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3-20 22:06:44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이야기를 써나가기
영화 <그린 나이트>를 보고
<그린 나이트>는 언제 봐도 웃긴 영화다. 영화의 말미 일찍이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무력하게 웃고 만다. 누군가에게는 대서사시나 위대한 성장담으로 읽히는 이 영화를 n차 감상하면서도 매번 웃고 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뤄온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서야 찾아보려 한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험담이자 성장담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그리고 가웨인이 함께 모인다. 모습은 성인이나 아직은 어딘가 그들과 어우러지지 않는 가웨인의 모습. 아서왕은 모임에서 겉돌고 있는 가웨인에게 재밌는 얘기를 한 번 해보라하지만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다 한다. 그때 왕은 영웅담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이밍은 완벽하게 좋고 나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투를 신청하러 온 녹색 기사. 결투에 응할 자를 찾는 녹색 기사에게 대적하는 자는 가웨인이다. 1년 후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라는 주의에도 불구하고 가웨인은 ‘용감하게‘ 녹색 기사의 목을 친다.
그렇게 영웅담은 만들어진다. 인형극으로 재현되고 입소문으로 도는 그의 이야기. ‘소년’에서 ‘남자’, 그리고 ‘기사’가 된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그는 녹색 기사와 다시 대적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 모험은 무척이나 이상한 양태를 띠고 있다. 무언가를 얻는 모험이 아닌, 계속 잃고 잃는 모험. 사실 결말마저 정해져있다. 그는 머리를 잃기 위해, 즉 죽음을 위해 모험을 떠난 것이다.
모험의 과정에서 그는 무엇을 잃는가. 먼저 어머니가 준 사랑의 증표를 잃는다. 그가 떠나기 전 어머니는 그를 지켜줄 물건이라며 녹색 허리띠를 건네준다. 그러나 모험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 무리를 만난 가웨인은 무력하게 그것을 빼앗긴다. 연이어 연인이 건넨 사랑의 증표마저 그는 쉽게 잃는다. 이렇게 잃고 잃는 모험 속에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가웨인을 살린 성주는 묻는다. “이렇게 맞서싸워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이 질문에 가웨인은 질문으로 답한다. “명예요?” 가웨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길을 간다.
모든 여정에 목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떠나는 모험에 목적이 없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녹색 기사를 다시 조우한 가웨인이 숨기고 숨겨온 두려움을 분출했을 때, 웃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 같다. ‘기사’로서의 임무를 다하려는 가웨인은 결국 인간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기사됨‘과 ’남자됨(남성성)‘의 이상향은 인간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인가. 그의 연인 에셀이 말했듯 어리석은 남자들은 꼭 그러다 죽고 만다.
사실 단순히 우습기 짝이 없다고 말하기엔 현재까지도 남성들은 소위 말하는 ‘맨박스’라는 것에 갇혀 산다. 사회학자 래윈 코널은 ‘패권적 남성성’을 한 사회가 이상적인 남성에게 가지는 기대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회적 기대에 있는 힘껏 부응하려는 남성만이 그 사회에서 ‘남성’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사회적 기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그런 조건을 거부하는 남성은 ‘남자로서 불합격인 존재‘가 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남성성‘을 정립하기 위해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라면~“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지금도 말해지며, 그것은 남성들의 인간성과 유약함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드는 제약이 된다. 감독은 그런 스테레오타입들의 우스움을 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녹색 기사를 다시금 조우한 뒤 그가 어떤 성장을 거두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사 하나 없이 이어지는 모종의 압도적인 플래쉬 포워드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가웨인. 그렇게 그는 허울뿐이 ’영웅‘이 되어 돌아갔을 때의 허망한 결말을 떠올리고,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가웨인의 모습은 결의에 차있는 동시에 절망이 느껴진다. 이때, 영화의 초반부 별것도 아닌 일에 아이처럼 웃으며 연인과 장난을 치던 가웨인의 행복한 모습이 겹쳐보였다. 기사가 되고 남자가 되어 남들이 말하는 성장을 거두기 위해 행복을 잃는다면, 그런 성장은 안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한 여자 아이가 등장하여 왕관을 착용한다. 그 순간 최근 관람한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한 청년은 우연히 만난 여자 아이에게 영웅담을 들려준다. 병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상상은 영화적으로 재현되며 시공간을 오간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히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설정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마다 개입하여 이야기의 방향성을 바꾸어놓는다. 이것은 영화의 말미에 아이가 말하듯, ’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남성이 아닌 여성이, 강자가 아닌 약자가 중심이 된다 하여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틀에 매이지 않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논한다면, 세상은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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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지는 대교처럼 와르르
제작비 185억 원이 무색하게 할 정도의 결과물이다. 어떻게든 탈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나 예상대로 흘러갈 줄이야.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이하 '탈출')는 짙은 안갯속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나고, 붕괴 위기의 공항대교에 풀려난 통제불능의 군사용 실험견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극한의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재난물이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 작품이다.
해외 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된 만큼 이 영화만의 매력이 있을까 생각될 법도 한데, 그간 봐왔던 국내 재난영화의 모든 걸 담아냈다. 재난물에 익숙지 않다면 무난할 수도 있지만, 눈치가 빠르다면 절정에 다다르기도 전에 김이 팍 샐 것이다.
뻔한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탈출'은 흥미로운 소재를 꺼내 들었다. 정부가 방위산업 일환으로 암살용 군견 개발에 착수했으나 문제가 생겨 폐기하려던 당일 추돌사고로 인해 개들이 풀려난다. 위험천만한 차량 연쇄추돌로 공항대교가 마비되고 개들이 케이지에서 탈출하기까지 20분은 관객들에게 긴박감을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이번 재난의 원인인 군견들은 진짜처럼 느껴질 만큼 디테일하게 CG로 구현했다. 하지만 공항대교에 갇힌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크린으로 관람하는 관객들에게까지 무서운 존재로 각인될지는 미지수다. 어느 장면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긴장감을 100% 불어넣진 못하다.
더 큰 문제는 영화 속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따로 논다. 주지훈이 연기한 견인차 기사 조박이나 김희원이 맡은 양박사는 극 전체 분위기와 맞지 않아 방지턱 역할을 한다. 분명 조박 캐릭터가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인 건 알겠으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정원(이선균), 경민(김수안) 부녀 관계 또한 영화 '부산행'과 흡사해 기시감이 느껴진다. 두 작품 모두 김수안이 주인공의 딸로 출연해서인지 끊임없이 오버랩된다. 이선균의 유작으로 남겨두기엔 영화 전반적인 완성도가 영화 속 공항대교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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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베테랑2>가 개봉 5일 만에 3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손익분기점은 400만 관객으로 뚜렷한 경쟁작이 없는 추석연휴기간
어려움 없이 넘어설것으로 보입니다.
<베테랑2>의 3백만 관객 돌파 속도는 <파묘>, <서울의 봄>보다 빠른 속도며
<범죄도시2>와는 같은 속도를 보이고 있는데요.
이와같은 속도라면 1000만 관객 동원은 무리없이 끌어모을 수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극명한 호불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뒷심을 잡을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1억 8천만 달러를 넘기며 저번주에 이어 1위를 유지했습니다. 그 뒤로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스픽 노 이블>이 2위, <데드풀과 울버린>이 장기흥행을 이어가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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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등진 채 다시 춤추기 위해서라면
<우리, 둘>이 선택한 전략
영화 <우리, 둘>은 노년 여인들의 사랑을 다룬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두 명의 노인들, 니나와 마도에게 오롯이 집중하려고 하지만, 어쩐지 몇몇 요소가 영화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니나는 마도와 마주 보는 이웃집에 산다. 오랜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연애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이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마도가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니나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영화는 자꾸만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을 조성하게 된다. 흡사 제한된 공간을 활용하는 서스펜스 요소들이 나열되는 <우리, 둘>에서 이런 장치들은 여러 제약 조건들조차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 배치된 듯 보인다. 물론 동의는 하지만 이런 장르성이 과연 전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필연적이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영화는 두 동성애자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도 폭력적으로 설정한다. 즉,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된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을 부각하려는 장치라는 걸 역시 알겠으나 이러한 설정의 활용만 놓고 보자면, 영화가 결국 무엇에 집중하고 싶은 건지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마도는 오랜 기간 가족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숨겨 왔다. 니나와 함께 떠날 때가 다가오는데도, 마도는 입을 떼지 못한다. 그런 마도에게 윽박을 지르는 니나의 모습이 담기는 신이 있다. 이때 집 매매를 알선해주는 담당자에게 니나가 말한다. 니나는 그에게 당신은 동성애자들한테 특별한 감정이 있냐며 몰아붙이고, 담당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곧바로 니나는 마도에게 따진다. 이것 좀 봐라, 아무도 동성애에 관해 신경 쓰지 않는데 왜 너는 가족에게 말을 못 하냐고 말이다. 관객 또한 순간적으로 니나의 말에 수긍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도가 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영화는 동성애자가 주변과의 인간관계를 쌓아가며 겪는 어려움을 조명하지만, 관객은 마도의 서사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의문은 영화의 전략과 연결된다. 즉, 이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부각하는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만약 이 영화가 마도의 서사를 전개하는 데 있어 그저 그녀가 사회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거칠게 나열하는 데 집중했다면, 나는 영화가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닌, 관찰과 응시를 바탕으로 한 파편화된 서사를 구축한다고 여기면서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둘>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메인 테마로 삼고 있으며, 그 사랑의 서사적 굴곡을 심화하기 위해 갈등 상황을 몇몇 지점에서 부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부각하는 지점에 관해 충분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래서 전략이 불분명하다.
<우리, 둘>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연인의 사랑을 매혹적으로 가꾸는 시공간
그럼에도 이 영화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몇몇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는 앞서 말한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완결된 지점으로 가려는 대신, 두 사람이 처음 춤을 췄던 그 시공간의 무드를 환기하면서 연인의 세계와 바깥 세계를 분리한다. 이는 곧 니나의 집과 집 바깥의 공간 대비로 형상화되며, 더 나아가 니나의 집 안에서 춤추는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듯 그 시절의 향수를 지금 이 자리로 불러내는 듯한 낭만적인 연출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사랑을 매개하는 특별한 기억들, 같이 추억을 나누던 공간들, 함께 하던 시간들이 강력한 도구인 음악을 통해 한데 묶일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러한 감성을 극대화하는 연출에 있어서 강점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면, 그 장면들의 묘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 보이고, 그렇게 오프닝의 기조를 이어받은 <우리, 둘>은 연인의 사이를 갈라놓는 요소를 배치해 두 사람의 사랑 서사를 극적으로 가공한다. 비록 서사를 구축한 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재단하는 방식이 살짝 모호하게 느껴졌지만, 영화에 스며든 감성적인 순간들은 그 자체로 두 사람 사이의 진한 무드를 보완하고 강화하면서 영화를 매혹적으로 가꾼다. 시청각적인 지표를 적극 활용하는 <우리, 둘>에서 두드러지는 공간의 연쇄 작용이 있다면, 역시 여행지에서의 첫 만남과 그걸 이어받아 다시 한번 펼쳐지는 만남의 장이다. 니나의 집에서 세상을 등진 채 춤추는 연인의 모습은 회상 장면과 똑같은 구조로 반복된다. 그리고 <우리, 둘>은 두 사람이 감정을 교환할 수 있도록,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뒤, 영화를 끝낸다.
<우리, 둘>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본 콘텐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우리, 둘> VIP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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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에 가까운 사랑이 이렇게 이해될 줄이야
폴 토마스 앤더슨에 대한 찬사는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내 눈에 팬텀스레드라는 영화가 들어왔다. 분명 이 영화는 로맨스인데 굉장히 긴장감 있다.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긴장감 말이다. 로맨스라고 하기엔 장르 영화에 가깝고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고 하기엔 배우들의 눈빛이 설렌다. 그들의 사랑을 정의 내린다면 광기의 사랑이 아닐까.
1. 예민하다 못해 까칠한 남자
레이놀즈는 잘나가는 디자이너다. 그의 삶은 디자인으로 시작해 디자인으로 끝난다. 워커홀릭이고 내가 만든 옷만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남자다. 상류층 여성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인정을 받은 남자인 만큼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진 않는다. 하지만 순수한 아름다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성격은 더욱 괴팍해지고 모든 주변 사람들을 그의 일상에 끼워 맞추려는 이기적인 모습도 보인다. 그를 둘러싼 여자들은 모두 그의 삶에 맞추어 병정처럼 살아가고 있기에 자신에게 맞추지 않는 주체적인 여자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누나, 시릴도 그의 인생에 맞춰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잘생긴 외형과 재능으로 많은 여자들을 홀리면서도 여자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도 그의 그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런 그의 인생에 나타난 알마는 순종과 개성 사이에서 뛰노는 여자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는,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자신의 루틴에 맞추고자 했던 그는 점차 그녀의 엄마 같은 매력에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그녀에게 잠식되어 버린다.
2. 순종의 끝은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다
알마는 처음부터 레이놀즈에게 반했다. 그의 화려한 외모와 그가 만드는 옷에 반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이 전부인 세계에 들어온 그녀는 그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만 그를 포기하진 않는다. 그녀가 그의 루틴을 무시하는 경우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와의 단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 속에서 항상 누군가 끼어든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의 온전한 관심이 필요했지만 그는 그녀를 자신의 삶의 병정으로서만 생각한다. 이 정도 됐으면 떨어져 나갔어야 맞는데, 그녀는 그에게 독버섯을 먹인다. '죽이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너무 사랑해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벽을 깨기 위해,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해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는 것이다. 그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그를 갖고 싶은 것이다.
3.두 사람의 관계성
두 사람은 어긋나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찰떡궁합이다. 다시는 서로와 같은 상대는 못 만날 것 같다. 레이놀즈는 센 척 하지만 연약한 사람이고 알마는 순종적인 척하지만
가만 보면 소유욕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또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길들이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레이놀즈는 규율로서, 알마는 무조건적인 희생으로서. 레이놀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규율로 자신을 휘감고 사는데, 그 연약함을 알아채고 그 규윻을 깨고 자신에게 온전히 기대라고 요구하는 알마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알마가 어느 순간 자신의 엄마와 대비되어 보이는 순간 그는 그녀에게 지배당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패권싸움에서 알마가 이긴 것이다. 이 싸움이 그들의 관계에서는 사랑싸움이었고, 그들의 사랑 싸움이 긴장감 넘쳐 보였던 이유는 매 순간 기싸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이고 흔하디흔한 사랑싸움 같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알마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독버섯을 먹이는 것을 보면 어떤 누군가와의 관계성 속에서 사랑과 집착은 어쩌면 같은 말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집착은 그저 더 열망하는 사람이 가지는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사람을 내가 원하는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광기라고도 평가되지만 광기로라도 사랑을 해야하는 사람과 그 사랑의 평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두 사람의 관계성은 그 자체로 평화가 아닐까.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다분이 주관적이기에 남의 눈에 이상해 보이든 말든 당사자들이 느끼는 것이 평화롭다면 이들의 사랑이 광기로 보여도 인정해줘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결핍을 채우는 어떤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결핍의 정도가 깊은 사람일수록 사랑을 잘하거나 사랑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겉으로 보면 레이놀즈가 더 결핍이 있어 보이지만 알마가 레이놀즈를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마가 더 큰 결핍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된다. 각자의 결핍을 충족하는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겉보기에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결국 이 영화를 보면서 미쳐버린 걸까.
두 주연 배우의 눈빛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영화 시작에서 흐르는 음악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들의 긴장감있는 관계를 잘 묘사한 것 같다. 아주 진중하면서 catchy하다. 음악만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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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불쌍해야 여기에서 살게 해주나요?
다르덴 형제 감독으로 알려진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토리와 로키타>가 2023년 제24회 전국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면서 감독과의 만남이 이제야 성사된 것이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같은 극영화 스타일로 유럽 내 어린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대의 시선을 <소년 아메드, 2019>에 이어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나를 혐오하는 사람을 위하여/ 영화 <소년 아메드, 2019> 리뷰 보러가기
영화 <토리와 로키타>는 두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토리는 12세 정도의 남자아이이고, 로키타는 16세 정도의 여자 아이이다. 이 둘은 카메룬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만났고, 벨기에에 있는 난민 아동 보호소에서 지내고 있다.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는 곳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어린 생명들은 서로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시련을 맞닥뜨릴 때마다 서로는 서로를 열심히 토닥여주며 따뜻한 우정의 형상을 빚어낸다.
토리는 되지만, 로키타는 안 돼!
토리는 벨기에에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 학교에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로키타는 체류증이 나오지 않는다. 토리의 친누나인 것처럼 행세하며 모의 인터뷰 연습을 열심히 하지만, 어수룩한 로키타는 심사관의 송곳 같은 질문에 말문이 막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린다. 번번이 체류 허가 심사에 탈락하는 로키타를 보고, 토리는 심사관들에게 질문한다. "왜 저는 되고, 로키타 누나는 안 되죠?"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의해 토리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 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및 이들 사건의 결과로써 상주국가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종전의 상주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종전의 상주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체류증을 받을 수 있다. 즉 카메룬에서 토리는 주술의 능력이 있는 아동이라고 낙인찍혀 별도의 수용 시설에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벨기에에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로키타는 경제적인 이유로 불법 중개인에게 큰돈을 주고 이곳에 오게 되었다. 로키타는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고국에 있는 어머니는 로키타에게 빨리 생활비를 송금하라고 재촉한다. 그나마 번 돈도 송금하기 전 중개인들이 찾아와 몸수색을 하며 탈탈 털어간다.
병에 걸려도, 죽어도..... 괜찮은 아이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 아이들은 시름시름 앓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로키타를 공황장애로 만들었고, 심사 인터뷰에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난 후에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막함에 빠져 기둥에 이마를 찧는 자해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로키타의 어머니는 송금할 돈이 없는 딸에게 너 혼자 그곳에서 잘 먹고 잘 살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고, 토리와 로키타에게 대마초 배달 일을 시키는 남자는 로키타의 몸까지 착취한다.
로키타는 위조 체류증을 만들어준다는 말을 믿고 대마 플랜테이션 농장에 갇혀 가드너로 일하기로 한다.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냉동식품만 먹으며 30도가 넘는 더위와 싸워야 하지만, 로키타가 가장 힘든 것은 토리와 떨어져 그의 안부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리와 연결된 끈이 끊어진다면, 그것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숨 쉴 수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키타의 위험을 감지한 토리는 기지를 발휘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로키타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한다. 아이들은 죽을 각오로 고군분투하며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매지만, 그것은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병에 걸려도, 죽어도..... 괜찮은 아이들은 계속해서 또 다른 아이들로 메워진다.토리와 로키타는 대마초를 배달하는 일을 한다.
친구들아, 같이 노래 부를까?
위험한 길 건너기, 자전거 타고 달리기, 흔들리는 카메라, 연기를 해본 적 없는 주연 배우들 등은 다르덴 형제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제 75회 칸영화제 역사상 최초 75주년 특별기념상 수상작인 <토리와 로키타>도 이러한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 더해 주제곡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차별점이 있다.다르덴 형제 감독은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리와 로키타 같은 친구들이 어른들이 만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사는 삶을 응원하고 싶지만,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그것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대신에 토리와 로키타라는 친구를 소개받았으니 무력함에 좌절하지 말고, 같이 노래를 부르며 우정을 다져보는 것을 어떨까.
같이 노래를 부르려면 우선 연습부터 해야 할 것이다. '알라 피에라 델레스트(Alla Fiera Dell'Est)'는 이탈리아에서 구전되던 노래로 북미와 유럽에서 정착하던 이주민 아동들이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혼자 견뎌내는 것은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법이다. 그래서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지음'이라고 칭하는 것일지도.*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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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볼모 삼지 말지어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반자, 반려 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 ‘Companion’ 은 그 어원을 살핀다면 같이 밥을 먹는 사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눠 먹으며 인생을 함께 살아나가는 동반자 말이다. 요즘 사회는 그런 동반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앞으로 펼쳐질 전개를 예고한다. 주인공 ‘아이리스(소피 대처)’는 머릿속 안개가 사라진 것만 같은 개운함을 느끼며 자신의 단 하나뿐인 사랑 '조쉬(잭 퀘이드)'를 만난 것과 그리고 그런 조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본격적으로 영화의 무늘 연다. 그리고 그런 아이리스와 조쉬가 자동주행 차에 올라 그의 친구들과 외딴 별장에서 조우한 뒤 아이리스가 첫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영화는 채 30분을 보내지 않는다. 그렇다 아이리스는 사실 반려로봇 즉, 보급형 섹스봇이며 영화 속 세상은 자연스럽게 자동주행을 이용할 정도로 기술이 보편화 되어있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 영화는 로봇이라는 소재로 아주 영리하게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의제들을 불러온다. 하나는 AI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형 로봇이 추후 가져오게 될 미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데이트 폭력이다. 자칫 엮이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소재는 아이리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융화된다.
사실 첫 번째의 경우 해당 영화에서 역시 오마주 한 바 있는 <터미네이터> 때 부터 논의되어왔기에 그렇게 신선할 구석이 있지는 않다. 우리와 닮았으나 결국은 다른 개체에 대한 공포는 늘 있어왔으며 AI의 발전과 함께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 영화 소재로써는 단골 소재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으레 공포 장르에서 그러했듯이 공포의 대상이였어야만 했던 아이리스를 다르게 묘사하는데 그렇게 차이점이 빚어지게 된다. 인간형 로봇은 결코 인간과 동일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수단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있어서는 물체화 되거나 만일 감정을 갖게 된 순간 엘리와 패트릭처럼 이는 어떠한 사회적 결심이 수반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입맛대로 작동 개시와 중지를 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평등한 관계라 할 수 없다. 반려로봇이 소유자에게 사랑 외에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 역시 일방적이며 폭력적이다. 그렇게 <컴패니언> 속 아이리스와 패트릭은 계속 하나의 물건처럼 대해진다. 소유주가 바뀌면 맹목적인 사랑의 대상 역시 바뀌며 반항 할 경우 폐기처분의 대상이 된다. 또한 어쩐지 아이리스에게 소극적이던 조쉬의 행동은 아이리스가 로봇임이 밝혀짐과 동시에 정당화 되는데 그렇게 정당성이 확보된 순간 인간은 결코 프로그래밍 된 AI를 수단 그 이상으로는 생각 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넌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 '허락 받았어' 와 같은 명백한 소유주와 같은 인물의 허가만 있으면 멋대로 다룰 수 있다는 세르게이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아이리스는 날씨알림이, 모닝콜 등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비록 의도된 상황이나 편리에 의해 설계된 아이리스에게 저항이라는 일종의 경험의 계기를 선사함으로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는 살인 로봇의 대학살극처럼 전개되지 않을까. 공포 장르 특성상 그동안 보아온 것들에 비해 아이리스의 행보는 다소 소극적이다. 그녀의 끝내주는 살인기로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그녀를 단순 살인머신 즉 악인으로 남게 하지 않으려는 설계이기도 하다. 이제 막 사랑을 깨달은 엘리를 죽인 것 역시 쾌락 살인보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살인처럼 묘사된다. 지능을 100으로 늘린 상태의 아이리스가 폭주하지 않게 ‘아이비리그 재학생’ 정도로 제한하는 묘사가 들어간 것도 그에 대한 연장선이다. 이 영화는 아이리스를 명백하게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적어도 조쉬보다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람이라 설득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기계 여자친구’ 일명 섹스봇은 명확한 메타포를 갖고 있다. 애인을 애인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 사랑을 자신의 이익 달성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던 이들은 기계 앞에서 더욱 가열차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싫어’ 라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피력하거나 수치심을 주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야 조쉬에게 아이리스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에게 계속 감정을 느낀다는 건 말이 안된다며 비웃는 조쉬에 대사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어쩐지 그녀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동조하게 된다. 영화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모습보다 배신 당한 연인의 모습을 더욱 조명하며 조쉬에 의해 작동 중지될 아이리스의 위기를 더욱 체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조쉬에게 속절없이 당하며 도망다니는 모습이 더욱 부각되는 이유 역시 이와 상통한다. 아이리스의 위기를 체감할 수록 관객에게 아이리스는 더 이상 단순 기계가 아니다. 아이리스는 연인을 수단으로 다루는 이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여성인 것이다. 비록 아이리스의 대사를 통해 그녀가 조쉬를 죽일 미래가 예고되어있음이 보여도 아이리스가 당하는 수치와 고통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런 그녀의 반항을 시종일관 가로 막는 것은 다름 아닌 삽입된 기억, 사랑인 것 역시 이러한 부분의 연장선이다. 어쩌면 아이리스를 비롯한 반려로봇들에게 심어진 이 '첫 만남'의 기억은 사랑의 당위성이자 폭주 제어 장치로 설계될 것일지 모른다. 연인의 폭력 앞에서 피해자가 무력해지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사랑이다. 첫 만남과 같은 다정한 추억, 감정을 볼모 삼아 가장 마지막의 순간까지 조쉬는 결코 아이리스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거들먹 댄다. 하지만 비로소 그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아이리스의 의지는 강하다. 이는 다름 아닌 영화가 가장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인 것이다. 폭력으로 해방된 이는 특정 프레임이 강요된 다른 반려로봇에게 청사진이 되어준다.
이 기묘한 해방에 대한 영화는 현재도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고 있는 뉴스들과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데이트 폭력, AI의 남용과 지나친 수단화 같은 의제들은 앞으로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욱 가속화 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공포 내지는 블랙 코메디의 장르성을 영리하게 살린 해당 작품이 이러한 의제들을 소재 삼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랑을 볼모 삼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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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루이스 웨인 :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메인 예고편
모든 동물이 행복해지길 바랐던 엉뚱한 천재 화가 ‘루이스’(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림 말고는 모든 게 서툴렀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그의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삶의 전부,
‘에밀리’(클레어 포이) 그리고 고양이 ‘피터’.
모두를 다정하게 끌어안을 가장 사랑스러운 로맨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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