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3-20 05:03:57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파문> Ripples, 2025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파문>은 다르다. 인물의 서사만으로 진한 감정적 파동을 일으키는 <강변의 무코리타>(2021)나 <카모메 식당>(2006)과 같으면서도 다른 보법을 가진다. 마음이 아픈 인물들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영화적 요소를 감독만의 색깔로 버무린 방식과 이들이 긴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된다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완성 ‘되어가는’ 이야기, 즉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음미하도록 유도한 연출은 같다. 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치유 과정에 집중했던 전작들과 달리 <파문>은 블랙코미디 가득한 해방 과정에 몰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삶을 ‘이미지’란 형태로 바꿔 보여준다. 극을 이끄는 주체가, 가짜 평화로부터 진짜 평화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요리코)이 아니라 그녀가 생산한 수많은 사진이란 점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장면과 장면이 연결되는 그때, 의도적인 찰나의 멈춤으로 발생한다. 카메라 화면 구성과 편집점이 계획적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공백이라 요리코도 관여할 수 없다. 그 결과 요리코의 삶이 흐를수록 관객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일본 사회)을 사진으로 인식하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가 등장하는 첫 장면을 보자. 잠에서 깬 그녀를 반기는 건 남편의 발뒤꿈치와 그의 우렁찬 코골이다. 분명 흠칫할 상황이지만 그녀에겐 익숙한 아침 풍경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는 부부(한 컷)를 통해, 함께 하지만 부부관계는 이미 멀어졌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침마다 마트에 달려가 생수를 사고, 가족을 위한 밥은 생수로, 투병 중인 시아버지 밥은 오염된 수돗물로 하는 요리코나,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우면서 며느리에게 성추행을 계속 시도하는 시아버지, 마당(꽃밭)은 애지중지하면서 방사능 괴담엔 무력하기만 한 남편, 가족보다 망해가는 세상에 더 관심 있는 아들까지 감독은 각 인물의 첫 이미지만으로 요리코가 처한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일본 여성을 향한 가족 내의 암묵적 희생 강요와 사회와 개인의 삶에 전반적으로 짙게 깔린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인한) 무기력과 자포자기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특히 두 요소는 참을 수 없는 웃음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함을 적재적소로 유발해, 블랙코미디의 맛과 이야기의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요리코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딱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기이한 평화에 갇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원전 사고와 다를 바 없는 ‘가족’ 덕이다. 세 사람은 요리코의 삶에 가족이란 이유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열심히 뿜어대고 요리코는 기꺼이 흡수하는 식인데 그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심지어 남편의 가출(자발적 실종)과 시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집 탈출로 혼자가 됐음에도 변함없다. 세 남자에게 치여 살다가, 사이비 종교(녹명회)가 만든 생명수(녹명수)를 믿으며 혼자 자유롭게 살게 된 삶은 당연히 전과 다르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일 뿐이다. 자기희생적 기질을 가진 요리코 마음에 사이비 종교가 가족을 대신해 들어온 것뿐이니까. <파문>은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리코가 남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화면이 끊기고 ‘수면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아주 짧은 영상’이 삽입된다. 공백이 그녀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단절’로 변주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주 짧은 예고편과 같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단절은 그녀에게 반갑지 않은 과정이다. 방사능이 무서워 가출해 놓고, 암에 걸려 돌아온 것도 기막힌데 비싼 항암 치료비까지 요구하는 남편과 연상의 청각장애인 여자친구를 연락도 없이 데려와 결혼을 통보하는 아들,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당당히 맞받아치는 예비 며느리, 거기에 멀쩡한 물건에 하자가 있다며 제값의 반값을 요구하는 마트 진상 손님까지, 단절 이후 벌어지는 상황이 죄다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단절로 인한 그녀의 혼란은, 진정한 해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가족들이 수면 위에서 요리코에게 가시 박힌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들의 발밑(수면)에서 시작된 물결이 그녀에게 닿는다. 이 흑백 장면들은 <파문>에서 가장 주요한 순간 포착이다. 가족의 이기심이 요리코의 고통 원인이자 전부임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얘길 하고 있다. 사실 그녀 또한 가족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는 자로 무수히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였다는 얘기도, 가족이 더 괴로웠고 그녀가 덜 괴로웠다는 식의 결론도 아니다. 가족들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준 만큼 그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상황 자체를 인지하는 일이다. 하지만 희생과 침묵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기에, 요리코는 자신의 파문을 보지 못했다. 상처받은 원인을 들여다볼 생각 없이, 또 자신에게 철저히 무지한 채, 고통받는 나를 계속 억눌러 왔던 것이다. 요리코는 진작 ‘여러 일을 겪은 나’란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살폈어야 했다. 가족들의 이기적인 행보에 화가 났고, 슬펐으며, 한없이 무력했음을, 그래서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다고 표현했어야 했다. 돌아온 남편의 칫솔로 화장실 세면대를 몰래 청소할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요리코가 진심으로 바랐던 건, 꽃밭을 없애고 만든 고산수식 정원도,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영혼 정화와 영혼의 차원을 높이는 희망도 아니었으니까.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진전이 없는 요리코에 단절은 진짜 평화를 가진 듯한 새 친구, 마트 청소부 미즈키를 소개한다. 미즈키는 요리코가 버거워할 때마다 어느새 나타나 위로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들 때가 있고,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고 말이다. 남편이 암에 걸렸든 말든 쫓아내라고 대신 화내주거나, 마음이 힘들 땐 녹명수를 마시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며, 자기가 하는 수영을 권하기도 한다. 현실적이면서 효과적이기까지 한 미즈키식 위로에 그녀는 반응한다. 그러나 미즈키 또한 내면이 곪을 대로 곪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잃고 대지진으로 집이 엉망이 된 후 완전히 주저앉았다. 쓰레기장이 된 집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건 수영복이었고,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반려 거북이 한 쌍뿐이었다. 방식만 다를 뿐 두 사람은 서로 다를 바 없는 삶을, 몰래, 숨죽이며 살고 있던 것이다.
거북이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한 요리코는 친구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모른 척해 왔던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고 오열한다. 자신에게 얼마나 무지했고 가혹했는지 깨달으며 그동안 삼켜왔던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곤 미즈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집을 깨끗하게 치워주며, 힘들었던 자신을 함께 위로한다. 마침내, 요리코의 삶에, 서로에게 대가 없는 희생이 아닌, 대가 없는 치유가 발을 들인 것이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는 거북이가 정원을 헤엄치는 걸 보며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처음으로 후련한 미소를 짓는 그녀만의 따뜻한 파문이 해방의 파도로 관객에게도 닿는 순간이다. 요리코의 깨달음 이후 단절은 사라진다. 여전히 아픈 남편과 살고 아들의 사랑도 말릴 수 없지만, 더는 그들의 파문에 힘겨워하는 요리코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귀한 녹명수를 권하는 교인에게 자기 발등을 내리찍는 눈물로, 숭배의 마침표를 찍는 그녀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남편 시신이 담긴 관을 든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집을 나온다. 가짜 평화의 축소판인 고산수식 정원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건너던 사람들은 결국 관을 떨어트리고 만다. 관 밖으로 나온 남편의 시신을 보며 모두가 당황한 그때, 요리코의 쾌활한 웃음이 울려 퍼진다. 당황한 아들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 해방의 파도에 몸을 맡긴 남편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요리코에게 해방은 무엇일까. 그녀에게도 이제 진짜 평화가 온 걸까. 요리코는 단절이 주는 절망이, 사실은 희망임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나에게서, 그들에게서 벗어났고, 동지를 얻었으며 함께 기쁨과 슬픔을 겪어내는 법도 배웠다. <파문>의 정체성이자 메시지 그 자체인 강렬한 포스터가 이를 증명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상복을 입은 요리코가 비를 맞으며 해방의 파도를 휩쓸며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한다.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는 활기찬, 감탄사 올레!! 하늘을 보고 활짝 이를 보이며 웃는 요리코가, 내면이 아픈 이들의 치유와 희망을 반드시 전하고 마는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예고편이다.
영화 <파문> 포스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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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된 두 번의 도둑질
7★/10★
두 번의 도둑질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술이 되었다. 영화 〈킴스 비디오〉 이야기다. 킴스 비디오는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운영되었던 비디오 대여점의 이름이다. 한창일 때는 회원 수가 25만 명에 달했고, 7개의 지점이 있었으며, 그중 한 지점의 소장 비디오 숫자는 5만 5천 점이나 됐다. 5만 5천이라는 숫자는 여느 대여점이나 가지고 있던 비디오로 채워진 것이 아니다.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특별했다. 직원을 전 세계 영화제에 파견해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는 영화를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비디오 대여점도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을 갖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킴스 비디오는 영화광들의 성지였다. 그리고 동시에 경찰의 표적이었다.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비디오를 대여했기에 경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FBI가 찾아온 적도 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다.
킴스 비디오는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았다. 직원조차 폐업 사실을 몰랐다. 문제는 소장품이었다. 사장인 김용만 씨는 이들을 이탈리아의 살레미로 보냈다. 수년이 흘렀다. 킴스 비디오가 있던 곳을 지나는 뉴욕 시민 중 몇몇은 그 자리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킴스 비디오〉의 두 감독은 결심한다.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이 현재 어떻게 보관되고 있는지, 그리고 김용만 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추적하기로. 여기서부터 두 번째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김용만 씨는 살레미를 예술 도시로 조성하겠다는 제안을 듣고 소장품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그러나 시장이 바뀌고 마피아가 깊숙이 연루된 복잡한 지역 정치 상황 속에서 처음의 사업 계획은 뒷전으로 밀렸다. 수만 점의 비디오는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방치됐다. 이에 두 감독은 두 번째 도둑질을 계획한다. 엉망으로 보관된 소장품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올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일부 소장품을 미국으로 반출한 이들은 김용만 씨를 찾아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고, 결과적으로는 살레미 당국 역시 여기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김용만 씨에게 자신들이 한 일을 설명하며 설렘과 두려움,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로 카메라 뒤에서 헐떡대는 감독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비디오/영화가 원해서 이 일을 벌였다’라는 감독의 변명에는 진정성이 있다. 심지어 두 감독이 비디오를 빼돌리는 과정마저 영화적이다. 두 감독은 영화적 환영에 사로잡혀, 그러니까 ‘예술’을 근거로 두 번째 도둑질을 벌였다.
이처럼 〈킴스 비디오〉에서 도둑질과 예술의 경계는 흐려지고 포개진다. 김용만 씨와 두 감독은 ‘모든 창작은 이전 창작물에 빚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수준에서가 아닌, 실제 범죄를 통해 예술을 구축했다. 〈킴스 비디오〉의 잘못을 고발하겠다는 게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예술과 법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과 법에는 각각의 논리와 체계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종종 충돌한다. 〈킴스 비디오〉가 보여주듯, 때때로 우리는 이 충돌에서 슬쩍 예술의 손을 들어줘야만 한다. 예술은 법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지만, 법은 예술의 세계를 담아내지 못한다.
영화는 예술에 관한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수많은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왜 두 감독은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와 그것에 공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일까? 소장품의 가치가 단지 희소성에만 있을까? 김용만 씨는 살레미에서 자신의 컬렉션이 방치된 상황을 접하고는 “슬프지만 그들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두 감독 역시 공유하는 생각이다. 〈킴스 비디오〉가 던지는 질문은 여기에 있다. 무엇이 예술인가, 예술은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해나갈 것인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겠지만, 누군가는 스트리밍의 시대에 그런 소장품은 보관소 자리를 그럴듯하게 차지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단정할 것이다. 어찌 됐든 영화의 경계와 정의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시대에, 〈킴스 비디오〉는 영화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답을 내놨다. 그것도 꽤 매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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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 La Pianiste
/ 감상 /
포스터에 적힌 저 글귀와 줄거리를 보고 성숙한 교수님이 제자에게
진정한 성인의 사랑을 알려주는 내용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 예상으 빗나갔다.
영화에 나온 피아니스트는 그 누구보다 어린 사람이었다.
생각과 행동 모두.
어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만 성숙한 어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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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나오는 세사람 (교수,월터,교수의엄마)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교수는 엄마의 과잉보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사랑을 부모님과 이성에게서 모두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딘가 엇나간 방식으로 자신만의 욕망을 표출한다.
교수의 엄마는 남편없는 가정에서 자신이 정신적,경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딸에게 광적으로 집착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후가 그녀에게 달려 있기때문에.
마지막으로 월터는 첫눈에 반한 교수에게 애정을 갈구한다. 아름다운 말들로.
그러나 결국 그도 가부장제가 낳은 한 남성이다.
아름다운 말들로 교수를 유혹하지만, 교수가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들도 결국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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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이런 욕망의 응집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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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며 느낀점은...
이정도의 영화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에는 나는 아직 어린것 같다.
최근들어 본 영화들 중 가장 어른스러운 영화였던것 같달까..
영화가 진하고 깊다
영왓챠피디아에서 몇몇 리뷰글을 보면 캐릭터와 상황에 공감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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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연출이랑 영상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 뭐랄까 화질이 좋지 않고 약간의 노이즈가 껴있으며, 뭔가 어둡고
약간의 감성도 있고, 과하지도 않은..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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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위페르 연기가 소름돋는다.
진짜 캐릭터에 녹아들어간 것 같달까.
마담 싸이코에서 나온 캐릭터랑 비슷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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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월터를 볼때마다 독일 축구선수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ㅋㅋㅋ
뭔가 로이스 느낌도 나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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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란하기만 한 뇌신의 사랑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합류한 천둥의 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새로운 동료들과의 모험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 공허함을 달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크리스천 베일)'가 등장하고, 토르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급히 뉴아스가르드로 돌아간다. '킹 발키리(테사 톰슨)'와 전 여자 친구이자 부서진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된 '제인(나탈리 포트만)'과 재회하여 고르의 습격을 막아낸 토르. 그는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비롯한 신들의 도움을 얻어 고르의 복수와 더 많은 신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토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우주로 떠난 토르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으로,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았다. 그래서인지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전작과 유사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이별했던 애인과 무기와의 재회가 낳은 토르의 개그와 유머는 오프닝 로고를 포함해 적재적소에 힘을 준 올드락과 어우러지며 전반적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전작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여줬던 액션씬도 여전히 호쾌하다. 토르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살린 장면들은 물론이고, 분리도 가능해진 묠니르를 활용한 망치 액션도 인상적이다.
또한 색상을 명징하게 대비하는 만화적 연출도 눈에 띈다. 특히 그림자 영역(shadow realm)에서의 전투씬이 압권이다. 화려한 색감으로 무장한 토르와 마음 가득한 절망을 표현한 듯 명암의 대조만 남은 고르의 대결은 두 캐릭터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면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이 한 데 모였는데도 <토르: 러브 앤 썬더>의 몰입도는 떨어지고, 토르의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으며, 심지어 토르라는 히어로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왜냐하면 스타일은 화려할지 몰라도, 10여 년 간 쌓아 올린 토르라는 슈퍼히어로의 캐릭터성과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르: 러브 앤 썬더>의 가장 큰 특징은 MCU의 히어로 중 네 번째 솔로 영화가 나온 첫 사례라는 사실이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도 삼부작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퇴장한 가운데, 유독 토르만 다시 한번 솔로 영화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거치며 토르라는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는 다른 방향성이 제시되었기에 가능했다. 그간 아스가르드의 왕자인 토르는 오딘의 후계자로서 아스가르드의 왕위에 올라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위의 무게감이 주는 책임감과 부담을 견뎌야 하는 역경과 시련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토르는 왕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왕이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정체성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호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다. 아스가르드의 멸망인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수르트를 처치한 것, 사카아르 행성에 갇혀 있던 와중에도 아스가르드로 되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 한쪽 눈을 잃어가면서까지 아스가르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헬라에게 저항한 것. 이 모든 것은 토르가 왕으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가 끝내 아스가르드의 왕좌에 앉은 것 역시 같은 연장선상이다.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는 수호자였기에 왕이 되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그가 타노스를 향한 복수심에 불탄 것도, <엔드게임>에서는 끝내 아스가르드를 지키지 못했다며 깊이 절망한 것도 그가 왕이기 이전에 아스가르드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천둥의 신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립해 나간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던 시리즈의 첫 두 편과 달리 전작인 <라그나로크>에서 유달리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강조된 이유다. 헬라는 그에게 왕의 자격보다도 그가 무슨 신이냐고 묻고, 오딘은 그가 망치의 신이 아니라 천둥의 신이라고 일갈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묠니르를 잃은 대신 토르는 뇌신으로서 각성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게 된다. <엔드게임>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가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타노스와 맞서는 순간,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천둥의 신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발키리에게 아스가르드의 왕을 맡긴 채 우주로 떠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왕이 아닌 토르는 수호자이고 신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탐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4편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토르: 러브 앤 썬더> 속 토르는 수호자로서, 또 신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고, 새로운 캐릭터와의 만남을 통해 두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다. 우선 수호자로서 토르는 제인과의 재결합을 통해 수호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사실 토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함께 전우주를 돌아다니며 여러 외계 행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만, 항상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들을 지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르에게 제인은 다르다. 이미 모든 가족과 친구를 잃은 토르에게 그녀는 그가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토르와 제인의 재회는 자연스럽다. 즉, 제인을 향한 사랑은 수호자로서 토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묠니르에게 그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기에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홀로 고르를 상대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제인을 보호하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수호자로서 토르의 서사를 로맨스와 결부시킨다.
한편 신 도살자인 빌런 고르와의 서사는 토르가 신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 이때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강조되는 신의 자격 역시 보호와 사랑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조차 없어 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신에게 헌신했던 고르. 그러나 정작 신이 그들을 보호하거나, 자신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분노하여 신 도살자가 된다. 이러한 고르의 분노는 인간과 신 사이에 상호 호의가 있어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고대 종교적, 신화적 질서 안에서 신은 인간에게 삶과 세상을 베풀고, 인간은 신이 베푼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그 세상을 앞으로도 유지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헌신으로서 보답하며, 이에 신은 다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영화는 고르를 통해 이 질서를 신의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고르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자, 고대의 대표적인 인격신인 토르와 제우스의 갈등 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작중 신 중의 신으로 등장한 제우스는 고르를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태 달라는 토르의 부탁을 거절한다. 제우스는 신들을 사랑했고 또 믿었던 인간의 분노가 낳은 재앙은 외면한 채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려 한다. 쿠키영상에서 그는 인간들이 토르와 같은 히어로만 사랑하고 정작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며 토르에게 복수하려 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고르에게 납치된 아이들의 믿음에 응답한 토르와 달리 제우스는 사랑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호자이자 신으로서 토르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랑에 달려 있게 된다. 모든 신을 죽이려는 찰나에 고르가 토르의 사랑을 보고 예상외의 마지막 선택을 한 것, 토르에게 다시금 지켜야 할 가족인 '러브(인디아 로즈 헴스워스)'가 생긴 것이 이를 방증한다. 또한 이는 아스가르드의 왕 대신 수호자와 천둥의 신으로서의 성장을 완결시킨 토르의 후일담 제목이 '러브 앤 썬더'인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작중 마침내 수호자와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꽃피운 토르보다 그의 성장을 돕는 두 조역, 제인과 고르의 서사가 더 빛난다는 점이다. 이는 전작의 유쾌한 분위기는 유지했지만 정작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는 토르의 캐릭터성을 살리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토르라는 캐릭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감'이었다. 가족과 고향, 무기와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면서 그는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신이라는 완벽함 대신 인간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진취적인 태도, 거기서 기인한 그의 유쾌함과 웃음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가슴 깊이 남아있는 아픔과 흉터, 상실감을 애써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는 그의 모습이 개그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엔드게임>에서 뚱보가 된 토르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상처 입은 그의 내면을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토르의 옷을 벗기는 개그 장면에서도 그의 등에 로키의 죽음을 기리는 문신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러브 앤 썬더> 속 토르에게서는 그의 웃음 뒤에 자리 잡고 있을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토르는 그저 염소들에게 시달리고, 묠니르와 스톰브레이커의 삼각관계 안에서 동일한 개그를 반복할 뿐이다. 감독판을 원한다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크리스 햄스워스 언급대로 많은 장면이 편집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MCU의 대표 캐릭터에게 기대할 법한 무게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장을 돕는 제인과 고르의 진중한 이야기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를 만나 탄생한 고르는 조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하고, 제인과의 로맨스는 그나마 토르가 진지해지는 순간이기에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서사를 완결 짓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작 토르의 존재감은 부족해진다. 그로 인해 영화의 전개와 구조는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이는 아이들에게 토르의 힘을 나눠주는 장면처럼 영화의 유쾌함이 유치함의 선을 자주 넘나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MCU에게도 어벤져스 원년 멤버인 토르의 실패는 큰 타격일 수 있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토르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매듭지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관의 확장을 시도한다.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더 많은 신들과 발할라라는 새로운 배경을 등장시키면서 그 스케일을 더욱 키우는 두 개의 쿠키 영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페이즈 4 이후 커지는 세계관에 비해 각 영화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토르: 러브 앤 썬더>도 피하지 못한 이상, 이러한 선택이 과연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과거 케빈 파이기의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지금의 마블은 작품 하나하나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적어도 <토르: 러브 앤 썬더>는 그렇지 않다는 심증에 확신을 더해준다.
D(Dreadful, 끔찍한)
유쾌함과 경박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천둥의 사랑
*Byron E. Shafer et al, Temples of Ancient Egypt.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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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벤더와 레드에서 핑크로
수학여행을 가든, 노래방을 가든, 길거리를 돌아다니든 나의 질풍노도와 함께 그녀들은 함께 했다. 어떤 날은 우리를 향해 s.e.s는 고백했다. ‘너를 사랑해, 나의 마음이, 너를 생각할수록.’ 그러다가 이에 질세라 다른 날은 핑클이 부탁했다. ‘언제나 날 지켜줄 너라고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줘.’ 계속되는 사랑 고백에 수많은 사람들은 라벤더색 풍선(S.E.S)을 들고 목이 터지라 “에쓰이에! 에쓰이에!” 외쳐댔고, 또 반대편에서는 빨강 풍선(핑클)을 흔들며 격렬하게 소리 질렀다. “핑클 짱 핑클 짱.”
빨강펄색깔은 핑클의 상징이었다. 그녀들은 가요대상을 탄 걸그룹이었다.
최초의 걸그룹 S.E.S는 라벤더 물결이 가득한 연보라빛 풍선!
철부지 녀석 하나가 내게 물어왔다. “넌 도대체 에스이에스와 핑클 중에 누굴 좋아하는 것이냐?” 평소 핑클을 좋아하던 그 녀석은 나의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이 안타까운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선 삼국지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난세의 어려움 속에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꽃과 같이 피어나는 영웅들의 이야기. 그 개개인의 인물들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 바로 삼국지에 즐거움이거늘, 위, 촉, 오중에 어느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당신은 충성스러움과 신의의 표본인 산상의 <조자룡>과 유비, 관우, 장비가 모두 덤벼도 거뜬하게 막아내는 무력과 달리 한 여인을 향한 로맨티시스트 <여포>, 도저히 승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지략으로 판을 바꾸는 <제갈공명> 등. 각 나라마다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이 많은데, 어찌 위, 촉, 오중 하나를 고르란 말인가? 그럼에도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SES에서는 유진을, 핑클에는 이진을 선택하겠다. 그러자 그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피아 식별을 향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이후 내게는 수많은 걸그룹이 스쳐지나갔다. 대학 시절 함께한 소녀시대, 군생활을 도와준 2NE1, 그러나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에 위로와 기쁨을 허락해준 두 그룹만큼의 임팩트는 찾아오기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했고 놀랍게도 그녀들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아이가 생겼고, 자연스레 그녀들도 엄마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돌 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방송에서 볼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그 시절 설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때로 라벤더 빛으로 때로 붉은 장미 빛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삼십대에 만난 <블랙핑크> 는 내 삶에 에너지와 즐거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지내던 내게 또 강렬한 색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블랙핑크> 다양한 걸그룹의 진화 속에서 한국의 팝 장르는 K-POP이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걸그룹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뉴스들을 간혹 볼 때마다, 그 시절, 보라색, 빨간색 풍선을 흔들어 대던 때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혼과 육아, 그리고 끝나지 않은 학업과 노동의 현장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잘 버티고 있다며 다독여야 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 때도 있었고, 걸그룹은 멀고 먼 이야기로 지나가고 있었다. 연일 바쁜 삶 가운데 축 쳐진 볏단처럼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헬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땀 흘리는 러닝머신 속에서 나의 속도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Hit you with that ddu-du ddu-du du”
- <블랙핑크>의 "뚜두뚜두" 가사 중에서...헬스장을 갈 때마다, 이 곡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지겹고,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트와 함께 멜로디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한 번 더 힘을 가했다. 그리고 멈추려 할 때 로제는 말했다. “두 번 생각해~” 그렇게 두 번 생각하고 있다 보면 제니는 내가 젤 좋아하는 부분을 부르고 있다. “Hit you with that ddu-du ddu-du du” 어느덧 이 노래는 삼십 대를 보내는 내게 다시 흥과 에너지를 가져다줬다. 그리고 헬스장에서 수영강으로 옮겨진 나의 무대에 블랙핑크는 때로 봄에는 휘파람으로 시원함을, 여름에는 마지막처럼으로 청량함을, 가을에는 뚜두 뚜두로 열심을, 겨울에는 불장난으로 한 번 더 뛸 수 있게 해 줬다.
자연스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를 블랙핑크의 팬으로서 즐겁게 시청할 수 있었다. 음식에 있어서 풍미를 증폭하고 개선케 하며, 밸런스를 가져다주고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재료를 통해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만든 《소금. 산. 지방. 불》을 독창적인 색감과 영상미로 이끌어주었던 캐럴라인 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지수, 제니, 로제, 리사라는 사람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블랙핑크가 되기까지의 장면들을 통해 그녀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제니의 인터뷰와 솔직한 모습은 아빠미소를 갖게 만들었다. 팬으로서 본 다큐멘터리였기에 전반적인 대부분의 내용에 몰입할 수 있었고, 특별히 그들의 프로듀서인 테디가 생각하는 블랙핑크와 노래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블랙핑크> 한명 한명의 인터뷰. 그것을 통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다큐멘터리다!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K팝을 단순히 십 대들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트로트처럼, 재즈처럼, 클래식처럼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이고, 나이와 출신과 종교와 직업을 떠나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길 바랬다. 그것을 블랙핑크를 통해서 설득시켜줄 수 있는 부분이 나왔으면 했다. 블랙핑크 다큐멘터리에 k-pop 장르의 접근성을 다뤄 달라는 것이 다소 방향성이 엇나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 K-POP은 십 대도 이십 대도 삼십 대도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음을 요청한 것은, 지금 이 나이에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대한 지지와 인정이 필요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시절처럼 신곡이 나올 그날을 매일 기다리고, 책받침과 스티커는 필요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뛰고 싶을 때, 청량한 햇살과 드라이브할 때, 덤벨을 하나 더 들어야 하는 그때...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전히 청춘과 젊음과 에너지를 느끼고 싶을때
나는 계속해서 블랙핑크를 찾을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라벤더와 레드를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는<레드>와 <라벤더>와 <블랙핑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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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한 선택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그리다, 영화 <관상>
장면장면은 다 알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영화 <관상>. 대표적인 장면들은 다 알고 있지만 스토리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장면 퍼즐들을 맞출 겸 영화를 플레이했다.
영화 <관상> 시놉시스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 삼라만상이 모두 다 들어있소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천재 관상가 내경. 처남 팽헌, 아들 진형과 산속에 칩거하고 있던 그는 관상 보는 기생 연홍의 제안으로 한양으로 향하고, 연홍의 기방에서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는 일을 하게 된다. 용한 관상쟁이로 한양 바닥에 소문이 돌던 무렵, 내경은 김종서로부터 사헌부를 도와 인재를 등용하라는 명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수양대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위태로운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 한다.*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관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BGM은 역작이 아닐까?
솔직히 장면들과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작품이어서 보다가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아는 장면의 순서를 잘 맞춰보고자 보는 영화였고, 한 번 본 작품은 쉽게 질려하는 스타일이라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도 몇 번씩 돌려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관상>은 그 지루할 수 있는 틈마다 bgm이 텐션을 끌어올려줬다.
이정재 등진신은 bgm을 이미 알고 있어서 나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했는데 이미 알고 있어도 그 bgm은 사람 심장을 쫄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bgm은 한명회가 등장할 때 소리가 울리면서 이정재가 등장할 때와는 다른 묘한 위압감을 자아내는데 캐릭터의 특징을 잘 잡아내서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데 쉽게 빠져들 수 있게끔 잘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결국 제 손으로 역모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단종을 설득시키기 위해 수양의 얼굴에 삼각형 모양의 문신을 새겨넣는 내경과 연홍. 수양이 이리의 상으로 이미 왕위를 찬탈할 만큼의 관상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 역모의 상을 직접 수양의 이마에 그려넣은 내경과 연홍을 보면서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했어도 그렇지 역모의 상인걸 알면서도 수양의 얼굴에 3개의 점을 찍얺는 그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었을까? 단종을 설득할 방법이 그밖에 없었을까? 안타까운감정이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수양이 역모를 일으켰고, 정말 관상대로라면 관장쟁이인 내겸은 수양이 역모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종을 설득하려다가 자기 손으로 역모를 일으킨 사람에게 훈풍만 불어준 격이 됐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아들까지 잃어버리는 잘못된 선택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파도가 아닌 바람을 보아라
아마 대부분의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영화 <관상>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를 "내가 왕이 될 상인가?"와 "파도만 봤을 뿐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했다."일 것이다. 나 역시 내겸의 마지막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양의 역모를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삼촌인 수양을 철썩같이 믿는 단종을 설득해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자신이 행한 여러가지 행동들을 후회하면서 하는 말이다.
저 대사를 들으면서 과연 인간이 파도만 보지 않고 바람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게 원하는대로 흘러간다면 모든 사람은 행복하고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내 마음이지만 그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도 사람이다. 다양한 일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저 말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그 여운이 상당히 오래갔던 것 같다.
영화 <관상>은 삶의 선택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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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왕비의 삶, 보통 여성의 삶 <코르사주>
영화의 제목과 같이 주인공인 엘리자베트는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이 역할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신체력은 ‘여성'이라는 미명하에 국가라는 옷에 달린 왕비라는 코르사주가 되어버린다. 왕비라는 신분은 구속이나 억압 없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엘리자베트는 영화 초반부터 흉부를 꽉 조이는 코르셋 때문에 호흡곤란으로 귀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기절한다. 지난 역사 속 여왕의 이야기를 보고 있지만 보통 여성의 삶과는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여왕이 자신의 코르셋을 조이는 하녀에게 ‘더 조여'라며 엘리자베트가 겪었을 숨 막히는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비극적인 삶에도 희로애락은 있다. 작고 소소한 일상이 공유될 때 그 사람의 미소와 눈물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솔직한 욕망이 드러날 때 우리는 주인공에게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한 여왕의 일대기가 아닌 한 여성의 삶을 공유하는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화의 결말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현실성 있는 삶이기에, 죽음만큼은 자유로웠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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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최신개봉영화(경관의 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 피아니스트, 원샷)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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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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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틱] 끝장리뷰 | 신앙에 대한 긍정 or 부정 해석 | 나비, 눈(snow) 상징 | 상승과 하강 | 두 자아
[헤레틱](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긍정 or 부정 (1)
Chapter 2 긍정 or 부정 (2), 두 자아, 상승과 하강
00:00 A24와 헤레틱
00:41 종교와 영화
02:02 신앙 부정
06:15 눈과 나비
07:24 신앙 부정
08:34 두개의 자아
09:11 상승과 하강
10:08 별점 및 한 줄 평
10:2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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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마존 활명수> 메인 예고편
막힌 웃음 뻥- 뚫어주는 우리는 류진스에염! 올가을 웃음 엑스텐 예고하는 [아마존 활명수]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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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문폴> 티저 예고편
지구와 달이 충돌한다!! ☄ [2012] [투모로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역대급 재난 블록버스터 [문폴] 티저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