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9-21 17:42:59
사랑으로 사랑을, <러브 달바>
우리의 사랑엔 그늘은 있어도 어둠은 없다, 달바에게 여전히 사랑만 있듯이
* 본 리뷰에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러브 달바> 2024
프랑스 / 드라마 / 88분
감독: 엠마누엘 니코
사랑으로 사랑을, <러브 달바>
사랑을 받는 일이 먼저일까, 사랑을 주는 일이 먼저일까. 사랑이란 ‘세상’ 안에서 영원히 표류하며 사는 우리에겐 즉답하긴 어려운 질문이다. 애초에 명확한 답이나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는 물음도 아니기에 생각의 바다에 빠지기도 쉽다. 동시에 우린, 사랑에 한없이 주관적이기에 거침없이 답한다. 서둘러 사랑을 하고 이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하지도 않는다. 답안지를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보다,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더 진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만큼 강한 의지도 갖기에, 두 개의 물음표 중 한 개를 선택하는 과정은 과감히 축소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랑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뜻한다. 사랑은 삶을 계속 흐르게 하는 강력한 동기이자, 귀중한 배움 그 자체다. 출발선과 도착점이 구분 없이 이어진, 단 하나의 (사랑하는) 트랙을 끝없이 달리는 러너들, 그게 바로 우리니까.
사랑하는 방식보다 사랑‘하는’이 더 중요해진 일상에 <러브 달바>가 핀 조명과 함께 모두의 시선을 가로채며 등장한다. 거대한 트랙이 사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고, 상당수가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했거나 얼마 못 가 뚝 끊어져 있다는 진실과 함께 말이다. <러브 달바>는 사랑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앞선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방법이 사랑 중인 상태보다 주요하고,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까닭은 사랑을 받는 일보다 받은 사랑을 ‘주는’ 일이 늘 선행되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이 친절하면서도 강단 있는 답안지를 모두에게 널리 공유하기 위해, 열두 살 달바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달바는 집에 들이닥친 경찰관들로 인해 하루아침에 자크와 강제 분리된다. 의사는 달바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궁금한 게 있다면 다 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검사를 진행한다. 특수 교사 제이든은 달바를 집과 가까운 쉼터로 데려가며 이제 안전하다고 말한다. 검사는 수감된 자크를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충격적인 진실에도 달바는 흔들리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 놓여 조금 두렵고 무서울 뿐, 아빠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다시 아빠를 만나 함께 살면 다 해결될 거라 믿는다. 영화는 달바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달바가 자크가 만든 인형의 집에서 ‘타의’로 탈출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란 점을 조금도 덜어내지 않고 담아낸다.
달바를 둘러싼 문제들은 삶에 멋대로 끼어드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달바를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무엇보다 자크(사랑)를 믿는 나를, 의심하는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을 노려보니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울 속 달바는, 달바가 주장하는 '여자애가 아닌 여자'가 아니었다. 제이든의 단언처럼 여자가 아닌 '어린애'였고, 어린애는 달바가 이를 인정하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패턴으로 정해진 트랙에서 어긋나지 않고 달렸던 달바는, 자크를 향한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태도가 계속될수록 자기도 모르게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어린애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마주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달바는 외면은 물론이고 내밀한 내면까지 또래 친구들과 달랐다. 짙은 눈화장과 붉은 작은 입술, 중년 여성이 할 법한 성숙한 머리 스타일, 가슴과 등이 깊게 파인 속옷용 원피스와 드레스. 평생 자크를 위한 여자로 살았던 달바는,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동요한다. 재미있게 노는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신을 발견한다. 친구들이 자크를 소아성애자라고 부르는 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의 옷을 선호하고,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어제와 오늘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단번에 치유되는 아픔은 존재하지 않듯, 달바는 계속 혼란 속에서 허우적댄다.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필요치 않았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기행을 벌이며 자크와의 만남을 요구한다. 고대하던 면회 날, 달바는 교도소에서 완전히 변해버린 아빠를 마주하고 얼어붙는다. 자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예쁘게 꾸민 달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본인이 저지른 범죄를 시인한다. 달바는 자신이 진짜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믿었던 사랑에 버림받아, 더는 어떤 사랑도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과 당황스러움. 달바는 어른들이 자크를 변하게 했다며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달바의 절규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한다. 아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폭력이며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범죄라고.
<러브 달바>는 달바가 품은 혼란을 직면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아이의 삶에 개입한다. 어른들을 통해, 달바에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하게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사랑을 주입한다. 당연히 사랑받아야 할 권리, 당연히 치유될 현재, 받은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는 희망찬 미래까지, 영화는 피해자를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르듯 오직 달바의 새 시작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온 마음을 다해 기꺼이 돕는다. 달바에겐 강제 동행으로 느껴졌을지 몰라도, 반드시 습득해야 할 배움이자 품어야 할 희망이었으니까. 룸메이트 사미라도 달바가 허우적댈 때마다 회피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달바를 위로한다. 때론 못된 언니로, 어설픈 친구로, 똑같이 마음을 다친 동료로 달바에게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사미라 또한 주변 이들에게 달바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달바는 제이든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묻는다. 혼자 있는 게 두렵고 모두가 날 하찮게 보는 게 싫다고도 고백한다. 아이가 진정 가졌던 공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을 잃는 것이었다. 달바는 집으로 도망쳐 자기 방 옷장에서 숨어든다. 쉼터 안에서도 옷장에 자신을 가뒀던 아이였다. 옷장은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어둠 속에서 파묻혀 있던 달바는 문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눈을 뜬다. 당연히 그래야 함을 깨달은 듯 옷장을, 자크의 인형집을 박차고 나와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자크의 가스라이팅을 상징하는 염색된 파마머리를 거침없이 자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불어오던 따뜻한 봄바람이 마침내 달바의 마음을 온전히 감싼 것이다.
달바에게 별 하나 없는 어둠이었던 자크의 서사는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러브 달바>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달바가 피해자란 어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빛을 뿜어내는 열두 살 소녀가 되는 것. 따라서 감독은 근친상간이란 충격적인 소재를 적극적 또는 자극적으로 노출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이야기 내내 버려뒀다. 달바를 짓누르는 고통도 직접 보여주지 않고, 달바의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아이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도록 했다. 달바가 거울을 볼 땐, 거울을 바라보는 달바가 아니라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의지가 담긴 거울 속 달바를 의도적으로 비췄다. 그 결과 달바는 거울에 비친 영락없는 열두 살 소녀를 보며 사랑을 건넨 자들의 미소를 따라 짓는 데 성공한다. 모두가 간절히 기다린, 제이든의 딱딱하지만 따뜻한 말과 기다렸던 엄마의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눈빛, 까칠하지만 다정한 사미라의 욕설이 버무려진 환한 웃음이었다.

우리가 믿는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자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온 세상에 퍼진 사랑이다. 축소보다 압축이 더 어울리는 사랑이랄까, 재판장에서 달바가 자크를 당당히 보며, 엄마의 손을 꽉 잡아주는 순간이랄까. 물론 이따금 자크가 남긴 상처가 달바를 또 욱신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달바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곁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지켜주는 이들과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원 없이 사랑할 시간만 남은 달바를 응원한다.
우리의 사랑엔 그늘은 있어도 어둠은 없다, <러브 달바>에 여전히 사랑만 있듯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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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1980년대 한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감독: 정이삭
프로듀서: 크리스티나 오,디디 가드너,제레미 클라이너
출연진: 스티븐 연,한예리,앨런 김,노엘 조,윤여정
시놉시스
제이콥과 모니카는 아들인 데이빗과 딸인 앤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로 이사 오게 된다. 제이콥은 아내인 모니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행에서 무리하게 대출금을 끌어당겨 아칸소에 있는 농지를 사들였고 그곳에서 큰 농장을 만들려는 목표를 세운다. 모니카에게 있어 불편한 건 자신의 아들 데이빗이 심장병을 앓고 있어 병원까지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바퀴 달린 허름한 트레일러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반면에 데이빗은 아버지인 제이콥의 말을 잘 따르고 씩씩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자 데이빗과 앤은 내심 불편해한다. 그건 바로 자신들이 기대했던 할머니와의 모습과는 딴판이라는 것이다. 데이빗은 할머니인 순자에게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연 데이빗과 앤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어떤 존재이게 될까?
데이빗이 기대한 순자의 모습은 쿠키를 구워주고 욕설을 쓰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깨부순 순자는 손자인 데이빗에게 화투를 선물하고 험한 말을 쓰며 쓴 한약을 먹인다. 그래서 데이빗은 오히려 순자가 오는 걸 반대했고 아빠인 제이콥과 엄마인 모니카가 더 싸우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손자인 데이빗을 무척 아낀다는 걸 몸소 표현해 줬고 데이빗은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순자가 뇌졸중에 걸리고 난 후에 조금은 알게 된다.
한편 제이콥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오직 한국 품종의 씨드로만 고집했고 가족들이 물이 안 나와 불편한데도 상수도에 있는 물을 농사에다 무리하게 썼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적인 목표를 펼치려고 하는 제이콥과 달리 모니카는 가족을 위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걸 원했기에 둘의 사이는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어 미국으로 이민 온 제이콥과 모니카는 서로에게 도움이 돼주려고 했으나 무리한 빚을 안고 살아왔고 먹고살기 위해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을 해왔다. 빡빡한 한국 이민자의 삶은 쉽지가 않았고 아메리칸 드림은 힘들어진다.
이 영화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한 한국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삶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병아리를 감별할 때 수컷 병아리는 폐기하고 암컷 병아리는 쓰일 데가 많아 폐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면서 데이빗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쓸모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
영화 미나리를 보고서 필자는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쓸모 있다는 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매긴 걸까? 병아리를 감별하는 것처럼 사람도 감별되어 폐기되거나 쓸모 있게 되는 존재로 전략하고 만다. 오늘날에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사는 거는 과연 쓸모의 여지일지 생각해 봐야 된다.
병아리를 감별해 쓸모 있는 것과 폐기되는 것이 있다는 게 나름 놀라기도 했다.
2023. 10.06 (금) 20:00 영화의전당 중극장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2023. 10.04 (수) ~ 2023. 10. 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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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며 자라긴 했었지
세계관 최강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용의 전사 겸 팬더 포(잭 블랙)이다. 지금의 포에겐 걱정이랄 것이 없다. 당연하지. 빌런도 세 동물이나 때려눕혀 이젠 웬만한 악당들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 여러모로 충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친아버지 리 샨(브라이언 클랜스턴)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포는 매일이 축제 같다. 평범하게 악한들을 해치우고 인질이었던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난 어떤 날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동물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포! 타이렁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있어!”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넘기는 포. 사실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맞다. 왜냐하면 포는 과거에(<쿵푸 팬더> 1편에서) 타이렁을 때려눕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포. 하지만 포를 귀찮게 하던 여우 젠(아콰피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이건 분명 카멜레온(비올라 데이비스) 짓이야. 그녀가 누군지 아는 동물은 나뿐이지!” 귀가 열린 포. 용의 전사로서 카멜레온에게 승리해 평화의 계곡의 평화를 사수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런 영화들을 봤었지
<쿵푸팬더 4>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이 가진 근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 글쓴이는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기획의도에 걸맞게 영화는 온갖 귀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어린 동물들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다 재미있다. 혼자 노는 외로운 동물은 하나 없이 이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다 ‘아 저렇게 사이좋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구나!’라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것 같다. 또 그 아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세상을 이루고 있는가? 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다. 영화에서 젠의 본거지로 갈 때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 어린 동물들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이 영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사소한 부분도 따듯한 필치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어리다고 다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서 ‘엄마아빠 말 잘 들어야 해!’라고 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충돌하고 어른으로서 좋은 역할을 이행하는 것 같지도 않다. <쿵푸 팬더 4>는 이 지점에서는 나름 매력 있는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클리셰에 천착하지도 않았고 그걸 부수려고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든 것이다.
영화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시각적인 부분도 아이들을 고려한 듯하다. 우선 글쓴이는 이 <쿵푸 팬더 4>의 단점 중 하나가 액션영화로서 방점이 덜 찍혔다는 쪽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점은 반대로 돌아와 ‘아이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성’이란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영화가 일부러 액션의 향만 첨가하고 세계관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이유로 어떤 부분에선 영화가 기획의도를 잘 살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랑스러운 포와 젠의 모습을 보여주고 앞으로 시리즈를 예고하기만 하면 됐지 액션이 왜 필요해? 이 영화에서 쿵푸는 액션의 갈래로서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냥 서사에서 도구로서 작동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합 척척 주고받고 싸우는 모습보다 영화의 귀엽고 유머 가득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 선에서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의 일부 장면을 가져온다고 해보자. 윈터 솔저 vs 캡틴 아메리카의 맨몸 액션 장면을 보면 영화가 이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1편의 줄거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두 사람의 무력과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맨목액션을 타이트하게 짜는 것이다. 실제로 글쓴이는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를 안 봤음에도 이 영화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어떤 캐릭터인지, 그리고 왜 이 영화에서 액션이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 왜 멋있어? 당연히 이 장면 때문이지!로 요약이 가능한 것이다. 이 <쿵푸 팬더 4>는 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이랑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포와 젠에게 쿵푸가 왜 필요해? 그거야 두 캐릭터 간의 관계 때문이고, 그 내밀한 부분은 영화 안에 있기 때문이지!라고 답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사용된 색도 이를 성실하게 구현하듯 밝고 사랑스러운 톤이 중심이다. 아이들끼리 와서 무난하게 볼 만한 영화라는 기획의도를 충실히 살리는 것이다.
직구 뒤 슬라이더
이 영화에서 감독이 승부수로 던졌을 것 같은 요소는 두 가지다. 우선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둘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렸을 때 포가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그런 포를 핑(제임스 홍)이 키웠다. 이런 상태에서 친아버지를 찾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두 명이다. 요즘의 할리우드를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이 동성애 로맨스로 향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1차적인 클리셰를 비튼다. 두 동물의 관계가 로맨스라고 보기엔 많이 어렵다. 하지만 이 두 동물을 연결하는 관계는 포를 통해 다진 견고한 우정이다. 이 두 설정을 영화 안에서 캐미로 살리는 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이 영화의 감독은 ‘아버지가 두 동물인’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기까지 하는 친절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영화가 두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줄거리 내에서 굉장히 중요해서 이 부분이 이야기의 전부를 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 쓰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두 캐릭터가 사실상 본 영화의 진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특정 캐릭터들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글쓴이는 메인빌런이 ‘카멜레온’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뱁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건 영화가 수도 없이 다뤄온 클리셰 중 클리셰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적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남을 따라 하지 말고 너 자신을 찾아라”라고 하면 와닿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을 염두하고 플롯을 짠다면 뭐부터 염두해야 할까? 따라 하려는 이유 / 따라 하고 난 다음 / 캐릭터가 가진 모순 이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왜? 남을 좇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이 캐릭터가 나약한 정도를 묘사할 수 있으니까. 영화는 이 세 부분을 나름 철저하게 묘사하면서 쉬운 화법을 통해 관객들이 ‘남을 따라 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게 유도한다. 이것은 영화가 간단한 액션과 귀염뽀짝한 색감과 소소한 유머를 가졌다는 점과 시너지를 낸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듣기 거북하게 하면 역효과가 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리함을 지닌 것이다.
허무한 마무리?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그냥 무난하다. 장르적으로 뭔가 태도를 취하지만 확실하게 어필하는 무언가가 없다. 액션? 윗문단에도 적었지만 이 영화에서 ‘쿵푸’가 들어가는 이유는 인물간의 관계를 연결 짓기 위함이다. 포의 시원한 쿵푸액션을 기대하기엔 모자란 점이 많다. 또 핵심 캐릭터인 젠의 덩치를 보면 시원시원한 액션을 구현하기엔 역부족하니 영화가 이것을 염두하고 기획한 흔적도 보인다. 코미디? 영화에서 소소하게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장르적인 특성이라고 볼 정도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왜? 젠의 캐릭터성이 포의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잭 블랙의 개인기를 보기엔 영화가 이런 부분까지 보여줄 여력이 없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랑스러움? 그렇다고 보기엔 이 영화가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를 너무 대놓고 가져와서 구현한 느낌이 있다. 가령 카멜레온이 사는 동네를 보면 이 캐릭터들도 동양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핍진성의 관점에서 ‘너무 뻔한 거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화려한 볼거리? 후반부 카멜레온과 관련한 모든 장면들이 굉장하긴 하지만 드림웍스의 전작 <장화 신은 고양이 : 죽여주는 모험>을 생각한다면 역시나 심심하다. 대단히 신선하다던가 귀엽다던가 유머러스하던가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닌 기괴한 맛만 있으니 영화가 시각적인 부분을 잡으려다 만 것이다.
이렇게 내내 슴슴한 영화인 탓에 편의적인 줄거리가 거슬린다. 대표적으로 영화가 젠의 행보를 그냥 편의적으로 설정했다. 클리셰에 기댔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좀 더 불친절했거나 무언가를 암시하거나 극적인 감정선이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었다. 왜? 이 영화는 내지는 시리즈가 이 영화를 통해 해소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젠 입장이 다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 포를 상대적으로 영향이 받는 캐릭터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이유로 주인공(포)이 핍진성이 떨어지게 묘사되는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카멜레온이라는 캐릭터도 젠을 돋보이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사용됐다. 카멜레온의 액션이 더 들어갔으면 영화의 생동감이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어떤 행위'를 두드러지기 위해 캐릭터들을 소모적으로 쓴 감이 있으니 빌런의 매력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단점을 가진다.
개봉일 때가 선거날이었고 이벤트로 팝콘을 무료로 주는 이벤트를 했었다. 그럼 어머니 아버지들이 투표하고 아이들 손 잡고 영화관에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이들끼리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나 이런 영화 보고 자랐지!’하며 자랐던 영화로는 제격이다. 뭐 데이트무비로 이 영화를 고른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영화고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이 전부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 <슈렉> 시리즈나 디즈니의 <라푼젤>을 생각하면 영화가 51%짜리 성공을 거뒀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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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을 괴롭게 하는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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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었어?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한국인에게 밥이 가지는 어마무시한 메타포를,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다 알지만, 외국인의 눈에 이 먹보들은 불가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2010년에 발매된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라는 노래는 이별 후에도 밥만 잘 먹더라는 스토리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힘들어 죽겠어도 '밥만 잘 먹으면' 괜찮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러니까 먹는 걸로 장난치면 뒈지게 혼나는 거다. 가정교육의 또다른 이름은 밥상머리 교육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클럽 제로>는 한국인들이 유전적으로 가진 어떤 버튼을 딸깍 누른다.
다행히도 영화를 볼 때 나는 공복이었다. 종일 먹은 거라고는 베이글 하나뿐이었는데,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술을 좀 마셨다. 영화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 할머니랑 같이 보면 난리 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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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엘리트 학교에 영양교사로 온 노백이 아이들을 굶기는 이야기.
노백은 학부모 회의에서 추천받아 부임했다. '웹사이트'에서 추천했다는 걸로 보아, '안아키' 한의사와 비슷하다. '의식적으로 먹기'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음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극단적 논리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식사의 정치학
예시카 감독은 <클럽 제로>를 '통제'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렇다. 밥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어도 무방하다. 이를테면 옷을 통제한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날씨와 옷은 상관 없다고 시작하여 점퍼를 벗는다. 그리고 상의를 벗는다. 다음으로는 하의를 벗는다. 사실 인간은 옷 같은 건 필요 없는 존재다.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줄 안다. 옷이란 자본주의의 폐해이며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통재의 소재가 '밥'인 것은 먹는 행위가 가장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어서 끔찍하고, 원초적이기에 인간의 모든 행동양태를 통제할 수 있다.
미성년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한 이유는 수십만 개가 되겠으나 그중 보호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이를 '먹이는' 행위이다. 그러니 수많은 아동학대 중 밥 굶겼다는 항목에 공분한다. 먹이는 자와 얻어 먹는 자에게는 역학관계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밥을 굶길 수 있는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보다 우위를 점한다. 노백의 클래스에 모인 학생들이 점점 노백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학생들의 식사를 통제할 수 있게 된 노백은 완전히 그들 위에 군림한다. 마치 사이비 종교 같다. 실제 영화에서 노백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사이비와 다름 없다. 정체불명의 '어머니'를 찾으며 계시를 내려 달라 애원하고, 명상하고, 마음 어쩌고를 찾는 것까지. 사이비 교주가 사이비 신도들을 꾀는 방법과 유사하다. 사이비 신도들이 절대적 믿음을 갖는 순간, 교주가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권력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이다. 사이비 종교를 다룬 무수한 콘텐츠들에서 발견되는 맥락과 같다.
접근 방식도 비슷하다. 각자의 약점과 결핍을 파고든다.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부모 같은 자애로운 사랑을, 특히 부모가 동생만 데리고 떠난 아이에게는 '너만이 내 특별한 아이'라는 환상을 심어 준다. 가난한 싱글맘을 가진 아이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자극하며, 체중 관리를 하는 아이에게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한다.
문제되는 지점은 이들이 청소년이라는 사실이다. 교장 선생에게도 노백은 '의식적으로 먹기'를 설파하지만, 식사량을 줄이던 교장 선생은 '처음에는 좋았지만 힘들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다르다. 맹목적인 믿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논리적으로 격파하지 못한다. 종국에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노백의 말만 따른다.
미성년자-그중에서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프로아나'라는 용어가 있다. '아노렉시아(Anorexia)'를 찬성(Pro)한다는 이상한 용어인데, 이들에게도 별 희한한 '믿음'이 있다. 뼈만 보일 만큼 빼빼해지면 모두가 자기를 사랑할 거라는. 프로아나를 지향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정상 체중이다. 밥에도 미쳤지만 외모 강박에도 미쳐버린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는 먹방이 난리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프로아나가 난리다.
사실 제3자의 눈에는 이들이 빼빼마른 몸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 훤히 보인다. 맹목적인 믿음에 빠진 그들만 모를 뿐이다. 사랑에도 정치가 있으니, 권력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만큼. 부모와 자식간에도, 연인간에도. 노백의 학생들은 노백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단식에 이른다. 부모나 친구로부터 생긴 구멍을 노백이 채워주므로.
노백이 처음에 주장한 '의식적으로 먹기'도 적당히 하면 중요하다. 식사를 통제하고, 의식적으로 액상과당과 탄수화물을 줄이고, 생활을 통제하고, 핸드폰 적게 하고. 우리는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입에 음식을 집어 넣는가. 입이 심심하니까.
노백의 학생들도 초반에는 몸이 가벼워지고, 능률이 오르고 일시적으로 당뇨가 호전되는 경험을 한다.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성인이라면 '적당히'를 안다. 이 정도 통제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통제가 극단으로 치닫는 까닭은 아마도 구멍 때문일 것이다. '결핍' 말이다.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면 내 구멍을 찾아야 한다.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사랑인지. 프로아나 여학생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몸이 걸레짝이 되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노백의 수업은 통제와 가스라이팅을 하려면 반드시 구멍이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는, 그리고 그 구멍을 집요하게 파야 한다는 이상한 교훈을 안겨 준다.
밥 잘 챙겨 먹자. 맛있는 거 '의식적으로' 먹고,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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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제로(Club Zero)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상영시간: 110분
주의: 역겨운 장면 있음. 저는 비위 약해서 눈 감고 봄.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대받아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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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이선균 배우의 마지막 세 얼굴
故 이선균 배우의 마지막 세 얼굴은 포개진다. 첫 번째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2024)다.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 차정원으로 분한 그는 재난을 마주한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오히려 처음에는 정반대였다. 유력한 차기 대통령을 상관으로 둔 차정원은 모든 일을 정략적으로 처리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다. 어떠한 선택에 담긴 공적 의미가 아닌 그 선택이 표와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되는지만 기계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상관이 연루된 극비 프로젝트 때문에 되레 자신과 딸의 안전을 위협받고, 끝내 상관에게 버림받은 후 기존 가치관을 버리고 ‘생존자’로서 목소리를 낸다. 이때의 차정원은 웃는 얼굴이다.
두 번째는 〈행복의 나라〉(2024)에서의 군인 박태주다. 박태주는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에게 총을 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관으로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경호원 3명을 살해했다. 재판에서는 박태주가 내란 모의에 적극 동조했다는 검사의 입장과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변호사의 의견이 대립한다. 두 입장의 길항이 이어지고, 그렇다면 군인은 어떤 명령이든 복종하기만 하는지, 그것은 아이히만의 변명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가 의아할 때쯤 박태주가 수동적으로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군인이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박태주의 총알에는 상관의 명령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도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며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자신을 굽히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국가는 위기에 처한 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차정원의 당부는 시대를 거슬러 오른 박태주에게서 ‘국민을 지키기는커녕 되레 억누르며 위협하는 국가는 총의 주인이 아닌 총구의 표적이 된다’라고 응답받는다.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진 재판에 임하는 박태주의 얼굴은 내내 담담하고 결연하다.
그리고 차정원과 박태주가 아닌 인간 이선균의 얼굴이 있다.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2달 동안 그의 얼굴은 내내 지치고 버거워 보였다. 그는 노골적인 피의 사실 공표와 자극적 보도로 배우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비난을 받았다. 그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 책임의 형태가 결코 이런 식이었을 리는 없다. 수사기관과 언론, 유튜버와 그들이 자극적으로 재생산한 단편적 진실들을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유포하거나 품평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그에 대한 실망감을 너무 쉽게 비난의 형태로 표했고 모든 것을 손쉽게 단정했다. 내게는 이 모든 게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나중에 ‘아 그래?’ 하고 이내 잊어버렸으면 그뿐일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니었다.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낸 넓고 느슨한 연결망에서 관계 맺고 있던 나와 그가 이 추문의 파도를 마주했을 때 각자 느낀 충격의 격차는 거대했다.
나는 그의 죽음으로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의 죽음에는 나의 책임도 있었다. 자극적인 기사를 클릭하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담은 게시물을 살펴보고, 수사기관과 언론‧미디어의 행태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내가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쉽게 내뱉고……. 이후, 다시는 전반적인 진실이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추문에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그리고 그 이전의 비슷한 수많은 죽음에) 그토록 슬퍼하고 반성하던 사람들은 이내 다른 먹잇감을 찾았고 물어뜯었다. 나 역시 그런 소용돌이에 말을 보태지 않고 빠져 있겠다는 다짐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만큼 우리를 휩쓸리게 만들고 관여하게 하는 추문의 파도는 일상적이었고, 거셌다. 나는 그의 죽음이 내게 남긴 무거운 질문에서 출발한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비틀거리고 있다.
〈행복의 나라〉에는 박태주의 변호사 정인후가 막후에서 재판을 좌지우지하는 군인 전상두(전두환)와 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영화 초반, 유능한 변호사 정인후는 군인들이 선을 넘는 것 같다며 짐짓 대범한 태도로 전상두에게 재판에 임하는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영화 후반, 재판이 법의 논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른다는 현실을 절감하고는 박태주를 살리기 위해 전상두 앞에 무릎 꿇고 울며 애원한다. 전상두는 첫 만남에서의 모욕감을 몇 배로 되갚는다. 그러고는 사회가 너무 혼란스럽기에 질서를 확립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정인후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가 이 몽둥이를 들어야겠나?” 변호사가 아닌 군인이 몽둥이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인후가 기대는 법리는 전상두가 쥐고 있는 몽둥이의 힘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그리고 쿠데타로 몽둥이를 완전히 그러잡은 전상두는 우리가 알고 있듯 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약 몽둥이라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면, 그 손잡이는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군인이 아닌 보편주의에 입각한 법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전상두는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단죄받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사실상 ‘끝났다’(이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점은 이 표현을 쓰는 데 머뭇거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제 모든 국민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사받고, 재판받는다. 법의 영역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도 이 원칙을 두루 적용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만 그렇다. 현실의 이선균 배우는 그가 법치의 원칙에 따라 마땅히 누렸어야 할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했다. 이 권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북돋아야 할 법률가 출신의 위정자는 되레 정인후보다는 전상두의 방식으로 법을 대하는 듯도 보인다. 그리하여 차정원과 박태주를 경유한 이선균 배우의 얼굴은 이런 질문으로 나아간다. 총, 칼, 법, 여론 등 그 모습을 달리하며 반복해서 휘둘리는 몽둥이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 몽둥이가 꼭 필요할까? 우리는 어떻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을 그만둘 수 있는가? 몽둥이의 폭력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한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선균과 함께했음을 기억합니다”라는 〈행복의 나라〉 영화 자막을 보고 울컥했다. 다시는 그의 신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데,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여러 감정이 맞물려서 한동안 몸이 저릿저릿했다. 엔딩 크레딧까지 마무리되고, 모든 관객이 퇴장하고 혼자 앉은 텅 빈 영화관에서 그의 영화와 삶이 남긴 질문과 나의 다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이선균 배우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온 마음을 담아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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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 오브 구찌> 영화리뷰 - 아이러니한 구찌 가족의 흥망성쇠
<하우스 오브 구찌>는 최근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선보였던 리들리 스콧의 신작이다.
국내에서 연달아 극장을 찾은 그의 이번 신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에게 익숙한 명품 브랜드 ‘구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아름다운 명품을 만드는 가문 뒤편에는 무지막지한 권력 다툼과 심지어는 살인 모략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진 적이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 그녀는 아버지의 트럭회사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한다.
아버지가 쓴 영수증을 정리하는 그는 아버지의 서명을 감쪽같이 따라 쓸 수 있을 정도로 눈썰미가 좋으며 유능한 감각을 지녔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녀는 어느 날, 클럽에서 우연히 마우리치오 구찌(아담 드라이버)를 마주친다.
그의 이름을 듣고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파트리치아는 이후로 마우리치오의 주변을 맴돌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시작한다. 결국 둘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마우리치오의 아버지 로돌포(제레미 아이언스)는 밝고 상냥한 파트리치아가 마음에 들면서도, 구찌의 격과 맞지 않는 그녀의 초라한 가문을 반기지 않는다. 로돌포는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파트리치아와는 연애만 하라며, 절대 결혼은 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다.
그런 아버지의 고루한 가치관에 동감할 수 없는 마우리치오는 그 길로 집을 나와 처가살이를 시작한다.
시아버지의 트럭회사에서 일하며 평소보다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은 어느 날, 로돌포의 형인 알도(알 파치노)의 연락을 받고 그의 생일잔치에 초대된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제목 그대로 구찌 가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포스터는 레이디 가가가 연기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의 강렬한 단독 스틸로 이뤄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토록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된 한 명품 가문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스피디한 편집과 촘촘한 서사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의 불같은 사랑을 주되게 그리던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 그들이 알도의 영향을 받아 구찌 사업에 동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권력을 향한 욕구, 미신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의심, 그리고 마침내 일그러진 사랑을 하나씩 그려나간다.
마우리치오는 점점 파트리치아가 마치 ‘선을 넘듯이’ 구찌에 집착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러던 찰나에 친구였던 파올로에게 애정을 느끼며 파트리치아와 점점 멀어진다.
영화는 속도감 있는 전개로 수십 년간 구찌 가문 내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일화를 그린다.
그리하여 우리가 동경하고 사랑해 마지 않는 이 명품 뒤에는 얼마나 사람답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톺아보면서,
사실상 이들의 세계를 과도하게 풍자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교도소에 오래 복역한 뒤 출소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는 이 영화를 두고
거세게 비난한 바 있다. 물론 구찌 가문 또한 이 영화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그려졌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 영화의 이야기가 오로지 그들만의 개인사라고만 여겨질 수 없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반길 만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오락영화다.
구찌를 비롯하여 즐거운 눈요깃거리의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톰 포드와 칼 라거펠드 등 저명한 디자이너들의 옛 모습도 잠깐 나타나기 때문에, 패션에 관심 있는 관객에게는 매우 반가운 선물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오스카 레이스에서 여우주연상 부문의 유력한 후보로 점쳐지는 레이디 가가의 도발적인 연기 또한 흥미롭다.
최근 <아네트>와 <라스트 듀얼>로 계속해서 극장을 찾은 아담 드라이버 또한 반가운 얼굴이며, 제레미 아이언스, 알 파치노와 같은 훌륭한 배우들 또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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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지를
영화 <올드 가드(The Old Guard)>(2020)의 인물들은 고뇌에 휩싸인다. 앤디(샤를리즈 테론)를 비롯한 불멸자들은 영속의 삶 가운데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찾아내려 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이유를 탐구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2001)의 간달프는 프로도에게 우리는 인생에서 의도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겪지만, 그저 주어진 그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다. 간달프의 말에 힘을 보태서 생각해 보면, 사실 <올드 가드> 속 불멸자들의 고민은 해결될 수 없다. 개체의 발생적 원인과 존재적 배경을 추적하고, 삶의 궤적을 지탱하는 명분이나 당위성 따위를 되새기는 작업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주어진 순간에 몰두하여 현존하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과연 <올드 가드>의 인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앤디는 어떤 사유 과정을 거쳐서 어떤 판단을 통해 어떤 선택을 보여주었는가. <올드 가드>는 다양한 인물상을 다루기 때문에 이를 통해 고찰하기 좋은 지점들이 여럿 보이는 작품이다. 앞서 이야기한 이들의 고뇌를 바탕으로, 앤디를 중심으로 한 인물 관계 속에서 무엇을 살필 수 있는가.
앤디의 고뇌
앤디는 불멸자 중에서도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로, 그의 기나긴 삶의 궤적만큼이나 쌓인 고뇌의 순간들도 분명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앤디는 영화 속 불멸자 중 가장 연장자 대접을 받는 데다가, 연령 또한 추측이 어려울 정도로 신묘한 존재로 묘사된다. 새로운 불멸자인 나일(키키 레인)을 팀에 합류시키려는 앤디는 나일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여겼던 적도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나일은 불멸의 삶이 좋은 것 하나 없을 거라 여기고 거부하려고 하지만, 앤디는 받아들이기 힘든 걸 알고 있다며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랜 세월 동안 불멸의 존재로 살아온 앤디
이렇듯 겉으로는 모든 걸 초월한 듯 보이는 앤디는 사실 힘든 여정을 끊임없이 겪어내다 못해 지칠 대로 지쳤으며 풀리지 않는 존재적 고민을 늘 안고 살아간다. 앤디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고민하고 절망을 겪으면서 번뇌에 사로잡히곤 한다. 불멸의 힘은 앤디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강요했다. 앤디는 팀을 조직하여 일종의 용병 집단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불의로 보이는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말이 쉽지, 대가 없이 선행만을 반복하는 삶이 과연 앤디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앤디를 필두로 한 불멸자 조직은 약자를 보호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몸을 바쳐 헌신해왔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칭송받아 마땅하고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정작 행위의 주체들에겐 이러한 행위의 연속이 무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런 동기도 없고 명분도 찾을 수 없는데 뭐 하러 세상을 구하고, 누구 좋으라고 정의를 수호하려 하는가. 심지어 앤디의 말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좋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하는 듯 보이지 않는가. 여전히 세상은 각종 문제들로 가득한 아수라장이다. 초월적인 능력을 보유한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실존에 관해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점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흔히 영웅물에서도 많이 다뤄지곤 하였다.
영화에서 앤디의 고뇌는 몇몇 지점을 경유하면서 다변화되는데, 특히 가게 점원과 앤디가 대화를 나누는 신이 그렇다. 앤디는 자신에게 자초지종을 캐묻지도 않고 덜컥 호의를 베푸는 점원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한다. 점원은 당신만의 사정이 있을 거라면서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치료가 끝난 후, 점원은 오늘은 내가 치료해서 널 도와줬으니 내일은 네가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보면 일으켜주라고 한다. 아무도 혼자는 못 산다며. 이렇게 가게 점원은 앤디를 조건 없이 도와준다. 앤디가 왜 도와주냐고 묻자, 점원은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도와주는 건데 꼭 이유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앤디가 아마 이때 지난 몇 천년의 삶을 돌아보며 의미를 곱씹어 보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은 왜 그 긴 세월 동안 인류를 도우며 살아왔는가. 앤디가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가?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삶의 형태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적으로 의미를 창출하는 삶을 살았다. 앤디는 조건 없이 인간들을 도와준다. 인간들이 자신을 마녀 등의 기이한 존재로 여겨 공격하기도 했지만, 앤디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류를 구원한다. 결국, 점원을 향해 의아해하며 건네는 앤디의 질문은 역으로 자기 자신한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대화하는 신은 불멸성을 잃고 인간화된 앤디가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중요한 서사적 동력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앤디가 점원의 말을 통해 많은 걸 느꼈는지, 잠시 눈을 감으며 아주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클로즈업 쇼트에서 상기한 서사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점원의 말은 들은 앤디의 얼굴이 담긴 클로즈업 쇼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일은 앤디에게 있어서는 앤디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로, 나일을 통해 앤디는 자신의 삶을 다시 되짚어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불멸을 잃을 때, 네가 나타났어. 너(나일)를 통해 내(앤디)가 처음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다시 기억하라는 의미인가 봐”. 이렇듯 앤디는 자신을 조건 없이 도와준 가게 점원과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나일을 보면서 지금까지 사로잡혀왔던 존재적 고민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실 앤디가 고민하는 지점들은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운명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한 삶의 논리를 수용할지 거부할지는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역시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의 도출을 그럴듯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다.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존재적 고뇌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간달프의 조언대로 현존하는 삶의 흐름을 잠시 붙잡아 의미를 부여하려는 각자의 주체성에 주목할 때 우리의 삶은 어쩌면 조금 더 가치 있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 심각하게 여길 바에는 이런 삶 속에서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편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IMDb
- Netflix(화면 캡처)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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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꿈꿨던 ‘미영’
네 편의 단편영화와 함께하는
이별 여행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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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리스도 디 오리진> 메인 예고편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만나다! 폭력과 탄압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 시대 예수는 12제자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고통받던 사람들을 사랑으로 치유한다. 위기를 느낀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다. 3일 후, 예수는 자신의 예언과 같이 부활하는데… 위대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