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0-29 23:31:27
스멀스멀 머리를 집어삼키는 공포
영화 <롱레그스>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롱레그스 이름의 뜻
- 롱레그스가 뻐꾸기 소리를 내는 이유
- 사라진 트로피 머리의 의미. 사라진 무언가를 찾는 리
- 인형, 아래쪽 어디에나 사는 친구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롱레그스 (Longlegs, 2024)
스멀스멀 머리를 집어삼키는 공포
개봉일 : 2024.10.30.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공포, 스릴러
러닝타임 : 101분
감독 : 오즈 퍼킨스
출연 : 마이카 먼로, 니콜라스 케이지, 알리시아 위트, 블레어 언더우드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주인공인 FBI 요원 ‘리’는 오직 감에 의존해 범인이 어디 있는지, 어디에서 악의가 풍겨오는지 찾아내는 남다른 능력을 갖고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동료들은 여성 요원인 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리와 2인 1조가 된 남성 요원 피스크는 저 집에 용의자가 있다는 리의 말을 진지하게 믿지 않고 홀로 진입을 시도했다가 총을 맞고 사망한다. 살아남은 리는 용의자를 무사히 제압하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이후 리의 육감과 요원으로서의 능력을 눈여겨보게 된 카터 수사관은 리에게 미제로 남은 일가족 살인 사건. 일명 ‘롱레그스’ 사건의 조사를 맡기고 리는 본격적으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긴 시간 매달린 결과 리는 피해자들의 공통점과 롱레그스의 알고리즘,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과정엔 석연치 않은 타인의 개입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롱레그스가 직접 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롱레그스는 어떤 이유로 리를 찾아온 걸까. 리는 혼란에 빠지고 새로운 사건의 단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의 내면은 궁금증과 공포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롱레그스>는 이런 예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을 암시하며 은밀하고 조용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옥죄는 공포영화다. (점프스케어 장면이 많은 공포영화라기보단 서서히 조여오는 심리 스릴러, 오컬트에 가까운 공포 영화다.)
영화는 리의 주변에 작은 단서들을 뿌리며 천천히 관객들을 유인한다. 그리고 한순간에 신선하고 소름 돋는 장면들을 선보이며 도망갈 틈을 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 뒤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사운드와 배경, 배우의 움직임은 그 공간에 충분한 공포감을 채워넣는다. 다면이 노출된 공간, 어둠 속에 유일한 빛, 시선의 높이차, 고요하고 정적인 공간 등을 다양하게 활용한 연출들은 매번 신선한 떨림과 다음 순간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매 장면마다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공포와 불쾌감. <롱레그스>는 이것의 기원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바닥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완벽하게 의도된 찌그러진 결말을 들어 보인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롱레그스 이름의 의미와 롱레그스가 뻐꾸기 소리를 내는 이유
롱레그스. 긴 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9-10살 사이의 소녀들만을 제물로 삼는 사탄 숭배자다. 성장을 마치지 않은 작은 소녀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다리와 상체 일부만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롱레그스’인것이다. 롱레그스는 소녀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무릎을 접으며 불쑥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괴기하고 공포스럽다.
롱레그스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읊조리며 다닌다. 그리고 말 중간에 뻐꾸기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뻐꾸기와 비슷한 습성을 가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를 빼앗아 알을 낳는 습성이 있는 새인데 롱레그스의 범행 방식이 딱 뻐꾸기와 닮아있다.
그는 직접 소녀를 죽여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 간호사였던 리의 엄마가 의심받지 않고 악마가 든 인형을 배달해 인형이 집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악마가 사람을 조종해 일가족을 몰살한다. 그는 둥지를 짓지 않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는 뻐꾸기처럼 자신의 힘을 들이지 않고 악마를 풀어 손쉽게 한 가정을 파괴한다. 그 덕분에 롱레그스는 이름 외엔 이렇다 할 증거를 남기지 않고, 리는 이를 수사하며 ‘죽이긴 했지만 직접 죽인 건 아닌 사건’이라며 혼란에 빠진다.
사라진 무언가를 찾는 리와 리를 위해 무언가를 버린 엄마
머리가 부서진 트로피와 사라진 머리의 의미
리는 술을 마신 카터를 대신해 차를 몰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카터 가족은 리를 살갑게 맞아주고 루비는 리를 자신의 방에 초대한다. 방을 둘러보던 리는 루비의 머리가 사라진 트로피를 발견한다. 루비는 트로피의 머리가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하고 리는 루비를 바라보며 “그런 게 내 일인데. 무언가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롱레그스>는 리가 무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진 머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리의 기억엔 구멍이 있다. 리의 9번째 생일 전날이었던 13일. 리는 롱레그스를 만났다. 하지만 리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엄마는 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그날 있었던 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생존자인 케리앤도 엄마도 모두 롱레그스와 어린 리를 기억하고 있지만 리에게만 그 기억이 없다.
리는 의심스러운 그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기억과 어릴 적 살았던 집을 뒤진다. 엄마는 계속해서 그날에 대해 묻는 리에게 “네 모든 건 네 방 안에 있단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엄마의 말대로 방 안을 살펴보던 리는 오래된 박스 속에서 자신이 찍은 롱레그스의 사진을 찾는다. 덕분에 롱레그스가 체포되고 리는 그날의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는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가 얼핏 느꼈던 검은 형체. 롱레그스가 심어둔 악마가 아직 리의 머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에게 악마가 있다는 단서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꾸준히 제시된다. 리는 검은 악마의 형체를 보고, 생존자 케리앤은 리가 우리 집에 왔었다고 말하다 나중엔 리를 ‘더럽고 늙어빠진 천사년(다른 제물들과 다르게 9-10살을 훨씬 넘겼기 때문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리는 엄마가 “요즘 기도는 하니?”라고 묻자 “기도한 적 한 번도 없어. 기도가 무서웠거든.”이라고 답한다. ‘모든 프레임에 악마의 단서가 심어져 있는 영화’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 정말 대부분의 프레임에 단서가 있었던 것이다.
리의 엄마는 악마의 단서와 자신의 머리를 찾아가는 딸과 반대로 악마의 단서를 열심히 지우고 자신의 머리를 버린다. 롱레그스라는 뻐꾸기가 리의 가족이라는 둥지에 낳고 간 악의 알은 둥지 주인인 엄마를 전부 갉아먹는다. 엄마는 리를 살리기 위해 사탄 숭배자 롱레그스와 한패가 되어 리처럼 14일에 태어난 소녀들을 죽인다. 리가 엄마의 집을 찾아갔을 때, 엄마는 벌써 리의 생일이 되었다며 14일을 ‘피를 흘리고 흘리던 날들이었다’고 회상한다. 리를 살리기 위해 14일 생일을 맞은 소녀들을 죽이고 또 죽였으니 그날을 피로 기억할 수밖에.
리의 엄마는 롱레그스와 함께 많은 소녀들을 죽이고 리와 닮은 인형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엄마가 그 인형의 머리를 쏘자 리는 마침내 자신의 머리를 완벽히 되찾는다. 그 순간 쓰러진 리가 다시 침대에서 눈을 뜰 때, 카메라는 180도 뒤집어진 앵글로 시작되며 리가 이전과 다른 세상에서 다시 눈을 떴음을 알려준다.
엄마는 자신의 머리를 버리고 딸의 머리를 되찾는다. 그런데 이 희생은 전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엄마는 다른 소녀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뒤틀리게 될 거라며 절규한다. 그래서 수많은 소녀들을 죽인 결과 리와 자신의 인생이 안전해졌나? 그것도 아니다. 엄마는 리의 손에 죽었고 리는 머리를 되찾긴 했으나 그의 인생은 이미 제대로 뒤틀린 후다. 악을 따른 결과는 절대 아름다울 수 없다.
여전히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 엔딩 해석
부수지 못한 루비 인형
롱레그스의 말처럼 사탄과 악은 여전히 ‘아래쪽 어디에나 사는 친구’다. 악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알 수 없다. <롱레그스>는 우리와 위아래로 마주 서있는 이 영악하고 소리 없는 악을 땅 위로 끌어올려 눈앞에 들이민다. 속지 말라고, 잊지 말라고 하는 듯이.
엄마의 뒤틀린 희생 덕에 리는 머리를 찾고 루비를 무사히 구해내긴 했지만 그는 총알이 부족해 루비의 인형을 부수지 못했고 악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박멸되지 않은 이 악은 앞으로도 롱레그스 같은 뻐꾸기를 통해 여러 둥지를 옮겨 다니며 둥지의 주인과 가족들의 머리를 앗아갈 것이다. 상상만 해도 불쾌함과 공포감이 끓어오르는 엔딩이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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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끝은 있는거야! 영화 <트루먼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딜레마가 하나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아이는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면, 웰컴 투 공리주의. 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만 해도 어느 면접에서 '공리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피하다면 최선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먼쇼>, 영화 한 편으로 정말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로 그 딜레마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면? <트루먼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 버뱅크, 태아 때부터 30대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하루 24시간 그의 모든 것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 나의 모든 것이 나도 모르는 이들에게 공유된다니. 이건 비밀인데, 하던 말, 나만 알고 싶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까지 모두. 소름끼친다. 방송국에 입양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나.
영화에서 트루먼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방관한 모든 인물이 악당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꼽자면 프로듀서를 대표적으로 꼽겠다. 트루먼쇼는 트루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모욕의 집합체다.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은 게 아니라 돈 되는 투자처였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에 대한 동의없는 일방적인 사기이자 감금,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자 착취다. 죄목을 몇 개나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프로듀서는 그의 신인 양,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스크린에서 그를 쓰다듬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프로듀서는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즉흥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섬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그에게 트라우마나 시련을 주었다. 물을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도록. 그를 위해 섬을 전부 꾸몄고, 인간관계는 배우들로 채워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롱런하는 드라마를 보듯 흥미롭게 시청할 뿐이다. 그들에겐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가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트루먼쇼는 대세다.
하려면 빈틈없이 제대로나 하지, 곳곳에서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수가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들렸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졌다.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모두가 당황한다. 아이를 갖자는 아내 메릴은 사실 별로 그를 안 좋아한다. 겁쟁이인 줄 알았던 그가 수많은 눈과 카메라를 속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던 물로 나아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프로듀서가 만든 폭풍우에 휩쓸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내지 않았다. 모두에게 위트있게 인사를 한다.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세상, 거짓된 진실, 빈 껍데기의 평온한 일상에서. 다들 그를 시청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마저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멍청한 듯 했지만 똑똑했다. 시청자가 느낀 감동과 재미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세상 꿀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듀서를, 시청자들을 못됐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1998년에 만들어진 트루먼쇼는 놀랍게도 최근의 예능 트렌드와 흡사하다. 프로듀서는 10년, 20년을 앞서 본 선구자인 것이다. 트루먼쇼는 그냥 쇼가 아니었다.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열일하는 연출로 더 많은 광고와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작은 국가의 GDP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 트루먼이 함께 하는 이상 이 수익은 고정적이다. 누가 아나. 늘 단역 자리는 필요하니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의 생활 속 제품 홍보로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수익으로 파이를 분배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감은 어떤가. 트루먼이 성장하는 것을 다같이 흐뭇하게 보며 울고 웃는다.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만나본 적도 없는 연예인과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받고 힐링받는다.
트루먼쇼의 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다. 트루먼쇼는 좋은 의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 위로를 주는 프로그램.' 다만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빠졌을 뿐. 전 세계 TV는 리얼리티 쇼가 가득 채웠다. 모델, 가수, 아이돌 등을 뽑는 부분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2016-17년 예능을 쥐어잡은 <나 혼자 산다>, <미운 오리 새끼>, <슈퍼맨이 돌아왔다> 까지. 일상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다르지 않다. 앞의 두 프로그램은 연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사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집집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상에 자리잡았다. 집을 공개하고, 생활하는 날 것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출연자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믿도록. 물론 무엇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진실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정도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질 것이다. 더 강한 자극은 진실된 존재의 진실된 감정에서 온다. 몰래카메라가 재밌는 이유와 같다. 예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짜고 치는 대본이 암암리에 있는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다. 진심이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트루먼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훌륭한 프로듀서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할 때의 자세
냉정하게 생각하자. 프로듀서의 역량은 훌륭하다. 눈치를 채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트루먼에 대처하기 위해 그 역시 열심히 대처하느라 바빴다. 갑자기 돌아가신 설정의 아버지를 우연찮게 만나자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개와 대사를 마련한다. 트루먼의 고뇌에 대한 위로, 트루먼과 아버지의 재회. 기쁨의 눈물. 바로 클로즈업을 해선 안 된다. 서서히 멀리서부터 마지막 그의 얼굴로 다가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가 만든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프로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트루먼이 폭풍우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만들었고 폭풍이 지나간 쨍쨍한 햇살에 비친 만족감을 대조하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이 곳에서 계속 함께하자며 그의 내면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물론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오래 함께 하자. 그러나 한 구석으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레전드는 만들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프로듀서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트루먼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얽힌 이해관계자의 기대에 찬 눈빛. 그는 트루먼의 인생동안의 시간만큼 그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두자면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트루먼의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은 묵인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이 상황은 딜레마가 아니다. 이제와서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이 트루먼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스타가 된 이상 바깥 세상에서도 그가 원하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여기선 고작 갑갑할 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 그는 욕을 먹고 상처를 받을테니까. 게다가 적어도 트루먼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니까. 심지어 이혼한 후에 재혼할 두번째 아내까지. 귀차니즘이나 결정장애에 빠져있다면 이 만한 직업도 없다.
프로듀서는 트루먼쇼를 딜레마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이득을 보는, 일방이 희생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스타와 지켜보는 수많은 지지자들, 윈윈이나 협조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의 화살만 퍼부을 텐가. 그는 자신의 일을 그저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쇼는 끝이 없다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하나뿐인 스타인 트루먼은 쇼도 끝이 있는 거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는 말문을 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트루먼을 보내줄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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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게 온 DCEU의 마지막 편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부동생 '옴'(패트릭 윌슨)의 야욕을 꺾고 아틀란티스 왕국의 왕좌를 차지한 '아쿠아맨/아서 커리'(제이슨 모모아). 왕비 '메라'(엠버 허드)와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아들을 키우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그에게 과거의 악연이 다시 찾아온다. 아쿠아맨에게 아버지를 잃은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마틴 2세)가 지구를 파괴할 무기인 '블랙 트라이던트’를 손에 넣고 아틀란티스를 공격한 것.
예기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아서는 과거 블랙 만타와 손을 잡은 바 있는 옴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사막 감옥에 갇힌 옴을 찾아가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아서. 의심과 불신 속에 한 팀을 이룬 아서와 옴은 이제 남태평양의 한 섬으로 향한다.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켜 지구를 파괴하려는 블랙 만타와 그를 조종하는 사라진 왕국의 '코닥스 왕'을 무찌르기 위해서.
<아쿠아맨 2>를 보는 두 시선
2018년에 개봉한 DCEU(DC 확장 유니버스)의 <아쿠아맨>은 시리즈 초석 역할에 충실한 영화였다. 전작 <저스티스 리그>에서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해 그저 '물고기랑 대화하는 애'였던 아쿠아맨. 그의 이미지는 '호쾌하고 상남자스러운 바다의 지배자'로 180도 달라졌다. <컨저링> 시리즈와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메가폰을 잡았던 제임스 완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흥행 성적도 훌륭했다.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국내에서도 5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에 개봉한 DC 원작 영화 중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조커> 다음으로 좋은 성적이었다. "물맨(아쿠아맨) 봄은 온다"는 밈이 유행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1편의 평가와 성적만 놓고 보면 5년 만에 돌아온 속편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을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DCEU의 현황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연출한 제임스 건이 총괄 기획을 맡은 DC 유니버스가 새 출발을 알리면서 세계관 자체가 취소됐기 때문. 그 결과 DC 유니버스로 편입되지 못한 <아쿠아맨 2>은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숱한 재촬영과 재편집 뉴스도, 조니 뎁과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엠버 허드의 출연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엇갈린 시선 속에 도착한 <아쿠아맨 2>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전편에서 스쳐 지나간 환경 문제를 주요 소재로 삼아 예상 못한 큰 그림을 보여줬고, 아쿠아맨의 서사도 한층 풍성해졌다. 근래 히어로 영화 중에서도 손꼽히는 액션의 쾌감도 강렬하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미처 못 지운 재촬영의 흔적 때문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특히 존재 의의가 없다는 한계를 뒤엎을 한 방은 끝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다급한 현실을 직시한 큰 그림
MCU의 전성기였던 2010년대 후반만 해도 MCU의 장점은 현실성이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호크아이 등은 당장 지구에서 활동해도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영웅이었다. 그랬기에 관객들도 그들의 서사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반면에 DCEU의 다소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은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솔로 영화가 나온 슈퍼맨과 원더우먼만 해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외계인과 신화 속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MCU와 DCEU에 대한 평가가 마침내 뒤바뀐 듯 보인다. 멀티버스 사가에 힘을 쏟은 마블은 점점 공허해졌다. 다중 우주와 양자 영역, 시간여행이 중심 소재가 되면서 MCU 영화들은 관객들이 발 딛고 있는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반면에 DCEU는 오히려 지구에 가까워졌다. 지구 온난화라는 환경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아쿠아맨 2>의 메시지는 그 어떤 히어로 영화보다도 현실적인 위협과 맞닿아 있으니까.
물론 전편에서도 환경 문제는 중요한 소재였다. 해양 오염 문제 때문에 옴이 이끄는 아틀란티스 군대가 육지 침공을 계획했을 정도였다. 단지 1편이라는 특성상 부각되지 못했을 뿐이다. 거시적인 문제를 화두로 던지기 전에 아쿠아맨 캐릭터 소개, 아서와 옴의 왕위 싸움, 아서와 메라의 로맨스만 다뤄도 러닝타임이 부족했으니.
<아쿠아맨 2>는 다르다. 빌런의 동기, 행적, 계획 모두 지구 온난화와 맞닿아 있다. 당장 극지방이 녹지 않았다면 블랙 만타는 블랙 트라이던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더해 블랙 만타를 통해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켜 남극 빙하에 갇힌 사라진 왕국 '네크루스'를 부활시키려는 코닥스 왕의 음모도 이뤄질 수 없다. 이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영구 동토층에 얼어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환기시킨다.
야심 찬 그림 위에서 뛰어놀다
이처럼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야심 찬 큰 그림은 아쿠아맨이라는 영웅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 최적화된 도구이기도 하다. 여러 능력이 있지만, 아쿠아맨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소통'이기 때문. 특히 기껏해야 물고기와 대화한다고 놀림거리가 되는 이 능력이 의외로 가장 영웅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웅은 인간과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인물이다. 영웅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예언을 실천하는 이다. 동시에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자로서 신이 정한 운명에 도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간극은 그리스 비극의 원천이었다. 오이디푸스도, 아킬레우스도, 테세우스도 인간으로 태어나 신의 세계에 도전하다 파멸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아서 커리의 서사도 다르지 않다. 그는 아틀란티스의 왕이자 육지와 바다의 전쟁을 막은 영웅 아쿠아맨이다. 육지와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두 세계의 공존을 가능케 한 셈이다. <아쿠아맨 2>는 이제 그의 영웅성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두 세계의 가교 역할을 넘어서서 두 세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과업을 아서에게 부여한다. 지구를 지키는 일은 인간과 아틀란티스인 모두의 생존을 위한 일이니까.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블랙 만타는 아버지를 죽인 아쿠아맨을 증오하고, 인간은 미지의 국가인 아틀란티스를 막연히 두려워한다. 옴을 비롯한 아틀란티스인들은 바다를 파괴하는 육지에 세계에 분노를 품고 있다. 그렇기에 아서는 블랙만타와 그를 조종하는 코닥스 왕과 대적하고, 자기와 반목했던 이부동생의 마음을 되돌려 협력해야 한다. 모든 적개심을 극복할 때 비로소 바다와 육지가 협력하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장점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더 나아가 <아쿠아맨 2>는 슈퍼 히어로 영화다운 방식으로 아쿠아맨의 과업을 보여준다. 바로 액션이다. <아쿠아맨 2>의 액션은 영화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 도착해 블랙 만타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대표적이다.
아서와 옴은 정글에서 거대해진 메뚜기와 식충식물에게 불시에 기습당한다. 블랙 만타가 가공할 만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동안 섬의 생태계가 불안정해졌고, 그 결과 돌연변이 동식물이 등장한 것. 지구의 이상 징후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액션 시퀀스의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셈이다. 그렇기에 괴물이 된 동식물과 아서 형제의 추격전은 마냥 유머스럽지 않다. 꽤 징그럽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물론 메시지, 서사와의 연결성을 빼고 보더라도 <아쿠아맨 2>의 액션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다. 비록 스케일이 전편보다 줄어들었고 CG 티가 나는 부분도 있지만, 아틀란티스에서 펼쳐지는 수중전이나 네크루스 전투는 여전히 화려하다. 다양한 색상의 광원을 활용한 덕분에 액션의 움직임과 흐름을 따라가는 데도 무리가 없다. 이는 너무 어둡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연출과 대비를 이룬다.
초기 DCEU 영화의 느낌이 되살아난 장면도 눈에 띈다. 히어로와 빌런이 일 대 일로 맞붙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경쾌한 리듬감과 명확한 카메라워크의 조합 덕분에 아쿠아맨과 블랙 만타가 각자 삼지창을 들고 일기토를 펼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눈이 호강한다. 잭 스나이더가 제작에 참여한 <맨 오브 스틸>, <원더우먼> 등이 빠른 템포의 액션씬을 통해 히어로의 초인적인 힘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다.
부실할 수밖에 없는 기초 공사
하지만 야심 찬 소재와 메시지, 히어로 영화로서 부족함 없는 액션의 완성도는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영화의 기본 토대인 각본과 편집이 상당히 불안정하기 때문. <아쿠아맨 2>의 플롯은 크게 세 개다. 1) 숙적이었던 아서와 옴이 함께 모험을 떠나는 버디 무비. 2) 복수심으로 가득 찬 블랙 만타와 그 배후인 코닥스 왕의 계략. 3) 왕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아서의 가족 이야기.
그런데 <아쿠아맨 2>는 플롯 간의 연관성을 제때 못 보여준다. 1번과 2번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블랙 만타를 막기 위해 전편에서 그와 관련이 있는 옴을 활용한다는 내용이므로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반면에 세 번째 플롯은 코닥스 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나머지 플롯과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세 플롯 중 등장은 가장 빠르다. 그러다 보니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영화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또 각 플롯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아서의 가족 이야기에서는 아버지로서 아서 커리의 정체성을 강조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엠버 허드의 분량을 줄이는 과정에서 내용이 대폭 삭제된 흔적이 역력하다. 할머니가 된 '아틀라나'(니콜 키드먼)의 등장 타이밍은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가족 이야기가 펼쳐지는 초반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틀란티스가 습격당할 때 갑자기 등장해 존재감을 뽐낸다.
아서와 옴의 버디 무비는 진부하다. 특히 <토르: 다크월드> 속 토르와 로키의 이야기를 답습한다. 선조가 패퇴시킨 고대의 적과 맞서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도, 감옥에 갇힌 동생을 형이 몰래 구해 모험에 참여시킨다는 전개도 빼닮았다. 그나마 옴이 로키보다 콤플렉스가 덜하고 진중한 게 차이점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장점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서 형제의 서사가 토르와 로키의 갈등보다 덜 극적이라는 뜻이니까.
근본적인 한계는 못 넘은 마지막 인사
그뿐만이 아니다. 디테일의 부족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퀀스 간의 전환은 종종 부자연스럽고, 음악도 전편에 비해 활용법이 어색하다. 전편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마다 음악을 적재적소에 삽입한 반면, 이번에 활용된 음악은 분위기를 자꾸 끊는다. 개그씬도 맥락이 어색한 경우가 잦다. 그 결과 <아쿠아맨 2>는 전반적으로 마치 밀린 과제를 해치우는 듯하다.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가기 바쁘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인상적인 큰 그림과 확실한 장점을 갖추고도 세밀한 완성도가 부족하다면, 결국 불안정한 제작 환경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제임스 완이 주연 배우 사망으로 인해 각본을 수정하고 숱한 재촬영을 진행하면서도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는 전례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그에게도 DCEU와 DC 유니버스 사이에서 표류 중이던 <아쿠아맨 2> 구조작업이 얼마나 난관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기대 이상의 완성도와 재미를 갖췄지만 <아쿠아맨 2>의 끝은 공허하다. <아쿠아맨 2>의 결말은 <블랙팬서>와 유사하다. 아서의 결단 덕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틀란티스는 육지와의 협력을 약속한다. 만약 DCEU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이는 세계관의 일대 변화를 기대케 하는 가슴 뛰는 마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럴 일은 없다. 그렇게 <아쿠아맨 2>는 무의미한 자기소개를 마지막으로 DCEU의 문을 닫는다.
Acceptable 무난함
조금만 빨리 왔다면 DCEU의 미래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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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일본에서 주목받는 떠오르는 영화감독 미야케 쇼의 신작 <새벽의 모든>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극심한 감정 변화에 시달리는 후지사와와 공황장애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린 야마조에가 특별한 연대로 삶의 희망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공감 드라마입니다.
새벽의 모든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고,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 이어 3연속 베를린에 초청된 미야케 쇼 감독은 일본을 대표하는 신예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의 섬세한 연출력과 따뜻한 시선으로, 삶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9월 셋째 주 개봉예정 PICK
새벽의 모든
All the Long Nights
개요: 드라마 | 일본 | 119분
감독: 미야케 쇼
주연: 마츠무라 호쿠토, 카미시라이시 모네, 미츠이시켄, 시부카와 키요히코
개봉: 2024.09.18.
배급: (주)디오시네마
줄거리
한 달에 한 번, PMS 때문에 짜증을 억제할 수 없게 되는 ‘후지사와’. 한층 악화된 증상에 다니던 회사를 도망치듯 그만둔 그녀는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 ‘쿠리타 과학’으로 이직한다.
친절한 동료들과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에 차츰 적응해 가던 중, 직장 내 자발적 아웃사이더 ‘야마조에’의 사소한 행동에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크게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발작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야마조에’가 극심한 공황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의 고충을 나눈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특별한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수유천
BY THE STREAM
개요: 드라마 | 한국 | 111분
감독: 홍상수
주연: 김민희, 권해효, 조윤희, 하성국
개봉: 2024.09.18.
배급: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줄거리
한 여대에서 촌극제가 있다. 전임이라는 이름의 강사가 외삼촌에게 자신의 학과 촌극 연출을 부탁한다. 전임은 매일 학교 앞 수유천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작품 패턴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외삼촌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몇 년 째 일을 못하고 있는 배우 겸 연출자이다.
사십 년 전 이 여대에서 대학 일학년의 신분으로 촌극을 연출했던 기억 때문에 연출을 맡은 것이다. 촌극하는 학생들 사이에 스캔들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나고, 전임과 외삼촌은 그 사건에 가볍게 끼어들게 된다. 그사이 외삼촌은 텍스타일과 여교수와 가까워지는데, 밤마다 하늘의 달은 점점 커져만 가고, 전임은 아침마다 수유천에서 그림을 그린다.
테인티드 러브
Tainted Love
개요: 드라마 | 중국 | 100분
감독: 마잉신
주연: 주동우, 장위, 장유호, 이몽
개봉: 2024.09.19.
배급: (주)디스테이션
줄거리
“사랑해… 거짓말” 연인에게 사기를 당한 여자 ‘저우란’. 진실을 찾기 위해 방문한 낯선 곳에서 두 남자 ‘린즈광’과 ‘쉬자오’를 만난다. 꿈 같았던 만남도 잠시, ‘저우란’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고 깊어지는 사랑과 의심 속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트랩
Trap
개요: 스릴러, 범죄, 미스터리 | 미국 | 105분
감독: M. 나이트 샤말란
주연: 조쉬 하트넷, 아리엘 도노휴, 살레카 샤말란, 헤일리 밀즈, 알리슨 필
개봉: 2024.09.18.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줄거리
팝스타의 콘서트, 경찰의 거대한 덫… 탈출해야만 한다!
10대 딸과 함께 인기 팝스타의 콘서트를 찾은 ‘쿠퍼’. 신나게 콘서트를 즐기던 그는 순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곳이 최악의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한 거대한 덫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쿠퍼’ 자신이 바로 연쇄살인마라는 것! 이제 ‘쿠퍼’는 수많은 관객과 경찰을 따돌리고 어린 딸과 함께 무사히 이 덫에서 탈출해야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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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을 자른다는 것의 의미
팔을 자른다는 것의 의미
<127시간>은 주인공 '아론 랠스턴'이 블루존 캐니언을 홀로 등반하다가 실족하고, 설상가상으로 바윗돌에 팔이 끼이는 사고를 당한 상태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설명이 스포일러가 아닌 것은,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의 한국 포스터 하단에는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감동실화’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갇혀 있었던 시간을 정직하게 암시하는 ‘127시간’이라는 제목부터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탈출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좋은 영화라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생생한 영화들은 따로 있다.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 <마션>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든가 <타이타닉>, <죠스>처럼 재난을 다루는 영화들이 보통 그러하다. <127시간>역시 개인에게 닥친 재난으로써 보는 이로부터 한껏 집중을 이끌어낸다. 너무도 생생한 탓에 아론 랠스턴에게 닥친 시련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조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팔과 나의 팔이 일치를 이루고, 함께 갇힌 듯한 기분을 전해준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긴 시간 함께 갇혀 있다가 비로소 그가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할 때는 '그가 탈출했다'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탈출했다'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이 이야기는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는 과연 포스터 홍보 문구의 말대로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꾸었는가?'에 대한 점이 특히 그렇다.
내 생각에 아론 랠스턴은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 것 같다. 큰 돌에 팔이 낀 상태에서 팔을 자르고 탈출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끝까지 불가능한 일이다. 팔을 자르고 탈출한다는 이 기괴한 결정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것을 불가능이라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초 가능한 것을 선택한 것일 테니까. 그가 처음부터 팔을 자르고 뚜벅뚜벅 탈출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힘든 선택지가 아니라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팔을 자르고서라도 살고 싶을 것이고, 누군가는 팔을 자른다는 행위를 불가능으로 치부하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인데, 내 생각에 나라면 팔을 직접 자르느니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한 쪽 팔 없이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마취없이’ ‘직접’ 팔을 자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팔은 레고의 그것이 아니니까.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아닌 것을 선택해버린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 같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홍보문구의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트집 잡는 데에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한 사람을 예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을 종합해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인간승리' 서사로써 이해되는 듯하다. 사람들은 아론 랠스턴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해서 살아남은 대단한 인물 정도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줄 수 있는 교훈이라는 것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직접 팔을 잘라서라도 살아 남아라?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팔 하나 정도 잃고 살아남을 수 있다? 매사에 긍정적이다 보면 직접 팔을 자를 용기도 생긴다? 내가 볼 때 그가 직접 팔을 자르고 탈출한 사례는 누구에게나 권할만한 모범은 아니다. 이 영화가 진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 말하지 않으면 위기에 봉착한다. 둘째,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일이 늘 달콤하지는 않다.
아론 랠스턴은 말하지 않아서 실패하는 자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론이 사랑했던 여자와의 달콤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여자친구는 “알려줘. 널 해제할 암호.”라고 말하는데 아론은 “그걸 알면 넌 나한테서 못 벗어나”라고 농담처럼 대꾸한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아론이 블루존 캐니언에 갇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유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알릴 수도 있었고, 단골 가게 직원에게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항상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약점을 알리지 않는 오만함.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객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에는 모험(여행)에도, 사랑에도 성공하는데 성공한 이후의 그는 이제 행선지를 꼬박꼬박 밝히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겸손해졌다. 진정한 사랑이든, 일이든, 뜻하지 않은 위기에 봉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숨기지 않고 자꾸만 알려주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영화가 말하는 듯하다.
주인공의 재난을 우리가 부여받은 운명으로, 팔을 자르는 행위를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탈출하는 행위로 보면 어떨까? 그렇게 보면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일이 늘 달콤하지는 않다는 깨우침도 주는 것 같다. 살다보면 큰 돌에 팔이 낀 것 같은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수도, 팔을 자르고 탈출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는 없는 존재이므로, 기상이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주어진 운명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때로는 선택지가 아닌것, 불가능이나 다를바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운명을 이겨내고 새로운 국면으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새로운 삶,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 늘 달콤한 것은 아니다. 마치 영구적으로 한쪽 팔 없이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운명을 극복하는 그 치열하게 끔찍한 선택이 결국 나를 나로서 살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27시간>은 주인공의 결정 그 자체보다, 그에게 그러한 불운이 닥친 이유에 더 집중하는 영화다. 그리고 팔을 자른다는 그의 선택이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었으나 영구적인 후유증을 동반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오만함으로 쉽게 망가질 수 있으며, 자연재해처럼 닥쳐오는 운명을 이겨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논조의, 비관적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시각에서 <127시간>을 감상하다 보면 어쩌면 용기보다 두려움을 갖게 된다. 늦기 전에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서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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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뒤의 얼굴
당신이 영원히 아름답기를 빕니다.
이 말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십대 한복판의 나였다면 축복이라 생각했을 지도. 아름다워지는 것으로 인생의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생각했던 나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생각한다. 그 말은 축복보다는 저주일지 모른다고. 아름다움은 많은 것을 주겠지.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앗아가겠지. 그 목록을 헤아려보지 않은 채로 쉽게 해서는 안될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아름다움으로 찬양을 받다가, 사람들이 원한 모습이 아니라고 수군거림을 받던 이들을 많이 보았다. 사랑한다 생각해본 적 없던 이들이었는데 그 죽음에 마음이, 몸이, 시리듯 아팠다. 그들의 죽음을 오래 숙고한 끝에 생각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긍정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얼마든지 "코르사주"를 벗어 던질 자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영원히 아름답기를 빕니다"는 인사를 들으며 정작 본인은 코르셋에 짓눌려 기절하던 엘리자베트 황후를 보고 한국의 여자 아이돌을, 또 그 영향을 받는 수많은 여자 아이들을 떠올렸다.
더없이 알려진 얼굴을 말하기는 쉬워 보인다
실존 인물 엘리자베트 황후의 삶은 어떻게 보면 여자 아이돌의 삶과 닮은 면이 있다.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미녀' 황후였고, '씨시'라는 애칭이 지금까지도 널리널리 전해져 온다.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이역만리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얼굴은 지금까지도 관광 상품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사랑받는 존재구나 하고 넘기기엔 엘리자베트의 일상이 편치 않았다. 머리카락 무게만 1킬로그램에 달할 만큼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프랑스어로는 코르사주 영어로는 코르셋이라 불리는 기괴한 장치를 허리에 대고 있는 힘껏 조여 신체를 압박해야 했다. "가짜 가짜 진심 없는 가짜"들에 둘러싸여 보낸 세월.
그 중에서도 영화 <코르사주>가 그리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순간은 마흔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한창 나이지만, 당대 유럽에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생이 저물어갈 날이 가까워지는 나이였다. 세간에는 자신을 운명적으로 사랑했다고 알려진 남편조차 그저 '얼굴'이 되기를 종용해 오는 세상에서 엘리자베트는 서서히 쇠해 가는 젊음, 그리고 거기 따라붙을 세간의 말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가 행해온 '철저한 자기 관리 노력'을 언급하는 문장들은 모두 기묘한 감정을 준다. 꼭 누군가의 기행을 수군거리는 말처럼 들린달까. 묘하게 그의 추락을 기대하고, 그의 나이 듦을 고소해 하는 듯 보인다면 착각일까. 코르사주를 너무 조이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대. 화장품에 엄청 집착했대. 머리 스타일에 자부심이 대단해서 머리카락 무게만 1킬로그램에 달하도록 길렀대. 그런데 글쎄 나이가 들수록 초상화 속 자기 얼굴을 보기 싫어해서 나중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지 뭐야. 어머나.
문장 뒤에서 어쩐지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세상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지만, 여성이 미를 향해 노력하는 순간 그 노력을 폄하한다. 세상이 강요하는 미의 전형도 정해져 있다. 살이 찌면 쪘다고 빠지면 빠졌다고, 성형을 했다고, 무표정했다고... 너무나도 많은 외면과 태도의 검열 조건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름다움이고, 그렇게 어렵사리 인정받은 아름다움은 너무나 한시적이다.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이었던 연예인들에게 어떤 악질 루머가 따라붙는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죽일 듯 달려드는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보라. 알려진 얼굴에 대해 말하기는 참 쉽다.
'알려진 얼굴' 뒤에도 사람 있어요
실존 인물을 활용한 시대극이라는 점에서 결말이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하고, 심지어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아예 제목부터 코르사주인 영화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엘리자베트라는 캐릭터의 주체성을 살릴 것인가 궁금했다. 바로 그 질문에 이 영화가 답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이 영화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알려진 얼굴" 뒤를 더듬는다. 물론 그가 1킬로그램에 달하는 머리를 고슬고슬 유지한 것도, 저체중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도 끊임없이 코르사주를 조이고 머리를 다듬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영화는 '외면'의 노력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황제보다 강하다고 상호 알고 있었을 정도로 훌륭했던 그의 펜싱 실력, 방에 링을 설치해 둘 정도로 '홈트'에 열성이었던 그의 자세, 시어머니의 '극성'에 반해 '외부 세계'로 데리고 나갔던 딸을 잃은 후 그가 느낀 고통과 그 이후의 자식들에 대해 느낀 애정, 평생 느낀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병동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점... 같은 "사실적" 요소들을 충분히 녹여 내면서도, "사실적" 기록에 기술되지 못한 그의 판단과 생각을 상상력으로, 그러나 충분한 설득력을 포함한 상상력으로 담아낸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온전히 전기 영화라 보기 어려움에도, 그 어떤 전기 영화보다 그를 가까이 느끼게 한다. 코르사주를 "조금 더!" 조이면서 그가 바라봐야 했던 현실을, 그 현실에서 그가 취해야 했던 태도를. 그러니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전기 영화보다 더 사실을 품고 있다 여겨질 것이다. 그의 코르사주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태도 또한 묘하게 현실적이다. 1킬로그램의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는 '왜 저렇게까지 기르는 걸까' 의아한 것인 한편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역작이 되는 것처럼.
언젠가 시대를 등져야만 했던 어떤 아름다웠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추대되고 내쳐졌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기록으로 담긴다면 나 또한 이 점을 가장 주목해서 볼 것이다. 그를 둘러싼 상승과 하락이 아닌, 오롯이 그의 발걸음과 그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어떤 전기영화보다 그 마음을 잘 담아냈으니, 잃어버린 어떤 여자들을 떠올리면 고마울 정도로 소중한 작품이었다.
얼굴 뒤의 얼굴을 본다면
사람마다 어울리는 삶의 양태가 제각기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그게 허용되지 않는 자리에서 종종 비극이 태동한다. 영화 속 엘리자베트는 가면 위에 가면을 덧써야 하는 자리에 앉아서도 자기 삶의 양태를 꿋꿋하게 지켜 나간다. 코르사주를 조이면서도, 머리를 기르면서도. 펜싱을 하고 말을 타고 사촌과 친하게 지내고, 비웃음만 사던 활동사진을 언젠가 사랑받을 거라며 긍정하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딛고 미래를 긍정하는 인물은 당대 여성에게 기대되는 인물상이 아니었다.
대신 당대 여성에게 기대되었던 "코르사주"는 이 영화의 공기에 묵직하게 담겨 압박감으로 전해져 온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옥죄었는가. 과연 오늘 이 영화를 보는 21세기의 여자들은 그 코르셋에서 자유로운가. 너무 과하게 익숙해진 나머지 가끔은 자신조차 미소에 감춰둔 얼굴 뒤의 얼굴이 없는가.
얼굴 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아름다운 초상화로만 존재하던 엘리자베트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 엘리자베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풀나풀 춤을 추는 엘리자베트까지. 다 보고 나면 이 영화는 새로운 초상 정도가 아니라 초상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수준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비는 말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 말이 축복이 아니어도 되는 세상에서 각자의 양태대로 행복한 세상이 오길. 그 날까지 이런 영화는 계속 나와야 할 것이다. 자유로워야 했고 자유롭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그 모든 위대했던 여자들을 위하여.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2022년 12월 21일 오늘! 개봉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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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나를 위한,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가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매 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공들여 쓰여졌다는 게 느껴지는 드라마 정말 오랜간만에 찾았다. 어느 대사 하나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은데, 최소한 나에게는 너무나 취향이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덕질하자고 꼬셔보려고 한다. 과연 내 구구절절한 글로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1. 폐부를 찌르는 대사의 향연
이 드라마의 장르를 나눠본다면, 휴먼 80/로맨스 20 정도가 될 것 같다.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드라마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 너무 잘 느껴지는 드라마이다. 관계가 가진 성질은 다양해서 가족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연인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동료와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연인 간의 관계의 실패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동료와의 관계 등으로 관계 자체에서 염증을 느끼는 두 남녀, 구씨와 미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추앙"을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새로운 사람에게서 치유받고자 하기 위함일까. 결국 인간은 사람에게 질리면서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대사 하나하나에서 내 인생을 돌아볼만한 묵직한 대사들이 많았다.
“싫을 때는 눈 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이 대사가 내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 폐부를 찌르는 대사였다. 처음 만나서 어색함에 아무말이나 해야 할 때, 상대가 하는 말도 아무말이구나 싶을 때,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오는 현타. 그리고 그 상황이 종료되고, 한창 말 잘하고 나와서 '내가 그런 말을 하고 나왔지. 쓸데없는 말이었는데."하는 자책에서 비롯된 두 번째 현타. 구씨의 대사에서 이런 내 모습이 투영되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요 근래 내 자신을 왜 좋아할 수 없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대사에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이 하는 이야기가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지치면, 그 지친 감정은 곧 짜증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리곤 후회한다. 그 사람은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을 텐데,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저 들어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미안해진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비판하며, 또다시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면서 남을 비판했을 때, 내가 나에게 느끼는 위선적 혐오감, 나는 오늘도 마음으로 삭히지 못하고, 또 감정을 표출해내고야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느라 지쳤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하나의 인간 관계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함. 그렇게 쿨한 척 하지만 한없이 소심한 내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책. 이 생각의 잔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에게서 내 자신을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신경쓰는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결국 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간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 인생은 혼자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 온전히 혼자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완전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공허함을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사를 통해 '맞아, 나도 그런 비슷한 느낌 받았었어'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2. 왜 하필 추앙일까.
계속 궁금했었다. 왜 작가는 연애하자는 말을 추앙이라고 바꾸어 표현했던 것일까. 처음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읭?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의 그 의문스러운 느낌 때문에 많은 뇌피셜 해석들을 찾아봤었는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들어갔다고 해석하신 분들이 꽤나 많았었다. 그 해석에 대해 많이 동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세계관이고 뭐고 그냥 단순하게 해석해서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내가 좋으면 그냥 좋다고 표현할 거라는 대사에서 이 추앙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정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신선하고, 미정이라는 캐릭터의 걸크는 여기에 핵심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거 말고, 그냥 나는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내가 하고 싶은 감정적 표현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미정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술에 절어사는 상대(구씨)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 그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시작한다는 개념이 너무 신박하다고 느껴졌고, 그런 담백하지만 묵직한 표현을 통해 구씨가 미정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싫어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명의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미정의 말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라 나를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 덕분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는 메시지가 너무 가슴 따뜻해진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로맨스는 참 많지만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다. 나의 경우,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사랑해보는 연습부터 해봐야 겠다.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할 한 사람은 필요하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너무나 침체되어 있음을 느끼기에.
요근래 참 나에 대한 고찰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 나는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그냥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야겠다. 남을 신경쓰지 않는 척했던 과거를 지나 정말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3. 삶이 힘든 그대에게
지금 이 시각,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무래도 열린 결말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하수구에 떨어질 뻔한 위기의 동전을 구하고, 편의점에서 샀던 술을 노숙자에게 준 걸로 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고,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화류계를 떠나고, 정말 술을 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술을 끊는 첫 스텝은 밟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구씨는 조금씩 미정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을 거다. 아무래도 작가님은 각자가 원하는 결말을 알아서 상상하라는 의도로 그런 결말을 내신 것 같으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내련다.
삶이 힘들고, 연애가 지치고, 친구 관계도 염증이 날 때, 미정의 상황, 기정의 상황, 창희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추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 내 안에서 답을 내지 못한 답답함을 뚫어내는 잔잔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방일지에 스며들며, 이들의 말에 공감하며, 이들의 캐릭터가 대단히 성공하지는 못해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들을 "추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응원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응원, "추앙"을 받고 싶다. 그렇게 여러분들도 세상의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추앙"받는 삶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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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게임」 이병헌 비하인드 스토리 최초공개(?)ㅣ팬메이드 스포일러 (*오피셜이 아닙니다)ㅣ오징어게임 리뷰ㅣSquid Game Review ByungHun Lee
? "오징어 게임 리뷰" 영상(*스포주의)"
오피셜이 아니라 제 멋대로 만든 겁니다
재미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프론트맨 이병헌 출연
팬메이드 비하인드 스토리
▶영상에 활용 된 이병헌 영화 및 드라마 필모그라피
- 번지점프를 하다
-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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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
- 쿠팡플레이 싱글라이더 배달 쿠팡이츠 SNL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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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발견한 가장 빛나는 만남”
열아홉 윤영은 엄마와 단 둘이 살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기도 하지만, 얼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장에서 일하는 청각 장애가 있는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뿐.
착한 마음과 성실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뜻밖의 사고는
윤영을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돌변시켜 교도소에 몰아넣고
‘윤영’이라는 이름대신 ‘이.공.삼.칠.’이라는 수감번호로 불리게 만든다.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10호실 동료들은 윤영을 지켜주기 위해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데…
반드시 돌려줄게 너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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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사랑한다고 말해줘> 메인 예고편
들을 수 없어도 말할 수 없어도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 서로 다른 세상에 찾아온 사랑 이야기❣️ [사랑한다고 말해줘] 11월 27일 디즈니+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