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4-10-09 23:15:42
오컬트는 외피일 뿐, 피할 수 없는 잔혹극!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리뷰
올해는 유독 인상깊은 호러 영화가 관객을 찾고 있다. 상반기만 하더라도 <오멘: 저주의 시작> <악마와의 토크쇼>가 있었고, 하반기에는 <이매큘레이트>를 시작으로, 다수의 호러 영화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그 중 한 편이 바로 아르헨티나에서 건너 온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다. 개봉 전 부터 화제를 모으며 평단과 장르팬 들이 무한 지지를 보낸 영화는 오컬트를 외피로 사용하면서 섬뜩하고도 피할 수 없는 잔혹극을 펼친다. 소리도 낼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수위는 가히 최상급.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수위보다 더 무서운 건 절망적인 아르헨티나의 현실이다.
외딴 마을 한 농장에서 참혹한 시신이 발견된다. 인간도 맹수의 짓도 아닌 것 같은 시신의 모습을 본 페드로(에세키엘 로드리게스)와 하이메(데미안 살로몬) 형제. 이후 사건의 실마리를 찾다가 마을 외딴 곳에 숨어 지내는 한 가족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악령에 빙의된 후 온 몸이 부패해가고 있는 한 남자가 누워 있다. 그의 엄마는 당국에 신고를 했지만, 방치했다는 이야기를 두 형제에게 말한다. 그 시각, 자신의 농장 지역에서 일어날 불길한 일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농장주 루이스(루이스 지엠브로우스키)는 형제들과 함께 악령에 잠식된 남자를 트럭에 실어 멀리 치워버리기로 한다. 하지만 악령의 봉인이 풀려버리고, 두 형제는 황급히 이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최근 핫한 호러 영화 전문 제작 배급사 셔더(Shudder)가 만든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장르로 구분하자면 오컬트라고 할 수 있다. 악마 빙의 자체가 주는 섬뜩함, 그리고 인간이 가진 죄의식을 건들면서 나약해지게 만들고 무력감을 갖게 하는 악마의 모습은 <엑소시스트> 이후 제작되는 오컬트 영화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가보면 영화는 보란듯이 경로이탈을 한다.
악마와 신부의 대결로 치닫는 다수의 오컬트 영화와 달리,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시킨다. 어쩌면 <엑소시스트> 보다는 결로 따졌을 때는 <유전> <곡성>과 더 가까워 보인다.
연출을 맡은 데미안 루냐 감독의 영화를 보거나 이미 알고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 이 작품을 마주한 이들이라면 생경하고도 거친 공포를 만끽할 수 있다. 영화제를 제외하고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호러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존 할리우드 호러 작품과는 다른 느낌을 전하는데,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포스터에서 보이는 붉은 바탕에 도끼를 든 한 여성의 모호하면서도 위태로운 모습은 이를 잘 나타낸다.
영화의 차별화 포인트 중 하나가 언제나 곁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불러내지 않기 위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등 사용을 금지할 것, 동물을 가까이 하지 말 것, 그것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 절대 총으로 쏘지 말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등이 있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어길 시 인간은 악마의 먹이가 된다. 감독은 이런 금기 사항을 정해놓고, 하지 말라면 꼭 하고야 마는 인간 본성에 기대어 그들의 말로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기심과 죄의식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페드로 또한 가족에게 지은 죄를 안고 사는 인물인데, 악마는 계속해서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고, 괴롭히고, 시험에 들게 한다.
감독은 빛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공포도 선사한다. 첫 번째 규칙인 전등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을 따르기 위해 주인공들은 어둠속에서 최대한 빛을 사용하지 않는다. 종반부 페드로의 둘째 아들을 찾기 위해 하이메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에서 헤드라이트 on/off를 반복한다. 이 때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착시 효과가 나오는데, 서서히 밀려오는 공포감과 높은 수위의 장면은 극강의 공포감을 전한다. 영화는 금기 규칙을 어길 때 보란듯이 파격적으로 선보이는 선정적 장면들로 공포 강도를 세게 가져가며 이들이 관통하는 지옥도를 보여준다.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테크닉적으로 관객에게 공포감을 확실히 전달하는 영화다. 스포일러라서 밝힐 수 없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가진 공포의 힘은 무한하게 커지는데, 그 동력은 현실 공포,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아르헨티나 사회를 겨냥한 현실이다.
어느 해외 영화제에서 제작 계기에 대한 질문을 받은 감독은 아르헨티나에서 농장 살충제가 광범위한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뉴스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농민의 건강을 무시한 채 사업을 진행하는 기업의 무관심과 잘못된 행태, 이런 마음이 만연된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유롭게 퍼질 수 있는 잠복한 악에 대해 풀어보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감독의 연출 계기를 들어보니 전주국제영화제 문석 프로그래머가 남긴 “장면에 대한 ‘묘사’보다 ‘설정’이 훨씬 더 공포스럽다”, 뉴욕타임즈가 전한 “공동체, 가족, 정부와 국민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을 가장 어둡고 시의적절하게 그려낸 우화”라는 한줄평이 더욱 와닿는다.
신고를 해도 마을의 이미지가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무마한 경찰, 자신의 농장에 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지역에 옮겨다 놓는 농장주의 이기심, 자신이 버린 가족을 뒤늦게 지키고자 했지만, 도리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 가장의 모습은 사회 전체의 균열이 심각해지는 아르헨티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 하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페드로가 지켜야 하는 가족은 자폐증을 가진 첫째 아들과, 나이 어린 둘째 아들, 노모로 사회적 약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인물 조합 자체가 감독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극 중 “악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악을 사랑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말처럼 아이들은 악마의 표적이 된다. 아이들은 무해하고 순수한 존재이면서도 무지한 존재로, 영화는 농장 살충제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기업의 손과 발이 되어 노동력만 제공하는 이들을 아이들로 표현한 듯하다. 표면적으로 악마의 먹잇감이 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불안하고 섬뜩한데, 여기에 숨겨진 의도를 알게 되면 그 강도는 더 세집니다. 이런 점에서 후반부 끊임없이 몰아치는 공포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소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올 하반기를 멋지게 장식할 호러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호러 영화는 그 시대의 가장 두렵고 불안한 것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있어야 한다고 본다.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얼룩져가고 있는 세상과 그에 따른 공포를 이 영화로 만나보시라. 악의 어둠에 점점 먹혀들어가는 극강 호러를~~
덧붙이는 말: 수위가 정말 세다. 기존 할리우드 호러 영화에서 자주 접하지 못했던 극강의 수위가 펼쳐진다.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들이 나오는데, 이를 뒤에서 조장하는 악마의 모습이 섬뜩하다. 마치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운명 앞에 무릎꿇고야 마는 인간의 나약함이 더 좌절감을 안긴다. 멈추지 않는 사회 혼란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아르헨티나 인들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사진 제공: (주)팝엔터테인먼트
평점: 3.5 / 5.0
한줄평: 악마가 활개치는 현실 사회가 더 큰 공포!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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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채플웨이트> 메인 예고편
겁내지 마세요. 이들은 비밀이 많은 집을 물려받았을 뿐이에요. 스티븐 킹 소설 원작, 〈채플웨이트〉가 11월 24일 왓챠에 찾아옵니다. ▶︎ https://wcha.it/3FkMlf2 ?그래도 조금 겁날 수도 있으니 같이 볼 겁없는 친구 미리 섭외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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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작조 : 현애지상> 30초 예고편
냉전이 감도는 1931년 중국,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온 4명의 특수요원은 작전명 '새벽'이라는 비밀 임무에 착수한다.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그들의 작전은 한 반역자에 의해 위협에 휩싸이게 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말의 상황 속, 이들의 숨통은 점점 조여오기 시작하는데...
1931년, 암호명 '새벽' 조국을 위한 이들의 작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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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친 이가 보내는 혹독한 겨울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낚시를 하는 이들의 떠들썩한 웃음과 대화가 맴돈다. 인물들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계절은 여름. 가만히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농담을 내어놓던 그날의 장면은 짧게 지나가고, 관객이 마주하는 영화의 진짜 계절은 겨울이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가 주인공이다. 쓰레기 정리를 하고 세입자들의 막힌 변기를 뚫어주며 건물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형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위독하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바닷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배들은 연안에 정박돼 있다. 영화의 공간적, 계절적 배경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내면과 맞닿는다. 발을 뒤덮을 만큼 쌓인 눈을 치우던 '리'는 겨우 근무 일정을 조절해 형이 있는 병원에 당도하지만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장례식 때까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을 돌봐야 한다는 것과, 형이 죽기 전 자신을 조카의 후견인으로 정해 두었다는 것.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의 실제 지명이다. 인구 1만 명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리’는 몇 해 전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흔에 그는 보스턴으로 떠나 살고 있었지만 형의 죽음과 조카를 둘러싼 여러 일들은 그를 다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부른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 그를 향해 수군거린다. 처음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돌아오던 순간부터 ‘리’는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지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내면을 영화의 카메라는 가만히 관찰한다.
'리'가 상실의 슬픔에 뒤늦게 휩싸인다고 해서 영화 내내 폭설이 내리거나 혹한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무심한 듯 인물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도 한밤중 냉장고를 열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고 마음이 아파오는, 매사 무뚝뚝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못 버티겠다"라고 간신히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곁을 영화의 시선은 떠날 줄을 모른다.
‘리’가 손 봐주러 온 어느 집에서 집주인인 노인이 ‘리’가 챈들러 가의 아들임을 알아보며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어느 날 출항하셨는데 평범한 날씨에 대단한 사건도 없이 그냥 돌아오질 않으셨지. 구조 신호도 무전도 없었고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몰라.” 생각해 보면 나 이제 죽을 거라고 예고하고 떠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삶을 통째로 뒤흔들 대사건도 아무런 징조도 신호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곤 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이야기는 인물의 내면 변화를 날씨의 흐름처럼 관찰한다. 예측은 자주 어긋나고 영화 안에는 가끔 예기치 않은 유머까지 도사리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두고도 밥이 넘어가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격랑의 순간에도 일어설 방법을 찾는, 그런 게 곧 인생일까.
상영시간 내내 한겨울인 영화에서 첫 장면이 과거의 어떤 여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해 보인다. 겨울을 보내는 이들은 생각한다. 다시 여름이 찾아올까? 그 계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리’가 처음 치우던 눈은 거의 무릎까지 덮을 기세로 쌓여 있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많은 눈이 녹아 있다. 형의 장례식은 “땅이 녹을 때까지”로 유예되는데, 땅이 녹는다는 건 기온이 오른다는 것이며 그건 겨울의 문턱을 지나 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의 모든 걸 결정짓지는 않는다. 날씨가 풀려도 내면은 여전히 혹독한 추위 한가운데 있을지도 모르고 겨울 내내 앓던 마음의 상처들이 눈 녹듯 금세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리라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말해주는 것 같다. 매 순간을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 같던 ‘리’는 언 땅이 녹을 무렵 조카 ‘패트릭’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 사람의 마음에도 날씨처럼 어떤 순리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입춘이 지나고 또 그러다 보면 결국 여름까지 우리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국내 메인 포스터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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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아들의 두려움과 엄마의 조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아리 에스터 Ari ASTER
출연]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네이단 레인 Nathan LANE, 에이미 라이언 Amy RYAN
시놉시스
'보 와서먼'(호아킨 피닉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철없는 남자다. 그는 아파트를 떠나 어머니 '모나'(패티 루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는데, 이때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된다. 고립되고 부상을 입는 등 갈수록 기이해지는 충격적인 그의 여정이 시작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옛날 집에 도착하게 된 보는 끔찍한 기억들과 추악한 비밀을 마주한다.
'아리 에스터'다운 난해함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품은 <유전>과 <미드소마>로 이름을 알린 아리 에스터 감독. 그의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연출 면에서는 점프 스케어를 지양한다. 기괴한 영상미와 음악을 통해 분위기를 고조하고, 이를 통해 관객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 내재된 집착을 공포와 미스터리의 소재로 사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수많은 상징 덕분에 곱씹어 보는 재미도 있다. 종합하면, 난해하다.
세 번째 장편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마찬가지다. 장르는 달라졌다. 호러가 아니라 판타지나 심리극에 더 가깝다. 그러나 난해함은 여전하다. 성기 괴물과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가 가득해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를 구성한 5개 챕터 사이의 연관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코미디, 연극, 로드무비, 심지어 좀비 영화(?)까지 섞여 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지막까지 숨통을 조여 오는 이야기의 힘이 그만큼 강렬하다.
의외로 단순한 얼개
하지만 첫 두 장면에 집중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얼개는 의외로 단순하다. "제 입장에서는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 말대로다. 영화는 엄마 뱃속에 태아인 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보. 그런데 이때 분만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엄마는 아들이 울지 않는다고, 아들을 받을 때 간호사가 실수한 거 아니냐고 화낸다. 보를 울리려는 간호사에게 아들을 폭행한다고 소리 지른다.
영화는 곧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보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 중이다. 의사와 상담을 할 때 그와 그의 어머니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 집에 찾아가는 걸 꺼리는 보. 가끔은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는 심정도 들켜 버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이야기의 주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억압적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들에 대한 영화라고.
안 그래도 영화는 주제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상담을 마친 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힌트를 준다. 한 남자아이가 광장 분수에서 놀고 있다. 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아이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아들을 낚아챈다. 아이의 장난감은 그대로 분수에 버려진다. 보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도 똑같다. 엄마에게 혼나며 쫓기는 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관건은 집착하는 어머니를 아들이 떨쳐낼 수 있느냐다.
뒤틀린 모정의 파노라마
이런 관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일종의 정신 치료기처럼 보인다. 특히 영화의 각 챕터는 보의 정신 상태를 각각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가 죽거나 자기가 죽음에 가까운 충격을 받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보. 그때마다 그는 자기도 미처 몰랐던 현실과 욕망, 상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성장한다.
첫 번째 챕터는 보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 회사가 만든 냉동식품을 먹으며 엄마 회사가 지은 건물에서 산다. 또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도 못한다. 엄마 생일에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그는 성인답지 못하게 우유부단하다. 이는 그의 눈에 마약 중독자와 강도가 가득한 세상은 항상 위험하고,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다.
두 번째 챕터에서 보는 모성애의 실체를 마주한다.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본가로 향하는 보. 도중에 그는 '로저(네이단 레인)'와 '그레이스(에이미 라이언)' 부부 집에 잠시 머문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 가족. 그러나 속은 썩었다. 뒤틀린 모성애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파병 나간 아들이 죽은 이후로 그에게만 집착한다. 잘못된 모정은 둘째 딸 '토니'(카일리 로저스)의 죽음을 초래한다. 엄마의 사랑을 잃은 그녀는 오빠를 미워한다. 오빠 방을 칠한 하늘색 페인트를 마시고 죽을 정도로.
세 번째 챕터는 연극이다. 이 연극은 보 자신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자기가 누릴 수도 있었던 이야기다. 엄마의 죽음을 해방으로 받아들였을 때 펼칠 수 있는 이야기다. 뒤틀린 모성애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남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시련을 겪어 가족을 모두 잃지만, 끝내 다시 재회하는 해피엔딩. 보는 자기가 자기 삶의 운전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례식이 열린 엄마의 집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마침내 온전히 주체적인 성인이 되는 듯 보인다. 그는 첫사랑인 '일레인'(파커 포시)을 만난다. 엄마 회사 직원이었기에 늦게나마 장례식에 온 일레인. 보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가 준 사진을 항상 간직하며 잊지 않았다. 죽은 엄마의 침실에서 그녀와 섹스하면서 그는 엄마에게서 벗어나 자기가 본 연극처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원형에 가까운 정신과 치료기
아리 에스터는 이러한 보의 모험을 프로이트적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원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 과정을 '리비도(성욕)'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단순한 성욕 이상이다. 성적 에너지이자 동시에 정신 활동의 에너지다. 따라서 리비도를 제대로 다루는 것은 성욕 통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프로이트는 부모 자식 관계와 이성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유아기가 되면 아이는 자기 성기를 쾌락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적의를 품지만, 그 욕망을 억압한다.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긴다. 참았던 욕망은 사춘기를 맞이해 이성에 대한 성욕에 눈을 뜨면서 풀려난다. 이렇게 성적인 충동을 적절히 통제하고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리비도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달하지 못하면 고착하거나 퇴행하며 정신적인 문제를 낳는다. 바로 보가 겪는 문제다. 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두 가지를 제거했다. 아버지와 애인이다. 그녀는 보의 아버지가 섹스 중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유전병인 심장병이 도져서 죽었다고. 또 보가 크루즈 여행 중 일레인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걸 싫어한다. 실제로 자기 회사에 일레인이 취직했는데도 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 결과 보에게는 온갖 문제가 생긴다.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초자연적인 이미지가 그의 성욕과 관련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이웃과의 소음 문제가 있다. 조용히 잠자던 보에게 옆집 이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음을 줄이라고 윽박지르고 보복까지 한다. 보가 일레인과 마침내 섹스할 때 큰 음악을 틀고 하는 걸 고려하면, 소음은 정상적으로 승화되지 않는 성욕으로 인한 문제라 해도 무리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극을 보며 자기도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빠진 보. 하지만 이내 그의 상상은 물거품이 된다. 가정을 이루려면 섹스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처럼 심장마비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덮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엄마가 진실을 숨겨둔 다락방에서 성기 괴물을 본다. 이 괴물 역시 어머니가 만든 존재나 다름없다. 자기 성욕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존재가 그 괴물이기 때문. 길거리에서 벌거벗은 채 칼로 보를 찌르는 남성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두려운 아들과 비웃는 엄마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의 정신 이상을 치료하는 이야기다. 일레인과의 섹스를 통해 그는 자기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반전을 주며 영화 장르를 하나의 블랙 코미디로 전환한다.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살아 돌아오자 보는 모든 상황이 각본이라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그를 집으로 부른 것부터 엄마가 죽었다는 뉴스, 장례식과 일레인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까지. 그를 집으로 이끈 죄책감도 모두 다 모나의 계획이었다. 동시에 이는 엄마의 복수나 다름없다. 아들의 정신과 상담 내용까지도 입수한 그녀는 자기가 준 사랑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챕터인 재판장에서 모나의 의도는 더 분명해진다. 이 재판은 정당하지 않다. 철저히 보를 공격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장이다. 재판 증거는 철저히 보의 잘못된 행동, 어머니를 실망시킨 일로 가득하다. 보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변호사 앞에서 묵살된다. 그의 변호사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가 떨어져 죽는다. 결국 보는 타고 있던 보트의 모터가 폭발해 죽는다. 사인은 폭사가 아니다. 익사다.
그런 보를 보면서 모나는 눈물을 흘린다. 단지 슬픔 때문은 아니다. 이 모자 관계는 집착, 가스라이팅, 속박, 폭력으로 점철됐다. 어머니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고 하면 구속했고, 아들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라지 못했다. 결국 이 재판은 어머니의 조롱이다. 아무리 아들이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절대 자기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조롱.
이는 익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초반부에 상담사는 약을 먹을 때마다 항상 물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보는 물에 집착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바다에 빠져 죽는다. 의미심장하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아직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대양적 느낌'이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보면 물은 모성애다. 적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다. 영화가 양수 속에 있는 보로 시작해 바다에 빠져 죽은 보로 끝나는 이유다.
이토록 불쾌한 블랙 코미디라니
그런데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장르 전환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관객은 모나가 아닌 보의 입장에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여줬다. 그가 바라보는 왜곡된 세계부터, 그의 희망까지 전부 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 그를 조롱한다.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으로 포장된 그의 희망과 상상은 다 부질없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그 순간 관객은 난 데 없이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관객은 보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해 그의 모험을 3시간 동안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익사하는 결말은 불쾌할 수밖에 없다. 블랙 코미디라기에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보가 자기 자신을 유머 대상을 삼으면 모를까, 피폐하고 나약한 보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지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독특한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아리 에스터는 보는 사람을 불쾌하고 찝찝하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가졌으니까. 제목에 담긴 언어유희를 생각하면 철저히 계획된 블랙 유머이기도 하다. "소년은 두렵다(Boy Is Afraid)”라고도 읽을 수 있는 제목은 모든 남성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영화 시작 전부터 드러내고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못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연출.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원형적 이야기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색다르게 보여준 스토리텔링. 5개 챕터로 쪼개진 심리 서사극. 마지막 순간 모두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전까지. 아리 에스터에게 박수를 보내기 충분하다. 단지 블랙 코미디에 같이 웃느냐, 웃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물도 적당히 마셔야 살 수 있다
상영일정
6/29 13:00 - 15:59 한국만화박물관
6/29 19:00 - 23:19 부천시청 잔디광장 /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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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속작이 있기에 원작일 수 있던 것들
전작보다 후속작이 더 좋은 영화는 도통 찾기 어렵다. 한 영화에서 사건은 이미 마무리되고, 인물들의 정체성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완성조차 코끼리의 일부이자 하나의 시선에 불과할 뿐이지만, 어쨌거나 시선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로 동의할 수 있었고 그것이 작품이 완성이라 불릴 수 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세계를 창조하는 욕심과 세계를 연명하려는 의지는 엄연히 다른 듯하다.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선택의 폭은 줄어든다. 완성된 시선에서 벗어나 위험하게 다른 곳을 비추어보던가. 혹은 그 시선을 뚜렷이 한다거나. 물론 그럼에도 창작자에게 수많은 선택과 실험의 기회가 있으며, 어느 방향으로 가든 좋고 전작보다 더 좋아지는 사례도 수도 없이 많지만, 결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니. 바로 전작과의 비교다.
단순히 무엇이 낫냐는 평가가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 작품의 세계를 발전했는지, 새로운 요소들은 세계의 본질을 홰손하지 않는지. 이전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표했는지 등. 무수한 작품의 가능성만큼 잣대도 수없이 생기고, 시리즈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잣대는 끝없이 올라간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좋은 후속작을 만들다니. 그 어려움을 어렴풋이라도 느끼면 후속작들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간도2>는 그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무간도2>는 전작의 프리퀄이다. 참신하고 날카로웠던 전작에 비하면 여러모로 파격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쇼트는 길어지고 카메라는 더 이상 역동적이지 않다. <대부>에서 느끼던 중후한 기운이 거리의 네온사인을 압도하는 듯 한편으로 공존하는. 짧은 러닝타임을 제외하면 연출 면에서 전작을 넘어 홍콩영화 대부분과 비교해도 이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 이들과도 연결점이 있으니. 바로 시대와의 작별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역사는 그것의 정당성이나 비판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탐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그것의 이해관계는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완전히 해소될 수 없고, 삶의 터전과 순수함이 훼손된 채 다른 세계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간도2>에서 선역과 악역은 없으며 모든 인연이 꼬여있다.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혹은 자발적으로 머무르는 인물들이 서로를 탓하고 있다. 신분을 숨긴 채 조직에 잠입하고, 이득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원한 고통을 뜻하는 무간지옥에 어울리는 모습, 이러한 점에서 <무간도2> 역시 홍콩영화이고,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시대상을 표현했을지 모르겠다.
특정 시대상을 잘 담은 명작은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느낄 수 있는 여운이 있다. 기원전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건 물론 그리스에 가본 적조차 없는 사람도 고전을 통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역사와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을 현재의 시대로 치환해 교훈을 얻곤 한다.
시대 불문이랄까. 당시의 홍콩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복합적인 시대상을 그대로 떠안는 젊은이들이 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그 속에서도 사랑은 불안하게나마 피어난다. 하지만 그 순수함만큼은 불안해질 수 없기에 항상 고뇌하고 희생을 감수한다. 무엇보다 그 영화의 끝이 행복하든 슬프든 시대의 변화를 역행할 수 없다는 진리를 끝내 이기지 못한다. <무간도2>는 이 점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촬영이나 편집 기법은 독창적이고, 되려 주제 의식을 보강했다. 전작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인물들에 입체감을 더해준다. 본작의 빌런이라 할 수 있는 예영효는 그 구심점을 확실히 해주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엔딩은 지나간 시대에 헌사를 보내며 과거의 향수를 원동력으로 미래를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무간도'라는 강렬한 제목처럼 이전도 그다음도 인생은 시대 불문 지옥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연과 사랑이 언제나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흔히들 홍콩영화는 이제 끝이 나버렸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두각을 드러내는 영화가 적은 것도 사실이니. 철거된 네온사인들처럼 그때의 스타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시대 불문의 가치를 상기한다면. 독창성을 되찾는다면. 무엇보다 목소리를 낼 용기를 되찾는다면 홍콩영화는 다시금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간도2>가 홍콩영화의 황금기 마지막 세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간도 2>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속작’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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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주의자 킬러의 차가운 복수가 슬픈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 목표물을 감시하는 '킬러(마이클 패스밴더)'. 자는 시간도, 음식도, 심지어 심박수까지 철저히 통제하며 암살 대상을 기다리던 그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타깃을 저격하는 데 실패한다.
처음으로 임무에 실패한 나머지 극도로 당황하며 간신히 은신처로 돌아간 킬러. 그러나 그 사이에 킬러의 '아내'(소피 샤를로치)는 보복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이에 그는 아내를 공격한 두 명의 암살자 '짐승'(살라 베이커)과 '전문가'(틸다 스윈튼), 공격을 주도한 '변호인'(찰스 파넬)과 '의뢰인'(알리스 하워드)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즉시 여느 때처럼 냉철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킬러. 그러나 이번만큼은 완벽주의자 킬러도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
데이비드 핀처의 노르딕(?) 누아르
데이비드 핀처가 12번째 장편 영화 <더 킬러>로 3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도 넷플릭스의 손을 잡았다.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놀렌트의 그래픽 노블 원작을 <세븐>의 각본가 앤드류 워커가 각색했다. 무려 20여 년 전부터 마음에 둔 작품이라 하는데, 그 의지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을 만났다.
<더 킬러>는 여러모로 의외의 영화다. 핀처의 첫 누아르 영화라는 점이 새삼스럽다. 낯설기도 하다. 누아르 영화치고 전체적으로 건조하다. '킬러'는 심리적으로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차갑기도 하다. 킬러의 복수극을 5개 챕터로 나누어 보여줄 정도로 계획적이다. 그러다 보니 <조디악>, <나를 찾아줘>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다. 화면이 전환되는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핀처에게 기대하는 현란한 편집 솜씨도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와플 사이에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핀처가 감정을 분출시키지 못하는 감독은 아니니, 왜 애써 감정선을 숨기려 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건조함과 냉정함 사이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핀처의 노림수는 이내 모습을 드러낸다. 답은 간단하다. 소설 같다. 비록 프랑스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했지만, 마치 한 편의 북유럽 소설 같다. 더 구체적으로는 데이비드 핀처만의 노르딕 누아르에 가깝다.
관건은 암살 작전이 아닌 암살자
물론 <더 킬러>의 주인공은 탐정도 경찰도 아닌 암살자다. 북유럽도 배경이 아니다. 파리, 도미니코 공화국, 뉴욕 등 다양한 장소가 나오지만 북유럽은 없다. 그럼에도 <더 킬러>에서 노르딕 누아르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톤과 매너 때문이다.
우선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이라는 특징이 눈에 띈다. 노르딕 누아르에서는 셜록 홈즈 같은 뛰어난 탐정이 없다. 평범한 경찰이 주인공이다. 형사의 한계와 고충. 경찰 시스템과 사법 제도의 한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거와 심리가 얽혀가면서 비로소 사건을 보여준다. <더 킬러>도 마찬가지다. 암살 작전은 중요하지 않다. 킬러가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고용한 고객의 목적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핵심은 암살자다. 킬러의 내레이션이 빈 공간을 차지한다. 파리에서 암살 작전을 준비하는 챕터 1이 대표적이다. 이 챕터에서는 킬러 외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살인이 갖는 의미. 암살을 하기 위해 필요한 철칙과 조건들. 때로는 냉소적이고 궤변 같기도 한 그의 상념으로 가득하다. 마이클 패스밴더의 킬러를 보면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마침 패스밴더가 영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를 연기한 적도 있고.
강박증이라는 공통점
이때 킬러에게 초점을 맞추면 유달리 도드라지는 지점이 있다. 강박증이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표적이 묵는 호텔 방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려 한다. 눈을 뜨자마자 표적을 관찰하기 위해 잠잘 때도 테이블 높이를 창문과 맞춰 둔다. 저격 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심박수를 체크한다. 밥도 효율적으로 먹는다. 햄버거에서 번을 빼고 단백질 위주로 영양분을 섭취한다. 목표를 위해 끝없이 기다리고, 유지하고, 인내한다.
이 강박증은 마냥 남 일이 아닌 것 같기에 흥미롭다. 업무의 강도가 높고, 비윤리적인 점만 빼면 그의 일은 일반 직장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본연의 리듬 대신 일에 맞춘 일상도 낯설지 않다. 제이 그리피스가 <시계 밖의 시간>에서 지적한 대로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립된 후 사람들은 삶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지운채 시계와 알람에 맞춰 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시간 맞춰 칼같이 일어나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완벽하게 이행해야 마음이 놓이는 킬러와 현대인을 분리해 말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동정과 연민 끼어들지 못하는 킬러의 세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더 킬러>의 복수극은 평범하지 않다. 자기 세계의 모순을 발견했지만, 외적 가치를 이미 내면화했기에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환자의 치유기에 가깝다. 그가 외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챕터 1에서 핀처는 킬러의 시점과 청각만을 강조한다. 카메라는 그의 시점을 비추고, 음악과 소음도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울려 퍼진다. 달리 말해, 그의 세상에는 그만이 존재한다.
이를 확대하면 분리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세계가 나타난다. 여러 파편이 있다.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낀 독일인 관광객에게 관심이 없다. 설령 그가 아마존을 이용해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표준화된 일상을 영위한다.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처럼.
이 세계에서는 동정과 연민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코인에 눈이 멀어 자기가 죽이려 한 킬러가 복수를 위해 찾아와도 의뢰인은 그 이유조차 짐작 못하는 사회이니까. 킬러의 내레이션이 동정과 연민보다 냉정함과 계획을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 킬러>는 더더욱 노르딕 누아르 같다.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 중 하나가 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이기 때문. 노르딕 누아르 작가는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 속 지명, 연도, 현장에 대한 묘사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마치 거울처럼 사회상을 반영한다. 핀처도 마찬가지다. <더 킬러>를 통해 자본과 권력으로 치환될 수 없는, 인격의 존엄성 같은 고유한 영역이 존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복수의 성공이라는 비극
그러면서도 <더 킬러>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다. 수십 번 반복했던 작업인데 킬러는 자꾸 실수를 범한다. 변호사, 짐승, 전문가, 의뢰인으로 타깃을 좁혀가는 사이 살인은 공허해지고 의미 없이 흘러간다.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자신마저 납득하지 못할 위기를 맞는다. 그 사이로 불길이 튀어나오며 장르적 쾌감도 조금 깃든다. 줄곧 냉정하고 건조하던 영화는 온 집안을 부술 것처럼 처절한 액션 시퀀스를 선보인다.
그러면서 킬러가 바라보는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서서히 남의 이야기가 들리고 보인다. 특히 전문가와의 대화가 정점이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킬러와 전문가. 전문가가 묻는다. 이 직업에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언제냐고. 일을 하면서 언제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해 봤냐고. 그 순간 킬러는 흔들린다. 조각상 같던 그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 버린다. 단답이지만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그는 자기 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애써 외면한다. 계획대로는 아니더라도 완벽한 삶을 복구해낸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복수극은 마냥 기쁘지 않다. 언제나 완벽하려는 자기 노력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킬러의 마음에 깃든 이 건조한 희망의 존재는 큰 액션이나 제스처 없이도 틸다 스윈튼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고, 많은 대사 없이도 패스밴더의 연기가 일품인 이유다.
핀처가 보는 현대인
어떤 면에서 극 중 킬러는 <소셜 네트워크> 속 마크 저커버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이스북 CEO로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허브의 중심에 선 그.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외톨이다. 절친도, 동업자도, 심지어 변호사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고, 받지 못할 답을 처량하게 기다린다.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고립된 후에야 자기가 놓치고 산 게 뭔지 어렴풋이 깨닫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킬러의 차가움과 냉철함이 장르적 쾌감을 거쳐 쌀쌀하게 이어지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즉, 킬러는 암살자이기 이전에 비극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비추는 인물이다.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도로 청소차나 쓰레기 수거차는 킬러와 현대인의 삶을 함축하는 듯하다. 에릭 메서슈미트 촬영 감독의 영상미, 애티커스 로스와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과 어우러지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겨냥한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해진다.
결국 데이비드 핀처는 킬러의 일상을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척하면서 하나의 거울을 가져다 놓는 셈이다. 나르시시즘 섞인 킬러의 독백와 업무 과정을 통해 화면 너머의 자기 자신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더 킬러>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어떤 장르든 핀처는 영화를 잘 만든다는 증명뿐만 아니라.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핀처, 패스밴더, 스윈튼 팬 모두가 사랑에 빠져 곱씹을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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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일상의 물리적 증명
7★/10★
그림자는 물리적 존재를 환기한다. 실존하는 물질이 빛을 가로막을 물리적 질감을 가질 때만 그림자가 생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적 삶에도 물리적 질감이 있음을, 나아가 물리적 질감을 초과하는 서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그림자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일하는 중 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웃음 짓는다. 화장실 통로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림자로 포착하는 물질성은 물리적 사물을 넘어서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우연히 만난 삶에 낙담한 또래의 중년 남성과 그림자를 갖고 몇 가지 놀이를 한다. 먼저 두 개의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진해지는지를 실험해보고, 뒤이어 서로의 그림자를 좇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상대 남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도 더 짙어지는 것 같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분명 더 진해졌다는 것이다. 히라야마는 ‘알고’ 있다. 그림자는 분명 어떤 물질의 실존과 그 실존에 깃든 서사, 의미를 대변하기 때문에 포개진 그림자는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림자 술래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해맑은 표정은 그림자가 증거하는 삶을 소환한다. 그림자가 물질로서의 인간의 몸뿐 아니라 그 몸에 담긴 삶 역시 담아낸다는 (히라야마가 남자에게 알려준) 사실이 두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그림자만으로는 물질의 구체적 형상을 그려낼 수 없다. 물질을 비추는 빛의 각도와 주변 환경에 따라 같은 물질이라도 여러 모양과 밝기의 그림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가 화장실 벽의 나무와 중년 남자의 그림자에서 물질 그 이상을 감각하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상을 살아내는 태도에서 나온다.
영화는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웃 할머니의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와 면도, 세수를 한다, 직접 분재한 화분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작업복을 입는다, 신발장 선반에 차례로 정리된 물건들을 챙긴다,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작은 봉고차를 타고 출근하며 음악을 듣는다, 동료에게 ‘왜 이렇게까지’라는 물음을 들을 정도로 깔끔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 식당에서 식사한다, 쉬는 날이면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고, 헌책방에 들르며, 단골 술집에서 피로를 푼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이다.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정말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을 보아 히라야마가 지금 하는 일이 그의 과거 ‘사회적 신분’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 열패감이 그가 느껴야 할 더 적절한 감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러지 않는다. 눈을 뜰 때마다,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조용히 미소 짓는다. 마치 오랫동안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가만히 웃음 짓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그림자에 구체적 물질성과 그 너머의 의미, 서사를 상상하는 통로다. 영화는 히라야마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히라야마의 표정이 이 설명을 대신한다. 별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종종 천대받아도 일터에서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려 노력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애정을 가질 때 나오는 표정으로 말이다. 여기서 빚어지는 단단함은 히라야마의 직업관과 과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에 대한 조급증을 종식시키며 소박한 차이의 평온한 반복이라는 히라야마의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게 해준다. 피곤한 날도, 기분 좋은 날도, 슬픈 날도, 예기치 못한 일이 있던 날도 히라야마는 같은 표정으로 일어날 것이고 하늘을 바라볼 것이며 화장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히라야마는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잃어버린 표정을 복원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히라야마가 그날을 복기하며 꾸는 꿈속에서는 그저 불분명한 회색빛 형체였던 것들이 어느새 그가 서랍 속에 엄격하게 선별해 모아둔 사진처럼 분명한 형태의 물질성과 그에 담긴 서사,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화가 그려내는 히라야마 캐릭터에 남성 판타지가 층층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해소되지 않는 찜찜한 의구심을 남긴다. 조카, 점심을 먹을 때마다 벤치에서 만나는 여성, 동료의 애인, 술집 사장 등 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히라야마가 구축한 일상이 매력적이고 살 만한 것임을 증명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체의 확립을 위한 여성 타자 없이는 완벽한 일상(perfect days)의 물리적 증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야큐쇼 코지가 놀라운 연기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일상의 물질성 앞에서, 이 머뭇거림을 함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혹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화 속 그림자 이미지가 증명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은 아직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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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현재가 교차하는 영화, <하얼빈>의 울림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한 역사적 재현을 넘어,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는 인물들의 내면과 갈등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아내는 <하얼빈>이 “독립운동을 세련되게 표현한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동의합니다.
아내와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여행 시에 영화의 배경이 된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후원한 최재형 선생의 집과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명의 독립군이 왼손의 약지(藥指)를 끊어 피로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쓰며 맹세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현장에 가보았기에 영화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우민호 감독의 연출은 웅장한 스케일의 장면들과 섬세한 감정선의 균형을 조화롭게 풀어냅니다.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담백한 연출로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조율합니다. 감독은 안중근이 단순한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결단,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를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현빈 (안중근 역)은 안중근을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고, 대사를 절제하면서도 몸짓과 표정으로 인간적인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박정민 (우덕순 역)은 단순히 안중근의 조력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에 대한 의병들의 역할과 희생을 자연스러운 연기로 보여주었습니다.
영화는 허구의 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서사의 입체감을 더했습니다.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은 픽션 속 캐릭터이나, 영화전개에 강렬한 드라마를 부여합니다. 조우진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독립운동의 복잡한 현실과 그들의 희생과 갈등을 실감 나게 전달합니다. 공부인(전여빈)은 독립군들 사이에서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눈빛과 몸짓으로 캐릭터의 내면을 생생히 전달하며 영화의 감정적 여운을 더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중근 의사가 말합니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말은 그의 희생이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한강 작가의 ‘과거가 현재를 도우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는 문학적인 질문과 일맥상통합니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이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서사는 개인의 희생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느끼게 합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과거의 희생이 오늘날 우리를 지탱하고 있음을 일깨우며, 우리의 현재 행동이 미래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역사를 기억하고, 그로부터 배운다.'는 뜻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만들어 나가라’는 성찰을 제공합니다.
영화의 제작비는 약 300억 원이며, 손익분기점은 약 720만 관객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찍는 데 상업성과 오락성은 거의 들어내었습니다. 대신 허구의 인물인 모리 중좌와 밀정을 등장시켜 드라마의 극적효과를 높입니다.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지점입니다. 영화가 손익분기점이 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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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채플웨이트> 메인 예고편
겁내지 마세요. 이들은 비밀이 많은 집을 물려받았을 뿐이에요. 스티븐 킹 소설 원작, 〈채플웨이트〉가 11월 24일 왓챠에 찾아옵니다. ▶︎ https://wcha.it/3FkMlf2 ?그래도 조금 겁날 수도 있으니 같이 볼 겁없는 친구 미리 섭외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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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작조 : 현애지상> 30초 예고편
냉전이 감도는 1931년 중국,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온 4명의 특수요원은 작전명 '새벽'이라는 비밀 임무에 착수한다.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그들의 작전은 한 반역자에 의해 위협에 휩싸이게 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말의 상황 속, 이들의 숨통은 점점 조여오기 시작하는데...
1931년, 암호명 '새벽' 조국을 위한 이들의 작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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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친 이가 보내는 혹독한 겨울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낚시를 하는 이들의 떠들썩한 웃음과 대화가 맴돈다. 인물들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계절은 여름. 가만히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농담을 내어놓던 그날의 장면은 짧게 지나가고, 관객이 마주하는 영화의 진짜 계절은 겨울이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가 주인공이다. 쓰레기 정리를 하고 세입자들의 막힌 변기를 뚫어주며 건물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형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위독하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바닷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배들은 연안에 정박돼 있다. 영화의 공간적, 계절적 배경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내면과 맞닿는다. 발을 뒤덮을 만큼 쌓인 눈을 치우던 '리'는 겨우 근무 일정을 조절해 형이 있는 병원에 당도하지만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장례식 때까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을 돌봐야 한다는 것과, 형이 죽기 전 자신을 조카의 후견인으로 정해 두었다는 것.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의 실제 지명이다. 인구 1만 명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리’는 몇 해 전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흔에 그는 보스턴으로 떠나 살고 있었지만 형의 죽음과 조카를 둘러싼 여러 일들은 그를 다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부른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 그를 향해 수군거린다. 처음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돌아오던 순간부터 ‘리’는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지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내면을 영화의 카메라는 가만히 관찰한다.
'리'가 상실의 슬픔에 뒤늦게 휩싸인다고 해서 영화 내내 폭설이 내리거나 혹한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무심한 듯 인물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도 한밤중 냉장고를 열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고 마음이 아파오는, 매사 무뚝뚝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못 버티겠다"라고 간신히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곁을 영화의 시선은 떠날 줄을 모른다.
‘리’가 손 봐주러 온 어느 집에서 집주인인 노인이 ‘리’가 챈들러 가의 아들임을 알아보며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어느 날 출항하셨는데 평범한 날씨에 대단한 사건도 없이 그냥 돌아오질 않으셨지. 구조 신호도 무전도 없었고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몰라.” 생각해 보면 나 이제 죽을 거라고 예고하고 떠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삶을 통째로 뒤흔들 대사건도 아무런 징조도 신호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곤 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이야기는 인물의 내면 변화를 날씨의 흐름처럼 관찰한다. 예측은 자주 어긋나고 영화 안에는 가끔 예기치 않은 유머까지 도사리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두고도 밥이 넘어가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격랑의 순간에도 일어설 방법을 찾는, 그런 게 곧 인생일까.
상영시간 내내 한겨울인 영화에서 첫 장면이 과거의 어떤 여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해 보인다. 겨울을 보내는 이들은 생각한다. 다시 여름이 찾아올까? 그 계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리’가 처음 치우던 눈은 거의 무릎까지 덮을 기세로 쌓여 있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많은 눈이 녹아 있다. 형의 장례식은 “땅이 녹을 때까지”로 유예되는데, 땅이 녹는다는 건 기온이 오른다는 것이며 그건 겨울의 문턱을 지나 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의 모든 걸 결정짓지는 않는다. 날씨가 풀려도 내면은 여전히 혹독한 추위 한가운데 있을지도 모르고 겨울 내내 앓던 마음의 상처들이 눈 녹듯 금세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리라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말해주는 것 같다. 매 순간을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 같던 ‘리’는 언 땅이 녹을 무렵 조카 ‘패트릭’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 사람의 마음에도 날씨처럼 어떤 순리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입춘이 지나고 또 그러다 보면 결국 여름까지 우리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국내 메인 포스터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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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아들의 두려움과 엄마의 조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아리 에스터 Ari ASTER
출연]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네이단 레인 Nathan LANE, 에이미 라이언 Amy RYAN
시놉시스
'보 와서먼'(호아킨 피닉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철없는 남자다. 그는 아파트를 떠나 어머니 '모나'(패티 루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는데, 이때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된다. 고립되고 부상을 입는 등 갈수록 기이해지는 충격적인 그의 여정이 시작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옛날 집에 도착하게 된 보는 끔찍한 기억들과 추악한 비밀을 마주한다.
'아리 에스터'다운 난해함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품은 <유전>과 <미드소마>로 이름을 알린 아리 에스터 감독. 그의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연출 면에서는 점프 스케어를 지양한다. 기괴한 영상미와 음악을 통해 분위기를 고조하고, 이를 통해 관객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 내재된 집착을 공포와 미스터리의 소재로 사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수많은 상징 덕분에 곱씹어 보는 재미도 있다. 종합하면, 난해하다.
세 번째 장편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마찬가지다. 장르는 달라졌다. 호러가 아니라 판타지나 심리극에 더 가깝다. 그러나 난해함은 여전하다. 성기 괴물과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가 가득해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를 구성한 5개 챕터 사이의 연관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코미디, 연극, 로드무비, 심지어 좀비 영화(?)까지 섞여 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지막까지 숨통을 조여 오는 이야기의 힘이 그만큼 강렬하다.
의외로 단순한 얼개
하지만 첫 두 장면에 집중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얼개는 의외로 단순하다. "제 입장에서는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 말대로다. 영화는 엄마 뱃속에 태아인 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보. 그런데 이때 분만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엄마는 아들이 울지 않는다고, 아들을 받을 때 간호사가 실수한 거 아니냐고 화낸다. 보를 울리려는 간호사에게 아들을 폭행한다고 소리 지른다.
영화는 곧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보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 중이다. 의사와 상담을 할 때 그와 그의 어머니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 집에 찾아가는 걸 꺼리는 보. 가끔은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는 심정도 들켜 버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이야기의 주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억압적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들에 대한 영화라고.
안 그래도 영화는 주제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상담을 마친 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힌트를 준다. 한 남자아이가 광장 분수에서 놀고 있다. 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아이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아들을 낚아챈다. 아이의 장난감은 그대로 분수에 버려진다. 보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도 똑같다. 엄마에게 혼나며 쫓기는 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관건은 집착하는 어머니를 아들이 떨쳐낼 수 있느냐다.
뒤틀린 모정의 파노라마
이런 관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일종의 정신 치료기처럼 보인다. 특히 영화의 각 챕터는 보의 정신 상태를 각각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가 죽거나 자기가 죽음에 가까운 충격을 받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보. 그때마다 그는 자기도 미처 몰랐던 현실과 욕망, 상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성장한다.
첫 번째 챕터는 보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의 치마폭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 회사가 만든 냉동식품을 먹으며 엄마 회사가 지은 건물에서 산다. 또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도 못한다. 엄마 생일에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그는 성인답지 못하게 우유부단하다. 이는 그의 눈에 마약 중독자와 강도가 가득한 세상은 항상 위험하고, 보호막이었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다.
두 번째 챕터에서 보는 모성애의 실체를 마주한다.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본가로 향하는 보. 도중에 그는 '로저(네이단 레인)'와 '그레이스(에이미 라이언)' 부부 집에 잠시 머문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 가족. 그러나 속은 썩었다. 뒤틀린 모성애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파병 나간 아들이 죽은 이후로 그에게만 집착한다. 잘못된 모정은 둘째 딸 '토니'(카일리 로저스)의 죽음을 초래한다. 엄마의 사랑을 잃은 그녀는 오빠를 미워한다. 오빠 방을 칠한 하늘색 페인트를 마시고 죽을 정도로.
세 번째 챕터는 연극이다. 이 연극은 보 자신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자기가 누릴 수도 있었던 이야기다. 엄마의 죽음을 해방으로 받아들였을 때 펼칠 수 있는 이야기다. 뒤틀린 모성애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남자.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시련을 겪어 가족을 모두 잃지만, 끝내 다시 재회하는 해피엔딩. 보는 자기가 자기 삶의 운전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례식이 열린 엄마의 집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마침내 온전히 주체적인 성인이 되는 듯 보인다. 그는 첫사랑인 '일레인'(파커 포시)을 만난다. 엄마 회사 직원이었기에 늦게나마 장례식에 온 일레인. 보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가 준 사진을 항상 간직하며 잊지 않았다. 죽은 엄마의 침실에서 그녀와 섹스하면서 그는 엄마에게서 벗어나 자기가 본 연극처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원형에 가까운 정신과 치료기
아리 에스터는 이러한 보의 모험을 프로이트적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원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 과정을 '리비도(성욕)'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단순한 성욕 이상이다. 성적 에너지이자 동시에 정신 활동의 에너지다. 따라서 리비도를 제대로 다루는 것은 성욕 통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프로이트는 부모 자식 관계와 이성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유아기가 되면 아이는 자기 성기를 쾌락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적의를 품지만, 그 욕망을 억압한다.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긴다. 참았던 욕망은 사춘기를 맞이해 이성에 대한 성욕에 눈을 뜨면서 풀려난다. 이렇게 성적인 충동을 적절히 통제하고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리비도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달하지 못하면 고착하거나 퇴행하며 정신적인 문제를 낳는다. 바로 보가 겪는 문제다. 보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두 가지를 제거했다. 아버지와 애인이다. 그녀는 보의 아버지가 섹스 중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유전병인 심장병이 도져서 죽었다고. 또 보가 크루즈 여행 중 일레인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걸 싫어한다. 실제로 자기 회사에 일레인이 취직했는데도 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 결과 보에게는 온갖 문제가 생긴다.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초자연적인 이미지가 그의 성욕과 관련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이웃과의 소음 문제가 있다. 조용히 잠자던 보에게 옆집 이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음을 줄이라고 윽박지르고 보복까지 한다. 보가 일레인과 마침내 섹스할 때 큰 음악을 틀고 하는 걸 고려하면, 소음은 정상적으로 승화되지 않는 성욕으로 인한 문제라 해도 무리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극을 보며 자기도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빠진 보. 하지만 이내 그의 상상은 물거품이 된다. 가정을 이루려면 섹스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처럼 심장마비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덮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엄마가 진실을 숨겨둔 다락방에서 성기 괴물을 본다. 이 괴물 역시 어머니가 만든 존재나 다름없다. 자기 성욕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존재가 그 괴물이기 때문. 길거리에서 벌거벗은 채 칼로 보를 찌르는 남성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두려운 아들과 비웃는 엄마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보의 정신 이상을 치료하는 이야기다. 일레인과의 섹스를 통해 그는 자기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반전을 주며 영화 장르를 하나의 블랙 코미디로 전환한다.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살아 돌아오자 보는 모든 상황이 각본이라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그를 집으로 부른 것부터 엄마가 죽었다는 뉴스, 장례식과 일레인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까지. 그를 집으로 이끈 죄책감도 모두 다 모나의 계획이었다. 동시에 이는 엄마의 복수나 다름없다. 아들의 정신과 상담 내용까지도 입수한 그녀는 자기가 준 사랑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챕터인 재판장에서 모나의 의도는 더 분명해진다. 이 재판은 정당하지 않다. 철저히 보를 공격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장이다. 재판 증거는 철저히 보의 잘못된 행동, 어머니를 실망시킨 일로 가득하다. 보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변호사 앞에서 묵살된다. 그의 변호사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가 떨어져 죽는다. 결국 보는 타고 있던 보트의 모터가 폭발해 죽는다. 사인은 폭사가 아니다. 익사다.
그런 보를 보면서 모나는 눈물을 흘린다. 단지 슬픔 때문은 아니다. 이 모자 관계는 집착, 가스라이팅, 속박, 폭력으로 점철됐다. 어머니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고 하면 구속했고, 아들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라지 못했다. 결국 이 재판은 어머니의 조롱이다. 아무리 아들이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절대 자기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조롱.
이는 익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초반부에 상담사는 약을 먹을 때마다 항상 물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보는 물에 집착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바다에 빠져 죽는다. 의미심장하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아직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대양적 느낌'이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보면 물은 모성애다. 적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다. 영화가 양수 속에 있는 보로 시작해 바다에 빠져 죽은 보로 끝나는 이유다.
이토록 불쾌한 블랙 코미디라니
그런데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장르 전환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관객은 모나가 아닌 보의 입장에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여줬다. 그가 바라보는 왜곡된 세계부터, 그의 희망까지 전부 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 그를 조롱한다.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으로 포장된 그의 희망과 상상은 다 부질없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그 순간 관객은 난 데 없이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관객은 보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해 그의 모험을 3시간 동안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익사하는 결말은 불쾌할 수밖에 없다. 블랙 코미디라기에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보가 자기 자신을 유머 대상을 삼으면 모를까, 피폐하고 나약한 보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지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독특한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아리 에스터는 보는 사람을 불쾌하고 찝찝하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가졌으니까. 제목에 담긴 언어유희를 생각하면 철저히 계획된 블랙 유머이기도 하다. "소년은 두렵다(Boy Is Afraid)”라고도 읽을 수 있는 제목은 모든 남성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영화 시작 전부터 드러내고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못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연출.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원형적 이야기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색다르게 보여준 스토리텔링. 5개 챕터로 쪼개진 심리 서사극. 마지막 순간 모두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전까지. 아리 에스터에게 박수를 보내기 충분하다. 단지 블랙 코미디에 같이 웃느냐, 웃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물도 적당히 마셔야 살 수 있다
상영일정
6/29 13:00 - 15:59 한국만화박물관
6/29 19:00 - 23:19 부천시청 잔디광장 /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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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속작이 있기에 원작일 수 있던 것들
전작보다 후속작이 더 좋은 영화는 도통 찾기 어렵다. 한 영화에서 사건은 이미 마무리되고, 인물들의 정체성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완성조차 코끼리의 일부이자 하나의 시선에 불과할 뿐이지만, 어쨌거나 시선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로 동의할 수 있었고 그것이 작품이 완성이라 불릴 수 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세계를 창조하는 욕심과 세계를 연명하려는 의지는 엄연히 다른 듯하다.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선택의 폭은 줄어든다. 완성된 시선에서 벗어나 위험하게 다른 곳을 비추어보던가. 혹은 그 시선을 뚜렷이 한다거나. 물론 그럼에도 창작자에게 수많은 선택과 실험의 기회가 있으며, 어느 방향으로 가든 좋고 전작보다 더 좋아지는 사례도 수도 없이 많지만, 결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니. 바로 전작과의 비교다.
단순히 무엇이 낫냐는 평가가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 작품의 세계를 발전했는지, 새로운 요소들은 세계의 본질을 홰손하지 않는지. 이전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표했는지 등. 무수한 작품의 가능성만큼 잣대도 수없이 생기고, 시리즈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잣대는 끝없이 올라간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좋은 후속작을 만들다니. 그 어려움을 어렴풋이라도 느끼면 후속작들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간도2>는 그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무간도2>는 전작의 프리퀄이다. 참신하고 날카로웠던 전작에 비하면 여러모로 파격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쇼트는 길어지고 카메라는 더 이상 역동적이지 않다. <대부>에서 느끼던 중후한 기운이 거리의 네온사인을 압도하는 듯 한편으로 공존하는. 짧은 러닝타임을 제외하면 연출 면에서 전작을 넘어 홍콩영화 대부분과 비교해도 이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 이들과도 연결점이 있으니. 바로 시대와의 작별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역사는 그것의 정당성이나 비판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탐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그것의 이해관계는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완전히 해소될 수 없고, 삶의 터전과 순수함이 훼손된 채 다른 세계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간도2>에서 선역과 악역은 없으며 모든 인연이 꼬여있다.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혹은 자발적으로 머무르는 인물들이 서로를 탓하고 있다. 신분을 숨긴 채 조직에 잠입하고, 이득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원한 고통을 뜻하는 무간지옥에 어울리는 모습, 이러한 점에서 <무간도2> 역시 홍콩영화이고,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시대상을 표현했을지 모르겠다.
특정 시대상을 잘 담은 명작은 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느낄 수 있는 여운이 있다. 기원전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건 물론 그리스에 가본 적조차 없는 사람도 고전을 통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역사와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을 현재의 시대로 치환해 교훈을 얻곤 한다.
시대 불문이랄까. 당시의 홍콩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복합적인 시대상을 그대로 떠안는 젊은이들이 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그 속에서도 사랑은 불안하게나마 피어난다. 하지만 그 순수함만큼은 불안해질 수 없기에 항상 고뇌하고 희생을 감수한다. 무엇보다 그 영화의 끝이 행복하든 슬프든 시대의 변화를 역행할 수 없다는 진리를 끝내 이기지 못한다. <무간도2>는 이 점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촬영이나 편집 기법은 독창적이고, 되려 주제 의식을 보강했다. 전작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인물들에 입체감을 더해준다. 본작의 빌런이라 할 수 있는 예영효는 그 구심점을 확실히 해주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엔딩은 지나간 시대에 헌사를 보내며 과거의 향수를 원동력으로 미래를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무간도'라는 강렬한 제목처럼 이전도 그다음도 인생은 시대 불문 지옥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연과 사랑이 언제나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흔히들 홍콩영화는 이제 끝이 나버렸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두각을 드러내는 영화가 적은 것도 사실이니. 철거된 네온사인들처럼 그때의 스타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시대 불문의 가치를 상기한다면. 독창성을 되찾는다면. 무엇보다 목소리를 낼 용기를 되찾는다면 홍콩영화는 다시금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간도2>가 홍콩영화의 황금기 마지막 세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간도 2>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속작’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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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주의자 킬러의 차가운 복수가 슬픈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암살 목표물을 감시하는 '킬러(마이클 패스밴더)'. 자는 시간도, 음식도, 심지어 심박수까지 철저히 통제하며 암살 대상을 기다리던 그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타깃을 저격하는 데 실패한다.
처음으로 임무에 실패한 나머지 극도로 당황하며 간신히 은신처로 돌아간 킬러. 그러나 그 사이에 킬러의 '아내'(소피 샤를로치)는 보복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이에 그는 아내를 공격한 두 명의 암살자 '짐승'(살라 베이커)과 '전문가'(틸다 스윈튼), 공격을 주도한 '변호인'(찰스 파넬)과 '의뢰인'(알리스 하워드)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즉시 여느 때처럼 냉철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킬러. 그러나 이번만큼은 완벽주의자 킬러도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
데이비드 핀처의 노르딕(?) 누아르
데이비드 핀처가 12번째 장편 영화 <더 킬러>로 3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도 넷플릭스의 손을 잡았다.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놀렌트의 그래픽 노블 원작을 <세븐>의 각본가 앤드류 워커가 각색했다. 무려 20여 년 전부터 마음에 둔 작품이라 하는데, 그 의지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관객을 만났다.
<더 킬러>는 여러모로 의외의 영화다. 핀처의 첫 누아르 영화라는 점이 새삼스럽다. 낯설기도 하다. 누아르 영화치고 전체적으로 건조하다. '킬러'는 심리적으로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차갑기도 하다. 킬러의 복수극을 5개 챕터로 나누어 보여줄 정도로 계획적이다. 그러다 보니 <조디악>, <나를 찾아줘>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다. 화면이 전환되는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핀처에게 기대하는 현란한 편집 솜씨도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와플 사이에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핀처가 감정을 분출시키지 못하는 감독은 아니니, 왜 애써 감정선을 숨기려 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건조함과 냉정함 사이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핀처의 노림수는 이내 모습을 드러낸다. 답은 간단하다. 소설 같다. 비록 프랑스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했지만, 마치 한 편의 북유럽 소설 같다. 더 구체적으로는 데이비드 핀처만의 노르딕 누아르에 가깝다.
관건은 암살 작전이 아닌 암살자
물론 <더 킬러>의 주인공은 탐정도 경찰도 아닌 암살자다. 북유럽도 배경이 아니다. 파리, 도미니코 공화국, 뉴욕 등 다양한 장소가 나오지만 북유럽은 없다. 그럼에도 <더 킬러>에서 노르딕 누아르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톤과 매너 때문이다.
우선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이라는 특징이 눈에 띈다. 노르딕 누아르에서는 셜록 홈즈 같은 뛰어난 탐정이 없다. 평범한 경찰이 주인공이다. 형사의 한계와 고충. 경찰 시스템과 사법 제도의 한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거와 심리가 얽혀가면서 비로소 사건을 보여준다. <더 킬러>도 마찬가지다. 암살 작전은 중요하지 않다. 킬러가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고용한 고객의 목적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핵심은 암살자다. 킬러의 내레이션이 빈 공간을 차지한다. 파리에서 암살 작전을 준비하는 챕터 1이 대표적이다. 이 챕터에서는 킬러 외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살인이 갖는 의미. 암살을 하기 위해 필요한 철칙과 조건들. 때로는 냉소적이고 궤변 같기도 한 그의 상념으로 가득하다. 마이클 패스밴더의 킬러를 보면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마침 패스밴더가 영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를 연기한 적도 있고.
강박증이라는 공통점
이때 킬러에게 초점을 맞추면 유달리 도드라지는 지점이 있다. 강박증이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표적이 묵는 호텔 방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려 한다. 눈을 뜨자마자 표적을 관찰하기 위해 잠잘 때도 테이블 높이를 창문과 맞춰 둔다. 저격 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심박수를 체크한다. 밥도 효율적으로 먹는다. 햄버거에서 번을 빼고 단백질 위주로 영양분을 섭취한다. 목표를 위해 끝없이 기다리고, 유지하고, 인내한다.
이 강박증은 마냥 남 일이 아닌 것 같기에 흥미롭다. 업무의 강도가 높고, 비윤리적인 점만 빼면 그의 일은 일반 직장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본연의 리듬 대신 일에 맞춘 일상도 낯설지 않다. 제이 그리피스가 <시계 밖의 시간>에서 지적한 대로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립된 후 사람들은 삶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지운채 시계와 알람에 맞춰 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시간 맞춰 칼같이 일어나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완벽하게 이행해야 마음이 놓이는 킬러와 현대인을 분리해 말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동정과 연민 끼어들지 못하는 킬러의 세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더 킬러>의 복수극은 평범하지 않다. 자기 세계의 모순을 발견했지만, 외적 가치를 이미 내면화했기에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환자의 치유기에 가깝다. 그가 외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챕터 1에서 핀처는 킬러의 시점과 청각만을 강조한다. 카메라는 그의 시점을 비추고, 음악과 소음도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울려 퍼진다. 달리 말해, 그의 세상에는 그만이 존재한다.
이를 확대하면 분리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세계가 나타난다. 여러 파편이 있다.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낀 독일인 관광객에게 관심이 없다. 설령 그가 아마존을 이용해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표준화된 일상을 영위한다.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처럼.
이 세계에서는 동정과 연민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코인에 눈이 멀어 자기가 죽이려 한 킬러가 복수를 위해 찾아와도 의뢰인은 그 이유조차 짐작 못하는 사회이니까. 킬러의 내레이션이 동정과 연민보다 냉정함과 계획을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 킬러>는 더더욱 노르딕 누아르 같다.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 중 하나가 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이기 때문. 노르딕 누아르 작가는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 속 지명, 연도, 현장에 대한 묘사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마치 거울처럼 사회상을 반영한다. 핀처도 마찬가지다. <더 킬러>를 통해 자본과 권력으로 치환될 수 없는, 인격의 존엄성 같은 고유한 영역이 존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복수의 성공이라는 비극
그러면서도 <더 킬러>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다. 수십 번 반복했던 작업인데 킬러는 자꾸 실수를 범한다. 변호사, 짐승, 전문가, 의뢰인으로 타깃을 좁혀가는 사이 살인은 공허해지고 의미 없이 흘러간다.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자신마저 납득하지 못할 위기를 맞는다. 그 사이로 불길이 튀어나오며 장르적 쾌감도 조금 깃든다. 줄곧 냉정하고 건조하던 영화는 온 집안을 부술 것처럼 처절한 액션 시퀀스를 선보인다.
그러면서 킬러가 바라보는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서서히 남의 이야기가 들리고 보인다. 특히 전문가와의 대화가 정점이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킬러와 전문가. 전문가가 묻는다. 이 직업에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언제냐고. 일을 하면서 언제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해 봤냐고. 그 순간 킬러는 흔들린다. 조각상 같던 그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 버린다. 단답이지만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그는 자기 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애써 외면한다. 계획대로는 아니더라도 완벽한 삶을 복구해낸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복수극은 마냥 기쁘지 않다. 언제나 완벽하려는 자기 노력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킬러의 마음에 깃든 이 건조한 희망의 존재는 큰 액션이나 제스처 없이도 틸다 스윈튼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고, 많은 대사 없이도 패스밴더의 연기가 일품인 이유다.
핀처가 보는 현대인
어떤 면에서 극 중 킬러는 <소셜 네트워크> 속 마크 저커버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이스북 CEO로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허브의 중심에 선 그.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외톨이다. 절친도, 동업자도, 심지어 변호사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고, 받지 못할 답을 처량하게 기다린다.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고립된 후에야 자기가 놓치고 산 게 뭔지 어렴풋이 깨닫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킬러의 차가움과 냉철함이 장르적 쾌감을 거쳐 쌀쌀하게 이어지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즉, 킬러는 암살자이기 이전에 비극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비추는 인물이다.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도로 청소차나 쓰레기 수거차는 킬러와 현대인의 삶을 함축하는 듯하다. 에릭 메서슈미트 촬영 감독의 영상미, 애티커스 로스와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과 어우러지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겨냥한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해진다.
결국 데이비드 핀처는 킬러의 일상을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척하면서 하나의 거울을 가져다 놓는 셈이다. 나르시시즘 섞인 킬러의 독백와 업무 과정을 통해 화면 너머의 자기 자신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더 킬러>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어떤 장르든 핀처는 영화를 잘 만든다는 증명뿐만 아니라.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핀처, 패스밴더, 스윈튼 팬 모두가 사랑에 빠져 곱씹을 누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