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바다2025-02-15 17:32:22
숭고한 수많은 이름 모를 '안중근'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
영화 <하얼빈> 리뷰
▷영화 : 하얼빈(HARBIN), 2024
▷평점 : ★★★☆
▷한줄평 : 어둠 속에 불을 밝힌 수많은 ‘안중근’의 역사는 다시 훨훨 타오르고 있다
영화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고뇌에 찬 '인간' 안중근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동료 독립군에 대해 서사한다.
왜 그는 그토록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목숨을 건 투사가 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안중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당시 수많은 이름 모를 또 다른 ‘안중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웅주의를 배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름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또 한 명의 ‘안중근’ 아니던가.
매서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광활한 두만강을 홀로 건너는 안중근, 그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만국공법에 따라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풀어 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그 일본군의 역습에 독립군은 궤멸되고 안중근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여기서 그의 깊은 고뇌는 시작된다.
영화 <하얼빈> 스틸컷
“길을 잃었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으니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내 목숨은 죽은 동지들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안중근(현빈)/하얼빈
1년이 지난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독립군들은 하나둘씩 안가로 모여든다.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는 독립군 동료들 앞에 안중근은 약지를 잘라 자신의 결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창섭(이동욱),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등의 독립군들은 ‘늙은 늑대’를 처단하기 위해 힘을 보탠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일 수가 없다. 굳은 신념으로 갖는 난관을 극복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는 이도 있지만,
밀정으로 배신하는 동료가 있기도 하고, 지지부진하기만 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마적단 두목이 된 사람도 있다.
“김형, 독립이 되겠소?” 우덕순(박정민)
“일본의 역사로 남으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요.” 김상현(조우진)
그 이후 영화는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완성하기까지 7일간 벌어지는 여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밀정을 이용해 턱밑까지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독립군의 치열한 수 싸움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그 과정에서 말을 타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는 장면, 작은 창에 드리우는 빛에 의존하여 골방에 모여 거사를 논의하는 장면, 폭약을 실은 마차를 방패 삼아 일본군과 총격 다툼을 하는 장면, 하얼빈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의 긴장감 흐르는 추격 장면 등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비장감과 영상미를 스크린에 꽉 채워 보여준다.
영화 <하얼빈> 스틸컷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하얼빈의 거사에서 영화는 정점에 이른다. 그러나, 예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사나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
마지막 안중근의 독백을 폭발시키기 위해 극도로 감정 노출을 자제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에 꽂혀 날아든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에 다시 도전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현빈)/하얼빈
그렇게 영화 <하얼빈>은 오늘의 '안중근'을 소환해내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1945년 우리나라의 독립은 미완이라고 말한다. 처단되지 않은 친일파가 그렇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그러하다.
그리고, 2025년 암울한 오늘의 현실이 더욱 그러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지 않던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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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월드컵을 기념해서 축구 영화를
총 여섯 편을 추천드릴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축구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소림축구
ⓒ 네이버 영화
synopsis
한때 황금의 오른발로 명성을 날렸던 축구선수 명봉. 그는 부정시합 제의를 거절한 후 폭행을
당해 오른발을 잃지만, 넝마주이 씽씽 그리고 소림사에서 무공을 익히던 친구들과 함께
축구팀을 꾸린다.
cine pick!
주성치의 첫 번째 단독 연출작이자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홍콩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N차 관람을 하는 영화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이다.
선데이리그
ⓒ 네이버 영화
synopsis
인생의 가장 완벽한 한 ‘골’을 위해 왕년에 피땀눈물을 꽤 흘려도 봤지만 끝내 좌절하고, 지금은
더 이상 완벽해지려는 시도조차 멈춘 이와, 못내 이루지 못한 꿈줄을 붙잡고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축덕 어른이들의 눈물 핑, 콧물 찡 흐르는 풋풋살벌 코미디 영화
cine pick!
재기발랄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코미디이자 가슴 뭉클한 성장 드라마로 공감의 웃음과 감동을
안겨준다.
골!
ⓒ 네이버 영화
synopsis
산티아고 뮤네즈의 아버지는 빈곤한 그의 가족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넘어왔다. 그런
산티아고의 유일한 관심은 오로지 축구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지역 시합에서 축구를 하다가
스카우트 담당인 글렌 포이에 의해 발굴되어 영국 프리미어 클럽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레알 마드리드와의 계약을 앞둔 중요한 게임을 앞두게 되고,
화려한 세계 축구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끝없는 노력이 계속된다.
cine pick!
<골!>은 3편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영화의 첫 번째 시리즈이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는 영화이다.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재밌게 볼 수 있으며, 축구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하는 영화다.
맨발의 꿈
ⓒ 네이버 영화
synopsis
전직 축구스타 원광은 동티모르에서 사기를 당하고, 맨발로 공을 차는 아이들에게 신발을
팔기로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축구화가 비싸 사지 못하고, 원광은 다른 결심을 한다.
cine pick!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을 결성하여 히로시마 국제유소년 축구대회 우승으로 이끈 한국인 감독
김신환 감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화이다.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웃음이 나오고,
성장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그들만의 월드컵
ⓒ 네이버 영화
synopsis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축구 스타 대니는 승부조작 사건으로 명예가 실추되고 급기야
음주운전에 경관 구타로 감옥에 가게 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감옥에서 간수로부터
축구팀을 훈련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따돌림을 피할 수 있는 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그것은 간수 대 죄수 축구 시합을 벌여 죄수들이 이기게 하려는 것이다.
cine pick!
1974년에 개봉한 <더 롱기스트 야드>를 각색한 <그들만의 월드컵>은 배우들의 코믹 연기가
매력적인 영화이다.
베른의 기적
ⓒ 네이버 영화
synopsis
2차대전 후 독일의 어느 탄광촌, 마테스는 마을 출신 축구선수 '란'을 영웅 삼아 살아간다.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풀려나고, 냉담하던 아버지는 그를 월드컵 결승에 데려간다.
cine pick!
축구를 좋아하는 사라마과 스위스 월드컵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본다면 재미와 감동이 배가 될
영화이다. 6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독일의 흥행작으로 꼽힌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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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6년 여교사가 당시 만 13세 남학생과 성관계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여교사는 2급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후 조기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시 남학생을 만나 관계를 가진 것이 적발되었고 최종적으로 7년 징역을 살았다. 더욱 충격(?) 적인 것은 여교사는 남학생과의 사이에서 딸 2명을 낳았다. 복역 중 첫째 딸을 낳고 가석방되었고, 두 번째 복역 중 둘째 딸을 낳았다. 출소 후 여교사와 남학생은 결혼하며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2017년 그들은 이혼을 했고, 2020년 여교사는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남학생과 두 딸이 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드 헤인즈의 신작 <메이 디셈버>는 위에 언급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래도 토드 헤인즈는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해외의 경우 아동 성범죄는 아주 심각한 범죄로 취급된다. 특히나 최근의 국내 경향으로는 이 영화가 개봉조차 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개봉을 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라는 명성과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지 않을까.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아동 성범죄라는 소재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인 건 분명하다.
우선 토드 헤인즈라는 감독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긴 감독은 아니라는 걸 밝혀야겠다. 기억도 잘 나진 않지만 <파 프롬 헤븐>, <캐롤>로 이어진 멜로드라마 감독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 사이사이엔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있지만 난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의 연장으로 <메이 디셈버>를 읽었다. 즉,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를 접근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더 이상의 멜로 드라마가 가능한가.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어원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글라스 서크로 상징되는 그 멜로드라마가 2024년에 가능하냐는 문제다. 멜로드라마는 아주 단순한 구성을 취한다. 남녀가 사랑하지만 어떠한 장애물이 그 사랑을 막는다. 더글라스 서크의 걸작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는 계급과 나이가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아주 오래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이 사랑을 가로막았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랑을 가로막을 게 없어서 죽을 병에 걸린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물론 간혹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같은 장애라는 요소나 혹은 <건축학개론>에서는 이 장르적 요소를 훌륭하게 지역 정치학으로 엮는 경우도 있다. 토드 헤인즈는 <메이 디셈버>에서 그들의 사랑을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둘의 나이차는 무려 23살이니까.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멜로드라마 장르 공식으로 이 영화를 풀어가진 않는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제 사건의 여교사 그레이시라기보단 그들에게 접근한 엘리자베스다. 그레이시와 조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그 영화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게 바로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실제 인물 그레이시를 관찰하기 위해 접근한다. 극중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인물을 고른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더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거만하다. 즉,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는 당연히 뒤따르는 문제가 생긴다. 엘리자베스와 관객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화를 진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관객들이 엘리자베스를 계속 쫓아가며 그녀가 얻는 사실과 힌트들로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할 것인가. 흔히 플롯을 구성할 때 아주 많이 쓰이는 방법이지만 토드 헤인즈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법적으로 그레이시는 아동 성범죄자다.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그레이시는 스물세 살 연하 남자를 서른여섯에 만났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당신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건 첨예한 문제다. 미성년자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할리우드 감독들과 배우들의 연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더군다나 미성년자다. 그것도 만 13세.
아마 단순히 나이차를 두고 그 연인들을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내면을 깊게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건 사기꾼이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토드 헤인즈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레이시와 주변 인물들을 만나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향과 관객들이 그레이시와 조를 따라가는 하나의 방향으로 총 두 개의 방향성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엘리자베스 쪽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똥과 함께 등장한다. 혹은 엘리자베스는 똥을 들고 등장한다. 여하간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시를 연기하려고 하는 점은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오만하다. 자신이 흥미로운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전 남편과 변호사 등을 만나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본다. 중요한 장면으로 그레이시가 조와 처음으로 섹스한 곳에 가서 자위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메리의 학교에 가서 연기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강의에서 엘리자베스는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엘리자베스는 배우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장면을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엘리자베스 본인을 당시 그레이시의 상황에 놓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레이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영화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엘리자베스란 인간은 자신의 배역을 위해 남의 남자랑 섹스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건 엘리자베스란 인간에 대한 일부의 이해다.
그런 다음 엘리자베스는 카메라와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아주 인상적인 연기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딘가 부족한 연기라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부족한 연기를 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아니라 토드 헤인즈의 연출이다. 영화가 이끌고 온 서사와 카메라의 위치가 지금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절대적으로 관객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연기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본인이 찾던 결론에 도달한다. 그레이시가 어렸을 때 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비뚤어진 성관념이 생겼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핵심적인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사건이 인간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프로이트에게 배웠다. 최근 들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거나 프로이트는 사장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책을 보거나 의견을 들으면 결국 다시 프로이트 이론 안에서 그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본다. 프로이트의 일부 이론이 틀리거나 부정당할 수는 있지만 결국 다시 프로이트라는 점은 아직까지 분명하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가 함정을 파두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성추행의 결과로 그레이시가 조와 섹스를 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훗날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비웃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마치 삼류 연기자가 연기하는 에로 영화 같은 느낌이 풍긴다. 심지어 사실관계조차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걸 밝혀냈으며 인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부분을 밝혀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업적은 엄청난 것이지만. 하지만 분명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무엇의 항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그레이시와 조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그레이시와 조는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냉장고를 열고 소시지가 없다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심각한 음악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느껴진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은 조가 자려고 누워있는 그레이시 옆에 누웠을 때 그레이시가 냄새난다고 씻고 오라고 이야기한다. 극장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단순히 웃기는 장면은 아니다. 이 전 장면이 조가 TV를 통해 세수를 하는 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보았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그 장면과 이 장면은 같이 연결해야 한다. 조는 왜 깨끗하게 세수하는 여자를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일까. 그리고 그레이시가 씻으라고 말할 때 왜 상반신에 물만 살짝 묻히고는 마는 걸까.
조의 그런 심리에 대해 알 턱이 없지만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조와 그레이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더럽다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조는 자신이 더럽지 않다는 걸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더럽지 않기 때문에 씻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이는 추론이다.
내가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는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그레이시와 조가 마주치는 장면이다. 부엌에서 둘이 마주쳤을 때 쇼트의 배열이 약간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확신했던 것은 그레이시와 조의 대화를 샷 리액션 샷으로 이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조와 그의 아들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그레이시는 정면에 가까운 위치에 카메라가 위치하지만 조를 보여줄 때는 아들의 정면 가까운 곳에 카메라가 위치한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레이시와 조가 이야기를 해도 둘의 시선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영화가 그 시선을 일치시키는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전 남편을 만났을 때나 변호사를 만났을 때 완전히 일치시킨다. 또한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에서 시선은 일치한다. 시선을 일치시키는 문제는 보편적인 영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문법이지만 이러한 문법 자체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는 아들과 대화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 하지만 그레이시와 조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둘의 시선이 일치하는 부분은 영화 후반부에서 조가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리지 않았냐고 물을 때다. 조가 대화를 시도하자 카메라는 둘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이내 그레이시는 대화를 거부하면서 장면은 끝난다.
그레이시는 딸 메리의 졸업식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데 영향을 주고, 자신에게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게 된 이웃이 생기자 오열한다. 이따금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문제가 명확하게 어떤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레이시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앞부분 소시지가 없을 때의 음악과 딸 메리의 의상을 고르는 장면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레이시의 문제가 명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 부분으로 그녀를 추론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와 굉장히 서먹하다. 아버지를 만나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면 그 또한 추론할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린 알 수가 없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조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전 남편 대화를 살펴보면 전 남편이 당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건 그의 입을 통해 증언되기 때문이다.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그레이시를 보고 범죄자라고 일갈하며 그레이시는 당시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 그레이시는 조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별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 상태를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레이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거나 그레이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즉 36살의 여교사가 13살의 남학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섹스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고, 복역 후 그와 결혼을 했으며 이후로도 같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독백 연기도 아니고 마지막 장면의 엘리자베스의 오만함도 아니다.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이 왜 잊히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만 13살의 아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감정이 타인에 의해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이 범죄 행위가 되며 정상적인 성장을 밟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서야 자신의 10대를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장면은 조와 엘리자베스의 섹스다. 이 장면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레이시는 어떤 변화도 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화하는 건 조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나타나고 나서 조는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아니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조는 처음으로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렸던 거 아니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부인하는 그레이시의 행동과는 다르게 조는 그 손가락질에 대해 그레이시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조는 10대 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중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명백하게 자신의 역할을 위한 섹스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레이시의 입장에서 조를 품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영화는 마치 성기 삽입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연출했다.
하지만 조의 입장은 약간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했다. 이 또한 추론일 뿐이지만 천천히 다시 한번 살펴보자. 엘리자베스는 지금 서른여섯의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입장이다. 즉 당시의 그레이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 13세 이후의 삶을 다시 겪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의 편지를 꺼내보고 딸의 졸업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는 당시의 그레이시와의 섹스를 다시 해본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물론 추론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의 인서트로 계속 등장하는 나비와 애벌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비가 나온다.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인서트에서는 애벌레가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순서가 뒤집혀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므로 이미 나비가 된 조가 다시 애벌레부터 시작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밖은 부드러운 빛이 내리쬐고 안은 어두컴컴하다. 바깥은 녹음이 드리워진 공간이다. 이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처럼 느껴진다. 인상주의가 등장했을 때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리다 만 그림이거나 혹은 그림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작자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비판이 쏟아졌었다. 미술사 고전기에 원근법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모방이라는 아주 중대한 부분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세상의 비밀을 파헤친 것만 같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어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의 인상들을 그리면서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나는 이 점이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태도가 결국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멜로드라마의 감독 답게 토드 헤인즈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탁월하게 연출했다. 특히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화장해 주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모두 옆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빛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엘리자베스의 독백 장면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반면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느낌은 약하다. 즉 이 장면은 분명한 디렉팅이 들어간 것 같다. 이 순간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입을 맞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충동의 감정에 솔직했다면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얻지 않았을까. 물론 난 엘리자베스를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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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승 | 엉성한 토스와 힘이 부족한 스파이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도자 생활 내내 10%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없는 배구 선수 출신 감독 '우진'(송강호). 아내와도 이혼하고 맡은 팀도 없던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해체 직전의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 에이스 '성유라'가 이적하면서 오합지졸이 된 팀이지만, 우진은 기꺼이 감독 제의를 받아들인다. 1년만 버티면, 대학 배구팀 감독으로 옮겨주겠다는 이면의 약속과 함께.
의욕 없는 감독과 실력 없는 선수들이 만나 개막 후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 핑크스톰. 하지만 자기 선수 생활을 망친 '문오성'(김홍파) 감독에게 조롱을 당한 뒤 우진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악연인 스승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겠다고. 이에 발맞춰 안하무인 구단주 '정원'(박정민)도 핑크스톰이 1승을 하면 상금 20억을 풀겠다는 파격 공약을 걸자, 우진은 단 한 번이라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잘못된 비빔밥
대부분의 상업 영화가 그렇지만, 특히 스포츠 영화는 모범답안이 확실하다. 서사적으로는 전력이 약한 팀이나 선수가 기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반 훈련 과정은 유머로, 후반부에는 감동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국내에서는 <국가대표>가 가장 대표적이다. 작년에 개봉한 이병헌 감독의 <드림>이나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도 비슷한 결의 영화다.
캐릭터는 감독과 선수가 핵심이다. 균형추가 한쪽으로 쏠릴 때도 있지만, 감독과 선수는 대체로 서로의 아픔과 상실감을 위로하며 한 팀으로 거듭난다. 근래에는 <머니 볼>이나 <스토브리그>처럼 단장, 구단주 등이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스포츠 경기 대신 스포츠 산업 종사자의 이야기를 다룬 <에어> 같은 영화도 유사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신연식 감독의 <1승>은 스포츠 영화의 공식과 트렌드를 모두 반영하고자 했다. 오합지졸 배구 감독과 선수를 묘사한 대목은 <드림>과 같은 웃음을, 그들이 한 팀이 되어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은 <국가대표>나 <우생순>과 비슷한 감동을 목표로 한다. 구단주가 새로운 목표에 맞는 팀을 재조직하는 과정은 <스토브리그>를 만화적으로 변형한 듯하다. 문제는 이 모든 요소가 따로 놀면서 서로의 맛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웃기 힘든 코미디 영화
<1승>의 초반부는 코미디를 지향한다. 구단주의 인수 사가, 단기 감독 임명, 의지 없는 선수의 조합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코미디다. 팀 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갈등과 문제 역시 그 재료로서 적합하다. 코칭스태프와의 어떤 논의도 없이 에이스나 가장 안정적인 포지션 선수만 팔거나, 징계받은 선수를 대거 영입하고, 현금 트레이드를 하는 등.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기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 <1승>은 뻔뻔함이 부족하다. 코미디나 만화적인 전개로 빠지려는 찰나에 톤을 다운시키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우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1년만 프로 감독직을 맡은 후 대학 배구팀 감독으로 넘어가려는 속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영화는 우진과 스승과의 악연, 전처와 딸과의 미묘한 관계를 거듭 삽입하면서 웃음이 나오려는 분위기를 끊어버린다.
선수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폭행을 저질렀던 선수, 마흔이 된 베테랑 선수, 분노 조절 장애 선수, 일본 교포 출신 용병 등 각자 사연이 있는 문제아들은 훌륭한 유머 재료다. <드림>만 하더라도 노숙자 축구 선수들의 개인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더욱 뭉클하게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1승>은 이 모든 선수들을 단지 과거 팀의 에이스였던 성유라와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소비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한다.
즉, <1승>은 만화적인 분위기를 밀어붙이는 뚝심이 부족하고, 다양한 캐릭터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했다. 꾸준히 비정상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정원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인물들은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성급하게 대사를 한다. 이는 코믹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장애물이 된다. 뻔한 유머 포인트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니, 큰 웃음이 나오기 어렵다.
목적이 결여된 1승
중반부 이후에 톤이 완전히 바뀌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토록 1승을 염원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 일반적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면 감독이나 선수가 진심으로 1승을 원하게 되거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던 그들이 한 팀으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국가대표>에서도 선수와 코치 모두 각자의 개인사나 비밀을 털어놓은 후에야 한 팀이 됐다. 그런데 <1승>에서는 그 전환점이 잘 안 보인다.
그래도 구단주와 감독의 목적은 유추할 수 있다. 정원은 일관적이다. 그는 문제아만 모이는 꼴등 팀이 1승을 챙겨서 반전 드라마를 썼다는 스토리텔링을 티켓 판매에 적극 활용한다. 우진의 변심도 어느 정도 근거가 보인다. 자리만 지키자는 생각을 하던 그는 고등학생 시절 선수 생활을 망쳤던 스승에게 패배한 후 조롱 섞인 비난을 듣는다. 이에 그는 어떻게든 1승을 챙겨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로 무장한다.
문제는 선수들이다. 적당히 연봉만 받자는 태도를 보여주던 선수들은 우진의 일갈 몇 마디에 갑자기 훈련과 경기에 몰입한다. 그 계기는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기회를 받고 싶어하는 몇몇 유망주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왜 1승을 원하는지를 좀처럼 알 수 없다. 성유라 관련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1승>은 마지막까지도 각 캐릭터의 플롯이 하나의 목적지에서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스포츠 영화' 중 '스포츠'는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승>은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바로 배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힘이다. 실제로도 배구 경기 양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구현하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초중반까지는 배구 경기가 흥미롭다고 하기 어렵다. 선수들 자체의 실력 문제가 있다 보니 경기 장면은 맥 빠지기 일쑤다. 하지만 후반부부터는 박력 넘치고, 쫄깃한 경기 장면이 등장하면서 보는 맛도 덩달아 살아난다.
특히 그래픽과 촬영분을 적절히 배합해 가능한 코트 위에서의 긴장감과 박진감을 재현하려 한 시도가 눈에 띈다. 특히 배구공에 카메라를 달은 시점에서 코트 양쪽을 10번 이상 오가는 랠리를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마치 <챌린저스>에서 테니스 공에 카메라를 단 시점으로 테니스 경기를 보여준 것을 연상시킨다. 배우들의 어설픈 움직임도 감출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특정 배구 용어와 작전이 어떻게 코트 위에서 펼쳐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연출도 흥미롭다. 사실 해당 스포츠의 열성적인 팬이 아니라면 경기 도중에 전술, 전략적인 측면을 알아챌 눈썰미를 갖추기 어렵다. <1승>은 관객의 눈썰미까지 보충해 주면서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특정 선수 교체 타이밍, 서브 공격 작전, 후위 공격과 속공 활용 시점, 포지션 변경 이유 등을 짚어주는 식이다.
그 덕분에 드라마가 공감되지 않거나, 유머 포인트가 웃기지 않더라도 <1승>은 결말은 일정 수준 이상의 감동을 보장한다. 1세트, 1점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마지막 두 세 경기 양상을 쫓다 보면 승리를 향한 집념에 자연히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영화의 힘이라고 볼 수 없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퀸의 라이브 에이드 무대를 재현했을 때의 전율을 두고 영화보다는 퀸의 노래 덕분이라는 말이 나온 것과 비슷하다.
세대교체?
배우들 상반된 모습도 특이점이다. 박정민은 다시 한번 가치를 증명했다. 자칫 유치하거나 과장되어서 어색할 수도 있는 만화적인 캐릭터에 최소한의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배우 본인이 인터넷 방송에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개인 방송 화면이 등장할 때 느껴지는 위화감도 최소화했다. 만약 정원을 중심으로 더 유쾌하게, 끝까지 B금 감성을 유지했다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반면에 지난 20여 년 간 국민 배우였던 송강호의 선구안은 이제 의문스럽다. 물론 <1승> 속 모습만으로 그의 연기력을 비판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우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이니까. 과거의 상처 때문에 속물처럼 살던 감독이 어릴 적 열정을 되찾는 서사는 스포츠 영화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리셰다.
다만 <기생충> 이후 <나랏말싸미>, <브로커>, <비상선언>, <거미집> 등 송강호가 명성에 걸맞은 완성도를 갖추거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디즈니+의 <삼식이 삼촌>도 다른 OTT 시리즈에 비하면 반향이 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승>은, 아무리 개봉일에 국가적 불상사가 겹쳤다 하더라도, 송강호가 믿고 보는 배우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를 남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Poor 형편없는
우격다짐, 뒤죽박죽으로 간신히 챙긴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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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지성에 돌 던지기
추락의 해부보다도 해부되는 것들의 추락. 이 법정 가족 스릴러 드라마 안의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 싸우지만 역설적으로 극 밖의 관객은 ‘무엇이’ ‘왜’ 진실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씬이 긴장감과 흡인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극 중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 기여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집중하길 선택했던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 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늘 남들을 먼저 챙겨야 해서‘ 힘들었다고,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모두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사뮈엘은 심지어 시각장애인 다니엘에게 없어선 안 될 안내견 스눕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플래시백에 다니엘의 음성을 빌어 입혀진 사뮈엘의 서사를 접한 관객은 희한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와 독박 가에 시달리던 부인들이 분노에 차 내지를 법한 진술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직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 쉬는 시간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가정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해 억울함을 마냥 삼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정에서 실질적 경제활동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위층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아래층에서 팬과 놀아났다든가 ‘남편의 고통을 무시했다’든가 기를 세워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검사 측 증인들의 성차별적 진술을 연이어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곱씹게 된다.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는 끝내 되지 못했어도 제1세계 지식인인 사뮈엘이 과연 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몰랐을까.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사뮈엘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경력단절의 부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몇 백 년간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당시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이기적이고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고 말하는 사뮈엘의 규명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조에에게 ”아,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인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재현한다. (이 오롯이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해 기울어진 자세를 지켜보는 스눕이 물고 있는 공은 어느 층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시 그때 누가 그의 그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입맛대로 끌어가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선천적으로 어울리는 타입, <타르>의 리디아 타르를 떠올리게 하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자, 어차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에 두 사람이 올랐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저술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취약함을 이미 드러내버린 사람과, “내 걱정 마. 난 어떻게든 써.”라고 얄밉게도 틀린 말 없는 선고를 내려버린 사람. 산드라가 말한 것 중 가장 날카로웠던 진실, 그래서 사뮈엘이 가장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은 아마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두고 날 원망하는 거야. 혼자 덫을 놓은 거야”보다도 “(가사노동의 배분에) 완벽한 균형은 없다고 봐. 순진하고 딱한 발상이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이란 무대가 이갈리아처럼 충분히 전복되기엔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싸움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명백하다. 이때 패자에게 중요한 건 ‘왜’ 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다. 녹취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사뮈엘은 최대한 지저분하게 부인을 옭아매기를 선택한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 극에서 주연이 된 부인은 또 한 번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역량과 그릇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사 뱅상에 의해 저지당하기는 하나,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초장부터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어려운 논쟁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더라도 그 논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류의 복잡성을 추구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비범한 작가인 그의 재능은 남편이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과 뒤틀린 감정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두 개인 사이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논리정연한 호소는 검사를 비롯한 청중의 적의를 잠시라도 멈춰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주 일부’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적이고 강인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부부간 원망은 덜하고 동등한 수준에서의 지적 교류는 더 활발했던 시절, 사뮈엘의 허락 하에 그의 개요를 가져다 소설로 발전시킨 산드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뮈엘이 제기한 표절 시비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을 거부하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위협적이고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알레고리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므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열악하고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산드라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설을 밀어붙여야 하는 처지로 몰아붙여진다. 산드라에게 아직 미묘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변호사 뱅상은 그를 믿는다고 공언한 유일한 어른이지만 애석하게도 ‘판단하는 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정작 산드라의 믿음을 획득하지 못한다. 뱅상은 법정에서 단 한 번 사실을 넘어선 추정을 ‘실수로’ 흘리는데 이때 그는 자기 피고인의 욕망(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또는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한다)보다도 인간 뱅상으로서의 욕망(산드라를 보호한다)에 잠깐 휩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를 지키기 위해 사뮈엘을 비난하고 찢어발긴 후, 사뮈엘이었던 것을 다시 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조립해 사뮈엘의 형상을 띈 것으로 창조한 직후. 지금까지의 변호 중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적이었던 반론을 펼친 그가 마주한 것은 산드라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거부 제스처다. 말했듯 산드라는 악의나 계략에 맞서는 것보다 진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드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둘의 얼굴이 한 숏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산드라라는 독특한 인물의 불가피한 고립을,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산장 부엌에서 이뤄진 뱅상-산드라 간의 첫 진술 장면, 바로 직전까지 아주 가까이 앉은 둘을 한 번에 잡는 바스트 숏이 수 차례 등장했는데도 산드라가 진술하고 뱅상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각 인물의 음성이 전개될 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출 뿐이다. 함께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카메라의 빠르고 단호한 시점 전환 때문에 관객은 거의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단절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법정에서 증인석에 선 채로 검사와 변호사 측 증인들의 말을 번갈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을 트래킹 패닝 숏으로 잡은 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칭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산드라를 두고 다니엘은 흔들리나 이어지고 뱅상은 확고하나 불통한다. 뱅상은 설원에서 취한 채 함께 담배를 피우고 텐션 가득한 농담을 할 때도 산드라를 마주 보고 있으나 카메라는 다정히 이어지는 시선 대신 각자의 후면 혹은 측을 보여줄 뿐이다. 아들의 축객령으로 우는 산드라를 뱅상이 태워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는 씬에서도 그는 거의 음성으로만 등장하고 화면은 산드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법정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다 끝나고 승리감에 도취해 단둘이 남겨지자 또 한 번 숨 막히는 텐션이 오르지만, 뱅상은 반쯤만 기대 오는 산드라를 딱 그 반만큼만 안아줄 수 있으며 관객 역시 그이들을 ’창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사람은 또다시 등만 보이는 채로. 우리에게 온전한 관람이 허락되는 교감은 뱅상과 산드라의 포옹이 아니라 귀가한 산드라와 다니엘의 한밤 침실에서의 보다 완전한 포옹이다.
산드라의 이해자는 변호인단이나 조에 같은 팬들이 아니라 극 중 유일한 미성년인 다니엘이다.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간 지점을 택한 부모 사이에서 가엾은 소년 역시 ‘남은 한쪽이라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니엘은 사고 이후 고도 근시를 가진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지와 단차와 오해를 필연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다. 극 중 산드라의 진술보다 다니엘의 진술이 먼저 의심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법정에 선 산드라가 문득 다니엘의 시점에서 관찰되듯 그려지는 구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을 집요히 좇는 그는 엄마의 진술을 듣고 가장 효과적이고 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낸다.
완성형 작가 그리고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처음 써낸,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 그들의 ‘생각해냄’이 recall인지 invent인지 우리는 영원히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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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든 엄마와 언니를 위한 기도
7/10
모녀 관계, 자매 관계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 관계의 복잡한 역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장소 중 하나다. 이들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아들, 남자 형제는 ‘바깥 일’만 잘하면 가족의 자랑이 되지만 딸, 여자 형제는 여기에 더해 관계를 유지하는 물질적·감정적 노동까지 잘 수행해야만 인정받는다. 불리한 위치에서 불평등한 노동을 떠맡은 이들은 서로를 깊게 이해하지만, 서로를 닮기는 거부한다. 이 관계만 벗어나면 더 좋은 삶이 가능하다는 듯 자꾸 그 관계 밖으로 나가려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얽힌 혈연이라는 관계는 지겹도록 끈끈한 것이어서 이들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라인〉은 바로 이 모녀, 자매 관계를 다룬다. 영화는 딸 마르가레트가 엄마 크리스티나를 구타하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딸을 때리려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된 딸이 엄마를 때리려는 거다. 격렬한 난투극 끝에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을 당하고(심지어 크리스티나는 장애를 얻는다), 마르가레트는 경찰로부터 석 달간 크리스티나에게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을 받는다.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마리옹은 마르가레트의 막냇동생이자 크리스티나의 딸이다. 앳된 얼굴의 마리옹은 언니와 엄마를 모두 사랑한다. 둘 사이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집 주위 100미터를 파란색 페인트로 동그랗게 칠해 ‘라인’을 그리기도 한다. 화가 많은 마르가레트와 예민한 크리스티나가 또다시 맞붙으면 두 사람과 함께하기가 영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모녀 관계와 자매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길항하며 좁힐 듯 좁혀지지 않는다. 영화에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가 왜 몸싸움을 벌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늘 남자를 바꾸며 연애하느라 어린 마리옹에게 소홀한 크리스티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주먹다짐에 휘말리는 마르가레트가 모녀로 만났다면, 갈등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딸 셋을 출산한 이후 경력이 망가졌다. 앨범까지 발표한 촉망받는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는 출산과 육아를 하며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피아노 강습으로 근근이 세 딸을 키웠다. 크리스티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딸들의 존재로 자기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영 어렵다. 크리스티나가 애인을 자주 갈아치우며 세 딸보다 그에게 더 많이 의존하는 데서도 그녀가 딸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티나는 불안하고 예민하다. 반면 마르가레트는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쉽게 분노하는 성격 때문에 동료들과 원활한 팀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다. 크고 작은 싸움으로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늘 문제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생 마리옹만큼은 끔찍이 아낀다. 매일 마리옹이 그려 놓은 선 밖을 서성이며 동생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는 마르가레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 둘을 모두 사랑하고자 하는 마리옹의 마음은 간절하다. 마리옹은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에게 애타게 기도한다. “엄마와 언니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어요.” 마르가레트가 파란 선을 넘지 못하도록(엄마와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엄격하게 감시하던 마리옹은 3개월의 분리 기간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나서 자신이 힘들게 그린 선을 지운다. 마침내 어색한 표정으로, 별일 없었다는 듯 대면하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의 뒤에는 마리옹이 있다. 서로를 향한 애증으로 잔뜩 엉킨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가 모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미성숙하고 불안한 어른을 보듬고자 온 힘을 다한 마리옹 덕분이다.
마리옹이 짊어진 책무는 그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녀/자매 관계의 복잡다단함은 당사자 간의 내밀한 소통과 더불어 그녀들의 실존 조건 역시 바뀌어야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될 마리옹이 부담에 짓눌리지 않기를, 자신이 품은 성숙함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를, 엄마·언니와 조금은 더 편안히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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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을 왜곡되어 보게 만드는 내면
누구나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때론 대화하며 살아간다. 나의 심리 상태는 외부의 시선을 형성하는 데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 바라보는 세상과, 기분이 나쁠 때 바라보는 세상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외부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다. 좋은 기분일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나쁜 기분일 때는 모든 것이 괴상하고 기이하게 보인다. 이건 개인이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조정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조절되는 건 아니다. 특히나 우울증 증상이 심각해졌을 때는 자신은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화 <스마일> 1편은 개인의 심리가 외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공포 스릴러 형식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등장인물들은 괴상한 스마일 전염병에 걸리며 웃음을 지은 채 자살하고, 이를 목격한 사람이 다시 감염된다. 마치 우울한 사람과 자주 접할수록 그 감정이 전염되듯이, 영화는 감정의 전염을 무척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공포 장르의 틀 속에 있으면서도 심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개봉한 <스마일2>는 음주운전과 남자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가다가, 다시 재기하려는 스타 가수 스카이(나오미 스콧)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첫 번째 감정] 스카이의 아픔
스카이는 음주 운전 사고로 남자친구가 죽는 것을 옆에서 목격했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스타 가수였지만, 그 사고로 인해 심리적 충격을 받았고, 대중의 비난도 받아왔다. 스카이는 사고 이후 육체적인 후유증과 더불어 심리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은 점점 심해져 마약 성분의 진통제를 찾게 된다. 그녀의 아픔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넘어 심리적인 문제와 깊이 얽혀 있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스카이는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로, 소속사와 어머니의 압박 속에 무리하게 복귀를 준비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며 성공과 재기를 강요한다.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스카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그녀를 밀어붙인다. 스카이는 심리적으로 안식할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그녀의 아픔은 외면받고, 고통은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되어간다.
스카이의 아픔은 단순히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선다. 그녀는 과거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주변의 기대와 압박은 그녀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점점 더 깊은 상처로 변해간다. 스카이는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려 하지만, 그 고통은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삶을 갉아먹는다. 영화는 이러한 스카이의 심리적 고통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만든다.
[두 번째 감정] 스카이의 우울
스카이는 영화 내내 불안정하고 불안해 보인다. 죄책감, 압박감, 자기 자책 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혼자 떠안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들은 그녀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든다. 스카이는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결과로 점점 더 많은 환상과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러한 환상의 순간들은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그녀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스카이가 자신의 심리를 통제하지 못하는 과정을 기괴한 이미지로 표현하며, 그녀가 점점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스카이는 여러 번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그녀의 우울은 정상적인 시도를 무력화시키며 계속해서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어내린다. 결국 스카이의 심리 상태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그녀 자신마저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카이는 자신의 우울을 떨쳐내기 위해 여러 번 노력하지만, 주변의 환경과 내면의 고통이 그녀의 노력을 무력화시킨다.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팬들 앞에 서며 정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그녀의 우울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그녀의 내면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이러한 스카이의 우울한 감정을 다양한 시각적 표현을 통해 강조한다.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과 그녀의 흐릿한 눈빛, 환각 속에서 보이는 기괴한 이미지들은 스카이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고통을 더욱 깊이 느끼게 만든다.
[세 번째 감정] 스카이의 감정전파
스카이는 몰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단한 팬층을 보유한 스타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스타들이 많다. 십대들은 그들을 보며 꿈을 키우고, 그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스마일2>는 한 스타의 몰락이 수많은 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스카이의 모든 행위는 미디어를 통해 팬들에게 전해진다. 그녀가 콘서트장에서 보여주는 행동들은 팬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그녀의 우울은 무의식중에 팬들에게도 전염된다. 스카이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우울을 추스르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절망과 불안을 드러내게 된다. 이 과정이 무척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표현되며, 팬들에게도 충격을 준다.
스카이의 감정전파는 단순히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개인적인 행동과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매우 현실감 있게 묘사하며, 스타의 감정이 팬들에게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팬들은 스카이의 몰락을 보며 그녀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녀의 우울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스카이가 느끼는 절망과 공포는 팬들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지며, 영화는 이러한 감정 전염의 과정을 공포스럽고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스카이의 몰락은 단지 한 사람의 추락이 아니라, 그녀를 따르는 수많은 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사건임을 영화는 강조하고 있다.
우울증 환자의 심리 속에 들어간 듯한 기괴함
<스마일2>는 공포 장르를 통해 우울하고 불안정한 사람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심리학 소설을 읽는 것처럼 불안정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고 망상을 겪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감정이 전염된다는 설정은 1편에 이어 계속되며 무척 신선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우울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우울한 감정은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영화는 이러한 현대인의 우울과 불안을 스타라는 매개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카이는 개인의 불안과 우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몰락은 단순히 한 사람의 추락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된다.
<스마일2>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우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감정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영화는 공포라는 장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감정적 연결과 그 파급 효과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의 우울함을 직시하고, 그로 인해 왜곡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은 때로는 우리의 내면을 왜곡시킬 만큼 강력하다. <스마일2>는 이러한 감정의 힘과 그 전염성을 무섭도록 현실감 있게 그려낸 영화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의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주변의 감정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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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전투가 아니었다 - GHOSTS OF WAR
흥해라 이 영화
고스트 오브 워 (2020)
- 2차대전 막바지 크리스와 4명의 분대원들은 한때 나치가 점령했던 프랑스 대저택에 도착한다
휴양지 같은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려 했으나 정체불명의 소리와 의문의 사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적군과의 교전도 모자라 정체불명의 존재와 싸워야 하는 군인들의 퇴마미션 '고스트 오브 워'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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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유미의 세포들 시즌2> 메인 예고편
"예쁘다" 강력한 돌직구 매력이 온다! 티빙 오리지널 [유미의 세포들 시즌2] 6월 10일 TVING 단독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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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그북> 메인 예고편
경력 30년의 잠수사 황병주 해병대 출신 한재명 부산 사나이 백인탁 수중 장비를 챙긴 이들은 바다로 향한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바지선 오직 '상승'과 '하강' 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그 곳 잠수사들은 무너진 벽과 뒤엉킨 격실을 뚫고 마지막까지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데... 그 어디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 '로그북' 그 첫 장을 세상에 펼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