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목필2025-03-23 09:57:14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영화 <미키 17>

자본과 번호, 이름과 사랑
퇴근하고 잔뜩 지친 몸을 이끌어 지하철에 오른다. 각자의 온도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뜨끈한 등과 어깨를 꾹, 꾹 밀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본다. 한 정거장 지나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간, 당신의 눈이 드물게 번쩍 빛난다. 그러나 옆에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던 중년 여자가 당신보다 훨씬 빠르게 엉덩이를 붙여버린다. 당신은 미간을 팍 구기고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다. 유해한 도파민이니, 뇌세포를 파괴한다느니의 말들은 쓸모없다. 무의미한 작은 직사각형의 세상으로 당신은 있는 힘껏 오늘로부터 도망친다.
결국, 21 정거장 내내 서서 온 당신은 길거리에서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는다. 아무리 편한 운동화를 신어도 언덕을 오르는 종아리는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당신은 길고도 긴 여정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 버튼을 누르다가 무심코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다. 그 속의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당신의 자리가 아닌) 당신의 자리를 뺏은 중년 여자와 얼굴이 겹쳐지면서, 핸드폰으로 겨우 외면했던 질문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내가 원래 이런 표정이었나?"
나는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름 모를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거울 속 나는 몇 번째 '나'일까?
블랙 코미디 + SF + 우화의 공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독히 사실적이면서도 어쩐지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 코미디 + 우화' 공식으로 성공한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기생충>(2019)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자본과 계급으로 분명하게 나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어쩐지 헛웃음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싹 젖는 감각이 생생한 동시에 몽롱한 동화 같으니 말이다. 한국 SF 장르와 봉준호 감독 세계관에 한 획을 그은 <설국열차>(2013)도 디스토파이 세계관에서 아주 긴 열차 칸으로 나뉜 계급 이야기다. 위와 아래, 앞과 뒤. 뒤집으면 언제든 서로가 될 수 있는 구조. 그는 열과 행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재와 미래를 그리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그의 대표적인 크리처 무비인 <괴물>(2006)과 <옥자>(2017)도 전체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빠질 수 없다. 이렇게 계승한 블랙 코미디 + SF + 우화로 더욱 견고해진 봉준호 감독의 작가 주의 세계관을 통해 <미키 17>(2025)이 세상에 나왔다.
<미키 17>은 지구가 멸망을 앞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배경이다.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자고 주장하는 이들과 망가진 지구를 어떻게든 고쳐서 쓰자 주장하는 정당의 대립이 이루어지는 혼란함 속에서, 친구 '티모'와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진 주인공 '미키'는 빚쟁이를 피해 지구를 떠나려고 한다. 얍삽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티모와 달리 자존감도 낮고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어떻게든 영토 개척 프로젝트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접수를 받는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제대로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물어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익스펜더블은 진짜 '극한 직업'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미키를 앞세운다. 우주선을 고치는 줄 알았더니 사실 방사능 실험이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몸이 망가지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4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미키가 먼저 땅을 밟고 있는 힘껏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피를 토한다.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은 미키'들' 덕분에 다른 요원들도 마음껏 차가운 입김을 볼 수 있게 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와 일상에 도사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미키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나샤'의 사랑이다. 미키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곁을 지켜주는 나샤를 사랑하면서도, 최고의 요원인 그녀가 왜 하찮은 자신을 사랑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녀를 내조한다.
그날도 17번째 미키는 추락사로 몸이 반토막이 나 죽었어야 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얼떨결에 살아남아 지나가던 티모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티모는 떨어진 무기만 챙기고 다친 그를 향해 재수 없는 질문만 툭 던진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미키는 행성의 주인인 '크리퍼'에게 잡아 먹히며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크리퍼는 잡아먹긴커녕 미키를 질질 끌고 가 얼음 동굴 밖으로 내보낸다. 크리퍼가 자신을 눈밭에 던져 얼려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한 미키 추위에 떨며 힘겹게 함선으로 돌아온다. 잔뜩 지친 몸을 침대에 내던지는 순간, 어떤 인기척에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 미키 '18'과 마주한다.
복제의 사이클
'익스펜더블'은 사뭇 다른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의 '복제 인간'과 다른 점은 미키가 자신이 익스펜더블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징그럽고 코믹한 정치인 마샬 부부의 영토 개척지 정책의 핵심은 좋은 유전자로만 구성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몇 번이나 복제된 미키는 불량품에 불과하다. 나샤와 카이, 과학자 도로시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도 미키가 느낄 고통과 죽음을 경시한다. 죽음에 대한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살피지 않는다. '그게 네 쓸모고 직업이야.'라는 폭력적인 말 한 마디면 미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니까. 과학자와 의료진도 처음엔 프린팅 되는 몸을 잘 받아줬지만, 나중에는 바닥으로 꼴사납게 떨어져 구겨진 몸에 주사 바늘을 꽂을 뿐이다.
시체, 쓰레기 등 자본과 사회의 찌꺼기는 모두 '사이클러'에 던진다. 용광로처럼 생긴 사이클러는 단순히 쓰레기를 소각하는 게 아닌, 단백질을 다시 분해하고 재생산해서 다음 미키를 만들어내고 선원들의 식사가 된다. 익스펜더블이 아닌 인물들도 자기도 모르게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다. 미키는 끊임없이 소각되고 다시 출력되며, 권력에 의해 멸시받는 노동자들의 응집된 몸이 된다.
꼭 프린터기에 들어가야만 복제 인간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마샬 부부는 특히 우수한 가임기 여자 요원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궁, 아니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샬 부부를 향한 카이의 날카로운 질문처럼 그들에게 여성은 다른 의미의 '인간' 프린터다. 인류 번식과 자신들의 부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출산할, 인간이지만 프린터의 역할을 해줄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퍼와 인간의 첫 대면에서 미키가 아닌 제니퍼가 죽었을 때 추악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카이와 제니퍼가 연인 사이인 줄도 모르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과 결합해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란 편견도 끼얹으며 말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일파 마샬은 이상하리만치 '소스'에 집착한다. 살아있는 베이비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바로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장면은 경악스럽다. 굳이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라고 권유하고, 배양육인지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미키에게 메인 디쉬가 아닌 소스 맛이 어떤지 묻는다. 이렇듯 소스는 일파가 강력하게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자 일개 노동자들과 자신의 차이다. 효율을 위해 정해진 칼로리 안에서 구역질 나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닌, 맛과 건강을 추구하고 음미하는 삶이 최고의 권력인 것이다. 미키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긴 하지만, 마샬 부부의 눈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비슷하다. 노동자 1, 노동자 2, 비위를 잘 맞추는 노동자, 말을 안 듣는 노동자. 선원들은 자신들을 미키와 달리 분명한 이름과 존엄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부의 시선에선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휴지 조각 같은 존재들일뿐이다. 생존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본의 힘이 있는 한 사이클러는 무엇보다 뜨겁고 부지런히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인간보다 나은 크리퍼
’Creepy’에서 유래된 이름인 ‘크리퍼‘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인간의 시선에선 낯선 외형이 두렵고 징그럽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니플하임에 마음대로 정착해 들쑤시고 다니는 인간이야 말로 외계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이름도 꽤 무례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크리퍼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생명체도 아니었고, 유일한 친구인 티모마저 외면한 위험에 빠진 미키를 구해준다. 미키는 크리퍼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나샤는 '크리퍼가 구해줬다'라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를 본 사람들이라면 크리퍼를 보자마자 ‘오무’가 떠올랐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 나라와 나라의 대립을 그린 영화로 주인공 ‘나우시카’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오무 무리들과 소통하는 장면은 미키가 통역기를 사용해 크리퍼에게 곧 가스가 살포될 테니 도망치라고 알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크리퍼가 본격적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어쩐지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장르 믹싱 기법이 눈에 띈다.
크리퍼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하며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 미키의 이름도 잡혀있는 베이비 크리퍼 ‘조코’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마마 크리퍼는 외형이 똑같은 두 베이비 크리퍼의 이름을 정확히 구분한다. 죽은 아이는 ‘로코’, 잡혀 있는 아이는 ‘조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명확하게 각자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외형도 전부 다르고 고유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치환되는 인간들이, 정작 동료가 위험에 빠진 순간 힘을 합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마 미키가 크리퍼였다면 마마 크리퍼는 단순히 그의 이름에 번호를 붙여 구분하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익스펜더블이라는 비윤리적인 직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더 앞서 삶의 터전인 행성을 그렇게 오염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넘나들며 과학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니 당연한 대가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받은 만큼만 되갚고, 선의를 보이는 이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러한 크리퍼의 자세에서 우리는 진작 갖추어야 할 인간성을 배운다.
나를 마주하기
영화는 미키 ‘17’과 미키 ‘18’이 대면하면서 본격적인 위기에 닥친다. 미키 18은 지금까지 누적된 미키의 정보를 다운로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키 17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이다. 뭐만 하면 죽여버린고 말하며 높은 폭력성을 띄고, 대책 없이 충동적이며, 엄청 밝힌다. 17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이려는 18과 몸싸움을 하면서 나샤에게 전해 들었던 지금까지의 미키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실감한다.
시간을 앞당겨 익스펜더블이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로 돌아가본다. 악용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주장하자마자 한 미친 과학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멀티플'을 만들어 노숙자를 죽인다. 둘도 아니고 셋이나 만들어 무고한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을 계기로, 익스펜더블은 공식적으로 지구 안에서 시행이 금지되며 멀티플은 중범죄가 된다.
다시 돌아와 미키 18을 죽이려고 나름 노력해 보는 미키 17의 눈을 보자. '또 다른 나'와 처음 마주한 그는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지고 죽을 거란 공포와 자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놀라움, 혼란 등에 빠져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몸이 반쯤 사이클러 속에 들어간다. 반면, 미키 18은 17에 대한 확실한 반감이 있다. 거울을 보듯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에 17은 더 혼란스럽다.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점이 있는 얼굴로 나란히 서있는 둘의 모습은 마치 자아 분열의 가시화된 것 같다. 얼음 동굴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듯 던진 티모의 질문은, 실험쥐처럼 수없이 이용당하는 미키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자기 방어와 누적된 폭력성을 발현시킬 트리거로 작용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미키 17이 처음으로 욕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18이라는 점이다. 처세술에 강하고 얍삽한 티모를 비꼬는 발언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무례함에 대응한 적 없던 미키 17은 나샤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화를 참지 못한다. 심지어 마샬 부부와의 만찬에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7이 씩씩 거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18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눌러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키는 죄책감에 모든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제외한다. 17의 이러한 위축된 태도는 18의 화를 키운다. 만찬에 초대해 놓고 실험 중인 배양육을 먹인 것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보다 카펫이 소중한 부부에게 뭐라고 하고 나왔냐는 질문에 17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저녁 식사 감사하다고... 하고 나왔어."
그런 수모를 겪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냐고 불같이 화를 낸 18은 당장이라도 케네스를 죽이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정말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눈다. 폭발하는 공격성이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표출될 때, 관객은 17을 향한 18의 반감이 애증이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미키 18은 17과 대치하던 중 티모를 보자마자 사이클러에 던져 죽이려 든다. 비록 분열된 두 사람이지만 미키가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시도한 순간이었다.
내가 너라서 알 수 있는 열등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트라우마. 빨간 버튼 따위로 사고가 날 만큼 자동차를 엉망으로 만든 회사 잘못이라는 18의 말은 평생 미키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는 무모하고 폭력적인 또라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뻔해도, 결국 우리를 구하는 건 사랑
서로 으르렁 거리는 17과 18 사이에서 혼자 신난 사람은 다름 아닌 연인 '나샤'다. 지금껏 다양한 미키를 봐온 나샤는 정반대 성격의 두 미키를 보며 굉장히 흥분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날 수 있냐는 미키 17의 질문에 그녀는 '반대 상황이라면 너도 나처럼 좋아할걸?'하고 가볍게 받아친다. 멀티플인걸 숨겨줄 테니 미키를 나누자는 카이의 말에는 불같이 화를 낸다. 16이든 17이든 18이든, 나샤에게 미키는 오로지 단 한 명이니까.
나샤는 엉뚱한 면이 있지만, 인정받은 소수 정예 엘리트 요원으로서 단단한 내면과 외면을 갖춘 인물이다. 미키는 다방면에서 월등한 그녀가 대체 왜 가장 낮은 계급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 각종 실험으로 죽어가는 미키를 두고 볼 수 없던 그녀는 직접 진공복을 입고 실험 캡슐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 희생하는 자를 돌본다.
베이비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몸이 묶인 채 이로 밧줄을 잡은 나샤는 미키에게 신호를 받고 'C3' 전략을 펼친다. C3는 아기를 안는 것 같은 자세로, 미키와 나샤의 섹스 체위 중 하나이다. 칼로리마저 철저히 계산하고 먹어야 하는 우주선 안에서 섹스는 가장 비효율적인 에너지 활동이다. 마샬 부부는 생존을 빌미로 니플하임에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섹스를 금지시키지만, 그들은 장난으로 체위를 그려가며 계속 몸을 겹친다. 나샤가 미키의 전략으로 베이비 크리퍼를 구해 눈밭을 달리는 장면은, 그들의 섹스가 결여된 존중과 냉소적 자본주의로 만들어진 노동과 권력보다 더 가치 있음을 증명한다.
케네스와 대치하던 18은 기어코 죽음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케네스는 그런 감정이야 말로 인간성의 증거라고 자극한다. 그러나 미키 18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나샤와 함께 서 있는 미키 17을 보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줄 사랑이야말로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본성이라는 것을. 뒤에 붙는 거지 같은 숫자 따위는 집어치우고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을 괴롭혔던 동그란 버튼을 꾹 누른다.
거대한 스케일의 SF 영화로 봉준호 감독은 사랑을 말한다. 너무 큰 서사와 화제성에 비해 작은 주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만 더 고민해 보자. 사랑이 조금 뻔하긴 해도, 작았던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는 것도, 너를 사랑하는 것도 식상한 말처럼 느껴져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무수한 호칭에 짓눌려 더미 속에 묻혀버린 내 이름을 건져 먼지를 툭툭 털어주고, 어쩐지 낯선 내 얼굴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힘이 남는다면 아끼는 이들의 이름도 찾아 숫자는 치워버리고 광이 나게 닦아보자. 미키와 나샤, 크리퍼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가치를 배웠으니까.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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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존재감의 선을 느끼는 방법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심성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학설입니다. 여러분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을 더 지지하시나요?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건한 성악설 지지자였습니다.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화를 거쳐 선함을 익힌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최근에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선은 만들어질 수 없지만, 악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의 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도, 이 주장들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는 선함과 악함이 모두 있다는 거죠. 어느 것이 먼저였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악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악에 비해 선은 너무나 사소하고 희미한 존재감을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이럴 때, 선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리하고 뾰족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 안에는 그들이 포착한 제각각의 선이 담겨 있거든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4년 12월 11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Summary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 '빌 펄롱'은 석탄을 팔며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지역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 펄롱'은 숨겨져 있던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팀 밀란츠
출연: 킬리언 머피, 아일린 윌시 외
선, 사소하지만 묵직한 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러 간 '빌'이 그곳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진실을 마주한 빌이 '방관'과 '행동' 사이에서 고뇌하는 과정이 채우고 있는데요. 영화 내내 깊은 고통, 불안과 불편 속에 있던 '빌'은 끝끝내 악에 저항하는 작은 행동 하나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바로 수녀원에 버려져 학대받던 소녀 '사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빌'이 '사라'를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는 아무런 스펙터클이 없습니다. '사라'가 갇힌 곳에 접근하기 위한 잠입도, 악의 축인 수녀원장과의 대립도 없어요. 오히려 수녀원장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행한 구원은 여느 때와 같이 수녀원의 석탄 창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쪼그리고 있는 소녀를 부축해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러닝타임의 90% 이상을 할애한 고뇌에 비하면 무척이나 짧고 허무하지요.
하지만 영화의 길이가 길지 않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약한 것은 아니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구성이 관객에게 선의 형태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거든요. 기나긴 숙고 끝에 내린 사소한 결단 하나, 그것이 바로 선이지요. (마침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98분, 동명의 원작 소설은 쪽수가 132쪽으로 짧습니다. 이마저도 하나의 메시지처럼 느껴지네요.) 그가 한 행동은 그저 손을 내미는 것뿐이었지만, 우리는 그 안의 묵직한 힘을 느낍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선의를 과장하여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을 더 강하게 전달합니다.
'빌'의 선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삶에 켜켜이 쌓인 또 다른 선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을 통해 외로움과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빌'의 과거를 조금씩 보여주는데요. 그의 어린 시절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그 속에도 분명한 선들이 있었습니다. 상주 고용인의 자식을 받아주고, 가난한 엄마 대신 갖고 싶었던 직소 퍼즐을 선물했던 집주인이 대표적이죠. '빌'이 아무리 고되어도 손에 묻은 재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아이들이 있는 식탁에 앉는 것, 부하 직원에게 노동 그 이상의 값을 지불하는 것, 그리고 '사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된 것은 유산처럼 남은 선의 영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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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빠진 '빌'이 아내 '아일린'에게 '사라'의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 아이들과 같은 아이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던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사에 담겨 있는 듯해요. 우리 인간은 모두 특별한 보편성을 가졌지요. 개개인은 모두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이나, 그 특별함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보편들도 있습니다. 같은 종으로서의 보편, 같은 정체성으로서의 보편, 같은 문화권에서 비롯되는 보편, 같은 이념과 가치관이 만드는 보편... 우리는 모두 다르면서도, 모두 같습니다. 그러니 선을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모두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희미하지만 강한 선의 마음이 이야기 밖에서도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One-Liner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용기 하나를 위한 9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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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투명한, 그래서 담백한 작별 일기
서른네 살의 존과 그의 네 살 난 아들 마이클. 엄마는 없다. 마이클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고향이 그립다며 러시아로 떠났다. 존은 창문 청소부다. 큰돈을 벌진 못하지만 단골도 있고, 그가 일을 할 때면 동네 주민들이 마이클을 돌봐준다. 요컨대, 엄마가 없다는 걸 빼면, 존과 마이클은 별다를 것 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다. 존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다. 존은 입양기관 직원과 함께 마이클을 입양 보낼 가족을 찾아다닌다. 기준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평범한 가족(normal family)이면 좋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마이클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가족이면 좋겠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마음에 드는 가족이 쉽게 나타날 리가 없다. 여러 가족이 마이클 입양 의사를 밝혔지만 존이 보기엔 다 어딘가 부족하다. 집이 과하게 깔끔하고 완벽하다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어 보인다거나, 이미 양육하는 아기가 너무 많다거나, 아이를 인형처럼 여기는 것 같다거나 등등. 존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입양기관 직원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많은 가족을 소개해줬음에도 존은 마이클을 어느 가족에 입양 보낼지 결정하지 못한다.
이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프지만, 존에게는 하나의 과제가 더 있다. 존은 마이클에게 죽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줘야 한다. 마이클이 죽음을 이해해야 왜 아빠와 헤어져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네 살짜리 아이에게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까? 아빠가 죽은 딱정벌레처럼 움직이지 않는 딱딱한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걸 마이클이 이해할 수 있을까?
〈노웨어 스페셜〉이 흥미로운 건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우선 존이 어떤 가족에게 마이클을 입양 보내는지를 살펴보자. 영화의 마지막, 존은 이혼한 싱글 여성을 마이클의 새 가족으로 최종 선택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임신을 했으나 임신 중지를 하지는 않았고, 출산 후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를 위탁가정에 보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그녀는 입양을 원했으나 남의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남편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이혼한 채 혼자 지내는 중이었다.
영화를 보며 존의 최종 선택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과 현 상황을 꾸밈없이 털어놓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거짓 포장은 없었다. 싱글 여성이 입양에 불리한 조건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이를 원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라고 담담히 고백했다.
존은 마이클을 ‘정상가족(normal family)’에 입양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런 존의 마음을 움직인 건 무엇이었을까? 마이클이 엄마의 사랑도 느껴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존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들여 마이클을 양육했지만, 싱글 대디는 규범 ‘바깥’의 존재이기에 늘 존의 마음 한편에 아픔을 남겼다. 존은 여자의 간절한 마음이 마이클에게도 있을지 모를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한 것 같다. 혼자이기에 더 진한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더불어 존은 그녀의 ‘부족함’을 보는 대신, 그녀의 마음을 보았다.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은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남기지만, 진심 어린 사랑은 그 수치심을 거슬러 결핍 있는 자들을 결속시켜주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픔 속에서 피어나는 다정한 강인함. 이것이 마이클을 원하는 여자의 얼굴, 표정, 말투, 몸짓, 태도에서 존이 읽어낸 것이다. 정상가족이라는 규범에 상처받아온 존이 또 다른 상처를 응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아픔을 승화하는 것이다.
영화가 빛나는 또 다른 지점은 존과 마이클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이다. 시놉시스만 들었을 때는 영화에 별 기대가 없었다. 오히려 인습적이고 뻔한 장면으로 눈물을 강요하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하지만 기우였다. 영화는 단 한 번도 감정을 강요하는 법 없이 사랑하는 아들과의 작별을 앞둔 아빠의 감정을, 어린아이가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처 입은 자들끼리의 만남과 치유를 덤덤히 그린다. 제목(Nowhere Special)부터 그러하듯, 거창한 의미나 심오한 해석의 여지를 숨겨두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보여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 투명하게, 그래서 담백하게 작별의 과정을 담는다. 지속하고 싶은 관계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노웨어 스페셜〉의 잔잔함이 큰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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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불쌍하지 않아?" 피해자는 보이는데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 이유
‘보여주기’와 ‘들여다보기’. 언뜻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쾌락을 좇는 이들.
그러나 감추고 싶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려는 순간 쾌락은 공포와 분노로 분한다.
당연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 여자, 자신의 정체는 숨긴 채 남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던 남자.
그들의 이해관계는 극 중에서 필연적으로 상충하며 갈등의 끝을 달린다.
결국 매한가지인 것은 둘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의 비밀은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것. 저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쾌락을 좇으면서도, 정작 상대방의 쾌락을 목격하며 정신이 나갔다며 고개를 저어댄다. 한국판 <나를 찾아줘>를 연상케 하는 범죄 스릴러 <그녀가 죽었다>는 어느 쪽에도 공감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두 인물상을 통해 익숙한 맛으로도 관객의 몰입을 배가시킨다.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상대방이 ‘미쳤다’는 것. 그들은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급급하다. 누구도 자신이 끼친 피해에는 반성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내가 피해자요, 나는 불행하노라 외쳐대며 서로를 삿대질한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들. 그렇게 가해자로서 ‘나’의 죄의식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피해를 호소하는 억울한 ‘나’뿐이다.
그녀가 죽었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그녀의 죽음’으로 상정되는 피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선악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 실체는 사라지고 없다. 그들이 아무리 피해를 호소해도 관객의 뇌리에 남는 것은 그들의 가해다.
시체는 있었는가? 아니, 온데간데없다.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명백한 가해자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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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자 우리
이 글은 영화 [브로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요즘 극장가의 상황이다.
판데믹 이후로 첫 천만 영화가 탄생했음은 물론. 기대작들이 줄줄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날이 드디어 왔다.
그 선봉장에는 칸 영화제에서 당당하게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를 앞세운 영화 [브로커]가 있다.
이미 송강호와 영화 [의형제]에서 합을 맞춘 경험이 있는 강동원과의 케미는 물론,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지은이 미혼모로 열연하는 이번 영화가 기다려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아 브로커들과 친모. 범죄 현장을 덮치려는 경찰들의 이상한 조합을 감독만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잔잔하고 자세히 속을 까뒤집어 보여주지는 않지만. 충분히 생각할 만하고 그 여운은 결국 실낱같은 안정으로 마음속에 다가온다.
아이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필요한 온 마을;금쪽이들이 치유받는 법
사진출처:다음 영화
한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그만큼 아이 하나가 온전히 커 어른이 되기 까지는 많은 사람의 영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어른이 다 “좋은” 사람이면 참 좋겠지만. 우성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어른 마을은 조금 독특하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금쪽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런데다 금쪽이 시절 버릇 하나 버리지 못하고 나이만 먹어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어딘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성의 엄마인 소영(이지은)은 물론 브로커인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확실하게 비뚤어져있다. 게다가 자신의 상처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만 보아도 못난 발톱을 한껏 세워 할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일 인분의 사람 구실도 못하는 핏덩어리에 불과한 우성에 의해. 금쪽이들은 스스로의 존재와 쓸모를 인정받는 순간을 맞이한다.
금쪽이들에게 이 순간은 평생을 기다려 온 순간임과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다가온 인정의 순간을 거부하는 금쪽이는 영화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금쪽이에서 조금은 어른에 가까워진 세 생명체들은 어디서부터 이 "판매 극"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누구 하나 입 밖으로 확신에 찬 채 말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보호받지 못했던 만큼의 시간을 우성이의 삶에서는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만 같다.
아이 하나를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의 뜻은 어쩌면 어른들에게도 아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상현의 세탁소;해소와 진심의 순간들.
사진출처:다음 영화
금쪽이 패밀리(?)의 대장 격인(??) 상현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탁소에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빨래가 얼마나 더 깨끗하게 될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담아 상현에게 말을 걸고. 상현은 그런 염려와 우려마저도 말끔히 씻어내린 빨래를 그들에게 건넨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빼앗아간 세상의 모든 티와 더러움은 고스란히 상현에게 쌓이고. 상현은 자신이 더러워질수록 타인의 빨래가 더 빛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게 자신의 훈장인 것처럼. 상현은 조용히 타인의 구겨진 삶의 일부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자신의 이중적인 삶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차장에서 온통 젖어 엉망이 되어버린 상현의 표정이 후련해지는 걸 보고 있으면. 사실 상현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신도 한 번쯤은 묵은 때를 벗겨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두 번 다시 더러워지지 않는 빨래도 없고. 자신의 마음도 상처받은 채 상현에게서 다시 머물겠지만. 또 한 번 깨끗해지면 그만이라고 상현이 생각할 수 있기를 빈다.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아예 없지는 않은 거라고. 마음도 빨래도 뽀송뽀송하게 마를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행복하자 우리;아프지 말고. 몸도 마음도.
사진 출처:다음 영화
멸종 위기의 토종여우를 밀반입해 번식시킨 개 장수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 자부하는 서울대에서도 실패한 프로젝트를 학위 하나 없는 한낱 개 장수가 성공 시킨 것이다. (참고 1)
그 비결을 물었을 때 개 장수가 내어 놓은 대답은 더 가관(?) 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돈이라 생각하고 무한한 관심을 쏟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개 장수도, 영화에서의 브로커도. 결국은 자수를 한다.
그 목적이 어쨌건 자신들이 품고 베푼 애정과 관심은 결국 누군가를 최종적이면서도 올바른 행복으로 이끄는 힘이었던 셈이고. 스스로가 짊어지고 있던 죄도 내려놓고 평안함에 이르게 한 셈이다. 그래서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잡히는 순간에도 동수의 표정이 홀가분하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들의 찬란한 행복을 보여주며 끝을 맺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기다릴 때처럼, 행복을 만나기 몇 시간 전부터 부푼 기대를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모든 인물의 행복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엔딩의 여운 앞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마치면서
사진 왜 이래.
영화 브로커에 대한 홍보이건, 친분 때문이건 상관없이. 아이유의 유튜브 채널에 나와 스스로에 대한 칭찬을 해달라는 말에 눈시울을 벌겋게 물들이는 송강호 배우를 보고 있자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업종에서 근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일하면서. 어찌 고난이 없고 회의가 없었을 것인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하나하나 걷어가며 묵묵히 길을 걸을 때 그가 흩어 뿌린 확신과 물음의 결과물을 나는 보고 자랐고. 그의 영화는 내게 믿음이란 각인으로 다가왔기에. 배우 송강호가 보이는 그런 모습은 참으로 귀함과 동시에 마음이 찡해지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로 인해 상을 받았건 말건 상관없이.
그저 배우 송강호가 여태 얻었을 고단한 마음의 짐들도, 마치 세차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끔히 씻겨내려가고 뽀송뽀송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요새 구찌보다 구씨가 대세라고 하지만. 내게는 아직은(?) 구씨보다 호 씨가 최고야. 늘 짜릿해.
참고 1
사진 출처:구글 이슈야 놀자
실제로 개 장수가 자수(?) 한 이유도 얘들이 너무 예민하고 식비도 많이 드는데 버리자니 토종여우이고, 돌보다 보니 애정도 생겼기 때문이라 했음. 그래서 아예 양육 노하우를 연구용으로 넘기고 죗값이랑 퉁치기로 함. 사실 노하우라고 해서 엄청난 게 아니었음. 노란 박스에 애들을 키우니까 애들이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었음. 원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노하우를 찾아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 보면, 역시 진심인 놈 이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도 돈에 대한 진심은.어우.
[이 글의 TMI]
1. 복숭아 비싸.
2. 그냥 조용히 망고를 사 본다.
3. 요새 왜 이렇게 리뷰 쓰기가 힘든지 생각해 보니
4. 인풋이 너무 없음.
5. 연차를 드디어 쓸 순간이 와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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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했던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매일 같은 내용을 쓰는 건 재미가 없다. 나도 싫증 나고, 내가 쓴 것들을 언젠가 읽는 분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요즘 드는 생각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은 이에 대한 내용을 쓰지 않았지만, 내가 한동안 썼던 문장이 있다. '도망쳐서 온 곳에 낙원이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도망치지 않아도 매한가지인 것 같다. 뭔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순간 불행으로 향하는 지름길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걸 우리가 무시할 수 있어? 원래 목표를 이루는 과정 속에 있어야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이 과정을 끝마치고 뭘 얻었다고 하면 항상 그에 맞는 '잃은 것'이 생각나곤 한다. 이렇게 뭘 얻어도 항상 잃는 게 있으니 불행은 과연 인간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다 똑같은 말을 한다. 그렇게 다들 원하는 순간을 살고 있으면서 '내가 겪어온 게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결혼이나 취업 같은 과제가 남아있긴 한 나는 사실 이런 일들에 지레 겁을 먹었다. 좋은 직업 가지면 행복할까? 사실 어차피 그게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고 위에 썼다. 이 뜻은 나를 위한 정신승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내가 재밌는 일을 더 할 수 있게 살고 싶어서다. 만약 어디 갈 곳 없는 백수가 되면 글을 쓸 일이 있을까? 아마 취업준비를 하느라 바쁘겠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내 이야기를 써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재미있다. 내가 쓴 것과 세상과 대화하면 재밌을 것이라는 바람이 매일 같은 요일과 시간에, 또 같은 장소에 내가 영화를 보고 여기 앉아서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된 것이다. 난 내가 겪어온 시간이 잠깐 달콤한 꿈이 아니길 바라니까 쓰는 게 습관이 됐고 공부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 산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큰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온갖 우울하고 어두운 핑계를 죄다 갖다 붙였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유들이 간단해진다. 참 당연한 것을 애써 부정해왔던 내가 놀라워진다. 이 '당연한 것'에 대해 다룬 영화가 있다. 조금 하던 이야기만 하는 영화 같지만 이 작품은 울림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미국의 한 농인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주인공 루비는 미국에 사는 10대 여고생이다. 루비는 다른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데 그건 겉모습만 봐서 그렇다. 루비 가족에겐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작은 딸 루비를 제외하고 전부 다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수화로 대화하는 루비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부 일을 하는 루비의 부모님과 친오빠. 노래를 좋아하는 루비지만 일상이 바쁘니 마음에 여유가 있을 턱이 없다. 매일 가는 학교도 피곤함에 쩔어 있는 루비. 학교에선 생선 냄새가 난다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부지기수다. 루비는 퍽퍽한 하루하루에 재미를 찾고자 합창부에 들어간다. 좋아하던 노래를 맘껏 부르고 싶어서다. 그렇게 찾아온 오디션 시간. 합창부 선생님 미스터 V는 루비에게 노래를 주문한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라니 당황한 루비. 루비는 갑자기 짐을 싸서 후다닥 도망가기도 하지만 결국 합창부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루비의 합창부 입성기를 다루면서 재밌는 일에 빠지는 10대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을 조명하며 10대 소녀 루비의 성장기를 다루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이걸 보여주면서 하이틴 영화 향도 살짝 첨가했다. 성에 대해 눈이 뜨이는 시기 아닌가? 영화 안에 소소한 유머로 이것들이 들어가 있다. 또 <플립>이나 <노트북>에서 볼 수 있었던 풋풋한 사랑이야기도 영화 안에 있다. 루비는 합창의 상대 커플 역이었던 마일즈와 다투기거나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면서 성장해간다. 영화는 이런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10대 소녀의 성장기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에 적지 않았던 한 가지 키워드가 있다. 뭐 예상하기 어렵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런 정보 없이 봐야 울림이 클 거라고 생각하니 굳이 적진 않겠다.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국밥 같은 영화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민했다. '짜장면 같은 영화'와 '국밥 같은 영화' 사이에서 뭘 쓸지 생각했다. 결국 후자를 골랐다. 이 단어를 설정한 이유는 국밥이라는 것의 속성을 예로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밥이라고 해서 말아먹을 정도로 구리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국밥을 아예 안 먹을 수는 없겠지? 술 먹고 먹는 해장국도 국밥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을 거고. 순대국밥도 국밥의 종류 중 하나니 국밥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무슨 말이냐면. 국밥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는 어떤 맛인지 다들 안다. 지금 당장 내 머리에 사골이 생각난다. 또 콩나물과 육개장도 생각나는 것 같다. 국밥은 이렇게 예로 들어 설명하기 굉장히 쉽다. 이 영화도 이와 유사점이 있다. 난 30분만 봐도 러닝타임의 줄거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또 정말 솔직히 거기에서 벗어난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근데 영화는 그렇게 남들이 걸었던 길만 걸었는데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 영화가 국밥 같지 않았으면, 그러니까 쉽지 않았으면 이런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한 부분을 공략해 효과를 주는 전형성을 타지 않았더라면 영화의 장점이 깡그리 죽었을 것 같다. 영화는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 노래의 가사들이다. 난 노래 가사가 너무 좋았다. 음악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뭐야. 당연히 음악 아니겠어? 근데 음악이 다른 노래들이랑 비슷하면 이 영화는 국밥의 야채 정도 되는 존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영화는 80년대의 음악을 리메이크해서 그런지 따뜻한 가사를 썼다. 후반부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제 난 구름을 위와 아래 양쪽에서 보지만 / 어쨌든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것은 구름의 환영이라 / 구름이 무엇인지는 정말로 전혀 모르겠어요'가 가사의 내용이다. 내가 이 가사를 좋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나라는 사람에서 찾을 수 있다. 성장과 깨달음이 정말 삶을 살아가는데 무조건 도움만 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 외로 그렇게 친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 내가 믿던 것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의 기분은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나에게 삶의 고단함을 터놓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 솔직히 이제는 잘 못할 것 같다. 나 역시 이 순간을 넘어가면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음악으로 사용됐던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내가 걷고 있는 이 삶에 정말 끝이란 있을까?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한 일들을 자주 맞이할 수 있다. 이 주인공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소재를 통해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요?'라는 작품의 핵심 키워드와 노래의 가사가 깊게 맞아떨어져 좋은 시너지를 낸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청각장애인에 대한 성찰이 보인다. 이 부분을 깊게 쓰면 아마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하게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살짝만 써보자면, '청각장애인인데 어떻게 루비의 음악생활을 지지해?'라는 질문에 굉장히 진중한 답변을 내놓았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고 퉁 치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 번째. 하이틴 로맨스 코드다. 이 분야 전문가 <플립>같이 영화 내에 달달한 분위기가 흐르지는 않는다. 사실 로맨스 코드는 부수적인 쪽에 가깝다. -핵심은 1번에서 굳이 쓰지 않은 '그것'과 루비의 꿈- 그럼에도 하이틴 로맨스 향이 나는 의도도 분명한 것 같다. 영화를 너무 진중한 쪽으로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소도구가 된다. 또한 사실적으로 10대의 삶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루비의 중요한 것을 산만하게 묘사하지 않아 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도와준다.
4.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나는 감독 션 헤이더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2번에서 쓴 '청각장애인에 대한 성찰'의 연장선상으로 쓸 수 있는데, 감독은 루비 가족을 실제 청각장애인 배우들로 섭외했다. 캐스팅으로 극의 사실성을 더한 것이다. 수화를 통한 감정연기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또 주인공 에밀리아 존스와 상대역 마일즈 역을 맡은 배우 노래 의외로 잘한다. 특히 에밀리아 존스는 거의 가수 백예린의 음색이랑 빼닮아서 놀랐다. 이 외에도 루비의 멘토가 되는 미스터 V 역의 배우도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또 그만큼 따뜻한 멘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5. 무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수상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솔직히, 내 답은 아니오다. 그 정돈 아니다. 정말 좋은 작품인 건 맞다. 그런데 <그린 나이트>나 <프렌치 디스패치>만큼이나 웅장 해지는 작품이냐? 그런 아니다. <그린 나이트>같이 영화 내적으로 비트는 테크니컬 한 모습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영화의 특장점이 쾅쾅 드러나는 작품도 아니다. 그래서 난 솔직히 작품상 못 받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파워 오브 도그>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받지 않을까. 근데 뭐 못 받을 것 같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다. 또한 <파워 오브 도그>에서의 인물 내면 비틀기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울림만큼의 무언가가 없다고 해서 예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화 역시 충분히 매력이 있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6. 보기 어려운 영화인가요?
아니다. 굉장히 쉬운 작품이라 무난하게 볼 수 있다. 아.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난 아이패드와 에어팟으로 봤는데, 영화관 음향 빵빵한 곳에서 보면 사운드적으로 귀가 풍부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으로는 네이버 시리즈 온에서 2500원 내고 볼 수 있다.
7. 왜,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최근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다. <더 배트맨>, <소년심판>은 영화 줄거리에 살인이 묘사된다. 또 <나이트메어 앨리>의 엔딩은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내가 이런 범죄/스릴러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한 편으로는 잔잔한 감동을 원했던 것 같다. <소울>과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감동이 내 머릿속에 쉽게 잊히지 않았거든. 영화는 이렇게 큰 스케일과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다. 하이라이트의 노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힘낼 거라는 게 아니라, 이런 걸 보면서 힘을 내라는 뜻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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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은 3월 넷째 주 주말 동안의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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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3월 넷째 주 주말에는 총 114만여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는데요, 한 주간 총 162만 6천 명의 관객이 다녀가 지난주(163만 9천 명)과 거의 유사한 관객 수를 기록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3주 연속 굳건히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내는 모습을 보였으며 개그맨 박성광이 감독한 장편영화 <웅남이>가 주말 829개 스크린에서 11만 7592명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습니다. <웅남이>가 선전함에 따라 지난주 2위와 3위를 차지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소울메이트>가 한 계단씩 떨어져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했고, 지난 수요일 새롭게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파벨만스>는 주말 동안 2만2469명의 관객을 유치하며 5위에 머물렀습니다.
1.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 후 3주 연속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3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번 주말 75만 7473명의 관객을 동원해 올해 주말 최다 관객수 기록을 세롭게 썼는데요, 사실상 2위(71만 2403명)과 3위(69만 4239명) 역시 <스즈메의 문단속>이 차지하고 있어 올해 들어 최고의 흥행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봉 첫 주주말에 69만명, 2주차 주말에 71만명, 그리고 이번 3주차 주말에 75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아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점차 관객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한동안은 <스즈메의 문단속> 열풍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감독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의 누적 관객수인 371만여명의 기록을 갱신하고 현재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 중 누적 관객수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제칠 수도 있다는 예측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편, 누적 관객 수 300만을 돌파할 경우 한번 더 내한하겠다고 말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4월 중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2. <웅남이>(NEW)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박성광의 장편 영화 데뷔작 <웅남이>는 주말 관객 수 11만 7592명, 누적 관객 수 17만 2372명으로 개봉 주 주말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습니다. <웅남이>의 손익분기점은 약 100만명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3만 명의 관객 수 차이로 간신히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긴 했으나 20만명도 넘기지 못한 관객 수로 사실상 좋은 성적으로 간주하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3. <더 퍼스트 슬램덩크>(⬇︎1)
지난 1월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후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스오피스 순위권에 머물며 꾸준히 누적 관객 수를 늘려가고 있는데요, 지난 주말에도 8만 9560명의 관객을 끌어모아 누적 관객 수 427만 9776명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같이 식지 않는 인기에 힘입어 오는 4월 2일에는 4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해 한일 성우들의 무대인사와 GV가 진행될 예정이며, 4월 5일에는 IMAX 개봉과 더불어 엔딩 주제가 '제ZERO감'을 부른 밴드 10-FEET의 내한 라이브 이벤트와 무대인사까지 예정되어 있어 관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4. <소울메이트>(⬇︎1)
유명한 중국 영화 리메이크에 김다미, 전소니 배우 등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았던 <소울메이트>는 개봉 2주 차에 주말 관객 수 3만 9519명, 누적 관객 수 18만 7365명에 그치며 박스오피스 순위 4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5. <파벨만스>(NEW)
이번 주말 박스오피스 5위를 차지한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 <파벨만스>입니다. 수요일에 개봉한 <파벨만스>는 주말 동안 2만2469명, 누적 관객 3만5345명을 기록했는데요, 영화를 연출한 스필버그 감독은 배급사 CJ ENM을 통해 "한국의 모든 팬 여러분께, 제 영화 인생에서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벨만스’에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라는 말이 적힌 친필 편지를 전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어 “제 가족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들 모두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정말 뜻깊은 일”이라고 덧붙이며 영화를 보러 와준 관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4월 12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존 윅 4>가 개봉 첫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주말 매출액은 7352만 5천 달러로 시리즈 사상 최고의 오프닝 기록이라고 하는데요, 특히 1편에 비해서 5배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역시 96%를 기록해 시리즈 사상 최고의 신선도를 기록 중이라고 하며 평단과 관객들의 만장일치 호평으로 이후의 흥행 여부 역시 긍정적으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이어 지난 3월 3일 개봉한 록키 시리즈의 스핀오프 영화 <크리드3>가 주말 매출액 10545만 4597달러를 기록하며 2위에 올랐고 국내에서도 냉담한 반응을 받고 있는 <샤잠! 신들의 분노>는 주말 매출액 9700만 달러에 그치며 3위로 떨어졌으며 바로 뒤를 이어 4위와 5위는 공포영화 <스크림6>와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SF 액션 스릴러영화 <65>가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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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3월 넷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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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메뉴> 티저 예고편
지상 최고의 코스요리 완벽할수록 위험하다! [더 메뉴] 티저 예고편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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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에놀라 홈즈 2> 공식 예고편
더 스케일이 커진 홈즈가 온다. 《에놀라 홈즈 2》,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첫 번째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기쁨에 찬 에놀라 홈즈(밀리 바비 브라운). 유명 인사인 오빠 셜록(헨리 카빌)의 발자취를 따라 탐정 사무소를 연다. 그런데 여성 탐정으로 사건을 따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냉혹한 어른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무소의 문을 닫으려던 찰나, 돈 한 푼 없는 성냥 공장 소녀가 에놀라에게 첫 정식 사건을 맡긴다. 바로 사라진 자매를 찾아달라는 것. 하지만 사건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것으로 드러난다. 런던의 부패한 공장과 화려한 음악 공연장, 초상류층의 사교계, 그리고 셜록이 사는 베이커 스트리트 221B까지, 위험천만한 새로운 세상에 던져진 에놀라. 치명적인 음모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에놀라는 친구들, 그리고 셜록의 도움으로 미스터리를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 게임은 다시 시작됐다! 해리 브래드비어와 잭 손이 원안을 작성하고 해리 브래드비어가 연출을, 잭 손이 각본을 맡은 《에놀라 홈즈 2》. 새로운 아군과 적군이 등장할 이번 작품에는 밀리 바비 브라운, 헨리 카빌, 데이비드 슐리스, 루이 파트리지, 수전 워코마, 아딜 액터, 샤론 던컨 브루스터, 헬레나 본햄 카터가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