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3-28 17:58:54
누벨바그 캐다 보면 결국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필모그래피 가이드 함께 봐요

오늘은 사진, 영화, 설치 미술 등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우리를 사로잡았던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6주기입니다.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선뜻 영화를 보기 어려웠던 분들을 위해 씨네픽지기가 필모그래피 가이드를 준비했습니다!
첫 만남은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한번 만나게 되면 바르다 감독과 사랑에 빠지게 되실 거에요.
혹, 작품이 많아 무엇부터 볼 지 고민이 된다면 <방랑자>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우선적으로 추천드립니다.
그럼 오늘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감상해 볼까요?
*인터뷰 발췌: 「아녜스 바르다의 말」, 아녜스 바르다&제퍼슨 클라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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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스텔라(Stella. A Life)., 2024
감독: 킬리안 리드호프
명시 그 외는 없는, <스텔라>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아름다운 별빛을 품은 금발의 미녀, 스텔라는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재능 있는 재즈 가수다. 미국에서 원 없이 노래하며 살고 싶은 열망은 그녀와 함께하는 밴드 친구들도 품고 있는 소망이기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현실을 등진 채 연습에 몰두한다. 고대하던 공연 당일, 스텔라는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다. 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밴드와 스텔라는 할리우드로 향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음을 자축한다. 이제 남은 건 미국으로 향하는 레드카펫뿐. 그러나 이들을 호위하던 재즈가 뚝 끊기고 고막을 찢는 공장 소음이 울려 퍼지면서,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잔뜩 더럽혀진 노동자 옷을 입고 강제 노역 중인 스텔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그녀는 재즈 가수이기 이전에 1940년 독일, 나치 정부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었고, 밴드와 스텔라가 등진 현실은 제힘은 물론이고 모두의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이기에 공포뿐인 세상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어둠 속에서도 자기 빛을 뿜어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게토에 있는 군수공장에 끌려가 유대인 배지를 달고 온종일 기계 부품을 만들며 언제 죽을지 모를 현실을 받아들인 동포들과 달랐다. 밤이 찾아오면 배지 대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거리로 나갔고,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 금발과 푸른 눈은 그녀를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독일 시민 '같은' 외형(가면)은 스텔라에게 미국 진출 실패에 대한 보상이 될 순 없었지만, 지옥 속에서 그녀가 그녀답게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수단은 곧 그녀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됐고 공장 책임자에게도 영향을 줬다. 도망치라는 책임자의 신호 덕에 스텔라와 그녀의 부모는 수용소로 잡혀갈 뻔한 위기를 넘긴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는 더 과감해진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신분증 위조 브로커(롤프)의 연인이 되어 그와 함께 일한다. 그들은 독일 시민인 척 거리를 쏘다니며 동포에게 돈을 뜯어낸다. 제삼자였던 동포의 경계는 점차 그녀의 가장 친한 밴드 친구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스텔라는 절친에게도 목숨을 담보로 돈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텔라는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기로 한다. 본인이 느끼는 고통과 별개로 나치는 여전히 유대인을 색출했고, 그녀에겐 안전한 은신처와 생계를 위한 돈이 필요했으니까. 언제 빼앗길지 모를 자유를 향한 욕망도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했겠지. 하지만 스텔라는 알지 못했다. 그 결정이 훗날 자기 삶은 물론 인간상까지 송두리째 무너트릴 계기가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스텔라는 밴드 친구의 고발로 게슈타포(나치의 비밀 국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반쪽짜리 자유마저 완전히 빼앗긴다. 갖은 고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수용소 수감을 피하고자 나치의 비밀 요원이 되기로 맹세한다. 비밀 요원 일은 딱 하나, 유대인 색출. 그동안 해왔던 브로커 일과 차원이 달랐다. 신분증 위조보다 더 예리하고 대담해야 했으며 재즈를 부르며 자아를 팽창하듯, 인간의 극한 이기심을 폭발시켜야 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기에 어떠한 감정도 비밀 요원 일에 방해 돼선 안 됐다. 그로 인해 받는 정신적 압박과 심리적 불안 역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불편한 마음’과 똑같았다. 브로커와 비밀 요원은 스텔라에게 행위만 다를 뿐 사실상 생존이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치된 생존 방식으로 정립됐다. 이전보다 더 냉혹해져야 했다. 유대인을 잡는 유대인은 스텔라 말고도 넘쳐났으니까. 업무 성과 미달로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동포를 고발해야 했다. 물론 다른 요원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색출했다고 해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필요 없는 독일인이 될 순 없었다. 태생적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은 레드카펫도 자유도 아닌 '길이 하나뿐인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장으로 변했고, 그렇게 스텔라는 동포를 잡는 동포가 아닌 ‘독재 국가를 위한’ 요원이 됐다. 매혹적인 금발과 푸른 눈이 만든 무기는 그 쓸모를 잃었으며, 마음 한쪽에 자리했던 죄책감과 죄의식은 본인이 처한 비극에 더 철저히 가려졌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스텔라에게 남은 건 스스로 만든, 무자비한 본인뿐이었다. 금발의 배신자는 친구들은 물론 얼굴만 아는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고발해 적게는 600명, 많게는 3,000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 덕에 강제수용소로 끝까지 끌려가지 않았지만, 종전 후 체포돼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미 이전 재판에서 선고받은 형기(10년)를 마쳤다는 이유로 처벌 없이 풀려난다. 재판 내내 부모님 역시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며 본인 역시 피해자임을 주장했던 스텔라였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작은 거울에 한 할머니가 비친다. 여전한 금발 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빨간 립스틱, 스텔라다. 악착같이 얻고자 했던 삶이 주는 압도적인 평온이 계속될 듯했는데, 돌연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쿵 소리도, 사람들의 비명도, 그 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스텔라> 끝난다.
<스텔라>는 실존 인물 '스텔라 골드쉬라크'의 일생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감독은 처음부터 스텔라의 일대기를 꼼꼼히 살펴, 이를 영화에 조금의 덧붙임 없이 담았다. 나치, 홀로코스트란 배경(환경)보다 그 안에 속한 인간, 스텔라(개인)에게 관객이 집중하길 바랐다. 따라서 그녀의 생과 사를 작품 안에 거짓 없이 담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고, 스텔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야기 전개에서 스텔라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은 철저히 '개인'의 내면으로만, 즉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밖으로 빠져나와 제삼자에게 감정이 전이시키는 과정은 없었다. 중요한 건 스텔라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결과였지,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나'만의 감정 태풍 따위가 아니었다. 영화는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았던 스텔라의 무수한 하루를 단순 기록했다. 사건 나열이 아닌 개인의 연속된 선택과 결과로 가중되는, 그다음의 선택과 결과에 무게를 뒀다. 스텔라 골드쉬라크가 해체되면 될수록 그녀의 개인사는 모두를 향한 이야기로 변형됐고, 이는 개인을 통해 전체와 역사를 바라보게 되는 길이 됐다. 영화는 스텔라란 인물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목도하는 일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는 첫걸음이란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끝에 다다라서는 최종 판단과 결정을 관객에게 넘기며 제 몫을 다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1980년 광주에서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된 '영호'(이창동, <박하사탕>(1999))와 1943년에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 아우슈비츠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 슈미츠'(스티븐 달드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도 스텔라와 같은 길을 걸었다. 세 사람 모두 국가적, 시대적 환경 안에 갇힌 인물로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표현됐다. 죽음의 과정도 닮아있다. 영호는 그동안 저질렀던 자기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기차 앞에 섰다. 유대인을 가스실에 넣어 죽인 일보다 문맹을 폭로 당하는 걸 더 수치스럽게 여겼던 한나는 수감 후 글을 읽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악마 같았던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와 '마지막까지 이어진 자기 파괴적 결말',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영화가 각각 무엇을 더 강조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랐을 뿐 모두 충실히 활용됐다.
영호는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진짜 피해자인지를 질문했고, 한나는 사고하지 않은 복종으로 파생된 악의 평범성을 고심하게 했다.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자기반성이 뚜렷하게 보였기에, 두 인물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전달했다. 여기서 자기반성은 다양한 방식과 절차가 존재하는데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는 꼭 포함되어 있다. 자기반성이 참회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용서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요점이다. 두 사람의 자기반성은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결과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경종을 외면하지 않게 했다.
출처: 영화 <스텔라> 스틸컷(다음)
반면 스텔라의 자기반성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만 휘몰아쳤다. <스텔라>는 이마저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담았다. 스텔라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장면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행위적인 측면의) 장면을 더 길게 노출했다.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투신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녀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여줬다. 스텔라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카메라는 공허한 바람 소리조차 허용하지 않고, 오직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머물러있었다. 그녀가 대체 어떤 얼굴과 어떤 마음으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우린 확언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 자체도 관객이 뭘 알고 싶고, 또 뭘 회피하고 싶어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자기반성은, 공감이나 비난 심지어 반사적으로 가능한 일차원적 반응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무관심과 관심의 대결에서 당연히 후자가 패배한 줄 알았는데, 스텔라의 메시지는 영호와 한나처럼 뚜렷하게 전달됐다. 아니, 오히려 더 냉철하고 단호하게 관객에게 닿았다. 마치 추상적인 물음이 가장 구체적인 답이 된 것처럼, 최종 판단은 알아서 각자 해야 함을 꼭 명심하길 바라는 것처럼‥.
<스텔라>는 명시 외엔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감도 분명히 보인다. 다하우 수용소에 새겨진 추모문 중 ‘죽은 사람에게는 애도를 표하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경고하기 위하여’란 구절이 <스텔라>를 관통해,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뚫고 지나갔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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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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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크루즈, 이 구역 낭만의 최종 수호자
6★/10★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만큼 세밀하면서도 정교한 미시 액션의 타격감을 가졌는가? 아니다. ‘007 시리즈’처럼 메인 캐릭터가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미션 임파서블’이 첩보 액션 시리즈로서 갖는 특장점은 뭘까? 바로, 그린 스크린 밖의 톰 크루즈다.
‘제발 그가 자연사했으면 좋겠다’는 팬들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실제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첫 촬영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오토바이 스카이다이빙 신이었다. 만약 톰 크루즈가 오토바이를 타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하다 사망할 경우, 바로 촬영을 멈춰 다른 장면에 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단다. 그리고 이 촬영 장면은 영화 홍보에 대대적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특이점이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주인공 에단 헌트가 또다시 불가능한 임무를 맡았다. 물론, 여기서 ‘불가능’은 에단 헌트가 그 임무를 맡기 전까지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어떻게든 그는 자신이 맡은 바를 해낼 것이기에. 새로 만난 적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에단이 마주한 적은 ‘엔티티’라는 이름의 AI다. 에단의 싸움터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초 단위의 정보 싸움이 일상인 첩보 현장이다. 그런데 엔티티는 첨단 기술과 정보의 집약체 혹은 그 자체다. 에단과 동료들이 사용해왔던 기술과 통신망은 수시로 망가진다. 그들이 획득한 정보 역시 엔티티가 조작한 거짓일지도 모른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스카이넷’은 인간을 통제하는 인공지능이라는 미래의 막연한 공포에 관한 장르적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이제 스카이넷이라는 상상력은 ‘현실’이 되었다. 온갖 AI가 쏟아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인공지능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힘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션이다. 이를테면, ‘본 시리즈’는 9‧11 이후 현실에서 발생한 ‘영화적 스펙터클’로 인해 충격을 받아 세계관이 흔들린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이슨 본의 물음에 기꺼이 동참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본 시리즈’의 정체성과도 같은 미시 액션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있다. 기존 블록버스트의 액션 스펙터클과 비슷한 시각성을 지닌 테러 장면과 대비되는 미시 액션은 테러에 대한 동시대 관객의 무의식적 공포를 달래주었고, 관객이 테러의 트라우마를 잊고 영화를 ‘편안하게’ 감상하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미션 임파서블’ 톰 크루즈의 CG 없는 고난도 액션은? 톰 크루즈의 액션은 영화에 어떤 장면이 나와도 그저 그린 스크린에서 찍었거니 하며 무심한 듯 반응하는 관객에게 새로운 긴장을 안긴다. 그가 고난도 액션을 소화할 때마다 ‘저걸 어떻게 찍었을까?’라는 경외 섞인 물음이 자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술, AI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만연한 시대에, 톰 크루즈의 뚝심이 의도치 않게 동시대인의 불안을 달래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 역시 아직은 ‘진짜’가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완성도 높은 CG로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 영화가 여럿이다. 때문에 어떤 장면을 CG 없이 촬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영화를 고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쨌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도 높은 장면을 선보여 관객에게 평가받으면 그뿐이다. 톰 크루즈가 배우로서 가진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마케팅, 관람평이 온통 CG 없는 액션에만 집중된 현 상황이 의아한 건 이 때문이다.
영화가 그 자체의 매력이 아닌 출연 배우의 열의나 헌신에 기대 평가받고자 한다는 건, 영화의 재미가 떨어진다는 걸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꽤 긴 러닝타임 동안 내내 적당한 긴장감을 선사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들갑 떨 만한 신선함이나 완성도를 갖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할리우드 첩보물의 전개와 장면이 익숙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린 스크린에서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와 대비되는 톰 크루즈의 장인정신(그리고 그가 위축된 인간에게 전하는 위로)과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개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톰 크루즈가 이 구역 낭만의 최종 수호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와 배우 톰 크루즈에 대한 평가를 분리하는 것이 그의 장인정신에 대한 진정한 예의가 아닐까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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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하고도 몽환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오다 카오리
다시, 주목할 만한 감독 칼럼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이 없어 언급이 잘 안돼는 감독이나 한국에서 비교적 주목받지 못한 감독을 다시 주목해보자는 취지로 적는 칼럼입니다.
본 칼럼 시리즈를 통해, 다시, 주목할 만한 감독들에 대해 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번 사라 고메즈 감독에 이어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은,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오다 카오리이다.
이번 감독은 현역 감독인데, 한국에서는 제작년에 서울아트시네마 '새로운 바람 - 일본 영화의 현재' 특별전으로 처음 소개되고 '2021 시네바캉스'로 최신작이 한 편 소개되었고 2022년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단편 <가라오케 카페 보사>가 소개된 바 있다.
오다 카오리 감독은 1987년 오사카 출신으로, 간사이 외국어 대학을 졸업 후 미국 홀린스 대학에서 영화학 과정을 졸업했다.
그리고 2011년 자신의 커밍아웃을 밝히는 내용을 담은 자전적 다큐멘터리인 <노이즈가 말하기를>로 단편 대뷔작을 발표한다.
본 영화는 2011년 나라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도쿄 국제 LGBT 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호평 받게된다.
그리고 2013년부터 3년 동안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 거주하며 영화 감독 벨라 타르의 필름 아카데미인 필름팩토리(FILM FACTORY) 과정을 3년 이수한다.
당시에 다른 대학이나 교육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여러 영화적 지식과 경험들을 쌓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었기에, 감독의 이후 작품들에 큰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름팩토리 과정을 이수중이던 2015년 발표한 장편 대뷔작 "광산"은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오래된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찍으며, 어둠속에서의 빛과 인부들의 움직임, 운동을 담아내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다.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며 특별언급이 되었다.
이후 2019년 또 다시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첫 발표한 "세노테"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될 뿐만 아니라 구로사와기요시 감독 등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오시마 나기사상의 제1회 수상자로 뽑히며 더 큰 주목을 받게된다.
세노테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북부에 존재하는 물이 샘솟는 ‘세노테(cenote: 암석 붕괴 등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우물)’라는 공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마야 시대부터 사람들은 세노테와 함께 살며 삶을 영위해 가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노테는 산 사람을 공물로 바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공간으로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았다.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 진행한 수중 촬영과 교차해가며, 물과 하늘, 빛과 그림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가며 몽환적인 광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현재로서 가장 최근 장편은 본 작품이기에, 추후 발표하는 작품은 어떨지 기다려지는 부분이다.
오다 카오리 감독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담담하고도 몽환적'이다.
연상되는 감독으로는 라브 디아즈, 왕빙 감독이 떠오르는데 실제로 광산은 오다 카오리 감독이 참고를 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왕빙 감독의 철서구를 봤다고 하고,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거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앞서 말한 이 두 감독 처럼 영화는 감독의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최소한의 설명, 혹은 설명없이 담담하게 대상을 담는 스타일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다.
이러한 담담함은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초현실적인 풍경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최신작인 세노테라고 생각이 드는데, 감독이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촬영한 수중 촬영과 현재 세노테 부근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을 담은 영상, 과거의 기억이 담긴 목소리들, 현재의 목소리들과 같이 대조되는 존재들이 교차되며 보여지는 광경은 정말 독창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예고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한번 예고편만이라도 봐보시고 짧게나마 경험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려본다.
전에 서술한 오시마 나기사 상의 경우에는 오다 카오리 감독이 수상한 2020년 제1회에 이어 2021년에 제2회가 진행되었는데, 2021년에는 적절한 수상자가 없어 수상을 아예 안 했다.
수상자 없음에 대해 심사위원 중 한명인 사카모토 류이치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통해 명성의 상징이 된다면, 그것은 그가 싫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명성에 단순히 편승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를 도발하고 비판하고 초월하는 자만이 이 상을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만나고 싶다." 라고 말했다.
이만큼 심사위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뽑는 상인 만큼 오다 카오리 감독은 일본 감독 중 주목해야할 감독이 맞으며 강력히 지지를 표하고 싶다.
이전에 세노테를 본 이후로 필자는 아직까지도 오다 카오리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으며, 분명 그 신작은 필자의 기대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인들의 기대도 충족시킬만한 영화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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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부터 회귀하고 싶은 영국 왕세자비의 비극!
영국의 왕세자비인 다이애나 스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스펜서는 보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를 띄며 다이애나가 왕실 가문에 부적응하는 것에 대해 다루는 영화이다. 사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꾸며낸 비극이라는 문구가 영화 초반에 나온다. 다이애나가 자가용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영국 왕실 가문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왕실 가문이 모이는 자리에도 지각을 하며 몸무게 재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다이애나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의 성격은 예술가처럼 진보적이고 뭔가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자신이 속한 강박적인 영국 왕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모습을 보인다. 규칙적인 분위기 속에 살아가느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영국 왕실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싶은 다이애나의 이야기
하니엘의 영화 줄거리 요약
오히려 자신이 왕세자비가 된 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로서 큰 부담과 정신적인 압박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비극이란?
다이애나는 수많은 파파라치들의 타깃이 되어왔다. 그리고 자신도 대중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영국 왕실 가문에 소홀히 대하였고 규칙적인 식사와 아침, 점심, 저녁에 드레스를 맞춰야 하는 것도 싫어했다. 분위기와 다른 드레스를 입고 나간다거나 자신이 먹는 음식들을 변기에 토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말이 잘 통하는 매기가 쫓겨나자 큰 불안감을 느낀다. 또한 주변 사람들도 다이애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려고 했으나 그레고리 소령과 셰프인 숀 해리스는 그런 다이애나의 행동에 맞추며 왕세자비로 대한다. 아마도 다이애나의 불안한 정서와 더불어 강박적인 영국 왕실의 분위기가 그녀를 미치게 만든 것 같아 보인다. 차라리 자신이 왕세자비라는 신분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찰스 왕세자의 아내이며 두 자녀들을 둔 어머니인 다이애나는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서 자신이 살던 허름하고 낡은 집에 쳐져 있는 철조망을 끊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린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왕세자비의 모습은 아마도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까?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지금 상황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생각 속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세자비인
다이애나 그녀는 왜 과거를 집착하고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하니엘의 생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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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없이 보기 힘든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그린 영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아이와 어른의 관계를 그린 영화들
오늘 추천작들은 혈연관계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어른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을 가지고 왔는데요. 위탁모, 조폭, 엑스맨, 유모 등 혈연이 아니더라도 끈끈한 관계로 형성된 의미가 깊은 영화들 같이 만나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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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엣 더 벤치 - 액션 하나 없이 지금 제일 재미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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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이 쓸쓸하다는 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이겠지” 강가 잔디밭 한가운데 작은 벤치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저녁, 그 벤치에는 오랜만에 재회한 어린 시절 친구인 남녀가 앉아 있다. 그들은 작은 벤치 위에서 어딘가 답답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따뜻한 대화를 나눈다. 이곳에는 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별 이야기를 나누는 커플과 그 대화에 끼어드는 아저씨, 가출해 노숙자가 된 언니와 그런 언니를 찾아온 동생, 그리고 벤치 철거를 계획하는 관청 직원들. 하나의 벤치를 무대로 다양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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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친자’들을 짜릿하게 할! 더욱 압도적으로 더욱 완벽하게 돌아왔다! 압도적 승리의 감동을 경험하라!? [한산 리덕스] 공식 예고편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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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세뇨리따 89> 30초 예고편
미인 대회 왕관을 차지하려는 여자들이 모인 이 곳.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던 이 곳의 실체는 지옥이었다. - 누구도 탈출 할 수 없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세뇨리따 89〉 감상은 지금, 왓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