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25 17:18:38
2025 재팬무비페스티벌 ATG 특별전 개최 및 라인업 공개
10주년을 맞은 재팬무비페스티벌!

2015년 '이와이 슌지 감독전’으로 시작된 재팬무비페스티벌이 올해 10주년을 맞아 '반항과 혁신: 1960-80년대 ATG 특별전’으로 돌아왔습니다.
1961년에 설립된 ATG(Art Theatre Guild)는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제작·배급사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했던 일본에서 기존 상업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실험적인 작품들을 과감히 지원하며 일본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고도성장기 일본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내재된 모습,
세대 간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동시대 일본의 자화상을 담아낸 대표작 6편을 상영하며,
3월 15일부터 3월 23일까지 아트나인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과감한 실험정신과 미학적 도전을 시도하며 일본 뉴웨이브의 정수를 보여주는
ATG의 대표작들을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image | article @artninecinema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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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일드 인 타임> -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차일드 인 타임
개봉일 : 2020.01.09 (한국 기준)
감독 : 줄리언 파리노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켈리 맥도날드, 스티븐 캠벨 무어, 사스키아 리브스, 베아트리체 화이트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신작 <모리타니안>의 개봉을 앞두고, 계속 그의 모습이 맴돌아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꺼내봤다. <차일드 인 타임> 직역하자면 시간 속의 아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동명 소설 <차일드 인 타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로, 소중한 아이들의 유년기에 대한 통찰과 부모가 최대로 품을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상처와 그 위로 솟아난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 어쩌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이 이야기는 유명한 동화 작가인 주인공 ‘스티븐’이 하나뿐인 딸 ‘케이트’를 잃어버리는 날부터 시작된다. 계산을 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딸의 손을 잠시 놓은 순간, 아이는 순식간에 스티븐의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를 찾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스티븐은 끝내 케이트를 찾지 못한다. 스티븐의 아내 줄리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함께 살던 집을 떠나고 스티븐은 홀로 남겨진다. 줄리는 케이트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절망하고, 스티븐은 아직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뜨겁던 부성애는 스티븐의 가슴에 화상 자국을 남길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성애’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부성애’를 그린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말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그 흔치않은 부성애를 중심으로 스티븐의 시간을 그려낸다. 더불어 아직 유년기의 부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스티븐의 출판인 ‘찰스’라는 인물을 통해 ‘유년기가 아이와 어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사이에 인물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데, 이야기를 다소 애매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지라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상당히 깔끔하고 담백한 영화였다. “난 아이를 잃은 부모야. 여러분 같이 울어요.” 하며 슬픔의 카펫을 무작정 깔아대는 것이 아닌,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새로운 음계를 하나하나 알아가듯, 슬픔의 무게를 천천히 더듬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스티븐은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 한마디를 보낸다. 사랑한다고. 곧 만나자고. 이 일상적인 한마디가 주는 울림은 예상보다 거대했다.
차일드 인 타임 시놉시스
유명한 동화 작가 ‘스티븐’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 ‘케이트’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딸의 부재는 행복한 부부였던 ‘스티븐’과 ‘줄리’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고, 상실감 속에서 매일을 견뎌나가던 두 사람은 일상 속에서 소중한 흔적들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
스티븐은 외출할 때마다 곧 돌아온다는 말과 번호를 적은 쪽지를 현관문에 붙인다. 그를 본 이웃은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라고 말하며 스티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븐은 왜 자신의 부재중을 알리는 걸까. 그 이유는 잃어버린 딸 케이트 때문이다. 이미 잃어버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스티븐은 케이트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과연 어떤 부모가 어린 자식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스티븐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딸이 집에 돌아온다면, 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언제든 나를 부를 수 있도록 매일같이 쪽지를 붙인다. 스티븐에게 케이트는 세상의 전부였고, 여전히 스티븐의 세상엔 케이트가 가득 차있다.케이트가 실종된 후 줄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다며 스티븐과의 별거를 결심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티븐은 1년 만에 줄리를 만나기위해 시골집으로 향한다. 스티븐은 집으로 가는 길에 운명처럼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의 환영을 따라가게 되고, 그곳엔 ‘더 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이 있었다. 술집 안엔 한 여자가 앉아있었고, 스티븐은 뭔가에 이끌리듯 여자를 쳐다본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스티븐은 어머니를 통해 그 술집에 얽힌 신기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더 벨’은 스티븐의 어머니가 스티븐의 아버지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던 술집이었고, 그 시절 어머니는 아름다운 아이 한 명이,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 창밖에서 자신을 바라봤다고 말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스티븐의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줄리와 스티븐도 어머니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줄리는 창문 너머에 서있는 스티븐의 머리색을 꼭 닮은 남자아이를, 스티븐은 줄리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탄 지하철에서 같은 남자아이를 마주치게 된다. 남자아이는 줄리와 스티브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 아이는 곧 태어날 두 사람의 아들을 의미한다.
"케이트를 계속 사랑해 주렴. 사랑하는 것과 그리워하는 건 달라."
부모는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 동안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들은 그 모든 시간 안에 존재한다. 스티븐은 3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케이트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면 케이트를 위한 선물과 트리를 준비하고, 케이트의 방을 항상 깨끗하게 정돈해둔다. 아이가 당장 뛰어들어와도 바로 누워 한숨 잘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제 7살이 되었겠지만 케이트는 여전히 내 어린 딸이고, 10년이 지나 만난다 해도 스티븐에겐 여전히 내 어린 딸이다. 그리고 곧 생길 사랑하는 아들은 어릴 적 스티븐이 그랬듯,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부모님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그 순간마저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게 아닐까."어딘가에 있어"
스티븐은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바친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트의 환영이 계속해서 스티븐의 주변을 맴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너에 대한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싶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던 어린 딸, 카트에 앉아 빠르게 달려달라며 부탁하던 어린 딸, 작은 손가락으로 힘 있게 내 손을 잡아오던 어린 딸.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고 오래도록 동화를 쓰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새로운 소년에 대한 동화를 쓰기 시작한 스티븐은 욕조 안에서 숨을 참는 시간을 늘려간다. 그리고 그의 상처도 아주 조금씩, 옅은 흉터를 남기며 회복되고 있었다.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어버리고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스티븐은 ‘찾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보단 ‘어딘가에 있어. 곧 만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사실 스티븐은 케이트가 돌아올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스티븐과 줄리의 상처는 새로 찾아온 사랑스러운 아들의 존재로 인해 조금씩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스티븐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줄리가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줄리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을 ‘스티븐과 줄리가 케이트를 잊어가고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순 없다. 두 사람은 여전히 케이트를 사랑하기에 어린 딸은 그들의 사랑과 기억, 그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엄마 아빠는 케이트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찾고 있어. 금지된 아이를. 그 아이를 찾아야 돼."
끝없는 사랑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메시지와 더불어 이 영화가 건네고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유년기의 중요성’이다. 이건 스티븐의 출판인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찰스의 이야기다. 스티븐의 동화 출판을 돕고, 동시에 정치계에서 일하고 있는 찰스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일을 관두겠다고 선언한다. 정치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육아 교육서를 제작하고 있었고, 총리는 스티븐에게 찰스를 감시(?) 해달라고 부탁한다.찰스는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찰스는 비 오는 날 숲을 가로지르고, 숲 한복판에 곧 쓰러질듯한 아지트를 만들고, 이상한 음료수를 마시며 자신의 음모를 가위로 자른다. 그는 마치 다여섯살 난 남자아이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찰스는 마음속에 있는 ‘금지된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금지된 아이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뜻한다. 찰스가 모든 일을 관둔 이유는 ‘책임지는 삶’에 지쳤음과 동시에 사회에서 통하는 ‘찰스’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걸 내려놓고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누구도 나의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추측과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는 ‘유년시절’. 그는 유년시절을 그리워하거나, 그에 대한 결핍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수많은 종류의 글 중 ‘동화’를 출판하는 출판인이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찰스는 어른이 되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이 싫었던 걸까.
일부 정치인들은 말도 안 되는 육아교육 제도를 내놓고 있고, 진짜 아이를 키워본 스티븐은 그에 반대한다. 그리고 찰스는 그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하듯 나무에 목을 매단다. 스티븐은 찰스의 장례식에서 그를 ‘유년기의 소중함을 알던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빗속에서 뛰노는 찰스의 모습과 맑은 웃음을 흘리며 아빠를 돌아보는 케이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나는 유년기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꼈다. 찰스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찰스는 구두와 반바지, 셔츠와 니트를 입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통상적으로 구두와 셔츠, 니트는 어른의 옷, 편안한 반바지는 어린 남자아이의 옷이라는 이미지를 주게 되는데 찰스는 어른과 아이의 옷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착장으로 발견된다. 땅에 떨어진 채 발견된 구두 한짝은 그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벗겨진 것이리라. 찰스는 어른 찰스를 벗어던지기 위해 몇 번의 발버둥을 쳐야 했을까. 결국 죽기 전까지도 그것을 완벽하게 벗어던지지 못한 찰스가 가엾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슬픔이, 사무치는 그리움이, 끝없는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보내는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시간들엔 아마 유효기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차일드 인 타임>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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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핍은 나의 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율리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끝까지 가 봐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성적에 맞춰 의대에 갔지만 자신은 정신적인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걸 깨닫고 심리학과에 진학하더니, 또다시 시각적인 것에 예민하다는 걸 깨닫고 포토그래퍼를 꿈꾸며 서점에서 임시로 일한다. 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마다 연애 대상도 계속해서 변한다. 율리에가 북유럽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인생 꼬이기 딱 좋은 성격이다. 나는 율리에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율리에처럼 침울해졌다가 율리에가 왜 자꾸 사진은 안 찍고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는 건지 갑갑해졌다.
그럼에도 율리에는 용감한 사람이다. 사람도 꿈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어쩌면 그는 좋은 걸 못하게 되는 것보다 싫은 걸 견디는 게 더 힘든 사람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예술가 악셀은 율리에에게 롤 모델이고 대화가 잘 통하지만 그와 함께할 때 율리에는 들러리가 된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점 때문에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끌린다. 에이빈드는 율리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야망이 없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에이빈드에게는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뭐냐며 무시한다. '나는 더 많은 걸 원한다'라고 말하지만 율리에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율리에는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와 있어도 대체로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걸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떠난다는 건 결핍이 많다는 뜻이다. 동시에 결핍은 동력이 된다. 그가 사랑에 열성적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20대 내내 나도 뭔갈 원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말하기 힘들었다. 늘 뜬구름 사이를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던 건 마음속의 결핍을 채울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몰입했다. 몰입과 결핍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매번 타인의 삶이라는 대조군을 통해서 욕망을 확인하고 점점 선명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릴 때는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중 뭘 맛볼까 고민했지만 이제 나는 쿼터 한 통을 한 가지 맛으로만 채우는 30대가 되었다. 율리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율리에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았고,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나와 혼자가 되었다. 타인의 삶을 전전하던 율리에는 드디어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 최악의 나를 수없이 지나온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결핍은 나의 힘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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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모든 것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의 원자핵을 쪼개 엄청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미국 물리학자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 정부 역시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로브스 대령'(맷 데이먼)을 책임자로 삼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인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고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과거 공산주의에 경도됐던 오펜하이머 이력이 재조명되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공격에 직면한다.
크리스포터 놀란 필모의 정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스크린에 옮겨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뤘다. 영화는 특히 그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정과 전후 수소폭탄 반대 운동을 펼친 뒷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오펜하이머>는 개봉 전부터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의 핵폭발 장면을 재현했다고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1달 전에 개봉한 영화 <바비>와 '바벤하이머' 밈으로 얽혀 이슈였고, 해외에서는 <바비>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아닌 유니버설 픽처스가 처음으로 놀란 영화를 단독 배급한 점도 화제였다.
사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3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작업은 어렵다. 원작 평전은 심지어 오펜하이머의 삶만 다루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사건과 정치인, 과학자의 이름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펜파이머>는 더욱 놀랍다. 놀란의 스타일, 기술, 직관, 통찰력이 한 데 모여 모순적인 물리학자의 일생을 긴장감 넘치게 재구성했기 때문. 달리 말해 <오펜하이머>는 영화감독 놀란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자폭탄 같은 영화
<오펜하이머>는 기본에 충실하다.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내면과 감정선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좌익 과학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지휘한 유능한 행정가. 자기 손으로 만든 신무기를 경계하는 야심 찬 정치인. 모순적인 세 인물이 한 사람이니 당연히 어색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마치 원자폭탄처럼 재구성한 놀란의 각본은 그의 내면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핵분열물질의 원자핵에 중성자가 충돌하면 원자핵은 분열되고, 더 많은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과 충돌해 새 핵분열이 발생한다. 원자폭탄은 이 연쇄반응에서 생긴 에너지를 활용한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트리니티 핵실험이라는 목표까지 거침없이 질주한다. 관객의 시선을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헌신하는 오펜하이머에게 집중시킨다. 그러고 나서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클라이맥스가 유발한 연쇄적인 폭발로 시선을 돌린다.
미국 정치권과 과학계는 수소폭탄 개발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계속해서 충돌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공격당한다. 놀란이 처음 1인칭으로 작성했다는 각본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트리니티 실험 전까지는 맨해튼 계획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이 주인공이 된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양심의 가책, 매카시즘과 스트로스에게 시달리는 고통 등 오펜하이머의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원자폭타과 같은 구조는 절제미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직후, 영화는 순간적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극장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진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개발했다는 기쁨에 심취하지 않는다. 인류가 다룰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힘을 손에 넣은 두려움이 정적 속 독백을 통해 전해진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오펜하이머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다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는 폭탄 폭발음과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원자폭탄으로 인한 흥분과 열광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 그가 받은 충격과 죄책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단번에 납득시킨다. 원자폭탄 희생자 시신을 오펜하이머가 밟는 환상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은 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날 때, 그의 선택 중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 없을 정도다.
양자역학의 인문학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논란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복권한 게 불과 반년 전 일이다. 영화는 이 모순적인 물리학자에게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준다.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그를 판단할 공간도 열어준다.
핵심은 컬러와 흑백의 전환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Fission(핵분열)'이라는 제목의 파트는 컬러로, 스트로스가 중심이 되는 'Fusion(핵융합)'이라는 이름의 장면은 흑백으로 묘사된다. 원자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수소 폭탄의 원리인 '핵융합'은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마치 양자역학의 인문학적 해석 같아 보인다. 양자 역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관측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전자나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중첩되어 있는 두 가지 상태는 관측을 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한 가지 성질로 표현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관점에서 주인공을 관측한다.
애국심이 투철한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자이고,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지만 반핵 운동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 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영화는 그의 시점에서 그 모순점을 이해시키고, 타인의 시점에서 그 역설과 중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비춘다. 인간이 그 자체로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렇기에 한 사람을 재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상기시킨다. 이는 제목에 걸맞은 접근법이다. 오펜하이머는 본래 양자 역학 연구자였으니까.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그래서일까? <오펜하이머>는 마치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같다. <소셜 네트워크> 역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모아놨기 때문. 저커버그의 시점과 동업자였던 윙클보스 형제 및 왈도 세브린의 시점을 충돌시킨다. 두 영화가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법도 흡사하다. <소셜 네트워크>는 법원 조정 과정으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로 서로 다른 시점의 충돌을 보여준다.
<소셜 네트워크>가 받은 찬사를 생각하면, <오펜하이머>는 작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량을 재증명하는 장이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놀란의 통찰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므로. 그간 놀란은 캐릭터를 플롯의 장치와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통찰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조연 캐릭터가 여전히 수단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놀란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
그러면서도 놀란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채를 잃지 않았다. <덩케르크>처럼 <오펜하이머>도 시간대가 세 개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에서 맨해튼 계획까지, 또 그 이후로 이어지는 시간대가 주 재료다. 1954년 원자력 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는 양념이다. 특히 두 시간대는 철저히 조각난 상태로 삽입된다. 주요 사건에 따라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형태로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시간을 비트는 연출과 구조는 주제의식과 긴밀히 연관된다. 오펜하이머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 붙임으로써 과학자의 책임을 논할 공론장을 연다. 통상적으로 과학자는 신기술의 개발자로만 인식된다. 그들의 역할은 기술을 만드는 데서 그친다고 여겨진다. 오펜하이머도 그랬다. 그는 원자폭탄의 오남용과 악영향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말한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가 바꾼 새로운 세상을 목도한 뒤로 그는 달라진다. 과학자에서 행정가, 정치인으로 변한다. 새 기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의 표현대로 이제 그는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가 되려 한다. 그는 사회 구조와 관계망 안에서 신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원자력을 평화롭게 이용할 체계를 만들지 못했고, 수소폭탄의 개발도 막지 못했으며, 자기 자신의 삶도 지키지 못했다. 대통령을 설득할 만큼 신중하지 못했고, 앙심을 품은 정치인을 꺾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마치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자기 미래는 지키지 못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성공했지만, 시스템 건설자가 되지 못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빛과 그림자를 가감 없이 들춘다.
SF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기 영화
이러한 맥락에서 <오펜하이머>는 외관과 달리 SF 영화 같은 면도 있다. 많은 SF 영화는 과학의 발달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로 가득하다. 달리 말해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나 다름없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SF 영화의 본질을 품고 있다. 영화는 만약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잊는다면,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현명한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손으로 전 세계를 초토시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설령 0에 가까운 확률이라 해도 인류가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정점은 멕시코에서 핵폭탄이 폭발한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지구를 불바다로 만드는 핵 미사일이 교차되는 결말이 정점이다. 오펜하이머와 놀란이 입을 모아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경고를 가득 담고 있으니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오펜하이머>는 테넷의 정신적 속편이자 프리퀄인 셈이다. <테넷>의 주된 플롯은 핵폭탄을 막는 미션이었고, 인류의 존속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전쟁이 시대적 배경이었으니까. 이는 SF 영화에 대한 관심을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준 놀란스러운 착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호불호가 심하게 나뉠 영화다. 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영화화한 만큼 밀도가 높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놀란의 꼼꼼한 각본이 반갑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맨해튼 계획 이전의 오펜하이머의 개인사나 초기 생애에 관련한 내용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도 낯선 영화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 대신 트리니티 실험을 기점으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 친절한 영화도 아니다. 1930~5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정치적, 국제적 이슈에 대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갈 길이 바쁜 만큼 상세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기대에 비해 시각적 임팩트가 약하다.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쾌감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그래도 배우 덕분에 진입장벽이 낮아지기는 한다. 우선 킬리언 머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놀란 사단 중 하나로만 알려졌던 그는 이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명배우들의 향연도 인상적이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데인 드한, 라미 말렉, 플로네스 퓨는 앙상블을 이루며 머피 뒤를 단단히 받쳐준다. 특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었다면 후반부는 힘이 빠져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몇몇 단점은 취향의 문제이지, 완성도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놀란이 의도한 방향성만 정확히 짚어 쫓아간다면 <오펜하이머>는 <인셉션>,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놀란이 그간 자기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스타일과 장점, 통찰력을 한데 모아 만든 폭탄 같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종합하면, 단언컨대, <오펜파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스터피스다.
Outstanding 특출함
원자폭탄 섬광과 굉음으로 빚어낸 프로메테우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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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다 깨어나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하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하는데, 지금 내 삶도 누군가의 꿈 속이 아닐까 싶은 거다. 내가 꿈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만들어내듯이.
어떤 삶은 자신의 의지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타인의 취향, 타인의 선택, 타인의 눈치. 온통 타인에게 기준을 맞추어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껍데기를 둘러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일까, 꿈일까. 자각이 없는 삶, 스스로가 이끌어가지 않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차라리 아름다운 꿈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매트릭스>에서처럼 모피어스가 빨간약, 파란약을 건넸을 때,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냥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할 것인가.
<바닐라 스카이>는 어떤 면에서 <매트릭스>와 맥을 같이한다.
물론 <매트릭스> 세계관이 훨씬 복잡하고, 인류가 기계와의 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인류가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르다.
뉴욕 출판계 거물의 아들 데이빗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다. 잘생긴 외모에, 아버지가 남긴 부에,
남들이 '드림 걸'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그의 캐주얼한 섹스파트너이기까지.
매일 아침 '일어나(Wake up)'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데이빗의 생일파티에 수많은 인사들이 찾아와 데이빗의 생일을 축하한다.
그리고 바로 그날, 친구 브라이언이 데리고 온 여자 소피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선물을 위층 침실에 옮겨놓던 데이빗은 침대 위에서 누가 벗어놓은 빨간 드레스 하나를 집어드는데, 그 순간 파트너인 줄리가 알몸으로 나타난다.
데이빗은 줄리에게 '파티는 초대받은 사람만 오는 곳'이라고 말한다. 줄리를 초대한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안 했다.
남들에게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은 것. 말하자면 줄리는 데이빗의 치부 같은 거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까. 좋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옆에 두면서, 줄리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즐길 것만 즐기는.
줄리와의 관계가 꽤 오래되었고 줄리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도 정말 '캐주얼한' 관계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면, 데이빗의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줄리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내려간다. 데이빗은 소피아에게 접근해서는, 줄리를 스토커라고 말한다. 도와달라고, 연기해달라고.
그렇게 데이빗은 소피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게 되는데, 소피아의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본다.
냉동되었던 강아지가 해동되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이라도 되는 것만 같다.
소피아는 그 다큐멘터리를 자주 본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그림도 그려주고, 분위기가 좋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밤을 꼬박 새고도 가뿐하게 출근길에 나선 데이빗 앞에 낯익은 차가 한 대 선다. 줄리의 차. 데이빗을 미행한 거다.
데이빗은 줄리의 차를 타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데이빗에게 배신감을 느낀 줄리는 자기의 행복은 데이빗과 같이 있는 거라며 울부짖다가 액셀을 밟는다. 그대로 줄리의 차는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줄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데이빗의 얼굴은 회복되지 않는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고쳐보라고 해도, 아직 현대의학기술이 망가진 얼굴을 완벽하게 이전으로 복구시키지는 못한다(인과응보일까?).
시련에 빠져 숨어 지내던 데이빗은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소피아에게 찾아가고, 그날 저녁 바에서 소피아와 만나기로 한다.
아직 맨얼굴은 부끄럽고 병원에서 준 가면을 쓴 채로 나간다.
바에 가 보니 어쩐지 소피아와 브라이언이 가까워진 것 같고,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데이빗은 데낄라를 연거푸 마시고 취한 채로 소피아의 집 근처에서 잠든다.
눈을 뜨니 소피아가 있고, 소피아의 지극한 사랑으로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너무 행복한 날을 보내는 데이빗.
하지만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소피아가 아닌 줄리가 옆에 있다.
줄리는 자꾸만 자기가 소피아라고 하는데, 줄리가 죽은 게 아니라 소피아와 바꿔치기 했다는 망상에 빠진 데이빗은 줄리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다 경찰에 붙잡히게 되고, 멕케이브에게 정신과 감정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부터는 지난한 과정이다.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당신은 이 세계의 신'이라고 말한다. 그 남자의 말처럼, 데이빗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다.
어느 날, 소피아가 보던 다큐멘터리에서 회사명을 보고 멕케이브와 함께 그 회사로 간다.
자,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진다.
데이빗은 사후 냉동보관을 했고, 지금 이 모든 게 자각몽이라는 것.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거다.
바에서 나와 소피아의 집 앞에 쓰러져있었던 그날부터 소피아와의 사랑도, 얼굴이 말끔히 고쳐지는 기적도, 맥케이브와의 상담도 다 꿈이다.
데이빗의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몰랐다면 그 세계의 신이 되어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살아갔겠지만 다 꿈이라는 걸 알게 된 데이빗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
덮어두고 자신의 피조물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 150년이 지나버려 돈도 없고 사랑하는 소피아도 친구도 없는 세계에 홀로 던져질 것인가.
<매트릭스>의 네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빨간약을 먹었다. 데이빗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질문한다.
진짜 세상이 아닌 환상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인지, 무자비한 현실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지.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꿈은 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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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 <바닐라 스카이>는 모네의 그림에서 따왔다.
데이빗의 생일파티날, 그의 어머니가 구매했다는 모네의 <바닐라 스카이>를 잠시 언급한다.
그리고 데이빗이 깨어나기를 결심했을 때, 그의 뒤로 바닐라 스카이가 펼쳐진다. 환상과 이별하는 순간이다.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깨어나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바닐라 스카이>는 실존주의적이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의 남자주인공 시어도어 핀치가 '깨어있기'를 새기며 살아갔던 것처럼.
삶은 허무하고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내 마음 같지도 않다.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인지, 남의 기분이 내 기분인지 분간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회피하고 냉동실에 들어갈 게 아니라, 지독하고 아플 만큼 생생하게 깨어있음으로써 이토록 공허한 삶을 채워가야 할 뿐이다.
+ <바닐라 스카이>는 왓챠에서 볼 수 있다.
+ 톰 크루즈의 20년 전 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 멜로 눈빛의 정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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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한 당신을 위한 영화
*이 글은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 )
우리의 마음은 늘 초조하다. 빠르게 성공해서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남들은 이미 저 멀리 앞서 가는데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 든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자꾸 불안하다면 영화 '행복의 속도'를 통해 마음의 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영화 <행복의 속도>
영화 <행복의 속도>는 일본의 '오제국립공원'에서 도보로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오제국립공원'은 일본 최대의 고산 습윤지로 2005년 람사르 협약에 등재되었다.
2356m 높이의 히우치가다케 화산 폭발로 지금의 자연경관이 만들어졌으며 군마, 후쿠시마, 니가타, 도치기 4개 현에 걸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영화 속에서는 꽃이 만발하는 봄과 여름부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까지 '오제'의 다채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행복의 속도>는 '봇타'로 살아가는 '이가라시'와 '이시타카',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3년간 기록했다.
자연보호를 위해 '오제'로 들어가려는 모든 것은 좁은 나무길을 거쳐야 한다. 산장에 필요한 각종 식재료와 생필품도 예외는 없어서 '봇타'가 두 발로 좁은 나무길을 걸어 짐을 배달한다.
촬영 중 길에 만난 방문객은 '이가라시'에게 '보통 어느 정도의 무게를 드냐'라고 묻고 그는 대부분의 '봇타'가 80~100Kg정도 든다.'라고 답한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각자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가라시'의 일상에선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사는 연륜과 여유가 느껴진다. 그는 20년 넘게 늘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1초도 같은 순간은 없었다고 말한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작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오제' 곳곳을 신중하게 담은 사진은 그가 '오제'를 향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 심지어 산장이 문을 닫아 일거리가 없는 추운 겨울에도 누군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눈길을 치운다.
그의 곁엔 '봇타'라는 직업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가족이 있다. 그의 아내는 부족한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틈틈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어린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소소한 추억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이가라시'는 아이와 함께 '오제'의 나무길을 걷고 산장에서 잠을 청한다.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사람은 오제에게서 뭘 뺏지 않고 오제도 사람한테서 뭘 뺏지 않거든."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빠가 하는 일을 알게 되고 '오제'와 가까워진다. 그의 가족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에 집중한다.
반면 '이시타카'는 야망과 혈기 넘치는 7년 차 '봇타'이다. 휴일에도 '오제' 밖의 TV송신소에 대형 배터리를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부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봇타'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청년봇타대'라는 단체를 만들고 대표로 활동한다. 겨울엔 직장인처럼 양복을 차려입고 대도시로 나가서 '봇타'를 홍보하고 다양한 협업을 제안한다.
다큐멘터리 후반부에 눈 길을 걷던 그는 섬에 들어가 다량의 짐을 옮겨야 하는 큰 프로젝트가 성사되길 바라며 들뜬 표정을 짓는다. 그는 '오제'의 '봇타'가 아닌 전국에서 일하는 '봇타'를 꿈꾼다.
그의 바람과 달리 가족들은 '봇타'라는 직업을 걱정한다.
특히 그의 할머니는 겨울엔 산장이 문을 닫아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하다가 다치면 당장 돈 벌 사람이 없다며 속상해한다.
가족들의 말을 들으며 의례적으로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간다. 실제로 부상을 당했을 땐, 그의 아내와 함께 '직장인이라면 회사에서 보험을 받았겠지' 같은 아쉬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Q.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
영화 <행복의 속도>는 짐의 무게를 두 다리로 견디는 '봇타'를 향한 존경의 결과물이다.
그리고'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관객에게 건네는 응원이기도 하다. 거기에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인생의 속도보다 먼저 고민해야 하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예고편의 메인 카피인 이 질문은 '박혁지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감독은 2019년 DMZ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Director's Statement'통해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답한다.
또한 자신의 현실은 '이시타카'와 비슷하지만 '이가라시'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고 답한다. 어떤 길과 방향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이가라시'가 될 수도, '이시타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고 가야 할 방향을 아는 사람에게 속도는 중요치 않다. 이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예시가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어느 날부터 '오제'에 등장한 헬기는 냉동식품처럼 빠른 배송이 필요한 짐을 운송하기 시작했다.
헬기는 금방이라도 그들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을 듯 보였으나 결국 헬기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 철수한다.
일이 더 많아지겠다는 아내의 말에 '이가라시'는 더 나은 헬기 회사가 들어올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빠르다는 이유로 언제나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느리기 때문에 가지 못할 곳도 없다.
지금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이 든다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점검하는 건 어떨까? 당신이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첫 발자국을 내딛을 때까지.
참고자료
1. [해외 여행] 아내에게 ‘100점’ 맞은 트레킹 일본 오제국립공원 - 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514100021
2. [ 한국어 ] 오제국립공원 – 尾瀬保護財団 - https://www.oze-fnd.or.jp/ko/
3. DMZ인더스트리 - http://industry.dmzdocs.com/kor/addon/00000002/history_fund_view.asp?m_idx=101191&QueryYear=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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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적 재난을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고지를 받았다. “너는 10월 25일 16시(한국 시간)에 <지옥> 시즌 2를 볼 것이다!” 하긴 이 고지는 나만 받은 건 아니니까. 2년 전 <지옥>의 신도가 된 전 세계 모든 구독자와 함께 받았을 터. 언젠가 시리즈가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연상호, 최규석이 만든 지옥도를 기다린 1인으로서, 시즌 1 이후 2년 동안 다수의 콘텐츠에 눈이 돌아간 죄를 시연하는 마음을 담아 시즌 2를 기다렸다. 전 시즌보다 더 큰 혼돈이 펼쳐지고, 한 줌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절망뿐인 이번 시리즈는 과연 어떤 것을 보여줬을까?
첫 고지와 시연이 벌어진 이후 한국은 혼돈의 시대가 이어진다. 정진수(김성철)의 시연 이후 힘이 약해진 종교 집단 새진리회,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화살촉, 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민혜진(김현주)의 소도, 그리고 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어떻게든 통제하려는 정부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청와대 정무수석 이수경(문소리)은 세력이 커지는 화살촉을 견제하기 위해 새진리회가 숨겨둔 부활자 박정자(김신록)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부흥회를 계획한다. 이때 정진수는 부활하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소도는 화살촉에 빠져 아내 지원(문근영)을 잃은 세형(임성재)을 통해 그를 포섭하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진다.| <지옥> 시리즈, 사상적 재난을 다룬 작품
<지옥> 시리즈는 물리적 재난이 아닌 사상적 재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를 통해 <지옥> 시리즈를 이렇게 설명했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거대한 사건이 벌어진 근원적 이유보다 사건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즌 1에서는 고지가 내려지고, 죄인으로 명명된 이들이 해당 시간에 맞춰 지옥의 사자들로부터 개죽음을 당하는 현상을 자세히 비춘다. 인상적인 시연 장면만큼이나 시선을 현혹하는 건 정진수. 신이 인간의 죄를 벌하는 것으로 선동하는 새진리회, 그리고 나약한 마음에 이 사이비종교에 몸을 맡긴 광기 어린 사람들의 모습이다. 세 치 혀로 내뱉은 정진수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그들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는 종교 집단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유일하게 인간으로서 올곧은 신념을 가진 민혜진의 눈을 통해 보이기에 그 여파는 오래 간다.
시즌 2에서도 이 사상적 재난은 계속된다. 그 중심축은 각 집단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다. 부활한 박정자를 놓고 대립하는 각 집단의 싸움은 어지러운 세상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아등바등 싸우는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촉발된다. 새진리회, 화살촉 등 모두가 신의 뜻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신은 없다. 신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자기 합리화에 빠진 우매한 인간들뿐이다.| 재난 속에도 꿈틀대는 권력욕, 그리고 거짓말
시즌 1은 고시와 시연, 그리고 정진수의 존재와 영향력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시즌 2에서는 그 현상으로 도래한 어지러운 세상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진수의 바통을 이어받는 이는 바로 이수경이다. 청와대 정무수석인 그녀는 세력 간의 혼란 속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옥 불에 뛰어든 것 같지만, 그건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녀가 계획한 건 각 집단 간의 견제를 통해 정부 측에 힘을 싣는 것뿐.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부활한 박정자를 메시아로 만든다.
“좋은 주인공을 가진 이야기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라 말하는 그녀는 교리보다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캐릭터가 가진 힘으로 와해된 국민들을 정부 측으로 끌어모으려는 거짓된 야심은 정진수 못지 않다.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 사이비 종교나 부패한 정치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거짓말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이를 동력 삼아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의 행태는 재난 속에서도 인간들의 사회라면 계속된다는 걸 보여준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부활한 정진수 또한 이수경에 뒤지지 않는다. 정진수의 거짓말은 아내를 잃은 세형, 정진수의 부활만 기다린 화살촉, 새진리회, 이수경에게까지 뻗쳐 나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지속 가능하게 이용할 수 있는지 아는 그의 머릿속에는 나약한 이들을 어떻게 이용해먹을지만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 후 얻게 된 공포감을 없애기 위한 개인적인 욕심에 이들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모습은 부활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소도 또한 내부 분열에 휩싸인다. 박정자를 아이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민혜진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 간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 민혜진을 반대하는 이들은 소신과 신념을 저버리고 집단의 힘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뜻이라도 사람들이 모이고 집단이 커지면 권력의 파워에 무릎 꿇는 게 인간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셈. 연상호 감독 각 집단의 내외적 문제를 수면위로 올리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벌이는 인간의 이기심이야 말로 지옥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새롭게 투입된 배우들의 활력!
<지옥> 시리즈의 동력 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새로운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각 인물로 하여금 독특한 세계관에 따른 이야기를 설득시킨다. 표면적으로 가장 눈에 띈 건 바로 지원 역을 맡은 문근영이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은 강한 열망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연기한 햇살반 선생 지원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 뭔가 행동하지 않았던 게 자신의 죄라 말하며 몸 바쳐 이를 고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 드라마 <가을 동화>의 은서 영화 <장화, 홍련>의 수연을 잊게 만든다. 기괴한 분장과 광신도의 말투로 연기하는 모습도 좋지만, 박정자 시연을 직접 보면서 짓는 엷은 미소와 차 안에서 남편의 농담을 듣고 분노하는 모습이 오랜 잔상을 남긴다.
최고의 거짓말쟁이인 이수경으로 분한 문소리는 권력을 향한 투철한 목적의식을 갖고 많은 이들을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와 극에 달하는 이중성을 드러내는 연기가 눈에 띈다. 특히 후반부 폐온천에서 역사적으로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 권력을 지속하는 방법을 소개하며 숨겨왔던 야욕을 보여주는 장면은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들고 설득력 있게 그린다.
어려운 상황에서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은 자신만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기존 유아인이 구축한 캐릭터와 다른 결의 정진수를 만날 수 있는데, 그만의 가스라이팅 실력으로 세형과 화살촉, 이수경 등을 조종하는 야비함이 돋보인다. 특히 6부에서 벌어지는 정진수의 말로를 기대하면 좋을 듯싶다.| 그럼에도 희망의 태양은 떠오른다.
시리즈의 특성상 이번 시즌 2는 영역 확장을 꾀했다. 전편보다 이야기와 몸집이 커진 시즌 2에서는 각 집단의 대립과 이합집산 등을 통해 현대 사회를 향한 비판의 강도를 세게 가져간다. 더불어 어려운 상황일수록 죄를 사하고 신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은 이번 시리즈를 통해 초기작 <돼지의 왕> <사이비> 정도의 깊어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 주는 듯한 느낌도 든다.
끝없는 검은 터널만 이어진 건 아니다.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서도 작은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시즌 1에서는 부모의 희생으로 부활한 갓난아기에 이어 시즌 2에서는 어렵게 조우하는 박정자와 그의 아이들, 그리고 민혜진이 돌보고 있었던 생존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지를 받고 시연을 받는 이들이 넘쳐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이기심을 불태우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부모의 희생과 사랑은 빛을 더 발한다. 6부에서 정진수와 박정자는 같은 부활자임에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박정자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점이다. 부활한 아기 또한 부모의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셈. 시즌 2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민혜진의 결심과 떠오르는 태양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듯이,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연상호 감독은 또 한 번 희망을 심는다. 누군가는 <부산행> <반도>처럼 진부한 설정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옥 같은 세계관에서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태양은 꼭 필요하다. 아기에게 ‘쏠라 트레인(sola train)’이라는 장난감이 필요하듯이.덧붙이는 말: 감독님 이번 시즌이 마지막은 아니죠? 제발 시즌 3 만들어주세요. 넷플릭스도 다음 시즌 바라고 있을 겁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3.5 / 5.0
한줄평: 사상적 재난에서 대피하는 방법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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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임파서블 / 시리즈의 화려한 피날레 / 파이널 레코닝 / 톰형의 씹어먹는 액션 / 톰형이 찢었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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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좀비크러쉬: 헤이리> 메인 예고편
“세 명의 영웅이 헤이리를 구하리라!”
자고 일어나니 온 동네에 퍼진 좀비 바이러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선(공민정), 현아(이민지), 가연(박소진) 삼총사는
우연히 숨겨진 비리를 알게 되고 마을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데..
무더위 통쾌하게 날려버릴 NEW 코믹 액션 어드벤처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