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3-17 15:03:45
3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북미 박스오피스 올해 최저 수익 기록, 위기에 빠진 극장가

극장가의 위기는 팬데믹 이후 매년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최근 극장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가 총 5,470만 달러로 올해 최저 주말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파라마운트의 신작 <노보케인>이 누적 수익 870만 달러로 1위를,
<미키 17>과 <블랙 백>이 누적 수익 약 750만 달러로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하며
한 주말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도 1,000만 달러를 넘지 못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썰렁한 극장가에 곧 개봉을 앞둔 디즈니의 실사영화 <백설공주>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펼친 인상적인 가창력과 연기력을 뽐낸 레이첼 지글러가 주연을 맡은 <백설공주>는
북미 개봉 첫 주 5,000만~5,6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대받고 있습니다.

국내 극장가 역시 한산하긴 마찬가지입니다.
1위를 차지한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주말 관객 수 32만 명을 불러들여 누적 관객 수 26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인기 애니메이션을 극장판으로 제작한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이 누적 관객 수 20만 명을 돌파하며 2위를,
교황 선거를 다룬 <콘클라베>가 지난주에 이어 3위에 올랐습니다.
가장 최근 개봉했던 디즈니 프린세스 실사 영화인 <인어공주>가 국내 누적 관객 수 64만 명에 그친 가운데,
오는 19일 개봉하는 새로운 프린세스 실사 영화 <백설공주>는 관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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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의 눈으로 담아낸 모순의 그 날
아이의 눈으로 담아낸 모순의 그 날
영화 리뷰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감독] 마크 허만
출연] 에이사 버터필드, 잭 스캔론
시놉시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나치 장교의 아들이었던 소년 브루노가 아빠의 전근으로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그의 아빠는 그저 군인이 아닌 나치의 최고 엘리트 장교 중 한 명. 농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학대를 받은 아우슈비츠다. 숲 속을 거닐던 브루노는 철조망을 발견하게 되고 슈무얼이라는 동갑내기 유대인 소년을 만나 친구가 된다. 전쟁, 학살이라는 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우정은 끔찍한 결말을 가져오게 된다.
#스포일러 주의#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은 주인공 브루노와 슈무얼의 눈과 얼굴이다. 다른 영화였다면 짧은 컷 정도 할애되었을 장면일텐데 상대방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도 브루노와 슈무얼의 얼굴과 눈이 클로즈업 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자신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해보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은 어리고 모험심이 강한 브루노는 폐타이어 그네를 타고 놀다가 다치게 되고, 그 상처를 집에서 일하던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할아버지 파벨이 치료해준다. 파벨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오기 전까지 유대인 의사였지만 이곳에서는 감자를 깎으며 지내고 있는데, 이런 파벨을 보면서 브루노는 할아버지에게 의사면서 왜 감자만 깎고 있냐며 천진난만하게 말한다.
이렇듯 브루노의 눈에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왜 그 옷을 입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 직업이 아닌 농부로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철장 밖을 나오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슈무엘 역시 자신이 왜 갇혀 있는지, 그리고 옆에 있었던 친구들, 그리고 아빠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도, 이유를 알 수도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특히, 나치의 모순적인 행동이나 대화가 오갈 때 브루노 혹은 슈무엘의 눈을 비추면서 그들의 대화나 행동을 듣게끔 화면이 구성되는데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서 관객들도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나치를 보게 된다. 이를 통해서 나치의 행동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지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독일인 사이에서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을 수용소라는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반인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의 눈을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었다.
교육과 사랑의 잘못된 시너지교육과 사랑이 과연 아이들의 가치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 대답을 단적으로 해줄 수 있는 영화 속 장면이 있다. 브루노의 누나 그레텔은 인형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우슈비츠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학교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없었고, 아버지는 그녀와 브루노에게 가정교사를 소개해준다. 그 가정교사는 뼈 속까지 나치로, 독일인이 얼마나 위대하고 현재의 나치가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 남매에게 가르쳤다. 어려운 책에 관심이 없었던 브루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레텔은 선생님이 가르친 내용을 온몸으로 흡수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집에 자주 방문하는 잘생긴 코틀러 중위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치즘 신봉자인 그에게 영향을 받은 그레텔은 교육과 사랑의 시너지로 완전히 변화한다. 방 한쪽을 가득 채웠던 인형들이 지하실로 다 옮겨지고, 그 자리에는 나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포스터들이 가득 붙여진다.
나치를 접하지 않았던 그레텔이 교육과 사랑을 통해 나치즘을 접하면서, 게다가 자신의 가치관이 자리잡을 청소년 시기에 접한 나치즘은 그녀에게 우상이 되고 말았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브루노를 챙겨주는 자상한 누나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거칠어져가면서 순진무구한 브루노를 못마땅해하고 무시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레텔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청소년 시기 교육과 사랑이 청소년의 가치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라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죽일 줄은 몰랐지
영화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까지는 굉장히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러던 어느날 슈무엘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브루노에게 알리고, 브루노는 슈무엘을 모른척해서 슈무엘이 곤란해졌던 과거의 일을 반성하는 의미로 그의 아버지를 함께 찾아주기로 약속한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었던 브루노와 슈무엘은 땅을 파서 브루노가 수용소 안으로 들어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보는 계획을 짜고, 결국 브루노는 이사를 가기로 한 날 몰래 집을 빠져나와 슈무엘을 만나러 간다. 그들의 계획대로 브루노는 땅을 파서 철조망 사이로 들어가고, 슈무엘이 준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수용소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아버지를 찾아 들어간 막사에서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치면서 어디론가 다같이 끌려간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바로 샤워실. 샤워기를 통해 독가스를 뿌려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브루노와 슈무엘은 ‘샤워를 시켜주나봐’라고 말하면서 두려운 마음을 잠재운다. 어린아이들의 시각에서 샤워실에서 독가스가 나올 것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브루노와 슈무엘은 샤워실에 갇혀 죽고 만다.
브루노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아빠와 엄마는 부리나케 수용소로 달려오고, 근처 철조망에 남겨진 브루노의 옷과 이미 가스실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된 아빠와 엄마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오열을 한다. 단 한번도 샤워실에 널려진 옷들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아버지 랄프. 그는 처음으로 샤워실에서 죽어간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그동안 행해왔던 일들이 얼마나 반인륜적인 행동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던 공간에서 자신의 아들이 살아있길 바라는 랄프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나치가 모순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제목처럼 소년의 눈으로 모순적인 나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결말로 꽤나 충격을 안겨 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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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 스카이> -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진짜 하늘로 뛰어들다’
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
개봉일 : 2001.12.21. (한국 기준)
감독 : 카메론 크로우
출연 : 톰 크루즈,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커트 러셀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진짜 하늘로 뛰어들다’
완벽한 현실과 완벽한 꿈, 순식간에 뭉개져버린 현실과 여전히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는 꿈. 현실과 꿈의 경계가 조금씩 모호해지고, 눈을 뜬 순간 머물고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순간. 내면 깊은 곳에 품어뒀던 그녀가 말을 건다. “눈을 떠!”
33살의 젊은 나이, 잘생긴 얼굴과 튼튼한 몸에 잘나가는 출판사 사장인 데이빗은 언제부턴가 자각몽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사고로 부모님을 일찍 여윈것을 제외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소위 말하는 달달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다. 데이빗도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단점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뿐인데, 그의 인생에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 브라이언과 데이빗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친구 토미 아저씨. 그리고 가끔씩 같이 밤을 보내는 파트너 줄리. 데이빗의 인생엔 절망과 실패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인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데이빗의 삶이 망가지게 된 건 데이빗에게 상처를 입은 줄리가 그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한 순간부터였다. 소피아와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하루는 종잇장이 바람에 날리듯 순식간에 뒤집어져버린다. 데이빗의 얼굴은 무너져내렸고, 사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회사 위원회는 데이빗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이빗은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하고, 의사들이 내민 가면을 쓰며 자신의 얼굴을 외면한다. 매일 아침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얼굴이 아닌, 수술 자국이 가득한 망가져버린 나의 얼굴. 그리고 운명이라 느낀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없을 거란 좌절감이 그를 휘감는다.
눈을 마주친 순간,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인생을 바꿀 운명이라 직감했던 그녀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사고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데이빗을 제자리로 돌려줄 수 있을까. 쓰디쓴 것이 현실이고 달콤한 것은 꿈인가. 처음으로 마주한 쓴맛 가득한 현실은 데이빗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바닐라 스카이 시놉시스
남다른 매력과 탄탄한 재력으로 수많은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데이빗 에임즈. 그는 유력 출판사와 잡지사를 운영하는 와중에 줄리라는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는 단지 섹스 파트너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빗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온 친구 브라이언의 애인 소피아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녀가 바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하는 데이빗. 소피아 역시 그에게 이끌려 둘은 뜨거운 연인 사이가 된다. 하지만 데이빗에게 버림받은 줄리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이들을 미행하고, 마침내 데이빗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사고 이후 데이빗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자기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것을 알고 괴로워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눈을 떠”
아침이면 얄짤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 데이빗은 그 소리에 눈을 뜬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살핀다. 오늘도 여전히 완벽하군-이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현실 같은 꿈을 한번 꾼 것을 제외하면 이상할 것 없는 완벽한 아침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33살의 나이에 오른 잘나가는 잡지사 사장 자리. 밤을 보내는 파트너 ‘줄리’. 그리고 자연스레 꼬이는 이성들. 데이빗의 절친 브라이언은 방탕한 데이빗의 생활을 보며 “어느 날 진짜 사랑을 알게 될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가온 데이빗의 생일날, 브라이언의 조언은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데이빗은 브라이언이 데리고 온 친구 소피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저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감정 말이다. 이렇게 얘기하자면 참 나쁘지만, 데이빗에게 줄리는 전자였고 소피아는 후자였다.
진정한 사랑이자 완전한 단맛. 데이빗은 완전한 단맛을 내는 사랑을 찾아 소피아의 뒤를 따른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던 줄리는 데이빗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고, 브라이언에게 자신을 ‘그냥 친구’라고 말했던 데이빗에게 다시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데이빗은 줄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냥 친구’라도 좋으니 오랜 시간 데이빗의 곁에 머물며 사랑을 갈구했던 줄리는 오디션 탈락의 절망감과 데이빗이 남긴 상처에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충동적으로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높은 곳이 아니라 떨어질 때 충격이 무서워요.”
항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데이빗은 줄리가 일으킨 사고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다. 몸이 망가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커다란 수술 자국이 남은 얼굴로 인해 회사에도 나가지 못한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이 추락을 두려워했을 뿐 실제로 알 순 없었다. 떨어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떨어진 곳에 남겨진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데이빗은 자신이 이제 온전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누굴 믿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고, 매일같이 잔인한 장난으로 나를 조롱하는 꿈이 이어진다. 얼굴은 상처로 망가졌고, 걸음은 느릿하게밖에 걸을 수 없고, 멋진 옷을 입을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의사들에게 되돌려놓으라며 분노를 터트려봐도 돌아오는 건 ‘전 같은 얼굴’이 아닌 기묘한 느낌이 드는 가면뿐이다.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현실이다.
“정신 차려, 안 그러면 그 남자를 잃어버릴 거야.”
내일 당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나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자기혐오에 지쳐버린 데이빗은 브라이언과 소피아를 만나 클럽에 간 날, 술을 진탕마신다. 데이빗은 가면을 뒤통수에 딱 붙인 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춤을 춘다. 어둡고 혼란한 클럽 안에서만큼은 그의 다른 점을 눈치챌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데이빗을 본 브라이언과 소피아는 이전의 데이빗이 그립다고 말한다. 데이빗은 여전히 꼬인 마음으로 브라이언을 등지고 서서 가면을 쓴 뒤통수로 말한다. “난 재수 없는 놈이야!”라고. 기이하고 부대끼는 느낌이 든다. 데이빗도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꿈보다 못한 현실에 지쳐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하다.
가면을 바닥에 던지고, 포기하듯 눈을 감은 밤이 지나고 다른 날보다 맑고 아름다운 하늘이 기다리고 있던 날,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소피아는 길거리에서 잠든 데이빗에게 돌아왔고, 그의 삶엔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데이빗은 이제 실연의 아픔을 겪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수술을 통해 완벽히 얼굴을 되돌리는데 성공한다.
“쓴맛을 모르면 단맛도 모르는 법이야.”
데이빗의 품에 안긴 소피아가 묻는다 “이게 꿈일까?” 데이빗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니, 절대.”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한, 이전과 같이 완벽히 달달한 삶이다. 아니, 인생의 쓴맛을 봤으니 전보다 더욱 달달하게 느껴지는 삶. 하지만 이 모든 건 데이빗이 선택한 죽음 후에 따라온 자각몽이었다.
식당에서 본듯한 남자의 존재, 사라진 소피아와 자기가 소피아라고 우기는 줄리. 살인 사건에 얽힌 나와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겠다는 박사. 가끔씩 찾아오는 악몽에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면 그곳엔 ‘예전과 같은 내 모습’이 존재하고 있는데, 어찌 된 것인지 모든 순간이 의심스럽게 변하고 있다.
진짜 소피아와 함께 봤던 TV 속에 나온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광고한 레이몬드 툴리의 회사 ‘LE’. 데이빗은 현실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LE와 계약을 진행한다. 그게 어느덧 150년 전 일이다.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은 가면을 벗으며 “나 깰래!”라고 소리친다.
현실의 데이빗은 나이트클럽에서 진탕 취했던 날 이후로 소피아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어찌어찌하여 회사를 되찾긴 했으나 그는 쓴맛만 남은 인생에 지쳐간다. 그렇게 LE와 계약을 하고 수많은 알약을 털어 넣은, 처음으로 진정한 선택을 했던 순간부터 150년이 지나 이제 다시 선택을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고층 건물의 옥상. 소피아가 아름답다고 말했던 ‘바닐라 스카이(원작:아르장퇴유의 센 강)’속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데이빗에게 소피아는 생일파티날, 브라이언과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만났던 날. 딱 이틀밖에 만나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무용수라는 것과 꿈을 품고 뉴욕에 왔다는 것, 그녀의 눈빛이 순수하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데이빗의 자각몽 속에서 단 하나뿐인 구세주가 된다. 좋아하던 로맨스 영화의 장면처럼 흘러가는 소피아와의 순간들,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아버지상을 투영한 커티스 박사, 전처럼 완벽하게 돌아온 얼굴. 데이빗이 원하는 것들로 채워진 자각몽은 완벽한 단맛의 인생이었다.
150년이 지난 지금, 이대로 행복하게 자각몽을 꾸며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베니처럼 다시 깨어나 ‘진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데이빗은 망설이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소피아는 이미 세상을 떠났겠지만, 이제라도 현실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데이빗은 자각몽을 꾸기 이전, 33년의 세월을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데이빗은 커티스 박사에게 아버지가 자신의 고소공포증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사에게 꿈 이야기를 꺼내놓기 전, “나더러 미쳤다고 할거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커티스 박사는 무조건 믿는다며 데이빗을 위로한다. 데이빗은 커티스처럼 무조건적으로 나를 믿어주고 위로해 주는 아버지를 바랐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그의 바람과 달랐던 것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린 나이로 회사를 떠안게 된 소년은 51%의 지분을 노리는 일곱 위원회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며 자랐을 것이다. 비즈니스 관계로 얽힌 수많은 사람들을 생일파티에 초대하면서도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브라이언뿐이었던 데이빗의 인생은 달콤하고도 무거운 것이었다. 그 무게를 지고 높은 곳에 서있던 데이빗에게 가장 두려운 건 무거운 것을 안고 떨어질 때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이빗이 자각몽을 끝내는 조건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걸 적어낸 이유는 자신의 선택에 진정한 확신이 섰을 때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만장자가 아닌 곧 사라질 돈만 남은 인생, 소피아가 사라진 인생. 가면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꿈 대신 많은 것이 사라진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자각몽이라는 가면을 쓰는 게 아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데이빗’과 자신의 단점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상처받은 과거에 멈춘 채 미래를 그리는 것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빗은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두려움을 극복하고 바닐라 스카이에 몸을 던진다. 유일한 친구인 브라이언은 꿈에서 깨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고, 소피아는 건너편에 서서 데이빗의 선택을 지켜본다.
데이빗은 과거의 상처와 미련을 털어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완전한 단맛일 거라고 보장할 수 없는 현실로. 하지만 쓴맛을 봐야 단맛도 아는 법이라고, 어쩌면 그의 현실은 이전보다 더 달달하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바닐라 스카이>는 눈을 뜨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눈을 떠!” 이 영화는 자신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에, 당신의 진정한 인생에 눈을 뜨라고. 꿈처럼 완벽한 현실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겁내지 말고 눈을 뜨라고.
인생엔 수없이 많은 기회와 새로운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사소한 선택과 놓치거나, 꼭 붙잡은 기회가 섞여 새로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으로 가득 채운 자각몽 속에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 선택을 할 것도, 의외의 기회도 찾아올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인생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자각몽처럼 흘러간다면, 완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꿈은 꿈일 뿐이요, 현실은 현실이니.. 꿈처럼 완벽한 현실을 살지 못한다고 절망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 살아가는 ‘진짜 나’의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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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13개 최다 후보의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를 연출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한국 개봉을 맞아 첫 내한이 성사되었습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3월 중순 영화의 개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갱단 보스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아내, 새 삶을 선물할 변호사가 엮이게 되는파격적이고 화려한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신작, 추가 세부 사항 공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습니다.
해당 작품에서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역할을 맡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테야나 테일러가시민운동가로서 알라나 하임, 레지나 홀의 캐릭터가 소속되어 있는 반정부 그룹에 가담하게 되고,
악역을 맡은 숀 펜은 백인 우월주의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신작은 PTA의 가장 상업적인 시도로 여겨지며, 러닝 타임은 약 3시간으로 알려졌습니다.애초 <One Battle After Another>는 2025년 8월 8일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가을 개봉으로 변경되거나,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데이미언 셔젤, 에빌 나이벨의 전기 영화 감독 예정
<바빌론>의 상업적 실패 이후, 차기작 소식이 들리지 않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스턴트맨 에빌 나이벨 전기 영화를 연출할 예정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작품은 1974년 아이다호 스네이크 강을 오토바이로 뛰어넘으려 했던나이벨의 야심찬 도전을 다룬다고 합니다. 그는 오토바이 스턴트로 유명한 미국의 퍼포머, 엔터테이너였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책을
쓴 남성을 야구 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경력을 무너뜨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찰리 카우프만 신작,
에디 레드메인&테사 톰슨 출연 확정
이도 게펜의 단편 소설 ‘Debby's Dream House’을 각색한 작품인 찰리 카우프만의 차기작에 에디 레드메인과 테사 톰슨이 출연할 예정입니다.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 EFM에서 비밀리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사람들을 위해 꿈을 제조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악몽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이번 작품은 2025년에 제작을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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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탄광 속 다이아몬드
왓챠 이용자로서 계속 추천 영화로 소개되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실 그전부터 이 영화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봐야겠다는 동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시도하게 되었다. 발레 음악으로 등장하는 클래식으로 귀를 즐겁게 만든다. 한편, 빌리(제이미 벨)가 꿈을 이루기 위한 시련과 도전들을 그린 영화지만 빌리 아버지 제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의 시점이 더 눈길이 가는 영화였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 스틸컷
뮤지컬
영화가 가진 큰 틀이 '발레'라서 빌리(제이미 벨)가 발레를 하는 장면마다 발레 음악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빌리가 발레 할 때뿐만 아니라 빌리 인생에 음악이 녹아드는 듯 음악 사용을 확장했다. 즉, 빌리(제이미 벨)가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발레 음악이 따라간다. 덕분에 빌리가 하는 동작마다 각각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내게 한다. 체육관에서 안무를 배울 때 등장하는 발레 음악과 체육관에서 아버지 앞에 발레를 출 때 나오는 음악은 빌리가 발레를 배우면서 느끼는 재미와 열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씬으로 전환할 때 나오는 가벼운 분위기의 팝송은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한편, 빌리가 추는 탭댄스 후반부 장면과 아버지와 형이 다시 광산으로 들어가는 장면 등은 아무런 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처럼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뮤지컬의 특성을 많이 가진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장면 전환에 사용되는 음악,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그들의 뚜렷한 개성은 영화의 재미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2005년 실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다.
헌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빌리의 꿈을 위해 아버지 제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의 헌신이 희생당한다. 에버링텀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제키는 빌리의 발레를 위해 처음으로 런던으로 가고, 탄광 파업을 하며 탄광에 가는 이들을 배신자, 짐승 취급을 했던 자신이 빌리를 위해 그 길을 선택하려 하고, 죽은 아내의 유품을 팔아 빌리의 발레 학교 학비를 마련한다. 제키의 헌신은 그동안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자신과 같은 생을 빌리에게 반복하고 싶지 않으려 하는 강한 각오를 보여준다. 끝내 빌리가 발레 학교에 합격했지만, 노동조합의 굴복으로 탄광 파업은 실패가 된 상황에서 제키는 웃는다. 그 웃음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웃음이 아니고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안도와 다행의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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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멈추지 않고 새롭게 간다,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 인터뷰
관객석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앉아있는 자리임에도 묘하게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같아서, 관객석의 공기를 모두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객석이 싸한지, 진심으로 웃고 있는지, 안타까워하는지 모두 서로에게 전해진다. 9월 6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이장호 감독 데뷔 50주년 기념 스페셜 토크 현장의 관객석은 그야말로 애정과 열정으로만 꽉 찬 객석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영화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과 동시대를 호흡한 사람들부터, 그의 오랜 발자취를 뒤늦게 더듬어보는 사람들까지, 함께 모여 그의 영화 인생 50년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자리였다.
오늘 데뷔 50주년 기념 스페셜토크를 진행하셨는데요. 감독님께서 현재진행형으로 사랑받는 영화인이심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오늘 관객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기분이 어떠셨나요?
아주 편안했습니다. 50년 동안 <별들의 고향>이 나를 뒤따라다니다 보니까 어떨 때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다른 작품 이야기도 더 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많이 사랑해 주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참 꾸밈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 편안하고 좋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듭니다.
오늘 스페셜토크 현장만 보아도 많은 분들이 <별들의 고향>을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경아라는 이름이 유행할 만큼 파급력이 굉장했는데, 지금도 유튜브에 그 시절을 추억하고 이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어요. 이 영화의 어떤 면이 이토록 오래 사랑받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는 청년문화라는 게 처음 생긴 때였어요. 최인호 작가가 청년 문화 선언을 언론에 발표했고, 민주주의 교육을 받거나 온전히 한글만으로 교육받은 첫 세대인 거예요. 한글 문화의 독특한 특징이 우리에게 들어오면서 이전 세대와 다른 특징을 갖게 된 셈인데, 저는 거기에 굉장히 긍지를 느끼고 있어요. 한글은 알파벳과 달리 글자 모양이 (초성, 중성, 종성의) 조립형인데, 이렇게 글을 배우니까 조립과 조형의 감각이 우리 예술의 특징이 되는 거죠. 또 조립과 변형은 율동적이기도 해서, 대단한 춤이 되기도 하거든요. 우리 문화가 지금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게 저는 다 이 청년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영화음악이란 것이 보편적이지 않던 시대에 <별들의 고향>은 음악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이장희),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 (윤시내) 같은 곡들이 아직도 굉장히 유명할 만큼 감독님 영화의 음악이 관객들과 잘 공명했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영화 음악에서 어떤 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관악반에서 색소폰을 불기도 했고. 아버지께서 클래식 음악을 매우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틀어 놓으신 음악으로 잠을 깨곤 했어요. 그렇게 음악적 감각이 길러졌던 것 같습니다. <별들의 고향>에서 제가 가장 자랑스러운 건, 경아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애인의 결혼식장에 뛰어가는 장면이에요. 그전 같았으면 아주 처절하고 애절한 음악을 공식처럼 썼을 텐데 저는 거기서 락 음악을 깔았습니다. 그게 저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런 게 청년 문화의 특징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제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조직위원장 자리에도 계신데, 이 자리에 영화인이 선임되신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바쁘게 준비하시다가 개막을 맞이하셨을 텐데 개막 직후 기분이 어떠신가요?
작년 개막 공연을 보고 ‘영화제가 차차 발전하고 있구나’ 했는데, 금년 공연은 ‘이동준이라는 천재가 개막 공연에서부터 스타일을 바꿔 버리는구나’ 싶었어요. 음악과 영화를 동시에, 아시아 국가의 성격이 드러나는 너무 좋은 공연이었어요. 이동준 위원장이 직접 작곡한 영화 음악을 활용해서 더 좋았고요. 개막 공연을 보며 영화제 성격이 완전히 자리 잡혔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제 영화제가 20년을 맞이했으니 앞으로도 쭉 나아갈 일만 남았는데요. 앞으로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들려주세요.
지금처럼 나아가면 세계 정상으로 갈 겁니다. 다만 행정적인 문제가 없어야겠죠. 소위 말하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잘 지켜진다면,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계속 훌륭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차세대 영화인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시대도 바뀌고 세대도 바뀌지만 제일 중요한 건, 폭력이나 선정적인 것만 노려 돈을 벌겠다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봉준호, 박찬욱 같은 감독들은 폭력이나 오락을 노리는 게 아니라 인문학적 토양에서 영화를 만들잖아요. 그게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영상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자극적인 것이나 선정적인 것을 만들기 쉽지만, 관객들의 영혼에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돈만 벌려고 하면 그런 감독은 성장하지 못해요.
마지막으로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아 주신 관객 여러분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천만의 환경이 있어요. 실제로 약재도 많고요. 정신건강에도 이로운 환경이에요. 영화와 음악 같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여유, 문화와 생태. 제천의 이런 면에 초점을 두고 와 주신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여전히 “철부지” 같다고 말하는 이장호 감독. 지나온 역사를 물 흐르듯 이야기할 때에는 아득할 만큼 듬직한 거장이지만, 다음 영화와 새로운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의 눈은 맑고 싱그럽게 빛났다. 그의 지난 50년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지난 20년도, 다사다난했지만 여러 변곡점을 거치며 흘러와 지금까지의 시간을 한 단락 맺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지만 여전히 성장을 멈추지 않는 모습. 이장호 감독과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쌓아온 시간이 든든한 마음 못지 않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차오르는 이유이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정유선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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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수평적 교환을 통한 소통의 성취
현대 사회 구성원 가운데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유동하는 정보들과 부유하는 자의식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나를 둘러싼 다른 존재와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에서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므로, 늘 누군가와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외계인과 인간의 소통을 그리는 다양한 텍스트들은 소통을 둘러싼 맥락 변화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문화적 징후이다. 드니 빌뇌브의 SF 영화 <컨택트(Arrival)>(2016)에서 외계의 존재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은 웨버 대령은 “그들이 뭘 원하고, 어디서 왔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며 언어학자들을 다그친다. 상당수의 인간은 웨버처럼 지구를 방문한 불청객을 향해 의구심과 불안감을 표출할지도 모르겠다. 불가해한 타자와 대면하는 순간에 인간은 어떻게 선택하는가. 이때 <컨택트>의 루이스 박사는 낯선 타자와의 소통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루이스는 외계의 존재와 원활히 대화하고 싶다. 웨버 대령에게 ‘캥거루’ 일화를 드는 루이스는 오역 없는 명확한 상호 의사전달을 위해서 기본이 되는 사항을 놓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적 혹은 침략자와 동등한 층위로 인식하지만, 루이스는 편견을 접어두고 소통의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한다. 전문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헵타포드로부터 특별한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자 군인과 분석관들은 조바심을 느끼지만, 루이스는 이내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들의 언어를 감지할 수 없다면, 우리의 언어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방식 말이다. 루이스는 군인, 과학자들과 대비된다. 그녀가 수평적인 교환을 지향한다면, 후자의 집단은 수직적인 질문 혹은 강요에 매달린다. 루이스는 타자를 향한 편견을 완전히 거둔 채 그들 앞에 나서고, 나머지 인원은 몇 겹의 벽을 세우느라 소통의 성취와 멀어진다. 영화에서 루이스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오염 방지 슈트를 벗어던지고 헵타포드를 찾아간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루이스를 보며 놀라워한다. 루이스가 선형적인 인간의 개념 대신 헵타포드의 비선형적 개념, 언어와 시간에 관한 낯선 형태의 사유를 수용하여 그들의 사고 체계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컨택트> 스틸컷
관계의 전도가 만들어내는 소통의 형태
구로사와 기요시의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2017)에는 발화된 언어를 학습하려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외계인은 지구를 침략하려고 한다. 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고등한 존재들이다. 극 중 한 외계인은 인류를 멸망시키는 일이 며칠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구의 기술력이 형편없다며 불평하기도 한다. 이때 외계인들이 굳이 인류 절멸을 위한 사전 답사라는 명분으로 인간에게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간의 관점에서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그렸던 <컨택트>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관계의 역학을 다르게 묘사한다. 외계인이 주체고 인간이 객체로 전도된 인상을 풍긴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는 외계인에게 신체를 뺏긴 신지의 아내인 나루미가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 묘사되는데, 인간과 외계인 사이의 전도된 관계에서 나루미가 어떤 존재로 기능하는지 들여다본다면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에 관한 흥미로운 논점을 추출할 수 있기도 하다.
외계인이 인간에게서 개념을 탈취하는 목적은 의외로 간명하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서 효율적으로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이 침략자들은 어딘가 엉성하게 지구를 침공 계획을 세운다. 인류를 절멸시키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면서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탐구해보겠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이들은 인간에게서 주요한 가치를 뺏는다. 이를테면 ‘가족’. ‘소유’, ‘일’과 같은 개념들이다. 기묘한 소통의 형태, 양방향이 아닌 뒤틀린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반복되면서, 두 개체 간의 관계 양상에 변화가 생긴다. 우리 처지에서 철저한 타자인 외계인이 주체인 인간과 유사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외계인의 관점에선 주체(외계인)의 객체(인간)화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세 명의 외계인 중에서 주인공 격인 신지는 이러한 모호성을 내포한 존재다. 이 관계의 역학은 다소 폭력적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단방향 소통 구조는 흡사 원주민의 문명을 지워내는 제국들의 만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묘한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 방금 사용한 예시는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폭력적인 단방향의 소통이긴 해도, 정체성이 모호하게 묘사되는 존재인 신지를 통해서 타자성을 수용하는 개체의 심리를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신지의 아내인 나루미는 외계인과 기존 신지의 의식이 융합된 포스트휴먼 격인 새로운 남편을 바라보면서 혼란에 빠지는데, 영화에 묘사된 나루미의 대응 방식에서 또 다른 낯선 타자와의 소통에 있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발견된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신지의 정체를 파악한 당국에서 신지를 잡아가려고 하자, 나루미가 이를 눈치채고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나루미는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주체성과 객체성의 분리가 모호해진 존재인 신지를 향한, 그러니까 탈경계화된 존재를 향한 인간의 손길은 다층적인 소통의 층위가 생성되는 기회를 만든다.
관계의 전도가 촉발하는 새로운 소통의 형태는 <산책하는 침략자>뿐 아니라 <컨택트>에서도 발견된다. 시간성에 관해서 새로운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 루이스는 일종의 포스트휴먼이다. 그녀에게 과거-미래-현재는 모두 동일선상에 놓인 채 공존하는 시점들이다. 미래를 엿보는 ‘현재의 나’는 곧 그 대상인 ‘미래의 나’와 정신을 공유할 수 있다. 단순한 미래 예지 능력을 갖춘 존재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시간관념을 장착한 포스트휴먼으로 진화한 셈이다. 이런 루이스는 모호한 존재성을 떠안은 채, 헵타포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류에게 손길을 내민다. 이 루이스의 행동들이 단순히 결정론적 관점에서 예정된 행동이 아닌, ‘선택’처럼 묘사됐다는 점이 타자를 향한 루이스의 심리와 행위가 내포하는 지점을 다변화한다. 루이스에게 다수의 평범한 인류는 일종의 타자처럼 기능할 수 있지만, 이 전도된 관계에서 피어나는 루이스의 선택들로 또 다른 소통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미지의 영역처럼만 보이던 우주는 21세기 들어 더욱 선명해졌고,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외계 존재와 같은 불분명한 타자는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외계의 존재와 맞닥뜨리는 먼 미래의 순간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불가해한 타자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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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이리> 예고편
회사원 콘노는 이와테 현으로 전근하여, 그곳에서 동료 히아사와 알게 된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가거나 낚시에 가는 등, 마치 늦은 청춘 시절 같은 날들을 보내 던 중, 콘노는 히아사에게 마음을 열어 간다.
그러나 어느 날, 이아사는 콘노에게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퇴직하고는 얼마 뒤 불쑥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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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메인 예고편
1957년 뉴욕, 라이벌 갱단인 제트와 샤크 사이의 갈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