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21 20:46:53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리뷰
SYNOPSIS.
[성모의 죽음], [메두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세례 요한의 참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카라바조’
살해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로마 교외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않는다
한편, 교황청은 그런 그의 사면 자격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림자’를 파견해 뒤를 쫓는데…
POINT.
✔️ 카라바조를 아시나요? 바로크 회화 거장. 렘브란트, 루벤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등이 영향을 받은 사람. 이전까지 없던 강렬한 화풍을 가진 독특한 화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
✔️ 카라바조 역할을 맡은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의 든든한 존재감 뒤로, 이자벨 위페르 & 루이 가렐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뽐내는 작품. 둘 다 프랑스 배우라 그런지 더빙을 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얼굴로 에너지를 다 드러냅니다.
✔️ 사랑과 예술이 함께하는 길. 종교로 대표된 권력에 맞서 인간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카라바조 캐릭터의 매력을 볼 수 있어요.
✔️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침 진행 중인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2025년 3월 27일)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그가 5살쯤 되었을 때에 흑사병이 터졌다. 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병으로 혼란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견습 생활을 거쳐 화가로 자라난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엄청난 능력치, 다른 의미로 폭발적인... 술과 폭력과 염문으로 절여진 사생활로 숱하게 화제가 된다. 결국 말다툼이 번진 결투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로마를 벗어나 몰타로 도피했으나... 몰타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나폴리로 또 도피하게 된다. 도망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 마치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거칠고 어두운 화풍을 남긴다. 혹자는 피살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풍토병이라고도 하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카라바조라는 화가에 대해 알려진 개략적 사실이다.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사실들을 크게 비틀지 않으면서도, 카라바조라는 인물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입힌다는 점이다.
'까'와 '빠'를 다 미치게 만들어야 슈퍼스타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카라바조는 당대의 슈퍼스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그를 극도로 좋아하거나 혹은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반응들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쉽게 재현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나와 거리감이 있는 시공간에서 익숙한 구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알 것 같다. 왜 나는 사랑-예술 사이에 인력이 있고, 사랑-권력 사이에 척력이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는지를.

사랑과 예술의 대척점에, 권력
천상의 이야기와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대. 성모 마리아 그림은 반드시 특정한 구도와 정물 등 계산된 방식대로만 그려져야 했고,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서도 안되었다. 하물며 길거리의 매춘부를 모델로 하다니 당시의 '높으신 분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봤을 때는 마음을 정돈하기에 도움이 되었던 성모화가, 모델이 매춘부임을 알고 나니 더없이 거슬리는 것이 되었다.
카라바조의 천재적 재능은 '천상의 이야기'를 지상에 전하기에 적합했지만, 그가 펼치는 예술의 방식은 신성모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그 조사관(루이 가렐)이 '그림자'처럼 어두운 데 몸을 두고,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좇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증언을 하고, 카라바조의 삶은 모자이크화처럼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카라바조를 싫어하는 사람들 축에, 온갖 권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솔직할 수 없기에 뒤틀린다.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솔직하게 경탄할 수 없어, 권위를 내세운 말들로 그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아카데미의 화가들을 통해, 예술의 진실성이 빛을 잃는다. (그림 뿐 아니라 비평도 함께.)
마찬가지의 양상을 종교 지도자들도 보여준다. (종교) 권력의 속성을 체화해 보여주는 캐릭터, '그림자' 조사관을 맡은 루이 가렐은 직선적인 눈빛으로 위압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기다란 막대봉을 땅에 내리꽂으며, 사람들을 협박하다시피 강압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묻고 정보를 뜯어낸다. 상대의 양쪽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이는 루이 가렐의 모습은 (진짜 너무 잘생겼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악마적이다. 종교를 수호한다는 캐릭터가 가장 악마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게, 종교의 진실성 또한 빛을 잃는다.

권력은 막대봉처럼 오직 파괴적이고 직선적인 방식으로만 내리꽂힌다. 사실 예술가들처럼 당대의 종교인들 또한 카라바조에게 사랑을 보았고 내심 끌렸지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온 모양과 다른 그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의 속성은 반-권력인가, 생각하다 문장을 바꿨다. 권력의 속성은 반-사랑이구나. 종교가 권력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서 본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에 사랑이 머물 곳은 없다. 그 자리에선 예술도 거짓될 수밖에 없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예술
반대로 예술과 사랑이 빛나는 카라바조의 삶은 자동으로 반-권력적이 된다. 그의 예술은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매춘부든 사형수든, 그가 이름을 묻는 방식은 마치 존재를 알아봐 주는 듯한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직접 서술하게 한다. "당신 대역죄인이오?" 물어 상대가 아니라고 자기 서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한 예술은 우리에게 1인칭 언어를 피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질문들이 인상 깊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밤을 뜯기며 시달리던 창부는 카라바조 앞에서 혼곤한 잠에 들고, 두려움과 용기를 구분 못하겠다며 마지막 밤을 회피하던 사형수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심지어 두려움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외친다. 카라바조는 사랑의 눈빛과 질문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끌어내고, 거기서 본 얼굴을 그려낸다. 권력이 끌어낼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 끌어낸다. 예술가가 탄생하는 지점은 공교한 기술 이전에 시각의 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아직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발명되기 전이었던 시대, 거리의 약자들은 철저하게 타자화되었다. 상처에 술을 부어주는 신부의 너털웃음, 그가 베푸는 음식과 약품 정도가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었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도, "만지게 두었다고" 즉결 심판으로 채찍질을 당하는 시대.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사랑은 홀로 빛난다. 비록 창부를 표현한 장면들이 다소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를 위한 대상화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와중에도, 카라바조의 사랑은 난봉이나 염문이라기보다 인류애로 느껴진다. 삶에 진심인 사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이나 상처를 쉽게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카라바조의 캐릭터에 부여해 드러낸다.
이는 카라바조를 경멸한 종교의 속성을 생각할 때 더욱 흥미롭다. 죽음 뒤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종교가 미세한 의심의 자국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오히려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사랑과 예술은 재갈에 물려 피를 흘리고 두려움을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리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는 미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훗날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자가 될 사실을 모른 채, 연필로 꾹꾹 이 문장을 눌러 썼던 여덟 살 아이의 마음. 거기 고여 있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랑이 없을 것 같지만 놓인 곳. 반대로 있어야 하지만 없는 곳. 그 구도를 소실점처럼 현실로 끌어와 본다. 그리고 묻는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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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때문에 만든 시리즈의 최후
스포일러 주의!
<오징어 게임 시즌 3>는 게임을 멈추기 위해 대규모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성기훈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게임 진행에 반대 표를 던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망하면서 게임을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에 절망을 느낀 기훈은 실패의 원인을 겁먹고 탄창을 가져오지 않은 강대호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향한 원망을 내비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의 이름은 '숨바꼭질'로, 참가자들을 파랑 팀과 빨강 팀으로 나누어서 진행을 하는 게임이다. 파랑 팀은 제한 시간 이내에 생존하거나 게임 방을 탈출하면 통과할 수 있고, 빨강 팀은 칼을 들고 파랑 팀을 1명 이상 죽여야 통과할 수 있는 게임이다. 게임에 참가한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걱정을 품고 있을 때, 빨강 팀이 된 기훈은 파랑 팀이 된 대호를 타깃으로 잡는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고 대호와 대면하는 순간부터 점차 변화하는 기훈의 모습을 담은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일단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재미있게 봤건, 재미없게 봤건 간에 <오징어 게임 시즌 3>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시즌 2와 시즌 3는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연 전편(전반부)에서 쌓아놓은 이야기들을 이번 작품에서(후반부)에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 보여줄 것이 많아 보였던 시즌 2와는 달리 <오징어 게임 시즌 3>는 애당초 하고픈 말이 있기나 했던 건지 의문일 만큼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다. 문제점들이 너무 많아 어떤 점을 먼저 짚어야 할지 난감한 수준인데, 가장 큰 문제는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이야기를 한 데 묶어 마무리를 짓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오징어 게임 시즌 3>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이야기 줄기를 가지고 있다. 분노 때문에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아가는 성기훈의 이야기, 섬을 찾아 형에게 만나려고 하는 황준호의 이야기, 진행 요원으로 참가했다가 박경석을 구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는 강노을의 이야기. 이렇게 세 갈래로 흩뿌려진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로 묶일지, 각각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으나, 놀랍게도 이 드라마는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의 흐름으로 간다. 기훈은 실패했다. 단지 쿠데타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실패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대호를 죽였다. 무리하게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죄에 더해 살인까지 저질렀다. 준호도 실패했다. 그는 본래 기훈과 함께 섬을 찾아 게임을 막아야 했지만, 프론트맨의 정체를 함구해버리는 바람에 기훈은 인호의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노을도 마찬가지다. 진행 요원으로 참가한 노을은 탈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 <오징어 게임 시즌 3>는 이러한 실패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실패를 바로잡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즉, 이 작품은 속죄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기훈에게는 아이를 지켜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준호에게는 섬을 찾아야 하는 의지가 주어졌으며, 노을은 경석과 경석의 딸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 주어진다. 여기까지의 구성은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나는 오히려 속죄라는 소재를 끼워 넣으려는 본 작품의 시도가 굉장히 어설프고 게으르며 전체 서사를 망쳐버렸다고 생각한다. 먼저 기훈은 내게 보기에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살인을 저지르면서 자기 손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훈은 누군가를 구해주는 한이 있어도 철저히 인간성을 잃고 폭주하는, 파멸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기훈을 마지막까지 평범한 사람을 대변하는 존재로 만들려고 하며, 아이를 지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의 희생을 숭고하고 성스러운 행위로 묘사한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불만은 이해 가능한 범주를 넘어선 기훈에게 '평범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집어넣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고, 두 번째로는 아이를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낡고 얄팍한 방식에 있다. <레옹>부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까지 이어지는 '아이를 구하는 것으로 그 모든 죄를 속죄 받는' 방식은 이제 너무 고리타분하고 편의적이지 않은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그럴듯하게 서사가 완성된 기훈에 비해 준호와 노을의 서사는 처참하다. 준호는 막말로 분량을 통으로 삭제해도 상관없을 만큼 존재의 의미가 없는 인물이다. 섬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만 주어졌을 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탓에 준호의 서사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작품에서 홀로 겉돈다. 심지어 섬을 찾은 이후에도 인호를 향해 "형!'이라고 외치는 것을 끝으로 활약이 끝나버리는 바람에 본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결말에 가서 아이와 456억이 주어지는데, '대체 왜?'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결말이다. 아이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준호가 왜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지에 대한 설득 과정이 전무하기 때문에 본 결말은 그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노을은 기훈보다 더 죄가 심각한 인물이다. 가족을 버린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다른 요원들이 장기매매를 하지 못하도록 참가자의 내장을 파괴해 줬으니 됐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고, 경석과 경석의 딸을 살리는 데 성공하게 만들면서 노을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딸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안면식이 있는 사이여도 그렇지 왜 그렇게까지 경석과 경석의 딸을 구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 모든 딸은 다 구할 속셈이 아닌 이상에야 목숨까지 거는 이유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주연들의 이야기가 이 모양인데 조연들의 이야기는 말할 필요가 없다. 가뜩이나 주연 다루기도 바쁜데 나머지 조연들은 어떻게 퇴장시킬지 차마 신경을 못 쓴 감독은 각 인물들에게 가장 최악의 방식의 퇴장을 안겨준다. 쿠데타를 실패하는데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대호는 이후에 기훈과의 갈등을 더 길게 보여주거나, 나중에 기훈이 용서하면서 둘이 다시 합심하는 그림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작품은 기훈에게 더 큰 죄를 안겨주기 위해 그에게 손쉽게 살해당하면서 허무한 퇴장을 맞이한다. 현주는 등 뒤로 접근한 명기에게 저항도 못하고 단번에 사망하면서 올바른 행적에 걸맞지 않은 최후로 시청자를 허망하게 만든다. 금자는 방금 막 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친아들을 (사실상) 살해하는 놀라운 행적을 보이고 작품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기 위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식으로 초라하게 끝맺는다. 세미와 타노스의 죽음으로 뭔가 보여줄 것 같았던 민수와 남규는 마약에 취해 별다른 활약도 못해보고 끝까지 약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죽는다. 그나마 명기와 준희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맞지만, 애를 낳고도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준희를 보고 있자니 마음만 먹으면 줄넘기도 쉽게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시청자 모두가 노을이 총을 가지러 엘리베이터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혼자만 모르다가 뒤늦게 눈치채는 멍청한 부대장, 아무런 활약도 못 해본 프런트맨, 마지막까지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던 극한의 컨셉질을 하는 용궁 선녀,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오징어 게임'스러운 재미는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숨바꼭질, 뒤를 돌거나 땅을 짚어야 한다는 규칙이 없어서 심심했던 줄넘기, 시즌 1의 구슬치기와 징검다리와 너무 유사한 전개 흐름, 전혀 풀리지 않은 게임의 기원과 프론트맨의 과거사(타노스가 자식 얘기로 조롱하자 갑자기 화를 내는 모습에 대한 설명) 등 단점이 너무 많아서 다 꼽으려면 밤을 새워야 할 정도다. 더 심각한 건 작품의 교조적 태도로, 기훈의 "우리는 말이 아냐, 사람이야. 사람은..." 대사를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치는데 이는 인물들의 죽음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오만하다. 만약 정말로 그러한 의도로 넣은 장면이라면 죽음을 오락으로 소비하여 돈을 벌고 전당에 앉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고, 더 나아가 데스 게임이라는 사람 죽이는 것으로 재미와 쾌감을 얻어내는 장르에서 이런 메시지를 담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아니라면 연출을 단단히 잘못한 것이고.
황동혁 감독은 어느 한 인터뷰에서 <오징어 게임>(정확히는 시즌 2)이 재미없으면 그건 당신이 우울한 것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그래도 창작자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다. 하지만 작품을 잘 만들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오징어 게임 시즌 3>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졸작이다. 시리즈의 마무리로도, 데스 게임 장르의 재미로도, 인간의 속죄에 대한 이야기로도, 자본주의 비판으로도, 어느 것 하나 성취하거나 좋다고 할 만한 부분이 없다. 시즌 2와 시즌 3는 만들지 말아야 할 속편의 예시로 계속 소환될 것이며, 남은 것이라고는 감독의 오만한 태도뿐이다. 창작자가 자아도취에 빠져 작품을 만들면 이렇게 된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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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llers of the flower moon / 플라워 킬링 문
2023년 11월 21일에 감상한 '플라워 킬링 문'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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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개 /
‘플라워 킬링 문’은 진정한 사랑과 말할 수 없는 배신이 교차하는 서부 범죄극으로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의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를 중심으로 오세이지족에게 벌어진 끔찍한 비극 실화를 그려낸다. 데이비드 그랜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며, 에릭 로스가 각본에 함께 참여했다.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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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평 /
플롯구성과 연출이 눈에 띄는 영화였다.
씬과 씬을 연결하는 플롯구성이 어느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연출 또한 마찬가지.
가장 인상깊은 연출은 당연히 마지막씬이다.
재판 이후의 이야기를 연극형식의 나레이팅으로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현실로 끌여들였고, 마지막에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으로서 직접 등장하여 그들(오세이지족)의 마지막을 위로한다.
가장 마지막씬에서는 오세이지족들이 모여 큰 원을 만드는데, 이 원은 곧 꽃의 형상을 띈다. 이는 "flower moon"에서 희생된 소중한 영혼들을한자리에 모아 기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3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이렇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디카프리오, 로버트 드니로의 세박자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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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온라인상영관 오픈 안내 (9/5~9/10)
제12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SICFF)가
9/5(목) ~ 9/10(화), 총 6일간 개최되는데요,
이번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온라인상영을 저희 씨네랩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9/5(목) 오후 7시에 오픈되는 'Online Screening' 페이지에서
수상한 영화모음집, 거인의 작은 발자국
위 2개 부문의 상영작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상영작 리스트>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의 우수한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기회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
그 외 온&오프라인, 야외 상영에 대한
자세한 사항 및 티켓 예매 안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세요!
> 제12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티켓 안내 (바로가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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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싱> 삼중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두 여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뉴욕, 남달리 밝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테사 톰슨)'은 이를 활용해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드나드는 패싱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더위에 지쳐 들어선 한 호텔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클레어(루스 네가)'를 만난다. 자신처럼 밝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를 이용해 백인 남편 '존(알렉산더 스카스가드)'과 결혼한 후 흑인이지만 백인으로 살아가며 경제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클레어. 그런 클레어를 보면서 아이린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클레어 역시 아이린을 보면서 마음만큼은 편했던 흑인으로서의 활기찬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두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패싱>은 1929년에 발간된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아이언맨 3>, <트랜센던스>, <고질라 VS. 콩>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레베카 홀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패싱>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은 바 있다. 이처럼 <패싱>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제목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패싱'(passing)은 흑인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패싱을 원래 자신의 소속과 다른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양 행동하는 일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정체성을 구분하는 경계들과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불안감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크게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이라는 세 가지 경계를 오가는 패싱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스터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는 패싱이다. 작중 흑인에서 백인으로의 자아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 곧 백인으로 패싱 가능한 중산층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인물은 아이린과 클레어 두 명뿐이다. 흥미롭게도 <패싱>은 단 둘 밖에 없는 여성을 여러 측면에서 대조하며, 그것만으로도 98분 동안 극을 전개할 원동력을 이끌어낸다.
우선 아이린을 보자. 중산층의 흑인 남편과 결혼한 아이린은 시내에 나갈 때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백인으로 패싱하지만, 흑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백인으로 행세하는 클레어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인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하는 기만적인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그녀가 패싱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인종의 구분과 차별을 내면화하고, 그 틀 내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보수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아이들의 선물을 사러 간 서점이나 더위 때문에 잠시 들린 호텔 카페, 심지어 길가에서까지 항상 자신이 사실 백인이 아닌 흑인임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있거나 무도회에서 춤출 때 성적인 매력을 숨길 생각이 없고, 금주법이 있는 시대에 술을 언제 어디든 갖고 다니는 클레어는 아이린과 정반대인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과거사를 꾸며내고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절단한 후 백인으로 살아왔지만, 공허한 삶에 지쳐 다시 흑인 사회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즉, 본인도 패싱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적 구분을 떨치지 못한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정해진 인종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으며 그 틀까지도 극복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린에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 기준을 전복하고 교란될 수 있는 클레어의 유동적인 정체성은 다양한 감정 안에서 인식된다. 분명 클레어는 호텔 카페와 스위트 룸, 그리고 아이린이 주최한 무도회 등에서 주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그들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위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린은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클레어를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심, 또 앞서 본 것처럼 경멸감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패싱을 두고 비슷한 듯 서로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차이로부터 부각되는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에 더해 아이린의 복합적인 감정선은 성적인 기제와 계급적인 차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이야기를 층층이 쌓는다. 클레어와 아이린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동성애적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인 '브라이언(안드레 홀란드)'에게 클레어를 설명할 때 아이린은 그녀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남편이 그녀를 멀리 하라고 눈치를 줘도 식사나 무도회에 계속해서 초대며 클레어의 존재를 쉽사리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못한다. 남편이 클레어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가정부와 클레어가 따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굳이 가정부를 다시 일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클레어에 대한 애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의 성적 매료 내지는 욕망으로 읽힐 수 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린에게 보낸 연애편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거나, 그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아이린을 갑자기 방문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이 대목 역시 상당한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또한 영화는 계급적 차원에서의 패싱도 간과하지 않으며 특히 계급 이동의 열망이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을의 한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아 죽었고 시체가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브라이언은 아이들에게 흑인으로서 1920년대 미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반면에 아이린은 철저히 그 현실을 아이들로부터 감추고자 한다. 흑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백인이 될 수 있기에 그녀에게는 흑백의 구분보다도 안정된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다. 본인이 비난하던 클레어조차 흑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상황에서 흑인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을 상실한 아이린의 이러한 패싱은 이 작품이 단순히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자칫 100여 년 전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에 그칠 뻔했던 영화는 더욱 현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중 삼중의 패싱은 인종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성과 계층적 정체성의 구분을 가로지르면서 아이린과 클레어가 확신하고 있던 자아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든다. 곧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정의와 정체성을 결정해 온 기존의 사고방식에까지 의문을 던진다.
특히 영화의 결말은 그 질문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클레어를 향한 아이린의 감정이 어떤 의미로든 나날이 강렬해지고 격화되는 가운데, 영화는 끝내 흑인 사회로 편입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클레어의 비극이 누구의 탓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어에 대한 어떤 진실도 명료히 규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추측만 가능하도록 심증이 될 법한 장면들을 열거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뉴욕이 내려다 보이는 가운데 눈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워 온전히 하얗게 만들면서 끝난다. 마치 인종, 젠더, 계급과 그 외의 경계선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에서 개인의 온전하고 진정한 정체성을 그려보라는 듯이.
따라서 영화 <패싱>은 사회적 차원에서 정의된 획일적이고 안정된 자아개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더 나아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나날이 한 개인을 규정하고 그에게 덧입혀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제기와 메시지는 꼭 흑인이나 여성이 아니더라도 <패싱>을 곱씹어 볼만한 이유가 된다.
<패싱>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그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방식 덕분에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우선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1.33:1 비율을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화면 비율은 배우들의 얼굴과 표정을 오롯이, 또 집중적으로 가득 담아내면서 그들의 내적 혼란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의 절제되어 있지만 깊이 있는 퍼포먼스가 유달리 빛나는 배경도 되어준다.
흑과 백을 외에 그 어떤 색채도 더하지 않은 연출도 1920년대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조명의 위치와 광원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순간마다 두 여성의 피부색을 조정하면서 패싱이라는 행위가 한 명의 개인에게나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단순히 피부색을 조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극명히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활용해 아이린과 클레어의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심정을 끄집어 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사실 <패싱>을 오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와 경제 대공황 사이의 미국 역사, 사회, 경제에 대해 알아야 하듯이, <패싱> 역시도 대략적인 사전 정보를 요구하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드라마틱한 전개 대신 일상의 모습을 담는 구성도 한몫하며, 설명보다는 관조가 주를 이루는 화법은 영화를 루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영화 기법이 주는 인상과 영향에 시선을 맡기다 보면 <패싱>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여성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그들의 급변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공감하면서 스스로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고전적인 작법과 시대를 타지 않는 메시지의 조화로 되살려낸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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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을 슬픔의 삼각형.
이토록 불편하고 여러모로 성가시며 그 마저도 웃게 만드는 영화가 또 있을까. 세 갈래로 이루어져 사회의 여러 모습을 영화에 담아 인상 깊은 연출을 보여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소개한다. 불편한 부분들로 가득하지만 2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몰입감이 넘친다. 영화는 불편한 장면들의 연속이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생각들을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제7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5월 17일에 개봉했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더 스퀘어>에 이어 루벤 외스틀룬드의 남성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영화이다.
오디션을 보기 위에 몰려든 남자 모델들은 모두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다. 인터뷰하는 장면과 함께 패션 브랜드에 따른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두 브랜드의 모습을 타겟층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는 모델들의 표정과 인터뷰의 내용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남성 모델들의 사정이 언급된다. 어떤 것으로도 채워 넣을 수 없는 슬픔의 삼각형으로 인해 합격하지 못한다. 자연스러움을 원하면서도 인위적인 젊음을 얻으려는 모순은 뒤이은 장면에서 지속된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패션 행사의 휘향 찬란한 메시지와 황당한 상황이 일어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패션쇼가 시작된다.
그렇게 패션쇼가 끝나고 칼과 야야는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침묵 속에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업계 특성상 야야에 비해 수입이 적었던 칼이 항상 데이트 비용을 냈지만 오늘도 역시 칼이 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꼭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야야는 표정이 굳어지며 남자가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회피한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으면서 갈등은 점차 심화된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상황은 마무리되고 협찬으로 두 사람은 호화로운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고급 크루즈에 승선한 사람들은 칼과 야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나이 든 백인 상류층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호화로운 여행을 즐긴다. 이들의 뒤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들 뿐만 아니라 배의 여러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이들의 만족을 위해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행에서 맞이하는 선상파티는 날씨로 인해 하염없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위선을 토해내며 선내가 엉망진창이 된다. 그 배가 난파되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웬 섬에서 눈을 뜬다.
재난으로 인해 상황은 전혀 다르게 변하고 새로운 계급 사회가 등장한다. 배 위보다 철저한 계급 사회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생존이 목표인 이 섬에선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전락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화장실 청소 담당 직원 애비게일이 이들의 '캡틴'이 된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며 이 섬은 여성이자 동양인인 애비게일을 중심으로 한 사회가 된다. 독점적으로 취하고 있는 음식과 생존 능력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만큼은 절대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생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한 욕구는 더더욱 커진다. 또한 그 권력에서 맛보게 된 진정한 소유의 욕망이 겹쳐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초반의 긴장감에 비해 후반부의 몰입감이 떨어지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지며 취하게 되는 것들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권력구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슬픔의 삼각형은 미간의 주름을 뜻하기도 하고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에서 펼쳐지는 계급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와 걸맞게 모순적인 것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또 모순적인 영화의 모습이 이중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영화 속 배경은 무지와 자의식 과잉으로 가득한 혐오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실하게 비극적이면서도 위선으로 내면을 채운 이들이 처한 상황이 유머스러움을 유발한다. 물론 이마저도 불편한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상황의 변화로 인해 미처 말하지 못했던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씁쓸함이 감도는 건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을 슬픔의 삼각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답만이 그 삼각형의 모양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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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괴물’
13살 때부터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창녀’ 생활을 했지만, 정작 사실을 알게 된 동생들로부터 쫓겨난 에일린에게는 꿈이 있다. 우연한 계기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마를린 먼로처럼,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는 남자가 나타나줄 것이라는 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없었다. 에일린에게 쾌락을 구매하는 남자들은 그녀가 꿈꾸던 남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에일린 자기의 꿈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절망적으로 깨닫고 자살을 시도하기로 한다.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맥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 한 클럽에 들어간다. 영화 〈몬스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에일린이 들어간 곳은 퀴어들이 모이는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셀비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에일린이 질색하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흥분하자 셀비 역시 ‘그런 의도’로 말을 건 게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셀비는 에일린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호감이 에일린의 모든 것을 바꾼다. 에일린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의 매력을 알아봐주고 다가와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매력은 늘 이성애 남성들의 돈과 치환 가능한 것으로만 여겨졌고, 빠른 시간 동안 소비된 후 버려졌기 때문이다. 셀비가 자신에게 수작을 건다며 잔뜩 흥분해 화를 내던 에일린의 마음이 바뀌는 이유다.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이 갈급했던 에일린에게 성적 지향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모두로부터 버려진 사람에게 관습적 섹슈얼리티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제 에일린에게는 셀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만이 중요하다.
행복. 참 골치 아픈 말이다. 무엇이 행복일까? 에일린에겐 돈으로 셀비를 호강시켜주는 게 ‘행복’이다. 에일린은 셀비의 관심과 호감, 즉 비물질적인 것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지만 그 구원을 지속하는 방법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는다. 최초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평생 ‘창녀’로만 일했던 에일린이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없기에 돈을 매개한 ‘행복’을 위한 에일린의 계획은 시작부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에일린을 믿고 가족을 떠난 셀비의 불안‧불만도 점차 고조된다. 결국 에일린은 급한 대로 다시 ‘손님’을 구하러 거리로 나선다.
안타깝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돈에서 찾고, 돈을 벌기 위해서 별의별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에일린이 ‘더 좋은’ 행복을 찾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것이 곧 파멸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진짜 비극은 세상이 에일린을 대해온 방식의 연장에서 생긴다. ‘손님’ 중 한 명이 폭력적으로 굴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에일린이 그를 총으로 쏜 것이다. 이 살인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죽었을 테니까. 그러나 셀비와 돈을 매개로 ‘행복’하고 싶다는 에일린의 뒤틀린 욕망은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살인을 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직장을 갖기 어려운 그녀가 ‘손님’을 살해한 후 차와 돈을 처분하여 버는 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다.
셀비가 이 사실, 즉 에일린이 살인으로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경찰의 수사망이 점차 좁혀오자 행복을 향한 에일린의 여정은 위기를 맞는다. “난 선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요.” 궁지에 몰린 에일린의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말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있다. 모든 가난한 사람이 몸을 팔거나 살인을 하지는 않으니까. 최초에는 에일린의 ‘선택’이 있었을 것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한 번의 선택이 만들어낸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을 전부 그녀 탓이라 하는 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첫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삶은 늘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은 안다.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생존을 위해서는 ‘일반적’ 기준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당연한 선택지’가 되기 마련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사연의 주인공인 에일린은 12년간 사형수로 복역한 뒤 2002년에 사형당했다. 〈몬스터〉는 ‘괴물’이 탄생하는 과정, 사랑으로 인한 ‘괴물’의 갱생 가능성, 행복에 관한 편협한 전망이 잉태한 비극, ‘선택’을 박탈당한 이들이 마주한 잔혹한 현실의 문제를 훌륭하게 엮어낸 영화다. 에일린으로 분한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도 압권이다. 그녀가 죽기 전에는 진정한 구원과 위안을 얻었기를, 살인사건의 피해자에게 진정 어린 용서를 빌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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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1편 삭제씬 총정리
#산돌구름 #어벤져스1 #삭제씬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4. 0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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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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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인트로
00:34 마리아 힐 & 오프닝
01:35 외로운 캡틴
03:35 캡틴과 웨이트리스
04:37 경찰 비하인드
05:23 앤트맨 힌트
06:09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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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라리] 끝장리뷰 | 엔초의 두 가족 | 장남들의 죽음 | 밀레 밀리아의 역설 | 장점 or 단점 | 오프닝 해석 | 장남과 차남
[페라리](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엔초의 두 가족
Chapter 2 장남들의 죽음, 장점 or not
00:00 페라리 개봉
01:38 엔초의 두 가족
04:07 악의 폐곡선
06:02 장남들의 죽음
07:47 절반의 죽음
09:19 장점 or Not?
10:39 별점 및 한 줄 평
10:57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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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3차 예고편 - 현실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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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샤이닝 걸스> 공식 예고편
로런 뷰커스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기반으로 한 시리즈 '샤이닝 걸스' - Shining Girls. 주인공 커비 마즈라치는 잔혹한 공격을 당한 뒤 끊임없이 뒤바뀌는 현실을 겪게 된다. 수년 후, 시카고의 한 신문사 기록 보관소에서 일하다 최근의 살인 사건이 과거 자신이 받은 공격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커비. 그녀는 베테랑 기자 댄 벨라스케스와 함께 끝없이 바뀌는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고, 마침내 과거에 직면한다. 엘리자베스 모스, 바그너 모우라와 함께 필리파 수, 에이미 브레너먼, 제이미 벨 등이 열연하며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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