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1-05 23:23:31
빈 가지 위에 남은 두터운 온기
영화 <룸 넥스트 도어>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스스로 가지를 끊어내는 잎새, 마사.
- 마사를 통해 죽음을 알아가는 잉그리드
- 잉그리드가 남긴 온기
- 엔딩 결말 해석
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 2024)
빈 가지 위에 남은 두터운 온기
개봉일 : 2024.10.23.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07분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존 터투로, 알렉산드로 니볼라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는 친구를 통해 젊은 시절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마사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젊은 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사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젊은 시절엔 주로 사랑, 예술을 향한 도발적이고 뜨거운 욕망과 파격적인 여성의 삶을 그리는 감독이었다.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욕망, 삶의 뿌리가 되는 어머니와 예술, 고통으로 이야기의 범위를 넓고 깊게 확장해왔다. 이젠 노년의 나이가 된 그가 만든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당함과 남성 권력이 넘치는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가는 한 여성과 그의 곁을 지킨 따스한 여성에게 바치는 헌시이기도 하다.
이별,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삶의 불씨를 찾아냈던 전작들에 비해 <룸 넥스트 도어>는 강렬한 붉은빛과 치열함을 조금 덜어낸 미적지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영화의 끝에서 고요하게 마지막을 담아내고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눈은 여느 때보다 영별하고 다정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스로 가지를 끊어내는 잎새, 마사
의학의 발전, 안정된 사회 등의 이유로 기대수명과 평균 수명 모두 80세가 넘어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노화와 죽음을 피해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직 정확히 정의되진 않았지만 우리의 몸은 보통 25세~30세쯤이 되면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자라나는 건 길어야 30년, 늙어가는 건 50년. 게다가 낡은 몸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버릴 수도 없다니. 살아간다는 건 참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다.
마사는 이 부당함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환자에게 스스로 죽을 권리를 주지 않고 심장 또한 주인의 마음에 맞춰 멈춰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사가 죽기보단 병과 싸워 이겨내길 최선을 다하길 바라고 그의 심장은 지나치게 열심히 뛰고 있다. 마사는 암 환자에겐 ‘암과 싸워 이기면 대단한 것, 지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회의 시선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과 튼튼한 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삶을 마감할 계획을 세운다.
마사는 열려있던 빨간 문을 닫은 후 초록 선베드에 누운 채 스스로 삶을 마무리한다. 그는 가지에서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는 시든 잎새가 되는 것 대신 스스로 몸을 털며 가지를 벗어나는 생생한 잎새가 되길 선택한다. 마사는 원색인 노란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생을 마무리한다. 그 어떤 색을 섞어도 흉내 낼 수 없는, 더 분해하려 해도 분해되지 않는 고유한 샛노란 색의 옷을 입고 말이다. 이 노란색 옷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마사의 확고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평생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전쟁에 뛰어들며 치열하게 살아온 여성 마사는 투병이라는 전쟁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병이 할 일을 빼앗으며 끝내 승리를 거머쥔다.
마사를 통해 죽음을 알아가는 잉그리드
처음 카메라에 담긴 마사의 얼굴엔 밝은 빛과 그늘이 반반 공존하고 있다. 마사를 만나러 온 잉그리드는 햇빛 반, 그늘 반으로 구성된 병원 로비로 들어오고 직원의 안내를 따라 그늘진 복도 방향으로 걸어간다. 항상 인생의 밝은 면. ‘삶’만을 생각하며 살던 잉그리드는 그늘 진 복도의 끝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마사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지금껏 미지의 영역이었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기도 하다.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이인 마사와 집 밖에서 자라나는 푸른 풀이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종군 기자로 일하며 수많은 죽음을 봐온 마사와 다르게 지금껏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없는 잉그리드는 여전히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싶어 한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함께 숲속 집에 머물며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기대한다. 마사가 삶이라는 빨간 문을 스스로 닫을 준비를 하는 동안 잉그리드는 보색(반대색)인 녹색 스탠드. 즉 죽음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며 죽음이 만든 그늘을 두려워하고 내일도 우리가 살아남길 바란다.
하지만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오고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후 경찰 조사를 마치고 마사의 딸 미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잉그리드는 2층에 올라간다. 삶만을 생각했던 자신이 머물던 1층이 아닌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했던 마사가 머물던 2층에. 그리고 그곳에 앉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죽음과 마사를 생각한다.
다음 날 잉그리드는 미셸과 함께 선베드에 누워 마사가 죽음을 결심하며 읊었던 [죽은 사람들]의 구절을 변주하여 읊는다. “눈이 내린다.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그는 열려있는 문 너머와 마사와 똑닮은 젊은 생명인 미셸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자신도 언젠가 마사처럼 죽음에 가까워질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함께 고독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마음
죽음을 앞둔 마사는 고독하다. 치료를 중단한다고 했을 때 미셸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무심한 반응을 보였고 남편이었던 프레드는 미셸이 어릴 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친구들뿐이다. 그래서 마사는 친구들에게 ‘죽음의 순간을 함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자주 왕래했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남에 가까웠던 잉그리드만이 마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잉그리드는 왜 자신이 마사의 부탁을 수락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숲 속집에 머물면서도 매일 마사가 죽지 않길 바랐고 생판 모르는 트레이너 앞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왜 부탁을 들어주었냐는 데이미언의 질문에 그럴싸한 답변을 하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마사와 자신이 ‘죽음을 함께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잉그리드는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마사의 손을 잡고 그의 옆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 마사는 옆자리에 누운 잉그리드의 기척을 느끼며 슬쩍 웃어 보인다.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의 고독을 함께 바라보고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이 남기는 온기는 가히 두텁고 따뜻하다.
Relative contents
-
- 타이틀 곡 없는 네 번째 디스토피아 앨범처럼
<러브, 데스 + 로봇> 시리즈는 넷플릭스에 간헐적으로 발매하는 컴필레이션 앨범과도 같다. 사랑, 죽음 그리고 로봇(테크놀로지)이란 세 가지 주제를 갖고 다양한 감독이 만들어낸 이 작품들을 보고 듣는 재미는 그 자체로 쏠쏠하다. 이런 의미에서 <블랙 미러> 시리즈와 함께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사하는 <러브, 데스 + 로봇> 시즌4를 향한 기대감은 컸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아쉬움도 큰 법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 실황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CAN'T STOP>이나 <미지와의 조우>의 매운맛 버전처럼 느껴진 <미니와의 조우>, 독특한 색채와 화풍을 선보인 <400 보이즈> <지크는 어떻게 종교를 갖게 되었나> <기어갈 수 있으니>, 고퀄리티의 수려한 그래픽으로 구현한 <스파이더 로즈> <티라노사우르스의 비명>, 그리고 블랙코미디 스타일 짙었던 <또 다른 커다란 것> <골고다> <똑똑한 가전제품 멍청한 주인> 등 제목에 기인한 주제로 탄생한 10편의 이야기들은 완성도를 떠나 각기 다른 개성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전 작품들에서 봤던 기시감은 벗어나지 못했다. 다수의 작품은 이전 시리즈에서 본 스타일과 세계관, 또는 콘셉트와 겹치면서 신선함은 떨어졌고, 일보 후퇴한 측면도 있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생길 수밖에 없는 거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팬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건 시즌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부재하다는 것. 시즌1에서는 <굿 헌팅> 시즌3에서는 <히바로>를 꼽을 수 있는데, 이번 시즌에는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폭망했던 시즌2가 생각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4를 계속 볼 수 있었던 건 실존적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시리즈의 중점을 어떻게든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개성은 다르지만, 다른 존재(로봇, 동물, 로봇, 외계인, 악마 등)를 통해 인간이 가진 나약함과 이기심, 배타성 등을 들춰내고, 반성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로봇은 물론, 고양이, 돌고래,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 타락한 천사 등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곧바로 객관화된다. 우리도 지구 안에서는 작은 개체일 뿐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현 인류의 혼란과 불안을 각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로봇에게 의존하면서 점점 멍청해지는 인간, 인간성 말살 상황에서 실존에 대한 고민, 전쟁, 종말 등의 소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중심마저 흔들렸다면 제작을 맡은 팀 밀러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데이빗 핀처 감독이 미웠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시즌4를 보면 이전 시즌에서 봤던 좋은 작품을 찾아볼 것 같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한 이들이라면 시즌 1부터 정주행할 수도 있다. 왜 넷플릭스 구독자들이 이 시리즈를 기다렸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때문.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시즌 5를 기다린다. 왠지 짝수 시즌보다 홀수 시즌의 완성도가 좋다는 가설이 세워졌다고나 할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 CAN'T STOP이나 들어야겠다.
개인 추천 에피소드 3| <지크는 어떻게 종교를 갖게 되었나>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군이 깨운 타락천사와 사투를 벌이는 미 공군들의 이야기.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피칠갑 고어 액션과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모습은 박진감 넘치게 연출된다. 특히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액션 시퀀스와 이를 구현하는 작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에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과 종교, 믿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은 힘든 상황 속에 놓인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한다. 참고로 해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연출은 시즌 3 <킬 팀 킬>의 디에고 포랄이 맡았다.
| <티라노사우루스의 비명>시각적으로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 경기장, 검투사, 공룡 등이 등장하는 작품인 만큼 호쾌하고도 잔인한 액션이 볼거리. 액션보다 잔인한 건 검투사들과 공룡의 죽음을 유희로 즐기는 군주와 상류 지배층들의 모습이다. 결국 폭군을 향한 피지배층과 동물(또는 자연)의 복수가 벌어진다. 극 중 자연을 무참히 짓밟은 인간, 유색인종을 노예로 부려 먹은 백인들의 추악한 과거 등을 잘 녹인 이야기. 다만 세계관의 설명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출은 팀 밀러가 맡았다.
| <스파이더 로즈>
브루스 스털링의 동명 단편을 영상화한 단편. <쿵푸팬더>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니퍼 여 넬슨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남편을 떠나보낸 후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여성, 외계 애완동물, 그리고 복수라는 주제를 잘 융합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면서 감정이 메말라갔던 스파이더 로즈와 귀여운 애완동물로 그 공허를 채우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여기에 SF 장르에 걸맞은 우주 전쟁과 액션 장면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도 있다. 반전의 힌트는 초반에 나오니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타이틀 곡 없는 네 번째 디스토피아 앨범
-
- [JIMFF 인터뷰] “이런 영화제, 전 세계에 또 있을까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동준 집행위원장 인터뷰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동준 집행위원장은 1994년 ‘구미호’의 영화음악으로 데뷔해, 올해로 영화 인생 30주년을 맞았다. 지금껏 ‘은행나무 침대’, ‘초록 물고기’, ‘각설탕’,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탄생’, ‘1947 보스톤’까지 꾸준히 영화음악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동준 위원장은 제17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제35회 대종상영화제 음악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3년 제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제천영화음악상을 받은 바 있다. 작년부터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영화제가 한창인 7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이동준 집행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로 영화인생 3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징그러워요. 30년 됐다고 하니까. (웃음) 본의 아니게 상징성을 가진 해여서 돌아보니 ‘어라? 얼추 그렇게 됐네’ 했죠. 징그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두 마음이 공존하죠.
영화 음악 꿈꾸기 시작한 계기가 있는지요.
-어린 시절 영향이 크다고 봐요. 정확한 년도는 기억은 안 나는데 ‘벤허’라는 영화를 봤어요. 영화에 압도되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음악적인 느낌이 제 감성에 새겨진 거죠. 유독 영화음악과 클래식을 좋아했어요. 음악가라는 방향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는데 사춘기 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일어났어요. 록 밴드도 했고요. 어렸을 때 엄마와 이모 따라다니면서 다닌 극장의 추억이 유난히 강렬했던 것 같아요. 그런 잔향이 제 미래를 결정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 같아요.
6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영화제와 마찬가지로 20주년을 맞은 ‘태극기 휘날리며’ 필름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공연 후 눈물을 보이셨는데요.
주책이죠. 자기가 만든 거에 자기가 뻑 가는 거. (웃음) 제 역사와 삶이 많이 응축된 눈물이었어요. 리허설할 때 되게 좋겠다는 확신은 들었어요. 장동건 배우도 그렇고 강제규 감독도 그렇고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걸 돌아봤죠. 그렇게 각자의 시선이 어우러져 수십 가지 감정이 올라왔어요. 감사함, 스스로에 대한 고마움, 미래의 도전에 대한 용기. 많은 감정이 교차하더라고요. 조명 활용 등에서 필름 콘서트의 정체성이 잘 전달되고, 퍼포먼스도 전달이 잘돼서 놀라기도 했어요.
예술인에게 도전, 초월은 평생의 과제
제천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영화 경험 고민 중
작년 19회 영화제 슬로건은 ‘Da Capo(다 카포)’였고, 이번 영화제 슬로건은 ‘Superascendo(수페라스켄도)’입니다. 각각 ‘처음으로 돌아가다’, ‘초월하다’란 뜻이지요.
처음 집행위원장하면서는 슬로건 안 하려고 했어요. 굳이 해야 되나 싶었는데 홍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필요하다 그래서 했죠. 그래서 작년에는 영화제의 20대를 앞두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되살리자는 의도에서 음악용어인 다 카포를 썼죠. 20회인 올해에는 도전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걸 고민했죠. 제가 이름 짓기를, 라틴어 찾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뒤지다가 초월하다, 도전하다 이 말을 찾았죠. 슬로건을 정하니까 포스터 방향성도 도전적인 게 나왔어요. 초월하는 느낌으로요. 예술인들에게는 이런 도전, 초월의 방향이 평생 있지 않아야 하나 싶어요.
이전에 하이테크를 지향하는 영화제를 고민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영화와 멀티미디어가 공존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관이 제천에 최초로 생긴다면 그 자체로 랜드마크가 될 수 있겠죠. 콘서트도 하고요.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요. 영화를 포함해 음악과 다채로운 미디어 콘텐츠를 묶어서 재밌게 만들 수 있겠다 싶어요. 욕심은 있는데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죠. 그런 공간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어요.
20주년을 맞아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작품을 다시금 관객에게 선보이는 ‘제천 리와인드’ 섹션을 기획하셨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 많은데 다 담지를 못했어요.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이에요.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아요. 너무 신선했어요. 올해 개막작 ‘아바: 더 레전드’도 그렇고요. 올해에도 좋은 영화가 참 많아요. 음악영화제로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작년보다는 더 나았다 싶어요. 프로그래머가 일을 너무 잘하신 덕분이겠죠.
어제 진행된 팬과의 만남 행사도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원장님뿐 아니라 심사위원, 영화제를 방문한 셀럽분들이 참석해주셨고요.
영화제에 셀럽이 많이 오는 게 대중의 영화제 선호도를 결정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역으로 셀럽이 영화제에 어떤 명분으로 올까 싶었죠. 작품이 노미네이트되면 오는데, 그냥 축하해주러 오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우리도 셀럽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숙제가 늘 있었는데 오히려 심사위원이라는 명분으로 셀럽분들이 오시면 좋을 것 같다 싶었죠. 그런데 그 귀한 분들을 모시고 심사만 시키기는 아쉽잖아요. 그런 분들이 제천에 왔다고 시민들께 알리며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픈 스테이지로 토크 진행했어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 없어
영화음악을 꿈꾼다면 진지하게 질문해봐야
감독님께서는 영화음악뿐 아니라, 드라마와 뮤지컬, 게임 심지어는 아시아축구연맹 공식 주제가까지 작곡하셨습니다.
음악적으로 욕심이 많아요.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두려움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계속 새로운 거 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어요. 제 음악적 스펙트럼을 규정하지 않고 확장하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음악가 중 그런 성향의 음악가가 많아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 영역을 찾아야 해요. 더 많은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어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아닌 아티스트 이동준의 행보와 계획도 궁금합니다.
영화제 개막식 공연에 작년부터 늘 제가 만든 곡을 직접 연주했어요. 내년에도 할 거예요. 이 자체가 영화제의 정체성일 수 있거든요. 집행위원장이 직접 작곡한 곡을 개막식에서 연주하는 영화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할 테니까요. 그리고 개인 솔로 앨범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 지점이 앞으로의 숙제죠. 올해 개인 공연도 예정되어 있어요.
영화음악을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해주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신지요.
내가 왜 음악을 좋아하는지를 질문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중간에 포기하게 돼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냥 좋은 것 같아서요’라면 안 했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진지하게 접근해야 해요. 잘 모르는데 어떻게 진지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미래에 자기 인생을 던질 일인데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죠. 내 인생을 바칠 만하다는 자기 확신이 있을 때 해야 해요. 구체적으로 작곡하고 들어보고 대화해보고 부딪혀보고 평가도 받으면서요. 영화음악 말고도 다른 음악이 있는데 영화음악을 하려면 뭐가 필요할지를 따져보고 찾아봐야죠. 출발점에서 그런 진정성을 갖는 게 어떤 음악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체념’ 말고 ‘초월’하자
관객분들에게 받은 선물을 돌려드리고 싶다
메가박스 제천과 2022년부터 함께한 CGV 제천이 모두 작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상영관 확보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듯합니다.
영화관 하나 건립하고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CGV 상황은 올 초 정도에 어느 정도 인지가 됐고 시나 저희는 여러 방법을 찾았죠. 영화제 기간만이라도 대관하는 방법을 고민했고요. 시에서 사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영화관이 있다고 해도 유지할 수 있는 플랜이 없다면 반복될 문제잖아요. 답은 계속 구해야겠지만 ‘이런 영화관이 있어?’ 할 정도의 도전적인 영화관을 꿈꾸지 않으면 그냥 기존 영화관처럼 될 거예요. 영화관의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죠. 영화 프로그램 자체도 다채롭게 하고, 영화관 자체가 복합 예술 공간으로 나아가는 방향도 고민해야죠. 제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관을 계속 생각 중이에요.
최근 재정 지원 문제로 여러 영화제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고, 한국 영화 역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화제는 돈 많이 쓰면 잘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소박한 영화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돈 줄었다’ 이런 거는 초월했으면 좋겠어요. 체념이 아닌 초월요. 제천에 맞는 영화제를 생각한다면 큰 예산 안 들이더라도 색다르게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부분과 영화제의 가치에 대한 것들을 고루 고민해야죠.
마지막으로 영화제에 참석한 관객과 관계자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제가 20대가 되기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와주신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께 너무 감사해요. 20회에 대한 고마움이 앞으로 또 10년 후까지 이어질 테고요. 영광스럽게도 20회를 맞이했는데 큰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그리고 그 선물을 다 나누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미래의 선물 보따리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박해민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문숙
-
- 뱀의 부활. 다시 한번 요동칠 준비를 마친 전반부
지옥 시즌2 (Hellbound 2, 2024)
뱀의 부활. 다시 한번 요동칠 준비를 마친 전반부
개봉일 : 2024.10.25. (NETFLIX 공개 예정)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감독 : 연상호
출연 : 김현주, 김성철, 김신록, 임성재, 문소리, 문근영
개인적인 평점 : 3.5 / 5
*본 리뷰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지옥 시즌 2> 1-3회의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지옥 시즌 1>은 지옥사자의 심판이라는 초자연적인 재해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공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리즈였다. 20년 전 고지를 받은 정진수 회장은 자신이 느낀 절망, 두려움을 다른 이들에게도 그대로 선사하기 위해 재해와 공포를 엮은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새진리회를 조직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두려움 앞에 바짝 엎드리고 순응하거나, 또는 저항하기도 하며 각자의 지옥을 살아간다.
시즌 1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지옥 시즌 2>는 앞서 쌓아둔 세계관에 누름돌을 올려 만든 더욱 밀도감 있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세상엔 어느 때보다 다양한 믿음과 종교 단체들이 넘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두 공포가 팽배한 지옥을 살고 있다. 이런 불안한 세상 속에서 되살아난 정진수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던 뱀처럼 간악한 혀를 뽐내며 다시 세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리고 정진수가 없는 사이에 세력을 늘린 화살촉,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새진리회. 이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소도까지. 각자의 교리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들이 동시에 충돌하기 시작하며 세상은 전에 없던 혼란으로 빠져든다.
1-3편만 감상한 시점이라 ‘지옥 시즌 2는 이렇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이 시점에서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거 칼을 갈고 나왔구나.’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김성철 배우의 설득력, 이전보다 커진 스케일과 액션이다.
앞서 누군가 연기했던 인물을 이어가야 한다는 큰 부담감을 지고 나온 김성철 배우는 초장부터 눈을 번뜩이며 극 전반에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내리찍는다. 그리고 연한 눈물 자국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오묘한 설득력을 싣고는 천천히 극을 장악해간다. 김성철 배우의 연기를 보고도 그가 정진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교적 일상적인 공간들이 많이 등장했던 시즌 1에 비해 시즌 2는 화살촉 집회 현장, 소도의 새로운 본부 같은 비일상적이고 재밌는 공간들을 공개하며 세계관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활짝 열어준다. 그리고 각 단체들이 세력을 키운 만큼 이들이 부딪히는 액션신 또한 이전보다 훨씬 본격적이고 역동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의 최근작인 <기생수: 더 그레이>를 보며 액션 연출이 훅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옥 시즌 2>에서도 그 느낌을 한 번 더 받았다. 액션이 주가 되는 시리즈는 아니라 큰 액션신을 반복해서 보여주진 않지만 시선을 끌기엔 충분한 정도다.
- 아래 내용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有
신의 영역에서 사람의 영역으로
다시 한번 판을 뒤집을 정진수의 부활시즌 1이 지옥사자의 심판이라는 신의 영역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사람의 영역 안에서 신의 힘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이들의 싸움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지옥사자의 심판’이라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누가 더 먼저 상대의 입을 막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 이런 능력이 더 중요해진 세상이다. 각 단체들은 심판과 공포를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하고 이용하며 새로운 교리를 주장한다. 송소현, 배영재의 죽음은 아름다운 부모의 희생이 아닌 신에게 몸을 내던진 속죄 행위로 해석되고 죽어 마땅했던 죄인은 단숨에 단체를 대표할 캐릭터로 세탁된다.
세상에 가득 찬 모순은 모두를 지옥으로 이끈다. 개인이 개인의 죄를 묻고 진실을 모르는 자가 진실을 찾았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올바른 길을 지키려던 단체인 소도 내부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고 정진수 회장을 뿌리로 둔 두 단체 새진리회, 화살촉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한다.
아비규환이 된 세상, 구불구불한 뱀 같은 산길의 끝에서 정진수가 부활한다. 화살촉에 빠진 아내가 죽은 후 소도의 일원이 된 천세형은 3달 동안 정진수를 기다리다 마침내 그를 마주한다. 부활 후 산길을 헤매던 정진수는 천세형의 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아래서 그의 절을 받는다. 마치 신성한 존재가 탄생한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 이때 천세형은 정진수를 속이기 위해 절을 했지만 전반부가 끝나갈 때쯤엔 정진수의 혀에 속아 진심으로 그를 자신의 신으로 받들게 된다.
전 시즌에서 유일하게 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추앙받던 정진수가 부활했다는 건 이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판을 한 번에 뒤집을만한 사건이 생겼다는 뜻이다.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여유롭게 “어쩌면 지금이 이 세상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던 그의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들어있을지, 그의 계획이 앞으로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기대된다.
과연 이 기대감을 충족시킬만한 설득력 있는 후반부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빵빵하게 들어간 바람을 훅 빼버리는 난장판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
-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곤돌라 (Gondola, 2025)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개봉일 : 2025.04.2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82분
감독 : 바이트 헬머
출연 : 니노 소셀리아, 마틸드 이르만
조지아의 깊은 산맥, 곤돌라 두 대가 푸릇한 산맥 위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세월을 그대로 품은 거대한 바퀴가 일을 시작하면 케이블에 매달린 곤돌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곤돌라는 일정한 속도와 궤적을 유지하며 시작점과 정상을 오간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 내려갔다. 안정적이고 느긋한 움직임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 ‘이바’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 느릿한 곤돌라에 몸을 싣는다. 그는 곤돌라 승무원이 되어 유일한 동료이자 사수인 ‘니노’와 함께 곤돌라를 운행한다. 두 대의 곤돌라와 두 명의 승무원. 탑승객은 몇 되지 않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다.
누군가 전원을 켜면 곤돌라는 돌아간다. 케이블이 있고 전원이 켜진 이상 곤돌라는 계속해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야 한다. 곤돌라와 우리의 삶은 닮아있다. 시작된 이상 마음대로 바꿀 수도 멈출 수도 없고, 멀리서 보면 매일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영화 속 곤돌라의 움직임과 그 위에 올라탄 승무원들의 일상은 매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바이트 헬머 감독은 이 지루한 반복 위에 익살스러운 상상력을 얹어 특별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곤돌라가 왕복 운동을 마칠 때마다 새로운 추억이 그려지고 그것은 주인공 니노와 이바의 마음을 단단히 채우는 나이테가 된다.
<곤돌라>는 모든 게 풍부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대사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무성영화’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보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누구도 속시원히 목소리를 내지 않는 스크린을 보며 속이 끓거나 또는 지루하다 싶은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힘을 빼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답답함이 전복되는 즐거움과 더불어 충만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곤돌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곤돌라는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자 첫 경험과 죽음까지- 다양한 삶의 순간을 담는 특별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부당함을 견디는 수동적인 삶’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니노’는 권태로운 일상과 사장의 몰지각한 행동, 말도 안 되는 임금에 지쳐있는 인물이다. 그는 하늘로의 행복한 탈출을 꿈꾸며 항공사에 지원서를 넣는데 그때, 니노의 권태를 깨는 인물 이바가 등장한다. 차후 니노는 항공사로부터 답신을 받지만 끝내 하늘로 날아가는 것 대신 곤돌라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니노가 더 이상 하늘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게 된 이유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니노와 이바는 사장이 지시한 곤돌라 승무원의 역할(손님을 태우고 돈을 받고 곤돌라를 운행하는 것)만을 수행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은 곤돌라의 문을 열고 연주하기, 곤돌라 꾸미기 등을 통해 매일 다른 하루를 만들어간다.
비행기, 버스, 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곤돌라의 겉모습과 누군가 정상에 도착할 때마다 모습을 바꾸는 체스판은 두 사람의 하루가 ‘단순한 반복’이 아닌 ‘작은 변화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두 사람은 곤돌라에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담으며 권태를 극복해간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 위에서도 삶의 순간들을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당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 그들의 사장이다. <곤돌라>는 두 종류의 탈출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권태로부터의 탈출, 두 번째는 반복되는 부당함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곤돌라 사장은 말 그대로 ‘나쁜 놈’이다. 여성 직원의 탈의 장면을 훔쳐보려 하는 건 기본이고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며 지위를 이용해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휠체어를 탄 남성을 차별하고 계단 아래로 밀어버린다.
니노는 얌전히 케이블을 따라 도는 곤돌라처럼 이 부당한 인물의 지시에 따라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바가 등장하고 그와 상호 작용하며 천천히 사장이 정해둔 선을 벗어난다. 니노는 이바와 함께 곤돌라의 문을 열고 그다음엔 곤돌라를 멈추고 이후엔 곤돌라의 지붕까지 올라탄다. 그리고 마지막엔 함께 곤돌라를 탈출해 허공이 아닌 땅을 밟으며 당당히 걸어간다.
극 중엔 니노가 사장이 건넨 꽃다발을 곤돌라 밖으로 버리고 그걸 본 사장이 니노와 이바의 체스판을 엎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체스판이 난간 쪽으로 엎어지고 받침으로 쓰이던 나무 박스만 남게 되는데 그 위에 검은색, 흰색 체스 말이 하나씩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사장이, 부당한 사회가 아무리 큰 충격을 준다 해도 니노와 이바는 끝까지 함께 살아남을 것임을 의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를 운행하며 식료품을 배달해 주거나 장례식을 함께하는 등 주민들과 다정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두 사람은 이후 곤돌라가 추락할 때, 앞서 식료품 배달을 위해 깔아 놨던 짚에 안착하며 목숨을 건진다. 반대로 사장은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고 마지막엔 이성을 잃고 홀로 자멸한다.
‘다정한 이들은 아름다운 결말을, 욕심쟁이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다’ 케이블이 끊어짐과 동시에 경로를 벗어난 곤돌라는 이러한 올바른 엔딩을 향해 마음껏 내달린다. 그리고 곤돌라의 충돌은 큰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현실에선 여기저기 이어진 선 때문에 ‘인과응보’ 엔딩을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함께 탈출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이 부당한 선들이 모두 곤돌라 케이블처럼 뚝- 끊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
-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프랑스] 5시부터 7시까지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씨네랩 크리에이터 챌린지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프랑스>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 영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키워드는 단연코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일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롯해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의 걸출한 영화 감독들을 주축으로 일어난 프랑스 영화 사조를 지칭하는 누벨바그는,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를 주축으로 활동했던 영화인들에 의해 등장했다. 이들은 미국식 할리우드 영화의 범람과 고전적 기성 영화의 흐름에 저항하는 작가주의적이고 전위적인 촬영 기법들을 활용하며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씨네랩에서 보내주신 추천작 리스트에서 프랑스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등의 누벨바그 작품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어쩐지 샛길로 새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지라, 괜시리 리스트에 없는 감독들의 이름을 하나 둘 떠올리다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활동한 감독들과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단편 영화와 기록 영화로 작품 활동을 이어간 좌안파의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를 골라보았다.
‘누벨바그의 대모’로 불리는 아녜스 바르다는 단편으로 시작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행복>(1964), <방랑자>(1985),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해온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감독이다. 누벨바그의 흐름에 동참해 관습적인 영화 구조를 해체하고, 여성 감독으로서 주체화 된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전면적으로 등장시켰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주인공 클레오 또한 주체성의 렌즈에 포착된 여성 캐릭터이다.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가던 클레오가 암 진단 결과를 기다리며 죽음의 불안을 경험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그녀가 파리 시내를 배회하는 시간의 흐름을 러닝타임과 거의 일치시키는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관객은 클레오와 함께 그녀가 경험하는 순간의 인상들을 흡수하고, 그녀의 불안을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클레오는 불길한 점괘 하나를 받는다. 병으로 죽음이 찾아온다는 뜻일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뽑아든 타로 카드는 13번의 Death, 죽음이다. 절망한 클레오의 주변인들을 하나하나 거쳐 완전한 타인에게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을 영화는 13개의 장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클레오에게 죽음이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하는 공포와 두려움, 불운의 대상이지만 마지막 13번째 장을 지나서야 죽음(Death) 카드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영화의 색채 대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대립쌍으로서의 삶, 그리고 흑백 영화의 검은색과 하얀색이라는 대립적 색채 구조는 노골적으로 삶과 죽음의 메타포를 형성해 나간다. 거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대립쌍 또한 중첩된다. 점괘를 받고 나서는 클레오는 ‘추함이야말로 죽음을 뜻하지,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한 난 살아있는거야.’라며 자신을 위안한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그녀가 상점에서 고른 모자는 검은색의 겨울용 털모자다. 죽음의 색과 계절. 고심 끝에 고른 모자를 쓰고 나서려던 그녀의 바람이 ‘화요일에 새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재수가 없다’는 알젱의 일축으로 무너진다. 그러나 정작 알젱이 고른 ‘재수가 좋은’ 택시의 번호는 새로 받은 번호라는 아이러니. 이후 그녀는 동료 작곡가들과 발매할 곡을 고르다, 장송곡과 같은 비장한 노래를 검은 배경으로 카메라를 또렷이 응시하고 부르게 된다. 관객과 마주치는 그녀의 시선과 고조되는 현악기의 배경음이 초현실로 우리를 이끈다.
<당신 없이는 Sans Toi>
아름다움은 황폐해지고
잔인한 겨울 속에 버려진 나는 빈 껍데기일 뿐이에요
당신 없이는, 당신 없이는.
절망에 갇힌 채로 투명한 관 속에 누워 내 몸은 썩어가요
당신 없이는, 당신 없이는.
당신이 오는 그 날 까지
나는 가만히 기다릴 거에요
나 홀로 창백하고 외롭게
노래가 끝나자마자 화면이 줌아웃되고, 클레오가 꿈에서 깨어난 듯 관객을 현실로 불러온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절망에 다시 사로잡힌 그녀는 온통 검은색 외출복으로 갈아입고는 친구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친구에게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카메라는 어둠이 가득한 다리 밑을 지나가는 클레오를 비춘다. 이렇게 클레오를 따라다니는 검정-겨울-어둠의 이미지는 7시를 향해 가며 중첩되고, 더욱 짙어진다.
전환은 흥미롭게도 친구의 애인이었던 라울이 보여준 영화를 통해 일어난다. 라울은 <맥도날드 다리의 연인들>이라는 짧은 영화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조심하시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영화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연인을 배웅하던 남성이 계단에서 넘어져 영구차에 실려가는 연인을 목격하고는 슬퍼하다, ‘선글라스 때문에 세상이 까맣게 보였던’ 것임을 깨닫고는 멀쩡한 모습의 연인에 안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을 찾아보는 것은 덤.) 영화를 보고 친구와 헤어지는 길, 클레오는 상점에서 샀던 검은 겨울용 모자를 친구에게 선물로 주어 보낸다. 클레오가 죽음의 불안에서부터 처음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인간이 탈피하는 계기가 ‘영화’라는 감독의 연출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인간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뛰어넘게 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 상황 앞에 클레오와 같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러나 정작 죽음은 선글라스와 같이 한꺼풀 벗겨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뒤에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결국 클레오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수용이었다. 앙투안느를 만나 두려움에 피하고만 있던 의사와의 면담을 가질 용기를 얻게 된 그녀는 의사로부터 두 달간 화학치료를 받으면 건강해 질 수 있다는 답변을 받는다. 완전히 사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죽는 것도 아닌 조건부의 상태에 놓였음에도 그녀는 행복함을 느낀다. 우연히 의사를 만나기 전부터 의사로부터 죽음을 선고받는 대신 앙투안느와의 현재를 즐기기로 한 순간부터, 클레오는 플로랑스로 변화한다. 봄이라는 뜻의 그녀의 본명처럼, 겨울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시작. Death 카드의 진정한 의미이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의 이어짐을 의미한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인간이 이겨내는 법은 영원한 생이 아니라, 죽음의 수용으로 주어지는 남은 삶의 찬미에 있는 것이다.
-
-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갸륵했던 동물계의 추상적 방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런 고백은 미술이나 관련 전시회를 조금이라도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 들어봄직한 말이겠지만 필자는 유독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았을 때의 느낌이 무척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았을 때엔 고흐 특유의 거칠고 당찬 붓질과 캔버스 위로 올려진 굳은 유화의 강직함이 상이한 주제와 의미를 가진 그림도 사납고 무서우리만큼 강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그림에서 스스로를 달리 아웃시켜 들여다보면 그 모든 야수성이 하나씩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어느새 본인이 마땅히 채워야 할 곳들로 이동해 하나의 모양을 이루고, 주제와 맞지 않을 것 같던 그 흔적들이 비로소 의미가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하게 한다. 고흐의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명언 '가까이서 보면 희극, 멀리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어쩌면 담아낸 것일까, 3d도 4d도 아닌 그저 평면의 무언가를 입체적으로 와닿게 해 감정마저 입체적으로 변모시킨다.
어떤 애니메이션은 사람의 형태와 신체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한 근육의 운동을 너무 잘 담아내서 호평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마저 극으로 향하게 되면 실사 영화 <라이온 킹>과 같은 평을 받긴 하지만 말이다. 또 어떤 영화는 구체화에서 벗어나 추상의 영역에 출사표를 던져 그 어려운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우린 그 모두를 애니메이션이라 칭하고, 그 둘 중 무엇이 더 애니메이션답다고 평할 수 없다. 둘은 방법적 차이지 수준 적 차이가 아니다.
영화 <플로우>가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디즈니 픽사를 제치고 수상했다는 사실은 자본적으로나 규모의 측면에서나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관점, 추상과 구체의 관점에서도 이 수상의 의미를 더욱 치켜세우고 싶다. 드러내는 것만이 더 이상 장사가 아니다. 순전히 본인의 의도를 본인만의 그릇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영화이고 예술임을 아카데미 시상식이 전 세계를 상대로 공표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인간의 흔적만이 남은 지구의 어딘가, 물에 비친 고양이의 눈동자를 담아내며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엔 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사를 배우가 하는 말 따위를 포함한 개념이라 한다면 영화 속 주인공인 고양이와 강아지,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의 울음소리가 대사만을 구성할 뿐이다. 또 영화는 그 동물들을 표현할 적에 털 하나하나를 세밀히 표현하다 거나 동물 근육의 움직임을 면밀히 담아내지 않는다. 주인공 동물들의 묘사마저도 타 대형 영화사, 애니메이션 사들에 비해선 디테일 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 점이 영화 관람 자체에 문제가 되었거나 불편함으로 남았었다면 본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었겠지만 전혀 그런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디테일 하지 않고, 세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 배경이나 전반적인 동물들의 움직임, 각 동물별 본능적 움직임에서 나오는 귀여움을 즐길 수 있었고, 특히 고양이의 눈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왜 주인공 동물들 중 하필 고양이가 주연을 맡고 있고, 이야기는 왜 고양이의 모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영화는 어째서 관객의 눈을 고양이의 눈으로 집중시킨 것일까.
영화 속 동물들, 그 중 고양이는 물을 통해 비치는 자신과 하늘을 자주 바라본다. 이는 영화가 시작한 직후부터 출발해 영화의 막이 내려질 때까지 꽤 빈번히 등장하는 샷이다. 그러다 물에 빠지기도 하고, 멍하다 새에 잡히기도 하며, 친구들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기도 한다. 비치는 거. 신기할 따름일까, 고양이뿐만 아니라 반짝거리는 것들을 수집하는 컬렉터 여우원숭이도 고조선의 청동거울처럼 생긴 인간의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다. 행동의 이유를 알 순 없다. 대사가 존재하지도 않고, 그들의 행동을 해설해 주는 보이스오버마저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들려오는 건 동물들의 울음소리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집중되는 건 그들의 행동과 눈동자 그리고 고양이의 존재이다.
영화 속 고양이는 다소 겁이 많고, 굉장히 고상한 고양이처럼 보인다. 현실의 많은 길거리 고양이들이나 주인 고양이들도 비슷한 특성을 띄겠지만 영화 속 고양이는 유독 그런 것 같다. 동물들의 방주에 삼삼오오 예측하지 못했던 불청객들이 찾아올 때마다 항상 고양이는 몸을 곤두세워 뒤집은 U자형으로 그들을 경계한다. 또 새로운 일들을 맞이할 때마다, 물에 빠질 때마다 그 크고 귀여운 고양이의 동공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영화는 설득의 예술이고, 별 다른 대사가 없는 영화일 수록 특별한 장치나 요소로서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데, 영화 <플로우>는 고양이의 심정을 움직임과 눈동자를 통해 설득했고, 이는 필자의 입장에선 성공이었다고 판단된다.
영화 속 세상마저 추상적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고양이와 그 친구들이 타고 있는 배 도한 원초적으로 인간의 것임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째서인지 인간 문명이 모두 멸망했고, 그 멸망으로 인해 어떠한 세계로 변했는지 등의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해일이 일어나 숲이 모두 가라앉는 사건과 몇 일 사이에 해수면이 모두 가라앉게 된 그 이유마저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친절하지 않은 그 점이 관객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해 저절로 생각하게 한다. 영화 <플로우>를 보고 있으면 '저건 어쩌다 저랬을까?' '저 집은 왜 존재하고, 집 안 속 고양이 그림들이 가득한데, 주인공 고양이는 그 집의 고양이였던 것일까?'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영화는 설득의 예술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예술이다. 일방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만을 보따리 채 싸 들고 관객에게 하나씩 던져내는 게 아니라 관객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이미 제작된 영화를 마치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몰입시키는 것이 영화의 참맛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 있어 영화 <플로우>는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라 생각한다.
그럼 영화는 어째서 인간의 세계를 보여준 것일까. 인간의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아도 이야기의 흐름이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인간의 흔적과 그들이 남기고 간 유적들이 단순히 동물들의 항해를 더욱 빛내기 위한 배경으로만 삼지 않았다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 속 세계엔 해수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이 꽤 빈번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부, 해일의 전조 증상이었던 순록의 무리 이동이 영화의 종반부에 반복된다. 과연 그런 세상이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영화 속 동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고, 위험에 처한 서로를 도우려 하며, 다른 종이더라도 물심양면으로 구조했던 건 아니다. 동물들의 본능이 작용해서인지, 서로를 돕다가도 본능에 이끌려 행동하는 강아지 무리를 볼 수 있고, 소유욕이 강한 여우원숭이는 본인의 소유물이 바다에 떠내려가자 뱀잡이수리와 싸우려 했다. 그렇지만 놀라운 건 우리 관객이 끝까지 따라갔던 그 친구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벌어진 그 모험 속에서 종이 다른 우정의 싹을 틔워내 함께 살아남으려 애썼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초반부와 종반부가 대칭을 이루게 되는 물에 비치는 동물들의 모습 샷엔 고양이 한 마리에서 고양이와 그 친구들로 변할 수 있었다. 영화는 동물들의 우정 연대기를 비추면서 지속해서 인간의 흔적들을 함께 담아내는데 이 또한 관객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 여지를 남겨둔다. 인간 또한 하나의 동물에 불과한데, 그 동물은 어쩌다 사라지게 되었고,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은 무엇이길래 개, 고양이, 원숭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사라지게 된 것일까 하는 질문 등을 자신에게 던지게 한다.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아무래도 친구 무리 중 뱀잡이수리가 하늘로 떠나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본 장면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표현법 때문이다. 현재 살아있는 우리는 각자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죽음에 이른 순간 무엇이 보이는지 살아있기에 알 방법이 없다. 영화는 한 동물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또 다른 동물의 시선을 빌려 담아냈고, 이 점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이다. 사실 영화 <플로우>의 카메라 시선은 굉장히 다각적이지만 하나의 시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그건 바로 고양이의 시선이며 프레임 속 비치는 세상은 모두 고양이의 시선에서 비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그 '비침'이라는 관념을 꾸준히 상기시키기 위해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장면을 계속해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날개를 다친 새는 도저히 올라오기 힘들어 보이는 수상한 둔덕 어딘가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고, 그곳엔 친구 뱀잡이수리가 있었다. 내리던 빗방울이 영화 <나우유씨미2> 속 장면처럼 하늘로 올라갔고 고양이와 뱀잡이수리까지 함께 몸이 공중으로 뛰어졌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빛이 어두운 하늘을 감쌌고, 뱀잡이수리는 함께 떠올려진 고양이를 발로 밀어 다시 땅으로 착지하게 했다. 고양이를 지키려다 동족들에게 꺾여버린 그의 날개는 상처를 모르는 듯 빛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시전했고, 항상 엉거주춤하게 하늘을 날던 뱀잡이수리는 마치 하늘을 덮듯 멋지게 날아가 버린다. 이 장면이 과연 인간의 시선이었을 경우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영화는 관객의 상상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해당 영화 속 주인공들의 상상까지 빌려 영화를 풍부하게 한다.
재밌는 건 이 모든 점들이 영화를 재미나게 관람한 필자의 상상이라는 점이다. 감독의 이야기나 인터뷰를 아직 보지 못한 필자의 상상력이 이토록 풍부할 수 있었던 데엔 영화가 그만큼 여지를 많이 남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불친절하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화 <플로우>는 추상적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갸륵하고, 흥미롭다.
-
- 마녀 파트2, 1편만한 영화가 나왔을까?
?Rabbitgumi 입니다!
마녀 파트2가 개봉했습니다.
김다미 배우의 데뷔작 마녀1이 꽤 좋은 반응을 보였었죠.
물론 그 영화도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이번 2편은 어땠을까요?
영화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을 하고 있어요.
액션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한국형 수퍼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
- 황정민 염정아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크로스" 후기 / 호불호는 갈리는 듯 / 안방에서 편히 보는 첩보 액션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크로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하나 있네요.
-
- 영화 <플래시> 파이널 예고편
준비 됐지? 6월 14일 #플래시 와 함께 전력질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