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3-20 05:03:57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파문> Ripples, 2025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모두를 향한 아주 짧은 예고편, <파문>
<파문>은 다르다. 인물의 서사만으로 진한 감정적 파동을 일으키는 <강변의 무코리타>(2021)나 <카모메 식당>(2006)과 같으면서도 다른 보법을 가진다. 마음이 아픈 인물들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영화적 요소를 감독만의 색깔로 버무린 방식과 이들이 긴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된다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완성 ‘되어가는’ 이야기, 즉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음미하도록 유도한 연출은 같다. 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치유 과정에 집중했던 전작들과 달리 <파문>은 블랙코미디 가득한 해방 과정에 몰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삶을 ‘이미지’란 형태로 바꿔 보여준다. 극을 이끄는 주체가, 가짜 평화로부터 진짜 평화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요리코)이 아니라 그녀가 생산한 수많은 사진이란 점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장면과 장면이 연결되는 그때, 의도적인 찰나의 멈춤으로 발생한다. 카메라 화면 구성과 편집점이 계획적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공백이라 요리코도 관여할 수 없다. 그 결과 요리코의 삶이 흐를수록 관객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일본 사회)을 사진으로 인식하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가 등장하는 첫 장면을 보자. 잠에서 깬 그녀를 반기는 건 남편의 발뒤꿈치와 그의 우렁찬 코골이다. 분명 흠칫할 상황이지만 그녀에겐 익숙한 아침 풍경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는 부부(한 컷)를 통해, 함께 하지만 부부관계는 이미 멀어졌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아침마다 마트에 달려가 생수를 사고, 가족을 위한 밥은 생수로, 투병 중인 시아버지 밥은 오염된 수돗물로 하는 요리코나,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우면서 며느리에게 성추행을 계속 시도하는 시아버지, 마당(꽃밭)은 애지중지하면서 방사능 괴담엔 무력하기만 한 남편, 가족보다 망해가는 세상에 더 관심 있는 아들까지 감독은 각 인물의 첫 이미지만으로 요리코가 처한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일본 여성을 향한 가족 내의 암묵적 희생 강요와 사회와 개인의 삶에 전반적으로 짙게 깔린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인한) 무기력과 자포자기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특히 두 요소는 참을 수 없는 웃음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함을 적재적소로 유발해, 블랙코미디의 맛과 이야기의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요리코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딱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기이한 평화에 갇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원전 사고와 다를 바 없는 ‘가족’ 덕이다. 세 사람은 요리코의 삶에 가족이란 이유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열심히 뿜어대고 요리코는 기꺼이 흡수하는 식인데 그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심지어 남편의 가출(자발적 실종)과 시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집 탈출로 혼자가 됐음에도 변함없다. 세 남자에게 치여 살다가, 사이비 종교(녹명회)가 만든 생명수(녹명수)를 믿으며 혼자 자유롭게 살게 된 삶은 당연히 전과 다르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일 뿐이다. 자기희생적 기질을 가진 요리코 마음에 사이비 종교가 가족을 대신해 들어온 것뿐이니까. <파문>은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리코가 남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화면이 끊기고 ‘수면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아주 짧은 영상’이 삽입된다. 공백이 그녀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단절’로 변주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주 짧은 예고편과 같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단절은 그녀에게 반갑지 않은 과정이다. 방사능이 무서워 가출해 놓고, 암에 걸려 돌아온 것도 기막힌데 비싼 항암 치료비까지 요구하는 남편과 연상의 청각장애인 여자친구를 연락도 없이 데려와 결혼을 통보하는 아들,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당당히 맞받아치는 예비 며느리, 거기에 멀쩡한 물건에 하자가 있다며 제값의 반값을 요구하는 마트 진상 손님까지, 단절 이후 벌어지는 상황이 죄다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단절로 인한 그녀의 혼란은, 진정한 해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가족들이 수면 위에서 요리코에게 가시 박힌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들의 발밑(수면)에서 시작된 물결이 그녀에게 닿는다. 이 흑백 장면들은 <파문>에서 가장 주요한 순간 포착이다. 가족의 이기심이 요리코의 고통 원인이자 전부임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얘길 하고 있다. 사실 그녀 또한 가족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는 자로 무수히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였다는 얘기도, 가족이 더 괴로웠고 그녀가 덜 괴로웠다는 식의 결론도 아니다. 가족들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준 만큼 그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상황 자체를 인지하는 일이다. 하지만 희생과 침묵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기에, 요리코는 자신의 파문을 보지 못했다. 상처받은 원인을 들여다볼 생각 없이, 또 자신에게 철저히 무지한 채, 고통받는 나를 계속 억눌러 왔던 것이다. 요리코는 진작 ‘여러 일을 겪은 나’란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살폈어야 했다. 가족들의 이기적인 행보에 화가 났고, 슬펐으며, 한없이 무력했음을, 그래서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다고 표현했어야 했다. 돌아온 남편의 칫솔로 화장실 세면대를 몰래 청소할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요리코가 진심으로 바랐던 건, 꽃밭을 없애고 만든 고산수식 정원도,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영혼 정화와 영혼의 차원을 높이는 희망도 아니었으니까.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진전이 없는 요리코에 단절은 진짜 평화를 가진 듯한 새 친구, 마트 청소부 미즈키를 소개한다. 미즈키는 요리코가 버거워할 때마다 어느새 나타나 위로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들 때가 있고,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고 말이다. 남편이 암에 걸렸든 말든 쫓아내라고 대신 화내주거나, 마음이 힘들 땐 녹명수를 마시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며, 자기가 하는 수영을 권하기도 한다. 현실적이면서 효과적이기까지 한 미즈키식 위로에 그녀는 반응한다. 그러나 미즈키 또한 내면이 곪을 대로 곪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잃고 대지진으로 집이 엉망이 된 후 완전히 주저앉았다. 쓰레기장이 된 집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건 수영복이었고,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반려 거북이 한 쌍뿐이었다. 방식만 다를 뿐 두 사람은 서로 다를 바 없는 삶을, 몰래, 숨죽이며 살고 있던 것이다.
거북이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한 요리코는 친구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모른 척해 왔던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고 오열한다. 자신에게 얼마나 무지했고 가혹했는지 깨달으며 그동안 삼켜왔던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곤 미즈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집을 깨끗하게 치워주며, 힘들었던 자신을 함께 위로한다. 마침내, 요리코의 삶에, 서로에게 대가 없는 희생이 아닌, 대가 없는 치유가 발을 들인 것이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요리코는 거북이가 정원을 헤엄치는 걸 보며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처음으로 후련한 미소를 짓는 그녀만의 따뜻한 파문이 해방의 파도로 관객에게도 닿는 순간이다. 요리코의 깨달음 이후 단절은 사라진다. 여전히 아픈 남편과 살고 아들의 사랑도 말릴 수 없지만, 더는 그들의 파문에 힘겨워하는 요리코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귀한 녹명수를 권하는 교인에게 자기 발등을 내리찍는 눈물로, 숭배의 마침표를 찍는 그녀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남편 시신이 담긴 관을 든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집을 나온다. 가짜 평화의 축소판인 고산수식 정원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건너던 사람들은 결국 관을 떨어트리고 만다. 관 밖으로 나온 남편의 시신을 보며 모두가 당황한 그때, 요리코의 쾌활한 웃음이 울려 퍼진다. 당황한 아들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 해방의 파도에 몸을 맡긴 남편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요리코에게 해방은 무엇일까. 그녀에게도 이제 진짜 평화가 온 걸까. 요리코는 단절이 주는 절망이, 사실은 희망임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나에게서, 그들에게서 벗어났고, 동지를 얻었으며 함께 기쁨과 슬픔을 겪어내는 법도 배웠다. <파문>의 정체성이자 메시지 그 자체인 강렬한 포스터가 이를 증명한다.
출처: 영화 <파문> 스틸컷
상복을 입은 요리코가 비를 맞으며 해방의 파도를 휩쓸며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한다. 정열적인 춤사위는 상복 안에 감춰진 붉은 드레스를 끄집어내고, 대문을 나서면서도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는 활기찬, 감탄사 올레!! 하늘을 보고 활짝 이를 보이며 웃는 요리코가, 내면이 아픈 이들의 치유와 희망을 반드시 전하고 마는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예고편이다.
영화 <파문> 포스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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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2021)
* 이 리뷰는 영화 <미나리>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션, <미나리>
지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나리>는 오늘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도 외국어영화상과 아역배우상 총 2관왕을 차지하며 오스카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공개날 여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하여 6개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며 오스카 수상이 허황된 꿈이 아니었음을 보란듯이 증명해주었다. 연초부터 각종 비평가상과 영화제 수상을 휩쓸고 있는 화제작 <미나리>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한인 가정
1980년대, 미국 아칸소 농장의 트레일러로 이사를 온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부부의 자녀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빗(앨런 킴)' 가족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낡은 트레일러 집 대신 농사 지을 땅을 산 제이콥은 가장으로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있지만, 안정적인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 탓에 모니카는 앞으로의 현실이 막막하기만 하다. 하루는 집이 토네이도의 위협을 받아 모니카가 큰 불안을 느끼게 되고, 제이콥과 크게 부부싸움을 벌인 끝에 손자들을 돌봐주고 모니카에게 안정을 가져다줄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을 아칸소로 모셔오기로 결정한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의 삶이 더 익숙한 데이빗은 할머니와 잦은 갈등을 빗게 되고, 이웃 '폴'과 단둘이 농사를 짓는 제이콥의 수확도 녹록지 않다. 데이빗과 순자의 관계가 좋아질 무렵, 순자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고 모니카가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제이콥은 끝내 수확에 성공하지만, 제이콥의 농사, 데이빗의 심장병, 아이들의 양육, 어머니의 부양에 완전히 지쳐버린 모니카는 현실의 한계를 느끼고 제이콥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가족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게 되는데...
예상 가능한 플롯, 큰 재미는 없다
개인적으로 <미나리>라는 작품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 실적이 워낙 좋기도 했고, 극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감상한 결과 생각만큼 인상이 진한 영화는 아니었다. 1980년대 미국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발생하는 가족 간의 갈등, 낯선 곳에서 새 출발을 한다는 불안 등을 표현한 여타 비슷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작품들과 뚜렷한 차별점이 없었다. 드라이하게 가슴을 울린 좋은 영화임은 인정하지만, 이렇게까지 극찬을 받을만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미나리>에게 이어진 극찬들은 주로 해외 시상식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한인 이민자 가정을 바라보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관점 차이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움의 미학, 클리셰 탈피
<미나리>는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고, 한국어로 대사를 치지만 엄연히 미국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그 스토리의 구조와 촬영 기법, 연출 방식은 상당히 미국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는 굉장히 기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내용을 갖고도 영화가 진부하지 않게 보일 수 있던 이유는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이 절제와 비움이었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한국 가족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데, 이 부분이 바로 영화가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미나리>가 한국감독이 연출한 국내 영화였더라면, 뇌졸증에 걸린 '순자'의 죽음과 같은 신파적인 소재로 가족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성장을 이끌어내는 플롯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이삭 감독'이 만든 <미나리>는 할머니 캐릭터를 억지 눈물 짜내기 포지션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감동을 강제하지 않는데도, 드라이한 여운을 이끌어내고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나리>의 극중 배경인 1980년대는 동양인에 대한 백인들의 원색적인 차별이 만연했던 시기다. 따라서 극에 제이콥의 가족을 괴롭히거나 인종차별적 행동을 가감없이 펼쳐줄 인물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미나리>는 그러한 진부한 설정을 따르지 않는다. 교회에서 만난 백인들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적응을 못하는 모니카에게 친절을 베풀고, 데이빗이 새로 사귄 백인 친구 역시 처음에 호기심 때문에 차별적인 언행을 했을 뿐 후에 친구로 함께 잘 지낸다. 즉, 제이콥의 가족을 제외한 인물 중 악인이라 칭할 법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쓸데없는 갈등 비중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 속 이방인들이 겪는 내적 갈등에만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굉장히 사소한 설정 차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미세한 부분에서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윤여정의 순자,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
<미나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존재는 감독도, 영화도, 젊은 배우들도 아닌 배우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주인공들의 어머니이자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하며 미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K-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캐릭터가 해외에서는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사실 한국 드라마를 수백 편 봐 오고, 윤여정 배우가 등장한 수십 편의 작품들을 봐 온 시청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순자' 캐릭터에 왜 이렇게 이목이 쏠리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미나리>가 제작된 미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분명 우리가 보는 시선과 달리 보게 될 지점들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순자'는 전형적인 할머니상에서 탈피한 인물이다. 데이빗이 불평하는 것처럼 손자들에게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고,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일반적인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순자는 요리도 못하고, 손자들과 함께 화투를 즐기고, 교회에서 십일조를 훔치는 등 일명 날라리 할머니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자가 나쁜 할머니일까? 순자는 자신의 성격과 방식대로 힘든 처지에 있는 모니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자신과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손자 데이빗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이러한 뻔하지 않은 할머니의 캐릭터가 '윤여정'이라는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와 만나게 되면서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순자'라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수의 해외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극의 중심이 되어주는 할머니
극의 중후반부까지 활약을 하다가 뇌졸증을 앓게 된다는 설정으로 비중이 작아지긴 하지만, 순자라는 인물은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죽음으로서 가족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신파적 장치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차별화가 되기는 했지만, 순자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순자는 우선적으로 모니카와 제이콥의 관계를 원만하게 중재해주는 인물이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쳤을 때, 부부싸움의 언성이 최고조에 달하며 관계가 험악해졌지만 순자가 등장하면서 부부관계는 차츰 완화된다. 순자는 모니카 부부뿐 아니라 손주인 앤과 데이빗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창고에 화재를 일으키고 망연자실한 채 허허벌판으로 걸어가던 순자를 잡기 위해 아픈 심장을 뒤로 하고 용기를 내어 뛰는 데이빗은 극 초반의 말 안 듣는 철부지 손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아픈 심장 때문에 일찍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데이빗에게 따스한 품을 빌려주며 희망을 불어넣어준 할머니로 인해 그가 조금은 변화하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순자의 영향력은 극의 결말부까지도 발휘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탓에 쓰레기를 태우다 화재를 일으킨 사건은 제이콥의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작물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대형사고였다. 하지만, 결별을 이야기할 정도로 파국의 단계에 들어섰던 제이콥과 모니카는 오히려 이 대형사고를 계기로 다시 뭉친다. 농사로 꿈을 이루겠다는 제이콥의 막연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모니카의 마음은 더욱 커지고 이는 곧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계기로 작용한다. 즉, 가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준 셈이다.
한예리의 돋보이는 존재감
순자가 극 안에서 내용의 중심을 잡아준 캐릭터였다면, 모니카 역을 맡은 배우 '한예리'는 극중 미국인에도, 한국인에도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섞여들지 못한 인물을 연기하며 극의 경계선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준다. 즉, <미나리>는 엄연한 미국영화이지만, 한예리가 등장함으로써 이 작품이 완전히 미국영화로 보이지 않게끔 만들어준다. 미국인 감독이 만든 미국영화이지만, 한국인 배우가 등장하고, 한국인 가정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미국의 가족영화가 되는 것을 한예리가 끊임없이 경계해주는 셈이다.
적당한 만족감, 어쩔 수 없는 아쉬움
<미나리>는 그 어떠한 갈등이나 주된 사건전개보다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이 가져다주는 큰 불안과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방인들의 내적 갈등이 가장 큰 중심 소재다. 이러한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모니카다. 극 후반부 제이콥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한계와 울분을 표출하는 한예리의 연기는 모니카라는 인물이 견뎠을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를 충분히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윤여정이나 아역배우에 연기에 좀 더 포커스를 두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예리의 존재감이 가장 빛났다고 느낀다.
<미나리>는 한 이민자 가정의 삶이라는 굉장히 사소해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지만, 영화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면 분명 잘 만든 영화다. 비슷한 플롯의 작품들을 답습하지도 않았고, 한국영화와 미국영화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오묘한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담아냈으며 배우들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하지만, 현재 <미나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극찬들에 진정으로 부합되는지는 영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영화 감상을 마쳤을 때, '정말 잘 만든 영화다'라는 생각보다 '이렇게까지 극찬 받을 영화인가?'라는 생각이 앞섰다는 것은, <미나리>가 준수한 작품 이상의 무언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부한 노선을 탈피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신선함을 더하지는 못했다. 인물들의 행동이나 성격, 이민자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모든 게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이하다는 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미나리>에게 걸었던 기대가 드라이한 만족 정도였을까. 호평일색인 평가들이 왠지 조금은 과하게 느껴진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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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묘하게 맛난 영화
* 대략적인 줄거리 포함.
영화 <프렌치 수프>는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미식의 세계를 그린 영화다. 연출은 베트남계 프랑스 영화감독 트란 안 홍이 맡았다. 트란 안 홍은 장편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씨클로>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영화 <프렌치 수프>로 감독상을 받아 칸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선택을 받았다.
영화는 사계절의 자연 속에서 음식을 만드는 <리틀 포레스트>처럼 음식이 만들어지는 주변 환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채소가 가득한 정원, 요리에 쓰일 재료를 솜씨 좋게 채취하는 장면, 보랏빛으로 무성한 들꽃과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숲, 넘실대는 물살에 햇빛을 반사하며 흐르는 강물......
줄리엣 비노쉬(외제니 역)와 브누아 마지멜(도댕 역)은 각각 당대 최고의 요리사와 미식 연구가로 출연한다. “맛있고 좋은 요리를 발견하는 일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일보다 인류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음식을 향한 도댕의 자부심. 급이 다른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 준비부터 요리 과정까지 모든 절차를 섬세히 다루며 두 인물의 심리와 미묘한 관계를 영화는 세심하게 담아낸다.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은 함께 요리를 만들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키워나갔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도댕은 기어이 외제니에게 청혼을 한다. “결혼은 코스 요리 중 디저트를 먼저 먹는 거와 같다.”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자유를 누리며 온전히 두 사람의 사랑이 깃든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 외제니는 요리사가 아닌 아내가 되기를 거절한다.
그녀가 쓰러져 눕게 되자,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도댕은 모든 정성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외제니에게 맛보게 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고민하여 만든 최상의 음식은 지극한 사랑의 풀코스 선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행위는 달콤한 사랑의 언어보다 더 강렬한 시적 표현이었다.
실제 부부였고 칸 영화제에서 각각 남녀 주연상을 받은 두 사람의 연기 호흡과 존재감은 화면에 빨려 들어가게 했다. 다만, 대화 중에 나오는 19세기 후반의 갖가지 프랑스 요리나 다양한 와인 브랜드만으로 맛이나 향취를 상상하기 어려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책이나 원작인 만화로 보았으면 구글을 검색했으리라.
극장을 나서면서 영화의 원제가 ‘The Taste of Things’라는 게 가슴에 와닿았다. 사물, 혹은 인생의 맛이 달콤(sweet)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쓰라린(bitter) 고통을 주기도 하지 않는가. 두 남녀 주인공의 운명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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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 모음 _망원동 팝업 공지
[클로저 팝업 공지] @closer_kr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오늘, 20일(금)부터 ~22일(일)까지 망원동에서 영화 팝업을 진행하는데요. <나를 찾아가는 시간> 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찾아가는 영화 주인공들의 모습들이 담긴 명대사, 굿즈, 각종 이벤트까지 준비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셔서 가을, 겨울 향취 듬뿍 담긴 영화 같이 느껴보아요자세한 일정은 맨 끝장을 참고해 주세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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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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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원 씨, 껍데기가 참 무겁죠?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전, 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작품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넷플릭스가 버릇 나빠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 시작했다. K콘텐츠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것은 인정하지만. 그 뒤로 넷플릭스를 뒷배 삼아 제작된 한국 작품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도, 그렇다고 참신하지도 않았기 때문.
게다가 최근 작품들에서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배우가 주연진에 들어차고 있다면, 배우의 이름값으로 인해 반가우면서도 작품 자체에 대한 우려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OTT시청자들에게야 작품 하나는 그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작품이 별로라면 손쉽게 종료 버튼 한 번으로 물려버릴 수도. 좋았다 하더라도 또 다른 좋은 것들에 파묻히기 좋을 작품들 중 하나로 남아 버릴 테니.
그러나 넷플릭스에게도. 그리고 출연진들에게도. 작품 [전, 란]은 매우 상징적인 작품이 될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대한 억울함도. 그동안의 치욕도. 함께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의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는 소리를 반드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특히 시청자의 입장인 내게는 몇몇 출연자들에게 이번 작품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게 느껴졌다. 배우 차승원의 경우 선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수라간에서 더 많이 마주칠 것만 같았고. 천하의 연진이도 입 닫게 만든 말솜씨의 나이스한 강아지 이미지를 과연 정성일 배우가 벗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궁금증이자 의문은 배우 강동원에게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는 배우로서의 꽤 많은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매번 배어 나오는 사투리.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얕은 호흡과 그로 인해 더 처참한 대사 전달력. 그리고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데 절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공을 세웠겠지만 그와 동시에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 벚꽃을 뿌려준 것만 같은 그놈의 용안(?)까지.
그 후광효과를 깨고 진정한 배우로 인정받기까지 무던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특히 최근 작품들에서는, 아쉽다기보다 절망에 가까웠다. 그에게 단단히 결속되어 벗겨지지 않는 이 껍데기를 과연. 이번에야말로 주연 배우의 위치에서 벗어던질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였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작품 바깥에서의 상황은 작품 속 인물들이 맞이한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자신의 것이 아닌 영광을 가진 종려(박정민;AKA 짜증계의 신예)와 거적때기에 불과하지만 청의검신으로 불리게 해 준 옷과 검을 걸친 천영(강동원)의 모습이 그러하다. 만인지상이라는 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붉은 옷과 그 한 글자를 제외하면 그저 생떼 쓰는 수염 난 늙은 아이에 불과한 선조(차승원)까지도.
등장인물들은 껍데기가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거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기도 한다. 좋든 싫든 영화 속 인물들은 상황에 맞게 자신이 지녀야 하는 그 껍데기를 꾸깃꾸깃 눌러쓰고 삶을 연장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배역과 배우로서의 껍데기를 가장 먼저 벗어던진 사람은 놀랍게도 정성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이 켜켜이 쌓인 껍데기 논란(?)에 가장 맞닿은 통쾌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청의검신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겐신은 자신의 신분을 은닉하기 위해 꾹꾹 눌러썼던 갓을 홱 내팽개치고 말에 박차를 가한다. 앙다문 입 사이로 그의 숙적을 향한 결의가 비치는 순간은 짧았지만. 하도영의 남은 그림자를 완벽히 날려버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정성일 배우는 자신의 숙적과의 결투를 고대한 장수인 겐신 그 자체였다.
겐신으로 재탄생한 정성일 배우와 가장 많은 대립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천영이다. 그리고 다행히 배우 강동원은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약점을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했다. 이 정도면 "스울 사람"이라고 봐도 될 법한 수준의 언어 구사. 염소 같은 목소리의 소리침이 아닌. 그래도 제법 포효의 느낌이 나는 호통과 절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게 스턴트 장면을 해낸다는 장점까지 십분 살려, 두 사람의 대결 장면은 꽤 긴장감 넘치는 "대등한"승부를 보여준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출처:다음영화
하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는 연기자들의 호연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이야기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개연성도 마음에 날아와 박히지 않고. 종려와 천영사이의 오해가 빚어내는 과정도 매끄럽지 못하다. 꽤 많은 장면들이 그저 다음 장면을 위한 흐름에 쓰일 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쉽지 않다. 그로 인해 극 중 존재하는 모든 갈등이 깊어지기보다 퍼지기만 해서 극의 후반부에 도착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또한 극 중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너무 극대화되어.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어느 작품에나 악역이나 천덕꾸러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애초에 "그럴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형성되기 쉽지 않다. 분명 장면들은 아름다운데. 그 안에서 뛰어노는 인물들에서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결국 극 중 거의 모든 배우들의 선입견을 날려버릴 만큼 애쓴 영화임에는 확실한 이 작품은. 볼만한 장면들이 분명 많음에도 불구하고 봐줄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이 글의 TMI]
1. 어제 상체 PT 받고 버스 손잡이도 못 잡는 휴먼이 됨.
2. 아보카도랑 눈치싸움 드럽게 힘드네.
3. 2025년 다이어리 구매 완료
4. 왜 아직 월급날 아니지?
#리뷰 #영화리뷰 #munalogi #넷플릭스 #전란 #박정민 #강동원 #정성일 #진선규 #김신록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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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택하더라도, 청춘
청춘(靑春)
1.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시절. 또는, 그 시절.
2. 왕성한 정열과 힘찬 기세와 기백으로 나아가는 상태를 비겨 이르는 말.
(출처: Oxford Languages)
'청춘'을 다룬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껴안고 있는 두 여인과 그들을 지켜보는 한 사람의 실루엣, 영화 감상 전부터 호기심과 긴장감이 솟구쳤습니다. 청춘을 그리는 대만 영화 특유의 방식을 사랑하기에 이 영화를 거리낌 없이 선택했습니다. 제58회 금마장 영화제 공식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청춘시련>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11월 22일(화)에 진행된 <청춘시련>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청춘시련>은 2022년 12월 1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청춘시련
Terrorizers
'샤오장'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유팡'에게 그녀와 같은 집에 살던 '밍량'이 칼을 휘두릅니다. '샤오장'은 간신히 그를 막아섰죠. '밍량'은 옛 애인이라서 그랬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청춘시련>은 한 도시에 사는 '유팡', '밍량', '샤오장', 그리고 '모니카'의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젊음은 무서울 것이 없고 사랑한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 포스터 속 카피는 <청춘시련> 속 젊은 청춘들이 죄와 결부될 만큼의 위험한 사랑을 하고 있음을 넌지시 시사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의 인물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문제들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밍량'은 검으로 사람을 베는 게임에 심취해있고(게임 중독), '모니카'는 과거에 촬영한 포르노 영상물을 동의 없이 배포한 전 애인으로 인해 배우 인생의 발목이 잡혔습니다(불법 유포). 이 와중에 '모니카'의 포르노 영상물을 보고 사랑에 빠진 '밍량'은 그녀의 뒤를 쫓고(스토킹), 외로움과 공허함을 겪던 '유팡'과 '모니카'는 서로를 보듬어주다가 관계를 갖습니다(성소수자).
청춘들은 본디 종잡을 수 없습니다. '청춘'이라는 이름을 제목에 달고 나온 영화라서 그런지, 이 영화의 이야기도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쉽게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청춘이듯이, 이 영화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청춘들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택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겪는 '청춘시련'이니까요.
⊙ ⊙ ⊙
그렇지만 "젊음은 무서울 것이 없고 사랑한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카피와 '청춘시련'이라는 제목으로 포장하기에 '밍량'의 행동은 도를 지나칩니다. 망상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범죄자가 되는지를 그리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우연히 포르노 영상 속 배우 '모니카'를 길거리에서 만난 '밍량'은 그녀에게 푹 빠진다. 귀가하는 '모니카'의 뒤를 쫓아 몇 층에 거주하는지 알아내고, 키를 복제해 몰래 집에 들어가 자는 '모니카'를 지켜본다. '모니카'와 사랑에 빠졌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모니카'를 힘들게 하는 전 남자 친구를 대신 폭행해주기도 한다.
여느 때처럼 '모니카'의 집에 숨어든 어느 날,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유팡'을 목격한다. 외국으로 떠나는 '모니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겁내지 말아요, 내가 지켜줄게요. 시집와요. 결혼해요."라는 헛소리를 시전하다가 경비원에게 붙잡힌다. 더는 '모니카'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그는 몰래 촬영한 '모니카'와 '유팡'의 성관계 영상을 유포하고, '유팡'에게 칼부림한다.
영화의 원제가 'Terrorizers(공포감을 조성하는 사람)'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주목하려는 인물이 바로 '밍량'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묘사한 것처럼 영화 중후반부를 장악하는 '밍량'의 이야기는 이처럼 거의 스토킹 범죄자의 범행 진술서와 같은 수준입니다. 피해자의 극복 과정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만을 뒤쫓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르죠. 범죄자 '밍량'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 사용한 시간과 열정을 다른 인물들에게 할애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 ⊙
"청춘, 청춘이여! 할 말이 없을 때 다들 이렇게 말하지."
극 중에서 연극에 도전하는 '모니카'의 대사를 빌어 이 영화의 감상 후기를 요약하고 싶습니다. 다들 할 말이 없을 때면 청춘을 들먹이곤 하지만, 청춘이라는 말로 포장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법입니다.
Summary
떠났다, 모두가.
분명 날 사랑한다고 했는데도.
어느 대낮, ‘밍량’은 데이트 중인 ‘유팡’에게 칼을 휘두르고 도주한다.
그는 자신이 ‘유팡’의 전 애인이라고 주장하고, 사건에 휘말린 네 명의 청춘이 서로를 마주한다.
도시를 충격에 빠트린 최악의 사랑
난, 떠나지 않는 사랑이 하고 싶어
Cast
감독: 호위딩
출연: 린 바이 홍, 이목, 지크린, 진정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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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결말포함]9.79점의 첫사랑을 자식들이 대신 이루어 준다면 설레임주의!!
#로맨스영화#조인성#첫라랑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무비워크 #영화리뷰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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