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02 19:04:03
모아나 2 |뻔한 레시피, 쉬운 재료, 평범한 플레이팅
<모아나 2>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섬에 사는 부족들을 찾기 위해 꾸준히 항해에 나서던 '모아나'(아울리이 크러발리오). 그녀는 전설적인 항해자이자 길잡이를 뜻하는 '타우타이' 칭호를 받은 직후 고대의 조상이 등장하는 환영을 본다.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지우고자 하는 폭풍의 신 '날로'(토피카 페푸리이)가 숨긴 섬, '모투페투'를 찾아내어 바닷길을 열지 못하면 모아나의 부족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지를 받은 것.
이에 모아나는 발명가 '로토'(로즈 마타페오), 농부 '켈레'(데이비드 페인), 이야기꾼 '모니'(후알랄라이 청)와 함께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모아나 일행은 날로가 보낸 괴물들을 만나 위기에 처하고, 그녀는 타우타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 앞에 오랜 파트너이자 반신반인 영웅 '마우이'(드웨인 존슨)가 나타나고, 그의 격려에 힘입어 모아나는 다시 한번 모투페투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6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아나>. <모아나>의 매력은 신선함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폴리네시아 신화는 이전까지의 디즈니 작품에서 보지 못한 볼거리였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생산 업무에 직접 관여하는 여자 주인공의 등장도 파격적이었다. <겨울왕국>의 엘사, 안나 자매만 해도 전통적인 공주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니까.
반면에 8년 만에 돌아온 속편 <모아나 2>는 기대보다 걱정이 컸다. 개봉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디즈니의 2024년 1분기 실적 보고회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던 속편이 돌연히 극장용으로 전환되었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 전편의 OST를 맡았고, 현재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곡가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뉴스도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모아나 2>는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전편을 답습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얼개와 스토리, 고막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OST는 본래 TV용 작품이었던 초안의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흥미로운 특이점은 있지만, 그조차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징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모아나 2>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스트레인지 월드>와 <위시>로 이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진을 끊어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담은 환상
개봉 전에 <모아나 2>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을 하나만 꼽자면 카누를 타고 망망대해를 시원하게 가르는 모아나와 독수리로 변신해 그 위를 날아가는 마우이의 투샷일 것이다. 그런데 <모아나 2>는 이 장면에 예상치 못한, 하지만 디즈니라서 자연스러운 함의를 불어넣었다. 폭풍의 신 날로의 방해를 뚫고 모투페투 섬을 찾아서 자유로운 바닷길을 열어야 하는 모아나의 항해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전한 후 지금까지도 미 해군은 서방 진영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다. 국가 간 무역을 활성화해 시장 경제를 키우며 자국 중심 질서를 정립한 것. 근래 중국처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군사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모아나 2>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작품이다. 모아나는 미 해군, 마우이와 동료들은 미국의 동맹국, 날로 신은 중국처럼 항행의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에 정확히 대응되기 때문.
물론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 해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닷길의 중요성은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며, 바다를 통한 소통과 교류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핵심 원동력이었으니까. 명나라가 정화의 원정 이후 돌연 바닷길을 포기한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의 국력을 추월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바닷길을 끊어서 인간 세계를 암흑 속에 빠트리려는 날로의 존재는 인류 문명 공통의 공포이자 두려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모아나 2>는 어디까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는 대공황 이후부터 미국 사회가 추구하고 유지할 가치와 윤리를 충족시키는 환상 속에서 재미와 쾌감을 추구한 스튜디오였으니까. 자연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렇기에 <모아나 2>가 보여주는 모험과 항해를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신화로 가린 이데올로기
다만 미국 패권에 대한 은유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모아나 2>가 전편의 미덕을 본받아 인간 영웅이라는 신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대다수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를 조력자나 대적자로, 인간 영웅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공통의 작법을 공유한다. 대체로 신적 존재는 아무리 강해도 여러 제약이 있다. 그렇기에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만이 신과 인간 세계 양쪽을 넘나들면서 모험을 펼치고, 운명을 성취한다.
<모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와 같은 강대한 존재도 세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모아나를 영웅으로 낙점하고, 그녀가 좌절하거나 포기하려 할 때마다 간접적으로 도울 뿐이었다.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영웅, 마우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우도록 난파된 모아나의 배를 그의 섬으로 이끌어주는 식이었다. 모험을 계속할지 말 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아나의 몫이었다.
<모아나 2>도 마찬가지다. 전편이 반신반인이 아닌 인간의 모험이라는 콘셉트를 제시했다면, 속편은 이를 구체화한다. 날로와 전투를 펼치는 클리아맥스가 대표적이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가운데, 모아나는 자신과 마우이의 역할을 바꾼다. 날로가 능력이 더 뛰어난 반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 이는 뻔할 수 있었던 후반부를 변주시키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는 맛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안타깝게도 <모아나 2>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우선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은 전편을 답습했다. 고향 모투누이 섬에 위기가 닥치는 환영을 본 모아나. 선조들이 발견하지 못한 전설 속의 섬을 찾아내지 못하면 부족 사람들이 모투누이에서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라는 예지를 받자 그녀는 다시 한번 항해에 나선다. 이는 모투누이에 찾아온 재앙을 풀기 위해 항해를 떠난 전편과 다를 게 없다.
발단 이후의 전개도 전편과 거의 동일하다. 서로 떨어져 있던 모아나와 마우이는 항해 도중에 합류해서 다시금 한 팀을 이룬다. 최종 빌런을 마주하기 전에 한 차례 실패를 겪는 것도, 좌절한 일방을 다른 일방이 위로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유사하다. 단지 전편에서는 모아나가 마우이를, 속편에서는 마우이가 모아나를 일으켜 주는 게 다를 뿐이다.
물론 기시감을 옅게 만들려는 시도는 있다. 돼지 '푸아'와 닭 '헤이헤이'에 더해 모아나의 여동생 '시메아', 동료 선원 모니와 로토 등에게 적잖은 분량을 부여하고, OST에서도 로토에게 래퍼 역할을 맡기는 식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모아나와 마우이의 분량이 줄면서 도리어 그들의 캐릭터성이 평면적으로 변한다. 일례로 전설적인 길잡이의 칭호까지 받은 모아나의 내적 갈등은 스케치 수준으로 스쳐 지나간다.
귀가 허전해
마지막으로는 음악의 쾌감도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 더 이상의 검증이 불필요한 린 마누엘 미란다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그는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로 결심을 굳힐 때 부르는 노래인 'How Far I'll Go'를 작사, 작곡하면서 <모아나>의 흥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바 있었다. 엘사가 부른 'Let It Go'가 <겨울왕국>을 상징하듯이, 'How Far I'll Go' <모아나>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으니까.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불참한 <모아나 2>는 'How Far I'll Go'와 같이 뇌리에 각인될 만한 OST를 들려주지 못했다.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Beyond'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만, 이전 곡과 같은 임팩트를 주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노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편에서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까지 겪은 역경만큼 극적인 전개를 속편이 고안해내지 못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귀가 허전한 아쉬움을 비주얼로 만회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맥스 전투 시퀀스는 확실히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모아나의 카누가 거대한 파도를 빗겨 타는 순간을 4d로 본다면 마치 서핑을 하는 듯한 쾌감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음악의 아쉬움을 온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클라이맥스 외의 장면에서는 특별히 놀랄 만한 장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모아나 2>는 쿠키 영상에서 예고하는 3편을 위한 징검다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싶다. 그와 동시에 과연 <모아나 2>가 징검다리 역할을 온전히 해냈는지는 끝나는 순간까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 애니메이션보다는 약 1년 반 뒤에 개봉할 <모아나> 실사 영화가 더 궁금해지니까.
Acceptable 무난함
디즈니가 디즈니한 무색무취한 속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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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탕한 여성'을 단죄하라
누벨바그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1961)이 재개봉했다. 개봉 당시 파격적인 기법과 아름다운 화면 등으로 화제가 된 영화라 한다. 그러나 2023년 현재, 이 영화의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는 줄거리와 여성 캐릭터 재현이다. 영화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요즘, 기법이나 화면이야 상대적으로 ‘낡은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줄거리와 여성 캐릭터 재현은 그렇지 않다. 전자가 영화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 한정된 이야깃거리라면, 후자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1912년 파리다. 독일에서 온 쥴과 프랑스인 짐은 문화·문화적 취향이 맞아 금세 친구가 된다. 그러던 중 절친한 두 사람 사이에 까트린이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까트린은 매력적이면서도 당돌한 인물이다. 언젠가 쥴, 짐과 함께 연극을 본 후에는 여성 주인공이 숫처녀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쥴은 지속적으로 정숙한 여인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와 짐이 까트린을 만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여성을 서로 소개해주고 종종 성매매를 했음에도 말이다. 쥴에게 ‘정숙함’은 젠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가치다.
논쟁을 이어가던 까트린이 돌발 행동을 한다. 갑자기 강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자 쥴은 크게 당황하고 까트린은 그제야 그런 쥴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여기까지는 까트린의 당돌함이 나쁘게만 묘사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논쟁을 마주하자, 자기 의견을 독특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매혹적’이다.
전쟁으로 인한 잠깐의 공백을 거친 후, 쥴은 까트린과 결혼한다. 역시 까트린을 욕망했던 짐은 낙심하지만 우정의 이름으로 쥴과 까트린을 축복하고 그들의 집에 방문한다. 그러나 짐은 행복하지 못한 쥴과 까트린을 목격한다. 쥴은 짐에게 까트린이 결혼하면 정숙해질 거라 믿었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까트린이 자신과의 관계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애인을 두고 있다는 점도 고통스레 털어놓는다. 까트린의 당돌함이 본격적으로 악마화되는 건 여기서부터다.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남자에게 도발적으로 반격했던 까트린이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쉽사리 변덕에 휩싸이는 존재, 즉 늘 욕망의 결핍에 시달리는 여자로 재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까트린을 놓칠 수 없는 쥴은 짐이 여전히 까트린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다소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까트린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운 쥴이 짐에게 까트린과의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다. 까트린의 자유분방함을 비난하면서도 그녀를 향한 욕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쥴의 고육지책이다. 이 과정에서 까트린에게는 점차 남자를 홀려 망가뜨리는 ‘팜므파탈’, ‘요부’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까트린은 쥴, 짐과 함께 지내면서 잠시나마 ‘두통이 올 정도의 완벽한 조화’를 느낀다. 까트린의 욕망은 남자 둘이 있어야 겨우 채워질 정도로 거대하다는 식이다. 여기에 그녀에게 구애하는 또 다른 마을 남성 알베르까지 더해진다. 문제는 까트린이 크게 변덕을 부려 끝내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의 욕망은 얼마나 위험한가’를 질문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진다.
결국 짐은 오락가락하며 여러 남자를 탐닉하는 까트린을 떠난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했던 또 다른 여자와 서둘러 결혼한다. 짐이 떠나자 거대한 욕망으로 비틀거리던 까트린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짐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해도 짐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자동차에 태우고 동반자살을 해버리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성의 운전은 자율성(혹은 통제되지 않음)으로 해석되어왔다. 때문에 까트린이 거칠게 운전한다는 건, 그녀 욕망이 끝내 무언가를 파괴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동반자살은 필연이었다.
이 장면은 결혼 전의 까트린이 쥴과 논쟁하며 강물에 뛰어든 장면과 겹친다. 그리고 두 장면 사이에는 주체적 욕망의 소유자였던 여성이 자기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과정이 있다. 쥴이 둘의 죽음을 회고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그는 까트린과 짐의 사랑이 자신과 짐 사이의 우정만 못했다고 자위하며 마지막까지 까트린을 우정을 파괴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그런 까트린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은 것처럼 말이다.
〈쥴 앤 짐〉은 자기 욕망을 소유한 여성을 단죄함으로써 두 남성의 우정을 상찬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그러나 그토록 ‘위대한’ 쥴과 짐의 우정은 여자 없이는 불가능한 공허한 것이었다. 쥴과 짐은 예술과 사회에 대한 의견을 공유한다는 데서 우정의 근거를 찾지만 이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들의 우정은 여자를 탐하며 파리를 돌아다니며 깊어졌을 뿐이다. 작가인 짐은 쥴과의 우정을 담은 자전적 소설에서 둘의 관계에 ‘동성애’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는데, 이 둘의 관계는 동성애라기보다는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남성 연대를 도모하는 호모소셜에 가깝다. 이를 ‘퀴어적 관계’로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적 기만이다.
영화 속 모든 여성 캐릭터가 부정적으로만 그려진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쥴과 짐에게 여성은 하룻밤 상대이거나,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상대, 지독한 수다쟁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지고지순한 사람, ‘아름다운 물건’일 뿐이다. 그들이 까트린에게 매혹된 건 그녀가 단일한 이미지로 뭉뚱그려져 타자화된 여성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정해놓은 안전한 영역을 벗어난 여자(팜므 파탈, 요부)는 ‘위험’하다. 그래서 쥴은 애타게 까트린을 욕망했음에도 역시 남자들 간의 우정만 한 게 없다고 뒤늦게 주절거린다. 놀라운 정신승리다.
요컨대, 〈쥴 앤 짐〉은 여성을 타자화한 것을 예술적 성취로 포장해온 오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영화다. 〈쥴 앤 짐〉의 관람을 강력히 권한다. 이 작품이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쥴 앤 짐〉은 남자가 예술을 빌미로 여성의 삶과 욕망을 제멋대로 재단해온 역사를 확인하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다. 갖지 못할 바엔 죽이겠다는 까트린의 태도를 영화가 그려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욕망하여 저항하는 여자’의 계보에 까트린을 추가하여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영화를 재독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쥴 앤 짐〉이 ‘명작’이라면, 오직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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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선이 아닌 연대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4), <미안해요, 리키>(2019)에 이은 영국 북동부 배경 3부작의 마지막 영화다. 기존 무대였던 뉴캐슬에서 더럼의 어느 폐광촌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지역으로 옮겨간 영화는 마을의 유일한 펍 '올드 오크'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과 난민 이주자들 간의 갈등을 다룬다. 켄 로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정적 은퇴를 선언한 만큼 빠른 판단일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영화에서는 전작들보다도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화법이 두드러지며 그와 대조되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주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소란스러운 다툼 소리를 배경으로 흑백 사진이 연속되는 오프닝부터 영화에서 카메라의 존재감이 종종 눈에 띈다. 시리아 난민들이 버스를 타고 와 마을에 내리고 마을 주민들은 이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러던 중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자신들을 찍던 야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몰래 꺼내 마음대로 사진을 찍다가 떨어뜨리면서 카메라는 망가트리고야 만다. 꽤나 강렬한 이 오프닝 씬은 카메라의 기능에 대해 상기시키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목격과 기록의 카메라. 피사체는 촬영자의 시선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담긴다. 오프닝에서 연속된 사진과 다투는 소리를 통해 우리는 야라의 눈에 비치던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야라의 시선에 좀 더 기울어 영화를 보게 된다.
마을의 유일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는 마을 사람 중에서도 난민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펍에 손님으로 와 그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말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나서지는 않는다. 단지 작은 단체 안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같은 것을 챙겨주고 관심 가질 뿐이다. 선한 소시민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일부를 제외하곤 그들 대부분은 난민들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적대시하지만 특별히 그들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을 막거나 크게 나무라지도 않는다.
그랬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난민들을 경계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쉼터였던 올드 오크가 난민들에게도 열리게 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TJ를 비롯해 난민들을 챙겨주는 이들이 탐탁지 않던 이들이었으나 그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TJ가 자신들에게는 빌려주지 않던 펍의 내부 공간을 난민들과 함께하는 행사의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이에 반기를 들고, '올드 오크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것이 마을의 뜨거운 화두가 된다.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 주로 찍던 사회주의 감독이 난민과의 갈등 속에서 또 다른 약자를 차별하는 노동자의 양상을 그려낸 것은 다소 이례적인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난민 집단 간의 이분법 갈등 구조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켄 로치 감독은 비록 차별하고 적대하는 이들일지라도 결국 잘못된 선택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들의 모습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정부의 난민 수용지는 왜 하필 우리 마을이어야 하며, 우리도 살기 힘든데 당장 나와 관련도 없는 난민을 왜 도와야 하는지 불평하는 이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난민 수용에 대해 찬반의 입장이 갈려 토론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는 결국 이들의 입장과 사정까지도 이해하도록 만든다. 보통의 사람이 문제에 부딪힐 때, 그 구조를 따라가며 전체를 파악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내 삶조차 여유가 없어 타인에게 눈 돌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기보다 당장 눈앞의 걸림돌을 비난하는 게 쉽다.
이런 모순은 TJ의 개 마라와 관련된 일화와도 상통한다. 마을 사람 중 누구도, 심지어 TJ까지도 그런 결말이 벌어질 걸 과연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흥분했을 때는 주인조차 통제 불가능한 대형견을 불완전한 목줄 하나 채워 돌아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 이를 보며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더 안전한 방식으로 개를 기르는 것이 견주의 의무는 아니다. 국가의 권력과 체제 아래에서 국민은 상대적 약자로서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상승하는 물가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최저임금, 고용난 등의 최악의 환경에서 약자들은 그들 간 우위를 겨루며 자신보다 취약한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분풀이를 한다. 물론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될 때는, 어느새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방치하다시피 한 그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차별과 혐오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화해의 방법은 '연대'다. 해결책이 당장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연대와 공감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선한 인간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용기를 가지고 함께 연대하며 저항하기.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감독의 전작들도 사회상을 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이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사회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다가오면서도 소위 말하는 치트키 장면은 적은 감이 있다. 당장 앞선 두 영화의 가슴을 울리던 장면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를 충분히 밋밋하게 느낄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누군가에게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회 영화의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를 지킨 켄 로치 감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영화는 그가 마지막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여전히 남아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다시금 되돌아볼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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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 | 처음 보면 오컬트, 끝까지 보면 가족 드라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임 교수직을 노리는 대학교 시간강사 '윤서하'(김현주). 부려먹기만 하고 교수직을 확답하지 않는 담당 교수에게 치이고, 요가 학원 강사인 남편 '재석'(박성훈)의 외도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경찰 전화가 걸려온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의 소유였던 선산이 그녀에게 상속될 예정이라고.
얼떨결에 작은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선산 처리를 고민하는 그녀. 그런 그녀 앞에 불길한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이복동생 '김영호'(류경수)가 갑자기 등장하고, 남편이 총에 맞아 사망하며, 그녀의 아파트 현관문이 닭 피로 도배된 것. 사건을 맡은 담당 경찰 '최성준'(박희순)과 '박상민'(박병은)이 확실한 수사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자, 그녀는 직접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베일에 감춰진 진실은 상상도 못 한 채.
일보전진과 일보후퇴
<부산행>, <반도>, <염력>, 그리고 <정이>. 연상호 감독의 장편 영화를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애와 신파의 존재다. <부산행>만 해도 호불호가 나뉘는 수준이었지만, <염력>과 <반도>를 기점으로는 신파가 극의 개연성과 몰입을 저해한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좀비, 히어로, 디스토피아, SF 등 각 장르의 고유한 재미를 방해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반면에 영화가 아닌 작품이면 위의 비판을 피해 가는 경우가 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에서 연상호 감독은 신파에 기대지 않았다. 신의 심판이라는 초자연적 소재를 내세워 인간의 욕망과 종교의 이면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집중하며 호평받았다.
연상호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은 <선산>은 반복되는 비판에서 벗어나려 한다. 가족애와 신파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오컬트라는 새로운 성공 공식을 앞세웠다. 또 장르물에 신파를 더하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 결과 신파에 기반한 가족 드라마에 오컬트와 스릴러적 요소를 곁들여졌다. 그러나 <선산>의 변화는 제자리걸음이다. 이번에도 장르적 쾌감을 살리지 못한 나머지, 일보 전진이 일보 후퇴에 가려지고 말았다.
현대 사회 속 선산과 가족
제목만 봐도 <선산>은 가족 드라마다. 선산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자연히 일련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주인공이 선산을 물려받고, 그에 반발하는 가족과 외부인이 나타나며, 그 사이에서 숨겨진 가족사가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선산 때문에 추진 못하는 부동산 개발 사업이 껴 있으면 금상첨화다.
<선산>도 마찬가지다. 위의 전개가 모두 들어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선산'이라는 어휘의 특성을 살려 약간의 변주를 주는 데 성공했다. 선산은 사실 나날이 낯설어지는 단어다. 가족 형태의 변화 때문이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1인 가족으로 가족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혈연의 중요성은 낮아진다. 그 과정에서 장례 방식도 바뀌고, 선산에 매장할 일이 줄어들면 단어 자체를 입 밖으로 꺼낼 일도 없어진다.
주인공 윤서하는 이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에게 가족은 큰 의미가 없다. 남편 재석은 외도 중이고, 아버지 윤명호는 딸이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작은아버지 윤명길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하는 작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도 놀라지 않는다. 선산을 상속받는다는 소식을 들어도 선산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누구에게 얼마에 팔아야 할지 궁리할 뿐이다.
진짜 가족을 찾는 여정
<선산>은 윤서하와 180도로 다른 인물을 내세워 선산을 둘러싼 갈등을 부각한다. 그녀의 반대편에는 이복동생 김영호가 위치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졌고, 존재가 지워진 채로 지냈다. 이복 누나가 자기 존재를 전혀 모르고, 경찰조차 그를 선산의 상속자로 고려조차 안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선산에 오히려 더 집착하고, 윤서하를 위협한다. 그에게 선산은 온전한 가족의 일원으로 마침내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선산>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선산을 두고 벌이는 암투를 담아낸 드라마가 아니다. 그보다는 선산을 지렛대 삼아 가족의 공동체적 의미를 고찰하려는 이야기에 가깝다. 가족을 대하는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인 태도의 충돌을 선산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는 두 이복 남매와는 접점이 없는 최성준의 가족 이야기에 꽤 많은 분량이 부여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일에 치여서 가족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가 갑작스레 쓰러져서 죽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했고, 비극의 원인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그 결과 아들은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했고, 아버지는 아들과 의절하며 가족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성준은 윤서하 사건을 수사하면서 변한다. 가족 관계에 완전히 무관심한 윤서하, 이복 누나와 선산에게 집착하는 김영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들과의 관계를 되짚는다.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 관점 사이에서 어떻게 가족 관계를 재건할지, 한번 끊어 버렸던 혈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한다. 이는 윤서하가 종국에 김영호와 연락을 안 한다고 해서 관계를 아예 끊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대사와도 상통하는 모습이다.
내용과 장르의 괴리
이렇게만 보면 <선산>은 가족 드라마로서 흥미로운 작품 같다. 확실한 지향점과 메시지를 갖췄으므로. 반면에 장르적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포스터나 예고편을 보고 키운 기대를 드라마가 배신하기 때문. <선산>은 중반부까지 오컬트 분위기를 유지한다. 김영호가 무언가에 빙의된 건지, 아니면 무당에게 조종당하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삼재 부적, 굿하는 스님의 존재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철저히 숨겼던 윤서하와 김영호의 진짜 관계가 비로소 수면 위에 올라오면서 오컬트 분위기가 일시에 가족 드라마, 더 나아가서는 막장 드라마로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암시나 복선도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선산>이 일반적인 스릴러라면 이는 나름 효과적인 반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산>이 애초에 오컬트 작품으로 포지셔닝했기에 이 반전은 악수로 작용한다. 오컬트 요소를 배제하는 순간 평범한 한국 드라마 중 하나일 뿐이니까. 초자연적 존재의 정체를 헷갈리게 하며 마지막까지 서스펜스를 유지한 <곡성>이나 <잠> 등의 작품과 다른 길을 간 대가를 치르고 만다.
선택과 집중의 부재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만듦새에도 군더더기가 있다. 윤서하가 대학교 시간강사로서 난관에 빠지고, 최성준과 박상민의 갈등을 빚는 플롯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서하를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도록 유도하고, 최성준의 가족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초반부에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활용하면 충분할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이 플롯은 중요도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 중후반부에도 거듭 등장하면서 존재감이 커지고, 그 결과 중심 갈등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더해 설명조 대사도 너무 많다. 보여주기만 해도 되는 순간에 굳이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한다. 자연히 흐름은 순간적으로 끊기고, 극은 늘어진다.
그 결과 윤상호 감독의 일보 전진은 제자리걸음으로 귀결된다. 장르물의 본질적인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함정에 <선산>이 또 한 번 빠져 버렸기 때문. 단순한 신파를 깊이 있는 가족 드라마로 풀어내고, 초자연적 소재라는 성공 공식을 버무리는 변화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Poor 형편없음
오컬트향 1% 첨가한 막장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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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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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당신이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이라면?
어느 날 당신의 삶이 가짜처럼 느껴진다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조명이 떨어지거나 만화 영화처럼 폭우가 당신의 움직임을 따라서 내린다. 수십 년 전 죽는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고, 평범한 사람들이 돌변해서 아버지를 납치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근길에 틀어 둔 라디오에서 당신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중계한다.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지켜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한다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의심스럽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진실과 해결책을 찾을까? 아님 상황을 모르는 척 안정된 삶을 이어가야 할까?
위에 적은 모든 예시는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가 겪은 일이다. ‘트루먼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 모든 순간이 리얼리티쇼로 방영된 남자가 점차 진실을 알게 되는 상황을 다룬다. 1998년 개봉했으며,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 감독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호평과 흥행에 힘입어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트루먼쇼’에서 능청스러운 연기로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 ‘짐 캐리’는 1999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한 편의 리얼리티 쇼처럼 출연진의 이름과 배우와 PD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이후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의 일상과 시청자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쇼에서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연기와 설정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의심스러운 사건이 이어지자 ‘트루먼’은 그가 살고 있는 헤이븐 섬을 떠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헤이븐 섬은 거대한 인공 스튜디오로 시간과 기후가 임의로 조정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조명은 밤하늘의 별을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헤이븐 섬은 잘 관리되어 있지만, 해와 달이 한꺼번에 떠있는 등 기묘한 공간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트루먼’의 노력은 번번이 막힌다. 약 5천대의 카메라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가 떠날 수 없도록 PD ’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는 온갖 방법을 이용한다. 쇼에 큰 집착을 보이는 PD는 달 모양의 방송국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트루먼’을 살핀다. 자신의 사생활은 극도로 노출을 꺼리지만, 트루먼이라는 개인의 삶을 공유하는 일이 다수의 시청자에게 위안을 준다고 믿는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바다에서 보트를 타다가 겪은 사고도 PD가 ‘트루먼’을 막으려고 고의로 만든 상황이다. 그런 방식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가 비행기 표를 구매하러 방문한 여행사 벽엔 비행기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나거나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PD의 지시에 따라 ‘트루먼’에게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건 배우들이다. 부모님, 가장 친한 친구, 아내, 이웃 가릴 것 없이 상황에 맞춰 연기한다. 그들은 쇼가 진짜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직업적으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7살부터 함께 한 친구 ’ 말론(노아 에머리히)’은 ‘트루먼’이 진실에서 멀어지고 의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트루먼쇼’가 위기의 순간에 처할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맡는다. 규칙처럼 간접광고를 위해 6개 묶음 맥주를 들고 ‘트루먼’을 찾아온다. 영화에서 재밌다고 생각한 배경은 ‘말론’과 ‘트루먼’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장소이다. 어두운 밤에 그들은 끊어진 다리 위에서 장난 삼아 골프를 치거나 위태롭게 다리 끝에 걸터앉는다. 거짓말로 얼룩진 그들의 관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와 닮았다.
쇼에서 큰 비중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은 ‘트루먼’의 아내 '메릴 버뱅크(로나 리니)’다. 그녀는 영화 속 대사와 행동으로 짐작컨대, ‘트루먼’을 사랑하기보다 쇼에 출연하며 얻게 될 명성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주로 트루먼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회피하기 일쑤이고, 광고를 처리하기 위해 맥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자주 한다. 트루먼에게 가족의 안정과 평화라는 명목으로 떠나려는 '안전한 집으로 가요' 라며 붙잡는다.
한편으로 ‘트루먼’이 세상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결혼식 사진에서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꼬고 있다. 미국에서 손가락을 꼬는 동작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행운을 빌어주거나 현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장면에서는 후자로 사용되었다. ‘트루먼’은 아내의 손가락을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때, 상처는 얼마나 클까? 배신감과 타인을 향한 불신이 밀려들지 않았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트루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 TV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쇼의 단역배우로 출연했던 ‘실비아(나타샤 맥켈혼)'는 우연히 ‘트루먼’과 마주치고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두 사람은 감시를 피해 함께 짧은 시간을 보내지만, 곧 방송 관계자에게 ‘실비아’가 붙잡혀 이별한다. 이후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비아’는 트루먼쇼 반대운동을 하고 그의 자유를 응원한다.
‘트루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를 지켜보는 시청자도 영화에서 등장한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전 세계 곳곳에서 방영되고 나이, 국적, 성별을 불문하고 열정적인 팬도 있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아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트루먼’의 삶에 한 마디씩 보태고 행동 하나하나에 함께 울고 웃는다. ‘트루먼’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숨어서 지켜보는 구도와 카메라의 검은 테두리가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사용했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더 자주 등장하는데, 관객이 '트루먼쇼'의 시청자 입장이 되도록 유도한다. ‘트루먼쇼’는 인물마다 개성과 존재감이 뚜렷해서 행동이나 역할을 해석하는 즐거움이 있다.
1998년 영화 ‘트루먼쇼’이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영화 속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서’가 아닐까? ‘트루먼’이 ‘헤이븐섬’을 떠나지 못하게 막는 모습에서 안정적인 삶을 이유로 도전을 말리는 주변 사람들이 떠오른다. 관계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실패로 끝날 거라 걱정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말린다. 때론 함께한 세월을 언급하며 ‘너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식의 말을 꺼내기도 한다.
그리고 ‘트루먼쇼’에서 충격적이라고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시청자가 프로그램의 결말과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곳은 뭐하냐고 물으며 채널을 돌리는 부분이다. 시청자를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타인의 시선이라고 해석한다면, 열렬히 응원하거나 인생의 조언을 건네던 사람들도 생각보다 우리에게 무관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헤이븐 섬’을 탈출하려는 ‘트루먼’에게 PD는 리얼리티 쇼라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은 위험하지만, 쇼의 주인공으로 살면 안전하다고 설득한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유명인이 될 거라고 설탕 발린 말로 회유한다. 결국 ‘트루먼’은 거짓이 판치지만 안정적인 삶과 자유롭지만 위험한 세계라는 선택에 놓인다. 만약에 당신이 ‘트루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선택 후 펼쳐질 미래는 어차피 미리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자신의 상징과 같은 대사로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In case I don’t see you,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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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과 경찰보다 기자가 중요한 스릴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코드 아메리칸 신문의 기자 ‘로레타 매클로플린’(키이라 나이틀리). 생활부 소속으로 토스트기 리뷰나 쓰던 그녀는 어느 날 보스턴 일대에서 세 명의 여성이 목 졸려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세 사건 간의 연관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범죄부 소속이라는 아니라는 이유로 '로레타'가 취재를 못하는 사이, 네 번째 희생자가 발견된다. 이에 '로레타'는 베테랑 기자인 '진 콜'(캐리 쿤)의 도움을 받아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고군분투한 두 기자는 마침내 결정적 용의자 '앨버트 데살보' (데이빗 다스트말치안)를 발견해 낸다. 그 순간, 이들은 이 살인 사건이 더 중요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목숨을 건 취재에 돌입한다.
범죄 사건의 영화화
영화가 범죄 사건을 다루는 시점은 다양하다. 가해자의 관점에서 범죄의 앞뒤 맥락을 살피거나,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시점에서 사건을 파헤칠 수도 있다. 또 복수를 다짐하는 피해자의 시선으로 범죄의 잔악성을 고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제각기 다양한 특성과 매력을 지닌 이들의 관점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자칫 잘못하면 작품이 과도하게 선정적이거나 감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범죄 사건의 당사자이거나 밀접하게 엮인 관계자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를 때, 형사나 경찰이 분노하거나 공명심에 사로잡혔을 때, 피해자의 고통을 강조할 때 언제든 선을 넘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디즈니플러스의 신작 <보스턴 교살자>는 흥미롭다. <보스턴 교살자>는 1960년대 보스턴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끔찍한 범죄 실화 사건을 다룬다. ‘보스턴 연쇄살인사건’은 <살인의 추억> 제작 당시 봉준호 감독이 참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연쇄살인범은 홀로 사는 여성을 교살하고, 기괴한 리본 모양의 시그니처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엄청난 공포를 안겼다.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고 미제로 남은 이 사건은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이 형사의 시각으로 1968년에 <보스턴 교살자>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영상화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션>, <에이리언: 커버넌트>,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이번 영화는 동명의 이전 작품과는 다르다. 범죄자도, 경찰도 아닌 기자의 눈으로 살펴보기 때문이다. 영화의 포커스는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두 기자에게 철저히 맞춰져 있다.
안갯속 유일한 내비게이션, 기자
<보스턴 교살자>는 추적극이다. 실존인물인 '로레타'와 '진'은 화면상으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연쇄살인범을 치열하게 뒤쫓는다. 두 저널리스트가 넘어야 할 산은 살인범만이 아니다. 범죄부 소속 기자가 아니었던 '로레타'는 회사 내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 그들이 쓰는 기사에 불만을 품은 경찰의 비난도 거세다. 안전을 위협받는 가족의 원망 섞인 눈초리도 따갑다. 하지만 두 기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취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맷 러스킨 감독은 그 원동력을 저널리스트만의 특징에서 찾는다. 특히 영화는 복잡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명명해야 하는 기자의 임무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이 기자와 함께 사건을 파악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셈이다.
실제로 작중 사건의 실체는 안갯속에 빠져 있다. 일례로 살인범은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 특징에 부합하는 용의자는 여럿이다. 집에 혼자 있는 여성을 노린다는 특징은 같지만, '폴 뎀프시'처럼 나이 든 여성만 노린 용의자도 있고, 젊은 여성만 노린 용의자도 있다. 성폭력을 저지른 전과가 있는 '데살보'도 살인범과 유사한 범행 수법을 지녔다. 그들 모두 아파트 정비공이나 모델 에이전트로 위장해 여성들의 집에 손쉽게 들어가 범죄를 저지른다. 또 '데살보'와 같은 정신 병원에 있었던 다른 용의자도 리본 모양 시그니처를 남기는 범행 패턴을 보여준다. 이 안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걷히지 않는다. 영화는 '데살보'가 마지막 살인이자 13번째 살인의 범인으로 밝혀진 것 외에는 범인이 특정된 바 없다면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범인을 헷갈리게 만든다. 실제 사건 기록을 참고한 세트 디자인, 의상 등을 통해 1960년대 보스턴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리얼리티도 큰 몫을 맡는다.
그렇기에 짙은 안개를 투시할 수 있는 기자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경찰도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할 때 '로레타'와 '진'은 명백한 사실에만 집중하며 조금씩 진실에 다가서는 길을 발견한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소피'의 이웃으로부터 확보한 증언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그들의 노력은 더욱 분명해진다. 살인범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그녀는 신뢰할 수 있고, 또 간과할 수 없는 목격자다. 그런데 경찰은 그녀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목한 범인과 경찰이 지목한 용의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레타'와 '진'은 다르다. 그들은 증언을 토대로 상황을 재검토한다. 다른 용의자가 있거나 단독 범행이 아닐 가능성까지 살피면서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다른 장면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다수의 보스턴 지역 언론은 사건 초기에 범죄자를 '보스턴 유령(phantom)'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로레타'는 그를 '보스턴 교살자(strangler)'라고 명명한다. 그가 목을 졸라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만 건조하게 담는다.
살인범의 정체보다 중요한 것
더 나아가 영화는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자의 역할을 묘사한다. 바로 감시자다. 경찰과 은연중에 협력해 범인을 추적하면서도, 경찰이 제대로 사건을 수사하는지 늘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중 경찰은 연쇄 살인 사건을 미연에 막지 못했다는 비난에 직면한다. 이에 경찰은 유력 용의자인 '데살보'의 자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침내 경찰에게 자백하기로 결심한 '데살보'. 그런데 그의 변호인은 한 가지 조건을 건다. 자백 내용을 법정에서 증거로 활용해서는 안된다는 것. 경찰은 어떻게든 연쇄 살인 사건을 종결하기 위해 변호인의 조건에 동의하고, 그를 살인이 아닌 다른 혐의로 기소하기로 결정한다.
'로레타'는 한 명의 용의자에게 모든 살인 혐의를 넘기고 사건을 종결하는 경찰의 조치에 분노한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데살보'는 갑작스럽게 스타 변호사를 고용한다. 변호인은 그의 자백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려 한다. '데살보'만큼이나 유력한 다른 용의자는 그와 같은 감방에서 모종의 회의를 연다. 이들은 마치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은폐하는 하나의 커넥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로레타'는 사건을 덮으라는 편집장의 지시도 거부한 채 계속해서 취재를 이어나간다.
마침내 '데살보'의 자백 녹음을 구하는 데 성공한 '로레타'는 경찰의 구체적인 사건 조작 정황을 발견한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묘사할 때 '데살보'가 횡설수설하자 경찰은 피해자의 집 구조와 사진을 보여준다. 그 순간 그의 자백은 오염됐고, 남은 자백 내용도 무의미해진다. 살인범의 기억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진위 여부를 알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보스턴 교살자>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저 한 범인만 쫓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한 사회적 문제를 찾아내는 것. 살인 사건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 살인 사건이 가능했던 경찰의 무능함과 구조적 오류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로레타'와 '진'이 함께한 작업의 진짜 가치라고 강조한다.
웰메이드 스릴러의 탄생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두 기자의 노력은 그들 본인도 구조적 차별의 희생양이었기에 더 인상적이다. 여성이 기자가 되는 게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그들은 언론사 안에서도 치열하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극명하게 갈리는 두 주인공의 태도 덕분에 그들의 싸움은 더 흥미롭다. '로레타'는 사내에서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지시가 있으면 편집인과 사주에게 직접 항의할 정도로 불같은 성격을 지졌다. 반면에 연차가 더 많이 쌓인 '진'은 회사 내에서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한다. 기사 밑에 기자 이름 대신 사진을 넣자는 상부의 제안에 '로레타'가 화를 내자 '진'은 회사도 신문을 더 팔아야 한다며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 사진 때문에 '로레타'의 신상이 공개돼 그녀가 위협을 받자, '진'은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상사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이미테이션 게임>, <비긴어게인> 등에 출연한 ‘키이라 나이틀리’와 <나를 찾아줘> 등의 작품에서 호평받은 ‘캐리 쿤’의 열연 덕분에 인상적이다.
사실 <보스턴 교살자>가 다소 정적이고 건조하다고 느껴질 여지도 충분하다.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을 가급적 제외하면서 정확하게 사건을 묘사하려 노력하다 보니 다른 스릴러 영화와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범인이 한 노인을 살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욕조에 물을 받던 노인은 벨소리를 듣고는 손님을 보러 간다. 문을 열자마자 범인은 노인을 공격하고, 살해한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은 그저 소리만 들릴 뿐이다. 카메라는 노인이 만지던 수도꼭지를 계속해서 비춘다. 마침내 집안이 조용해지고, 범인의 손이 나타나 물을 더 세게 틀고 손을 닦으려 하자 그제야 사건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영화가 범죄자의 시선이 아닌 기자의 시선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스턴 교살자>를 마냥 지루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묵직한 스토리텔링과 섬세한 디테일 덕분에 여전히 스릴러 장르다운 긴장감과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화 사건을 저널리즘적 마인드로 풀어낸 대목에서는 의미와 재미를 모두 붙잡으며 극찬을 받은 톰 매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가 순간적으로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
A(Acceptable, 무난함)
기자의 시선이 돋보이는 진중한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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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7시간 시리즈 20분 요약 + 7분 설명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고질라 대 콩ㅣ고질라 킹콩ㅣ고질라 대 킹콩ㅣ몬스터버스ㅣ건데ㅣ
? '고질라 vs 콩 (Godzilla vs. Kong, 2021)' 고질라 대 콩 예고편 분석
그리고 몬스터버스(몬스터 유니버스, Monsterverse) 시리즈 요약 정리
1. "고질라"(2014)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장르: 모험, 액션, SF
감독: 가렛 에드워즈
제작: 존 제시니, 메리 패런트, 토머스 툴
각본: 맥스 보런스틴, 프랭크 대러본트, 데이비드 캘러햄 외
출연진: 에런 테일러존슨, 엘리자베스 올슨, 브라이언 크랜스턴, 와타나베 켄,
샐리 호킨스 외
촬영 기간: 2013년 3월 18일 ~ 2013년 6월
개봉일자: 대한민국 2014년 5월 15일. 미국 2014년 5월 8일
음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러닝 타임: 123분
제작비: 1억 6,0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200,676,069 (최종)
월드 박스오피스: $529,076,069 (최종)
한국 총 관객수: 709,734명 (최종)
2. "콩:스컬 아일랜드(2017)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장르: 모험, 판타지
감독: 조던 복트-로버츠
제작: 존 제시니, 메리 패런트. 토머스 툴
각본: 맥스 보런스틴. 데릭 코널리, 존 개틴스, 댄 길로이
출연진: 톰 히들스턴, 브리 라슨, 사무엘 L. 잭슨, 존 굿맨, 존 C. 라일리 외
촬영 기간: 2015년 10월 19일 ~ 2016년 3월 18일
개봉일자: 대한민국 2017년 3월 8일, 미국 2017년 3월 10일
음악: 헨리 잭맨
러닝 타임: 118분
제작비: 1억 8,5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168,052,812 (최종)
월드 박스오피스: $566,152,812 (최종)
한국 총 관객수: 1,689,717명 (최종)3. "고질라:킹 오브 몬스터(2019)
감독: 마이클 도허티
제작: 메리 패런트, 알렉스 가르시아, 토머스 툴, 존 자시니, 브라이언 로저스
각본: 마이클 도허티, 잭 쉴즈
원안: 맥스 보런스틴, 마이클 도허티, 잭 쉴즈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토호(도호) 영화사
장르: 모험, 액션, SF
출연진: 밀리 바비 브라운, 카일 챈들러 외
촬영 기간: 2017년 6월 19일 ~2017년 9월 27일
개봉일자: 미국 2019년 5월 31일. 대한민국 2019년 5월 29일
음악: 베어 맥크레리
주제곡: 일본 [ALEXANDROS] - Pray
러닝 타임: 132분
제작비: 1억 7,0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109,432,609
월드 박스오피스: $384,232,609
한국 총 관객수: 359,041명 (2019년 7월 4일 기준)
#고질라vs콩 #고질라_대_킹콩 #고질라vs킹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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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웬델&와일드> 공식 티저 예고편
헨리 셀릭(《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코렐라인: 비밀의 문》 감독)과 조던 필(《놉》 《어스》 《겟 아웃》)의 유쾌하고도 짓궂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작품. 과거에 시달리는 고민 많은 청소년 캣(리릭 로스)은 옛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내면의 악마들인 웬델과 와일드(키건마이클 키, 조던 필 연기)를 마주해야 한다. 《웬델 & 와일드》에는 앤젤라 바셋, 제임스 홍, 빙 라메스도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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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립> 30초 예고편 ?
새로 이사 온 미소년 브라이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직감한 7살 소녀 줄리.
솔직하고 용감한 줄리는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브라이스는 그런 줄리가 마냥 부담스럽다.
줄리의 러브빔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를 6년!
브라이스는 줄리에게 받은 달걀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들키고,
화가 난 줄리는 그날부터 브라이스를 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가신 그녀가 사라지자 브라이스는 오히려 전 같지 않게 줄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