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5-01-25 08:49:14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쏘았다> 리뷰
음악과 역사, 진실을 엮은 애니메이션 다큐 영화
씨네랩의 시사회 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감상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브라질의 천재 피아니스트 테노리오 주니오르의 실종과 비극적 죽음을 중심으로 그려진 다큐 작품이다. 테노리오의 음악적 유산과 남미 우익 독재시대에 음악과 예술인, 그리고 역사가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영화는 섬세하게 전개해 보여준다.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수많은 쿠데타와 계엄령, 그로 인한 인권의 억압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중남미의 우익 군부독재정권과 협력하여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삼으며 ‘콘도르 작전’을 벌였다.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다. 체포된 사람의 대부분을 군부대의 조사실에서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남미의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자유로운 예술과 표현은 억압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실종되거나 살해당했다.
영화는 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브라질의 천재 피아니스트 테노리오 주니오르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며, 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역사의 희생물이 되었는지 드러낸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우익 군부독재정권 치하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인권과 개인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침해되고 탄압받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한 예술가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실종과 죽음을 그리면서 무참하게 짓밟힌 예술혼을 조명하며, 민주주의 체제와 독재와 계엄 체제의 상반된 가치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선으로 테노리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감성적이고 시각적인 몰입감을 제공하여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기록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전개는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로서의 무게감을 더한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실제 영상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며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AI가 결합되면 과거에는 재현하기 어려웠던 사건과 인물들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을 터이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만들어낼 새로운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이 영화는 음악, 예술, 그리고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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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도 자비도 없는 범죄 액션 느와르
황정민과 이정재가 신세계 이후의 7년 만에 재회가 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강렬한 느와르 액션과 두 남자의 처절한 싸움 속에각자 서로의 싸움이 이해가 되는 영화.
영화 관상의 강렬한 등장 이정재가 있었다면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는 박정민이 있다!
기본 정보
장르 : 범죄, 액션, 스릴러, 느와르, 하드보일드, 피카레스크
감독 / 각본 : 홍원찬
출연진 :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개봉일 : 2020년 8월 5일
평점 : 8.54
스트리밍 : 티빙, 넷플, 웨이브, 쿠팡, 왓챠
기획 의도
태국에서 충격적인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을 끝낸 암살자 인남(황정민)은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인남은 곧바로 태국으로 향하고, 조력자 유이(박정민)를 만나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형제가 인남에게 암살당한 것을 갈게 된 레이(이정재).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 레이는 인남을 추격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하는데...
처절한 암살자 VS 무자비한 추격자
멈출 수 없는 두 남자의 지독한 추격이 시작된다!
여담
스토리상으로 납치 -> 추격이라는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테이큰, 아저씨, 레옹 등 다수의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스토리는 뻔하지만 카메라 워크 기술만큼 뛰어나 직접 액션에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촬영기법으로 몰입감을 상승시켰다.
영화 포스터 속에 황정민과 이정재 단독 주연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박정민을 일부러 숨겼구나 라는걸 캐치할 수 있다.(강렬한 등장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연기력)
후기 및 결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결말을 살펴보자면
인남은 자신의 딸을 구해냄과 동시에 유이에게 맡기며 레이와 최후의 결투를 시작한다. 레이와 인남은 혈투 중 치명상을 입게 되자 수류탄을 뽑고 둘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인남이 사전에 준비한 주택으로 유이와 인남의 딸이 향하며 이 둘의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역시 믿고 보는 배우 이정재와 황정민의 두 사람의 연기력은 입이 아플 정도로 좋았고, 아역인 박소이의 연기력과 더불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박정민이 다한 영화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한줄평 : 박정민의 연기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보게 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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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등 (2015)
영화 <4등>의 중심 인물은 모두가 피해자다. 이미 첫 아시안 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의 유망주로 떠오르는 젊은 수영 천재 ‘광수’,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매번 4등만 하는 ‘준호’, 기자이자 준호의 아버지인 ‘영훈’, 악착같은 준호의 어머니인 ‘정애’. 간략한 소개로만 보아선 이들이 무슨 피해자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들이 어딘지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의 원인을 좀처럼 찾을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을 행세하는 힘의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중력장의 실체는 영화속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1-1. 광수
가장 먼저, 광수의 경우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태릉으로 출발하는 날 그의 오래된 고향의 폐건물에 들러서 광수는 불법 도박을 하고 있는 고향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폐건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광수의 뒤에 떨어진 말. “내일 가도 되잖아, 너 천재잖아”라는 그 말이 광수를 다시 도박판으로 불러들인다. 서울로 떠나려던 광수는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뒤돌아서더니, 다음 컷에는 어느덧 광수가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컷으로 이어진다. 광수는 이 지점에서 어촌 마을의 도박에 빠진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셈이다.
광수는 몇날며칠을 도박에 빠져 태릉선수촌에 늦게 들어가게 되고, 뒤늦게 들어간 광수를 본 선수촌 코치는 대걸레 자루로 광수에게 체벌을 가한다. 대걸레 자루로 백 대. 그 체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광수의 몸은 분명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광수는 저항하고, 저항은 코치의 심기를 건드린다. 곧 체벌은 감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광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떠난다.
1-2. 어머니 정애
정애는 아들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준호는 매번 4등만 하고, 정애는 준호의 성적이 아쉽기만 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고자 한다. 준호에게 일부러 밉살스럽게 ‘4등’이라고 부르는 모습, 준호에게 대놓고 “엄마가 싫지? 그러면 수영할 때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해 봐”라는 식의 말들을 하며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정애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첫째로 아들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애가 열정을 부을만한 것이란 이제 아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사회 수많은 어머니의 초상을 담은 것이 영화 <4등> 속에서 그려진 정애의 모습이다. 특히나, 그 자식에게 거는 간절함의 깊이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가 낮을수록 짙어진다. 출산과 육아후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의 삶만을 좇는 정애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없다. 그녀가 사회속에서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밖에 없다. 이는 한국사회의 구조, ‘여성’에게 부과되는 독박육아와 강력한 사회적 단절의 탓이다. 이런 구조 탓에 어머니 정애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다그친다. (자신처럼)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으면,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3. 아버지 영훈
아버지는 수영 천재이자 유망주인 광수를 만나고 이 유망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친해진다. 영훈은 광수의 성적을 묻고 광수가 높은 기록을 세웠다는 대답을 듣고는 광수에게 기대를 걸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광수에게 호의적이다. 기자인 그가 수영 유망주와 친해지고자하는 목적은 어느정도 알 법하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인간관계는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알 법하다.
광수가 태릉을 박차고 전화를 건 것은 ‘영훈’의 번호였다. 광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걸레 자루로 100대를 맞으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있어서 늦게 간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1 주일 늦었습니다. 그리고 광수의 절박한 전화를 받은 영훈의 대답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였다. 그리고 이런 영훈은 후에 자신의 아들 준호가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에게 체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광수를 찾아가 그에게 아이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를 통해서 영훈은 분명하게 체벌에는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훈은 광수의 전화를 외면하는데, 이 행동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란 영화를 통해서 다 알 수 없기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이유를 제시해보자면, 영훈이 광수를 두둔한다고 하여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신의 업으로 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영훈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비주류의 물결에 몸을 떠맡기라는 선택은 어렵다. 영훈에게는 일단 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전적으로 영훈에게만 짊어져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영훈은 다소간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그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탓이라고 하겠다. 여성에게는 독박육아가, 남성에게는 생계유지의 의무가. 한쪽 성별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의무들이 그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고, 망쳐놓는다.
1-4. 준호
“형. 1 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4등 준호는 1등을 해낸 초등 수영부 선수에게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묻는다. 이런 준호는 광수의 과거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고, 엄마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호탓에 애가 타서 새로운 코치 광수에게 준호의 지도를 맡긴다. 그리고 광수는 준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광수는 재능있는 준호를 키우고자 체벌로 엄하게 가르치며, 어린 준호는 당연히 맞는 게 싫다. 하지만, 준호는 가정으로 돌아와 어느순간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체벌을 그대로 재현하며 동생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광수처럼.
역설적으로도 준호는 새로운 코치인 광수에게 ‘엄하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적은 점차 좋아진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대로 준호는 점차 코치의 체벌이 두려워 수영에서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점차 잃게되고, 급기야 광수의 체벌 탓에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수영장을 떠난다.
2. 기성 사회의 구조와 구조속의 피해자들.
이 네 명의 중심인물을 정리하다보면, 영화가 그려낸 그들의 삶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한 긴장의 장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광수는 태릉으로 떠아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에 남고, 모욕적이고 감정적인 체벌이 싫어 태릉을 떠났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며, 정애는 자신이 악역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행을 중단하지 않고, 영훈은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준호는 마찬가지로 체벌이 싫었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고 권위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도덕적 딜레마들은 모두 어떤 원인에서 부터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그 원인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화속의 모든 문제는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어촌마을의 기성세대인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도박판에 어쩔수 없이 빠져드는 광수, 그리고 잘못은 체벌을 통해 몸속에 교훈을 새겨야 한다는 기성의 교육 방식, 양심적인 비주류에 휘말리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사회속에서 생계를 위해 뻔뻔해져야 했던 영훈, 이 사회속에서 이젠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식들은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애.
영화 <4 등>속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잘못된 기성의 구조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잘못된 구조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미와 신념을 잃고, 사회 주류의 신념과 구조를 따르는 이들의 삶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낮을 수록 구조의 요구와 강요에 더욱 순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이 기성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대적 상처이며, 일반적인 역사적 기류에 의한 것이지 특정한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기성의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아닌 기성의 사회 구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무엇을 고쳐나가야 할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3.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들
영화 <4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현재까지 앓고 있는 상처를 재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와 영화속 불합리한 상황들을 동일시 여겨볼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4 등>속 인물들은 구조에 의해서 요구된 악역을 어느정도 떠맡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상처를 지닌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적인 비인간성을 영화속에서 목격하며, 이 영화가 마냥 통렬한 사회비판의 영화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비판만을 담은 영화였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영화 <4등은> 사회구조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만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한 줄기의 희망을 예술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4 등>은 조금 높게 평가하고 싶은 영화다.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은 개별체의 순수한 특성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의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인간이 가진 개별성은 인간 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때로 ‘구조’는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지위와 책무를 떠맡기거나 강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한 특성, 개별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강요와 구조가 정의한 개체성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개체성을 추구할 때 아름답게 빛난다. 영화 <4등>에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체벌이 두려워 수영장을 떠난 준호가 다시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늦은 새벽에 수영장을 찾아와 홀로 어둡과 차가운 물속에서 빛을 따라 헤엄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씬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어둑한 새벽, 어둑한 물속에서 감감히 출렁이는 빛의 주변을 헤엄치는, 절대적인 어둠속 희미한 빛의 주위로 떠도는 여리고 어린 피사체의 모습이 씬에 아름답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래 밝기만 해서는 그 밝음의 정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지라, 어둠속에서의 그 희미한 빛을 향해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그 어떤 희망적인 언어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읽힌다. 비록 그 빛이 준호를 수영장에서 꺼내올리는 빛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그 결과로만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4 등>은 이렇게 구조속에서 피해받는 이들의 고통과 초상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구조 내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지닌 순수함의 미학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희미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강렬한 희망의 메세지를 유려하게 그려내어, 작금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판의 메세지와 함께 영화의 미학적인 추구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는 꽤나 괜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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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단하되 느린 '용들의 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후 마침내 내전 '용들의 춤'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라에니라 타르가르옌'(에마 다시). 하지만 그녀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남편 '다에몬'(맷 스미스)의 독단으로 인해 칠왕국의 비난이 그녀에게 쏠려 버린 것. 심지어 흑색파 가신들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통치력과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라에니라는 점점 곤경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전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타르가르옌 가문의 큰 어른인 '라에니스 타르가르옌'(이브 베스트)이 녹색파 최강의 드래곤 바가르와 그 기수 '아에몬드 타르가르옌'(이완 미첼)에게 공격당해 사망한 것. 이에 라에니라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타르가르옌 가문의 모든 서자를 불러 모은다. 주인이 없는 드래곤에게 새 주인을 찾아주고, 단기간에 전력을 강화해 전세를 뒤바꾸기 위해서.
저조한 흥행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기획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1의 흥행은 놀라웠다. 첫 회부터 10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기록했고, 평균 시청률도 회당 약 1,000만 명 이상을 유지했다. 시청률만 높은 것도 아니었다. 제8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도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2년 만에 돌아온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두 번째 시즌은 실망스럽다. 당장 수치가 시즌 1에 못 미친다. 시즌 2의 첫 회는 약 78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시즌 1 첫 방영 당시의 시청자 수보다 약 22% 감소한 수치다. 평균 시청률도 낮아졌다. 시즌 1의 마지막 화 시청률은 930만 명에 달했는데,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는 890만 명에 그쳤다.
재미와 완성도도 시즌 1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 시즌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기획의 한계가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번 시즌은 기존 인물들의 갈등을 일단락하고,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다가올 내전, '용들의 춤'을 위해 판을 까는 데 집중했다. 그 대가는 컸다. 캐릭터가 많다 보니 응집력이 약해졌고, 기승전결도 명확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시즌 1이 키운 기대감을 미처 이어가지 못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물론 <하오스 오브 드래곤> 제작진의 선택도 일견 이해는 된다. <왕좌의 게임> 본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이었기 때문. <왕좌의 게임>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혹평받았다. 캐릭터의 붕괴가 핵심 원인이었다. 외견상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이나, 그 본질은 정치극 혹은 군상극에 가까웠다. 즉, 수많은 캐릭터가 자기 목표를 위해 이합집산하며 펼쳐지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재미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 후반부는 스케일을 키우다가 각 캐릭터의 매력을 놓쳤다. 칠왕국의 내전, 밤의 왕과의 전쟁에만 초점을 맞출 뿐 각 캐릭터의 행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 시즌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붕괴됐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는 불과 한 회만에 타락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했고, 예언 속 영웅인 '약속된 왕자'로 꾸준히 암시된 '존 스노우'(킷 해링턴)도 본인 역할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본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애쓴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각 인물의 서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다. 그 중심에는 흑색파의 리더인 라에니라와 녹색파의 기둥인 '알리센트'(올리비아 쿡)가 있다. 시즌 1에서 그들은 모성애라는 같은 이유 때문에 충돌했지만, 시즌 2에서는 같은 문제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로 남거나, 여왕으로 거듭나거나
자기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왕좌를 노렸지만, 전쟁만은 피하려던 알리센트와 라에니라. 내전이 시작된 후에도 두 여성은 비슷한 곤경에 처한다. 전례가 없는 여성 정치인의 통치에 자꾸 분란이 생기니까. 알리센트는 왕대비로서 정국을 주도하려다가 오히려 두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라에니라도 휘하 영주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전쟁에 나선 적도, 칼을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여왕의 지시에 그들이 끊임없이 반기를 들기 때문.
그러나 난관을 뚫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알리센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어머니다. 그래서 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다. 권력을 빼앗기고, 녹색파 내부의 갈등이 커져도 알리센트는 모성애와 가족애에 호소한다. 일례로 장남이자 왕인 '아에곤 2세'(톰 글린카니)와 차남이자 섭정인 아에몬드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 그녀는 정치적 거래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로서 두 아들의 싸움을 말리려 한다.
반면에 라에니라는 점차 여왕으로 거듭난다. 자기 권위와 권력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장녀라는 점에서 비롯함을 돌파구로 삼는다. 특히 타르가르옌 가문이 드래곤 혈통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가문의 서자들, '드래곤의 씨'를 적극 활용한다. 장남 '자캐리스'(해리 콜렛)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드래곤을 길들인 이들을 선별해 전력을 강화한다. 또 자신이 타르가르옌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도구로도 이용한다.
이 차이점은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성들이 현실의 역경에 맞서는 여러 방법과 겹쳐 보인다. 라에니라는 조금 더 현대적이고, 알리센트는 비교적 전통적인 여성이니까. 작품 내적으로는 그들의 선택을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어서 더욱 흥미롭다. 원작에서 두 여성은 자기 가치관과 반대되는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 라에니라는 승전하고도 여왕이 되지 못하고, 알리센트는 모든 자식을 잃을 운명이니까.
확실한 교통정리
두 여성이 정해진 비극으로 나아갈 것이 정해졌듯이,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도 전면전을 앞두고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일례로 녹색파의 이합집산이 본격화된다. 특히 아에곤 2세와 아에몬드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섭정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아에몬드는 형을 죽여서라도 왕좌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한 아에곤은 수도인 킹스랜딩을 떠날 준비를 하며 다음 시즌에서 녹색파가 처할 위기를 암시한다.
독보적인 사고뭉치인 다에몬의 서사도 마침내 정리가 된다. 그는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형이자 왕인 '비세리스 1세'의(패디 콘시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시즌 2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왕이자 아내인 라에니라의 장악력이 흔들리자 왕이 되겠다는 야욕을 곧바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욕망덩어리인 그가 어떻게 욕심을 버리고, 라에니라를 여왕으로 인정했는지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인다.
특히 이 부분은 본편과의 연결고리라서 더욱 눈에 띈다. 다에몬은 여러 환상과 암시를 본다. 본인은 물론 '용들의 춤'에 관여된 모두가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서사시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라에니라가 왕좌에 올라야 이 서사시가 비로소 이어질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는 <왕좌의 게임>이 '티리온'(피터 딘클리지)의 입을 빌려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야기의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 또한 인상적이다. 시즌 1이 궁중 암투였다면, 시즌 2는 그 암투가 평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같이 탐구한다. 그 중심에는 드래곤의 씨 세 명, '휴 해머'(키에론 존 뷰), '울프 화이트'(톰 베넷), '아담 벨라리온'(클린턴 리버티)이 있다. 그들은 전쟁 준비와 식량난 때문에 고통받느니 죽을 각오로 드래곤을 길들이는 데 도전한다. 이는 단순한 권력 투쟁처럼 보이던 '용들의 춤'에 현실감을 더한다.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아
문제는 캐릭터가 너무 많은 나머지 구심점이 약하다는 것. 전개 속도를 고의적으로 늦추면서 캐릭터를 깊이 개발하고 긴장감을 구축했지만, 녹색파와 흑색파 모두 사분오열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난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음 시즌을 앞두고 가지치기는 확실히 했는데, 애초에 가지가 너무 많다 보니 나무가 좀처럼 깔끔해지지 않은 셈이다.
무엇보다도 방점을 찍어줄 클라이맥스의 부재가 아쉽다. 물론 중간중간 등장한 드래곤들의 전투는 분명 놀라운 스펙터클이다. 본편에서는 드래곤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학살하는 묘사가 대다수였고, 드래곤끼리 싸우는 장면은 마지막 시즌 한 에피소드에서만 잠시 등장했다. 그에 반해 이번 시즌은 거대한 드래곤 세 마리가 뒤엉키면서 싸우는, 그 자체로 전율이 이는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전투가 중반부에만 등장하다 보니 시즌을 끝맺었다는 느낌은 덜하다. 여러 캐릭터의 서사가 전쟁이라는 종착점으로 모였음을 시각적으로 각인시켜 주는 장면이 부족한 것. <왕좌의 게임>이 매 시즌 후반부마다 결정적인 전투 시퀀스를 배치해 시즌을 명확히 끝맺은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차라리 마지막 화에 전투씬을 짧게라도 보여주면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게 어땠을까 싶다.
어쩌면 드라마 기획의 근본적인 한계와 과욕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원작 소설의 형식이 한계로 작용한 듯하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근본적으로 더하기의 미덕이 빛나야 하는 작품이다. 원작 자체가 역사서 형태로 쓰였기 때문에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이야기를 삽입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각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려다가 군살이 다소 과하게 붙은 인상이다.
종합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단단하고 풍성한 이야기로 무장한 기초 공사, 시즌 3의 전초전에 그친다.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시즌 1로 인해 높아진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못한 속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향후 두 시즌의 만듦새에 따라 더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어벤져스>를 위해 완성도를 희생한 <아이언맨 2>와 유사한 위치인 셈이다.
Acceptable 무난함
드래곤보다는 사람에게 주목한 '용들의 춤' 기초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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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시시각각 달라지는 삶에도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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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및 출연진
감독 호나카 료스케
배우 우츠미 세코, 사이가 마사카즈, 치쿠니 메구미
시놉시스
렌탈 파파 사업에 종사하는 나카무라는 다양한 의뢰인들의 임대 아버지로 활동하며 나름의 위안을 얻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대생 리카를 만나게 되고 드로잉 모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림의 주제는 아버지의 얼굴이다.
리뷰
어떤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로 밀려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
당연한 것들이 녹아있는 만큼 무엇이 중요한지 파악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들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무언가를 규정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렌탈파파>는 사회가 규정하는 시선에서 좀 더 나아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어떤 세계에 대해서 세밀하게 묘사하는 영화이다.
미래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영화에는 감독님의 ‘의도적인 설정’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특히 원제에는 ’틈‘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만큼, 영화의 틈새를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주인공들의 감정변화가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갈구하는 여자주인공, 딸의 빈자리를 갈구하는 남자 주인공이 맞닿아있다.
또한, 장면의 구간마다 달라지는 표정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이는데, 허탈감과 분노 이상의 서글픔까지 느낄 수 있었다.
결국에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것을 쫓게 되는 그 마음과 감정이 왠지 모르게 공허하게 느껴진다.
가해자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와 아빠를 빌리는 것이 극 중 소재인 렌탈파파는 이야기할 거리가 굉장히 많다.
그만큼 영화에 많이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서 더욱 흥미롭다.
우선, 가해자의 자녀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영화에서 어쩌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가해자의 자녀들에게 당연시되는 폭력이 불편해졌다.
가족이니 감수해야 한다 라는 생각은 가해하지 않은 이에게 가해하는 일은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만든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나고 결국에는 또 다른 좋지 않은 결말을 낳게 되지 않을까 라는 안타까움이 생겼다.
두 번째로는 아빠를 빌리는 설정이었다. 무언가를 빌린다는 렌탈은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처음의 거부감에 비해 만족감은 그 이상을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는 이상적이지만 비관적인 설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지만 현실과 멀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공허함이 짙게 느껴진다.
가상의 것을 좇게 되는 이 사람들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루는 ‘렌탈’이라는 소재를 통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우선 렌탈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통해 소유할 수 없는 무언가를 채우려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서비스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으면서 보다 더 간편하게 욕망을 충족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모든 감정은 자신이 감수해야했기 때문이다.
편안함과 동시에 커지는 공허함에 대해 집중해본 적이 있다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서비스가 아닐까.
영화제 기간
2024.05.01 - 2024.05.10
렌탈파파 상영기간
2024.05.03 17:00
2024.05.04 13:30
2024.05.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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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울란바토르에도 개는 짖는다.
포스터
감독: 퓨레브-오기어 카비주
출연진: 테르겔볼드 에르겐(제役), 노민-에르덴 아리운뱜바(마랄라役)
시놉시스: 동네에서 이름난 무당인 17세 몽골 소년 '제', 부모님이 시키는대로, 이웃이 바라는대로 군말 없이 살아오던 그가 매력적인 소녀 '마랄라'를 만남으로써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무당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만 가는 울란바토르의 청년들의 사정과 사유, 고민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살다 보면 아주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의 아마존이라든가, 저 멀리 몽골 초원의 이야기라든가. 그곳의 삶은 무언가 아주 각별하고 이질적일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러나 막상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곳의 특별함 외에도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사유자는 그 세계와 얼마쯤 연결된다.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환상에만 머무르던 '그곳'을 현실로 끌어온다.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확장된다. 아주 보물 같은 순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을 가져다 주는 다양한 매개 중 하나는 단연코 영화일 것이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쉽게 말해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알고 싶어서 이 영화를 택했다는 소리다. 필자는 한국어 교사 일을 하면서 다양한 외국인 학생들을 만난다. 특히 최근에는 몽골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문제는 내가 몽골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국어 교사로서는 아주 부끄럽고 민망한 사실이지만, 내가 몽골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징기스칸과 게르(몽골식 천막 집), 말, 초원 따위의 단편적인 유목민의 이미지 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만나 본 몽골 학생들로 말미암아 몽골 사람들이 아주 유쾌하고 예의 바르며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바람의 도시>를 보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17세 무당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몽골의 과거와 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몽골, 울란바토르를 사는 '제'의 이야기를 좀 소개해 볼까 한다. 몽골 인구의 절반이 살고, 아파트와 게르가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와, 그 속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소년의 이야기를.
1. 사랑은 말 잘 듣던 무당도 변하게 한다
무당 일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17세 소년인 '제'. 마을의 영적 안내자이자 상담자 역할을 도맡아 하는 그는 소위 '말 잘 듣는 모범생'이다. 숫기 없고 소심해서 말수도 적은 그는 가족과 이웃의 애정과 기대에 부응하려고만 했지, 자신의 의견이나 욕망을 적극적으로 내비친 적이 없다. 무당이라는 직업도 있겠다, 어른들이 예뻐하기도 하겠다, 이대로 잘 졸업하기만 하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고, 아이는 자라는 법. 어느날 홀연히 등장한 소녀, '마랄라'로 말미암아 소년의 세계에는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병약하지만 당돌한 소녀 마랄라는 삽시간에 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순박한 소년은 곧잘 잔망스러운 소녀에게 빠지는 법이니까 그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심장병으로 오래 고생한 마랄라는 제를 반항적인 일탈의 세계로 이끈다. 마랄라와 어울리며 제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인다. 백화점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여자애와 밤을 보내는가 하면, 미성년자면서 클럽에 나가 춤을 추거나 그렇게나 착실히 따르던 부모님의 말에 말대꾸도 한다. 그는 '변했다'. 선악과를 맛 본 아담이 그러했듯이.
2. 특별한 소년의 평범한 성장통
소년은 자란다. 그리고 모든 자라는 것들은 성장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조상신에게 쏠리던 관심을 다른 곳에 쏟느라 학교 생활은 엉망이 되고 '그분'은 강림하지 않는다. 이제야 진정한 '나'를 찾은거 같기도 했는데 도리어 내가 누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방황의 시기가 닥친 것이다.
상술한 마랄라와 제의 일탈은 언뜻 비행과 타락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따진다면 온 세상의 사춘기 청소년들을 모두 타락했다고 말해야 할테니 그렇게 속단하지는 말자.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이 소년 역시 다른 세계를 알게 된 것일 뿐이다. 게르와 전통, 순종과 계승의 세계에서, 아파트와 현대, 반항과 혁신의 세계로.
비록 너무 늦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방황과 고뇌로 고생하기는 하지만, 제와 마랄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겨낸다. 으레 사춘기라는 관문을 거친 사람들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듯이.
겨울은 지나가고, 울란바토르의 어린 무당은 이제 남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안다. 그는 여전히 젊고 어리지만 지난 겨울의 그 자신보다는 한층 어른이다.
3. 울란바토르에도 개는 짖는다
영화는 제라는 이름의 무당 소년을 통해 울란바토르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준다. 울란바토르는 게르와 아파트, 신앙과 불신, 자연과 자본,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다. 세계적인 유행(?)처럼 소년과 청년들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삶과 자유를 갈망하지만 현실은 마냥 녹록치 않고, 그들은 목줄에 메인 개처럼 순종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봄이 기어코 오는 것처럼 변화의 바람 역시 기어코 불어 닥친다. 어른들이 제 아무리 '짖지 말라'고 해도, 개들은 어쨌든 짖는다(* 몽골에서는 '닥쳐'라는 말을 '그만 짖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개는 으레 짖는 법이고, 신세대는 으레 꼰대들에게 반항하니 말이다. 꼰대와 요즘 것들이 갈등을 빚는 우리들에게도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제는 17세 소년이면서 무당이기도 함으로써 이러한 양면적인 세계의 중재자가 되는데, 그가 그러한 인물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울란바토르의 여러 모습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민을 극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영화 <바람의 도시>는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 그러한 중재자(두 세계를 잇는 매개자) 역시도 신성과 본성 사이에서 고뇌한다는 역설 또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몽골 영화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는데, 첫 몽골 영화 관람이 아주 성공적이어서 무척 만족스럽다. 이 영화 한 편만 보고서 몽골을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입문 내지는 개론은 맛 본 셈이니까 나름대로는 새로운 세계로 지평을 넓힌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색다르면서도 우리와 참 닮은 나라, 몽골. 여러분도 한번 울란바토르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반항적인 시기를 추억하면서.
[상영 일정]
[부산국제영화제 10.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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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판 "허클베리 핀의 모험", <피넛 버터 팔콘>
벚꽃이 봄눈 되어 거리가 하얗게 덮인 날, 다양한 장르의 예술영화와 함께 따뜻한 로드무비 한 편이 개봉하였습니다. 꿈과 희망, 그리고 돛단배 한 척이 담긴 포스터만 보더라도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영화 <피넛 버터 팔콘>은 레슬러가 되고 싶은 청년 '잭'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세 사람의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한 요양원에서부터 플로리다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2011년, 캘리포니아의 한 연기자 캠프에서 영화의 두 감독과 배우 '잭 고츠아전'이 만나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주연 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를 찍는 것이 꿈이라는 '잭'의 말에 영화의 두 감독은 2000만 원을 들여 그와 함께 짧은 컨셉 비디오를 찍습니다. 그리고는 수년간 그 비디오를 통해 투자자를 찾는 작업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2017년, 마침내 그들은 펀딩을 통해 '잭'을 주연 배우로 하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는 배우 샤이아 라보프, 다코타 존슨, 그리고 원로 배우 '브루스 던'이 함께하게 되죠.
'마크 트웨인'의 명작이자 주연 배우 '잭'이 실제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현대판으로 각색한 이 영화는, '잭'의 유일한 우상이자 꿈 레슬링 '선수 '솔트 워터 레드넥'을 만나는 길을 따라 갑니다. 무모할 수도 있는 그의 여정은 본인이 속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요양원을 탈출하면서부터 시작되고, 언제나 그렇듯 우연히 (그 나름대로 문제가 안고 있는) 조력자를 만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잭'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로드무비는 보통의 경우, 드넓은 미국 땅을 횡단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경우 옥수수밭을 제외하고는 물 위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터도, 안전장치도 없는 작은 뗏목을 타고 그들은 천천히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의문점이 하나 생기죠. 미국의 남동쪽, 대서양 바다가 파도도 없이 저렇게 잔잔할 수가 있을까?
네, 있습니다. 이유는 '바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촬영지는 Pamlico sound 라는 석호(lagoon)로, 길이는 130km, 너비는 50km에 달하는 서울보다 큰 호수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 찍어도 육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당연히 이곳이 '바다'일 거라 으레 짐작하게 되죠.
이 외에도, 영화엔 몇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음악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약간 낯설 수도 있는, 미국의 소울 음악부터 컨트리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가 흘러나오는 영화를 보며, 관객만큼이나 흥이 난 '잭'을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조금은 서툴 수 있는 '잭'을 위해, 영화의 두 감독은 촬영 전 리허설 단계에서 대형 붐박스를 가져다 놓고 영화에 사용될 사운드트랙을 크게 틀어놓았다고 합니다. 영화보다 사운드트랙이 먼저 작업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잭'을 위한 영화인만큼, 영화의 모든 부분은 '잭'이 꿈을 펼칠 수 있게 짜여져 있습니다. '잭'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첫 주연 영화에서 그가 마음껏 뛰노는 장면들을 통해 관객으로서 생각하는 바가 많아지기도 합니다.
'백인' 위주였던 할리우드는 최근 많이 달라진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의도에서든,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 세대의 관객들이 보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인종'과 '성별'에서 더 나아가 '차별'이라는 산탄을 받고 있는 모두를 향해 갈 수 있다면 영화는 가장 대중적이고도 주도적인 문화예술로서의 그 가치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차별로부터 멀어지게 될 날까지
영화로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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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 도깨비 깃발 - 전체적으로 직무유기인 영화
“가자, 보물 찾으러!”
자칭 고려 제일검인 의적단 두목 `무치`(강하늘)와
바다를 평정한 해적선의 주인 `해랑`(한효주).
한 배에서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들이지만
산과 바다, 태생부터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바람 잘 날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선을 소탕하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실의 보물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적 인생에 다시없을 최대 규모의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라진 보물을 노리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적 `부흥수`(권상우)또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데...!
해적과 의적, 그리고 역적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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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감독 정이삭 / 역대급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 4DX관 연속 매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트위스터스"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에 캐릭터들의 후기를 담은 쿠키영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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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스트 도터> 1차 예고편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는
딸을 가진 젊은 여자 니나를 보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일 같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갑자기 니나의 딸이 사라지고 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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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궤도 이탈자들> 예고편
비정상 궤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심리 스릴러 '궤도 이탈자들'
<눈을 감으면> :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건물 붕괴사고의 진상을 파헤치던 ‘미소’는 진실을 폭로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몇 개월 뒤, 지상파 보도국 ‘박 기자’는 ‘미소’가 죽기 전 숨겨놓은 사건의 증거품을 찾으러 학교로 간다.
그곳엔 죽은 ‘미소’와 닮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밥을 먹을 때> : 네 명의 여대생이 저녁식사를 위해 모였다.
너무 평범해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그 순간,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말들이 쏟아진다.
밥 먹는 네 여자의 잡담. 하나의 사건, 수많은 진실. 진실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 그리고 관계없는 이야기.
<양을 죽이다> : 여자친구 ‘소연’이 바라는 대로 여장을 하고 춤추는 ‘정수’.
아픈 엄마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발레리나 ‘시우’가 되어 춤추는 ‘정수’.
진짜 ‘정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 여기 한 명의 화가가 있다.
그녀는 끝없이 그림을 그리지만, 어째선지 입술만큼은 완벽히 원하는 대로 그릴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우연히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 입술과 마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