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1-11 20:00:57
역사의 결절을 목도하는 눈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리뷰
SYNOPSIS.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
그의 집에 쌓인 작품화되지 못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
기억의 망망대해에서 수집해낸 역사가 강렬하게 들려온다.
잊혀진 피해자들의 표정을 되살려내고 식민과 전쟁으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간다!
POINT.
✔ 이렇게 멋진 기록자, 선구자, 영화인, 작가...를 왜 아무도 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죠? 이제야 박수남 감독을 알게 된 게 너무 아쉬울 만큼, 그냥 인생 자체가 너무 압도적입니다.
✔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정말 귀한 풋티지를 보실 수 있는 작품을 놓치지 마세요
✔ 소수자성과 당사자성, 기억과 기록에 대해 사유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 영화는 11월 13일 수요일 개봉합니다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어두운 화면에서 목소리로 시작한다. 마의태자를 아느냐고 묻고, 딸의 이름도 마의태자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영화 작업을 함께한 박마의 감독의 이름이 독특하더라니. 어떤 마음으로 딸의 이름을 마의라고 지었을까. 망국의 슬픔을 온몸으로 휘감고 사라진 왕자의 이름을. 그러나 마의태자에 관한 좋은 노래가 있다며 서정적으로 부르는 목소리는, 망국의 슬픔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두지 않는다. 마의태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싸매는 다정한 노랫말. 딸의 이름과 그 유래에 맺힌 노랫말. 슬픔의 자리와 그 자리를 혼자 두지 않는 마음. 박수남 감독의 인생처럼 느껴지는 오프닝 시퀀스다.
옛 사진 몇 장 위로 스쳐가는 몇 문장의 증언만으로도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보통 사람이 아님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이 예감은 148분 동안 스크린 위에서 겹겹이 펼쳐지고 풀어진다. 수많은 테스트 영상들, 수많은 인터뷰들, 방에 있었던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풀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10시간 분량 안에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에 관한 기록유산으로 지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귀한 풋티지들 사이사이, 하나하나 기함할 사건들 사이사이, 박수남이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눈
잘나가는 고깃집 사장님으로 살면서 글을 쓰던 박수남 감독은 가게를 팔고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로 수많은 곳을 다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기록한다. 펜으로 담기에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던, 때로는 언어 바깥에서 더 선명하게 전해지던 떨림과 침묵을 담기 위해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마의 감독과 대화하는 장면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젊은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게 설명해 주는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는 박마의 감독의 말 앞에, 박수남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카메라 앞'을 두고 더욱 단호해진다. 박수남 감독은 한 치의 타협도 먹히지 않을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카메라, 내가 영화라고.
오랜 세월 그가 들어온 목소리들은 마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엔딩에서 울려퍼지던 목소리처럼 그를 감싸고, 그는 이제 영화로 현현한다. 1인칭으로서의 카메라, 체화된 카메라. 키노 아이 그 이상의 카메라. 그는 기계적인 카메라의 정확성보다, 발군의 기억력과 소상한 기록의 힘으로 카메라를 역사의 경지에 끌어 올린다. 개인이 겪은 모욕과 수난의 증언들은 모여서 역사가 된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기록한 것들을 결국 거칠게 요약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낯이다. 수탈하고 강제 연행할 때는 '내선일체'지만, 폭력과 피폭의 뒷수습을 할 때는 철저히 남, 아니 투명한 비존재 취급을 하는.
관동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박수남이라는 사람은 작가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차차 기록자로 나아간다. 마침내 이 영화에 이르러서서는, '이 정도면 기록 계의 무형 문화재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는 관객이 생겨난다. 소수자로서 또 당사자로서 예리하게 포착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사람, 스스로가 뚜렷한 사람. 사유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교실로 만들고, 그 교실에서 만난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이 영화에서 내가 배운 건 다음과 같다.
ㅁ 기억도 기록도 힘이 세다
가끔은 이 말 자체가 구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현실 정치와 모략이 판치는 세상에서 기억이 과연 얼마나 힘이 셀 수 있을까. 힘이 셌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구호처럼 맺힌 문장은 아닌가. 그러나 평생 동안 삶으로 기억하고 기록한 사람을 보니 이는 허망한 구호가 아니다. 실제 그의 기록 중에는 역사 교과서의 몇 줄 행방을 가르는 주효한 대목도 있었다. 목격한 일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는 말 앞에서, 기억과 기록은 단순히 내 주장을 뒷받침하고 내 목소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참으로 인간 되기 위함임을 통감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이 다른 서로를 가르는 선은 딱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가?
ㅁ 피의 대립, 국적의 대립이 아닌 역사의 대립이다
그렇기에 이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 대립도 아니고, 어떤 피를 타고났는가에 따라 답이 갈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사이, 역사를 무엇이라 기록하고 싶어하는가의 차이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역사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차마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이다. 박수남 감독은 철저히 후자다. 눈물로 바다가 되도록 울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로 못 다하는 말까지 다 담을 수 있다고 위로하는 사람.
ㅁ 인류애는 한 걸음부터
박수남 감독은 당시 소년이었던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며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민족의 정체성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전혀 다르다. 손을 떼라는 "상부"의 금지령을 듣지 않고, 반국가적 인물이 되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자신으로 살려면 어디에 살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이므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 끝에 소년 이진우가 발견한 것은 인류애다.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하고 옆 사람을 걱정하기 시작할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범죄가 왜 잘못되었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ㅁ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영화에 짧게 지나가지만, 지금도 원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이 있다. 피폭 다시 히로시마에 재일 조선인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인터뷰하는 한 장애인 남성은, 감독과 자신이 차별 받는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 대목은 짧게 지나감에도 내게 너무나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는 방법은 그뿐이지 않을까? 뿌리는 다양성에서 찾아야 한다. 한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만 갖고 살지 않으므로, 어딘가에서는 다수파의 안온한 자리에 서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소수자의 자리에 선다. 이러한 소수자의 감각을 일깨우는 건 다양성이다. 그걸 토대로 우리는 좀더 쉽게 타인의 자리를 가늠해 보고,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이 영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묻는 영화였다. 가끔 이렇게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이나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를 적시에 조우하는 기쁨이 있다. 이런 영화들이 등불처럼 비추어 주는 길이라면,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 영화의 엔딩 신은 내가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의 엔딩 신 중 가장 산뜻하고 말끔했다. 이렇게 마음을 놓게 해주는 엔딩이라니. 박수남 감독은 병으로 점차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지만, 투쟁의 도구이자 기계적 정확도를 가진 '키노 아이'를 넘어서는 눈을 우리에게 빛낸다. 발군의 기억력과 끈덕진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이 더 큰 감각을 가져온다.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이렇게 풀어냈으니, 남은 40시간 분량의 필름 또한 언젠가 또 볼 날을 기대한다.
**혹시 저처럼 지금부터 박수남 감독님의 작품과 궤적을 따라가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둡니다.
[박수남 감독 작품]
▶ <침묵>, 2017 (퍼플레이로 보러 가기 / 편당 결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옥선 씨가 전후 50년, 긴 침묵을 깨고 1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사죄와 개인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 과정을 동행하며 담은 기록입니다.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작품 중 굉장히 시각이 독특한 작품이라며 꼭 추천한다고 하셨어요.
▶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이 터졌을 때, 당연히 그곳에는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강제 연행과 피폭으로 이어진 피해는 컸지만, 전후 보상 대상에서 이들은 빠졌습니다. 이들을 기록한 이 작품은, 일본이 내세우던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슬로건(?)에 균열을 내고, 현실에 변화를 이끌어낼 만큼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 누치가후: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한국어 자막 없음 (영, 일)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미군의 상륙 공격이 임박해오자, 오키나와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굴 등의 은신처에서 일본인에게 받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하거나 서로 목 졸라 살해하는 참극... 생존자들은 일본군의 명령과 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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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의 의미, <곤돌라>
영화 <곤돌라> (바이트 헬머, 2025)의 배경이 되는 곳은 한 산골이다. 이곳에서 곤돌라는 사람, 가축, 물건 등 다양한 것을 실어 나르며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연결한다. 이곳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결고리인 곤돌라는 나아가 곤돌라의 승무원인 ‘이바’와 ‘니노’의 사이를 연결한다. 두 사람은 곤돌라의 위쪽 정류장의 체스판으로 함께 체스를 둔다. 곤돌라가 운행을 해야 위쪽 정류장으로 이동해 말을 옮길 수가 있고, 곤돌라가 운행을 하면 두 정류장의 중간 지점에서 두 대의 곤돌라가 교차하며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태우고 다른 한 사람을 엇갈려 지나가던 영역은 어느새 두 사람이 함께하는 데이트 장소가 된다.
이러한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곤돌라를 소유한 남성이다. 그는 자신의 곤돌라가 이윤의 창출 수단이 아닌 연결과 연대의 장이 되는 것에, 또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이바가 니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하지만 오해를 넘어서며 단단해진 이바와 니노는 그의 사적인 생산수단인 곤돌라를 탈환하여 주민들을 위한 공공재로 탈바꿈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가 곤돌라로 축적한 이익을 바로 그 곤돌라 위에서 흩뿌린다. 그리고 곤돌라의 높고 얇은 줄 위에서 뛰어내려 함께 단단한 땅에 발을 붙이고 걷는다.
영화에 대한 인상은 간단하게 ‘귀엽다’는 말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이 이러한 인상을 만든다. 상황에 맞는 소품과 코스튬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고, 거대한 장치가 곤돌라 레일에 뚝딱 설치된다. 인물들은 말 대신 표정이나 몸짓, 비명, 웃음 등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현실에서 조금 붕 떠 있는 듯한 동시에 포근한 느낌을 주며 작품 전체의 톤을 잡는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덕에 다소 허무맹랑한 장면들도 ‘영화적 허용’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웃음과 감동의 요소가 되어 준다.
대사 없이 표현되는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 변화, 그리고 영화의 전개에 따라 변화하는 곤돌라의 의미 등을 생각하며 보면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곤돌라> 시사회에 참석 후에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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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한 연민이 이어지는 밤
나는 항상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철없는 나를 보듬어 주고, 다양한 선택지를 알려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런 어른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내가 (사회적인) 어른이 된 후였다.
나는 타인의 못남을 어루만지지도, 먼저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 그저 그냥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아직도 나를 돌보기에도 능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타인을 위한 마음을 내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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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슬립, 2023> 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배우상을 수상한 독립영화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길호(최준우)와 기영(김영성)이 서로 부딪히며 함께 살아가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특별할 것 없는 캐릭터에,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새롭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그냥 지나가면서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는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과하지 않은데 따뜻하고, 얕은 것만 같은데 묘하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담배와 식물
처음으로 피식거렸던 장면은 기영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면서 식물들에 물을 주는 씬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별다른 설명 없이도 기영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핑크색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고, 앞에서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물을 챙겨주는 사람이라니.
어머니가 남겨준 식물들이 죽지 않도록 정성껏 돌봐주는 행위 그 어디에도 진한 애정은 보이지 않는다. 잘 자라길 바란다거나, 어느 식물은 어떤 주기로 물을 주어야 한다거나 그런 깊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흙이 마르면 물을 준다. 그게 다다. 그냥 거기에 식물이 있으니까, 할 만큼 한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길호에게 식물에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줄 때는 뿌듯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기영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안 느꼈을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알려주고자 한 것은 물을 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일상에 대한 사소한 부채감과 비슷한 어떤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주는 대상이 꽃에서 길호로 옮겨간 것은 기영의 성장과도 맥락이 이어진다.
#2. 야, 일어나봐
집 앞 평상에 자는 (누가 봐도) 가출 청소년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 굳이 타인과 엮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기영은 그냥 '일어나'라는 말로 길호를 툭툭 건드린다. 그리고 그냥 으레 그렇듯이 잔소리만 하고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기영이 아마 길호에게 1mm의 마음의 틈을 열게 된 건 길호가 기영이 시킨 대로 평상의 쓰레기를 싹 치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말을 따르는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티가 난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어딘가 보살펴 주고 싶은 구석이 보인다.
기영은 본가에서 반찬을 얻어오던 날 길호를 집으로 초대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기영의 본가에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버지를 돌봐주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기영은 꼬박꼬박 아줌마라고 부르면서도 겉옷을 사 입으라며 돈뭉치를 억지로 쥐어주고, 아줌마는 도망치다가도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별다른 부연 설명이 없어도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런 평범한 가족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순간적인 연민이 불쑥 커진 그날 밤부터, 기영은 길호를 조금씩 돌보기 시작한다. 마른 흙에 물을 주듯, 서툴고 천천히 양육이 시작된다.
하지만 당연히 양육은 쉽지 않다. 길호는 기영이 집을 비운 날 친구들에게 휩쓸려 집에 패거리들을 재우고 만다. 이 상황에서 길호가 잘못한 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기영이 혼자 집을 비운 것부터 부주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또 기영도 서투른 어른일 뿐이니까. 아버지의 똥을 열심히 닦고 와보니 또 길호가 똥을 싸놨다. 기영은 남의 똥을 치우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아닌데, 자꾸 주위 사람들이 똥만 싼다.
#3. 머리 위의 랜턴
영화를 보면서 랜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길호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도둑질을 할 때나, 어두운 굴다리를 걸어갈 때 주로 랜턴을 끼고 나오는데, 마치 길호의 시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랜턴이 있으면 눈 바로 앞은 밝게 잘 보인다. 내가 보고자 하는 건 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시야는 막상 가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어딜 봐야 하는지 당최 파악을 할 수는 없다. 길호도 마찬가지다. 길호의 눈앞에 당장 필요한 것은 잘 곳, 먹을 것, 그리고 있을 곳이다. (잘 곳과 있어야 하는 곳은 다르다)
하지만 길호는 랜턴을 벗고 싶어 하는 의지를 가진 아이다. 나쁜 일이란 걸 알고 있고, 벗어나고도 싶지만 랜턴을 벗으면 어둠뿐인 것을 알기에 벗지 못한다. 당장 먹고 자기 위해서라도 랜턴을 껴야만 했다, 기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영은 길호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집도 기영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라면도 있고 TV도 있고, 서로 결혼을 못 할거라는 사소한 악담도 나눈다. 마지막에 길호가 기영을 찾아가면서 친구들과 반대로 걷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고 좋았다. 드디어 길호는 랜턴을 본인이 정말로 가야 하는 길을 찾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길호가 랜턴이 필요 없는 일상을 보내기를 바란다.
#4. 연민의 확장
기영은 길호랑 지내는 기간 동안 직장에서도 한층 밝아진 모습을 보인다. 우는 모습도 못 본 척하며 무관심하던 기영은 어느새 초은(이랑서)과 조금씩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 집에 데려다준다는 전에 없던 다정한 태도도 드러낸다.
참 조그맣던 기영의 세계는 본인도 모르게 길호로 인해 조금씩 넓어지고 밝아진다. 아마 길호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길호를 내쫓은 후 기영이 일하는 모습이 첫 장면과 비슷하게 나오는데, 지게차를 모는 장면은 같은 장면을 두 번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똑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달라 보였다. 원래 사람은 잃어봐야 그게 마음에 있던 거라는 것을 알아챈다고, 사실 예전 일상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영은 많이 허전하고 공허했을 것이 분명하다. 같이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그 호수가 기영과 길호의 마음이라는 건 스크린에서 본 나도 알겠으니까. 던진 돌은 결코 다시 안 던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5. 빅슬립
기영은 길호에게 '불쌍한 척 하지마, 그럼 진짜 불쌍해지는 거야'라며 충고한다. 기영은 스스로를 불쌍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현실에 타협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 적당한 사람. 여러 사회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관객이 보기에도 그는 불쌍하지 않다. 그냥 하루를 적당히 잘 보내고, 할 만큼 하고,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사람.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다. 영화 보는 내내 여자 두 명의 이야기였으면 갈등부터 해결까지 단 하루밖에 안 걸렸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 두 명을 갖다놓으니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초은이 등장해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할 때는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으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과 꽤 높은 수준의 음향,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력이 놀라웠다.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서 몰입도를 끌어낼 수 있는 건 독립영화에서 약간 과장해서 8할은 배우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역 배우가 나온다면 연기력에 대한 기대는 사실 반쯤 내려놓고 보는 편인데, <빅슬립>의 두 배우 모두 캐릭터 그 자체로의 모습이어서 연기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앞으로도 어디에 나온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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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쌍해하지 않으면서 대가 없는 식사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내가 받았었던 약한 연민들의 순간, 그리고 그 찰나들이 지탱해 준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은 잠을 청해봐야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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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부대 | 거짓과 진실 사이 공간에 빠질 시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특종을 놓치지 않기로 유명한 사회부 기자 '임상진'(손석구). 그런 그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폭로하고 싶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제보자의 증언과 나름의 취재 내용을 더해 단독 기사를 출고한 상진. 그러나 다음 날 기사는 오보로 판명되고, 상진은 그를 기레기라고 비난하는 수많은 댓글과 문자에 시달린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잘리면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느 날, 상진 앞에 의문의 제보자 '찻탓캇'(김동휘)이 나타난다. 자기를 온라인 여론 조작 댓글부대 ‘팀알렙’의 멤버라고 소개한 찻탓캇. 그는 상진이 만전 댓글부대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자기와 두 친구 '찡뻤킹'(김성철), '팹택'(홍경)의 여론 조작 수법을 고발하는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제보를 토대로 상진은 댓글부대의 진실을 찾기 위한 취재를 맹렬히 이어간다. 만전에게 복수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콘셉트 그 자체가 되어버린 <댓글부대>
파울 요제프 괴벨스. 나치 독일의 중앙선전국장이자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그는 뛰어난 대중 선동 능력을 갈고닦아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최전선에서 선전했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악행에 앞장선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다른 의미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권력 장악과 정치적 동원에 탁월했던 선전 방식이 재조명받으면서 그의 이름은 프로파간다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졌다.
괴벨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어록도 여럿 전해진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괴벨스가 이러한 말을 했다는 근거나 출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위의 문구는 그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더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한 안국진 감독의 신작 <댓글부대>는 위의 어록을 체화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극 중 캐릭터는 물론 관객마저도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헤매게 만드는 전개와 반전이 인상적이기 때문. 댓글부대의 역할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재와 콘셉트에 지극히 충실한 작품인 셈이다. 이는 <댓글부대>가 일반적인 사회 고발 영화와는 차별화된 존재감을 보여주는 원동력이다.
아는 맛이 맛있는 전반전
<댓글부대>는 영리하다. 관객의 기대를 정확히 파악한 뒤 가지고 놀 줄 안다. 실제로 <댓글부대>의 전반전은 일반적인 사회 고발물의 전개를 따라간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따라 댓글부대의 역사와 흐름을 추적한다. 주인공의 사연을 쌓아 올린 서사 덕분에 이 전반전은 쾌감이 상당하다. 댓글부대의 피해자인 기자가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다는, 뻔하지만 검증된 스토리텔링의 힘을 적극 차용했기 때문.
물론 제보자는 말하고, 기자는 듣는 구도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댓글부대>는 이를 물량공세로 만회한다. ‘팀알렙’ 삼인방이 활동한 에피소드만 4개를 선보인다. 그들은 특종 기사를 가짜뉴스로 호도하고, 담배 신상품 바이럴 마케팅을 진행하고, 인스타그램 테러를 자행한다. 영화는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 화면을 빠르게 넘기며 보여주는 몽타주까지 곁들여 이미 익숙한 여러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경로를 이탈한 후반전
그러나 <댓글부대>는 후반전이 시작되는 순간 급격하게 방향을 꺾는다. 임상진은 끈질긴 취재 끝에 마침내 댓글부대의 진실을 손에 넣는다. 회사에도 복직하고, 1면을 장식하는 특종을 터뜨린다. 그렇게 댓글부대의 실체가 온 세상에 알려지고, 상진의 울분도 말끔하게 해소된다. 이처럼 장르적으로 쾌감이 극대화되고 카타르시사 터져 나오는 바로 그 순간, <댓글부대>는 반전을 선사한다.
영화는 명확한 답과 통쾌한 결말을 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혼란에 빠트린다. 알고 보니 상진이 만전의 댓글부대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는 의심을 퍼트린다. 더 나아가 그가 알아낸 진실이 과연 진실일지 헷갈리게 만든다. 모든 사건이 사실이지만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썼다는 영화 첫 장면의 자막 때문에 이 반전은 더 혼란스럽다. 완전한 거짓보다는 진실이 약간 섞인 거짓이 더 효과적이라는 찡뻤킹과 괴벨스의 말대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 댓글부대의 목적임을 고려하면 이는 콘셉트에 아주 충실한, 메타적인 전개라 할 수 있다. 감독의 전작을 고려하면 사실 놀랍지 않다. 또 코미디 요소가 거의 없는데도 <빅 쇼트>, <바이스>, <돈 룩 업> 같은 애덤 맥케이 감독 작품이 겹쳐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댓글부대>가 다른 사회 고발 영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것만은 분명하다.
부실공사로 쌓은 반전
문제는 뒷심 부족이다. 반전은 그 자체로 분명 인상적이다. 반전을 주면서 의도한 효과도 충분히 느껴지며,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반전이 느닷없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후의 묘사가 반전의 충격을 연착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상진은 다시 한번 진실을 추적한다. 새로운 제보자와 취재원을 찾고, 자료를 보강해 첫 기사를 보강할 후속 기사를 완성한다. 두 번 당하지 않기 위해서 댓글부대의 방식을 차용해 기사를 세상에 퍼트린다. 그런데 상진이 2년 간 기울인 노력이 영화 상으로는 5분 여에 불과하다. 에피소드를 여럿 배치한 중반부와 비교하면 균형이 안 맞는다.
끝내 열린 결말인 점도 감점 요소다. 익숙한 장르적 쾌감도 거부하고, 반전 이후의 과정도 생략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반전 자체도 낯선데 낯섦이 배로, 혼란이 제곱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상업영화로서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라 할 수 있다. 차라리 반전 이후의 내용을 조금 더 보강하거나, 반전을 준 지점에서 과감하게 영화를 매조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 많은 곁가지
이어 더해 <댓글부대>의 전반적인 만듦새도 세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초반부는 욕심이 과하다.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역사도 역으로 추적해 댓글부대의 출발점을 찾는다. 이는 만전이 여론 조작에 유독 심혈을 기울이는 데에 당위성을 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촛불집회까지 거론한 스케일에 비하면 정치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 또 일반 시민도 대기업의 여론 조작 시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눈치채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적 맥락을 굳이 초반부에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다. 후반부의 급전개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댓글부대>는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주인공 임상진은 전형적이다. 대쪽처럼 곧았다가 꺾인, 그러나 재기를 노리는 기자라는 클리셰를 답습했다. 기자의 취재 과정과 습관을 세밀하게 살린 손석구의 연기를 보는 재미만 남을 뿐이다. 김성철, 김동휘, 홍경처럼 이미 대세이거나 유망한 배우들을 캐스팅했지만, 그들을 사건 전달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로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 또한 한계라 할 수 있다.
결국 <댓글부대>는 매력적인 소재와 참신한 아이디어의 결합만 인상적일 뿐, 그 파괴력을 감당할 내실이 부족한 영화처럼 보인다. 나름의 열린 결말이 카타르시스의 부재로 읽히고, 완성도를 떨어뜨린다고 느껴지는 결정적인 이유인 셈이다.
Acceptable 무난함
콘셉트와 물아일체 되어 허우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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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도전한 아름다움
1926년에 벌어진 한 화가의 인생은 삼각형 도형을 동그란 원형 틀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 동그란 원을 만들어내지만, 끝내 그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에이나르 베게너의 실화 기반 영화다. 덴마크와 파리, 독일의 풍경과 20세기 유럽 예술가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니쉬 걸> 스틸컷
상징
<대니쉬 걸>에서 등장하는 바엘레 호수는 에이나르의 자아다. 에이나르(에디 레드메인)가 한스(마티아스 쇼에나에츠)와 함께 깊은 우정을 쌓은 곳이자, 어렸을 때부터 에이나르가 성장한 장소이다. 이에 자신이 살던 고향의 추억으로 에이나르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대부분 나무 5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바일레 호수 작품을 많이 그려낸다. 하지만,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부탁으로 처음 만진 여성 옷으로 깨어난 '릴리'의 자아로 에이나르의 머릿속 바일레 호수는 희미해져 가고, 그는 점점 바일레 호수 작품을 그리지 않는다. 에이나르 자아가 릴리의 자아로 변화되는 과정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상징물이다. 그리고 에이나르가 성전환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한스와 게르다가 함께 바일레 호수에 간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며 처음에 등장한 바일레 호수 장면이 생각나게 하며 수미상관 구조를 지닌다. 결국, 이 영화는 에이나르를 위한 영화라는 사실을 정의한다.
연기
에이나르를 연기한 배우 에디 레드메인의 눈빛 연기는 에이나르 자아와 릴리의 자아를 모두 표현한 눈빛 연기다. <대니쉬 걸>에서 에디 레드메인의 눈빛 연기는 바일레 호수와 같이 평온하면서 여자가 되고픈 열망과 섞여 강렬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에이나르가 행동하는 여성스러워 보이는 손짓과 표현들은 그가 얼마나 여자가 되고픈지 간절함이 느껴온다. 러닝타임이 지나며 점점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에이나르 그 자체를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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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세계로 뻗어나가는 k-contents! 넷플릭스 <발레리나> 글로벌 흥행중입니다!
홍상수 김민희 우리의 하루 오는 19일 개봉
<우리의 하루>가 19일 국내에서 개봉합니다. 홍상수의 서른 번째 장편 영화로, 김민희가 제작실장과 주연을 맡았다고 합니다. 은퇴한 배우 ‘상원’과 70대 시인 ‘의주’에게 각각 방문객이 찾아오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보여주는 줄거리로 올해 76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감서독 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전종서 발레리나 89개국 top10
이충현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가 글로벌 TOP10 영화 부문 1위에 등극했습니다.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영화(비영어) 부문 1위 기록, 대한민국을 포함한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대만 등 89 개국 TOP 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범죄도시3 시체스 영화제 ‘포커스 아시아 최우수 작품상’
액션 영화 <범죄도시 3>가 제56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 부문 중 '포커스 아시아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범죄도시 3>은 지난 5월 국내 개봉 이후 천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올해 나온 작품 중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됐습니다.
전두환 된 황정민 <서울의 봄> 11월 22일 공개
<서울의 봄>이 다음 달 공개됩니다. 이 작품은 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황정민, 정우성, 이성민, 박해준, 김성균 등 출연을 확정했습니다. 믿고 보는 배우진과 <아수라>를 만든 김성수 감독이 만나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탈 할리우드 중국
미국과 함께 세계 최대 영화시장을 다투고 있는 중국이 급격하게 할리우드 손절에 나섰습니다. 오는 20일 전 세계에서 개봉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신작 <플라워 킬링 문>이 중국 개봉이 확정됐었지만 배급사 사정이라는 설명과 함께 중국 본토 개봉이 전면 취소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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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상한 퀴어 로맨스'로 사랑의 조건을 질문하다
7★/10★
1972년 독일 쾰른.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화감독 피터가 귀찮은 듯 침대에서 일어난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새로운 영화의 제작이 결정되었는데도 그렇다. 곧 그 이유가 밝혀진다. 피터의 영화로 데뷔한 후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가 된 친구 시도니와 대화하며, 피터는 얼마 전 동성 애인과 헤어진 후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예술성에 심취하여 세상의 모든 속물을 비웃는 피터는 자신의 사랑 역시 영화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피터는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 상태다.
시도니는 그런 피터에게 호주에서 온 배우 아미르를 소개한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잘 풀리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건너온 아미르는 단숨에 피터를 사로잡는다. 복잡한 사연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 무엇보다 아름다운 육체와 매혹적인 얼굴. 아미르는 피터의 외로움을 달래줄 최적의 인물로 보인다.
피터는 곧바로 작업을 건다. 물론, ‘작업’은 제삼자의 용어다. 피터는 언제나 사랑에 진심이기에 그가 자기감정을 ‘작업’과 같은 경박한 언어로 부를 일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배우 지망생에게 끈적한 눈빛을 보내며 ‘너는 재능이 있어. 내가 꽃피워줄게’라고 말한다면, 이건 사랑이 아닌 거래 제안에 가깝다. 나의 영향력과 너의 매력을 교환하자는 거래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진심’인 피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과 아미르가 그 모든 걸 초월해 진정한 사랑에 다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은 곧 연인이 된다. 하지만 피터 마음대로 되는 건 여기까지다. 아미르는 영리하고 영악하다. 자신과 피터의 관계가 사랑의 외피를 두른 거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곁에 있어 달라는 피터의 구걸에 가까운 친밀성 요구에 적당히 거리를 두며 늘 피터를 불안하게 한다. 피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미르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매번 불평하면서도 아미르를 떠날 수는 없다. 10대 청년마냥 사랑의 열병에 몸과 마음이 잔뜩 달은 피터가 아미르에게 완벽히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피터 본 칸트〉는 사랑에 관한 성찰과 질문을 던진다. 먼저 두 사람이 마주한 조건을 보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나이 든 남자와 매력 자본을 지닌 젊은 여자의 이성애 관계는 젠더에 따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형태다. 이러한 교환 관계는 공정하지 않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돈과 명예를 얻기가 쉽지만, 여성이 가진 자원(매력 자본)은 그 반대여서다. 교환하는 자원의 불균등한 가치와 지속성으로 인해, 남자는 여자의 매력 자본을 양껏 소진시킨 후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러 떠난다. 때문에 사랑의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대개 여성이다.* 더 젊고 예쁜 여성이 나타나 자기 자리를 뺏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 본 칸트〉에서는 반대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피터가 대개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몫이었던 비련을 떠맡는다. 퀴어적 비틀기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중년의 배 나온 백인이자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상실의 우울감에 젖어 손에 술잔을 들고 슬픈 음악에 맞춰 홀로 느릿느릿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피터는 아미르와 자기 사이에 놓인 관계의 조건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피터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피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종종 일깨워줌으로써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풍자의 재미가 생겨난다. 상대를 권력관계에 따른 조건의 교환물로만 ‘소유’하고자 하면서도 이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무능한 존재/관념에 대한 풍자 말이다. 영원히 사랑과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고자 하는 피터는 끝내 자신의 사랑 관념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하여 권력관계에 기인한 친밀성 교환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고 딱한 사람의 표상으로 박제된다. 폭주 후 엄마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으며 잠자는 피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유아기적 퇴행이다. 우리 중 몇이나 여기서 자유로울까?
친밀성을 물질과 별개인 ‘순수한 것’으로 보는 통념은 경계해야 한다. 현실에서 친밀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자원의 교환을 ‘사랑’이라 부르는 형태 또한 경계해야 마땅하다. 〈피터 본 칸트〉는 평등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를 비튼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여성의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렬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남성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구조적으로 사랑에서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여성은 개인의 매력으로만 이 구도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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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동안 유럽 대형구단주 12개팀이 유럽축구연맹과 프리미어리그에 대항해 수퍼리그를 결성하려다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기까지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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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사람, 나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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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뤼팽 파트 2> 공식 예고편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내몬 펠레그리니.
그를 향해 복수를 시작했던 아산이 또다시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역전을 위한 계획, 그리고 목숨을 건 트릭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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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히어> 메인 예고편
인생이라는 대단한 모험 그 모든 순간은 여기서✨ [히어] 메인 예고편 공개📸 2025년 2월 메가박스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