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1-02 16:56:00
1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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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류준열·천우희, <머니게임> 크랭크업
ⓒ 롯데컬처웍스
한재림 감독의 첫 시리즈물 <머니게임>이 지난 23일 크랭크업했다. <머니게임>은 네이버 웹툰
원작으로 한 8부작 시리즈로 류준열, 천우희, 박정민 배우가 출연한다.
지일주·박지연 <강남좀비>, 134개국 선판매
ⓒ 네이버 영화
배우 지일주, 박지연 주연의 영화 <강남좀비>가 북미를 비롯해 독일, 태국, 일본, 필리핀 등
총 134개국에 선판매되었다고 밝혔다. <강남좀비>는 이번 달 5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메간>, 25일 개봉 확정
ⓒ 네이버 영화
영화 <메간>은 오직 ‘케이디’를 위해 프로그래밍 된 AI 로봇 ‘메간’이 ‘케이디’와의 우정을 위해
예측할 수 없는 업그레이드를 계속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새해 첫 호러 영화 <메간>은
이번 달 25일 개봉 예정이다.
<상견니>, 25일 개봉 확정
ⓒ 네이버 영화
대만 인기 드라마 <상견니>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과 스토리로 재탄생한 영화가 국내에서
25일 개봉을 확정했다. 원작의 내용에서 출발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였다.
해외
제임스 카메론, <아바타 3> 불 다루는 나쁜 나비족 그릴 예정
ⓒ 네이버 영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최근 프랑스 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아바타 3>에서는 나비족 중 불의
요소를 가진 '재의 부족'에 대해 그릴 것"이라고 밝혔다. <아바타 3>는 현재 2024년 12월
20일 개봉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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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 성장하는 성장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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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짓는 것은 정말 어렵다.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용은 잊혀도 제목만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셀링 포인트가 될 것이다.
서두에 밝히자면, 이 영화는 제목만 좋았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다한증이 있는 박춘희의 성장 이야기다. 박춘희를 위한, 박춘희에 의한, 박춘희만의 이야기. 박춘희의 주변인물과 배경과 사건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저 멀리로 사라지고, 광활한 우주에 박춘희 혼자 남겨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너무 많은 어려움들
춘희는 중학생 때 부모가 죽는 바람에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왜 죽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데, 아무튼 부모가 죽어 혼자 남겨진 춘희는 외삼촌 부부와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 누구도 춘희를 환영하지 않고, 여분의 방이 있는데도 굳이 다락방을 내어준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지만 방금 부모상을 치른 아이에게 참으로 불친절한 외삼촌네 가족이다.
설상가상으로 춘희에게는 다한증까지 있다. 다한증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도 어렵다. 하필이면 학교에서 폴카댄스를 춰야 하는 상황인데, 손을 잡고 춤을 출 파트너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선생조차 불쾌해 한다. 명상센터에서 '저는 쩔어 있어요, 땀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춘희. 땀은 인생의 모든 고난과 역경에 쩔어있는 춘희의 메타포이자 상징이다.
춘희는 어른이 된 이후 외삼촌네 식구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산다. 외삼촌네 식구들은 고등학생이 된 춘희만 내버려두고 새 아파트로 이사가버렸기 때문이다. 춘희는 혼자 살아도 조그만 다락방에서 지내고, 다한증을 수술할 돈을 모으기 위해 매일 마늘을 깐다. 끼니도 오직 컵라면뿐이다.
중학생 정도의 아이에게 조실부모도 엄청난 충격일 테니 이후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사실 조실부모와 눈칫밥 먹는 것, 이후 버려진 집에서 버려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왜 굳이 다한증까지 설정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혹은 다한증 하나로도 충분하다. 부모를 잃거나 잃지 않거나, 평범한 가정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한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풀어나갈 만한 이야기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캐릭터가 그렇게까지 입체적이지 않다. 춘희는 그저 딱한 아이이다.
우리나라는 국가보장시스템이 있는 나라이고, 생활고로 힘들 때는 각 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 핍진한 이야기는 차치하자. 이 영화는 불쌍한 춘희 이야기이니까.
춘희와 NPC들
외삼촌네 딸, 춘희의 외사촌 유라는 춘희를 너무 싫어한다. 유라는 충분히 춘희를 싫어할 만하다. 그러지 않아도 예민한 사춘기에 갑자기 사촌이 우리집에서 살게 된다니. 더군다나 같은 학교이기까지. 영화에서 보여지는 유라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다. 여자들은 원수의 자식에게도 생리대는 빌려준다는데, 생리대를 가져가는 춘희를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개인적인 악행에서 나아가 수학여행에 술을 챙겨가고 담배를 피우는 불량학생이기까지. 춘희를 선량한 희생자로 만들기 위해 유라가 꼭 못되처먹은 아이가 되어야 했나?
유라의 오빠이자 춘희의 사촌오빠는 식당을 운영한다. 춘희는 그 식당에서 쓸 마늘을 까주고 3만 원씩 받는다. 그 오빠란 사람은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다. "혁명에도 실패하고 사랑에도 실패"했다며 술 마시고 징징거린다. 도대체 왜 학생운동을 했는지 이유도 명분도 없고, 왜 하필 춘희에게 마늘까는 일을 주는지 모를 일이며(홀서빙직을 제안하기는 하지만), 왜 이혼위기에 처했는지 모를 일이다. 오빠를 설명하는 일련의 사실들은 그의 캐릭터를 형성하지 못한다. 혹시 춘희가 마늘을 까는 알바를 하기 위해 오빠가 있어야 했나?
춘희와 잠깐 사랑에 빠지는 주황이라는 캐릭터를 보자. 스토리상 남자주인공에 가깝다. 주황은 말을 더듬는데, 어릴 때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주황의 역할은 춘희를 갑자기 사랑하고, 춘희가 돈이 없으니 돈 주겠다고 말하고, 춘희에게 차이는 것뿐이다. 춘희에게 잠깐의 행복을 맛보게 하기 위해 굳이 말을 더듬는 남자가 있어야 했나?
가장 골때리는 인물은 노숙자이다. 단순한 도식으로 보았을 때 집이 없다는 점에서 노숙자는 춘희보다 불쌍하다. 춘희는 집에 가는 길에 여자 노숙자를 발견하고, 노숙자가 맨발인 걸 보고 사촌오빠에게 받은 마사이족 신발을 준다.
이 노숙자는 총 세 번 등장한다. 춘희가 신발기부를 하기 위해 등장, 번개맞은 춘희를 살려주기 위해 등장, 춘희에게 마사이족 명언도 아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 등장. 춘희에게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경험을 하게 만들기 위해 노숙자가 나와야 했나? 굳이 마사이족 신발이었어야 했나?
그 외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기타 등등 모든 영화 속 인물들은 춘희의 성장을 돕기 위한 NPC에 불과하다. 심지어 춘희에게 꽤 중요한 인물이었던 외할머니의 죽음도 외숙모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그때 춘희가 문상을 갔는지, 울었는지, 절망에 빠졌는지, 무감정했는지 궁금하다. 외할머니는 유일한 춘희 편이었으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에게 부모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유라의 불안, 혁명도, 사랑도, 이도저도 해내지 못한 사촌오빠의 좌절감, 비록 말을 더듬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주황의 성장, 춘희가 선물해준 신발을 신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나가게 될 노숙자의 변화는 춘희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오직 춘희의 성장만을 위해 전개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춘희 외에는 그 누구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는 전혀 넓어지지 않고 오직 춘희의 자아만 부풀어오른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 만나기
다시 말하지만 춘희는 '불쌍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조실부모와 천대와 왕따 등등을 모조리 경험했다. 작은 다락방에 갇혀 살았던 춘희는 어른이 되어도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다락방 같은 안전기지에 갇힌다.
그런 춘희가 우연히 책을 기부하려다 명상센터를 알게 되고 거기에서 주황을 만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보고, 사기도 당해보고,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춘희는 조금씩 성장한다.
이야기 초반에 춘희는 번개를 맞고 쓰러진다. 우리는 번개를 맞은 춘희의 앞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것을 예상하게 되는데, 그 변화란 어린 춘희의 등장이다.
1.조실부모한 고아 / 2.다한증 / 3.눈칫밥 먹는 더부살이 / 4.매일 컵라면 먹기 / 5.평생 마늘까기 / 이 정도의 설정도 너무 많은데, 6.번개맞기 / 7.어린 춘희 만나기가 추가된다.
어린 춘희를 등장시키기 위해 번개를 때리는 게 뜬금없지만, 아무튼간 어린 춘희를 만난다는 것은 위로받지 못했던 내면의 어린아이와 마주하는 일이다. 차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던 그 시절의 불쌍하고 어린 나를 어른인 내가 안아주는 것,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나가가는 것. 그러므로 너는 쓸모없는 아이가 아니라 태어나길 잘한 아이라는 것. 그것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이다.
결국 춘희는 그 집을 떠난다. 자발적으로 떠났으면 좋았으련만, 사촌오빠가 투룸 정도 얻을 수 있는 돈이라며 봉투를 내밀고, 사촌오빠에게 갑자기 왜 그랬냐고 화를 내며, 라면이 아닌 고기를 사먹고 나서 이사간다. 이사를 가도 여전히 마늘을 깐다.
어른 춘희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춘희는 이제 다락방이라는 안전기지와 상처받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영화에서는 보여주지도, 다루지도 않더라도 외삼촌네 식구나 주황, 노숙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서 성장하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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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다 보려고 한다. 다른 작품들이 좋더라도 이 작품을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들 중에서도 절망적인 영화들이 한두 편씩은 있으니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직면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분명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똑바로 바라보는 건 너무 무섭고,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상처받을 것 같다. 상처받은 어린이는 마음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 별안간 툭 튀어나온다. 우리에게 번개가 떨어질 일은 극히 드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처투성이 불쌍한 어린이를 잘 위로하고 달래주어서 마음 속 감옥에서 풀어주는 수밖에.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춘희에게 떨어진 번개처럼,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태어나길 잘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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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리 몽키스
쓰리 몽키스
'윈터 슬립'을 보고 이 감독이 누구인지,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찾아보았다. 누리 빌제 세일란. 터키 영화감독이다. '윈터 슬립'은 따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마치 영화로 보는 또스또예프스키라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긴장감이 대단했던 영화다. 그것은 오로지 대화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철학적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공방이었는데, 이 영화 '쓰리 몽키스'에서도 감독의 철학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부유한 기업가이자 정치가를 꿈꾸는 세르빗은 어느 날 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죽인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세르빗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므로, 자신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이윱에게 사고의 책임을 떠안는 대신, 감옥에서 나오면 한몫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가난한 이윱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세르빗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신 감옥에 간다.
이윱의 아들 이스마일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싶어한다. 차를 사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고 엄마 하레스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세르빗이 아버지에게 줄 돈을 미리 받을 수 없느냐고 묻는다. 하레스는 세르빗을 찾아가고 그와 불륜을 맺는다.
감옥에서 나온 이윱은 약속대로 세르빗에게 큰 돈을 받는다. 세르빗은 지방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개의치 않는다. 이윱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세르빗이 살해당하고, 아내 하레스와 세르빗이 간통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다.
하레스는 왜 세르빗을 일부러 찾아갔을까. 전화로만 요구하고 아들 이스마일이 돈을 받아와도 충분한 일이었고, 이슬람 사회에서 - 비교적 자유로운 터키라 해도 - 여성이 일부러 찾아가 만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아닌 다음에는 얼굴을 맞대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아는데, 하레스는 세르빗을 만나고, 쉽게 육체관계를 맺는다. 이건 하레스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세르빗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않고 단절하자고 했을 때, 하레스는 세르빗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하레스는 지금의 삶 - 이윱과 아들 이스마일과의 삶 - 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금의 궁핍하고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다.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을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삶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구조적 억압 아래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하지만, 그와 함께 개인이 갖는 순수한 욕망 또한 언급해야 한다.
어느 사회나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태도이기도 한데, 문제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욕망의 크기만 큰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의 역겨움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고고한 지식인 흉내를 낸다던가,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사치를 흉내 내는 것은 스스로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짓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하레스도 그런 도착적 욕망의 하수구에 빠진 여성으로 보인다. 하레스가 단순히 '육체적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해 세르빗을 유혹했다고 보진 않는다. 세르빗은 성공한 사업가이고, 정치가이며 하레스가 보기에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남성이다. 반면 이윱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남편이다.
반면, 하레스는 비록 가난한 남편과 살지만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다. 젊었을 때부터 미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하레스는 그러나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자기처럼 미인이라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하레스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아내 하레스가 자기를 감옥에 가라고 한 세르빗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윱은 내색하지 않는다. 아니, 갈등한다.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세르빗이 살해당한다. 누가 세르빗을 죽였을까. 세르빗의 차를 운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이윱은 경찰이 알려준 강력한 단서를 듣게 된다.
집안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흐르고, 이스마일은 자기가 세르빗을 살해했다고 엄마 하레스에게 고백한다. 한밤중, 잠에서 깬 이윱은 옥상에서 아내가 자살하려는 모습을 보지만 그것을 숨어서 지켜보기만 한다. 아니, 그것은 이윱의 환상이거나 상상이다. 하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것이다. 아니, 이윱은 그런 자기의 바람을 아내 하레스에게 직접 말한다. '가서 잠이나 자, 아니면 뛰어내리던지.' 이렇게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바보처럼 굴지 마, 거기서 내려 와.' 이윱은 하레스를 용서한다.
이윱도 아들이 세르빗을 살해했다는 말을 듣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깊은 밤, 인적이 끊긴 골목, 밝은 전등 아래 홀로 서성이는 이윱의 그림자가 짙다. 그는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고, 오래 망설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 바이람을 찾아간다. 찻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있는 바이람은 돈을 벌어 찻집을 열고 싶어한다. 이윱은 감옥에 갔다오면 한몫 챙겨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윱은 옥상에 올라 먹구름 사이로 치는 번개와 천둥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넋을 놓고 바라본다. 굵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굳은 결심을 할 때 이슬람 사원을 찾는다. 이스마일이 세르빗을 살해하기 전, 이슬람 사원을 찾아 깊이 생각하고, 이윱이 바이람을 찾아가기 전, 역시 사원에 들러 오래 생각한다. 두 사람은 모두 알라신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가 그들 자신의 의지로 결행되는 사건이다.
사건의 흐름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여지지만, 이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존재가 있다. 고통스러워 하는 이윱의 등 뒤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린 아이. 불과 서너 살에 세상을 뜬 이스마일의 형이자 장남이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 어린아이의 존재는 이 세 명의 식구를 붙들고 있는 강력한 원심력이기도 하다.
세 명 가운데 적어도 이윱은 어릴 때 죽은 아이를 내내 마음에 묻고 살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커다란 비극이지만, 이윱은 어디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는지 어렴풋하게 느낀다. 아내 하레스의 불륜도, 아들 이스마일의 범죄도 모두 자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의 앞날이 저 마르마라해, 에게해에 드리운 먹구름과 천둥, 번개처럼 무겁고 두려운 것이라는 걸 이윱은 잘 알지만, 그 앞에서 오로지 침묵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견뎌내는 것임을, 오로지 침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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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형상은 언제나 만족스러울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갈림길을 택했던 수많은 다른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마블에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던 것은 향후 전개될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지만, 다중우주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제목으로는 전개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고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인 영화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감정이 너울너울 파도를 친다. 이 상상력의 폭발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1. 세탁소
에블린은 남편인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세금 처리를 위해 영수증을 들고 직접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시작했던 세탁소는 다사다난했다. 업장을 운영하며 겪는 사건 사고들은 오전 시간만 하더라도 몇 건씩 발생했다. 세금 처리에 자잘한 실수들도 있었고, 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국세청 직원이 깐깐하게 군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이런 과정이 단지 올해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세금 징수는 매년 있는 일이고 올해 무사히 신고를 마치고 나면 내년의 몫이 남아있다.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탁소에 맡겨진 옷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다. 옷을 맡기고 찾아가는 과정들, 매번 보는 단골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반복적이다. 이러한 반복은 지극히 권태롭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우린 결코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시시때때로 무의식에 스며든다. 변화는 의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고 미세하다. 일상은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 가끔은 가족 간의 약속, 기념일, 의미 있고 중요한 대화도 일상에 무너진다. 그러니 가족회의를 소집하는 순간은 대개 정말로 중요한 대화들의 유통기한이 끝난 이후가 된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도 그랬다. 크고 작은 오해들은 대화로 풀어낼 타이밍을 놓친 채로 일상 속에 숨겨진다.
2. 새해맞이 기념행사
세탁소에서는 새해맞이 기념행사를 연다. 가족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을 초대해 다 같이 편하게 노는 자리다. 맛난 음식도 있고 분위기도 좋다. 올해는 세무처리 때문에 예년처럼 즐겁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우린 그 반복되는 순간을 기념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해 다시 1년 전의 그 자리로 돌아오면 우리의 삶도 다시 시작된다. 다시금 생일을 기다리고, 공휴일을 기대하고, 작심하고 3일을 버텨낼 의지를 얻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를 적어두는 것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일이다. 인간은 무한함을 견딜 수 없으니까.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어도 남은 삶이 유한하기에 우린 지금 이 날들을 기념해야만 한다.
기념일은 표지판 같은 역할이다. 올해는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고 무엇을 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상 속에 남겨진 날들에 의미를 덧붙이려는 노력은 그간의 과정에 대한 축하인 셈이다. 기념일의 좋은 점은 딱히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내지 않더라도 날짜가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냥 그 시간에 그때에 있었기 때문에 기념일을 맞는다. 매년 반복되는 삶 속에서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1월 1일에는 결심을 불태울 의지 또한 충전된다. 변화를 만들어낼 의지를 사랑하고 긍정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인간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3. 웨이먼드와 에블린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한 선함은 물리력이 내포된 수단이 아닌 친절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몰라서 지나치게 가혹해질 때가 있으니까. 싸움이 발생하는 와중에 혼란스러워하는 웨이먼드는 간절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더 다정해져야 한다고 간절하게 소리친다. 내내 철없는 것처럼 굴었던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상황을 바꿔낸다. 몇 마디 진솔한 설명과 약간의 호의를 통해 마술처럼 분위기가 바뀐다. 웨이먼드는 특히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혼란스러울 때는 다정해지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아주 사소한 일상 속의 웃음, 실없는 장난들과 대화. 애정이 만들어내는 관심은 세계를 바꾼다. 다정함에는 그런 힘이 있고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는 그걸 '전략적 친절함'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무작정 교정하거나 구제하려는 시도보다 애정 어린 관찰과 소통이 해결에 적합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조부 투바키는 그런 일순간의 감정을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얻어낸 세계의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주변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하게 고통받았다. 가장 유능했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게끔 자극하고 몰아붙였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에블린이 했던 말과 행동은 그녀를 위로한다. 이 세계의 딸이든 다른 세계의 거대한 악당 조부 투파키든. 궁극적인 공허와 허무를 이야기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여기 있고 싶다'는 답이면 충분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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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 불가능성' 앞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화를 동시에 사용하는 연극을 상상해보자. 관객이야 무대 위 프롬프터에 나온 자막을 보며 극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배우들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에 느낌과 감정, 천천히 맞춰온 합으로 대사를 주고받아야 한다. 언어가 다르기에 돌발 상황에서 애드리브로 능청스레 넘어갈 수도 없다. 대사 타이밍이 살짝만 어긋나도 극의 흐름이 깨져버리는 고난도의 무대. 막막하고 두렵다.
연출을 맡은 가후쿠는 배우들이 '대체 언제 움직이며 연습할 거냐'라고 물을 때까지 대본 리딩을 반복한다. 지루하고 건조한, 몸이 근질거리는 그 시간이 반복되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배우들 사이에 무언가가 ‘일으켜지고’ 이것이 관객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쏟은 정성 들인 노력, 여기서 만들어지는 호흡은 타인의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노력과 호흡이 ‘기계적 기예’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계적 기예는 매끄러울 순 있지만 상대에게 가 닿을 순 없다.
사실 가후쿠는 두 번의 큰 상실을 겪었다. 딸은 네 살 때 폐렴으로 죽었고, 가후쿠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도 갑자기 죽었다. 아내의 죽음은 가후쿠에게 특히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딸을 잃은 상실감에 휘청이던 가후쿠가 전적으로 의지해오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듣지 못한 채 급작스레 이별한 것이다.
그런 가후쿠의 마음을 여는 건 극단에서 배정해준 운전기사 미사키다. 그녀는 어린 시절 엄마의 폭력에 시달린 후 도망치듯 도시로 나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전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이다. 가후쿠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자신이 오랫동안 길들인 차의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기를 꺼린다. 그녀가 차에 깃든 가후쿠의 내밀한 관계와 감정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긴장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꾼다. 미사키의 능숙한 운전 솜씨 때문만은 아니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그녀는 금세 가후쿠가 지금껏 차를 아껴온 마음과 이 차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알아차린다.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말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후쿠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미사키에게 내 차를 운전해달라(‘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의 요청은 인간의 소통 가능성에 관한 감동적인 제언이 된다. 기계적‧기능적 관계를 넘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내밀한 소통의 관계가 바로 이 운전을 매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이때부터다.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건네는 말(“살아가야 해.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은 언어 이전의 보다 근본적 층위에서 교감이 이뤄진 후에야 서로를 위로하고 엮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카페에 마주 앉아 서로의 사연을 나눈 후 위와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면, 이 영화가 전하는 감동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말은 그저 건조한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그 의미를 두텁게 만드는 건 진심 어린 존중으로 쌓아 올린 시간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명쾌한 말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해한다는 건 타자를 내가 가진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명제다. 하지만 소통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이 불가능성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 닿기를 갈망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냉소적‧회의적 태도는 불가능성을 사실로 확정함으로써 이 권위를 재확인하지만, 그럼에도 가 닿겠다는 처연한 의지는 불가능성에 어떤 균열을 낸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보여주는 건 이 자그마한 균열이 자아내는 감동이다. 연극이든 삶이든, 그 어떤 소통 불가능성 속에서도, 우리는 이를 거스름으로써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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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구원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x 티모시 샬라메의 재결합“보통의 삶, 보통의 가족, 보통의 존재. 보통의 것이 불가능한 누군가에게. 당신과 비슷한 타인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서로가 이어져있을거라고. 그렇게 상처를 보듬고 사랑할 수 있을거라고, 영화는 말한다.
‘카니발리즘(식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코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한 호러영화가 아니다. 사회 밖으로 내몰려 그 주변을 맴돌아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일 뿐.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인물들이 가진 아픔의 한 구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그 상처는 얼마나 깊은지. 어떻게 해야 아물 수 있는지.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나가 되어 서로를 구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좌)테일러 러셀_매런과 (우)티모시 샬라메_리
삶의 경계선에 서있는 이들, 사회 속에서 이방인의 위치에 서있는 이들의 삶이란. 그것은 때로는 고독하며, 때로는 온전하지 못하다. 소중한 감정들을 짓눌러야 하고, 아픈 마음을 타인에게 쉬이 내비칠 수 없다.
영화는 식인을 하는 18세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의 성장을 그린다. 엄마는 매런을 떠난 지 오래고, 언제나 그녀 곁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마저 그녀를 떠나 결국 매런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매런은 자신과 같은 식인 성향을 가진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난다. 왜 나랑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냐는 매런의 말에, 네가 착한 사람 같아서,라며 화답한 리. 그렇게 리는 매런의 인생길에 동승하게 된다.
힘든 삶을 살아온 매런과 리가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마를 마주댄 채 주고받던 말들이 참 애틋했다.
"You don't think I'm a bad person?" - 리
넌 내가 나쁘다고 생각 안 해?
"All I think is that I love you." - 매런
널 사랑한다는 생각뿐이야.나의 결핍이 타인의 결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매런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뒤에 리를 떠나려 했던 것처럼, 리가 사랑하는 동생 케일라 옆에 언제나 함께 있어줄 수 없었던 것처럼. 결국엔 각기 다른 모양의 결핍들이 연결되어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신 역시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여동생 케일라를 끔찍이도 아꼈던 리. 너무나도 소중한 그녀에게, 리는 보통의 사랑을 내어줄 수 없다. 자신의 아픔이, 자신의 이야기가, 케일라에게 큰 상처가 될까봐 두려워서. 짓궂은 말들만 내뱉고, 전부를 터놓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다. 공중전화부스에서 케일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먹이던 리의 마음이 너무나 연약해보였다.
저기 저 멀리, 언덕 위에 앉아있는 매런과 리를 보며 둘의 행복을 빌었다.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그곳이 참 평화로워보였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는 곳. 나와 닮은 상처와 결핍을 가진 너를 껴안은 채 위로받을 수 있는 곳. 아픔을 묻어두며 살아온 리는 매런에게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나’라는 존재가 거부당하는 가혹한 세상 속에서, 그렇게 각자가 가지고 있던 빈자리는 서로의 존재 덕에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다.
강렬하고 아름다웠던 마지막 장면이 아직까지도 오랜 여운으로 남아있다.
Eat me please, bones and all. -리
영화의 제목은, 종반부에서 리의 말로 귀결된다. 뼈까지 전부 먹어달라는 리.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너 안에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사랑하자고. 너에게 내 전부를 주고 싶다고. 그의 애원은 이렇게나 사랑으로 가득하다. 매런을 향한 리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갖고 있는 마음의 크기만큼 줄 수 없는 사랑은 서럽고 또 서럽다.
2022 부산국제영화제_ 본즈 앤 올
정식 개봉 전, 202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만난 영화. 상영관을 나오면서부터 개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영화라는 예술의 힘을 빌려, 사회 속 한 개인의 삶과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의, 그 둘의 사랑이 더 이상은 아프지 않길.
이 영화 역시 오랫동안 보내주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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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경사 바틀비의 대척점에 선 남자
톰 크루즈가 연기를 잘한다는 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마이너리티 리포트》, 《미션 임파서블》시리즈 등을 봐오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제리 맥과이어》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금 탄식하듯 내뱉었다. 세상에, 톰 크루즈 연기 좀 봐! 특히나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얄밉고 짜증 나던지. 그 톰 크루즈인데도 상관없이, 꿀밤을 먹이고 싶다는 충동이 절로 치밀었다. 하여간에, 오늘 이야기할 《제리 맥과이어》는 톰 크루즈가 근사한 얼굴을 빛내며 "You Complete Me, "라고 고백하는 장면으로 유명하지만 내겐 그리 어여쁘지만은 않은 영화였다. 《제리 맥과이어》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말랑말랑한 버전의 필경사 바틀비가 아닐까, 라는, 다소 울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엔 모두가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테마가 몇 가지 있다. 아니, 말하더라도 다 함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 있다. 『피로사회』라는 책 제목을 훑거나, 과로사로 세상을 등진 이들이 많다는 신문 기사를 읽을 때 그들과 나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상대와 자신을 눈물겹게 여기고, 소위 말하는 '이놈의 세태'에 분노하면서도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나가는 우리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데없는 감성/감정/소망 등은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통계로 대표되는 경제 논리의 관점에선- 우리의 경험이 진실이기도 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영화 《제리 맥과이어》엔 이런 세태에 반기를 든 남자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제리(톰 크루즈)는 스포츠 에이전시에 근무하는 유능한 매니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일상에 환멸에 느낀 그는 새벽 감성에 젖어, 칸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업무 지침서를 작성하여 회사 내 전 직원에게 선물한다. 안타깝지만 회사의 시선으로 보자면, 제리가 저지른 한순간의 기행은 그가 효율적인 경쟁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가 시작한 지 25분이 채 되기도 전에 제리는 해고된다.
그렇다면 해고된 직후 제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이 키워내고픈 스포츠 유망주와 일대일의 가슴 뛰는 관계를 순탄하게 이어나가며 승승장구할까? 인간을 도구화시킨 자본주의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폭로할까? 전혀 아니다. 생각해보자. 제리의 업무 지침서는 충동적으로 쓰인 글이었고, 전날 밤까지만 해도 제리 맥과이어라는 남자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누구보다 훌륭하게 적응한 남자였다.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매니저라고 이야기했다지만, 그는 미국이 사랑하는(혹은 사랑하게 될) 스포츠 거물들을 이어주고 커미션을 획득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업무 지침서에 '취해'있었을 진 몰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래도 운명의 여신이 제리를 완전히 버리진 않았나니, 제리는 자신의 업무지침서에 깊은 감명을 받은 도로시(르네 젤위거)와 새로운 에이전시를 꾸린다. 도로시는 마법세계에 발을 잘못 디딘 동화 속 주인공처럼, 경리직원임에도 자본주의 특유의 비인간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감성적 순수를 지닌 여자다. 제리의 비서인 웬디가 월급 인상이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며 그를 따라가지 않는 것과 달리, 어린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인 도로시는 4대 보험조차 보장이 어려운 제리의 신생 회사를 택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여기서부터 영화가 뻔해질 거라 코웃음 치기 쉽다. 남주인공을 따라간 여주인공이니, 당연히 사랑에 빠질 것이고, 사랑을 원천 삼아 직업적 성공까지 일궈낼 것만 같다. 아니, 실상은 다르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제리와 도로시의 관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녹슨 문처럼 끊임없이 삐끄덕댄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겪은 하루의 끝에서조차 제리와 도로시가 바라보는 세상은 하염없이 다르만 하다. "가끔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라는 도로시의 고백은 제리가 업무적으로는 뛰어난 협상가였을지는 몰라도, 사적이고도 내밀한 인간관계에선 문제적 인물일 수 있음을 폭로한다. 물론 도로시 역시 어느 정도 인간관계에 있어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제리를 먼발치에서 동경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열 명의 이혼녀와 이야기하는 현실을 지긋지긋해하는 동시에 또래 여자들의 삶을 부러워했다. 영화 중후반부, '우리가 황홀함에 빠져서 사랑한다고 믿었'던 게 아니었겠냐는 도로시의 지적은, 최소한 도로시에게 있어선 일부 사실이었으리라.
이러한 두 사람의 위태로운 관계를 임시적으로 봉합하는 존재는 바로 도로시의 아들인 레이(조나단 립니키)다. 제리든 도로시든 결국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어른인 반면, 레이는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는 자야 한다는 엄마의 규칙을 손쉽게 넘나들고, 제리에게 "안녕, 제리 아저씨"라고 인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한밤중 모르는 아저씨에게 "지금 동물원에 가자"라고 이야기할 만큼, 어떤 사회적 속박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소망에 충실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레이는 그 어떤 어른보다 삶의 주권을 뚜렷하게 쥔 존재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관계를 합목적성 하에 계산을 했던 제리가(그는 심지어 레이가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하자, 그 '대가'로 동물원에 꼭 가야겠다고 이야기한다) 잘 나가던 스포츠 에이전시를 나오자 연인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동료로부터, 사업 파트너로부터 루저 취급당한 모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그렇다 한들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제리의 성장은 보이드 가家에서 이뤄지지 않으며, 오히려 로드 티드웰(쿠바 구딩 주니어)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두 사람이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로 거듭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나 제리에게 더욱 그랬다. 에이전시를 나온 후 경제적으로 파산한 그는 절박하다. 모든 가능성을 붙잡아야 한다. 사무실에서 그에게 쇼 미더 머니를 외치게 했던 이해할 수 없는 선수에게 '내겐 너 하나뿐이야, '라는 말을 건네야 했고 모든 자존심을 저버리며 도와달라 외치고 광고주에게 비굴하리만큼 굽신거려야 했다. 남은 패가 많지 않은 제리에겐 더 이상 물러날 자리도 없고, 포기할 여력도 없다.
하지만 어디 인생사가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제리와 달리 자신의 하나뿐인 클라이언트는 불만이 산더미다. 약속했으니까 의리를 지키겠다며 제리 곁에 남은 로드는 언뜻 영화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처럼 보이기 쉬우나, '쇼미 더 머니'나 '콴'을 큰 소리로 외치는 그는 기실, 경기장 밖에서의 매너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액의 계약금을 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에 강하게 예속된 인물이었다. 이기적인 그의 태도가 자꾸만 몸값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던 로드는 제리의 잔인하리만큼 정직한 말에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넌 너무 액수에 연연해. 가슴은 없고 머리만 굴릴 뿐이야. 경기에선 돈 생각만 하고 그런 태도로는 관중을 감동시키지 못해.” 그렇다. 20세기 서프러제트 역사에서 “We want bread, but we want roses, too!”라는 슬로건을 찾을 수 있듯, 인간에겐 울림이 필요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오로지 돈과 계산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는, 그러나 제리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이 영화의 장르다. 《제리 맥과이어》는 드라마/코미디/멜로/스포츠라는 네 가지 장르를 납득 가능할 만큼씩 흡수한 영화다. 한 가지 장르에만 집중해서 두 시간을 투자해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네 가지 장르가 한 영화에 뒤섞인 이유가 뭘까? 최소한 《제리 맥과이어》에서의 답은 단 하나뿐이다. 주인공인 제리 맥과이어가 관계에 있어서, 비즈니스에 있어서 두 시간 내내 우왕좌왕했기 때문이라는 것.
위에서 말했듯 그의 업무지침서는 충동적으로 쓰였다. 새벽녘에 쓰인 '꿈'이 신념으로 자라기 전 제 자리에서 쫓겨났기에, 제리는 기존 체제와 완전히 척을 진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도로시를 움직인 낙관적인 인간 찬가를 자신 있게 확대할 만큼의 용기 혹은 배짱이 없다. 우연에서 출발한 도로시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로시를 배려하고 그의 아들 레이에게도 친절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한다. 분명 끔찍한 사이도 아니고, 머리로 계산한 관계인 것도 아니나, 진정성 있는 관계도 아니다. 그렇기에 제리는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줄였고, 결국 맥과이어 부부는 너무도 금방 별거하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수 있던 이유는 제리가 도로시를 향해 뛰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 말미 제리의 대사에선 그의 성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로드가 멋진 경기를 이끌어내자 택시를 잡고 무작정 도로시에게 달려갔음에도 제리의 입에선 곧바로 사랑한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은…… 모르겠어. 다만 오늘 밤은 우리 회사가 성공한 날이야. 아주 크게 성공했어. 하지만 뭔가 부족했어." 한참 후에야, 그것도 '차가운 세상'과 '힘든 경쟁'을 먼저 언급한 후에야 제리는 비로소 도로시에게 사랑한단 말을 건넸다. 그러하므로 제리는 여전히 사랑을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사람이다. 다만, 제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며, 자신의 가장 특별한 사람에겐, 특별한 애정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단 것 역시 자명하다. 그렇기에 도로시는 그의 입에서 그리움이 먹먹하게 담긴 "안녕, "이라는 말이 흘러내린 순간 모든 걸 용서했다.
이렇듯 《제리 맥과이어》는 둘의 결합이 서류상의 부부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부부로 거듭났다는 것을 보여주며 제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제리의 선택이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제작진이 선택한 엔딩 장면이 유명 CEO의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제리가 로드와의 관계, 도로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으로 해피엔딩은 완성될 수 없다는 가정이 영화 뒤에 자리한다. DICKY FOX라는 명패가 똑똑히 새겨진 그가 말한다. "살아오면서 성공만큼 실패도 많이 했지만, 아내를 사랑했고 인생을 사랑했죠." 영화 내에 묘사된 제리 맥과이어의 기행과 업무상의 순간적 추락은 높은 확률로 '실패' 축에 속할 것이다. 다만 영화 이후 제리의 삶은 달라질 터다. 로드가 높은 금액으로 재계약하는 데에 성공했듯, 제리는 곧 뛰어난 기량의 소수의 스타 선수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커미션 금액으로 가족을 부양할 것이고, 레이는 어쩌면 야구선수가 될 것이다. 새아버지인 제리가 일궈둔 인맥이 도움이 될 건 뻔하다.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본주의적 성공신화에 대한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둔 후, 디키 폭스(제러드 주심)가 영화 끝에서 관객에게 충고한다. "바라건대 여러분도 저처럼 살아가세요."
결국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일과 사람을 양분하지 않고 모두 누릴 수 있으리라 속삭인다. 제리처럼 무모할지라도 충동적인 용기를 낸다면 말이다. 굳이 사회 시스템 전반을 흔들지 않고도 획득할 수 있는 이 달콤함은 심지어 기업의 CEO가 되는 것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암시를 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소시민들에게 “체제가 허용한 한도 내에서 자유를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착각을 적극적으로 누리"며 "스스로가 속한 체제에 더욱 철저히 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게(이용화, 2018)"되는 모습을 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제리 맥과이어》를 모두 감상한 내 마음속에 남는 대사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건 단지 업무 지침서일 뿐인데. (It was just a mission statement.)”
★★★☆
참고문헌
이용화 (2018). 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삶에 대한 멜빌의 고찰. 인문학 연구, 29, 13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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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풀, 원더우먼, 홉스 너네 모여서 뭐하니?
넷플릭스에 레드 노티스가 공개 되었어요!
라이언 레이놀즈, 갤 가돗과 드웨인 존슨이 주연을 맡아서 꽤 기대를 받았던 영화였는데요.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나 평범하고 예측가능한 액션 영화였습니다.
특히나 세 캐릭터 모두 그걸 맡은 배우들의 다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는 캐스팅이어서,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영화 레드 노티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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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탑> 메인 예고편
중년의 영화감독이 오랜만에 만난 그의 딸과 함께 인테리어 디자인하는 여자의 건물을 찾는다. 딸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해서 그녀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디자이너는 직접 고친 그 4층 건물의 소유주이고, 자기가 어떻게 고쳤는지 보여주고 싶어 한 층씩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간다. 각층의 방을 다 열고 들어가 보는 세 사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시 밑에서부터 한 층씩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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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사다 가족> 메인 예고편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마사시는 사진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졸업작품으로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재현한 사진을 찍는다.
독특한 가족사진으로 주목받게 된 마사시는
타카하라 가족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특별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데
어느 날, 타카하라 가족이 사는 마을에 쓰나미가 덮쳤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을 찾기 위해 마을로 간 마사시는 버려진 사진을 세척하는 봉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