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4-09-05 11:01:54
리얼리티 가족 다큐멘터리
9/11 개봉영화 <장손>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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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성 발언.
나는 여자다. 그리고 김씨다. 조부는 종가집 장손이었다. 무려 4대 독자! 그리고 대망의, 내 본적은 경상북도다. 나는 순혈이다. 지독한 가부장제의 순수혈통. 종친회에서 고칠 데를 손 봤다는 올칼라 족보를 만들었고, 여전히 나는 남동생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가족 소개 같은 숙제를 하면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무슨 김씨 무슨 파 무슨 왕의 몇대손이며 우리 할아버지는 몇대 독자고 어쩌고 저쩌고. 어릴 때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더랬다. 그리고 좀 커서는 족보를 샀겠거니 생각했다.
커서 보니 쓸 만한 유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나와 내 동생과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등과 비슷한 모습일진대 무슨 놈의 대를 그렇게 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이 족보주의에서, 순수 혈통을 이어가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 유전자를 굳이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가.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뭐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어서 아무도 병원에 안 오고, 내 이름이 뒤에 아들 낳는 이름으로 지어질 뻔하고, 족보에도 올려주지 않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슨 왕정 제도를 미시체계에서 이룩한다는 게 좀 우스우니까. 장남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훗날 왕위를 물려주는 것마냥 일개 가정에서 신수왕권설 같은 걸 주장하는 게 이상하니까.
자,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까닭은 영화 <장손>이 픽션이기 때문이다. 픽션인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 픽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장손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도 핍진하여 두 시간 동안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차남의 장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그 이야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건
족보와 장손밖에 없다. 장손을 제외한 나머지는 흩어져야 산다. 영화는 가정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층위의 갈등을 두 시간 동안 보여주는데, 그 갈등이 비단 가정 내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프랙탈은 일부를 확대해 보면 전체와 동일한 모양이 반복되는 구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산 김씨'네 가정은 대한민국의 프랙탈이다. 영화는 가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나 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서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선산 김씨'네가 유난스럽지도, 특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몇 개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켜켜이 쌓인다. 그 갈등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제법 클리셰적인 갈등이다.
자기네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김씨 아닌 사람들만 모여 앉아 전을 부치고, 김씨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화투 치고 맥주를 마신다거나, 장손이 올 때까지는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거나.
6.25 전쟁 때 빨갱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하는 노인과 노인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은 손자, 사업으로 부자가 된 자식과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자식. 애초에 돈 되는 공장은 아들 주고, 낡은 집은 딸을 준 유산 분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세대갈등과 남녀갈등이 총체적으로 한 가정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두부 공장'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두부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음식 아닌가.
두부를 잘 뭉치려면 쌩노가다를 해야 한다. 원래는 가정 내에서 만들었다(아는 척하는 이유는 내 외조모가 두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산 김씨네 두부공장 역시 처음에는 가정 내에서 조모인 오말녀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말녀는 며느리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두부가 못마땅하다.
두부 공장 씬에서 장남인 태근이 일하는 모습은 스케치로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일하는 사람은 손녀사위다. 그런데 사장은 당연히 태근이다.
간단히 설명된다. 이 가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이다. 다시 프랙탈. 유사 이래로 놀고 먹은 여자는 소수다. 장손이라 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한 것만 같지만, 사실상 장손 혼자서 가정을 부양하고, 조상들을 제사지내주지 않는다.
조모는 장손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조부는 규범과 같은 상징체계에만 관심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사람은 조모다. 장손이 올 때만 에어컨을 켜 주고, 장손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신화처럼 반복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감시하는 여자. 장손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여자. 장손이라는 고귀한 존재를 만들어 희생을 합리화하는 여자. 어쩌면 장손은 고된 여자들이 만든 신화다.
그러니 사실 여자들이 뭉치지 않고 흩어지는 순간, 장손? 그게 뭔데.

가족의 미래
영화의 초반부에 제사 준비를 하면서 오말녀는 딸에게 '상조보험'에 가입하라고 재촉한다. 보살이 집안에 초상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 하나 죽긴 죽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누가 죽을까. 가족의 미래를 점쳐보자.
1. 김승필(장손의 조부)의 사망: 매우 자연스럽다. 나이도 많고, 대장암 수술을 해서 건강도 좋지 못하다. 제사를 꼭 자정에 맞추어 지내야 한다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다. 입만 열면 빨갱이 타령. 김승필이 사망한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주도권이 김태근에게 넘어갈 것.
2. 김태근(장손의 부)의 사망: 장손의 모가 농담으로 하는 말. 하도 미워서 잘 때 한 대 때렸다. 죽지도 않고 왜 깼냐. 뭐, 슬프지만 장손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두부 공장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할 것. 공장은 서울에서 연기하는 장손에게 갈 것이냐, 공장에서 일하는 손녀사위에게 갈 것이냐.
3. 김성진(장손)의 사망: 큰일난다. 이 가족 망한다.
4. 오말녀(장손의 조모)의 사망: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실질적 가장. 오말녀는 현재 매우 건강하고 꼬장꼬장한 노인이다. 한글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오말녀가 죽는다면 장손 판타지로 이어온 가정은 붕괴된다. 오말녀만큼 장손을 우쭈쭈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5. 그 외 여자들의 사망: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큰 사건이라 함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장례식은 별 탈 없이 잔잔하게 살던 가족에게 던져진 돌멩이가 아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는 겉잡을 수 없는 와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장례식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

<장손>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과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이나 출연진, 줄거리,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갔다. 두 시간 동안 경북에 본적을 둔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 솜씨에 무슨 상을 받아도 받았겠거니 예상만 했다.
이 영화에 다양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탁월한 이미지를 꼽고 싶다. 오래된 한옥에 사는 노인들의 출입을 쉽게 하려고 문간에 걸어둔 동앗줄 같은 디테일.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줄조차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인데, 장손 성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고, 성진을 배웅한 노인은 눈 쌓인 비탈길을 아주 오래 걷는다. 롱테이크로 잡아낸 그 장면은 마치 서편제 같다. 뭐 대단한 걸 하고 돌아서는 장면 같다는 뜻이다.
택시를 탄 성진의 얼굴에 아침해가 날카롭게 비친다. 성진은 눈을 찡그린다. 빛을 보는 대신 눈을 가려 버린다. 그런 디테일에서, 이 가부장제라는 망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장손 성진의 손에서는 결코 낡은 시대가 종언되고 새로운 체제가 구축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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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픽션,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고통, 또 누군가에게는 피해망상,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관습'.
<장손>은 픽션이 아니다. 리얼 다큐멘터리다. 추석 직전에 개봉하는 만큼, 가족과 함께 보면... 과연 괜찮을까?
장손(House of the Seasons, 2024)
감독: 오정민
출연: 강승호, 손숙, 우상전 외
러닝타임: 121분
개봉: 2024. 09. 11.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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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작년에 돌아가신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과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루스의 삶을 보면서, 역사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 역사의 진보를 이뤄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즉, '루스'는 특정한 개인이면서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인물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 '루스'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멋진 드라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초기 공동체 - 모계사회 - 를 제외하고 줄곧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였다. 즉,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은 여성은 착취하고 억압하고 학대했다. 남성이 권력을 갖게 된 시기를 마르크스는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이건 인류가 채집경제를 벗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를 말하며, 농경, 정착, 집단화의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이며, 이는 공동체 시기에 모든 구성원이 채집 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집단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다른 구성원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잉여생산물을 취득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었고, 그는 신과 대화하는 무당이기도 했다. 그 우두머리가 꼭 남성은 아니었다.
잉여생산물의 집적, 농업에서 남성노동력의 우월성, 여성의 생리, 임신, 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 기간, 여성의 생리와 임신, 출산이 갖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신비로움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존재했던 다부모, 다자식 형태에서 일부일처 또는 일부다처제로 나아가는 원인 역시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독차지하고, 여성을 사회적 존재에서 대상화, 소외시키면서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한 사회적 계약이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건 모든 인종, 모든 지역, 모든 사회에서 공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잉여생산물을 독점하려는 남성 집단의 담합과 여성을 소유하려는 남성 집단의 연대가 암묵적 또는 공공연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뿌리내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는 방식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던 초기에 남성(집단)은 물리적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금기(터부)를 만든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집단에서 배재하는 방식으로 시작한 금기는 점차 다양하고 세분화하면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규정해 나간다.
집단(사회)의 규정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재편되고, 여성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며, 모든 기득권, 권력의 독점, 경제적 이익을 남성이 차지하도록 구조를 만들어 가고, 공고히 한다. 이런 지배 규칙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회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사회경제 제도,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에서 주류는 남성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가부장제를 핵심으로 한다.
'여성과 계급'의 문제는 어느 시대든 가장 급진적이며 본질의 문제였다. 둘 사이에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고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여부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 문제는 늘 계급 문제에 가리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계급 해방은 극소수 착취 계급을 무너뜨리며 착취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여성 해방은 인류 보편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이며 여성 해방은 자연스럽게 계급 구조도 해체할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경제적 착취 구조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형태를 달리하며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 등으로 옮겨갔지만, 여성의 차별, 착취는 계급 발생과 함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제되는 사회는 멸망했으며, 자본주의 체제 역시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화된 사회구조여서 계급 갈등과 함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두 개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도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공산주의 이론에서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을 동시에 주장하며, 이때 인간해방은 양성평등을 기본 전제한다. 또한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해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즉, 공산주의는 계급의 철폐와 함께 인간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체제다. 지금까지 몇 나라에서 실험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류의 미래가 지금과 같은 소수 착취자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폐기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그것이 꼭 '공산주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 같은 착취 구조는 점차 평등을 향해 나가고 있음을 역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할 때마다 가부장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시도를 방해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남성과 여성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어리석은 남성 대중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여성에 의해 침범당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들에게는 남성우월주의가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숨 쉴 권리를 찾으려 하는 당연한 행동을 남성 일반은 자신(남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체제에 안주한 기득권자인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지금의 사회구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단지 '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기득권에 소속되며, 특혜를 누린다. 반면 여성은 똑같은 능력을 가졌거나 더 나은 능력이 있어도 남성보다 적은 보상,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며, 사회 변화의 주체다. 그럼에도 여성은 여성만으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한다. 계급 투쟁이 여성운동보다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 나는 물론 둘 다 근본적이라고 본다 -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은 계급투쟁과 동행하거나 포용해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에서 여성운동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동시적이며 본질적인 과제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백인 부르주아 여성'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에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과 노동계급해방을 동시적 과제로 선정했다. 노동계급은 8시간 노동, 주5일 노동, 생리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기업에서 성차별 철폐, 가사노동의 사회적 보상 등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성차별 금지, 여성노동의 착취 금지, 여성의 사회적 노동의 인정 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이것도 현대 자본주의 초기부터 노동계급이 피흘리며 싸워온 결과였다.
루스 긴즈버그의 삶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에 크게 기여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과 의지가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루스 긴즈버그가 체제-미국 자본주의-내에서 가능한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노력을 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제의 변혁을 통해 인간해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하다 참혹하게 살해 당한 경우다. 사회주의 변혁운동에서도 여성은 비주류였으며, 중요한 결정에서 소외되거나, 더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지도부에서 배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여성운동은 체제에 매수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남성기득권에 투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여성(과 여성운동)은 본질에서 진보적이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남성 기득권에 기생 또는 공생 관계로 만족한다. 이들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인식하며, 남성 권력이 던져준 부스러기 권력에 만족한다.
여기에 극히 일부 여성(운동)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무차별 공격한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남성기득권 구조가 비난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남성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건 19세기 아나키스트의 테러를 떠올린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을 살해하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만, 체제와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남성 일반은 여성(운동)의 동지이자 지지자이자 동지이며,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은 여성이 남성을 공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남성 일반을 견인해야 하며, 각성한 남성과 함께 힘을 모아 사회를 변화시켜야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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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러운 두 배우와 동력을 잃은 리메이크
내 맘은 이게 아닌데
위이잉. 회로가 굴러가고 있다. 어떤 회로? 행복회로와 연애회로. 95학번 한국대 기계공학과 복학생 김용은 현재 행복회로를 굴리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수업 들으러 가는 용. 친구 놈이 말을 건다. "야. 너 그거 들었냐? 우리 과에 똑똑한 여자 애 들어온다는 거." 사실 학과에 신입생으로 여학생이 들어온다는 것은 '내일 일어나서 밥을 먹는다'에 준하는 흔한 이야기다. 아니 들어 올 수도 있지. 그런데 이 여학생이 다른 사람이 아닌 '서한솔'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수한 외모. 그렇게 꾸미지 않았는 데도 한솔이의 미모는 저 멀리 있는 용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혼란스러운 세기말 1999년. 많은 것들이 바뀌기 바로 직전이었다. 두근 반 세근 반 용이의 계절도 봄으로 바뀌기 직전이다. 그렇게 설레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신나는 대학 생활. 어느 날 용은 은성이가 갖고 있는 'HAM 무전기'를 발견한다. 야. 은성아. 나 이거 써봐도 돼? 뭐라도 있으면 좋잖아? 한솔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전기를 빌리는 용. 용은 그 무전기에서 의외의 상대와 대화한다.
내 맘은 이게 아닌데. 무늬에게 사랑은 너무 어렵다. 무늬의 오랜 '남사친' 영지. 무늬는 영지를 사랑하고 있다. 21학번 대학생인 무늬. 무늬에겐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과 수다 떨 때는 떡볶이를 먹으며 노닥거리고, 인스타그램을 끄적이며 일상을 공유한다. 별 다를 바 없는 무늬의 20대. 그러나 무늬의 짝사랑 영지는 뭔가 다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대학을 다니지 않았던 영지. 어느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면서 보내고 있다. 난이도가 올라가는 무늬의 사랑. 영지가 다른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무늬에겐 용기가 없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영지. 불안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교양 과제를 위해 누군가를 인터뷰해야 하는 무늬. 집에 고물처럼 박혀있는 'HAM 무전기'의 수화기를 켠다. "씨큐. 씨큐. 혹시 들리시나요?" "네 들립니다. 제 이름은 김용이라고 합니다."
비주얼 합격
시놉시스를 4초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용과 무늬다. 용은 여진구 배우가, 무늬는 조이현 배우가 맡았다. 드라마를 잘 안 보는 나. 여진구 배우의 대표작 하면 <화이>가 생각난다. 그래서 이 배우가 이렇게 좋은 배우였나? 싶었다. 일단 이 극에서 용(이)의 서사가 제일 중요하다. 전반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찌질하면서도 풋풋한 양면성을 띄는 톤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작위적인 무언가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여진구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연기에는 굴곡이 있어야 한다. 사랑에 빠졌기에 달달하고 멋있는 듬직한 모습과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는 궁색맞음이 한 사람의 톤 안에 있어야 극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여진구 배우는 이를 이해한 듯 풍부한 감정연기를 선보인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이현 배우의 화보집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말하는 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진구 배우의 팬이라면 베테랑이 된 이 배우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이에 힘입은 배인혁, 김혜윤 배우도 그 시절 티가 나는 파릇파릇한 대학생을 잘 소화했다. 특히 김혜윤 배우는 96년생으로 한국 나이 27세다. 건국대학교를 다녔다고 검색하니 나온다. 아마 이때 15학번 신입생으로 들어온 많은 남학생들의 마음을 실제로 훔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대학생 연기가 아니라 진짜 대학생 같았다.
현대 시점으로 와서, 무늬 역을 맡은 조이현 배우는 극에서 가장 빛난다. 아마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뭐냐?라고 글쓴이에게 묻는다면 조이현 배우의 모든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나머지는 하이라이트 신에 삽입된 명곡이라고 답하고 싶다) 조이현 배우가 그렇게 장신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큰 화면으로 보면 조이현 배우의 비율이 더 뛰어나게 느껴진다. 또 조이현 배우가 무쌍 미녀의 대표 격 아닌가? 귀여운 외모와 더 귀여운 목소리 톤으로 사랑스러운 현대 시점의 이야기를 이 배우의 매력으로 끌고 간다. 연기도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역할로 잘 골랐다. 소심할 땐 소심하지만 인물이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씩씩한 내면을 잘 보여줬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볼 수 있던 남라 캐릭터의 강점을 어느 정도는 옮겨 온 듯하다. 후술하겠지만 영화에서 무늬의 감정선이 거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 무늬에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조이현 배우의 비주얼과 연기력 덕이다. 또 멜로드라마의 구성에서 과거 시점이 현재 시점보다 훨-씬 존재감이 세다. 대신 반대 측면에서 현재 시점이 영화가 정말 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도 중요할 때 감정에 힘을 빡 주는 연기로 영화를 소화한다. 이 무늬를 지원 사격하는 영지 캐릭터, 그러니까 나인우 배우의 비주얼도 좋았다. 아니 대학생활하다 보면 꼭 저런 형이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았다. 그 모습을 꼼꼼하게 묘사한 성실함이 돋보였다.
좀 갑작스럽네
그렇게 두 주인공의 비주얼을 예쁘게 뽑았다. 이런 로맨틱 코미디 장르나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런 게 필수 아닌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일단 영화는 과거 시점과 현대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설정은 이 두 시점에서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22년 전 과거의 대상과 무전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과거 시점이나 현재 시점이나 이 판타지적인 소재를 받아들이는 데 심리적인 장벽이 있어야 몰입이 쉬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를 묘사하다가 말았다. 서로 '당신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냐?'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서로를 이해한다. 여기서 몰입이 어그러진다. 그럼 영화의 핵심으로 닿는 부분까지 감정 이입이 안된다는 단점이 있다.
또 이는 무늬라는 인물의 캐릭터성과도 이어진다. 무늬는 관찰자이면서도 능동적인 입장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관찰자로서는 용의 사랑을 모니터링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아끼지 않는다. 이 관찰자의 관점에서 푸는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 문단에서 언급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용(이)에게 쏟는 감정선이 관객이 생각하는 것보다 깊게 느껴진다. 또 현재의 무늬가 갖고 있는 문제는 영지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할 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이 이유가 단순히 용의 첫사랑에 같이 몰입해서 마음이 깊어졌다기엔 내면 묘사가 너무 안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이야기 비중을 좀 줄여서 무늬의 사랑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든다. 또 무늬가 HAM 무전기로 대화하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교양과목 발표다. 이 교양과목 발표가 너무 흐지부지 마무리된다. 영화를 보는 분들 중에 분명 대학생 신분이 있을 것이다. 보다 보면 친구들은 발표를 잘하는데 무늬만 굉장히 평면적으로 발표한다. 이는 '우리 모두 다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낭만'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것으로 보인다.
소소하지 않아
22년을 돌아온 리메이크다. 올해 후속작이 참 많았다. 그중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탑건 : 메버릭>이다. 36년 전의 1편은 미국의 군인들에게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2년의 이 <탑건 : 메버릭은>은 아날로그가 왜 사라져선 안 되는지에 대해 소리 한 방 크게 지르는 영화가 됐다. 이를 반영하는 호쾌한 액션으로 톰 크루즈의 대표작이 되었다. 36년이 걸린 이 영화. 두 영화는 차이점을 보여주며 왜 리메이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 <동감>은 22년을 걸린 리메이크의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구체적으로 굳이 영화의 시점을 2022년과 1999년으로 설정한 이유를 찾기도 어렵다. 뭐라고 적을 것도 없이 현대 젊은이들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없다. 또 과거라는 설정이 영화에서 엄청 중요했나? 그것도 아니다. 용과 한솔의 사랑이야기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시대상과 관련이 없다. 이런 소재와 메시지가 따로 노는 현상은 자잘 자잘한 것에서 더 신경 쓰인다. 가령 무늬가 2022년 봄에 아이폰 13을 쓰는 것이나 3월에 패딩을 안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다. 섬세한 힘이 부족해 고증에 실수가 있는 것이다. 또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거북이와 달이 있다. 이 두 소재를 통해 연출가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개기월식이라는 소재는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또 거북이라는 소재는 영화에서 연결고리를 위해 기능적으로 툭 던진 느낌이 강하다. 굳이 마음의 이동을 표현하기 위해서 거북이가 있어야 하나? 아니라고 본다. 또 수위 아저씨가 극후반부에 어떤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조이현, 여진구 두 배우의 극후반부 퍼포먼스로 아련한 느낌을 잘 살렸다. 그런데 나레이션에 이것까지 더해지니 계속 들었던 말을 두,세번 반복하는 느낌이 강하다.
사랑스럽기만 한
영화는 사랑스럽다. 조이현, 여진구 두 사람의 캐릭터성이 통통 튀기 때문에? 맞다. 나인우, 배인혁의 훈훈한 비주얼? 김혜윤의 미모? 맞다. 영화는 이 배우들의 매력을 중심으로 사랑스러운 느낌을 잘 풍긴다. 그러나 첫사랑의 달달함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짝사랑과 첫사랑에 대해 다룬 영화라면 뭐랄까 나 혼자서 품고 있는 짝사랑의 상대에게 메시지라도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무언가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았다. 그냥 조이현 배우 같은 여사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 정도였다. 이는 절대 관객들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닐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가 사랑스럽긴 한데 굳이 이걸 봐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영화 볼 거면 <건축학개론>을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더 사려 깊은 연출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아. 이 영화와 협업한 츄, 미노이의 리메이크 곡을 지금 글 쓰면서 듣고 있다. 이 <고백>과 <습관>이 아주 잘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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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 영화 그 자체인 영화
줄거리
서울의 한 모텔, DMZ 바이러스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백신 개발에 성공한 정병호 박사와 그의 딸이 납치되었다고 보도하는 뉴스 화면 아래 한 남자가 누워있다. 남자는 뒤통수에 새겨진 십자 흉터를 만지려다가 들이닥친 사람들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정병호 박사는 어디 있어?"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사람들, 그리고 의문의 전화와 폭발. 그는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이끌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데... 인간 백신인 정하나 양을 구출해 북으로 데려가라,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임무!
감상 포인트
1. 초반부 볼 때는 밥 먹지 마세요.(feat. 엉덩이의 습격)
2. 잔인함 매우 많음 주의.
3. 영화의 90%가 액션인 찐 액션뿐인 액션 영화.
감상평
예전부터 주원 배우가 작품 보는 안목이 있다는 말은 유명했다. 소속사가 할 일을 배우가 대신한다고, 제발 소속사가 작품 고르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도 돌 정도였으니. 이 작품은 주원이 순전히 '궁금해서' 고른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원테이크로 어떻게 찍을지 궁금해서.
원래 나는 액션 잘 안 보는데, 지금 하도 난리이기도 하고 주원 배우가 나의 X-최애였어서 궁금해서 봤다. 작품성까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화제성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작품을 고른 것 같다.
액션 자체는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쩔긴 쩔었다. 하지만 너무 억지스러운 장면도 많았다. 사람들 말마따나 '물리법칙 모조리 무시한 액션 영화'라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특히 고공 액션 신에서는 CG가 너무 티 났다. 막눈인 내가 보일 정도의 CG는... (절레절레) 심지어 나는 영화를 1.5배속으로 봤단 말이다. 그런데도 티가 났다면 단순히 편집만을 욕할 게 아니라, 감독의 액션 욕심이 과해서 일어난 참사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액션을 좋아하거나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기에는 좀 어렵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리고 처음엔 좀비 영화를 표방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다. 처음에 바이러스를 보면서 '어? 이거 좀비물이었어?'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절대 좀비물을 기대하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좀비도 아니다. 이게 감독의 욕심이 과했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하다. 원테이크 액션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과하게 쏟아부었다는 느낌.
*지금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음, 일단 내용이 없다. 영화의 대부분이 카터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느라 전개될 내용이 없는 것이다. 안에 숨겨진 다른 이야기가 분명 있기는 한데, 그걸 전부 다루기에는 너무 촉박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데, 영화가 친절히 알려주기보다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주워들은 내용으로 유추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이게 정치적 상황을 다루고 싶은 건가 싶었다. DMZ에서 창궐한 바이러스라고 하면 당연 한국과 북한이 모두 연관이 있을 거고, 처음에 등장한 CIA와 야쿠자들까지. 한국, 북한, 미국, 일본이 몽땅 등장하니까 종이의 집처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북쪽도 미국 쪽도 아닌 나라면 국제적인 분쟁으로 번질 문제도 없고."
카터가 이 말을 하고 나서야 '아, 지금 이거 한 발 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카터는 한국인인데, 미국 CIA 소속이었다가, 성형하고 북한에 잠입했다가 아내를 만나 귀화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이 무슨... 중립 아닌 중립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그냥 액션만 하고 싶다는 감독의 마음을 저 대사에서 겨우 읽었다.
"악쓰고 기억 찾은 게 정말 네 기억인 줄 아니?"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액션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본부 말까지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했던 카터가, 정하나를 구하면서 까마귀 고기를 먹은 건지 의심 없이 북한행 비행기를 탄다고? 캐릭터에 대한 의문이 심하게 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뭐가 됐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 악을 쓸 것 같은데...
충격적인 것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스토리 전개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쫓아오는 북한군 다 죽이고 중국 가는 기차에 올라탔는데, 그 기찻길이 폭발하면서 끝난다. 카터가 사실 카터가 아니라는 것이 숨겨진 비밀인 것 같은데, 떡밥만 던지고 회수를 안 하는 걸 봐선 시즌 2가 확정인 듯싶다.
1편을 본 사람이라면 궁금해서라도 2편을 볼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기대감이 많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액션이 화려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편집점이 너무 잘 보여서 매끄럽지 못한 원테이크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나 같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보면 티 안 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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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하는 일
영화는 해가 뜨기 전 이미 활기차게 깨어있는 뭄바이의 모습을 배경으로, 도시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성이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음성은 뭄바이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도시민으로서 겪는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뭄바이는 인구수가 약 2300만에 달하는 인도 최대의 도시로, “가족 중 한 사람은 뭄바이로 향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인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자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나은 삶을 모색하고자 정착한 이 도시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으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오프닝 시퀀스 끝에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운행하는 출근 열차에 몸을 실은 영화의 주인공 ‘프라바’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흐르고 약동하는 도시 속 홀로 한곳을 응시하는 사람이다.뭄바이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프라바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로 떠나버린 후 몇 년째 연락도 닿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한다. 그런 프라바에게 어느 날 독일에서 온 발신자 불명의 소포가 도착한다. 어떤 이름이나 안부도 없이 독일제 밥솥만이 덩그러니 담긴 상자를 마주한 그는 자연히 남편을 떠올린다. 도시의 불빛이 늦은 시간까지 어둠을 밝히는 불면의 밤. 프라바는 얼굴도 모르는 채 결혼한 낯선 남편을 생각하며 밥솥을 끌어안지만, 그럼에도 외로움이 마음 한 켠을 파고드는 이상한 감각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한 편 프라바와 같은 병원에서 함께 간호사로 일하면서 방을 같이 쓰고 있는 룸메이트 ‘아누’는 남몰래 연애에 몰두하고 있다. 카스트제와 종교 등의 정치적 문제가 일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도에서 아누의 연애에는 주변인들의 날 선 시선이 늘 뒤따른다. 힌두교도인 그녀는 이슬람교도인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표현하는 데 주저가 없다. 병원에서의 권태로운 일상이 지나면 아누와 그의 남자친구 ‘시아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밤거리를 헤맨다.
병원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이 두 사람과 우정을 쌓고 있는 '파르바티’는 지금껏 수십 년간 살아온 집이 재개발 구역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거주지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프라바와 파르바티가 도움을 청하고자 찾은 변호사는 그가 그곳에 오랬 동안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며 떠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녀가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그 땅, 그녀의 노동으로 일군 그 공간에는 곧 신축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머물렀다 떠나가는 복잡한 대도시에서 개인들의 존재는 미세해진다. 누구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곳, 내가 여기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남기기 어려운 도시 뭄바이. 거대한 도시의 익명성 뒤에 지워진 개개인의 삶은 지극히 외롭고 쓸쓸하다.
영화 속 세 사람은 그런 도시의 외로움을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이겨내고자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그 누구의 상실이라도 서로가 기억하면서.
이들은 이를 수 없는 사랑에 얽매여 있고, 또 자신이 살아갈 안식처를 마련하고 싶어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런 작은 소망마저 이루기 어렵다. 결국 도시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파르바티를 도와 프라바와 아누는 인도 남서부 라트나기리 지역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로 향한다.
공간이 변화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장으로 접어든다. 몬순 기후의 습기 어린 푸른 공기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뻗은 빌딩, 사람들의 소란으로 채워졌던 대도시 뭄바이를 떠나 당도한 작은 시골 마을은 광대한 바다와 숲, 건조한 모래와 파도 소리가 있는 곳이다. 다큐멘터리적 연출로 시작해 지극히 현실적인 도시의 삶을 담아냈던 영화는 이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시간을 훔치는 도시 뭄바이’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낮보다는 밤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시골 마을에서의 오후는 아주 느리게, 때로는 영원에 가깝다고 느껴질 만큼 느리게 흘러간다. 이렇듯 문명을 떠나 비문명과 가까운, 즉 자연이 펼쳐진 공간으로 이동한 파르바티와 아누는 바쁘고 소란스러웠던 도시에서의 모습보다 한결 편안해 보인다. 파르바티는 전에 없이 춤을 추며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이고, 아누는 몰래 데려온 남자친구와 보다 과감하게 사랑을 속삭인다.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그늘 없이 내리쬐는 눈부신 햇빛 아래 그들은 자유를 찾은 듯하다.
그러나 오직 프라바만이 여전히 멈춰 서 있다. 먼 곳에서 아직 그녀를 얽매고 있는 남편이라는 존재의 속박 때문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해변을 거닐던 프라바는 우연히 파도에 떠내려 온 남자를 발견한다. 거의 죽음 직전에 있던 그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 프라바는 곧 그 낯선 이에게서 자신의 남편을 본다. 수없이 많은 밤 그려보았던 남편의 형상은 프라바에게 그녀가 꿈꾸었던 말을 건네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줄곧 원해왔던 것이 남편의 귀환이나 그의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것을 결심한 프라바는 그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남편의 “함께 떠나자”는 말에 완강히 거절을 표한다.
“이러지 마요. 다신 보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요.”
이는 아마 그녀 식의 작별인사였을 것이다. 지금껏 그녀를 얽매고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남편의 유령으로부터 그렇게 프라바는 벗어난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연출과 음악, 세련된 편집 역시 훌륭한 영화지만 결말부의 작은 마법은 그 어떤 것보다도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아름다운 결말에서 어두운 객석에 앉은 관객의 마음에는 따스한 빛이 찾아든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이 안 돼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는 계속해서 빛을 활용한 아름다운 연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빛은 광원光源의 빛이 아니다. 카메라가 계속해서 포착하고 있는 빛은 스크린에 영사되는 희미한 빛과 같은 것, 그러니까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같은 빛이다.
어두운 방을 희미하게 밝히는 그 빛은 어둠 속에서 상상한 빛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상이 비록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괜찮다. 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 희미한 한줄기 빛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의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계속 빛을 상상해야 한다. 어둠에 너무 익숙해져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도록, 무정한 도시의 흐름에 쓸려 나가지 않도록.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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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My Salinger Year, 2020
드라마 / 12세 이상 관람가 / 101분
감독: 필립 팔라르도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꿈은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있다. 현실이 꿈보다 매번 먼저 우릴 찾아와 문제지.
슬프지만, 현실은 늘 꿈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다. 그래서 우린 매 순간 현실과 꿈 사이에 표류하면서 안전지대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현실도, 꿈도 모두 포함된 이상적인 공간. 그 공간을 단 한 뼘이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만큼 꿈은 우리에게 절실하며 애틋하다. 꿈꾸던 시절이 곧 '나'의 찬란한 인생의 한 겹이며, 그 투명하고 얇은 겹이 하나둘 겹쳐지면 앞으로의 나를 예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니까. 현실에서 꿈꾸는 일은 언제나 가치 있다.
조안나의 꿈은 뉴욕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아주 즉흥적으로.
남자 친구에게 버클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일방적인 말에서 왜 활기찬 희망이 느껴지는 걸까. 그렇다, 그녀는 작가란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을 선택했다. 싸구려 아파트에 살면서 카페에서 글 쓰는 유명 작가들의 노선을 경험하기 위해, 진정한 작가는 바로 그런 사소하면서도 운치 있는 환경에서 탄생한다는 학습된 환상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라면 갖고 있는, 특별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조안나에겐 그게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란 신분을 숨긴 채 전통 깊은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마가렛의 첫 번째 업무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샐린저에게 온 편지를 빠짐없이 읽고 정해진 형식에 맞춰 답장하는 일. 첫 만남에 딱 잘라 작가 지망생은 비서로 뽑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마가렛의 말에 조안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마가렛의 비서가 냉정하다 못해 서늘한 직업이라 느껴졌지만, '작가의 세계에 다가간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만족했다. 그러니 편지를 읽고 답장하는 일도 자신의 글쓰기에 분명 좋은 영감을 줄 거라 막연하게 여겼던 그녀였다.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편지를 분쇄기에 넣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무시하고 있다는, 나아가 '작가'로서 독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였기 때문이다. 정해진 양식으로 독자에게 답장하는 일은, 독자가 존재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작가로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못 할 짓이었다. 그때부터 조안나는 마가렛이 준 임무를 말도 안 되는'허튼소리'라 명명한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그러나 조안나는 새내기였다. 꿈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을 것을 과감히 선택했으나 사회생활이라 말하는 사회 구조의 한 일원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의 뚜렷한 기준 갖고 마가렛의 비서로 일하는 건 나쁘지 않은 자세였지만, 그녀는 직원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 작가 에이전시에서 독자에게 똑같은 편지 형식을 고수하는지, 왜 소속된 작가의 작품을 '감상'이 아니라 '판매'에 중심을 두는지, 왜 슬러시 파일(개인 출판사가 없이 활동하는 작가들의 원고)을 대부분의 헛소리로 평가하는지... 조안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이고 강압적이며, 열정적인 마음을 식게 하는 부정적 시선만을 눈여겨봤을 뿐이다. 그녀는 작가 에이전시가 지금까지도 그런 메마르고 인정머리 없는 감성을 고수하고 있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직원으로서 말이다.
조안나가 못 박은 허튼소리는 법률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수많은 경험과 데이터가 쌓아 올린 최소한의 울타리이자, 가장 안전한 지침이었다. 답장 하나를 마음껏 할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처지를 '비서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애석하게도 조안나는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비서'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해야 할 일을 잘 해냈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란 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변화시킬 길이 있다면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는 말인데, 다들 알다시피 뭐... 그게 어디 쉽나. 다 실수를 해봐야 아는 거지.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고심하던 조안나는 결국 회사의 타자기를 훔쳐, 허튼소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쓰고 독자에게 정성스럽게 답장한다.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기둥처럼 받쳐주던 관계들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새로 사귄 남자 친구(돈)와의 관계, 냉정한 사장 마가렛과의 관계, 전 남자 친구(칼)와의 관계 마지막으로 내 꿈과 내 현실의 관계까지. 귀중한 관계들이 하나씩 엉키면서,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샐린저의 전화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또 반응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내가 뭘 하려고 했었더라?'
점차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언제부터 제멋대로 선을 넘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감정이 확 솟잖아요!'라 소리치던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답장이 기계적인 편지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 불이 꺼지기 시작한 관계는 다시 보살피고 필요 없는 관계는 단호히 잘라내면서 마침내 "그들의 편지가 저를 바꿨죠."라고 읊조릴 수 있게 된다. 과거의 나를 책임질 줄 아는 '내일의 조안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만의 속도로, 또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매력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출처: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컷 (다음)
자기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즐겁게 춤추고 뛰어다니며, 끝까지 나를 잃지 않는 힘까지 갖게 된 조안나.
이제 그녀는 샐린저의 외투에 몰래 독자들의 편지를 넣어버리는 걸 들켜도 예전처럼 움츠러들지 않게 됐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마가렛에게 진심이 담긴 말을 듣는 사람이 됐다. 그녀는 처음 뉴욕에 눌러앉으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기 싫다 말했었다. 반드시 특별해지고 싶다 했다. 하지만 더는 자신이 평범하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됐으며 이를 불안해하지 않게 됐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한 나를 이끌어낼 방법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든 특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평범하다는 말속에 잠시 나를 위로하고 돌보는 거지.
조안나,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기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지금도 열심히 꿈꾸고 있는 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조안나를 통해, 꿈을 위해 현실을 이용하는 당차고도 용기 있는 자의 현재와 현실과 꿈의 괴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구현해낼 줄 아는 자의 미래를 모두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긴 여운을 남기는 좋은 응원이 될 것이다.
현실이든 영화든 당연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당연하지 않은 게 세상을 움직이는 법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처럼, 조안나처럼, 앞으로의 우리처럼, 그리고 오늘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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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톺아보기] 박형식 배우 출연작 파헤쳐 보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큐레이션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의 톺아보기 주인공은 로코의 달인으로 다채로운 매력과 출중한 연기력을 가졌으며,
오늘이 바로 생일인 배우인데요. 바로 배우 '박형식'입니다!!
그럼, 바로 박형식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러 가볼까요?!
배우 '박형식' 프로필
ⓒ 스타포커스
이름 | 박형식
출생 | 1991년 11월 16일
소속사 | 피앤드스튜디오
데뷔 | 2010년 1월 15일 제국의 아이돌
배우 '박형식' 데뷔 과정
ⓒ 스타포커스
배우 박형식은 중학교 때 CA 활동으로 밴드부 활동을 하게 되었고, 시 대회를 나가서 1등을 하고
상을 받으니 기획사에서 명함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떨어지면 다시 공부하기로 하고 일단 한 번
오디션을 봤고 그때 스타제국과 연이 닿았다고 한다.
배우 '박형식' 활동
ⓒ ELLE
2010년 1월 15일에 9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ZE:A의 멤버로 정식 데뷔 후, 2011년 SBS 설특집
2부작 드라마 <널 기억해>에서 조연으로 배우에 데뷔하였다. 그 후,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배우 '박형식' 대표작
가족끼리 왜 이래 - 차달봉
ⓒ KBS Drama
차씨 집압의 문제 많은 삼 남매 중 철부지 막내 아들
역할인 '차달봉'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상류사회 - 유창수
ⓒ SBS Drama
까칠하지만 순수한 면모가 있는 나쁜 남자인
재벌 3세 백화점 본부장인 '유창수'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힘쎈여자 도봉순 - 안민혁
ⓒ JTBC
박형식 배우는 속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똘끼충만 4차원
게임회사 CEO인 '안민혁'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두개의 빛: 릴루미노 - 서인수
ⓒ 네이버 영화
박형식 배우는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점점 시각을 잃어가는 피아노 조율사 '서인수'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왓챠
슈츠 - 고연우
ⓒ KBS
박형식 배우는 한번만 읽으면 뭐든지 기억하는 천재이자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공감능력을 가진 신입 변호사 '고연우'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왓챠
배심원들 - 권남우
ⓒ 네이버 영화
박형식 배우는 끈질긴 질문과 문제 제기로 재판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8번 배심원 '권남우'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U+ 모바일tv
해피니스 - 정이현
ⓒ Tving
박형식 배우는 정의로운 성격을 가진 인물로
세양경찰서 강력반 형사 '정이현'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사운드트랙#1 - 한선우
ⓒ Disney+
박형식 배우는 말수는 적지만 다정하며 따뜻한 성격을 가진
신예 사진 작가인 '한선우'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디즈니+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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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룸> 재개봉 예고편
램프 하나, 세면대 하나, 침대 하나…
감옥 같은 작은 방에 갇힌 24살 엄마와 5살 아들7년 전, 한 남자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 갇히게 된 열일곱 살 소녀 ‘조이’
세상과 단절된 채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아들 ‘잭’을 낳고 엄마가 된다
감옥 같은 작은 방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엄마와 아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잭은 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잭을
더 이상 좁은 방안에 가둬 둘 수 없다고 생각한 조이는
진짜 세상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들의 극적인 탈출과 충격적인 과거 때문에
세상은 두 사람을 또다시 보이지 않는 방안에 가두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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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네트> 파이널 예고편
“?? ??? ?? ??????” 다양성 영화 예매율 압도적 1위! 아담 드라이버 X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 온몸을 전율시킬 시네마틱 뮤지컬 '아네트'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