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9-07 12:33:49
[JIMFF 데일리] ‘지역 소멸’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듣는 건 너의 책임〉

듣는 건 너의 책임/Listening to Us Is Your Duty
Korea/2024/92min/Documentary
‘한국경쟁 장편’ 섹션
‘듣는 건 너의 책임’.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통영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인디밴드의 이름이다. 멤버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책방 ‘너의책임’에서 따왔다지만 어딘가 ‘뻔뻔해 보이는’ 이름이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뿐이니 듣고 말고는 당신 책임이라는 데서 오는 ‘뻔뻔함’ 말이다. 괜히 호기심이 인다. 그리고 영화는 이 뻔뻔함을 너끈하게 초과해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가 소도시 통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서정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청년‧음악‧영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상승 욕망만이 들끓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다른 삶의 양태와 목소리가 구체화된다.
90분짜리 통영 올 로케 뮤직비디오의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통영 풍경과 밴드의 노래가 이어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청량하고 따스하다. 그러나 동시에 첨예하다. 영화 말미, 밴드 공연장에 참석한 청년 관객은 말한다. “이렇게 많은 통영 사람들이 있다니!” 이 말은 각자의 이유로 통영에 살아가는 청년들의 네트워크가 취약함을 대변한다. 이들은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왜 이미 곁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지역 청년과 일상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걸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역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횡행하고,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 수도권으로 몰린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필요한 분석이고, 일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종 함부로 유통되는 이런 말들은 지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축시켜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옆의 또 다른 청년에게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지역에서의 삶을 음울하게 되돌아보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밴드 멤버들은 자신에게 통영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준다. 통영은 누군가에게는 아이를 키우기에 완벽한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잠깐 쉬러 들렀다가 정주하게 된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계의 근간을 이루는 일터이다. 당연하게도, 멤버들의 사연은 고유의 결을 가지며 때로는 접속하고 때로는 독립적이다. 우리가 ‘지역 소멸’을 말할 때 놓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지역 소멸’이라는 말은 이미 홀로 또는 함께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다. 그래서일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의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은은한 감동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이유는. 아마추어 인디밴드가 결성되고, 노래를 만들고, 공연하는 과정을 정감 있게 담아낸 영화의 여정은 지역 청년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삭제된’ 목소리를 되찾는 분투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통영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항상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멤버들의 통영 서사에는 늘 서울과 대도시가 등장한다. 통영 생활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마찬가지다. 이는 지역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수도권 대도시에서의 삶을 경유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주변’과 ‘중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지역에서의 삶이 독립적으로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고 ‘중심’을 통과한 이후에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관계를 인지한 후 솟아나오는 지역의 역설적 자기 인정은 기존 위계를 질문하는 자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기존 담론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자본주의 경쟁 문화가 포섭하지 못하는 ‘재미’를 추구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은 프로/아마추어, 중심/주변의 경계를 오가며 자기들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감동적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음악의 힘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밴드 멤버들이 청년이고, 밴드가 활동하는 곳이 소도시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감동을 더 넓은 고민으로 확장시킨다. 유쾌한 도전을 ‘분투’로도 해석할 여지가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 ‘다양함’의 범주와 경계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듣는 건 너의 책임〉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지역 소멸’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자. 연결된 사람들이 무언가를 즐겁게 해나가는 모습에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빚어낼 ‘오래된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6일(금)/19:00~20:32/세명대 태양아트홀
-9월 9일(월)/16:00~17:32/세명대 태양아트홀
-jimff.org/w4_c/8
Relative contents
-
- ‘클수록 좋다’의 늪에 빠진 24년만의 속편
시대는 바뀌었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콜로세움에서는 차세대 검투사가 등장, 보다 크고, 강하며 잔인한 적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24년 만에 귀환한 <글래디에디터 2>는 웅장하고, 퇴폐미 가득하며,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공허하다. 마치 극 중 배경인 칼리굴라 시대의 로마처럼 풍요 속 빈곤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24년이 지나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막시무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전설이 된 지 20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로마는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라는 또 다른 폭군이 등장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을 이끄는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 장군은 왕들의 명을 받들어 전쟁을 계속한다. 그가 이끈 군대에 대패 후 노예로 전락한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권력욕에 사무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의 눈에 띄어 검투사의 길을 걷는다. 자신과 악연이 된 아카시우스의 목에 칼을 겨누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콜로세움에 입성, 쌍둥이 형제가 연 경기에 참여한다.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친 그는 출생의 과거와 자신이 진자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결전의 날을 맞이한다.
속편의 속성이 있다. 1편의 성공 사례를 밑바탕으로, 전편보다 크게 만들면 된다는 논리.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특히 긴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속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글래디에이터 2>의 가장 아쉬운 지점은 ‘클수록 좋다’는 속편 논리에 너무 기댄 점이다. 1편의 대대적인 성공을 앞세워, 제작한 속편은 더 많은 인물, 더 커진 액션 시퀀스를 내세운다. 폭군은 전편보다 배가 되었고, 여기에 진짜 빌런인 마크리누스가 추가된다. 더불어 해상 전투를 시작으로 콜로세움 내에서 벌이는 해전 등 기존 1편의 액션보다 다르고, 더 커진 장면을 깔아놓는다.
이런 외형 구조를 키워 놓은 것만큼 새로운 인물과 서사가 함께 잘 따라가느냐가 중요한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인물이 너무 납작하다. 입체감이 너무 떨어진 나머지 특색이 없어 관객이 그들의 감정을 비집고 들어가 틈이 없다.
극 중 막시무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루시우스의 매력은 극을 이끌고 갈 카리스마도, 큰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도 부족하다. 폴 메스칼의 연기 때문은 아니다. 막시무스의 그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캐릭터가 짊어져야 하는 분노가 너무 많다.
막시무스의 경우, 가족을 죽인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를 향한 응어리진 분노를 갖고 끝까지 달렸다면, 루시우스는 아내를 죽인 원수인 아카시우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엄마 루실라(코니 닐슨), 그리고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마크리누스 등 분노의 대상이 너무 많다.
이 모든 분노를 동력 삼아 달려가기엔 루시우스가 너무 벅차보인다. 과거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 한순간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할 인생의 굴곡, 울분 등도 플래시백으로 보이지만, 관객이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엔 너무 제한적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막시무스가 열어놓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 나가기 위해 등장한 인물로만 보인다. 그나마 입체적으로 보이는 건 마크리누스다. 그는 악마적인 책략가로서의 이중성,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야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사가 나오면서 그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된다.
이렇다 보니 어느새 영화의 주인공은 막시무스가 된다. 극 중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전설이 된 그의 이름, 콜로세움 지하에 놓인 그의 물건들이 나올 때 마치 막시무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영화는 막시무스의 자장 안에 머문다. 최고의 검투사이자 영웅의 유산을 적절히 활용하고, 이를 도약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야 하지만, 정작 영화는 머무는 길을 택한다. 1편과의 유사성은 둘째 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 시간이 갈수록 흥미는 떨어진다. 이럴 거면 막시무스가 환생해 나오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럼에도 리들리 스콧 감독이 펼치는 웅장한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간신히 끌어올린다. 전편과 다른 해상 전쟁, 유혈 낭자한 콜로세움 결투, 로마 시대를 구현한 미술 등 볼거리는 충족시킨다. 마치 이런 영화는 큰 스크린에서 봐야한다는 감독의 말을 전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1편보다 강렬함을 덜하지만 그럼에도 볼거리는 충족한다.
전편을 넘는 속편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게 리들리 스콧 감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4년 만에 돌아온 검투사 이야기가 반갑기는 하지만, 그냥 전설은 전설로 남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냥 보리밭을 손으로 느끼며 걸어간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가 그립기만 하다.
덧붙이는말: IMAX 시사회로 관람했는데, 비율 자체가 IMAX 화면에 꽉 차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돌비시네마 또는 스크린X로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한줄평: 막시무스가 보고 싶다!
-
- 영랑호에는 바닷물고기도 민물고기도 산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이탈리아의 <퍼펙트 스트레인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을 보지는 않았는데 전 세계 18개 나라에서 리메이크되었다고 하니 훌륭한 작품일 것이다. 넷플릭스에서는 프랑스 버전의 <위험한 만찬>이 제공되고 있다.
<완벽한 타인>은 저녁을 먹는 동안 핸드폰의 모든 전화와 문자를 공개하는 게임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묘한 감정싸움과 드러나는 갈등이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외국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라서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이서진 배우님의 살짝 어색한 연기 빼고는 다 괜찮았다. 아마 이서진 배우님의 바른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인공들의 고향은 강원도 속초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관계성과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네 명의 친구는 석호인 '영랑호'에 모여서 월식을 기다리며 투닥거린다. 싸우는 이유는 영랑호가 바다인지 아닌지이다. 바닷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바다라고 하는 친구와 민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민물 호수라고 하는 친구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극장인 것을 잊고 '얘들아, 너희 둘 다 맞아'라고 말할 뻔했다.
두 친구의 이야기가 둘 다 맞은 이유는 석호의 특징 때문이다. 석호는 중·고등학교 과학 수업이나 지리 수업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단어이다. 원래 바다였다가 모래 퇴적층인 사주가 물길을 막아서 호수가 된 형태를 말한다. 바다와의 길이 완전히 단절되는 곳도 있고, 바다와 호수가 연결된 곳도 있다. 처음에는 원래 바다였던 곳이라서 염분이 높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물인 하천의 물이 유입되면서 점점 옅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바다와의 격리가 모래로 된 것뿐이라서 지하를 통해 해수가 섞여 들어오기도 해서 흔히 이야기하는 담수 호수보다는 염분이 높다.
영랑호는 바다와 호수가 연결된 케이스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호수를 기수호라고 한다. 이런 기수호는 담수호와 비교하면 플랑크톤이 풍부한 편이다. 민물고기와 바다물고기가 모두 사는 것도 당연하고 다양한 생물이 살기 때문에 생태적으로 가치가 아주 높은 곳이기도 하다.
석호는 오랜 시간을 걸쳐서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에 영랑호의 나이는 많을 수밖에 없다. 8,000년 전에 생성되었고, 이름은 신라의 화랑이었던 영랑이 발견하면서 붙여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속초에는 대표적으로 청초호와 영랑호 두 곳의 석호가 있는데 청초호는 항구개발과 매립으로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영랑호는 호수 원형을 잘 유지해 오고 있다. 물론 100년 전보다 호수 면적이 조금 줄고 주변 습지와 연못이 모두 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영랑호에도 시련은 있었다. 1980년대에 주변으로 유원지가 개발되었고 양어장, 낚시터, 주거지, 리조트의 오·폐수가 영랑호로 유입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기도 했다. 수질이 악화되니 악취도 심해졌고 벌레도 많아지게 되었다. 결국, 1996년에는 깔따구 퇴치작업도 진행되었다. 2010년을 전후해서는 물고기의 떼죽음과 녹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계속 있다 보니 영랑호에는 1993년부터 2015년까지 준설, 호안 정비, 오·폐수 차집관로 매설 등의 사업에 총 430억 원이라는 막대한 사업비를 들였다. 지금 영랑호의 수질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속초시도 같은 생각인지 수질보호를 위해 낚시금지구역으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곧 뒤통수를 치고야 만다.
영랑호에는 원앙, 수리부엉이, 수달, 가시고기 등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생물을 비롯한 다양한 종의 어류와 조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다양한 먹이가 있으니 다양한 동물들도 찾아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날아와서 탐조하시는 분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곳이기도 하고, 2013년 1월에는 국내 미기록종이 발견되기도 했다.
과거에 주변지와 내수면개발을 진행되면서 수질이 악화된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수질보호를 위해 낚시금지구역으로 지정하는 등의 노력도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가 개발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야금야금 영랑호에 카누 선착장을 만들었고, 호수 안에 모터보트를 허가해줘서 운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만큼만 해도 과잉 개발처럼 보이지만 생태가 좋은 곳이다 보니 영랑호와 그 주변은 끊임없이 관광개발이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왜 좋은 자연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속초시는 '영랑호 생태탐방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업은 호수 안쪽의 수면과 물가에 인공구조물을 대규모로 설치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호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부교다. 수많은 사업이 있었지만 이런 사업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부교는 물에 띄워놓는 형식의 다리다. 호수의 수면을 개발하게 되면 석호의 자연생태계에 큰 피해가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수질 악화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동안 인간의 간섭이 없었던 지역까지 간섭이 들어가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동·식물들에게도 부교의 설치는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영랑호가 수면을 개발하게 되면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근 지역의 다른 석호들도 개발하려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성의 송지호와 화진포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비슷한 조건의 자연이 개발되면 ‘유사 사례’로 언급하기 일쑤고, 선례로 악용하여 떼쓰곤 한다. “왜 저기는 되고 우리는 안된단 말입니까”가 먹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신청이 가능해지자 전국의 40여 곳이 넘는 곳에서 케이블카를 신청한 것과 같은 현상과 같다.
주민들과의 갈등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이미 영랑호는 과잉개발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구조물(데크 등)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서 도보로 인한 보행과 자전거 이용한 산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고, 약 1시간 20분 정도면 영랑호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업의 진행은 경제적인 효과 역시 담보하고 있지 않다. 속초시가 현재(라고 쓰고 뒤늦게) '관광수요 추정'에 대한 용역을 발주했지만 이미 개발 계획을 진행하는 중에 맡긴 것이니 신뢰하기는 어렵고, 심지어 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쓴 예산이 코로나를 핑계로 집행했다는 것에도 신뢰가 무너졌다.
속초시에서 크게 놓치고 있는 것은 관광객들의 마음이다. 관광객이나 주민들은 영랑호에 '인공구조물'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러 오는 것임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속초는 1년 방문객이 2천만 명 정도라고 한다. 중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전 국민의 2/3 정도가 방문하는 것이고 이는 곧 오버투어리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관광객의 수를 늘리려는 개발을 진행하는 것은 관광산업에 대한 왜곡까지 불러올 수 있다. 특히 머무르지 않는 관광, 쉽고 빠른 둘러보기가 가능한 관광으로 획일화되면 오히려 고유의 생태적 매력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영랑호를 지키기 위해 '영랑호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속초시가 시민들이 반대하면 사업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하고선 사람들이 모이자 시민들의 모임을 환경단체라고 명명하고 '원래 그런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다. 이 모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1인 시위도 하고 있고, 몸자보를 하고 걷기도 하고 있고, 반대 서명도 받는다. 속초시 인구의 3% 이상의 서명을 받았지만 역시 묵살되고 있다. 속초시는 지자체에 우호적인 단체들에게 부탁해서 찬성하는 현수막을 대대적으로 걸었다는 의심도 받았다. 의심은 현실인지 불법 현수막에 대해 신고했지만 걷어가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영랑호를 지키고 싶은 마음일 뿐인데 쉽지 않다.
영랑호에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바닷물고기와 민물고기들은 서로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갈등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울려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제 석호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름답고 희귀한 석호를, 기수호를 이런 식으로 잃는다면 어른들은 영랑호가 바다인지 민물 호수인지 다투는 아이들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 많은 것들을 빼앗으며 살아왔는데 아이들의 호기심과 궁금증마저 빼앗아서는 안 된다.
감독님이 이런 영랑호의 모습을 영화의 전반적인 모습으로 담고 싶으셨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와 조금은 같은 마음일 것이었을 것이라 기대하고 상상해 본다.
-
- 압도적인 긴장감의 서부극!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작은 긴장감이 늘 자리한다. 혼자 있는 시간만 있다면 그런 긴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그리고 직장 동료와 보내는 시간 등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이라는 그림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의 시간 속에는 크고 작은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긴장이 작으면 보통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불편함이 커지면 큰 긴장이 따라오고 평상심을 잃게 만든다. 우리가 평소에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긴장은 시종일관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삶에 영향을 준다.
다른 어떤 관계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긴장감이 일상에 배어들어있다. 부모와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아이가 자라나는데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가족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각 가족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긴장의 정도도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관계의 모습과 미래도 다르다. 그 긴장을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이고, 그것일 시답잖은 것으로 느끼면 무시하고 외면할 것이다. 각자가 느끼는 긴장감에 따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나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각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일상 속에 스며든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다. 1925년 미국 몬태나를 배경으로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고 있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비치)와 조지 버뱅크(제시 플레먼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영화 초반에 필과 조지가 일 때문에 로즈가 운영하는 숙박 업소에 방문하게 되면서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대할 때 만들어지는 그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시선을 잡아놓는다.
이들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다, 필은 호탕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다. 반면 그의 동생 조지는 좀 더 섬세하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인물로 필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는 로즈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을 받는 로즈는 남편을 잃은 이후 아들과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숙박업과 식당을 운영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아들인 피터는 조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손으로 하는 세심한 작업들을 잘한다.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감성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이 네 인물이 만나게 되고, 그중에서 조지와 로즈는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데 어찌 보면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가족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가 좀 더 집중하는 건 각 인물들의 감정과 표정이다. 비록 로즈에게는 재혼이긴 하지만 조지의 관심을 받은 그는 결국 조지를 선택하면서 그의 가족 일원이 되는 선택을 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고 안정적인 일이 있었던 조지를 택한 로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조지의 형인 필의 시선은 무척 좋지 않다.
로즈와 피터가 필과 조지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간단히 보여주던 영화는 피터를 대학에 보낸다는 설정으로 잠시 이야기에서 제외시킨다. 그 이후 집중하는 건 조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로즈의 감정이다. 비록 시부모님이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조지의 형인 필은 남성주의적인 성향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리에 들어온 여성인 로즈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 그는 로즈를 무시하고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조지는 로즈가 부담스럽지 않게 최대한 애쓰지만 로즈는 말이 없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그는 술에 의지해서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로즈가 술에 의지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면 속 로즈의 얼굴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런 로즈의 심리를 무척 세세하고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의 서부극
사실 이 독특한 서부극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상하기는 무척 힘들다. 초반 조지와 로즈에게 집중했던 영화는 로즈와 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가 다시 피터와 필의 관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서부극이었다면 분명히 총을 이용한 격투가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등장했을 테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비슷한 장면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을 무척 잘 활용하고 있다.
영화 속 로즈의 아들인 피터는 영화 중반 이후에 학교의 방학기간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필은 피터의 여리여리한 모습과 취미를 조롱하고 무시했던 인물이다. 그렇게 시작된 피터에 대한 조롱은 로즈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구도는 영화 후반부에는 완전히 깨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피터의 모습을 보던 필은 어느 순간 그에게 따뜻한 말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조금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른 남자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피터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필과 피터가 먼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개 모습의 그림자를 같이 봤을 때 무언가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 중반부까지가 로즈와 필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후반부는 필과 피터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감정이 될 수도 있고, 두 사람 간에 남아있는 앙금과 적대적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어떤 인물에 감정을 대입하는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과 피터가 다시 만난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것은 적대적인 긴장이지만 둘 사이에 어떤 사건 이후로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바뀌는 긴장으로 변경된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필로 인해 발생한 관계의 긴장에서 로즈는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술에 의지한 방식인데 그것에 의존하면서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소심하게 필의 심기를 건드린다. 즉 그가 가진 힘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방식이 조금은 무력해 보이는 방식인 것이다. 반면 피터는 필에게 느껴지는 친숙감을 이용해 둘 간의 신뢰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에게 만들어진 동질감은 피터가 필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게 되는데 두 사람 각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각자가 서로 적대감을 갖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도의 심리전이 바탕에 깔려있다.
조화로운 세 가지 : 훌륭한 연출, 좋은 영화음악 그리고 뛰어난 연기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절대 마음을 놓고 볼 수 없는 서부극이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굉장히 효과적이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는 그룹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여러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작곡을 하기도 했다. <펜텀 스레드>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 음악에 참여했는데 음악으로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심리를 음악을 통해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영화 음악 역시 각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음악을 통해 극대화시켰다.
영화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은 영화 <피아노>로 20대 미혼모의 이야기와 그의 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을 했었다. 이후 <여인의 초상>과 같은 영화를 연출했었는데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어서 연출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번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여성을 비롯해 남성의 심리를 꿰뚫는 연출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필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 비치의 연기가 훌륭하고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의지한 채 망가져가는 로즈 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도 무척 실감 난다. 또한 인물의 실제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인 피터를 연기한 코디 스밋 맥피의 연기도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연출,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무척 독특하고 몰입감 있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의 제목인 <파워 오브 도그>는 성경의 구절인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라는 말에서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영화 속 필과 피터가 함께 보는 산등성이의 개의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던 해석은 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파워 오브 도그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makOjhOAwds
-
- [SIWFF 데일리] 투명한 수채화처럼, 다시 시작
SYNOPSIS
비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의 시로 남성 지배적인 독일 문학계를 사로잡는다. 경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바흐만은 유명한 극작가 막스 프리슈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으나 일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끝없이 부딪힌다. 지친 바흐만은 친구들과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자기 자신, 무엇보다 자신의 시를 되찾기 위해.
PROGRAM NOTE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실제로 스위스 극작가였던 막스 프리슈와 연인관계였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고, 이후 바흐만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의 영화감독이자 극작가였던 아돌프 오펠을 만나게 된다. 오펠은 그녀에게 이집트 사막으로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는데, 이 여행으로 바흐만은 여성이자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여행의 경험은 그녀의 이후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영화는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자서전 중 한 부분일 수 있는 일련의 이야기를 비 연대기적으로 교차, 나열한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세 개의 몸을 만난다. 하나는 무한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바흐만의 몸, 또 하나는 그 몸이 발산하는 생동감을 질투하면서 그 몸을 지배하려는 막스 프리슈의 무겁고 자기중심적인, 고집스러운 몸이다. 마지막 하나는 무거운 몸에 짓눌려 극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몸에게 손을 내밀어 비로소 모든 억압의 경계를 벗어나 넓은 세상을 향해 확장될 수 있게 안내하는 아돌프 오펠의 몸이다. 서로 다른 세 몸이 엮어내는 관계의 직조를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이경미]
서른 살을 목전에 두었던 어느 날, <삼십세>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른을 맞는 새해에 읽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샀다. 대다수의 책이 그렇듯 아직도 펼쳐지지 못한 채…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다. 사실 서른을 언제 넘긴 거지 당황하며 어느 날 펴서 몇 장 넘겼고, 읽은 내용 대비 많은 밑줄을 쳤던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언젠가 제대로 다시 읽을 책으로 보아두고 넘어갔다. 마흔 되기 전에만 읽으면 되겠지 뭐.
그리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그 작가의 이름을 본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게다가 로자 룩셈부르크, 한나 아렌트 등 저명한 여성 인사들의 얼굴을 영화로 새로이 그려내는 데 정통한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이다. 심지어 그 얼굴을 비키 크립스가 분하고 있다. <팬텀 스레드>나 <코르사주> 등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배우가, 이미 문단의 화려한 이름이 되어 있는 시절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을 연기한다. 궁금했던 얼굴을.
영화는 사건의 발생 순서에 따라 선형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관계를 쌓아가는 과거 시간의 한 축과, 그와 헤어지고 아돌프 오펠이라는 인물을 만나 사막 여행을 떠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미래 시간의 한 축을 얼기설기 엮었다. 두 개의 관계, 두 개의 시간 축에서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상대와 어떤 식으로 사랑의 관계를 쌓아 가는지, 어떤 태도와 어떤 표정을 짓는지가 대조되어 보일 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러니까 전혀 다른 두 개의 시간 축 내내, 심지어 글이 써지지 않거나 시를 쓰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때조차도, 그는 시인이고 작가이고 예술가이다. 비키 크립스는 잉게보르크가 시인임을 매 순간 표정에서 눈빛에서 뿜어내듯 연기했다. 그러니 누구를 사랑하든, 어디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잉게보르크는 잉게보르크라는 예술가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실존했던 한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멜로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예술하는 여성의 풍성한 이야기로도 기능하게 된다.
사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요즘 <문명특급>에서 재재가 펼치는 연애상담에 사연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무엇이든 물어보살>에라도… 내보내고 싶어진다. 아님 진짜 하다 못해 귀에 대고 뉴진스 노래 ETA라도 좀 틀어주시겠어요? 아무튼 뜯어말리고 싶어진다. 걔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수상한 밑밥을 까는 발언을 많이 했다고. 아니 남자는 여자를 잘 몰라서 여자의 자기 표현이 중요하다는 인간이, 정작 잉게보르크가 자기를 표현하는 중요한 질문에는 대답도 안 했잖아. 일단 모든 말의 주어가 남자는~ 여자는~ 이런 식의 일반화인 사람은 믿으면 안돼! 게다가 처음부터 너를 ‘독일의 스타’로만 보고 있으면서 왜 취리히로 널 부르는 거야? 너 진짜 취리히에, 그 사람 집에 갈 거야?
잉게보르크가 막스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다면 그런 막스와 순탄한 사랑을 했을 것이다. 끼리끼리 잘 만나셨네요 소리나 들었겠지. 그러나 잉게보르크는 세계에 표표히 서 있는 존재다. 나치가 오용했던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자기 책임을 지는 몽상가를 그려냈다. 빌런도 없고 정해진 운명 같은 것도 없는 주인공. 취약한 세계에 홀로 있는. 거기에는 잉게보르크 본인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사실 잉게보르크와 같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자신이 취약한 세계에 발 디딘 존재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
실존 인물 막스 프리슈와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 막스는 잉게보르크와 만나 두 사람의 새로운 세상을 꾸리는 게 아니라, 자기 세상 안에 잉게보르크를 넣어두고 싶어한다. 잉게보르크의 말마따나 일하는 여성, 생각하는 여성, 자주적인 여성에게는 최악의 형태다. 막스가 일하는 시간을 비롯 자기 루틴을 명확하게 지킨답시고 커피 잔 하나를 들고 타자기 앞에 덜렁 앉을 때, 잉게보르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고, 타자기 소리에 괴로워한다. 불만을 제기하면 아이처럼 어르고 달래는 말이 돌아온다.
이따금 자신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주변을 불행하게 만든다. 잉게보르크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위험은 감수하겠다고 말하면서, 잉게보르크는 자신 옆에서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막스의 기묘한 자기 확신처럼. 사막에 데려다 주겠다던 남자는 아름다운 자기 나라를 못 떠나겠다고 하고, 잉게보르크의 일적인 대화나 과거의 인연 하나하나에도 벌컥 화를 내며 식사 준비나 제대로 하라고 한다. 그 지점에서 이 사랑은 분명 잉게보르크를 파괴하는 방향이었다고 본다. 결국 잉게보르크가 막스의 일기장인 푸른 노트를 펴보는 순간, 꼭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푸른 노트가 푸른 수염은 아니었던가.
반면 아돌프는 들어주는 사람이다. 잉게보르크가 미라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며 모래밭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하는 비합리적 요구까지 순순히 응하고 듣는다. 잉게보르크가 밤 산책을 거절하면 그냥 조용히 물러난다. 자신이 아니면 잉게보르크의 꽃병이 채워지지 않길 바랐던 막스와 달리, 그는 잉게보르크를 그대로 둔다. 잉게보르크의 방식으로 해방을 맞는 순간에도 조용히 옆에서 웃고 있고, 자유롭게 걸어가는 잉게보르크를 뒤에서 지켜보다가 그가 관심을 보인 직물을 구입할 뿐이다. 선물하는 장면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다음 장면에 잉게보르크가 머리에 두르고 있다. 이 작고 사소한, 그래서 좋은 사랑.
통제와 소유, 안정적이라는 환상의 텁텁함. 막스 프리슈의 육중한 몸과 그의 집에 가득한 색채는 꼭 유화 물감 같다. 덧발라 완성할수록 무언가가 가려진다. 반대로 아돌프 오펠의 말과 행동들은 잉게보르크 주변에 투명한 수채화로 그린 배경이 된다. 사막을 바라보는 잉게보르크의 얼굴이 그래서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잘 안 맞는 사람이랑 헤어졌고 새로운 사람 만난 여자 이야기’ 정도로만 요약할 수 없다. 막스와의 끝, 아돌프와의 시작…이라기엔 너무나, 제목처럼, 잉게보르크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건 잉게보르크의 끝, 잉게보르크의 시작이다. 사랑은 물론 삶의 커다란 일부이고, 아돌프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잘 맞지 않았던 막스와의 사랑 또한 잉게보르크에게는 큰 부분이었다. 헤어지고 오래 아팠을 만큼. 그러나 그 내내, 잉게보르크는 예술가였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투명하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인간인 동시에, 준엄하게 말을 골라내고 언어의 심지를 돋우는 시인이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커다란 것을 떠나보낸 후에 한 번쯤 꺼내 보면 좋을 영화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을 계속해 가는 게 인생이니까. 동시에 내가 사랑하고, 내게 커다란 의미를 가진 것들이 떠나간 후에도 내게 존재하는 것, 내가 차마 손 닿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질문하게 된다. 잉게보르크의 시와 같은 것, 그것만 있다면 많은 끝이 찾아와도 또 다시 무수한 시작점을 이어 붙여가며 어찌저찌 인생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완만한 선형으로. 그 옆에 수채화 물감으로 투명하고 곱게 배경을 칠해주는 사랑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2023.08.26. 15:30-17:2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상영코드 220)
2023.08.29. 14:00-15:5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7관 (상영코드 507)
-
-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답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만나기 전까지 이 예술가에 대해 전혀 몰랐다. 첫 사진집 ‘성적 의존의 발라드’는 물론, ‘아트 리뷰 파워 100’ 1위에 선정될 정도로 예술가들의 예술가라는 사실, 더 나아가 사진으로 억만장자 일가에 맞선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 활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일 등 낸 골딘은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든 장본인이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그녀가 이룬 결과물에만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 여느 예술가의 삶이 그렇듯 멋진 결과물 속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녀만의 투쟁 역사가 담겨 있다.
사진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낸 골딘. 그녀는 2017년부터 시위 단체 P.A.I.N.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를 무분별하게 판매해 막대한 이득을 챙긴 제약 회사 퍼듀 파마, 이 회사를 소유한 새클러 가문과 그들의 기부금을 받아 운영해온 전 세계 대형 미술관을 향해 시위를 벌인다. 2017년 말, 오피오이드 중독에 빠졌다가 벗어난 낸 골딘은 자신과 동일한 위기에 처했던 이들과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한 이들의 가족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 다큐는 그녀가 왜 이런 활동을 하는지, 아니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정을 소개한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은 낸 골딘 개인의 투쟁 역사는 물론, 가족 및 사회 시스템에 억눌린 개인의 투쟁 역사로 말할 수 있다. 이는 다큐의 구성 측면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총 7개의 챕터로 나눠 낸 골딘의 과거사와 현재 시위 활동을 병치한다.
<시티즌 포>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은 먼저 챕터별로 그의 언니 바버라 홀러 골딘의 죽음, 위태로웠던 그녀의 유년시절, 1970년대 초 예술가 친구들과 이룬 공동체 삶, 언더그라운드 문화, 첫 번째 사진집인 ‘성적 의존의 발라드’ 이야기, 이후 성공과 나락에 빠진 삶의 굴곡 등을 다룬다. 그녀가 갖고 있거나 직접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 쇼 형식으로 구성, 어느 덧 노년의 시기에 접어든 낸 골딘의 내레이션으로 각 사진에 담긴 이야기와 그 안에 숨겨진 개인사를 소개한다.
‘꼬꼬무’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녀의 처절하고도 투쟁적인 개인사는 그 자체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불안한 가정 환경, 여성으로서, 여성 사진 작가로서, 그리고 성적 소수자로서 겪는 사회적 편견은 그녀를 매번 시험에 들게 하는데, 오히려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도 작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진 작가로서 가감 없이 성적소수자 공동체, 에로티시즘, 에이즈, 약물 중독 등 그 누구도 담지 않은 당시 사회의 민낯을 찍은 작품은 기록물로서 예술로서 그 가치를 입증한다.
이처럼 각 챕터별 소개되는 그녀의 개인사는 현 시점에서 벌이는 그녀의 저항 운동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처방을 받았을 뿐인데, 약물에 중독된 낸 골딘은 또 한 번 개인으로서 사회적 불합리함에 희생양이 된 것. 자신이 처한 삶을 오롯이 카메라에 담으며 투쟁을 벌인 그녀에게 이 사건은 개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또 한 번 저항 운동의 중심에 서게 한다. 그리고 가열차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퍼듀 파마와 새클러 가문에 반기를 들고 투쟁을 이어가는 그녀는 대형 미술관들의 새클러 가문 기부금 거부 선언을 이끌고, 새클러 가문이 피해자들을 향해 진정한 용서를 하게 만든다.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삶의 기억을 견디는 것은 어렵다. 이야기와 달리 삶의 경험은 악취가 있고 추잡하며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시작을 알리는 낸 골딘의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나 다름없다. 이 작품이 극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기억을 담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온전히 실천하고 싶은 그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용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낸과 같은 사람은 결코 만난 적이 없다”는 로라 포이트라스 감독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새클러 가문을 향한 시위 운동에서 그리고 이 모든 걸 담은 다큐를 통해 실행으로 옮겼다. 마치 이야기를 직조하는 게 아닌 있는 시궁창 같은 삶이라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것처럼 그녀는 용기있게 피하지 않고, 또 한 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제79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이 영화가 지닌 의미는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끼’ 또는 ‘한 개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진솔한 답을 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뒷걸음치지 않고, 세상이 보낸 수많은 공격을 온 몸을 다 받아내면서 끝내 자신만의 셔터를 누르는 그녀의 강단과 집념.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 개인의 힘이 무력화되는 현 시점에서 예술가가 지녀야 하는 마음과 용기, 그리고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가진 의미는 더 크게 다가온다. 노년의 예술가이자 운동가인 큰 누님의 가르침을 받아 저마다 개개인의 투쟁을 시작해보자. 그것도 아름답게!
사진제공: 찬란 제공
평점: 4.0 /5.0
한줄평: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답변
*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겉으로 봐선 몰라요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욕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속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욕망에 휘둘린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든지 말이다.
영화 <욕창>은 퇴직 공무원 창식, 뇌졸증으로 쓰러진 아내 길순, 그리고 입주 간병인 수옥의 평범한 하루를 보여 준다. 창식은 매일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운동을 하고 길순은 침대에 누워 수옥의 수발을 받는다. 수옥은 불법체류자라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지만 월 200만 원을 받으며 창식의 식사와 말동무, 그리고 길순을 간병한다. 이러한 평범한 일상 속, 어느 날, 길순의 등에 욕창이 생긴다. 창식은 이 사실을 딸 지수에게 알린다. 그 날 이후, 창식을 포함한 가족들의 욕망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욕창은 겉에서 봐서는 몰라요. 속이 얼마나 깊은지 문제거든요.”
욕창은 한 자세로 오래도록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 신체의 부위에 지속적으로 압력이 가해져 그 부분의 피하조직 손상(궤양)이 유발된 상태를 말한다. 길순의 몸에 생긴 욕창처럼 가족들 간의 불화는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겉으로 봐선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창식의 가족은 겉으로 봤을 때 평범한 가정이다. 첫째 아들은 과일과게를 하고, 둘 째 아들은 미국에 가있다. 그리고 막내 딸은 목공일을 하며 각 자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병든 어머니가 있지만 최선을 다해 돌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들의 불화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가부장제, 고령화, 노인복지, 입주 간병인 등 더 이상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드러난다.
가부장제
창식은 가부장제의 표본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한다. 밥은 삼시세끼 매일 챙겨 먹어야 하며, 밥, 국, 반찬은 세가지 이상이 꼭 식탁위에 차려져 있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옥이 잠시 전화를 받기 위해 국을 뜨다 말고 방으로 들어간다. 전화를 받고 돌아와 국을 창식에게 가져다 주는데 창식은 그런 수옥에게 윽박지른다. 수옥은 죄송하다고 말하며 방에 들어간 사이 국을 퍼서 드실 줄 알았다며 다시금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창식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결국 수옥의 뺨을 때리게 되고 수옥은 일을 그만두게 된다. 창식의 이러한 모습은 남자는 부엌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식은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는 병든 아내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더이상 느끼지 못한다. 그와 반면 수옥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자신에게 살랑거린다. 그런 수옥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창식은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결국 수옥의 비자 문제로 위장 결혼을 해야되서 일을 정말로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자 자신과 결혼을 하자며 통보한다. 자식들과 모인 자리에서 수옥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는 창식의 표정은 굳건하다. 그러한 창식의 모습에서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라. 그러나 나는 너희들 말을 듣진 않을 것이다.’라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창식은 자식을 가르치는 데에도 편애가 심했다. 첫째 아들 문수는 공부를 못해서 대학도 보내지 않고 유학도 보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내놓은 자식처럼 대했다. 그 반면에 둘째 아들에게는 모든 것을 퍼다 주었다. 대학도 보내주고 미국으로 유학도 보내주었다. 한국에 돌아와 벤처 기업을 만든다고 모든 돈을 날려도 다시 미국으로 보내줄 정도로 둘째 아들에게 모든 것을 퍼다 준 것이다. 그렇기에 문수는 가족의 일에 무관한 사람처럼 굴며 관여하지 않았다. 막내딸 지수는 다른 자식들과 달리 창식과 길순을 보살피고 집 안 관리를 하지만 창식은 딸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가부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돌봄 노동
영화 <욕창>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돌봄 노동의 실체를 보여 준다. 돌봄 노동은 혼자서 생활 및 생계를 가꿀 수 없는 노인, 아동, 환자 등을 돌보는 일이다. 이는 여성이 도맡는 가사노동도 돌봄 노동에 포함된다. 이러한 가사 노동은 무급이거나 무급이 아니더라도 적은 돈을 받으며 행해진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수옥은 입주 간병인으로서 창식의 삼시 세끼를 챙기며 온갖 잡일을 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한다고 해도 월 200을 받으며 그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반찬을 만드는데 주 3만 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되며, 창식에게 말을 해도 창식은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냐며 윽박지를 뿐이다. 창식과 수옥의 위장 결혼 문제로 인해 딸 지수는 수옥에게 소리 지르며 말한다. “돈 받고 하시는 일이잖아요!” 그렇다. 아무리 수옥이 길순을 진정으로 보살피고 창식의 안녕(安寧)을 바랬어도 그녀는 그저 돈 받고 일하는 노동자일 뿐이며, 그 누구도 수옥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 돌봄은 85% 이상이 여성이 전담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여성 평등과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라는 구분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곳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정말 돌봄이 필요한 곳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고령화
한국은 고령화 사회이다. 이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노인 요양, 독거노인 등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복지 문제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지만 젊은 사람들에겐 크게 와 닿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딸 지수 또한 자신의 가족 문제와 일 때문에 어머니의 병간호를 수옥에게 일임한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활을 생각하기엔 자신 또한 딸의 반항과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머니, 아버지의 부양 문제는 최대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었다. 수옥이 일을 잠시 그만뒀을 때 그만한 돈을 주고 일할 간병인이 없다면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고 아버지는 실버타운에 보내겠다고 말한다.
길순은 이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몸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일 뿐 살아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길순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그녀는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그저 병든 노인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길순의 모습이 미래의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고령화 시대에 살아가며 좀 더 노인 복지와 노인 요양 문제에 대해 한 번쯤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를 부양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노인을 부양하는 일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신의 선에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도 언젠간 늙어 노인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령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불법체류자
수옥은 조선족 불법체류자이다. 그러므로 수옥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을 해도 불만을 느끼거나 따지지 않는다. 그저 숙식할 수 있다는 것과 매달 60만 원씩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한다.
매년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난다. 이들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들보다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이 다치고 위험에 노출되어도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국가에 걸리는 순간 바로 귀환 조치 된다. 그들은 ‘가성비’ 좋은 노동자일 뿐이다.
수옥은 억척스러워도 최선을 다해 창식과 길순을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수옥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일을 대충 한다고 느껴졌지만, 이것은 창식의 시선에서 본 수옥의 모습일 뿐, 그녀는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불법 체류자로 신고받아 경찰에게 끌려가는 뒷모습 뿐이다.
불법체류자가 본국으로 귀환 조치 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이용해 불법체류자들에게 과한 노동과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욕창
욕창은 가족들의 곪은 문제들을 보여주는 메타포이다.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 그 속에 곪은 문제들은 자신도 모르게 차곡차곡 깊이 쌓이게 된다. 그렇기에 욕망에 쉽게 좌지우지되고 농락당한다. 영화에 등장인물 중 절대 악은 없다. 그렇다고 절대 선하지도 않다. 그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나와 각자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것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현실은 가까이 있고 깊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삶은 정말 다양한 관계로 얽혀있으며 각종 사회 문제 그리고 골치아픈 일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애써 그 문제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떠 넘기기도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겉으로 봐선 아무것도 모른다.
-
- 007 노 타임 투 다이 '본드걸'에 대한 모든 것
007 노 타임 투 다이 - 새로운 본드걸
배우 '아나 데 아르마스' 완벽신상정리#007노타임투다이 #007본드걸 #007여배우
-
- 원작소설과 비교분석하는 영화 '그것2' 리뷰
스티븐 킹의 동명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비교
그리고 소설에서 빠진 설정과
이에 따른 영화 "그것:두 번째 이야기"의 개연성 논란#그것2리뷰 #그것2 #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예고편
-
- 영화 <프리 가이> 스페셜 예고편
“내 안의 히어로가 깨어난다!”
평범한 직장, 절친 그리고 한 잔의 커피.
평화로운 일상 속 때론 총격전과 날강도가 나타나는
버라이어티한 ‘프리 시티’에 살고 있는 ‘가이’.
그에겐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기 전까지는…
갖은 노력 끝에 다시 만난 그녀는
‘가이’가 비디오 게임 ‘프리 시티’에 사는 배경 캐릭터이고,
이 세상은 곧 파괴될 거라 경고한다.
혼란에 빠진 ‘가이’
그러나 그는 ‘프리 시티’의 파괴를 막기 위해
더 이상 배경 캐릭터가 아닌,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시원하게 터지는 상상초월 엔터테이닝 액션 블록버스터!
인생의 판을 바꿀 짜릿한 반란이 시작된다!
-
- 영화 <언차티드> 1차 예고편
네이선(톰 홀랜드)'과 '설리(마크 윌버그)'가 함께 트레저헌터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미스터리와 보물을 찾아나서는 액션 어드벤처 블록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