼 수 있을 카야에겐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을 공간을, 카메라는 철저히 서정적인 시각으로 공간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제목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카야의 엄마가 말해주었다는 그 장소는 대체 어디일까. 카야의 손위오빠였던 제레미 "조디" 클라크(로건 맥레이) 또한 힘들면 그곳으로 달려 나가라고 말했던 그곳은. 영화를 보다 보면 사실, 그 제목이 맥거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카야는 자신이 힘들 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장소를 점차 넓혀가지 않았나. 심지어 작가가 되어 카야는 누군가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될 수 있는 책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아빠의 눈에 띄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던 소녀의 성장은, 그를 끊임없이 체제에 맞추고자 폭력을 휘둘렀던 외부에 저항하고 자신만의 삶을 갈고닦아온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눈부시기만 하다.
★★★☆
참고문헌
김완구. "특집 논문 : 생태위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 ; 야생지(wilderness) 철학과 생태학: 그 한계와 의미." 환경철학 0.14 (2012): 61-92.
김태철.“습지의 중심은 바닥이 없다” : 모더니티와 문학적 습지 인식.외국문학연구(2007):119-146.
전연희. "여성연극에서 전통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한국연극학 15.1 (2000): 315-345. 캐롤 처칠의 <습지>(Fen)를 중심으로, Caryl Churchill's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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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계자 | 자기 설계도마저 잃어버린 설계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 그의 치밀한 설계가 조력자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을 만나면 경찰도, 검찰도, 그 누구도 사고가 사실 철저한 계획 살인임을 알아내지 못한다. 어느 날, 영일은 새로운 의뢰를 받는다. 차기 검찰총장 후보인 '주성직'(김홍파)을 죽여달라는 주성직의 딸 '주영선'(정은채)의 의뢰. 영일과 팀원은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신중히 설계에 돌입한다.
그런데 막상 작전을 개시하자마자 예기치 못한 변수에 계획이 흔들리고, 영일은 국내 최고의 설계자 '청소부'가 움직였음을 눈치챈다. 과거 '청소부'에게 동생 '짝눈이'(이종석)를 잃은 바 있는 영일. 이제 그는 '양경진'(김신록)을 필두로 한 경찰의 수사를 피해 의뢰와 복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설계자가 설계도를 못 그려
리뷰 작성법을 배울 때도, 기사를 작성할 때도, 자기소개서나 논문을 쓸 때도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설계도를 먼저 그려라." 글감이 될 주제를 정했다면 그와 관련된 모든 아이디어를 먼저 펼쳐 놓고, 글의 순서를 짜라. 이때 전체 흐름에서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아무리 아까워도 과감하게 버려라. 그래야만 작가의 의도가 하나의 글로 응축되어서 일관성 있게 독자에게 전달될 테니까.
이요섭 감독의 신작 <설계자>는 이 가르침을 정확히 역행한다. 여러 아이디어는 분명 눈길을 끈다. 영일과 청소부 중 누가 더 그럴듯하게 사고를 꾸미는지를 추적하는 범죄극은 긴장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이에 더해 사고를 설계할 줄 알지만 정작 자기 팀원의 사고사를 막지 못한 설계자의 자괴감을 지켜보는 심리극도 흥미롭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어떻게 엮어낼 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결과 <설계자>는 범죄극과 심리극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린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면서 역으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 배우들의 열연이 헛되이 느껴질 정도다. 자연히 '믿고 있는 진실을 언제나 의심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도 덩달아 빛을 보지 못한다.
자격미달 범죄극
<설계자>라는 제목을 보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조의석 감독의 <감시자들>이다. 둘은 내용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경찰과 범죄자라는 차이는 있지만,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특정 팀의 작전과 역할을 조명한다는 큰 줄기가 같다. 실제로 <감시자들>은 상공에서 도시를 훑는 듯한 신선한 연출로 호평받았다. 현장 팀장, 미행 전문가, CCTV 전문가, 천부적인 기억력을 지닌 요원이 합을 맞춘 깔끔한 액션을 보는 재미도 상당했다.
안타깝게도 <감시자들>의 미덕까지는 닮지 못했다. 일단 '설계자'라는 콘셉트의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초반부까지는 나름대로 재기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타깃을 어떤 상황으로 유도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어떻게 도주하며 증거를 지울 것인지 그 얼개를 대략적으로나마 보여준다.
하지만 중반부부터는 설계된 사고를 연이어 제시할 뿐, 그 사고들의 설계도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자살이나 교통사고를 끌고 온 뒤 알고 보니 전부 청소부의 설계였다는 식의 무책임한 전개가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긴장감이 깃들지 않는다. 누가 그 사고를 어떻게 계획한 것인지를 추적하는 것도 범죄극으로서의 재미일 수 있었는데, 그 가능성을 스스로 저버린다.
이에 더해 팀으로서 움직이는 재미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리더인 영일과 변장 담당자인 월천 외에는 각자 전문 영역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경험의 유무에 따라 맡는 역할이 달라지지만, 정작 경험이 가장 많아서 신뢰를 받는 재키는 가장 중요한 작전을 망치는 데 일조한다. 심지어 후반부에 가서는 굳이 팀으로 움직일 이유도 없어 보인다. 영일 혼자서도 온갖 사고를 꾸며내는데 통달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무 얕은 심리 스릴러
그렇다고 해서 설계자의 심리를 깊이 파고드는 것도 아니다. 영일은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누구보다도 지키고 싶었던 동생 짝눈이가 청소부의 설계로 인해 목숨을 잃어햐 했기 때문. 그래서 그는 청소부를 찾아내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고를 항상 추적한다. 이는 자기 설계가 또 한 번 무너지고 점만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영일과 짝눈이의 관계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만 제시된다. 짝눈이는 영일에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족이다. 설계자 일을 할수록 세상사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은 영일에게도 짝눈이는 유일하게 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존재다. 그는 모르핀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받는 재키를 꾸준히 보살필 정도로 심성이 착하니까.
그런데 이 관계는 너무 단순하게 묘사된다. 영일과 짝눈이 사이에 있었던 두세 가지 사건은 플래시백으로 되풀이될 뿐이다. 그나마 재키가 짝눈이를 그리워하는 대사를 몇몇 더하지만, 그 내용마저도 러닝타임 내내 도돌이표다. 자연히 영일에게 짝눈이의 죽음이 그토록 큰 아픔인지 공감하기 어렵다. 그 결과 심리극으로 급전환하는 중반부부터 영화는 급격히 서스펜스를 잃고 템포가 늘어진다.
공중에서 사라진 메시지
물론 <설계자>의 지향점을 유추할 단서는 있다. 마지막 플래시백에 따르면 영일과 짝눈이는 단순한 가족 관계가 아니다. 짝눈이는 설계자 일을 그만두려 한다. 일을 할수록 의심과 편집증이 깊어지는 영일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깊어졌기 때문. 영일은 그런 짝눈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괴롭고 불편해도 의심을 거듭하며 진실을 추구할지, 아니면 진실에 눈 감더라도 편안한 삶을 누릴지.
이렇게 보면 극 중 다른 캐릭터는 영일과 짝눈이의 심리 상태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장치다. '하우저'(이동휘)를 필두로 한 유튜버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영일의 설계가 절반 정도 성공한 주성직 사망 사고와 관련해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를 만들어 노출시키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회색 지대를 만든다. 그 안에서 배신자와 진실을 찾아낼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영일과 월천이 충돌하듯이.
그 연장선상에서 주영선은 관객의 시점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버지 주성직의 죽음과 관련해 언론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리며 불안해한다. 또 무엇이 진실인지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한다. 미디어의 과잉 이미지가 빚어낸 현대 사회의 확증편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이를 통해 <설계자>는 '진실은 있지만, 그것을 숨기려는 이들이 존재하고, 진실을 알기 위해 그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다만 여러 단서 간의 연관성이 보이지 않는 게 문제다. 짝눈이는 흩어져 있는 모든 캐릭터와 플롯을 한 데 이어 줄 유일한 연결고리다. 그런데 정작 그의 서사가 단편적으로 비치고 있으니 <설계자>의 여러 아이디어와 메시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될 수가 없다. 하우저, 주영선을 비롯해 보험사 직원들이 자주 등장하는 지점과 영화가 급격히 동력을 잃는 시점이 겹치는 게 우연이 아닌 이유다.
청소부는 대체 누군데
이 모든 문제는 메인 빌런인 청소부를 활용하는 방식에 집약되어 있다. 청소부의 정체와 관련된 반전은 <설계자>의 메시지에 힘을 더한다.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일은 청소부가 사실 존재하지 않았으며 자기는 그저 망상에 빠졌을 뿐이라고 좌절한다. 그렇게 그는 모든 사고를 의심하려는 노력을 그만둔다. 바로 그 순간 만족스러워하는 청소부의 정체가 드러나며, 영화는 영일처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최근 작품 중에는 <댓글부대>와 유사한 그림인 셈이다. 반전을 통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순간적으로 무너뜨리고, 사회적인 메시지에 힘을 더한다. 그런데 이 반전은 성과에 비해 대가가 너무 크다. <댓글부대>는 반전을 준 후에 분량이 충분하지는 않아도 관객의 의문을 최소한 해소하려는 노력은 보여줬다.
반면에 <설계자>는 반전을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도 두지 않았다. 청소부는 영일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뜨렸지만, 영화만 보면 청소부가 어떻게 그 설계를 성공시켰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반전을 위한 반전일 뿐, 러닝타임 내내 품은 의문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범죄극으로서도, 심리극으로서도 완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렇게 <설계자>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마지막까지 설계도를 찾지 못했다.
Dreadful 끔찍한
아이디어만으로는 건물을 못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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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 관계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다
9★/10★
캐나다로 이주한 한인 모자의 이야기를 담은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여러 모로 〈미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백인이 주류인 서구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아픔과 고난을 밀도 높게 담아내면서도 아시아인/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거와 단절하지 않은 채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주제의 측면에서만 접근해 〈미나리〉 계열의 영화로 뭉뚱그려서는 곤란하다. 처음 몇 장면으로 단숨에 영화의 주제와 방향성을 강렬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소수자 이슈를 다루는 영화의 전형성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체성, 혼란, 삶, 미래의 문제를 풀어낸다.
모든 이야기는 1960년에 시작된다. 한 사찰에 누군가 아이를 몰래 버리고 간다. 그 아이에게는 ‘소영’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어느덧 어른이 된 소영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남자는 정신 질환으로 자살해버린다. 이미 ‘고아’로서 한국 사회에서 낙인찍힌 존재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알고 있는 소영은 ‘미혼모’로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대신 캐나다로의 이주를 선택한다. 여기까지가 짤막한 내레이션으로 제시되는 소영과 그의 아들 동현의 출발점이다.
‘노란’ 피부, ‘냄새나는’ 음식, ‘찢어진(혹은 언젠가 찢어질 거라 예상되는)’ 눈,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학교에 들어간 동현이 백인 학생들과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아시아 여성을 수동적 성적 대상으로 보는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소영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소영은 위축되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서툰 영어로나마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분노하며 이를 시정하려 든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라이스보이’라고 놀림받은 동현은 참지 않고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백인 아이들의 ‘정서적’ 폭력과 동현의 물리적 ‘폭력’은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고 책임은 동현에게만 지워진다. 이것이 소영과 동현이 사는 세계의 모습이다.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인식할 줄 아는 소영과 동현은 조금씩 지금 그들이 자리한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소영은 아버지 이야기만큼은 동현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비극적 삶이 취약한 동현의 자존감‧정체감에 또 다른 타격으로 다가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체성과 뿌리가 모든 고민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동현은 소영의 침묵이 불만이다. 소영이 사이먼이란 남자와 연애를 하고 곧 결혼을 앞두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과거를 흐릿하게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계보’로 들어가는 데 동현이 느끼는 막연한 거부감은 당연하다.
그러나 뜻밖의 계기가 찾아온다. 동현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꺼리는 소영과 아버지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동현의 욕망은 결코 그들이 바라지 않았을 방법으로 해소되어 두 사람의 뿌리를 향한 여정으로 인도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소영과 동현의 이야기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의 질감은 영화의 전반부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 역시 이에 맞추어 심화‧전환된다. 영화의 전반부가 캐나다에서 동양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 집중했다면, 후반부는 두 사람의 뿌리와 정체성 그리고 이를 향한 여정에서 새롭게 다져지는 관계성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상호적 돌봄이라는 모자 관계의 양상이 구체화된다. ‘고려장’이라는 잔혹하지만 가슴 찡해지기도 하는 모자 관계의 설화를 새롭게 변주해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펼쳐내는 모자 관계의 깊이와 다채로움이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동현은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밀고, 늘 끼던 파란 렌즈 대신 안경을 쓴다. 소영은 감춰온 비밀을 공유한 후 오랫동안 혼자 감당해왔던 슬픔을 동현 앞에서 완전히 토해낸다. 동현은 모호한 과거를 명확히 인식하고, 소영은 공유하지 못한 과거를 온전히 나누는 것이다. 이들이 그다음 단계에서 펼쳐낼 새로운 모자 관계의 양상이 궁금해진다. 어려움 속에서 의지하는 존재였다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며 돌보는 존재로 나아간 두 사람이 펼쳐낼 또 다른 모자 관계의 구체적 내용 말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속성이 담겨 있을 테다. ‘엄마’와 ‘아들’이라는 관습적 명명과 함의가 이들의 관계 역동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모자 관계에서 피어나는 무한한 가능성에 관한 상상을 촉발하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성취에 기꺼이 동참해보기를 권한다.
*캐나다에서 자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보고 자란 아시아 여성은 늘 당당하고 부당한 요소에 화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인데, 왜 미디어에서는 아시아 여성을 수동적으로만 재현하는지 의문이었다며 소영을 적극성/당당함을 갖춘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분노한 흑인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분노한 흑인 여성 이미지는 보통 주류 미디어가 이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다뤄지지만 여기에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사회에서 자신과 자녀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행위자성이 담겨 있다. 소영이 자신과 아들 동현을 위해 싸우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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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일주일 / A Week Away, 2021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그 여름의 일주일>은 나름의 기대를 걸었던 작품입니다. 점차 뮤지컬 영화가 보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그나마 볼 수 있었던 뮤지컬 영화들을 만나기 힘들어졌으니까요. 그런 와중에 넷플릭스에서 종종 뮤지컬 영화를 제작해 주니, 비록 집에서 관람해야 하지만 경쾌한 음악이 곁들여진 신작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기대를 품었지만 자세한 조사까지 하지는 않았던 터라 영화를 틀자마자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만 봤을 때는 우연히 만난 남녀의 풋풋하고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풀어낼 것처럼 보이는데, 갑자기 여름 캠프를 떠나더라구요. 이때 아차 싶었습니다. 영화의 관람 등급을 보면 알겠지만 <그 여름의 일주일>은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족 뮤지컬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체 관람가 등급이 가지고 있는 몇몇 한계점들을 자연스레 내포하고 있기도 하구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유치하게도 느껴지는 스토리는 물론, 아이들이 신경 쓰지 않을 캐릭터의 묘사부터 배경 설명, 그리고 급한 전개 등이 보인다는 점은 어쩔 수 없이 아쉽게 다가왔네요. 의미없는 행동들의 나열들도 상당히 거슬리기도 하구요. 하이틴 분위기의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성 또한 상당히 애매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고, 가족 영화라는 큰 틀 안에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맞춰둔 느낌이 강한 영화였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 노래의 멜로디 자체는 좋았습니다. 딱히 꽂히거나 중독성 있는 넘버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노래였네요. 다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는 확 다가오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아쉽게 다가옵니다. <더 프롬>도 그랬지만 보통 뮤지컬 영화하면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 두고두고 듣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노래 가사도 뭔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그 순간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도 조금은 아쉽게 다가옵니다. 뭐 이것 또한 가족 영화라는 틀에 맞춰 쉽게 쓴 탓도 있겠지만, 뭔가 뮤지컬 영화임에도 노래는 사이드 메뉴에 불과한 느낌이랄까요. 중요한 연결고리에 노래들을 집어넣어 그 효과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조건 신날 때 넣고 보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여운이 남지도 않고 휘발성이 강하네요.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대놓고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더 프롬>에서 줄기차게 까댔던 게 기독교였던 것 같은데,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기독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니 참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뭐 제작자 마음이지만,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단 정통 기독교적인 착하디착한 내용은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거든요. 또한 영화의 메인 스토리에 너무 뜬금없이 끼어있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구요. 한계가 있었겠지만 어차피 다룰 소재면 조금 다듬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구요.
나름의 장점도 보였는데, 디테일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느낌이 강해서 안타까웠네요. 나름 캐릭터 간의 케미도 좋아서 짧지만 즐거웠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하지만 너무 순간적인 흥분으로만 다루고 있어서 허전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상당하구요. 여러모로 아쉽게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팬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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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viction of Everyone, 영화 <브이 포 벤데타>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해 주던 친구가 있었다. 영화 초반에 나오던 독백을 적어서 편지에 적어주면서. 추천받으면 제때 보지 않는 이상한 습관이라도 있었던 건지, 한참이 지나고 이제서야 봤다. 이비의 목소리로 Remember, Remember the 5th of November로 시작되는 대사를 들으면서 그 친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라고 했을까 궁금해졌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그 친구를 마음 한 켠에 두고 시작되었다.
유쾌한 사이다 영화다. 이상적인 전개지만 배경은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미래의 국가이지만 익숙하다. 역사는 패션보다는 좀 더 큰 주기로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세계대전과 테러, 질병을 겪으면서 등장한 전체주의 국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질병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2차 세계대전은 강렬하며, 생체실험은 저 멀리 일제강점기까지 떠오르게 한다. 히틀러를 떠올리게 만든 것 같은 미래엔 서틀러가 있고 언론을 포함해 수많은 통제가 있다. 늦은 밤엔 통금이 있고, 하나가 되기 위해 다양성은 배척된다. 서틀러와 크리디는 일부러 질병을 퍼뜨려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넣었다. 생화학무기를 만들겠다던 생체실험은 본래 목적 대신 유일무이한 질병을 만들고 치료제를 갖고 있다가 적시에 풀고 이익을 얻는데 쓰였다. 얼마나 짜릿했을까. 온 나라를 내 손에 넣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기분이란. 또 얼마나 불안했을까. 조금씩 틈이 생기는 게 보일 때마다. 그래서 자꾸 통제하게 되었겠지.
사람들은 서틀러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불만은 있지만 그들에게 서틀러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다. 다시 고통받고 두려워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도 그냥 듣고 있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면서 그런대로 산다. 때 되면 밥을 먹고, 술도 마시고 TV도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전하다면 그건 사람들의 어딘가 결핍된 표정 때문일 것이다. 미술과 음악 등 예술은 물론 음식까지 제한했다니 서틀러는 정말 고약하기 짝이 없다. 예술은 자유롭게 자신을 비판하는 게 싫어서 그랬던 모양이고, 본인 입에만 넣으라고 있는 버터가 아닌데.
그때 나타난 게 브이다. 이비를 포함해 사람들이 가면을 쓴 그를 마음에 담게 된 건 그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알고 있지만 대놓고 이 나라는 뭔가가 제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권력자들이 가장 큰 잘못을 했지만, 사실은 거울 속에 비치는 당신들이 가만히 있었던 걸 되돌아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놀라워서 귀 기울인 건 아닐까. 당장 나와 함께 하자고 하지 않고 1년 후에 함께 하자는 그 말에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궤변론자나 과대 망상가라고 평가받지 않게 되는 건 정말 세상이 문제가 있고, 사람들도 알고 있지만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을 때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억압적으로 느껴질수록 브이에게 설득력이 생긴다. 누군가에겐 그럴듯하고, 누군가에겐 헛소리가 되어버릴 땐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이상하지, 하나가 되자고 할수록 하나같이 절망감을 느끼게 만드는 게.
브이의 '11.5 선언'은 묘하게 교훈적이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입바른 소리를 하면 밉상일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 수긍이 가는 건 그는 사람들과 다르게 도전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그 방송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소를 시원하게 폭파하면서 1812 서곡을 들려주었고, 언론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정규 방송을 차단하고 비상 방송을 장악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였다. 방송국에서는 황급히 그를 검거한 것처럼 내보냈지만 이미 사람들은 믿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을 흔들고 내년 11월 5일을 기대하게 만든 것이다. 1년 후 11월 5일이 다 되어선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모든 집에 자신과 똑같은 가면과 망토를 선물하면서 사람들은 거리에 나올 준비가 되었다. 그 가면을 쓰고 망토를 걸치고 한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정이 지났을 때, 400여 년 전 가이 포크스의 생각처럼 시원하게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렸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해 준 건물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잃었을 때 쓸모를 다 한다. 국가나 정부에도 이는 똑같이 적용된다.
이쯤 되면 다가오는 느낌을 알다마다. 뭔가 술술 풀리는 게 좋으면서도 불편하다. 음악과 함께 펑펑 터지는 건물에 하늘 위를 수놓는 폭죽은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면서도 그 광경이 잠잠해지면 이비가 처음 브이를 만났을 때 경계했던 생각이 그대로 소환된다. 이상은 어디에나,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었지만 왜 우리의 현실은 늘 그러지 못했을까? 한바탕씩 뒤집어지면 이제는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다가도 다시 보면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다시 사람들은 무기력해질 것이고 누군가는 권력이나 이익을 위해 기상천외한 일을 벌일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신념(이데아, Idea)에 답이 있다고 하는 건 안도해야 할 부분인지 모르겠다. 개인의 마음속 신념은 절대적일지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 신념은 너무나 다른 의미다. 각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거나 빼앗기까지 하며, 그럼에도 그 신념은 끈질기게 살아있다. 인간이 때론 신념의 숙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잘 사는 것과 우리가 잘 사는 방향은 다를 때가 많다. 국가나 정부가 있는 한 그 부분이 충돌하는 문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나 정부 없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혼란과 변화 속에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할 테니까. 둘 다 우리를 공포와 무기력에 잠식하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또 다른 불안감의 원인은 브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후에 브이처럼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해 줄 존재가 있을까? 브이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불렀지만 영화 속의 그는 적잖이 멋진 영웅이었다. 위트가 넘친다. 문학은 셰익스피어, 영화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좋아하며, 총보다 칼을 선호하고, 재즈를 즐겨 듣고, 자신만의 갤러리를 갖췄다. 심지어 앞치마를 곱게 두르곤 아침엔 몰래 구한 버터에 계란 넣은 토스트도 만들어주지 않나. 이비에겐 첫 만남부터 핑거맨에게 붙잡혀 있는 걸 구해줬을뿐더러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 만큼의 온갖 V를 가져와 언어유희를 펼쳤다.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전신이 불타 있는 걸 알고도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왜일까? 흔들리지 않는 신념 혹은 그 신념을 내뱉는 깊은 목소리의 덕일까? 부정하지 말자. 브이는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만큼 멋진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팬텀이 크리스틴에게 한 것처럼 이비에게 소유욕을 보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물론 브이 역시 팬텀 못지않게 몹쓸 구석도 많다. 애초에 이비를 이 모든 사단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처음 만났는데 재판소를 터뜨리는 그 자리에 데려가서 공범으로 만들지 않았나. 이비가 일하고 있는 BTN 방송국에서 때마침 '11.5 선언'을 하면서 건물을 장악했고, 이비가 그를 구해주자 예상에 없던 전개인지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집에 데려와 안전하게 내년 11월 5일까지 나갈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이비의 신분증을 제 것처럼 훔쳐서 자신의 복수에 이용했고 두려움을 없애주겠다는 이유로 그녀를 고문하고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기에 고문을 해줬어. 머리를 밀고, 물에 집어넣었지. 왜 그렇게 오래 고문했냐고? 네가 굴복하지 않았잖아. 용서를 바라진 않지만 넌 덕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되었다면서. 가만 보면 상당히 뻔뻔하다.
영화에서 조금 아쉬운 건 고문 장면 이후에 이비가 브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둘 사이에 애틋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좀 더 시간을 할애하며 전달해 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제삼자가 보기엔 방금 전까지 자신을 고문했던 브이를 이비가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다. 물론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초반부터 이비는 모두가 11월 5일을 기억하지만, 자신은 한 남자, 브이를 기억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한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사랑도 깊어졌다. 심지어 두려운 게 없다던 브이는 막판에 이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들은 통했다.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신념이 확고한,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11월 5일 전날 밤 그들은 마지막으로 Cry me a river을 듣고 춤을 추었다. 사랑을 느낄 수 없으리라고 했던 브이에게 이비는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줬다. 그렇다고 브이가 이비를 고문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둘이 애초에 결사단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넘치던 증오가 갑자기 진정된다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사랑을 전하려 했던 발레리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이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도 없다. 둘이 애틋해지는 걸 보고 함께 100퍼센트 애틋해지진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브이가 이비를 무척 아꼈기 때문에 고문까지 했겠다 싶다. 브이는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을까. 그가 우연을 믿지 않아서는 아닐까. 브이로 현란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이 이비(Evey)라는 이름에 v가 들어가서? 혹은 E-V라고 생각하니 너무 인연처럼 느껴져서? 마침 재판소를 터뜨리러 가는 저녁에 Eve라는 뜻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혹은 그녀에게 고마워서는 아닐까? 마침 방송국에서 위기의 순간 이비가 자신을 구해줘서?
혹은 얄팍하게도 그의 곁을 먼저 떠나서는 아닐까. 브이가 복수를 위해 그녀를 미끼로 썼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도망쳐 일하던 방송국의 PD 고든에게 찾아갔다. 고든은 묘하게 브이와 닮았다. 재즈를 틀은 채로 계란 넣은 토스트를 해주고, 집에 자신만의 위험한 갤러리가 있다. 그가 자신이 브이라고 장난칠 때, 왠지 그게 장난이 아닌 것도 같았다. 좀 더 평범하고 힘이 세지 않다고 해서 그가 브이와 다른 것은 아니다. 고든은 간판 프로그램의 PD고 무슨 바람인지 갑자기 말도 안 되게 풍자적인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브이에게 고든과 그의 결정적 차이점은 이비가 고든의 집에서는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단 점은 아닌가? 고든이 프로그램 내용으로 붙잡혀 가고 나서 도망치던 이비를 붙잡아 고문을 시작한 걸 보면, 지극히 공적인 이유만으로 고문을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궁금했겠지. 그에게서 도망치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지 않을지 확인하고 싶었을 갓이다.
Ideas are bulletproof.(My turn!)
고문 후에 이비가 브이를 떠난 걸 보면 브이가 준 교훈과 별개로 이비가 다행히(?) 완전히 그를 용서한 건 아닌 듯싶다. 이비와 브이는 복수라는 지점에서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다. 복수를 하는데 피를 흘려야 하는가. 이비는 자신의 온 가족을 이 나라에 빼앗기고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영화를 보고도 복수에 눈이 멀어 외면당한 메르세데스가 안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만약 브이가 복수할 대상이 마침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브이를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가 복수할 대상들이 이제는 힘을 잃은 약자가 되었다면 애초에 그는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도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죽였을 것이다. 그들의 힘을 빼앗고 모든 것을 정상화하는 방법이 브이에겐 죽음뿐이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건, 이비가 그저 브이를 기억하는 어느 특별한 누군가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만약 그 고문이 이비가 자신을 대신할 또 다른 브이가 될 수 있는 걸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해도 설득력은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이비에게 집과 심지어 10년을 넘게 노선을 깔고 만들어놓은 지하철 폭탄을 넘기는 걸 보면 그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브이는 복수가 삶의 목표였지만, 이비는 복수가 목표인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겐 이름처럼 삶이 있고, 그 삶은 국회의사당이 폭파된 이후에도 이어진다. 원작에선 실제로 이비가, 이후에는 도미닉이 브이를 이어간다고 하는데 그 부분이 살아났어도 좋았을 것이다.
20년을 걸었던 도미노
영화는 브이의 원맨쇼이자 이비와 브이의 콤비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팀워크였다. 그래서 더더욱 반드시 브이라는 '한 남자'를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브이였고, 브이이며, 브이가 될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이제서야 그 영화를 보게 된 게 현실과 무관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의 과거는 지구 상 어딘가에서 되풀이된다. 그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이자 미래다. 조금 가깝고 먼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억압에 맞서 저항하려 하지만 영화처럼 속 시원한 모습은 보기 힘들다. 브이는 피의 복수에 성공했지만 현실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흐른다. 마음이 아파서 영화를 통해서라도 대리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역시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인적인 힘을 가졌던 영화 속 브이를 찾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건 브이가 아닌, 이비, 발레리, 핀치 경감, 고든 PD, 그리고 안경잡이 소녀다. 이비가 브이가 방송국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면, 발레리가 고문당하면서도 모두를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당에 27년이나 충성해 온 핀치 경감이 이 나라가 권력을 위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 알고 이비가 레버를 당길 때 말리지 않았다면, 고든 PD가 사람들에게 코미디를 가장해 서틀러를 풍자하지 않았다면, 안경잡이 소녀가 브이의 상징을 스프레이로 그리지 않았다면, 술집과 식당, 집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망토를 걸치고 한 곳에 모여있지 않았다면,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1812 서곡이 그렇게 통쾌하게 들릴 리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 끝까지 브이와 이비를 뒤쫓다가 걸음을 멈췄던, 모든 걸 알고 밤잠을 설쳤던 핀치 경감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의 촉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언제 총을 내려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V가 들어가는 수많은 단어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남는 건 모두(everyone), 그리고 신념 혹은 유죄(conviction)이란 단어다. 신념이자 유죄라는 뜻을 가진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반드시 처벌을 받는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더라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유죄다. 신념 없이 살아서 유죄가 되기도 하고, 신념이 있더라도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유죄가 될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특정한 정치체제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목격한 건 통제와 억압 사이에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었다. 어떤 해결 방법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영화도 무조건적인 답을 주진 않는다. 브이 역시 완전하지 않았고,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완전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가 남긴 말들 중 스스로에 마음에 남았던 말을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언젠가 뭔가가 제대로 잘못되었을 때, 그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으면 된다. Voil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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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일상의 물리적 증명
7★/10★
그림자는 물리적 존재를 환기한다. 실존하는 물질이 빛을 가로막을 물리적 질감을 가질 때만 그림자가 생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적 삶에도 물리적 질감이 있음을, 나아가 물리적 질감을 초과하는 서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그림자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일하는 중 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웃음 짓는다. 화장실 통로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림자로 포착하는 물질성은 물리적 사물을 넘어서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우연히 만난 삶에 낙담한 또래의 중년 남성과 그림자를 갖고 몇 가지 놀이를 한다. 먼저 두 개의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진해지는지를 실험해보고, 뒤이어 서로의 그림자를 좇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상대 남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도 더 짙어지는 것 같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분명 더 진해졌다는 것이다. 히라야마는 ‘알고’ 있다. 그림자는 분명 어떤 물질의 실존과 그 실존에 깃든 서사, 의미를 대변하기 때문에 포개진 그림자는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림자 술래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해맑은 표정은 그림자가 증거하는 삶을 소환한다. 그림자가 물질로서의 인간의 몸뿐 아니라 그 몸에 담긴 삶 역시 담아낸다는 (히라야마가 남자에게 알려준) 사실이 두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그림자만으로는 물질의 구체적 형상을 그려낼 수 없다. 물질을 비추는 빛의 각도와 주변 환경에 따라 같은 물질이라도 여러 모양과 밝기의 그림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가 화장실 벽의 나무와 중년 남자의 그림자에서 물질 그 이상을 감각하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상을 살아내는 태도에서 나온다.
영화는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웃 할머니의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와 면도, 세수를 한다, 직접 분재한 화분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작업복을 입는다, 신발장 선반에 차례로 정리된 물건들을 챙긴다,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작은 봉고차를 타고 출근하며 음악을 듣는다, 동료에게 ‘왜 이렇게까지’라는 물음을 들을 정도로 깔끔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 식당에서 식사한다, 쉬는 날이면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고, 헌책방에 들르며, 단골 술집에서 피로를 푼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이다.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정말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을 보아 히라야마가 지금 하는 일이 그의 과거 ‘사회적 신분’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 열패감이 그가 느껴야 할 더 적절한 감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러지 않는다. 눈을 뜰 때마다,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조용히 미소 짓는다. 마치 오랫동안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가만히 웃음 짓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그림자에 구체적 물질성과 그 너머의 의미, 서사를 상상하는 통로다. 영화는 히라야마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히라야마의 표정이 이 설명을 대신한다. 별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종종 천대받아도 일터에서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려 노력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애정을 가질 때 나오는 표정으로 말이다. 여기서 빚어지는 단단함은 히라야마의 직업관과 과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에 대한 조급증을 종식시키며 소박한 차이의 평온한 반복이라는 히라야마의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게 해준다. 피곤한 날도, 기분 좋은 날도, 슬픈 날도, 예기치 못한 일이 있던 날도 히라야마는 같은 표정으로 일어날 것이고 하늘을 바라볼 것이며 화장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히라야마는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잃어버린 표정을 복원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히라야마가 그날을 복기하며 꾸는 꿈속에서는 그저 불분명한 회색빛 형체였던 것들이 어느새 그가 서랍 속에 엄격하게 선별해 모아둔 사진처럼 분명한 형태의 물질성과 그에 담긴 서사,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화가 그려내는 히라야마 캐릭터에 남성 판타지가 층층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해소되지 않는 찜찜한 의구심을 남긴다. 조카, 점심을 먹을 때마다 벤치에서 만나는 여성, 동료의 애인, 술집 사장 등 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히라야마가 구축한 일상이 매력적이고 살 만한 것임을 증명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체의 확립을 위한 여성 타자 없이는 완벽한 일상(perfect days)의 물리적 증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야큐쇼 코지가 놀라운 연기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일상의 물질성 앞에서, 이 머뭇거림을 함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혹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화 속 그림자 이미지가 증명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은 아직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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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1. 04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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