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지2024-09-19 12:16:20
취약함은 연대한다 ‘디피컬트’
영화 <디피컬트> 리뷰
블랙 프라이데이, 환경 단체가 대형 쇼핑몰을 점거하며 외친다. “1도, 2도, 3도, 오르는 기후. 소비는 반인륜적 범죄” 싼값에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들과 소비를 막으려는 사람들은 과격하게 대치한다. 격렬한 시위 장면으로 시작하는 <디피컬트>는 기후 위기와 환경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원제 ‘A difficult year’가 암시하듯 이 영화는 삶의 힘듦과 우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환경 운동가 캑터스는 기후 우울증으로 무력감을 느낀다. 브루노와 알베르는 대출을 반복하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 거주지도 불분명한 신세가 됐다. 브루노는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고, 알베르는 공항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며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물건을 되팔아 근근이 돈을 마련한다. 환경 운동가와 리셀러,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세 사람이 환경 운동으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환경 운동과 가난이 맞닿는 지점들이다. 알베르와 브루노는 공짜 맥주와 음식에 혹해서 환경 단체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기후 위기에 코웃음 치지만, 자선 바자회가 물건을 빼돌려 되팔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환경 운동에 가담한다. 환경 운동에서 떨어지는 콩고물과 캑터스에 대한 알베르의 호감, 시위 현장이 주는 묘한 흥분 등은 이들로 하여금 환경 운동에 가담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유가 된다.
빈곤과 환경 운동은 또한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캑터스는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한다. 하나의 물건을 들일 때는 하나의 물건을 버리는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유지한다. 알베르와 브루노에게 도움을 주는 경제 전문가는 물건을 사기 전에 세 번 생각해 보라고 강조한다. ‘꼭 필요한가? 정말 필요한가? 지금 당장 필요한가?’ 최소한의 소비는 환경 문제와 재정적 문제에 봉착한 개인들의 실천이자 투쟁이다.
이는 기후 위기와 빈곤이 끊임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루노가 자본의 중심지인 프랑스 은행을 점거하자고 설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이 화석 연료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기후 재난을 가속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는 채무 변제 서류에 접근하려는 속내를 갖고 있다.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환경 운동과 연결되는 의외의 상황들은 삶의 취약함이 여러 지점에서 우연히 연결됨을 보여준다. 우리의 우울이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발견할 때 취약함은 연대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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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메라>의 아무도 없음과 누구도 아님
얼핏 <행복한 라짜로>에 비해 계급성에 대한 고찰은 덜 두드러지고 로맨스 / 로드 무비의 모험적 속성으로 약간의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서늘하고 직관적인 대비는 여전히 빛난다. 예를 들면 감독의 언니 알바 로르바케르가 연기한 부자 수집가 스파르타코의 대사 같은 것들.
더러운 옷을 입고 도굴꾼인 척 하지만 당신 본질은 그게 아냐. 저들을 봐. 자기가 예술품을 밀매하는 약탈꾼인 줄 알지만 사실 거대한 기계의 부속일 뿐이야. 우리 몸종들이지. 언젠가 완전히 녹슬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야.
도굴로 먹고 사는 가난한 시골의 톰바롤리 친구들은 우연찮게 찾은 ‘진짜 보물’로 부자들의 유람선에 오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스파르타코의 저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피로의 삼촌이 괭이를 빌려갈 때 “일만 하다 돌아버렸다”며 노인을 조롱하고 박대한 바 있다. 이 장면은 도시로부터 침투한 자본과 공장의 오염에 밀려나고 자리를 뺏긴 채, 전통적인 육체노동을 경시하며 한 탕을 노리는 80년대 이탈리아 지방 청년들의 세태를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전 세대 노인들에 비해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지만, 바라던 대로 졸부가 되는 데엔 결론적으로 실패하는 젊은이들(애초에 그것은 아르투가 찾아준 기회일 뿐이었으니). 결국 노인의 운명이나 자신의 운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단 걸 검은 머리의 에트루리아 후손들은 모르고, 오만한 금발의 스파르타코는 알았다.
에트루리아의 동물, 풍요, 번성의 여신 키벨레 상으로 인해 톰바롤리도, 스파르타코도 일확천금의 기회를 쥐지만 돌연 환멸을 느낀 아르투는 “인간이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라며 상의 얼굴 부분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만다. 과거에 얽매인 그는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와 곧 잃어버릴 키벨레의 얼굴을 동일시한지 이미 오래다. 한순간에 절망한 피로와 친구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아우성이지만 스파르타코만은 단말마처럼 숨을 들이킨 후 가라앉는 상을 바라보며 오히려 살며시 웃고 있다. 이천 년 넘게 땅 속에 있었고 이제 일부를 영영 유실한 여신상은 영원히 얼굴 없는 아무개, ‘누구도’ 될 수 있고 ‘아무도’ 아닌 상에 머무를 수 있다. 그 편이 ‘더 낫다’는 건 아르투에겐 고대의 예술을 향한 본능적 감각이었고, 스파르타코에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업가로서의 이성적 판단일 테다.
이쪽과 저쪽. 지상과 지하. 아르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꿈속 저승과 그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이승. 배 위의 부자를 위해 일하는 큐레이터들과 산 아래 동굴의 도굴꾼들. 아르투가 수맥을 찾을 때 쓰는 Y자의 나뭇가지와, 이탈리아가 “사람이 머리부터 거꾸로 꽂힌 것 같다”고 웃어댄 나무의 수형(Y자를 반대로 꽂아둔 듯한).
플로라 부인은 폐쇄된 기차역에서 “이쪽은 시골, 저쪽은 도시”라고 반대 방향을 가리켰지만, 실상 불행과 빈곤은 언제라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찾아들며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행복한 라짜로>의 귀족 부인이 과거에 가둬둔 자기 소유의 소작농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을 착취하고 저들은 가장 약한 소년(라짜로)을 착취한다”고 말했듯이. 반세기 후 그의 아들 탄크레디 역시 귀족 집안의 부와 명예를 이어받지 못하고 문서 몇 장에 집안 땅을 모두 뺏겨 도시 빈민이 되었듯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전했으며 기원전부터 이어진 에트루리아 문명도 로마에 흡수됐다. 파비아나가 장난스레 부르짖은 “통일 이탈리아”를 구축하기 위해 지역 특색의 문화와 언어는 통제되고 소실되며 가치를 잃는다. 과거의 영광은 빛바래고 외부 자본에 의해 싸구려 ’평민의 일상품‘이라며 멸시받는다. 아르투 일생의 마지막 도굴에서 먼저 사금을 찾아낸 젊은이가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르투와 같은 이방인(아마도 동유럽의 언어를 쓰는)이었던 것처럼, 주인 아닌 자들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더 빨리 알아보고 정작 주인된 이탈리아 인들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해 외부의 도움을 빌려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무덤 위에서 뛰놀며 자랐다는 알리체 로르와커가 애수를 품고 조망한 이야기의 첫 번째 골자다.
여기저기 평을 읽다가 이탈리아라는 인물 자체를 그냥 싫어하거나, (그렇게 말하긴 아무래도 너무 여혐적이었는지) 아르투가 이탈리아와 호감을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게 거부감이 든다는 반응을 꽤 많이 보았다. 나도 첫 관람 때는 이입하기 힘든 인물이란 인상 정도는 받았지만,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싫어했단 점에서 오히려 갑자기 흥미가 생기고 복잡한 인물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아르투가 가진 매력의 대부분은 삶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듯한, 덤덤하고 버석버석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이 범상치 않은 초연함에 자꾸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삶의 미련과 생동감을 불어넣고야 마는 이탈리아를 대번에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베니아미아란 과거의 사랑이 너무 선명히 버티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강력한 순정을 가진 아르투에게도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접근하는 (아이 둘 둔) 여자라는 점, 푼수 같기도 당돌하기도 한 성격과 눈치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면까지. 누군가는 이탈리아를 무척 피하고 싶은 여자, 대책 없이 해맑은 사람으로 기억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실패한 사랑의 시작을 이탈리아의 시점에서 다시 쓴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초목이 우거진 걸 빼곤 좋아할 수 없었던 고향을 떠나, 아버지가 다를지도 모르는 두 아이를 낳고, 그다지 잘할 생각도 없는 노래를 배우는 체하며 딸을 잃고 정신 나간 늙은 여자의 집에 입성해 아이들을 숨겨 키우고, 결국 들켜서 쫓겨났지만 굴하지 않고 같은 마을의 버려진 역을 고치고 꾸며 제 살 곳을 마련하고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불러 모은다. 이 영화는 아르투의 입장에서 보면 방황하고 회피하며 끝내 치유받지 못하는 여정에 관한 비극적 로드무비지만, 이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고향으로부터 유리된/쫓겨난 이가 끝끝내 자기만의 새 집, 새 고향을 일구어내고 새 가족을 만드는 일종의 개척자 영웅 서사다.
고향에 자카란다 나무가 많았다는 언급이나, 라틴 또는 아프리칸계 혼혈로 추정되는 외모의 아이들 콜롬비나와 치릴로의 외모로 미루어보아 그가 떠나온 고향도 어쩌면 타국일지 모른다. 혹은 포르투갈, 멀게는 남미까지도 떠돌며 살아온 (아르투 못지않은) 방황의 시절이 있었을지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근거는 이탈리아가 확실히 ‘이방’의 인물에 끌려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음악 선생의 죽은 딸의 남자친구라는 영국인 - 보다도 그가 이방인이라는 점 그 자체, 그가 움막을 살기 좋게 꾸미는 능력, 언어적 소통에 서툴다는 점 등등 -을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짜증스럽게도 돌아왔다가 떠나고 찾아왔다가 버리고 가기를 반복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뿐인데도 이탈리아는 평정과 긍정을 유지하는 드문 사람이다. 아르투를 비롯한 톰바롤리 남자들이 별다른 직업도 없이 스파르타코의 탐욕에 기생하며 과거에 속박된 도굴꾼에 머무르고, 플로라 부인이 페르세포네를 잃은 데메테르처럼 정신을 놓고 딸에 집착할 때, 이탈리아는 홀로 현실을 책임지고 미래를 도모한다. 누구 못지않게 신산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데 그에겐 과거가 별로 중요치 않은 듯도 하다.
영화 중반부쯤, 스파르타코의 조카 멜로디에가 돌연 제4의벽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에트루리아 인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엔 마초가 없었을 거래요”라고 말하고 에트루리아 민족은 모계 사회였다는 점을 피로에게 일러주는 재미난 순간이 있다.
이 서술은 영화 전반에 존재감을 행사하려 애쓰는 피로의 분투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그처럼 마초가 되려 하는 근현대 이탈리아 남성들의 폭력적 문화를 - “여자가 오줌 눴을 때 모양이 동그랗다면 결혼하라고 했다”는 말에서 즉각 감지되는 ‘처녀성’에의 집착, 카니발에서 춤추는 이탈리아의 모습에 동해 ‘발가벗기자’고 달려드는 관습적 성희롱 등등 - 야릇한 방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영화가 그 대신 가만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은 시끄럽고 하찮은 남성 조연들에 비해 훨씬 인상적인 방식으로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여성 조연들이다.
빼앗긴 힘의 자리로 가장 먼저 소환되는 건 베니아미아의 어머니 플로라 부인의 기이한 권위다. 플로라는 딸 뿐인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며 딸들과 제자를 함부로 대한다. 딸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낡은 집을 팔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그는 집과 가구들을 팔지 못하게 하며 죽은 막내딸(베니아미나란 이름은 야곱이 요셉만큼 사랑한 유일한 아들이자 막내인 베냐민에서 따왔을 게 분명하다)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버티기 위해 건강과 경제권 그리고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막내딸의 연인이었던 아르투는 오페라 가수였던 플로라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도 되는 유일한 사람인데, 딸들은 ‘남자만/남자라서 가능하다’며 차별 대우에 대놓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 아르투가 대접받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베니아미나가 죽은 것을 부정하려는 플로라의 절박함에 군말 없이 동조하는 체라도 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후 스파르타코가 자기 직원들을 손짓 하나로 몸종처럼 부리는 모습에서도 플로라와 유사한 권위가 발견된다. 스파르타코란 이름을 여성이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주로 이탈리아 남성형 이름에 붙이는 어미(-co)로 끝나는 점, 그 유명한 투쟁가 스파르타쿠스 또는 아테네를 이긴 스파르타의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란 점도 그의 특수한 위치성을 짐작케 한다. 그와 친지, 직원들이 전원 새하얀 금발 벽안을 가진 것은 그들이 토종 에트루리아 혈통이 아닌 역사적 침략자의 혈통이리란 사실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가 일군 대안 가족의 그림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모계 사회는 다시 한번 불려 나온다. 이탈리아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유적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공간을 쓸만한 집으로 만들어내자 그처럼 아비 없는 자식들을 홀로 키우는 젊은 여자 친구들이 모여 거대한 양육 공동체를 이룬다. 아이도 남편도 없는 파비아나가 “짜증만 내고 지시만 하며 부려먹었“던 피로와 남자들을 떠나 여성과 아이뿐인 집에 합류한 결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아서 집을 고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자급자족 노동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탈리아의 모습은 앞서 ”가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 뭐라도 하면서 노래를 불러“라며 온갖 가사노동을 시킨 플로라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만든다. 클래식하고 권위 있는 음악을 가르치면서도 육체가 깨어 있어야 소리가 잘 나온다고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직접 몸으로 배운 교훈 때문일 것이다. 플로라와 이탈리아에게 예술과 생활, 음악과 노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이는 inestimable한 것을 기어이 estimate하겠다는 외지의 자본, 남성들이 추구하는 협소한 의미의 성공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미학이다. 버려진 기찻길 옆에서 일정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노동은 그 자체로 저항 예술의 성격을 띠게 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르투는 톰바롤리와 플로라 대신 이탈리아의 집을 찾아가며 처음으로 ‘다른 미래’를 꿈꾸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니아미아의 망령을 그리워하며, 사람 대신 새 떼가 노니는 명계의 꿈과 망자들의 부름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는 운명이라 이탈리아가 마련해 준 현실 세계의 유토피아에 편히 머물지 못하고 떠나간다. 결국 부장품 하나 없이 제 발로 들어간 무덤에서 그는 비로소 진짜 웃음을 짓고 마음 저린 행복을 찾는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 도굴꾼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측정될 수 없는 것, 훼손할 수 없는 것들은 영영 보존될 것이다.
그가 묻힌 땅 위에서 플로라는 계속 베니아미나와 아르투를 기다릴 테지만, 이탈리아는 계속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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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 근래 나왔던 디즈니 영화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최고!
서론
어릴 적, 학교에서는 퇴학 당했지만 손재주가 좋아서 옷을 만들며 살아가던 크루엘라 드 빌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생각에 트라우마에 빠져,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다행히 호레이스와 재스퍼를 만난 덕분에 도둑질을 해가며 안정적으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고, 본명을 버리고 에스텔라로 개명해 살아가던 도중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꿈을 그리던 리버티 백화점에 취직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매일같이 하는 건 화장실 청소였고 슬슬 일에 질리려는 찰나, 폰 헬먼 바로네스의 눈에 띄어 얼떨결에 전문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다. 이 덕에 앞으로는 행복길만 걸을 줄 알았으나 얼마 안 있어 알게 된 바로네스의 진실을 안 크루엘라는 에스텔라를 지우고, 크루엘라로 각성해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를 그린 [1001마리 달마시안 개]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실망스러웠던 디즈니 전작들
일단 솔직히 말해 최근에 디즈니 영화들 중에서 만족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 불과 3개월 전에 개봉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도 설정과 배경만 다를 뿐 [겨울왕국 2]와 별 다를 바 없는 화법으로 인해서 매우 실망했고, 더 나아가 2019년부터 개봉한 모든 디즈니 영화들이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알라딘]은 각색된 부분들은 모조리 구려서 보고 나서 많은 아쉬움에 휩싸였었고, [라이온 킹]은 아예 원작을 베껴온 수준, [말레피센트 2]는 그냥 영화 자체가 구려서 실망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게 만들었다. 물론 애니메이션 쪽은 비교적 낫지만 여러모로 연속된 실망을 안겨주었던 디즈니가 드디어, 그리고 이제야 볼만한 영화를 꺼내와서 참으로 반가웠다. 비록 디즈니의 색은 얕아졌을지 언정 원작과 차별화된 동시에 독자적인 개성을 추가하여 디즈니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리메이크이자 스핀오프였다.
한 걸음 내딛다.
디즈니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는 걸 제외하더라도 이 작품은 장점이 상당히 많다. 우선 디즈니답게 기본은 해주는 재미와 60년대의 느낌이 풀풀 살아있는 연출과 비주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어쨌든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저 안전한 길로만을 선택해왔던 디즈니가 범죄를 저지르는 악역 캐릭터를 전면적으로 내세워서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고, 하도 많이 나와서 질릴 대로 질릴 칭찬 중 하나인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의 연기력은 당연히 훌륭했다. 거기다 음악의 활용 또한 굉장히 좋았는데, 대표적으로 C.C.R의 'bad moon rising'이나 비틀즈의 'Come Together' 등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노래들을 상황에 맞게 잘 끼워 넣은 덕분에 눈만이 아니라 귀까지 즐거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크루엘라와 함께 하는 캐릭터인 호레이스와 재스퍼도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악역이고 뭐고 할 거 없이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 제몫을 하고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는 건 확실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원작을 훼손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나오는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는 사악하기 그지없었던 캐릭터가 이번 영화에서는 사연이 있는 인물로 나오고,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담배피는 장면도 없으니 원작의 캐릭터성을 훼손시켰다는 불만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만약에 원작 그대로의 크루엘라가 나왔다면 2시간 동안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비윤리적인 영화가 될 뿐만 아니라 흥행이나 교훈을 남기는 디즈니의 성향과도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각색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도면 원작을 크게 훼손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고, 마찬가지로 캐릭터성을 바꿔서 원작과는 다른 모습의 캐릭터를 보여준 2019년에 [조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빌런 캐릭터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방식 정도로 생각하면 보는데 큰 불편함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초반부는 별로...
이렇게 영화에 대해서 쭉 좋은 평만 해주고 있지만, 사실 단점 또한 만만치 않게 있는 작품이다. 일단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바로 지나치게 길었던 초반부다. 크루엘라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 이 초반부는 개인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고 생각하는데, 차리리 속도감을 더 내서 간단하게 처리하고 바로 본론으로 직행하거나, 아니면 크루엘라의 심리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자세하게 그려내서 완성도를 높이거나 했어야 했는데 딱히 둘 다 해당하는 것도 아니라서 괜히 초반부만 늘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바로네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분수대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도 처음에는 임팩트가 있었으나, 대사가 너무 길어지는 탓에 뒤로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크루엘라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다룬 탓에 중반부터 활약하는 캐릭터인 기자 아니타 달링과의 케미도 딱히 와닿지가 않았다.
생뚱맞은 반전과 의문인 대목
그리고 작중에서 반전으로 나오는 요소들도 충격적으로 와닿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쌩뚱맞는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바로네스가 어머니를 죽였고, 그 바로네스는 사실 자신의 친어머니였다는 반전은 딱히 이렇다 할 복선도 없었다고 생각했고, 애초에 예전 디즈니 영화들에서 지겹도록 써먹은 반전이다 보니 충격적이긴 커녕 당황스럽다는 느낌이 더 컸다. 거기다 크루엘라의 어머니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도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웃기게 떨어져서 몰입감을 깨먹었다. 아마 의도라면 어린이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겠다는 디즈니의 의지로 볼 수 있겠지만, 막상 [라이온 킹] 같은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매우 충격적으로 그려냈다 보니 과연 이게 의도인지 실수인지 섣불리 감이 잘 안 온다. 그리고 크루엘라가 에스텔라를 버리고 각성하는 첫 장면에서 경호원들을 쓰러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굉장히 이상하다. 왜냐하면 크루엘라가 딱히 과거에 몸을 쓰는 훈련을 배웠다는 묘사가 없음에도, 건장한 경호원들을 쉽게 쓰러트리는 신은 몰입을 깨먹는 것도 있지만 개연성 측면에서도 매우 이상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결론
단점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지만, 수많은 장점들 덕분에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디즈니 영화. 제목에서도 써놨다시피 근래 나왔던 디즈니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고, 앞으로도 성공적인 스핀오프를 꼽을 때마다 계속 언급될 작품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특전 너무 이쁘게 잘 나왔다.^^ 소장 가치 있을 듯.
평점: 7/10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콩까기의 종이씹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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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와 대화의 마법
기차에서 난데없이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책을 읽다 봉변을 당한 한 승객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자리를 옮겨 앉는다. 옆 줄에 앉은 다른 승객과 공감의 눈빛을 잠시 주고 받는다. 하지만 남자 쪽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무슨 책 읽어요?’라고 묻는다. 폭풍 같은 부부싸움이 객차에서 빠져나가고 나서도 두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대화는 계속된다. 그들은 식당 칸으로 옮겨 대화를 시작하고, 대화를 멈추지 못해 식사까지 함께 한다. 그러면서 또 다시 우연히도 서로와 놀랍도록 말이 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제시는 셀린에게 비엔나에 함께 내려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하자는 제안을 한다. 망설이던 셀린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이 우연한 에피소드로 문을 연다.
셀린은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기차에서 내리고, 영화는 계획도 없이 여정을 시작한 두 사람의 끊임없는 산책과 대화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이내 할리우드식 로맨스 공식을 완전히 비껴 가면서 자기만의 낭만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는 리얼리즘 영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판타지 같은 로맨스다. 존재 자체로 90년대의 청춘 영화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지 모른다는 몽상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나의 어머니의 가장 큰 낭만이었고, 21세기를 사는 나의 근원 없는 향수다.
플롯은 아주 간단하다. 두 남녀가 만나서 계획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둘은 밤새도록 비엔나 거리를 소요하며 대화를 나누고, 잠시 연인이 된다. 날이 밝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이 하룻밤을 링클레이터 감독은 수많은 대화로 채워 넣는다. <비포 선라이즈>의 모든 시퀀스는 두 사람의 끊임없는 말소리로 구성되면서 찬찬히 길어져 3분이 넘도록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중반에 두 사람이 대성당을 발견하는 시퀀스가 있다. 두 사람은 성당 맨 앞자리에 앉아 성당에 엮인 추억과 신에 대한 믿음, 공간으로서의 성당, 심지어는 퀘이커교 식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화는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공간에 있을 거야’ 라는, 둘만의 명쾌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다음은 강변이다. 두 사람은 시인을 만나고, 짤막한 즉흥 시를 듣고, 걷고 또 걷고, 말하고 또 말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이렇게 제시와 셀린이 나누는 대화로 채워 넣은 시퀀스가 비엔나의 골목길처럼 연결되어 일출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링클레이터의 이 길고 긴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아무런 내용이 없다’고, ‘지루하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특히 흥미로운 캐릭터와 세계관을 던져 주고 영화의 성적에 따라 다음 시리즈에서 그 인물의 과거와 세계관을 확장을 맛볼 수 있는 대형 프로덕션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티켓 값을 하는’ 스펙터클을 제공해 주는 작품을 원하는 관객, 그리고 미래의 관객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단박에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포 트릴로지’가 낭만적인 영화로 회자되고 시청되는 이유는 셀린과 제시의 관계가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여타 할리우드 로맨스가 완전한 환상으로 관객을 미혹하는 방식과는 다른 특별함을 말해 준다. 바로 어떤 관객은 ‘지루함’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그 지점이 비포 트릴로지를 독보적으로 만든다.
<비포 선라이즈>는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지닌’관계를 두 배우의 대화를 통해 쌓아 간다. 두 사람은 같은 의견을 지닐 때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어긋난다. 예를 들어 손금을 보겠냐는 한 집시의 물음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셀린에게 자신은 그런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렇다. 두 사람은 너무 잘 맞아서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철학을 지녔고,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줄 알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차이점은 논쟁이 되지 않고 되려 하룻밤 여행을 이어 나가는 동력이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관객은 제시와 셀린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나간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계속될 것인지 아닐지에 대한 걱정은 무의미하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대화를 전면에 내세워 셀린과 제시를 그린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난다. 영상 언어를 구사하면서 말없이 주제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영화의 가장 주된 임무를 <비포 선라이즈>는 수행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 질문에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시나리오에서 꺼내 입은 제시와 셀린이 답해 준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잔뜩 감상에 젖어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기억하는 것은 결국 쇠라의 그림이 프린트된 팜플렛을 훑는 셀린의 손가락, 전차 맨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 작은 절도를 저지르고 내달리는 순간의 짜릿함, 그리고 음악 감상실 안에서 서로를 힐끔 쳐다보는 눈길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대화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셀린과 제시인 두 배우, 비엔나를 걷고 또 걸음으로써 만남을 관계로, 대화를 캐릭터로, 비엔나를 낭만으로 변환한다. 그것이 링클레이터가 각본과 대화로 부린 마법이다.
비포 트릴로지는 ‘선라이즈’에서 끝나지 않고, <비포 선셋>을 거쳐 <비포 미드나잇>에 이른다. 뒤의 두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생겨난 마음과 관계를 다른 도시에서 이리저리 움직임으로써 자꾸만 타임머신을 타게 한다. <비포 선라이즈>가 관객을 미혹하게 한 이유, 그리고 트릴로지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길고 긴 대화를 매력적으로 촬영해낸 솜씨와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에 있다. 두 사람 실제 시간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나이 든 배우들과 자연스레 변화하는 두 캐릭터의 관계를 담은 시리즈라는 매력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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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 바라보다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과 이 영화.
미지의 물체도 길들일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은 각기 다른 형태로 일어난다. 하지만 인간의 오만은 목숨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고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빨려들어 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떤 것은 살아있음에도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는 느낌으로 나아가며 공포에 갇혔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망가뜨려야만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인해 앞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가려지며 우리가 어떤 것에 주목하고 있었는지 망각하게 만든다. 나쁜 기적의 경계에서 조차 자극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 속, 내가 보인다.
카메라에 의해 벌어지는 ‘관심’에 대한 시선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보여 진다. 벗어날 수 없는 시선은 어떤 이에게는 폭력의 수단이 되어버렸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 각자 다른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에서 멈추지 않는 욕망은 인간을 압도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만다. 심지어 그 공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관객조차도 OJ의 생사여부보다 미지의 물체가 사진에 담겼는지에 대한 생기게 하며 바뀌지 않는 현실이 영화를 넘어 현실로 밀려들어온다. 소외된 이에서 소외된 이들을 주목하는 이질적인 요소들도. 해석해야 하는 영화는 좋아하지만 난해하고 무언가에 갇힌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의미 부여를 해야 이해를 할 수 있어서 이미 지루해져버린 서사를 살리기에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여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게 했다. 특히 공포 영화로서 기대했던 부분들보다 ‘놉’에서 돋보이는 여러 설정들은 전작에서 보여준 것보다 덜 무서워서 아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는 조던 필 감독의 ‘놉’은 나에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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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날 인터넷만 하고 사니까 이렇게 되잖아!”
7★/10★
김도훈의 칼럼 ‘가능한 임무를 찾아서’에 따르면, 톰 크루즈는 1999년 이후 ‘연기파 배우’와 ‘액션 스타’의 길 중 후자를 골랐다. 배우라면 둘 중 하나만 성취해도 대박일 텐데, 1999년의 톰 크루즈는 둘 다 잘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전자가 더 멋져(?) 보이는데도 기꺼이 후자를 택했다. 그를 향한 대중적 환호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고 모든 전문가가 ‘걸작’이라고 칭송하는데 나는 봐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서 멋쩍은 영화가 아닌, 주요 시상식에는 초대받지 못하고 ‘배우’가 아닌 ‘스타’로만 취급는다 해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데서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
사실 톰 크루즈에 대한 예찬, 상찬에는 좀 낯 뜨거운 구석도 있다. 영화가 얼마나 재밌냐를 말하지 않고, ‘톰 크루즈가 이런 액션까지 직접 촬영했다니!’만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영화 배우’ 톰 크루즈에 대한 칭찬일까 싶었던 것. 그가 오금이 저리는 액션을 직접 촬영한 게 대단한 건 맞다. 하지만 이 말만 반복하면 오히려 ‘그것 빼면 영화는 별로’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심지어 시리즈 마지막인 이번 영화에는 아예 시작부터 ‘이선 헌트’가 아닌 배우 톰 크루즈로 등장해 관객에게 별도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의아했다. 이게 맞나?
그러나 ‘미션 임파서블’은 늘 적당함 이상의 ‘대중적 재미’를 보장해왔고, 그건 시리즈의 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톰 크루즈만큼은 아니더라도, 영화 역시 웬만한 첩보 액션물을 훨씬 상회하여 즐거움을 선사해온 것이다. 이 시리즈의 대단함은 이선 헌트가 맞서 싸워온 적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늠이 된다. 이선 헌트는 조직의 배신자, 생화학 무기, 테러리스트, 핵무기를 거쳐 마침내 인공 지능까지 때려눕힌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인류의 적’이 누구인지를 고발해왔다.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아카이브다. 이선 헌트가 어떤 적과 싸워 세계를, 지구를 구해왔는지만 분석해도 당대 가장 첨예한 국제 사회의 위협에 관한 이미지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에 관한 그럴듯한 아카이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리즈 전작에서 그는 대부분 냉전 시대의 긴장을 토대로 한 무대에서 뛰놀았다. 하지만 마지막 영화인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에서는 무지막지한 인공 지능 앞에서 냉전 구도마저 우스워진다.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인공 지능을 자기 통제 아래 두려 노력하지만, 그들은 내내 역으로 인공 지능에 잡아먹힐까 벌벌 떨고 있다. 정말 언젠가 인공 지능이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는 지구인들의 연대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지는 차차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영화 내내 지난 시리즈의 장면들이 삽입되어 관객의 기억과 추억을 일깨우는 건, 파릇파릇한 시절의 톰 크루즈의 얼굴에 새삼 놀라게 하는 효과와 더불어 배우 개인에 대한 헌사, 나아가 ‘인류의 적’에 대한 아카이빙의 역할까지도 수행하는 셈이다.
뜻밖의 명장면도 있다. 언제나처럼 불가능한 임무에 고군분투 중인 이선 헌트를 한 미국 군인이 습격한다. 그는 이선이 임무에 성공하면 사이버 공간이 마비되는 것을 우려하는, 초월적 인공 지능 엔티티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몇 번의 주먹질로 그를 제압한 이선이 말한다. “맨날 인터넷만 하고 사니까 이렇게 되잖아!”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비장한 임무가 자녀의 엉덩이를 때려주는 부모의 훈계가 연상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커뮤니티도 좋지만 현실의 인간관계도 좀 맺어보고(모 대통령 후보님이 생각난다), 영 감을 못 잡으면 ‘어른’이 좀 훈계도 해주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고 느껴서일 듯하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인공 지능, 인터넷에 잡아먹힌 인류에 대한 가장 적확한 비판의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이선 헌트와 동료들은 끝내 인공 지능 엔티티를 램프에 갇힌 지니의 신세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세계에서도 누가 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제 대선이 일주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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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려는 한 가족의 이야기
먼 이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난다. 고국에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거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이민의 길은 사실 쉽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면서 조건이 좋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야 새로움의 삶을 천천히 익숙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일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나은 일을 찾고 가족들과 삶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시작을 선택한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 힘든 이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점점 그곳의 일부분이 되어간다. 어떤 나라에서든 이민자들의 삶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과정을 거친다.
사실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이 꼭 이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전혀 새로운 곳에 이사 가게 되어 살게 되거나 다른 환경으로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한 번쯤은 겪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다시 삶을 만들어 나가는 장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할 때, 그 쉽지 않은 현실을 앞에 두고 가족들은 때론 서로 의견 대립을 하고 싸운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곳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해 의지할 곳은 바로바로 옆에 있는 가족뿐이다.
영화 <미나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제이콥(스티븐 연), 모니카(한예리), 딸 앤(노엘 케이트 조), 아들 데이빗(앨런 김) 가족이 알칸소의 새 집에 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미국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가족이 다시 새로운 지역 알칸소로 이주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제이콥은 바퀴가 달린 집과 그 주변의 땅에 농장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하는 일을 하며 같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미국 대도시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한 이들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 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거주 환경과 주변을 본 모니카가 실망감을 토로하지만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남편 제이콥의 말에 일단 그곳에서의 삶을 준비한다.
제이콥이 준비하는 농장은 그의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제이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주변의 땅에서 물을 찾는 일이다. 물길을 찾는 외부인을 불러와 살펴보거나 자신이 직접 땅을 파서 땅속의 물을 찾아 농사에 활용한다. 제이콥이 늘 물에 신경 쓰는 것처럼, 영화 속에서 물은 꽤 중요하다. 물만 잘 공급된다면 농사를 짓기 수월하고 이들 가족이 큰 불편함 없이 뿌리내려 사는데 도움이 된다.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물이 끊겼을 때 가족을 압박하는 것은 생활의 불편함 뿐 아니라 경제적인 압박도 포함된다. 그들이 목이 타는 것과 같이 마음속도 타들어가고 부부는 의견 대립으로 충돌한다.
제이콥은 자신의 농장에서 작물을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믿고 부단히 매달린다. 반면 모니카는 실패할 수도 있는 농장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병아리 감별을 지속적으로 하길 원한다. 그리고 조금은 더 큰 도시로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원한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위하지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르다. 제이콥은 농장의 성공이 가족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부단히 매달린다. 당장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리는 안정적인 상황이 그의 눈앞에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농장을 포기할 수 없다. 그 농장의 성공이 바로 가족의 안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모니카는 적은 돈을 벌더라도 바로 지금 안정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당장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농장일에 매달리는 제이콥과 의견 대립을 하게 된다.
그런 작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모니카와 제이콥은 서로의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모니카는 제이콥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은연중에 만들어준다. 비록 제이콥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의 엄마인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불러와 자신과 남편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한다. 순자는 이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윤활유이자 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으로 올 때 가져온 고춧가루, 멸치 등은 밥상에 올라올 음식이 되어 가족들에게 고국의 맛을 선사하고, 그가 가져온 화투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놀이가 가진 재미를 알려준다. 비록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외할머니와 데면데면해 하지만 아이들은 곧 그것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조금씩 외할머니는 이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
그 익숙해진다는 것이 곧 친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완전히 마음을 열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이 영화 속 데이빗과 앤 도 마찬가지다. 대화조차 잘 통하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그들이 친숙함을 금방 느끼기는 어렵다. 처음 외할머니를 만난 데이빗은 연신 할머니 같지 않다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한국의 할머니를 처음 만났고 기대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일하러 간 시간,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데이빗과 앤은 외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에 산책을 나간다. 특히 데이빗은 그 산책의 시간을 보내며 순자와 교감하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질병도 서서히 회복해나간다. 그렇게 모든 가족의 마음속에 익숙함이 자리해나갈 때 비로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는 기운이 만들어진다.
<미나리> 속 특별한 장면들은 대부분 외할머니 순자와 데이빗이 만들어낸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은 짧은 한국어와 영어를 통해 이야기하는데 냇가 옆에서 데이빗과 부르는 원더풀 미나리 송에서도 정감이 느껴지고 티격태격 장난치는 듯한 두 사람의 행동도 웃음을 짓게 한다. 또한 순자는 데이빗이 눈에 보이는 위험을 보이는 곳에 놓고 관리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심장병이 있어 늘 뛰기를 두려워하는 데이빗에게 그 위험을 직면하며 관리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데이빗은 마음도 몸도 서서히 치유가 되어간다 이 영화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외할머니와 손주가 만들어낸 이런 앙상블 때문일 것이다.
순자는 고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냇가에 뿌려 미나리를 키운다.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미나리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니카와 데이빗 가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가족에게 물만 있으면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큰 문제없이 정착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영화 후반 군집을 이루어 아주 잘 자라는 미나리의 모습은 어쩌면 이 가족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는 이들 가족이 잘 정착하여 살게 되는지, 농장 운영은 성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마음인지는 잘 보여준다. 결국 다섯 명의 가족이 결코 떨어질 수는 없고 앞으로도 같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타오르는 농장에 뛰어든 제이콥과 모니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싸운 직후였고, 이별의 결심까지 한 후였다. 하지만 남편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이 타오르자 그것의 일부라도 구하고자 이리저리 물건을 불 밖으로 빼는 모니카의 모습에서 남편의 노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그들이 결국 같이 그것을 해결해 나갈 것임을 보여준다.
가족의 고난사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영화 <미나리>는 긍정적인 영화다. 잠깐씩 모습을 비추는 알칸소의 이웃과 교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조금은 신기하게 바라보고 친해지려 다가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폴(윌 패튼)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웃으로 등장하지만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다. 이해 못할 행동을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제이콥의 농사가 잘되길 빌면서 일손을 돕는다. 악의 없이 이 가족이 그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어쩌면 영화 속 그의 주술이 실제로 가족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심리적인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농작물 수확도 잘할 수 있었고, 집안에 나쁜 일들도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이민자들 주변에 있었던 좋은 이웃들의 모습을 폴이라는 인물이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폴이 이민자인 그들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도 폴을 하나의 이웃으로 대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각기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하며 관람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부부의 이야기, 어떤 사람은 외할머니와 손주들의 이야기 그리고 본인이 이민자라면 이민자 자체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이민자들의 경험이 담겨 있지만 아주 보편적인 가족의 정서를 담고 있어 널리 공감될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미나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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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나이트」 이 영상을 보고나면 이해가 될 겁니다 (*결말포함/영화리뷰)
? '그린나이트' 영화리뷰/결말포함 해석영상(*스포일러) 가웨인 기사, 녹색기사, 아서왕 전설
- 그린나이트 영화정보 장르: 드라마, 판타지, 호러
각본, 감독: 데이빗 로워리 원작: 중세 전설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제작: 토비 할브룩스, 제임스 M.존스턴, 데이빗 로워리, 팀 헤딩턴, 테레사 스틸 페이지, 애런 길버트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외
촬영: 앤드류 드로즈 팰러모
음악: 대니얼 하트
편집: 데이빗 로워리
제작사: 레이 라인 엔터테인먼트, 브론 스튜디오, 세일러 베어
수입사: 대한민국 찬란
배급사: 미국 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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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틀 오퍼레이션] 끝장리뷰 | 영국을 향한 상남자의 과격한 애정표현 | 코트 의미 | 가장무도회, 프랑켄슈타인, 유대인 해석
(영화 [언젠틀 오퍼레이션](2025)은 씨네랩 측에서 제공한 시사회권으로 감상하였습니다) [언젠틀 오퍼레이션](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두 개의 태도 Chapter 2 가장 무도회, 유대인 00:00 언젠틀 오퍼레이션 01:47 두가지 태도 02:37 코트 의미 04:57 가장무도회 05:50 프랑켄슈타인, 유대인 06:46 별점 및 한 줄 평 07:0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틀오퍼레이션 #언젠틀오퍼레이션리뷰 #언젠틀오퍼레이션영화 #언젠틀오퍼레이션해석 #언젠틀오퍼레이션후기 #영화언젠틀오퍼레이션 #가이리치 #헨리카빌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movie #TheMinistryofUngentlemanlyWarfarereview #GuyRitchie #henrycav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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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녀도> 30초 예고편
영험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이름난 무녀 '모화'
아들 '욱이'를 절에 보내고 아픈 딸 '낭이'를 애지중지 키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10년만에 돌아온 아들 '욱이'와 그가 섬기는 예수님이 '모화' 자신의 삶을 점점 흔들기 시작하는데...
스러지는 모화의 삶, 마지막 굿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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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영화의 거리> 티저 예고편
영화 로케이션 매니저와 감독으로 부산에서 재회한 선화와 도영.
헤어진 연인에서 일로 만난 사이가 된 이들의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은
쎄한 fall in 럽케이션 밀당 로맨스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