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2-09 12:56:26
잘 만들어진 판타지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썼어요.
한국 드라마에 멜로 열풍이 불 때가 있었다. 그 멜로 열풍은 장소도 상황도 시간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드라마 속 인물들은 검사가 되어도 연애를 하고 의사가 되어도 연애를 하고 경찰이 되어도 연애를 하는 데다 과거나 미래로 가도 연애를 하는 것도 모자라 학폭을 저지른 동창들에게 복수를 하는 와중에도 연애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그 열풍이 아직까지도 “먹힌”다고 믿었는지 이제는 아주 우주까지 가서도 연애를 하느라 제작비를 말아먹어놓고는 SF팬이 소수라서 드라마가 안된다는 궤변까지 늘어놓고 있다. 세상에나.
이렇게 유구한 연애의 역사를 자랑하는 K드라마인 데다. 애초에 인본주의자 성향이 전혀 없는 인류애가 바닥난 나에겐 그런 드라마들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제목이 중증외상센터 라고 한다 한들. 내겐 정말 큰 심적인 허들 하나가 드라마 앞에 턱 하니 놓여 있는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부작이라는 "비교적"짧은 러닝타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뻔뻔해 보이는 주지훈의 표정을 보며. 이건 병맛이다.라는 느낌에 나는 가볍게(?) 드라마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즐거웠다. 오랜만에.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포지셔닝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넘쳐나는 꽤 많은 메디컬 드라마들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게" 다루는 스킬 덕에. 보는 내내 심하게 불편하지 않게 드라마를 "정주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이런 즐거운 청량감은 백강혁이라는 유니콘의 역할이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이야기가 판타지화 되어 버린다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끝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고. 어느 정도의 해피엔딩을 보장받은 상황에서의 이야기들은 적당히 현실과 엮여 들어가며 피식피식 웃게 하기도.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판타지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기도 한다. 속이 시원해지면서도 마음 한편에 걸려있던,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되뇌어볼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물론 앞선 워딩인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게"라는 말이 대충 다룬다.라는 의미에 가깝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는 내공은 당연히 현직 웹툰작가(??)인 원작가의 전직(?) 의사 시절이 경험에서 온 것일 테니까. 남이 무언가를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사람이 맡은 일을 매우 잘했다는 뜻이라 했다. 원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그저 웃는 얼굴로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판타지라는 말에 숨은 뜻은 현실에는 이런 일이 없는 것에 수렴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한 번씩은 꼬집어보는 모든 문제들은 고질적으로 의료계에서 한 번씩은 목소리가 높게 나왔던 문제들이기도 하고, 여전히 팽배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중증외상센터가 자금난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는 뉴스를 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니까.
백강혁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사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에게는 백강혁 같은 존재가 더 필요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강혁이 아닌 그가 존재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치면서
개인적으로는 한유림(윤경호)의 캐스팅이 매우 반갑고 감사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입체적인 데다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해 줘서 좋았다. 예전에 도깨비에서 나라를 구한 덕으로(?) 집도 차도 직장도 얻을 수 있었다는 설정이 기억나서 그런 걸까, 그 드라마 뒤로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냥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백강혁의 원맨쇼가 될 뻔했던 드라마에 적당한 추 역할을 해 준 배우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이 글의 TMI]
1. 이번 주 너무 바쁘다.
2. 부모님이 반찬 보내주셔서 포동포동 해지는 중.
3. 빨래하기 싫다.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주지훈 #추영우 #영화리뷰 #최신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Relative contents
-
- 마동석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 계속 롱런할 수 있을까?
첫 장면부터 어마 무시하게 등장하는 외인부대 용병 출신 빌런 백창기(김무열 분). 살인병기 빌런은 절제된 표정으로 대담한 살인을 하며 내재된 광기를 보여준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통쾌한 핵주먹과 툭 던지는 말에 웃음을 터지게 하는 마동석의 등장. 여기에 장동철(이동휘 분)과 장이수(박지환 분)가 가세하여 영화의 재미를 살린다.
<범죄도시 3>의 무술감독이었던 허명행 감독이 넷플릭스 영화 <황야>에 이어 메가폰을 잡았다. 무술감독 출신인 만큼 액션신에서의 연출과 편집이 훌륭하다.
최근 영화계는 고민 없이 가볍게 즐기는 이른바 '팝콘 무비'가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삶이 팍팍해지고 어두운 뉴스가 많은 세상이다. 관객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깊이 생각해야 하는 영화를 거금의 티켓값을 지불하며 보고 싶겠는가. 아무 생각 없이 곳곳에 잔재미를 숨겨 놓아 관객들이 잠시라도 지루해질 틈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고 싶은 게다.
록키와 람보 시리즈에 이어, 다이하드와 스파이더맨, 엑스맨처럼 '시리즈'이기에 팬덤이 있고 극장에 걸리면 반드시 봐야 할 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성룡이나 이소룡, 그리고 <가문의 영광> 시리즈처럼 <범죄도시> 시리즈도 내내 비슷한 플롯이 반복되면 관객들이 질리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다.
시리즈의 태생적 한계는 있다. 그럼에도 같은 느낌인데도 무언가 다른 맛을 주어 관객에게 어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달콤하고 차가운 맛은 동일하나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제작진이 공언한 대로 범죄도시가 8번째 시리즈까지 롱런하려면 꽤 정성 들인 적절한 변주가 필요하리라. 시리즈이므로 익숙한 전개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겠으나, 관객에게 진부함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빌런의 변주가 중요하다. 묵직하고 강하면서도 스피디한 액션을 갖춘 마동석은 상수(常數)이고 빌런은 변수(變數)다. 아이스크림에 비유하면 상수인 우유 아이스크림 보숭이에 바닐라, 녹차, 커피, 블루베리, 망고 등 독특한 맛으로 변주를 주어야 한다.
빌런을 한국인이나 동양인으로 한정하지 말고 냉혹한 백인 빌런을 쓰면 어떨까? 남성이 아니라 길복순처럼 여성 킬러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기승전 마동석 승리로 결말짓기보다는 마동석이 빌런에게 당하고 위기를 맞는 것으로 하여 다음 편으로 넘기는 건 어떨까?
한국 영화계가 낳은 꽤 괜찮은 시리즈가 오랫동안 인기를 구가하며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범죄도시 시리즈에 자극받아 창의적인 한국의 작가들이 더욱 중독성 있는 시리즈물을 세계 극장가에 내놓게 되기를 소망한다.
-
- 잡아먹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
공포영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 귀신, 악령 등 초자연적인 현상에서부터 잔혹한 살인마와 같은 실질적인 공포까지. <에이리언 시리즈>는 호러영화 중에서도 크리쳐물에 속하는 장르지만, <쥐라기 공원>, <죠스>, <피라냐>등과는 다른,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와 절망을 자극한다. 바로 이성과 본능의 선과 악을 뒤집는 내용들과 무자비한 성폭력의 메타포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제노모프'로도 불리는 이 괴생명체는,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인간과 제노모프의 기원을 다루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나오듯 '엔지니어'라고 불리는 창조주들이 만들어 낸 생물이다. 이 제노모프는 알에서 태어나 '페이스허거'로 불리는 상태로 숙주를 찾아 얼굴에 들러붙고 입에 삽입해 제노모프의 유충을 넣는다. 제노모프의 유충은, 숙주의 DNA와 결합해 숙주에 따라 다른 형태의 성체로 자라난다. 인간의 DNA와 결합한 제노모프는 뛰어난 지능과 포악한 본능으로 생물들을 잡아먹는다.
<에이리언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그 특유의 미술은 기괴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화가 H.R. 기거가 만들었다. 제노모프의 디자인도 애초에 그가 그렸던 한 그림에 나오는 괴물을 모티브로 했다. 바이오메카니즘으로도 불리는 기거의 그림들은, 뼈와 기계 관들을 반복적으로 밖으로 드러내면서 반투명한 미끌거리는 질감을 넣어 무척이나 기분 나쁜 느낌을 준다. 특히 제노모프의 머리는 남성 성기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거의 디자인은 후에 다양한 곳에 영향을 주었는데, 만화 <베르세르크>의 사도와 5인의 천사들 디자인이 그 예다.
디자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페이스허거는 강제로 얼굴에 들러붙어 삽입을 해서 유충을 몸속에 넣고, 나중에 체스트버스터가 되어서 가슴에서 튀어나오게 된다. 이 과정은 그저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서 무섭다기 보단 성폭행에 의한 강제임신과 출산을 연상시켜 더 끔찍하게 만든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전부 여성이고, 여성이 침을 질질 흘리는 남성 성기모양의 머리를 가진 폭력의 화신인 괴물과 대항해 싸우는 내용이다. 그 세세한 영화 뒷이야기를 모르더라도 영화 미술이나 디자인, 연출들이 그걸 느끼게 해 주기 때문에, 끔찍함을 넘어서서 불쾌함으로 다가가 영화 자체를 보기 힘들어할 수도 있다.
또한 제노모프는 태어난 본능으로 인간의 뇌를 주식으로 먹는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는 것이다. 본능과 이성의 뒤집힘은 작중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앤디와 같은 합성인간이 이성적이라면 제노모프는 본능적이고, 인간은 그 중간에서 이성과 본능을 다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능은 모두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전혀 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살려는 본능이나, 친구를 살리려는 본능에 이끌려 죽음을 자초한다. 이 와중에 이성만이 극대화된 합성인간들은 합리적인 생각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주인공들이 들어가게 되는 우주정거장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모듈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를 건국한 형제의 이름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도 전쟁의 신 마르스의 강간으로 낳은 자식이다. 또 로물루스 모듈은 모두 제노모프의 근거지가 되어 승무원들이 잡혀가 숙주가 되어있는데, 역사에서도 로물루스는 로마에 여성이 부족하다고 이웃나라의 여자들을 납치했었다. 레무스 모듈이 그나마 웨이랜드 유타니의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모듈이라면, 로물루스의 연구소는 그들의 끝없는 탐욕의 본능을 드러내는 모듈이다. 이 탐욕은 제노모프보다 더욱 끔찍한 것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모든 본능이 나쁜 것이고, 이성은 합리적이며 옳은 것일까? 망가진 합성인간이 인간성을 되찾고, 인간성은 죽음을 무릅쓰고 친구를 구한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 완벽할 순 없다. 제노모프도 통제할 수 있다는'합리적 이성'으로 통제하려는 사람들을 본능으로 끔찍하게 이성의 상징인 뇌를 잡아먹으며 죽이지 않은가.
수많은 시리즈를 낳은 <에이리언>이지만, 이번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그 근본의 메시지에 가장 충실하다. 70년대 사이버펑크가 지닌 우주선의 디자인부터, 남성의 성폭력과 여성이 대항하는 힘, 본능과 이성의 줄다리기. 그리고 <이블데드>를 리메이크하면서 인정받은 페데 알바레즈의 뛰어난 연출력까지. <에이리언 시리즈>가 가진 특징과 재미를 그대로 살려냈고, CG가 아닌 실물이 보여주는 질감과 레트로한 감성은 <에이리언>을 처음 접하는 젊은 관객들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
- 당신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릴 음악의 세계로.
TAR는 주인공의 성인 타르(TAR)이자 쥐(RAT)와 예술(ART)의 애너그램이며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어떤 부분에서 이 알파벳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점을 주목하며 보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다큐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구성은 가상의 인물을 통해 실제인 것처럼 한 사람의 성공과 몰락을 생생하게 담아내어 그 강렬한 의미를 더한다. 주변 인물의 감정이 입체적이지 않아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로지 '리디아 타르'의 심리상태를 영화의 화면에 드러내 밀도 깊은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158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가득 채우는 연기가 강렬하다. 열정을 넘어선 광기를 그린 영화 '타르'는 2월 22일 개봉했다.
상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지휘자 리디아 타르.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터라 강박증과 신경 쇠약을 달고 산다. 그만큼 주변에 끼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가 되어 평생 꿈꿔왔던 과업을 행한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있게 되며 겪게 되는 심리적인 문제는 그녀를 파괴할 만큼 큰 파도를 밀고 들어와 내부와 외부를 장악한다. 마에스트로라는 껍데기 속에 가득 메워진 알맹이의 정체를 밝힐 음악의 시작을 여는 하나의 손짓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차별이 만연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한 타르(TAR)는 편견에서 살아남아 그 자체의 실력을 인정받는다. (ART)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인식보다는 의무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 그녀를 뒤덮는다. (R 전부 바뀌지 않지만 조금씩 바뀌는 세상 속에 안주하며 자아도취적인 폭력성을 주변에 내뿜는다. 욕망으로 점철된 가치관과 신념은 주변을 상처 입힌다. 예술로 포장했던 모순이 자신에게 불어닥치는 순간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러 교향곡 5번의 비극처럼 급격한 상황 변화로 인해 왜곡되는 현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정말 제목처럼 타오르기도 하며 예술적이기도 하며 쥐새끼 같기도 한 인간 군상이 모두 드러난다.
자기도취적인 동시에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폭력성은 시간이 지나며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타르의 현실과 그녀가 비판했던 캔슬컬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여있었다. 얄팍한 정의감을 드러내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지점에 놓인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예술가의 삶과 예술은 나누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부합하는 지점에 도달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관객에게 달렸다.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만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사람으로서가 아닌 음악으로 마주할 때, 느끼는 위대함은 어쩌면 불편한 것 투성이의 것들이다.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는 저마다의 해석이 담겨있다고 해도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 묘하면서도 모순적인 이 딜레마는 영영 이해하지 못할 말들처럼 보이지만 그 한정적인 한계는 인생의 단면에 불가하다. 어떠한 선입견에 갇혀 그 안의 것을 보지 못하면 그 본질 또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모순과 딜레마를 넘어서 그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길로가 밝을지, 어둠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주가 시작된 순간부터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간을 다루고 있는 이들은 '사랑'을 종점으로 4분을 연주한다. 감정에 대한 해석 순환 속에서도 매력을 느끼고 그 지점에 도달하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스며드는 따뜻함은 지휘와 맞물린다. 무엇은 지휘하는가에서 시작하는 음악의 해석은 열정적인 모습을 영혼에 담아낸다. 그렇게 편견을 소거한 음악은 위대함 그 자체이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음악의 광기는 자신에 의해 파괴되지만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음악 자체의 위대함으로 표현한다. 감정, 음악, 그 이상의 것들은 타오르는 열정만큼이나 타르에게 전부다. 설령 단조로운 음표라 할지라도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연주하듯 펼쳐지는 영화는 이름처럼 악보 속에 남아 타올라 꺼진다. 설령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음악만큼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그녀의 곁을 지킨다. 새로운 시작이라 일컫는 우주선도 몰락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차별이 만연한 클래식 음악계의 벽을 허문 최초의 여성 지휘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소식에 상당한 기대를 안고 영화를 보았다. 얼마나 진취적이고 단단한 사람의 이야기일까?라는 생각으로 봤지만 그 상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소시오패스 범죄자의 몰락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어려움 속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얻은 만큼 불합리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휘가라는 일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성취이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처럼 은연중에 기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 다뤄왔던 '연대', '희망'과 같은 일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흐를 때, 권력형 성범죄는 성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영화 포스터 자체도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표현을 통해 편견을 소거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편견'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
- 화자와 메시지의 충돌이 낳은 난맥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하정우). 하지만 그에게 금메달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시상대에서 화분으로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려야 했으니. 이후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
1947년 서울, 광복 후에도 술로 일상을 버티던 손기정. 어느 날, 그는 냉면집 배달부 '서윤복'(임시완)을 만난다. 그에게서 마라토너의 재능을 발견한 손기정은 윤복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광북 이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간 국제대회에서 일본에게 귀속된 한국인의 기록을 되찾기 위해. 정부도 없고,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손기정은 옛 동료이자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배성우)과 함께 서윤복을 마라토너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한다.
전적으로 실화에 의지하다
“1947년은 혼란스럽고 희망이 부족했던 시기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루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통해 힘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 강제규 감독의 포부다. 단언컨대, <1947 보스톤>은 목적을 이뤘다. 서윤복이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자긍심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이라는 역경 속에서 세 주인공이 쟁취한 승리의 감동 역시 뜨겁다.
하지만 공허하다. 눈시울이 순간적으로 뜨겁지만, 눈물이 나오기 전에 식는다. 이유는 여럿이다. 일단 역사가 스포일러다. 서윤복 선수가 1등을 차지한다는 결말을 미리 알고 있어서 감흥이 덜하다. 예상을 벗어나는 내용도 없다. <1947 보스톤>은 제목에 충실하다.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새 국가대표 서윤복이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우여곡절을 정석대로 담았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1947 보스톤>은 영화가 아닌 실화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실화가 선사하는 감동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단점, 영화와 실제 사이 간의 모순이 눈에 띄자마자 실화에 의지하는 감흥은 뜨거워질 때만큼이나 빨리 식는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내용이나 결말이 실제 사건을 그대로인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1947 보스톤>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라 엄연히 극영화라는 점이다. 극영화는 한정된 시간 내에 여러 사건을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고 캐릭터가 스크린 위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 설령 실화 사건을 차용했다 하더라도.
하지만 <1947 보스톤>은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 나머지 실화에 힘을 더하지 못한다. 감독은 턱없이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팀을 꾸린다. 선수는 불행한 개인사와 꿈 사이에서 헤맨다. 팀은 갈등에 휩싸이고, 첫 경기 성적은 엉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기적을 써 내려간다. 이처럼 익숙한 에피소드를 기계적으로 나열한다. 결국 영화는 사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물의 변화, 감정선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짜임새 때문에 실화의 감동이 약해진다. 서윤복이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는 보스톤 언덕길에서 어머니와 고갯길을 같이 넘던 추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그런데 이 대목은 기대만큼 감동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그와 어머니의 관계가 피상적인 효자와 현모양처로 묘사되다 보니, 해당 장면이 어떤 의도로 삽입됐는지가 노골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화자 따로 메시지 따로
물론 클리셰에 충실해도 관객이 기대하는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도 많다. 하지만 <1947 보스톤>은 아니다. 영화의 만듦새가 헐거워진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와 화자의 부조화가 바로 그 원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기정과 서윤복이라는 두 톱니바퀴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1947 보스톤>은 개인의 아픔을 민족과 국가의 좌절로 확장하고, 이를 극복해 카타르시스를 주려한다. 영화는 세 주인공의 아픔을 부각한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망국의 설움을 지녔다. 서윤복은 약소국의 설움이 있다. 두 선배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듯이, 그도 태극기 대신 성조기를 달아야 한다.
영화는 이들의 아픔은 하나로 연결한다. 그 중심에는 손기정이 있다. 남의 나라를 국기를 달고 뛰는 설움. 독립했는데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고군분투. 레이스를 통한 치유까지. 손기정이 서윤복을 제2의 손기정으로 길러내는 여정에는 개인과 민족의 아픔을 씻어내는 기승전결이 함께 깃들어 있다.
그런데 카메라는 정작 서윤복에게 초점을 맞춘다. 냉면 배달 중 미군과 부딪히는 장면, '옥림'(박은비)과의 얕은 로맨스처럼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내용까지 세심히 다룬다. 그러니 영화는 조화롭지 않다. 화자와 메시지가 따로 놀면서 필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실패한다. 손기정의 서사는 불충분하고, 서윤복의 서사는 늘어지면서 양쪽 모두 깊이가 부족해진다.
예를 들어 보스톤 대회는 서윤복만의 경기가 아니다. 손기정이 오래된 한을 떨쳐내는 레이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때도 영화의 초점은 서윤복에게 쏠려 있다. 그러니 손기정의 서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레이스 중간에 손기정이 자주 등장하면서 흐름이 끊기는 인상도 준다. 결국 마라톤 장면은 클라이맥스라기에는 담백하고 힘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유독 배우의 단점이 잘 보이는 이유
그러다 보니 배우들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다. 배우 개개인의 역량이 아쉬운 지점도 있으나, 캐릭터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지니 그들만의 잘못도 아니다. 일례로 하정우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도 보인다. <수리남>, <비공식작전> 등에서 본 대사와 연기 톤을 반복한다. 이 지점에서 극본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예스러운 말투의 대본이 배우의 현대적인 톤과 어긋난다.
하지만 기자회견 시퀀스를 보면 배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손기정은 기자들 앞에서 오랜 울분을 터뜨린다. 그저 한국인으로서 달리게 해 달라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며 개인과 민족의 한을 토로한다. 그런데 가장 극적이어야 할 손기정의 항변은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배우의 톤이 아무리 익숙하고, 이질적이라 해도 그전까지 캐릭터의 서사를 제대로 구축했다면 불가능할 일이다.
배성우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극 중 남승룡이라는 인물은 큰 임팩트가 없다. 영화가 그의 입체적인 면모를 살리는 데 실패했기 때문. 어떻게 보면 남승룡은 손기정보다도 한이 더 깊다. 손기정과 달리 금메달을 따지도 못했고, 시상식에서 일장기를 가리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기 아픔을 넉살 좋게 애써 감춘다. 이런 인물을 영화는 평범한 감초 조연으로 소모한다. 개인사와 무관하게 배우의 연기력을 지적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나마 임시완의 경우 배우의 노력이 엿보이기는 한다. 마라톤이 취미가 됐다고 말할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게 그의 달음박질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비중에 비해 역할이 조연에 가깝고, 캐릭터 자체도 평면적이다 보니 그 노력은 미처 다 보이지 않는다.
실화에 잘못 기대다
이에 더해 <1947 보스톤>은 많은 사극과 시대극이 그렇듯이, 실화의 힘을 잘못 활용한다. 영화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국을 빌런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영화 내용과 실제 사건이 충돌하며, 그 결과 영화의 감동도 덜해진다. 실제 사건을 왜곡하고 있으니 영화 말미에 나오는 자료 영상과 사진의 의미가 퇴색되고, 영화의 진실성도 약해진다.
실제로 영화 전반에 걸쳐 미국은 점령국에 가깝다. 미군병사는 무전취식에 항의하는 서윤복을 권총으로 위협한. 미군정은 보증금과 신원 보증을 이유로 마라토너 삼인방의 보스톤행을 방해한다. 대회 측도 서윤복과 남승룡에게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달아야 한다고 고집한다. 심지어 미국의 마라톤 중계 아나운서는 한국선수들의 실력을 조롱한다.
실상은 달랐다. 서윤복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정 하지 장군을 비롯한 미국인이 보증금을 구해주며 대회 출전을 도왔다. 보스톤 마라톤 협회도 두 선수에게 태극기와 미군정청 문장이 병기되어 있는 유니폼을 지급했다.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려야 했던 일이 서윤복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서윤복과 손기정의 서사를 연결해 메시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처럼 보인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미군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연결해 애국심을 자극하는 드라마를 만들려는 의도다. 하지만 실화의 힘에 기대면서 정작 실화를 왜곡하고 있으니 자연히 모순과 오해가 발생한다. 아쉬움도 크다. 미국을 악역으로 만드는 대신 한국을 알리려는 일념이나 개인의 성취에 집중하는 선택지도 있었으므로.
마지막으로 디테일도 올드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양변기를 몰라 당황하는 개그 장면, 조선을 무시하지 말라며 외국인에게 일갈하는 장면, 전 국민적인 응원에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장면... 감동과 눈물을 짜내는데 최적화된 클리셰가 종합선물세트로 펼쳐진다. 한국영화에서 자주 목격한 익숙한 이 조합 역시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종합하면 <1947 보스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마인드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실화의 힘을 빌려 애국심을 고취하고, 눈물을 짜내고, 감동을 주면 성공이라는 식으로 직진한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완성도, 서사의 짜임새, 실화 고증 같은 요소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고 만다. 그 결과 2023년도 극장에 어울리지 않는 올드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Poor 형편없음
실화를 이용하는 데 그친 클리셰 범벅
-
- 더 이상 가족끼리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적과의 동침'은 친밀한 관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에 대해 다룬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바로 생각난 드라마가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드라마화한 '빅 리틀 라이즈'였다. 우선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로라의 남편인 마틴은 결혼 전 로라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나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로라를 때리고 협박하며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에서도 이와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전직 변호사였던 셀레스트는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을 돌보며 동시에 남편을 보살피는데 조금이라도 남편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 마찰 등을 겪으면 남편은 폭력을 행사하고 셀레스트는 으레 그렇다는 듯 그 폭력을 견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정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단순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며 피해자가 발생한다. 법적인 제도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범죄가 존재하고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그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는 법의 허점과 법에 명시된 사항들이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가정폭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배우자 폭행, 아동방임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법률적으로 명시된 정의가 아니다.
가정폭력은 범죄로 인정되긴 하지만 그 처벌법에 의하면 가정보호법으로 처리되어 크게 형사처리사건과 가정보호사건으로 구분된다. 형사사건의 경우 피해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사건을 진행하지만 가정폭력으로는 경미하다고 판단되어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가 되는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사건으로 진행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가 성립된다. 이 경우 피해자가 고소 의사를 밝히고 사건이 기소된 후 유죄판결을 받은 뒤에야 가해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는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으며 피해자는 언제든 다시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피해자가 더 불리한 입장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느껴야 할 주거공간이 공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외국의 가정폭력의 경우 문제를 일으킨 폭력의 가해자가 퇴거명령을 받고 법원에서 개입 후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가해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기본 원칙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피해자가 집을 떠나 쉼터로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난다. 이는 근본적으로 현 사회가 가정폭력을 '폭력'보다는 '가정'에 방점을 찍어 가정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둔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1997년 제정되어 그 이후 5번 정도 개정되었는데 20년이 넘는 법의 역사 속에 아직도 숱한 피해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
-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
- 공포영화 제 8일의 밤, 실망스러운 오컬트 영화
넷플릭스에 한국 공포영화 제8일의 밤이 공개되었어요.
예고편에서 오컬트 분위기를 한껏 뽐냈기 때문에 꽤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았을텐데요.
영화는 생각보다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을 가지고와서 번뇌와 번민을 요괴화 하여 전개되는 이야기인데요.
생각보다 오컬트의 분위기도 약하고 그렇게 무섭지도 않아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성민 배우가 열연하고 있지만 나머지 캐릭터들이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네요.
보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
-
-
- 영화 <글래디에이터 2> 2차 예고편
권력, 음모 그리고 복수 위태로운 로마의 운명이 걸린 결투가 시작된다
-
- 영화 <우리가 끝이야>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주목한 용기 있는 선택 로튼토마토 팝콘지수 92%🍅 북미 박스오피스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