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0-24 10:06:37
10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미국판 <오징어 게임>, 데이비드 핀처 참여

국내에서는 <나를 찾아줘> 등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미국판 <오징어 게임>에 참여합니다.
<오징어 게임: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드라마는 리메이크가 아닌 미국을 배경으로 한 스핀오프 시리즈로 변경되어 원작의 캐릭터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으며, 2025년 말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올해 초 The Playlist의 로드리고 페레즈는 핀처가 2021년부터 이 스핀오프를 구상해 왔으며, 이는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시기와 맞물린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핀처는 <차이나타운> 프리퀄 프로젝트를 뒤로 미루고 <오징어 게임>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넷플릭스는 아직 이 프로젝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페레즈에 따르면, 지난해 핀처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드라마 <유토피아>의 작가 데니스 켈리를 영입해 각본을 맡겼으나, 켈리가 여전히 참여 중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CGV아트하우스 20주년 기획전

CGV아트하우스가 20주년을 맞아 기획전을 개최한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은 연도별 한국 독립영화 화제작과 국외 예술영화 화제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수꾼>, <잉투기>, <우리들>, <홀리 모터스>, <문라이트> 등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관객 수 역대 1위 작품인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시네마톡의 첫 작품인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도 상영될 예정입니다.
정식 개봉을 놓쳐서 아쉬웠던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닐까요?
한스 짐머 <듄: 파트 2>, 오스카 레이스 탈락

<라이온 킹>과 <듄>으로 두 차례의 오스카를 거머쥔 바 있는 음악감독 한스 짐머의 올해 수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카 아카데미 규정에 따르면, 후속작이나 프랜차이즈 작품의 경우 기존 음악의 20% 이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듄: 파트 2>의 경우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한스 짐머는 Variety와의 인터뷰에서 상을 위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듄: 파트2>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러운 결말을 향해 테마를 확장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쓰여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차기작 화려한 배우 캐스팅

<레버넌트: 죽음으로 돌아온 자>로 오스카를 수상했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차기작에 캐스팅된 화려한 배우 라인업이 화제입니다. 톰 크루즈를 필두로 산드라 휠러, 리즈 아메드, 존 굿맨, 마이클 스털버그, 제시 플레먼스 등이 출연할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냐리투의 영화는 "세상의 가장 강력한 인물이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임을 입증하려고 미친 듯이 나서지만, 자신이 촉발한 재앙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에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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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래빗: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서' 리뷰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치킨래빗: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서
(23.03.18 개봉 예정)
감독: 벤자민 모스퀫, 벤 스타센
더빙: 박시윤, 김용 등
CGV 회원 시사로 먼저 보고 온 '치킨래빗'!
주토피아 제작진이 참여한 작품이라고 해서,
그리고 동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저라서
더더욱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요!
우선 총평을 내려 보자면... 개인적으로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공짜로 봤는데도 별점 2점... 정도??
15,000원 제값 내고 보기엔 아주 아까운 ㅠㅠ
그러나 미취학 아동은 아주 좋아할 거 같은 영화였답니다
머리 좀 크고 나니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지브리 아님 못 보겠더라고요 하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제목과 같이 토끼+닭 혼종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데 아마 다문화 가정 등을 표현한 듯해요
'외적으로 어떤 모습이든 나는 나다'라는 명대사 아닌 명대사가 나오거든요
아무튼 주인공이 나라의 영웅이 되기 위해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그린 애니메이션인데요
빌런이 삼촌이라는 점이 신박했고 주인공이 왕족이라는 점도 새로웠어요
보통 모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하위 계층이지만 명랑한 행동파 캐릭터가 많잖아요
이렇듯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설정이 많은데 그걸 다 이용하지 못한 거 같달까요?
왕(아빠)-빌런(삼촌)의 이야기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고
주인공이 왜 치킨래빗이 된 건지도 나오지 않고
주인공을 무시하는 친구들의 감정 변화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거 같아요
영화 초반엔 주인공을 엄청 적대시하는데
영웅으로 등극하자 갑자기! 호의적으로 바뀌었거든요
친구들간의 감정선을 조금 더 그려 줬으면 하는 아쉬움...
그리고 스토리적으로 쪼이는 맛이 없달까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났다면 그만 한 벽이 있고,
그걸 헤쳐나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가는 길마다 너무 쉽게 열려요
주인공 무리가 낭떠러지에 갇혀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 게 최종 관문이었는데요
친구의 명언에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닭의 날개가 생기면서 날아오르는 주인공,,,,,,
본인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다가 닭이 된 거면 엄청나게 감동적인 장면인 거잖아요??
관객 울릴 수 있을 만큼 신파적인 장면인데도
감동은커녕 신기함조차 없는 지나가는 씬 1이었어요
또 악당 무리 말고도 한 번의 고난이 있었는데요
돼지족...? 들한테 잡혔을 때였어요
주인공 무리를 화산에 던지겠다며 가둬놨는데 한창 도망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날아올라요 또...
지금 생각해 보면 점점 닭이 되어 가는 걸 표현하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그 표현이 굉장히 섬세하지 못하고,
본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인공이 역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만든
하나의 장치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냥
게다가 주인공 앞길을 막으려던 악당 무리가
산사태를 본인들에게 일으켜 갑자기 죽더니
뒤에 가서 죽은 줄 알았지? 하면서 나타나요
허무+어이없음의 연속 . . .
맨 처음 말씀드렸듯이 미취학 아동까지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시각적으로 재미있고 코믹한 그림이 많거든요
그러나 스토리는... 완성도가 낮았단 점!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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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리듬감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라면 카메라가 놓일 공간과 조명의 위치로 인해 인물 동선과 장면화의 많은 제약들이 애니메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른데 픽사, 디즈니,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 모두 그들만의 독특한 리듬감이 전달하는 감흥은 꽤나 아름답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봇 드림> 또한 그 특유의 리듬감이 꽤나 아름답다. 하지만 이 리듬감에는 독특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어떤 확신에서 오는 감흥일 것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많은 오마주들을 확인시켜준다. <이터널 선샤인>, <오즈의 마법사>은 감독이 인정한 레퍼런스고 관객들은 <A.I>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뮤지컬 영화인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오즈의 마법사>와 동시에 떠오른 이 뮤지컬 영화가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외에도 <첨밀밀>이나 <라라랜드>, 자크 타티 영화의 면면들이 보이고, 핼러윈 날에는 <샤이닝>, <나이트메어>, <뱀파이어> 등이 보인다. 물론 <사이코> 같은 영화들은 분명하다. 이 레퍼런스들은 단지 씨네필들을 위한 숨은 그림 찾기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로봇 드림>에서 대사는 들어오지 않는다. 무성 영화의 리듬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그와 로봇의 움직임과 쇼트들의 결합은 꽤나 인상적이다. <Septepber>가 흘러나올 때의 몽타주 시퀀스는 흥미롭다. 특히 이 음악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 생일이 9월이어서 사용한 음악이라고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가사에서 명확하게 가리키는 날짜가 9월 21일이고, 감독의 딸 생일도 9월 21일이다. 영화에서 해수욕장이 폐장되는 건 9월이다.
우선 영화 제목부터 보자. 로봇 드림. 로봇의 꿈.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이 제목에 의아했다가 수긍했다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도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외로운 도그, 옆에 있어줄 누군가를 찾다가 로봇을 주문한다. 로봇은 친구가 되고, 특이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 뒤로는 도그와 로봇의 시간을 각각 보여준다. 하지만 제목이 로봇 드림인 것은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오는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의 질문이었다.
복기해 보면 로봇의 첫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지만 도그가 집에 없다. 두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서 그를 보게 되지만 그는 다른 로봇과 있다. 세 번째 꿈은 위에서 언급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처럼 뮤지컬 시퀀스로 진행되면서 하나의 화폭 안의 꽃들이 도그의 형상으로 끝맺음을 한다. 혹은 <오즈의 마법사>로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이 꿈들을 이어붙여보면 도그를 찾아갔지만 없었고, 배신당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도그를 기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그의 꿈은 어떠한가. 도그의 꿈은 로봇의 꿈보다는 훨씬 꿈처럼 느껴진다. 눈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 볼링을 치러 간다. 볼링장에서 웃음거리가 된 도그는 꿈에서 깬다. 마치 악몽을 꿨다는 듯. 도그의 꿈엔 로봇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원하지만 미끄러진다. 이건 마치 도그가 로봇과 헤어진 뒤에 겪는 일들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도그는 로봇의 구조를 실패한 뒤 스키장에서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덕이라는 멋진 오리를 만나 사랑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여기서 <로봇 드림>의 제목이 왜 도그 드림이 아니라 로봇 드림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지만 로봇은 도그를 사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잔인함 중 거의 대부분은 로봇이 당하는 폭력에 맞춰져 있다. 로봇은 다리가 잘리고 폐기처분된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살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인데 그렇게 잔혹한 행위에서 자신을 살려낸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애인(?)이다. 로봇은 아직 도그를 그리워하지만 새로운 사랑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봇은 이제 꿈을 꾸지 않는다. 상상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가정을 한다. 자신이 도그와 재회를 하게 된다면 관계가 꼬일 것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렇기에 로봇은 도그와의 재회를 포기한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플래시 포워드는 그들이 함께 했을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로봇의 가정은 그들이 함께 한다면의 미래를 그린다. 함께 한다면이라는 가정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위험한 혹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왜 배경이 1980년대 뉴욕인가. 감독은 왜 뉴욕에 보내는 러브 레터라고 이야기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곱씹어 보면 이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들과 예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불길한 이미지들 몇 가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히치콕의 <사이코>,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리즈를 낳은 <나이트메어>의 이미지들과 함께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우디 앨런의 <맨해튼>이 나왔던 것도 빼놓을 순 없겠으나 감독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여기에다가 하나 더. <Septepber>는 9월이다. 9월과 세계무역센터. 그리고 80년대는 중동의 전쟁이 미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그때가 아닌가.
미국의 1980년대는 60년대부터 이어진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 안정된 시기로 일컬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백래시 현상부터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지닌 시기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로봇 드림>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또 하나의 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로봇이 해수욕장에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태어난 아기 새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한다. 이 희망찬 동화 아래에는 물질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는다. 이제 곧 고물상이 다가와 로봇을 수거해 만신창이를 만들고 분해할 것이다.
도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멋진 덕을 만난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멋있게 질주를 한다. 게다가 성격도 아주 쿨하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떠나버린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 결국 도그는 생명체를 만나지 못하고 방수 로봇을 구입(!) 한다. 이 영화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고 동물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동물과 로봇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한다. 만약 로봇이 생명체라고 인지되었다면 그는 폐장된 해수욕장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다리가 잘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분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든 즉각적인 생각은 성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4인의 결합은 불가능 한가였다.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인간 세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인데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는 불만에 툴툴거렸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알겠다. 4인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곳이 뉴욕이기 때문이다. 도그가 로봇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 도시의 규율 때문인 것처럼 로봇은 뉴욕의 규율 때문에 도그와 재회하지 못한다. 80년대 뉴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굉장히 엄격한 곳이다. 희망찬 곳이었지만 눈물이 들어찰 공간이다.
2024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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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
느껴야만 하는 합당한 감정이 왠지 좀처럼 터져 나오지 않고 몸속 어딘가 꼭 박혀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어딘가 있는데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 기분. 난 느끼지 못해도 내 몸 어딘가는 그 감정을 그대로 전달받는다.
전달받은 곳은 고장이 나 삐그덕거린다. 발광하기도 하고 일부로 날 괴롭힌다. 그렇게 화가 나고 아픔을 느끼면 마음이 놓인다.
살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반복한다.
아내를 만나고 장인어른 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계획적이고 완벽하게 산다. 그러나 자기가 빠져 있는 일이 아니면 게으르고 무심하다.
물이 새는 냉장고에도, 그리고 아내에게 마저도.
아내를 무심히 여기고 놓치고 살던 그는 아내가 떠나고도 마치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은 듯 아무렇지 않게 지낸다.
슬프지가 않다. 그렇지만 왠지 삐그덕 거린다. 어딘가에서 위급상황을 외친다. 매미나방이 심장을 갉아먹었다.
문제점을 찾기 위해 분해를 시작했다. 모든 걸 부수고 나면 조금 나아졌다. 전과 다른 충동적인 삶을 산다. 파멸, 파괴 그것만이 흥미롭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주는 관심. 조금 무심할 수도 있지 바쁘고 힘들면 그럴 수 있지.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다. 날 아직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관심. 그게 없이는 사랑이 아닌 걸까?
"전에 못 보던 것들이 갑자기 눈에 띄기 시작해요. 어쩌면 보긴 봤는데 무심하게 본 거겠죠."
오랫동안 아프던 마음이 사소한 위로 한 마디에 행동 하나에 싹 낫는 일이 있다.
어떤 정신질환 약과 치료보다 강한 게 누군가 날 사랑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 관심을 받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무엇보다 강력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미루고 놓친다. 꼭 잃고 나면 그제야 깨닫고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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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는 어디 도망 안 가요
“파리는 어디 도망 안가요”
서둘러 파리에 가야 한다는 앤에게 자크가 말한다.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여유가 없을 때면 문득 이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대사이다.
영화 제작자로 성공한 남편 마이클을 따라 칸에 온 앤은 귀가 아파서 다음 행선지인 부다페스트를 포기하고 파리로 가기로 한다. 마이클의 지인인 자크도 파리까지 갈 일이 있다고 하며, 앤을 데려다 주기로 하고, 그렇게 칸에서 차로 7시간 거리인 파리까지 함께 가게 되는데…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닌 여정을 여행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감독인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지인과 가는 7시간의 긴 여정은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럽다. 빨리 달려 목적지에 도착해 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을 것 같다. 앤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크는 자꾸만 샛길로 빠진다. 예정에도 없던 기나긴 식사와 와이너리 투어, 낡은 자동차가 멈추는 상황에서도 피크닉을 즐긴다. “마네 그림 속에 있는 척하죠. 풀밭 위의 점심” 같은 피크닉이라니. 어떤 상황에서도 낭만의 순간을 발견하는 사람의 태도에 영화를 보는 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웃음에 마음이 행복함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다.
영화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 속을 달린다. 프로방스를 거쳐 리옹을 지나 부르고뉴를 들러 파리로 가기까지 프랑스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 영상에 스토리를 입힌 것처럼 생 빅투아르 산, 엑상프로방스, 라벤더, 가르수도교, 오벨리스크, 비엔 리옹 뒤미에르 박물관, 베즐리에 성 막달레나 대성당, 폴보퀴즈 시장…
가 본 곳을 추억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만들며, 그 여행에서 영혼을 달래줄 음식을 먹고, 마네와 르누아르의 그림속에 있는 것 처럼 순간을 즐기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며 인생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중년의 사랑이나, 불륜에 대한 이야기 일수도 있다.
하지만…나는 이 영화에서 행복과 자아에 대한 질문이 더 크게 다왔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여정이 다르기에 현재 가지고 있는 가치관도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향도 다르다.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삶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 특히 내가 나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오늘은 자크가 앤에게 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뭐가 당신을 꿈꾸게 하죠?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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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랑이니까, 마미 (2014)
가족과 사랑, 이 두 가지 요소는 자비에 돌란의 영화들에서 늘 존재한다. 그의 페이지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사랑의 환희와 아픔을 맛보고, 혼란을 겪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 곁에는 항상 그들의 가족이 맴돌고 있다. 돌란은 그 중 ‘엄마’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그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단 하나뿐인 인물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미>는 ‘엄마’의 전형적인 틀에서 다소 벗어난다. 다시 말해 자식을 향한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사랑을 다루지는 않는다. ADHD와 애착 장애가 있는, 다소 불안정한 스티브가 보호시설에서 나온 뒤 엄마 디안의 모험 같은 나날이 시작된다. 극의 초반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교통사고처럼, 그들의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가 없다. 둘은 집 안의 물건이 부서지도록 살벌하게 싸우기도 하고,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며 언쟁을 벌이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너무도 사랑한다. 디안은 다정함보다는 특유의 발랄함과 불같은 성격이 돋보이는 엄마로, 스티브와 치고받는 하루가 가장 평범한 날이다. 이들의 일상 속, 이웃집에 사는 카일라가 합류하게 되며 그들의 시간은 더욱더 다채로워진다.
디안, 스티브, 카일라는 모두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디안은 남편을 잃고 통제가 어려운 아들을 시설에 보낸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스티브는 아빠를 잃고 그 상처로 인해 급격히 행동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카일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말을 더듬게 된다. 그의 방에 놓여있던 남자아이의 사진으로 보아 그의 아들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들은 각각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통해 그 결핍을 조금씩 채워간다.
<‘마미’만의 아이덴티티_색감(빛)과 화면 비율, 그리고 사운드트랙>
이들이 함께하는 순간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대범하고, 강렬한 색감들로 둘러싸여 있다. 눈부시게 쨍한 푸른 하늘과 디안의 화려한 옷들, 스티브를 둘러싼 노란빛들은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들과 확연히 대비된다. 특히 스티브의 등장 장면은 그가 사랑스러운 아이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보호시설에 도착한 디안에게, 인터폰을 통해 쏟아지는 험한 말들로 스티브의 충동적이고 거친 면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일종의 긴장감이 생기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그는 예상 밖의 모습이다. 엄마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환한 미소를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이다. 이때 유난히 디안과 스티브를 비추는 빛은 너무도 따스하다. 극 중 등장하는 옆광의 활용 또한 인상적인데, 인물보다는 뒷배경의 색이 돋보이며 불안정한 인물의 모습을 강조한다. 신문의 구인광고면을 보며 일자리를 찾는 디안과 홀로 남겨진 스티브를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을 대신해 준다.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면 비율도 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확연히 차이를 둔다. 일반적인 화면비와는 다른 1:1의 비율을 유지하는데, 이로 인해 불필요한 것들은 덜어내고 손과 눈빛 등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줄곧 정사각형 비율을 유지하던 화면은 두 번 넓어진다. 한번은 세 인물의 행복한 순간, 다른 한 번은 엄마가 스티브의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이다. 넓어진 화면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지만, 곧바로 인물이 막막한 현실을 인식함에 따라 화면은 다시 닫힌다. 이 두 장면은 어쩌면 이들이 가지지 못할 평범하지만, 먼 꿈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영화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화면의 크기로 확실히 각인한다.
사운드트랙 또한 그중 일부이다. 돌란의 영화 속 노래들은 인물의 상황이나 감정이 묻어나오는데, 이는 대사의 또 다른 연장선이기도 하다. <마미>에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곡은 의도된 배경음이 아닌 인물의 일상에서 나온다. 스티브가 CD 플레이어를 작동시키거나, 카일라가 차 안에서 듣는 것처럼 인물이 주체적으로 음악과 함께한다. 여러 노래가 있지만, 세 가지만 소개하겠다. 스티브의 첫 등장씬에서 나오는 Dido의 White Flag의 가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항상 너를 사랑할 거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가사는 디안의 스티브를 향한 마음을 읽는 것만 같다. Ludovico Einaudi의 Experience라는 곡은 감독이 <마미>를 만들게 되는 첫 시작점이 되었다. 곡을 듣고 난 후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떠올렸던 돌란은 이 영감을 영화에 녹여냈다. 극 중 엄마 디안의 상상 장면에 쓰이는 노래에 맞게 화면은 잡을 수 없는 미래처럼 뿌옇다. 마지막, 밖으로 달려 나가는 스티브와 함께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Lana Del Rey의 Born To Die는 제목에서부터 의미가 있다. 여기서 Die는 그의 엄마인 디안 다이 데프네의 미들 네임으로, 스티브의 엄마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대신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마미>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에요>
영화에서 제시한 가상의 법안인 S14는 이렇게 말한다. ‘행동 문제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가 위험에 처할 경우, 법적 절차 없이 아이를 공공병원에 위탁할 수 있다.’ 이는 디안과 스티브의 삶에 화두를 던지는 부분이자, 엄마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이를 공공병원에 위탁하는 것, 과연 이 행동이 엄마로서의 잘못된 방식인지, 그렇다면 과연 보호자로서의 옳은 행동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에요.’ 스티브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 여긴 보호시설 직원이 한 말이다. 이에 디안은 비관적인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며 당당히 맞섰지만 현실의 무게는 버티기에 쉽지 않다. 결국 디안은 서로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고, 이들은 또다시 이별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태도가 <마미>에서 말하고 싶은 바이다. 디안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스티브를 병원에 보낸 것이라고 하며, 그렇기에 자신은 늘 승자였다고 한다. 그의 말이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이는 절대적인 부모의 역할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겼지만, 이는 곧 회복될 것이란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감정과 꿈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돌란의 말처럼,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승리자이다. 어쩌면 사랑과 구원은 별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 또한 사랑의 다른 형태로써, 이들이 가장 잘하는 이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고, 그렇기에 희망을 품을 이유가 충분하다.
‘마미’는 어린 시절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말로 여겨진다. 영화의 제목을 보편적으로 엄마를 지칭하는 말인 ‘마더’가 아닌 ‘마미’로 표현한 것에는 분명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늘 엄마를 위해 살겠다는 스티브의 애정 어린 표현이자, 언제나 우리를 제일 사랑하는 그들에게 바치는 돌란의 존경 담긴 메세지가 아닐까. <마미>는 그렇게 결국 현실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의 삶을 낭만적으로 말한다. 엄마와 아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엄마는 스티브가 항상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이자, 우리에게도 그런 장소이다. 이들은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항상 서로에게 의지한다. 마지막 병원에서 달려 나가는 스티브 또한 디안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좀 더 나아질 것만 같은 앞으로의 나날들, 그 한 줄기 빛은 나의 엄마, 그리고 사랑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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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안전이라는 이름의 폭력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탤릭체에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네모 칸의 타이포와 함께 영화는 시작한다. 학생들이 어디론가 걸어가는 장면들을 제시한 후, 카메라가 비추는 밤의 풍경에서 학생들의 실루엣은 사라졌지만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학생들의 목소리만이 흘러나온다. 영화의 타이포에 반듯하고 굵은 이탤릭체가 눈에 먼저 들어오고 카메라가 학생들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듯, <해피엔드>는 주체의 시선으로 선택한다. 오프닝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말하는 화자 대신 듣는 청자를 비추거나, 전혀 상관없는 배경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림자를 찍기도 한다. 이런 카메라의 규칙은 교장과 그 옆의 선생들 등 권력자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의 장면에서 화면의 정중앙에서 말한다.
또한 시위나 지진의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데모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지진의 상황에서는 소리 없이 흔들려 떨어지는 물건만을 보여준다. 학생들의 교장실 칩거 농성도 처음 교장실을 점거할 때의 장면이 아닌 이후 교장실에서 대치하는 장면을 선택한다. <해피엔드>가 주체의 시각을 선택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에 있다. 인물들이 다니는 학교는 하얗고, 24시간 돌아가는 감시카메라와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 ‘안전’한 곳이다. 뉴스 속 총리는 시만들의 안전을 주장하고 이민자들에 대한 엄중한 배제를 약속한다. 언뜻 보면 ‘안전’해보이는 세상이지만 그 근간에는 소수자들에 대한 ‘타자화’가 깔려있다. 카메라가 시위와 지진을 숨기듯 세상또한 시위와 지진을 숨기며 ‘안전’한 사회처럼 보이게 만든다. 소수자인 문제아, 이민자, 재일외국인들은 학교와 세상 속 권력의 시선을 피해 숨거나, 숨겨져야 한다.
깔끔한 건물과 좋은 차가 있는 만들어진 사회와 달리, 진짜 사회는 어둡고, 구름 가득한 하늘에는 붉은 글씨의 뉴스가 뜨며 매일 지진 재난 문자가 날아든다. ‘안전’의 이면에서 사는 학생들이기에 학교, 사회가 애써 감추고 있는 부조리함을 본다. 그러나 같은 문제아로 치부되어도 유타와 코우는 동일한 선상에 서 있지 않다. 유타가 교장의 차를 보며 같이 장난을 치자고 권유할 때, 학교에서 야타와 경찰을 주제로 농담을 할 때 유타는 고개를 들고 서있지만, 코우는 허리를 굽히고 있다. 유타와 코우가 클럽이 있던 장소에서 말다툼을 할 때도 코우는 서있는 반면 유타는 고개를 숙이고 디제잉에 집중한다.
초반의 장면, 경찰의 단속으로 사람들은 클럽에서 빠져나가고, 코우도 사람들처럼 클럽을 떠나려하지만 음악에 심취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유타를 보고 돌아온다. 또, 유타의 집에서 제일 먼저 집밖을 나가는 건 코우다. 아이들은 코우를 선두로 차례차례 집을 떠나지만 유타는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다. 위 장면들은 유타와 코우의 성격을 보여준다. 코우는 재일외국인으로 엄중한 잣대 위에서 살아간다. 유타가 경찰에게 잡히면 단순한 학생의 일탈로 치부되지만 코우는 자신의 존재와 삶을 위협받는다. 교장의 차에 장난을 치려는 유타를 말리거나, 교장실 점거 농성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도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타는 동아리실을 폐쇄하고 음악 기기를 창고에 옮기자 혼자서라도 그 기기들을 훔쳐오는 즉흥적인 인물이다. 코우의 시선으로는 같은 짓을 해도 유타와 자신에게 다른 결과가 따르는 현실과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기는커녕 아무 생각 없어만 보이는 유타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반면 유타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바뀌지 않았으나 한마음 한뜻으로 어울리던 친구들이 점차 흩어지고, 다른 목표를 찾아 떠나가는 것에 소외를 느낀다.
이 둘의 갈등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해소된다. 유타는 악기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시위하는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다 경찰에 붙잡혀 끌려 나가는 장면을 본다. ‘안’이라는 유타의 공간에 ‘밖’이 침범하게 되고, 이후 같이 서드 앰프를 옮기던 코우또한 증명서를 요구하는 경찰에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본다. 이는 유타가 코우가 서 있는 위치가 자신과 다른 ‘밖’임을 인식하게 되는 장면이다. 영화의 후반부, 교장실 점거 농성이 있은 후 교장의 연설에서 학생들은 교장의 감시카메라 철폐에 환호하는 쪽과 ‘예방’의 효과가 있다며 반대하는 쪽으로 나뉜다. 이때 환호하는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코우와 달리 유타는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위치한다. 자신의 차에 장난을 친 범인을 고발하면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교장의 조건에 유타는 범인이 자신임을 고백하고 퇴학당하며, 비로소 안에서 밖으로 이동하게 된다.
코우는 후미와의 만남으로 성장한다. 후미는 일본인이지만 재일외국인들이 받는 차별에 관심을 가지고, 시위에도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인물이다. 후미와 만나며 코우는 시위에도 참가하는 등 방어적인 기제를 조금씩 벗어가지만, 시위 사실을 학교에 들키고 장학금을 빌미로 협박받는다. 이런 일들이 있고, 코우는 후미를 필두로 교장실로 점거 농성을 하러 가는 무리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헬멧을 쓰고, 김밥을 챙겨 교장실로 들어간다. 코우가 일본인과 재일외국인이라는 차이로 유타에게 일방적으로 가졌던 질투와 억울함을 후미의 존재를 통해 해소하고, 밖에서 안으로 이동한다.
<해피엔드>에 나오는 지진과 EDM, 시위는 모두 ‘흔들림’으로 묶인다. 사람들은 지진을 재난으로 보고, EDM을 불량하고 방탕하다 여기며, 시위를 폭력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유타가 세워놓았던 교장의 차가 지진으로 전복되어버리고, 점거 농성이 인권을 침해하는 감시카메라 철거를 이룬 것처럼 이런 흔들림들은 해방과 저항으로써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단 한 번의 흔들림이 기분 좋은 결말을 가져올 수 없음을 시시한다. 유타와 코우의 갈등에서도 해소와 성장의 암시만 있을 뿐, 직접적인 장면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코우가 여전히 유타를 두고 먼저 계단을 내려가듯, 둘이 완전히 동일 선상에 서게 된 것도 아니다. 영화의 결말부, 코우가 대학 장학금을 받고 손님들이 환호하는 장면에서 가만히 멈춰져 있던 전등은 환호하는 손님의 머리에 부딪치며 다시 요동친다. 지진은 완벽한 사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지진이 일어난 후에도 새로운 부조리함은 생겨난다. 그러나 적어도 지진을 멈추지 않는 한, 새로운 사회는 잉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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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8] 복제인간이 묻는 삶과 죽음의 의미-영화 서복
공유와 박보검 배우가 주연한 영화 서복이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불신지옥, 건축학개론을 연출했던 이용주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인데요.
이번에도 드라마적인 이야기가 강한 영화입니다.
복제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SF장르의 표피를 두르고 있고 액션도 가미되어 있는데요.
이 영화는 볼거리 보다는 두 주인공 기헌과 서복의 관계를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양하고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하실 거에요.
그래도 공유와 박보검의 연기가 좋은데, 특히 박보검 배우는 서복과 너무 잘 맞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샹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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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화 서울의 봄 - 이 영화에 담긴 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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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레빗구미입니다. 오늘은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이 영화는 1212 사태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인 사건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
?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두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감정의 격동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전두광의 탐욕과 이태신의 분노, 그리고 국민의 허탈감까지, 이 영화는 다양한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 황정민과 정우성의 연기는 각각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군사반란과 그로 인한 국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린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 이 영화가 갖는 감정적 가치를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서울의 봄'을 꼭 관람해보세요. 감독 김성수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여러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 '서울의 봄'에 담긴 감정들을 직접 경험해보세요. 영화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저희 채널을 구독하고 다음 리뷰를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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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트랜스포머 : 비스트의 서막> 1차 예고편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압도적인 신작 그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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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사람도, 강아지도 '개' 귀엽다! 행복만 가득해지는 [도그데이즈] 메인 예고편 공개? 2024년 기분 '개' 좋은 영화 2월 7일은 극장에서 [도그데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