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우유2025-03-21 16:06:19
어설프면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도전을 응원하며 위로 받기를
영화 <스윙걸즈> 리뷰
‘청춘’과 어울리는 계절로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며 왠지 모르게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하는 여름이 먼저 떠오른다. 비슷한 결의 청춘 영화가 여럿 존재하는데, 아예 제목에 ‘여름’이 삽입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예를 들자면, <썸머 필름을 타고!>라는 또 다른 청춘 영화가 있다) 필자에게 여름은, 봄에 피어나기 시작한 생명이 뜨거운 햇볕과 가끔 불어오기에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을 번갈아 맞으며,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성장과 고통을 맞이하는 단계이다. 봄처럼 마냥 따듯하지 않고 겨울처럼 그저 매섭게 춥지 않은 그런 계절. <스윙걸즈>는 이러한 계절에 ‘동아리 활동’, ‘친구’, ‘사랑’, ‘우정’이라는 살을 덧붙여서, 관객에게 그들도 겪었을 학창 시절의 기억을 ‘재즈’로 풀어낸다. 풋풋함,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부담감 같은 것들을 말이다.
지루하기만 한 수학 보충수업 시간.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와 따분한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니..’라고 생각하는 주인공 ‘토모코’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버스를 타고 야구부 시합을 응원하러 가는 학생들이 보인다. 흥겹게 멜로디를 중얼거리며 버스에 탑승하는 아이들. 버스가 출발하고, 뒤늦게 그들의 도시락을 배달하는 차량이 도착한다. 토모코는 그 도시락에서 보충 수업반 아이들과 수업을 빼고 놀러 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차 없이 직접 배달한 도시락은 상해버렸고 이를 먹은 밴드부 아이들은 식중독에 걸린다.
그렇게 자의 10%, 타의 90%로 보충 수업 대신 밴드부가 되기로 한 아이들. 관악기 연주에 필수적인 폐활량을 기르기 위해서 마을을 뛰어다니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창문에서 휴지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연습도 한다.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악기에서 소리가 나게끔 할 수 있는 정도가 되고, 이제 악기를 구매해야 하는 단계가 찾아온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마트에서 알바하고 본인의 물건을 팔기도 하며 중고로 악기를 장만한다. 이마저도 성한 곳이 없는 중고 악기를 구매한 탓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악기를 수리하기도 한다. 자,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무대이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다리 밑, 강변, 노래방, 동네 마트 앞 등등. 엉성한 무대지만, 그들의 실력은 점점 갖춰져 간다.
<스윙걸즈>가 편안한 영화인 이유 중 하나로, 아이들을 방해하는 어른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극중 어른들은 겉으로 무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을 ‘존중하는 어른’으로 등장한다. 아이들이 그랬듯 온전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재즈’를 시작하지 않은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악기를 배웠다) 또 한 명, 그들이 그렇게 빼고 싶던 보충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그들의 조력자가 되어준다. 아직은 입문자이지만, 마음만큼은 프로 재즈 연주자인 선생님은 ‘재즈는 실력이 아니라 스윙이 필요하다’는 마인드를 심어준다. 그들이 함께 ‘재즈’를 연주할 때만큼은 사제지간이 아닌 하나의 밴드가 된다.
다리 위에서 떨어진 생쥐에 놀라 안 되던 고음 부분을 연주하거나, 몰래 송이버섯을 따서 악기 살 돈을 구하려다가 멧돼지를 잡아 포상금을 받거나, 시식 코너에서 굽던 만두에 와인을 부어 스프링클러를 터트려 해고된 마트 앞에서 연주하게 되거나, 폭설로 다른 밴드팀이 참가를 포기해서 음악제 참가권을 얻거나…. 이렇게 어이없는 순간의 연속. 여기서 비롯되는 터무니없는 상황. 아이들은 그들의 순수하고 귀여운 방식으로 헤쳐 나가며 어엿한 빅 밴드로 성장해 간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악기를 다룰 줄 모르던 아이들이 어영부영 서툴게 밴드를 시작했어도, 결국 성공적으로 재즈 공연을 올린 것처럼! 아이들의 성장기는 ‘당신의 청춘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때’라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앞서 이 영화는 청춘을 담은 여름을 보여준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남들이 보기에는 보충 수업을 빼먹기 위한 수작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인생을 바쳐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청춘과 열정을 둘 다 갖추고 있다니! 정말 부러울 만한 인생이다) 사람들이 청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때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희망과 열정을 가질 수 있던 시절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럭저럭 평탄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무언가 부재한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면 <스윙걸즈>를 추천하고 싶다. <스윙걸즈>가 그 빈틈에 ‘스윙’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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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난해함에 가려진 현대적 고전의 진면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J.R.R. 톨킨이 현대어로 정리한 영국의 두운시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비록 아서 왕 전설에 속하지만 원작 자체가 아서와 엑스칼리버,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사랑, 성배 찾기와 같은 굵직한 에피소드에 비해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린 나이트>는 난해하다. 일반적인 판타지 작품에서 기대할 법한 화려한 액션은 없다. 대사도 많이 등장하지 않으며, 간간히 나오는 대사들마저 함축적이거나 중의적인 경우가 많다.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목 베기 게임, 여인의 유혹, 획득물 교환 게임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미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일반적인 화법을 따르지 않는 <그린 나이트>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마치 조개껍데기를 벗겨낼 때 숨어 있는 진주를 발견할 수 있듯이, 인상적인 영상미를 통해 혼란스러움과 불친절함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로 받아들일 때 <그린 나이트>의 감상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느낌은 진정한 기사로 거듭나는 가웨인의 여정에 관객들이 스스로를 대입시키는 효과적인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아서 왕(숀 해리스)'의 조카라는 이유로 원탁에 앉을 수 있었던 '가웨인(데브 파텔)'은 원탁의 다른 기사들처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용담을 가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 앞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나타난 '녹색 기사(랄프 이네슨)'는 자신의 목을 내리치고, 그 대가로 1년 뒤 녹색 예배당으로 가서 녹색 기사에게 똑같이 목을 내리치는 도끼날을 맞는 게임을 제안한다. 가웨인은 이 '목 베기 게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진정한 기사로 거듭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녹색 기사의 도끼로 그의 목을 내리치고 정확히 1년이 지난 후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여정에 나선다.
모험 중에 가웨인은 도적, 여인, '성주(조엘 에저튼)', 여우 등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기사도의 여러 덕목을 착실히 배워나간다. 이때 영화는 그가 관대함, 신의, 순결, 예의범절, 그리고 연민 등을 배우는 것보다 그 덕목 앞에서 자신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삶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한 채 갈등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원탁의 기사이자 영웅인 가웨인 이전에 자아를 사로잡은 혼란 때문에 괴로워하며 도망치려 하는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에셀'과 '귀부인' 역을 동시에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웨인의 연인인 에셀은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그로 하여금 가책을 느끼게 하고, 그를 유혹하는 귀부인은 그가 기사가 되기에 인간적 약점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한 명은 과연 그가 기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다른 한 명은 그가 기사가 될 만한 재목인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그렇게 그녀들과의 만남과 이별은 가웨인이 녹색 기사와 재회하기 위한 여정을 지속할 것인지, 즉 기사로 거듭날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된다. 이에 가웨인은 연인과의 사랑을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유혹에 넘어갈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고귀하고 진실한 인간이자 기사로 성장한다.
이처럼 기사도를 배우고 기사로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린 나이트>는 마치 기독교적 윤리로 가득한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도 게르만 족이 잉글랜드 섬을 침략하자 브리톤 족이 이에 맞서 싸웠던 아서 왕 전설의 역사적 배경이 가웨인의 여정에 투영된 기독교적 흔적 영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당장 영화의 첫 대사부터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어요"이고, 이 대사는 가웨인의 방탕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영화가 가웨인의 속죄와 회개, 그리고 참회를 다루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서 왕의 왕관은 성화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성인들 뒤를 비추는 후광을 본뜨고 있으며, 이는 캐멀롯 왕궁의 상징인 원탁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녹색 기사가 기독교의 상징인 캐멀롯 왕궁에 난데없이 나타나 게임을 제안하는 모습은 이교도 대 기독교도의 대결 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녹색 예배당에서 가웨인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십자가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는 그의 모습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와 사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명백히 들리고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모험을 평면적이고 교훈적인 성장담으로 결론짓지 않는다. 영화는 상징이나 이미지에서 두드러지는 기독교적 배경에 비하면 자연과 이교도, 마법과 켈트족의 신화에 힘을 주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그들의 존재감을 노출한다. 가웨인이 녹색 기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결 짓지 않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가웨인의 어머니인 '모건 르 페이(사리타 초우드리)'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지만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가웨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적떼와 붉은여우부터 거인과 눈을 가리고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노파에 이르기까지 가웨인을 유혹하거나, 낙담시키거나, 알 수 없는 조언을 건네는 이들의 정체도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린 나이트>는 신의 말씀에 충실하고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아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찾는 입체적인 작품으로 거듭난다. 가웨인이 마주한 인물들이 그를 유혹하거나 방랑으로 이끈다 해도 영화는 그들의 존재가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 하에서 가웨인이 스스로 억압하던 정열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진정한 자아를 찾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목 베기 게임, 여인의 유혹, 획득물 교환 게임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과 갈망, 그리고 기사도의 덕목 중 갖춘 것과 갖추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 또한 부족함을 채우고 진실해지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깨닫는다. 따라서 가웨인의 각성은 단지 그리스도교라는 기존의 사회적 전통에 충실한 기사로의 성장보다는,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과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마침내 중심을 찾아낸 한 젊은이의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린 나이트>가 고대의 전설을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도 발돋움하는 이유다. "이야기의 뿌리인 자신의 자아를 찾아 나가는 한 청년과 관련된 기사도의 개념은 지금 시대에도 시의적절하다"는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기존의 삶의 방식을 따르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은 젊은 세대가 가웨인에게 이입하여 스스로 기사가 되어가는, 즉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확립하는 과정을 경험할 장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가웨인에게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것에서 사회적인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곧 완벽하지 않아도 완벽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투영할 뿐 그를 완전무결한 기독교적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때 <그린 나이트>는 이 모든 이야기를 금색, 녹색, 적색, 회색이라는 색 안에 담아낸다. 가웨인이 입은 망토는 아서 왕의 왕관을 닮은 금색을 하고 있고, 이 망토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웨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연을 뒤덮은 녹색의 이미지로부터 그를 지켜준다. 가웨인 대 녹색 기사, 카멜롯 대 녹색 예배당, 더 나아가 기독교 대 이교도의 대립이 두 색책의 대비에 담겨 있는 것이다. 적색은 숱한 피의 향연을 장식하면서 두 세계를 넘나드는 가웨인의 모험이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함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회색은 거인들을 만나는 대목처럼 매혹적이고 장엄하지만 동시에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모험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회색풍의 색감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녹색 기사의 도끼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가웨인의 혼란스럽고 난해한 내면을 외면화하며, 마찬가지 입장인 관객들을 가웨인의 내면으로 자연스레 초대하기도 한다.
따라서 다채로운 영상미의 도움을 받아 난해함과 혼란이라는 껍데기를 열기만 한다면, <그린 나이트>가 품은 기독교적인 성장담, 기독교 세계에 가려졌던 켈트 족의 영웅과 마법을 조명하는 판타지, 더 나아가 가장 현대적인 고전이라는 다양한 진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상이한 세계가 만날 때의 혼란, 충격, 경탄을 장중하게 담아낸 서사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그린 나이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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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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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주차 개봉작,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이번 주 개봉, 공개 예정인 작품들을 소개해드릴 예정인데요.
액션 맛집 <존윅 4>부터, 문소리X김희애 주연의 넷플릭스 <퀸메이커>까지,
장르도, 국적도 다양한 이번주 개봉작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존 윅 4
John Wick : Chapter 4
ⓒ 네이버 영화
개요: 액션 | 미국 | 169분
감독: 채드 스타헬스키
출연: 키아누 리브스, 견자단, 빌 스카스가드
개봉: 2023.04.12.
배급: (주)레드아이스 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존 윅'은 '최고 회의'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아낸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희망을 보지만, NEW 빌런 '그라몽 후작'과 전 세계의 최강 연합은 '존 윅'의 오랜 친구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위기에 놓인 '존 윅'은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데..
CINE PICK!
4년만에 돌아온 액션 맛집 <존 윅 4>는 미국 영화 전문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6%를 기록하며 해외에서 시리즈 역대 최고의 영화라는 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존 윅 4>에서는 칼과 활 그리고 쌍절곤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액션을 선보일 예정인데요. 키아누 리브스는 58세의 나이에 12주 간의 훈련을 커쳐 스턴트 없는 다양한 액션을 보여줄 것이라 예고했습니다.
거울 속 외딴 성
Lonely Castle in the Mirror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16분
감독: 하라 케이이치
출연: 토우마 아미, 아시다 마나, 키타무라 타쿠미
개봉: 2023.04.12.
배급: 워터홀컴퍼니(주)
시놉시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코코로’. 어느 날, 방 안의 거울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고, ‘코코로’는 홀린 듯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거울 속 세상은 바다 위에 떠있는 신비로운 성이었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여섯 명의 친구들과 늑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소녀 ‘늑대님’을 만나게 된다. “성에 숨겨진 열쇠를 찾으면,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지” 열쇠를 찾으며 조금씩 가까워진 ‘코코로’와 친구들은 뭔가 수상한 점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펼쳐진다!
CINE PICK!
<거울 속 외딴 성>은 일본 현대 문학을 이끄는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의 동명의 170만 부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하라 케이이치 감독은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 어른 제국의 역습>,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 외 다수를 연출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명장으로 자리매김한 감독입니다.
킬링 로맨스
Killing Romance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 대한민국 | 107분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개봉: 2023.04.14.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CINE PICK!
영화 <킬링 로맨스>는 콸라섬, 조나단 월드, 발연기 톱스타 등 설정과 배경만 봐도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킬링 로맨스>는 <뷰티 인사이드>의 박정예 작가가 각본을 썼고,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화제가 되었는데요. 영화는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볼거리를 제공하여 전형적인 것을 탈피한 새로운 재미를 더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사로잡을 또 하나의 킬링 포인트가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퀸메이커
QUEENMAKER
ⓒ NETFLIX
개요: 드라마 | 한국 | 11부작
감독: 오진석
출연: 김희애, 문소리
공개: 2023.04.14.
채널: 넷플릭스
시놉시스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자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황도희'가 정의의 코뿔소라 불리며 잡초처럼 살아온 인권변호사 '오경숙'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
CINE PICK!
<퀸메이커>는 김희애와 문소리의 첫 호흡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연출을 맡은 오진석 감독은 "정치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각 캐릭터들의 스타일과 연기를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밝히며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지금까지 액션,애니메이션,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와 일본,한국,미국까지의 다양한 국적의 콘텐츠를 소개해드렸습니다. 꽃샘 추위가 찾아온 요즘,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어 이번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Editor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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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마로서 살다가 인간으로서 죽다
경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미건조함으로 가득찬 살인마의 일생
<언더 더 스킨>은 인간의 몸에 기생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외계인을 그린다. 외계인은 로라라는 이름으로 흰 바탕 앞에 누워 있는 여자의 옷을 뺏어서 입고, 어딘가에서 받은 거대한 트럭을 타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을 유혹해 집으로 들여보낸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집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게 끝나면 로라는 사냥감이 될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난다. 이러한 유혹과 사냥이 영화 초반부 ~ 중반부에 계속 반복된다.
로라는 살인에 매우 유능한 외계인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남자들을 유혹해 사냥감으로 삼는다. 그러나 캐릭터의 특성을 드러내야 할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반복되는 노동처럼 느껴진다.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연출 탓이다. 특히 로라가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이러한 연출의 끝을 보여준다. 로라가 어두운 곳에 홀로 서 있다, 로라를 발견한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남자는 중간에 어두운 늪으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이게 끝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도 로라처럼 무미건조한 톤을 통해 그려지는 캐릭터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안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꼭 동전을 던진다. 동전이 나오는 면에 따라서 살인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우위를 숨기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한편 안톤은 살인을 할 때도 총이 아니라 공기 봄베를 쓰는 등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캐릭터의 매력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그러나 로라한테는 그럴만한 장면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이처럼 <언더 더 스킨>이 로라한테 철저하게 거리를 두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로라에게 얼굴이 흉측한 남자가 찾아온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그동안 로라가 만나왔던 남자들과 달리 외모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걸 꺼려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정을 들은 로라는 그 때부터 연민이라고 하는 감정을 그 남자에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유혹했던 남자들 중 처음으로 그를 산 채로 집 바깥으로 꺼내준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로라는 살인을 멈춘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우기 시작한다. 자신의 장기를 버린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내 샤낭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다행히 이후 로라가 첫 번째로 만난 남자는 남자는 로라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단 걸 알고 그 남자와 헤어지고 만다. 두 번째 남자는 숲의 관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숲에 찾아온 외계인을 강간하려 했다. 그리고 로라에게 불을 붙여 그녀를 불타죽게 만든다.
그래도 마침내 인간으로서 죽다
로라는 죽기 직전, 마침내 외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온몸이 검은 비늘로 덮인 흉측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이 모습이 로라가 인간의 피부 속에서 살인을 저지를 때보다 훨씬 인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로라에게 공감할 수 있는 모습들이 그녀가 살인을 멈출 때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연출도 로라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로라가 케이크를 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언더 더 스킨>은 이렇게 감정을 쌓아나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로라가 붉은 불에 타죽어갈 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라가 살인마 시절이었을 때 주로 검은색과 푸른색으로 둘러싼 화면이 등장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렇게 영화의 초반부 ~ 중반부의 무미건조함은 이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기 위한 밑밥으로 밝혀진다. 이는 로라가 끝내 인간으로서 죽는 모습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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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 4 | 익숙한 맛으로 생명 연장하는 시리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면의 평화도 찾고, 숱한 빌런을 물리치며 용의 전사다운 위업을 쌓아 올린 쿵푸팬더 '포'(잭 블랙). 마스터 '시푸'(더스틴 호프먼)는 그에게 새 과제를 낸다. 이제는 평화의 계곡을 지키는 보호자가 아니라, 계곡을 이끌 영적 지도자로 거듭나라는 것. 그 일환으로 포는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태가 좋은 포는 스승의 과제가 마뜩잖다.
때마침 과거의 숙적 '타이렁'(이언 맥셰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고, 포는 시푸와 수련하는 대신 새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는 쿵푸 마스터의 유물을 훔치려는 도둑 여우 '젠'(아콰피나)을 붙잡고, 그녀에게서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빌런 '카멜레온'(비올라 데이비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다. 그렇게 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용의 전사로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정을 떠난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할리우드 영화에 가해지는 여러 비판 중 하나가 속편 제작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등장하면,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할 때까지 속편을 계속해서 찍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속편 제작 자체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죽은 자식 불알을 계속 만지니 문제다. 시리즈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1편에서 참신했던 캐릭터나 스토리가 모두 무너지고 오로지 돈 만을 쫓는 작품이 양산되기 때문.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시작은 화려했다. 1편 <블랙펄의 저주>는 <컷스트로 아일랜드> 이후 명맥이 끊긴 할리우드 해적 영화를 부활시켰다. 조니 뎁이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였을 정도. 하지만 삼부작으로 끝난 이야기를 무리하게 늘리면서 프랜차이즈는 무너졌다. 5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주인공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성도, 전편과의 연결고리도 지키지 못하면서 팬들의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쿵푸팬더>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캐리비안의 해적>을 향한 눈초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포의 이야기는 지난 삼부작으로 이미 깔끔하게 끝났기 때문. 제작사인 드림웍스의 전례 때문에 우려는 더 컸다. <슈렉> 시리즈를 4편까지 늘리다가 시리즈의 명성에 금이 갔으니까. 다행히도 <쿵푸팬더 4>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시리즈를 이어져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서 생명 연장에 성공했다.
포의 새 과제
<쿵푸팬더> 트릴로지는 포의 성장기로서 흠잡을 데 없었다. 1편은 포의 육체적 각성을 보여줬다. 쿵푸 마스터를 꿈꾸지만 정작 주방에서 국수를 만들어야 했던 포. 그는 본인도 모르던 쿵푸 마스터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고, 평화의 계곡을 지켜내는 '용의 전사'로 거듭났다.
2편에서 포는 자기 과거를 극복했다. 아버지는 거위인데 자기는 판다인 이유를 궁금해했던 포. 그는 출생의 비밀에 관한 환상을 본 후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포는 자기처럼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는 빌런 '셴'을 만나고, 그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단단한 용의 전사가 됐다.
3편에서 포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용의 전사이자 쿵푸 마스터로서는 과거 자기가 동경했던 '무적의 5인방'까지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으로 거듭난다. 그와 동시에 팬더로서의 정체성도 확립한다. 마침내 친부를 만나고, 팬더 마을에서 다른 팬더들을 만나며 마음속 응어리를 완전히 해소한다.
<쿵푸팬더 4>는 포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이제 그는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의 전사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할 토양을 마련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포는 이제 직접 빌런을 무찌르는 대신, 그의 후계자가 빌런을 대적할 수 있도록 밑바탕을 다져주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마치 우그웨이가 시푸와 포에게 그러한 존재였듯이.
진정으로 변화하는 법
물론 포는 변화를 거부한다. 그는 현재에 안주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새로운 빌런 카멜레온이 나타나 포를 공격한다. 그녀는 누구로든 변신하는 능력을 살려 포의 숙적이었던 타이렁을 가장해 그를 혼란에 빠트린다. 그 틈을 노려 우그웨이가 포에게 남긴 영혼의 지팡이를 탈취하려 든다. 지팡이가 있어야만 영혼계로부터 모든 쿵푸 마스터를 소환하고, 그들의 무력을 탈취할 수 있으니까.
카멜레온의 능력은 의도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이 능력 덕분에 포와 카멜레온의 대결을 능력을 갖고도 변하지 못하는 빌런과 능력 없이도 진정으로 변할 줄 아는 영웅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포는 카멜레온을 쉽사리 이기지 못한다. 모든 쿵푸 마스터의 능력을 지닌 상대에게 숱하게 패한다. 하지만 파훼법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다. 포가 후계자 젠에게 기회를 양보하며 스승으로 거듭날 때, 마침내 카멜레온은 패한다.
<쿵푸팬더 4>는 이 대결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듯하다. 직접 부딪혀 봐야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그때서야 비로소 낯설고 어색한 자리와 새로운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단순히 외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은 진정한 변화도, 성장도 아니라고. 카멜레온이 남의 능력을 탐내듯이 재물과 권력, 지위를 탐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캐릭터에 조금만 신경 썼다면
다만 포의 새로운 성장담은 기존 서사에 비해 얕고 급하다. 포를 도와줘야 할 새 캐릭터가 기존 주인공과 빌런을 대체할 만큼의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빌런인 카멜레온은 효과적인 도구다. 포가 왜 한 번 더 성장하고 변해야 하는지를 적당히 전달하는 장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는 않다. 돈을 강탈하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평범한 악당에 불과하다. 만약 쿵푸 마스터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과거 개인사를 강조했다면 포의 아치 에너미로서 기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서사를 대사 몇 마디로 축약해 버린 나머지 가능성을 살리지는 못했다. 도심 추격전이나 술집 액션처럼 다소 길고 늘어지는 대목을 줄이고, 카멜레온에게 분량을 조금 더 나눠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이유다.
그 결과 카멜레온은 시리즈의 완성도와 매력을 망치는 주범에 가깝다. 타이렁, 셴, 카이 등 지난 악역을 모두 소환하고도 정작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 액션을 보여주는 건 타이렁뿐이다. 다른 빌런은 한 두 컷 스쳐 지나가는 데서 그친다. 심지어 타이렁조차도 개그 캐릭터로 허비된다. 그 결과 용의 전사가 되겠다는 야심, 스승을 뺏기지 않으려는 결핍이 더해져 묘한 매력을 뽐냈던 시리즈의 개국공신은 허망하게 퇴장한다.
포의 후계자가 될 젠 역시 불만족스럽다. 물론 기존 시리즈와 결이 다른 재미를 주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포와 버디 영화를 찍는 대목은 익숙한 캐릭터만 반복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적절히 변주를 준다. 때마침 젠이 여우이다 보니 마치 <주토피아> 속 닉과 주디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첫 등장부터 젠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 보니 나름 힘을 준 반전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맛집이 괜히 맛집인가
더 나아가서 전반적인 구조와 구성도 좋게 말해 익숙하고, 나쁘게 말하면 뻔하다. <쿵푸팬더 4>는 시리즈의 기본 패턴을 반복한다. 포의 활약을 짧게 보여준다. 우그웨이나 시푸가 던져주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한다. 뒤이어 빌런이 등장하자 포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의 첫 도전은 실패한다. 그러나 이내 각성한다. 결국에는 빌런을 격퇴하고 스승이 준 과제를 끝내면서 성숙해진다.
물론 장점이나 특별한 점은 아니어도 단점이라 말하기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에는 종종 다른 잣대가 필요하기도 하고, 애초에 이 맛에 <쿵푸팬더> 시리즈를 찾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 다만 4편까지 나온 상황에서 '식상하다' 내지는 '안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익숙한 맛에 풍미를 더하는 여러 조미료에 힘입어 영화는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내달린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머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다른 제작사와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꼽자면 성인 취향의 말장난 대사를 많이 쏟아낸다는 점.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에 더해 포가 등장하는 모든 컷마다 개그씬을 연출하려고 애쓴다. 이때 유머 타율이 꽤 높다. 특히 포와 시푸의 투닥거림은 이번에도 미소를 자아낸다.
그렇게 <쿵푸팬더 4>는 비록 삐걱거릴지언정, 모두가 기대한 맛을 선사하며 오랜만의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6편까지 기획 중이라는 소식에 기대감도 조심스럽게 키워볼 만하다. '무적의 5인방'의 복귀가 화룡점정을 찍는 크레디트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욱 그렇다.
Acceptable 무난함
살아남는 국밥집에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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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의 신이 되고 싶었던 마약왕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나는 일단 가죽을 남기기는 싫다. 자연스럽게 죽는 걸 원한다;; 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이렇게 내가 콘텐츠를 만들어 글을 쓰는 게 재밌기도 한데 유명해지면 짜증 날 것 같다. 갑자기 들어와서 '돈 받고 광고하냐'라는 식의 댓글만 달아도 짜증 나는데 다양한 미친놈들을 상대하기엔 난 너무 예민한 타입이다.
그래서 보면 좀 신기하다.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랑 종자 자체가 다른 것 같다. 고위 정치인이 되면 따라오는 존경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 사람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유명세 얻자고 지역 유지가 되는 건 너무 기가 빨리는 짓이다. 그냥 우리 엄마 아빠랑 같이 살면서 글 쓰며 사는 것이 나에겐 최고인 것 같다. 이런 나는 '마약왕'이 되는 것을 꿈조차 꿀 수 없다. 재밌게 사는 건 당연히 원하는데 마약까지 할 정도로 격하게 재미있고 싶지는 않다. 눈을 한국 외로 돌린다. 수리남의 어느 곳에서 마약왕이 된 남자가 있다고 한다. 또 어떤 남자는 이 마약왕을 파멸시키기 위해 복수를 계획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이다.
타지에서 새로 시작하다
모두들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강인구도 예외는 아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왔다. 경제난에 부딪힌 강인구 가족.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트럭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을 먹어 살려야 했던 인구. 단란주점에서 일을 시작해 돈을 한 푼 두 푼 모으기 시작한다. 절실했던 인구. 이런 인구에게 먹을 것과 학비를 준다는 이유로 유도부에 가입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덕택에 어느 정도 재능이 생긴 인구. 이런 인구는 어려운 삶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동두천 근처 미군 부대 카센터를 위시로 유흥업소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 수완도 좋고 사회생활도 곧잘 해서 수입이 일정해진 인구. 네 가족을 이끌고 지하 단칸방에서 아파트까지 이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위기가 발생했다. 단란주점을 운영하고 있던 인구. 어떤 손님이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야? 대응하던 인구.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행인을 두들겨 패 버린다. 그냥 패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을 걸. 그 두들겨 패 버린 나쁜 놈의 정체는 경찰이었다. 장사가 어려워질 것 같다. 위기에 봉착한 인구. 이에 힘입어 친구 응수는 수리남이라는 나라에서 홍어 장사를 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한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수리남으로 출국하는 인구. 역시 쉬운 건 없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적응은 한다.
역시 어딜 가든 문제는 있다. 수리남에서 아무 일 없을 리가 없다. 수리남의 조폭 중 한 명이 인구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문제에 직면하는 인구와 응수. 돈으로도 대응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때 두 남자에게 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수리남의 지역 유지 전요환. 전요환은 목사로 수리남 현지인들, 한인들 가릴 것 없이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지역을 이끌고 있었다. 전요환의 강력한 영향력에 홍어 장사가 쉽게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풀리기는커녕 강인구는 전요환에 의해 삶이 크게 꼬이기 시작한다. 돈도 홀라당 까먹고 사랑하는 대상도 잃을 것 같은 인구. 이런 인구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와 함께 전요환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이유 있는 선택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윤종빈 감독이 신작을 갖고 왔다. 윤종빈 감독은 뭐랄까 절실함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절실함'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뭐 각자 다르겠지만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최익현이 보여준 이 정서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큰 영향으로 남아있다. 아등바등 살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른 감독들에게서 볼 수 없던 방식이었다. '이거 하나만 얻고 나머지는 다 잃은' 인간 본질의 순리를 개성 있는 방식으로 잘 묘사하는 느낌? <군도 : 민란의 시대>에서는 그런 묘사가 잘 기억이 안 난다. <공작>에서 이성민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가 이런 걸 잘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이 감독은 캐릭터를 잘 만든다. 수많은 밈을 양산한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만 봐도 그렇다. 최익현, 최형배 캐릭터가 드러내는 생생한 개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또 <공작>에서 이성민 배우가 연기했던 북한 간부 캐릭터도 극을 이끄는데 적절하다. 이 작품 이후로 글쓴이가 이성민이라는 이름을 기억했으니 말이다.
이 느낌은 엔딩부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실화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 인물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아마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화와 인물들의 처지 대비는 참 씁쓸하다. 후반부에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더 도드라지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 정서를 표현할 때 만약 영화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생각했다. 조금 어색하다. 전요환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사건들이 필요했다. 또 국정원 쪽의 치밀함 역시 드러내기 위해서 긴 서사를 보여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냥 단순히 <오징어 게임>이 잘 돼서, 넷플릭스가 오리지널을 만드는 형태가 이 쪽이 많아서 드라마를 고른 게 아니라 매체 선택 이유와 장르, 내용이 잘 어우러진 건 윤종빈 감독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 캐릭터 설정 역시 빛을 발했다. 일단 두 배우의 캐릭터를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황정민 배우가 연기했던 전요환, 박해수 배우가 연기했던 최창호다. 전요환에게는 큰 단점이 있다. 캐릭터가 직접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기도 하는 부분이다.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면서 사기를 치고 다녀서 의외라고 생각하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이 인물의 이런 단점은 인물의 행적에도 충분히 드러난다. 이 때문에 인물 전부를 가로지르는 선택도 한다. 이런 인물의 속성은 극 중 내내 반복되는데 살짝씩만 변형해서 연출한 감독의 능력이 돋보였다. 또 최창호 캐릭터는 살짝 페널티가 있다. 바로 박해수 배우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자주 나왔다는 점이다. 그럼 당연히 이전 작품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이를 박해수 배우 자체가 연기를 잘한 것도 있지만 캐릭터를 잘 꾸면서 과제를 해결한다. 최창호는 직업적 특성상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때 연기를 하는 디테일 설정이 좋아서 관객 몰입에 용이하다. 이 두 캐릭터 설정을 통해 감독의 장점을 잘 만든 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중 화룡점정이 되는 지점이 있다. 이 부분은 직접 보시길 바란다.
최애 배우가 된 것 같아
또 이 영화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황정민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배우는 또 엄청난 악역 연기를 맡았다. 이 사람의 악역 연기를 맡았던 기억을 되살리면 바로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과 <아수라>의 박성배가 생각난다. 전자는 배우의 연기도 연기였지만 감독의 인물 세팅이 빛났다. 후자 <아수라>의 박성배는 인물 세팅보다 배우의 연기력이 빛났다. 우선 백사장은 비열한 인물이다. 자기 마음 안 든다고 후배를 전화기로 냅다 패거나, 유명한 명장면인 선우와의 아이스링크 결투신에서도 선우가 방심한 틀을 타 습격한다. 후배는 냅다 패는데 눈 돌아간 선우에겐 굽신거리는 이 모습만 봐도 이 인물은 이중적이다. 그리고 하는 말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극 중 내내 야비하고 비열한 모습만 보여주던 인물이 느닷없이 철학을 늘어놓는 것 역시 자기보다 아래 입장에 있는 사람을 깔보는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0여 년이 지나 가상의 도시 안남 시로 무대를 옮겨온다. 안남 시장 박성배는 시장이다. 그런데 무늬만 시장이고 사실상 마피아 보스에 가깝다. 이 사람이 시장이란 직업을 유지하는 이유? 법조계와 정치계를 휘어잡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박성배는 절대적인 빌런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백사장이 허점을 보이며 퇴장하는 것과 다르게 극의 세계관 전체를 장악하며 인물을 압박하는 것이 박성배다. 그럼 어떤 연기를 해야 할까? '내가 너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라는 식의 눈빛, 표정, 제스처, 말투까지 상대 배역을 깔아뭉갤 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니만큼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박성배. 주변에게 을에 입장에서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 없다. 마이크를 쾅쾅 내려친다던가 휴대전화를 느닷없이 부순다던가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제압한다. 또
이번 악역 '전요환'은 다른 결의 빌런이다. 일단 직업적으로도 다르다. 조폭은 조폭이지만 종교라는 특성이 들어가 있다. 대사마다 '사탄'이라는 단어가 곳곳이 들어간 것이 보인다. 또 목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상이 선해야 한다. 그래야 일반 대중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목적을 설파하기도 쉽고, 여러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배우 황정민은 이 선한 외모를 유지하되 톤을 살짝씩만 변형해서 악당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령 초반부에 전요환이 첸진과 대면하는 신이 있다. 세상 친절한 얼굴로 몇 마디 나누는 것 같지만 바로 욕을 하면서 태도를 바꾼다. 텍스트상으로 보면 이질감이 들 수도 있는 부분을 황정민이라는 배우는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관객에게 간단하게 소개한다. 그리고 이 악당의 특성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초중반부쯤에 자기 입으로 '난 이게 제일 어려워'라고 대답한다. 또 황정민 배우가 뽐내는 카리스마와 극 설정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인물의 허점이 있다. 얼핏 보면 박성배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요환은 다르다. 전요환은 겉으로는 외부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살짝 다르다. 이 부분은 중후반부를 넘어가서 등장하는 한 인물과도 관련이 있다. '속으면 죽고 속이면 산다'라는 이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에 주의하시고 보시라. 이 전요환이 실속을 못 챙기는 부분과 엔딩, 캐치프레이즈는 서로 관련이 있다. 아. 엔딩 보고 이해 못 할 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인물이 어떤 소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염두하고 본다면 이것이 무엇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국가정보원 소속 공무원
박해수 배우가 이번에도 넷플릭스 시리즈에 출연한다. <오징어 게임>, <종이의 집 : 공동 경제구역>에 이어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말 그대로 공무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연기를 못하는데 계속 섭외되는 게 아니다. 이 배우의 연기 역시 결이 달랐다. 우선 <오징어 게임>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역을 맡았다. 서울대 출신의 상우는 연이은 실패 때문에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게 됐다. 오지랖에 가까운 동네 아는 형 성기훈과는 다르게 동료도 배신하며 앞 단계로 나아가는 상우지만 사실 알리에게 따뜻한 모습도 보여주며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만들었다. 다음 드라마 <종이의 집 : 공동경제구역>에서 맡은 역은 베를린이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다음은 '그럭저럭 볼만한 드라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아쉬운 게 사실이다. 이야기 설계를 잘 짠 드라마다. 그러나 이를 이점을 죄다 붕괴시키는 이상한 연기 디렉팅 덕에 유지태, 김윤진, 이원종 같은 베테랑 배우들도 오그라드는 드라마의 톤은 확실히 단점이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혼자 살아남았던 게 베를린 역의 박해수 배우였다. 분명히 이 사람은 더 반동 인물로서 존재감이 있어야 하는데 극에서 뭔가 창의적인 설정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냥 연기를 잘해서 눈에 띈 것이다. 오합지졸이 될 뻔한 강도 집단을 이끌며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들었던 퍼포먼스 역시 박해수 배우의 개인능력이 빛난 부분이다.
이 <수리남>에서는 앞의 둘과 다르다. 일단 반동 인물이 아닌 국정원을 이끄는 리더 역할이다. 대립되는 전요환이 악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인상이나 말투부터 신뢰감을 주고 시작해야 한다. 처음 최창호가 등장하는 신이 있다. 이때 이 인물은 친구인 척을 한다. 그냥 전형적으로 쨘 하고 등장하는 게 아니라 '남을 속이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라는, 인물의 근본적인 속성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그렇게 죄수들의 시선을 돌리고 강인구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최창호. 이때 베를린과 조상우와는 다른 발성과 눈빛으로 관객에게 신뢰를 준다. 사실 글쓴이가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를 볼 때 최창호도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요환이 정, 재계를 주무르는데 어떻게 믿어? 이 의심은 결국 강인구에게 관객이 감정이입이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 강인구가 최창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때가 몇 번 온다. 이때 최창호는 관객으로 하여금 강인구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도 보다 보면 최창호를 욕 할 만큼 몰입감이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다는 뜻이다. 이 외에 전요환을 속이기 위해 하는 연기, 그 와중에도 내면에는 긴장감에 벌벌 떠는 연기를 잘 소화했다. 선하고 올바른 국정원 요원에서 위장 범죄자까지 말투와 눈빛이 극 중에서 여러 번 바뀌는 연기 방식은 정말 대단하다. 연기하고 있는 걸 연기하는 박해수 배우의 테크닉이 돋보인다. 의상 바꾸고 머리 올리니까 진짜 양아치 같았다.
놀랍게도 실화
드라마 처음 재생하면 자막이 나온다. '이 드라마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입니다'다. 찾아보면 이 드라마가 정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리남에서 마약왕으로 군림하며 정치권과의 인맥도 유지하던 조봉행 씨. 조 씨는 한국에서 사기를 취고 수리남으로 튀었다. 수리남에서 마약 사업을 운영하는 조 씨. 조 씨는 지역 카르텔들과 협착 관계를 맺고 세계적으로 마약을 유통하며 악명을 떨치다 결국 2011년에 잡혔다고 한다. 당시 인터폴에도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했었다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 조 씨의 범죄행각이 질이 안 좋은 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물건 배달을 해 달라'라며 부탁을 한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이 물건이 보석이라고 들었어서 그냥 단순히 이송만 해준다. 그런데 갑자기 마약 유통업자가 돼서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이렇게 민간인에게 사기 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하던 조 씨. 이 범죄 수법을 소재로 한 영화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국내외에서 악명을 떨치는 범죄자였다.
실제로 극에 나온 것처럼 국적을 오가며 포획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수리남 안에서 이 사람을 잡을 가능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브라질로 옮겨 범죄자를 잡는 것을 시도했지만 실패. 그렇게 국정원의 해결책이 오리무중 안으로 들어갈 때 조 씨에게 K 씨가 등장했다고 한다. 이 K 씨는 조 씨의 사기 피해자로, 3년 동안 그에게 브로커 역할을 연기하며 조봉행의 구속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지만 그에게 결국 내려진 건 징역 10년과 벌금 1억이었다.
단점도 있어
초반부의 살짝 잔잔한 걸 지나가면 초중반부부터 드라마의 속도에는 불이 붙는다. 물 샐 틈 없이 견고한 연출력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 드라마.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보여줬던 인간사의 공허함이나 <공작>에서 보여줬던 서스펜스가 양립하며 극을 이끈다. 마피아 게임에서 밤이 되면 사람들을 찍고 죽이는 것이 드라마로 옮겨왔다. 전요환이 무슨 턴이 되면 사람들을 죽이고, 이것의 동기를 인물들의 성격과 결부시키기 때문에 각본이 크게 어렵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액션도 나름 잘 뽑았다. 강인구는 극 중에서 유도선수 출신이다. 그래서 호신술을 보여주거나 순간 반응속도가 빠른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 중후반부에 액션신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하는 걸 처음 봤다. 이 액션신을 하는 배우가 이 드라마에서 최고작을 갱신한 것과는 다르게 몸도 잘 쓰는 좋은 연기였다. 그리고 액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총기 액션이다. 총기 액션을 꼼꼼하게 잘 배치했기 때문에 액션의 시간 할당과 배치를 영리하게 잘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의 톤은 좀 아쉽다. 유치하다. 일례로 데이빗 박 캐릭터가 말하는 대사는 전부 어색하다. '여기서 더 관심을 가지면 it could be dangero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윤종빈 감독이 헛똑똑이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어서 한국어, 영어도 둘 다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인물을 연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영어, 한국어 두 언어만 오롯이 쓰인다고 해서 전달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나름대로의 갈등 설정을 잘 짜 놨기 때문에 이는 충분하고, 오히려 과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문어체 같은 대사 톤은 초반부의 전개에 살짝 영향이 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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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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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 박상영 작가
02:36 발(foot)
05:15 성경, 기독교
07:36 가치판단의 딜레마
10:36 별점 및 한 줄 평
10:5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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