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8-31 19:20:03
이런 판타지를 보려고 이런 클리셰를 본다.
영화 <인턴>
이 영화는 클리셰가 참 많고 내용이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 찾아보게 되는 맛이 있다. 노인이라면 대단히 참견이 많을 것이라는 젊은이들의 고정관념도 어른들의 참견만큼이나 큰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벤 휘태커는 은퇴 후 시간이 너무 많아진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래서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능하고 싶어 시니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이에 합격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그의 복장은 지나치게 클래식하지만 내공이 느껴진다. 그의 캐릭터가 호평받은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그는 남에게 참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매너있게 챙겨줄 뿐이다. 하지만 나이어린 상사인 줄스는 그의 호의가 불편한데, 그녀에겐 그의 호의가 그저 꼰대의 참견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나를 돌아본다. 어른들에겐 호의가 나에게 참견으로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뼘 자라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분들의 호의는 오지랖이 아니라 정말 호의였음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내가 과민반응을 했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줄스는 상사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벤을 대하니 벤의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듯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벤이 끝까지 그녀를 존중으로서 대하니 그녀는 오히려 그에게 의지한다. 나는 젠더갈등도 문제지만 세대갈등이 더 와닿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갈등이 만연한 이유는 젊은이의 과도한 편견과 기성세대의 과도한 오지랖이 원인이라고 본다, 한쪽만의 문제라면 오히려 피하거나 문제를 인지시켜 개선시킬수라도 있지만 (개선이 가능하다면 그 상대는 굉장히 착한 편일 것이다) 두쪽다 문제라면 그 관계는 어서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줄스도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는 영리한 여성이고 벤도 자신의 삶의 지혜를 뽐내지 않고 남을 위한 매너로 쓰니 둘 다 선순환의 관계를 유지할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이 곧 유연함이고 그 유연함은 나이와 상관없다.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며 나이를 볼모로 대접만 받으려는 어른도, 그런 어른들은 무조건적 꼰대로 몰며 어른들에게 인격체로서 대접해달라고 요구하는 젊은이들도 유연하지 못한 것이다. 뭐든지 대접을 받겠다고 요구하는 쪽이 유연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벤도, 줄스도 판타지일지 모른다. 이런 관계로 실제로 있으면 좋겠지만 결국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면 이들의 유연함을 롤모델로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조금은 충만하고 윤택하지 않을까. 젊은이는 기성 세대에게서 클래식을 배우고 기성 세대는 젊은이에게 시대의 감각을 배울 수 있는 선순환의 관계가 많아지기를, 나부터 그런 인간이고 싶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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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어> 마이클 조던 영화에 조던이 없어야 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4년, 농구화 시장에서 업계 꼴찌를 전전하는 나이키. 나이키의 농구 선수 스카우트 담당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는 새 농구화 모델을 살펴보던 중 유망주 마이클 조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스타플레이어보다 조던이 더 위대한 선수가 될 거라고 확신한 소니. 그는 CEO '필'(벤 애플랙)에게 가용한 모든 금액을 투입해 조던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소니는 필의 승인을 얻어냈지만, 이미 업계 1, 2위를 다투는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그와의 계약을 노리는 상황. 소니는 상사 및 동료 '하워드'(크리스 터커), '롭'(제이슨 베이트먼), '피터'(매튜 무어)와 머리를 맞대고 조던을 설득할 전략을 짜기 시작한다.
조던 영화에 조던이 없다?
할리우드 대표 절친 스타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이 감독과 주연으로 합을 맞춘 영화 <에어>. 나이키 '에어 조던' 브랜드의 탄생 비화를 그려냈다. 1984년, 나이키는 농구 유망주 마이클 조던을 내세워 새 농구화 에어 조던 마케팅을 펼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이키는 컨버스와 아디다스를 제치고 농구화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한 지금도 에어 조던 시리즈는 계속해서 제작 중이다. 농구 이외의 스포츠 영역에도 진출했다. 2018년부터는 프랑스 축구 클럽 파리 생제르맹 FC 스폰서로 나섰다.
그런데 <에어>는 이상하다. 마이클 조던 영화인데 조던이 없다. 경기 분석 영상만 빼면 그는 항상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는 순간은 없다. 대신 <에어>는 에어 조던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조명한다. 나이키 스카우트 소니는 조던의 잠재력을 가장 정확히 꿰뚫어 봤다. 나이키 창립자 필과 농구 부서 책임자 하워드는 선수 한 명에게 올인하자는 소니의 과격한 마케팅 전략을 승인했다. 소니의 직속 상사 롭과 나이키 신발 디자이너 피터 무어는 빨간색과 흰색을 조합한 혁신적인 첫 조던 에어 신발을 만들었다.
프레젠테이션, 에어(Air)의 진짜 의미
조던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영화 제목에 숨어 있다. 에어(Air)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일단 나이키와 조던이 합작한 브랜드명이다.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는 포스터 문구처럼 농구화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은 작명이다. 나이키 운동화 밑장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는 영화 소재를 직관적으로 연상시킨다.
그런데 에어는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발표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에어>는 발표의 연속이다. 소니는 상사와 CEO를 설득해야 한다. 농구 선수 3명과 계약할 수 있는 돈 25만 달러를 전부 마이클 조던에게 투자하자고. 조던은 그럴 가치가 있는 선수라고. 그의 에어전트,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마이클 조던 본인도 설득해야 한다. 나이키만이 조던의 스타성을 터뜨려 줄 수 있다고. 그러려면 조던에게 투자해야 하는, 또 나이키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한다. 영화가 프레젠테이션의 연속인 이유다.
<에어>, 나이키의 프레젠테이션
영화는 마이클 조던을 위한 발표를 준비 과정으로 가득하다. 전반부가 발표 내용과 주제를 선정하는 작업이라면, 후반부는 발표 방식을 결정하는 단계다. 소니는 여러 계약 후보 중 조던에게 주목한다. 그의 플레이를 반복해 보면서 아직 아무도 깨닫지 못한 조던의 위대한 잠재력을 알아본다. 목표가 정해지자 소니와 나이키는 조던을 설득할 수단을 강구한다. 업계의 관행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에이전트 선에서 제안이 자꾸 끊기자 직접 조던의 집을 찾아가 '들로리스'(비올라 데이비스)를 만난다. NBA가 규정한 농구화 배색 조항도 어긴다. 강렬한 레드로 가득한 농구화를 제작한다.
경쟁사의 약점을 흘려 차별화도 시도한다. 컨버스는 계약을 맺은 스타가 워낙 많아 조던을 전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아디다스는 가족 간의 경영권 분쟁 때문에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반면에 나이키는 조던에게 올인했다며 진심을 전한다.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조던은 단순한 농구 선수 이상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나이키 역시 평범한 스포츠 의류 회사 그 이상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생일 파티나 가족 행사는 언강생심이다. 이틀 안에 조던을 사로잡을 농구화 디자인을 개발해야 하니 밤샘 작업은 기본이다. 하지만 이들의 끈기 덕분에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에는 호소력이 깃든다. 물론 실제 사건과 다른 내용도 적지는 않다. 소니와 동료들에게 주목한 각색 덕분에 실화는 비로소 영화가 된다. <에어>에 설득 대상일 뿐인 조던의 자리가 없는 이유다.
관객을 사로잡는 말의 힘
접근 방식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도 '의견을 말한다'는 제목에 충실하다. 인물의 감정이나 욕망, 조던이라는 슈퍼 스타의 이미지까지 오직 말로써 전한다. <에어>는 대사가 많다. 주로 사무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당연하다. 그런데 과하지 않다. 현란한 티키타카가 유쾌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애런 소킨이 각본을 쓴 <소셜 네트워크>나 <스티브 잡스>를 보는 듯하다. 일례로 소니와 '데이비드 포크'(크리스 메시나)의 통화는 단순한 코미디처럼 들린다. 서로를 비난하고, 놀리고, 자극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비유가 덕분에 말의 재미도 살아있다. 그러나 통화가 이어질수록 이들의 대화는 극의 분기점처럼 들린다. 막다른 벽을 만날 때마다 소니는 포크와의 대화로부터 해결책을 찾아낸다.
독특한 화법도 예상 못한 울림을 선사한다. 극 중 등장인물은 다들 선지자 같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대사를 반복한다. 이는 자칫 터무니없거나 과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언'과 실제 자료 화면이 교차되는 연출이 반복되다 보니 확신에 이들의 만용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나이키와 조던의 미팅 장면이 대표적이다. 나이키가 준비한 영상을 돌발적으로 끊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소니. 그는 조던과 나이키가 쓸 영광과 비극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간중간 삽입된 자료화면 덕분에 그저 앉은 채 말을 이어갈 뿐인데도 상당히 감동적이다.
전반적인 영화 분위기도 수많은 대사에 힘을 더한다. <에어>는 1984년의 분위기를 살려내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그 시절 음악이나 필름 질감 등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중심 세계 질서와 자본주의를 광고한 LA 올림픽처럼 화려했던 미국의 전성기를 보여주려 한다. 베트남 전쟁 패전과 끝나지 않은 냉전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유명한 슈퍼볼 광고를 활용한 오프닝을 통해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를 스크린 위로 불러온다. 덕분에 예언에 가까운 확신에는 설득력이 생긴다.
심심한 점근법과 매력이 부족한 소재
다만 <에어>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접근법이 담백하다. <에어>는 갈등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다. 직원이 고생하는 모습은 있지만, 그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는 장면은 많지 않다. 에어 조던 개발은 큰 난항 없이 신속하게 완료된다. 조던과 나이키의 계약도 생각보다 무난하게 진행된다. 소니와 조던 가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도 없다. 실화에 없던 대립도 추가해 긴장감을 높이는 영화가 많은 걸 고려하면 <에어>는 이단아에 가깝다. 그 대가로 신선함과 심심함 사이에서 호불호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각색에 비해 소재의 매력도 부족하다. 물론 에어 조던이라는 브랜드는 유명하고 익숙하다. 그러나 나이키와 조던의 협업이 영화가 묘사하는 만큼 중요한 '세기의 딜'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스포츠 산업 관행에 큰 변화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큰 관심이 없다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의문을 피하려는 시도가 엿보이기는 한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접근법을 취해 의문을 가질 여지를 없애려 한다. 조던과 나이키가 함께 위대해질 거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게 그 일환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순간, <에어>의 매력이 감소하는 것도 사실이다.
Acceptable 무난함
말로써 조던이라는 미끼를 던졌고, 나름대로 대어를 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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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란말이가 없는 평화와 행복의 세상을 꿈꾸며
스포일러 주의!
<미키 17>은 마카롱 사업의 실패로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니플하임'이라는 외계 행성 이주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미키 반스의 사연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미키는 무턱대고 '익스펜더블'에 지원하지만 문제는 익스펜더블이 홀로 위험한 일을 도맡고 혹시나 죽게 되면 다시 프린트되는 일상을 반복하게 만드는 매우 비인간적인 직업이었다. 결국 미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보내지만 우연찮게 만난 나샤 배릿지와 연인이 되면서 그나마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17번째로 프린트된 미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아래 크레바스에 빠져 땅 아래 깊은 곳으로 추락한다. 당연히 여느 때처럼 죽을 줄 알았으나 니플하임의 원주민 '크리퍼'가 미키를 구조해 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미키는 겨우 본부에 도착하지만 이미 18번째 미키가 프린트되어 있는 상황. 두 명의 미키가 서로 조우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미키의 이야기를 그린 봉준호 감독의 SF 블랙코미디 영화다.
블랙코미디 버전 <아일랜드>로 시작해서 정치적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끝나는 영화. <미키 17>은 안타깝게도 봉준호 감독이 만든 여덟 편의 영화들 중 가장 아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쉬움이 많은 영화다. 초반에 설정을 줄줄 푸는 미키의 내레이션과 기자의 인터뷰는 대사가 너무 길고 장황해서 지루하다. 전반부에는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다룰 것처럼 하더니 후반부에 가면 그러한 문제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프린트된 인간도 인간인가?' '설령 합리적이라고 해도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옳은가?'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갈등을 벌인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질문들이 중반부에서 멈춰버린 채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커지는 스케일, 미키 17과 미키 18의 너무 빠른 갈등 해결, 후반으로 갈수록 정치 풍자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원인이다.
특히 후반부의 전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대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설정, 상황, 인물들까지 유사한 지점들이 너무나 많다. 크리처의 비슷한 디자인, 인간에게 고문을 받은 새끼 크리처, 그것에 분개하여 인간들을 향해 질주하는 크리처 종족들, 그리고 주인공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엔딩까지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적이 한번 있긴 했다. 바로 <옥자>다. 그러나 <옥자>는 스타일의 유사성 정도에 머물렀던 반면 <미키 17>은 표절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오마주가 지나쳐서 흥미로울 수 있는 영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니까, 마치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기 다른 영화처럼 보일 만큼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인물들도 문제가 있다. 나샤와 티모와 카이, 마샬 부부까지 대부분의 조연 캐릭터들이 다소 기능적으로 그려진다. 티모와 카이는 순간의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일 뿐, 영화가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면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금세 존재감을 잃는다. 마샬 부부 역시 정치 풍자를 제외하면 딱히 인상적인 행적을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퇴장한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미키 17>을 마냥 혹평만 하기에는 좋은 지점들이 너무 많다. 첫 번째로 좋았던 점은 시의성 있는 정치 풍자다. 마샬 부부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하루하루 수명을 갈아가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미키는 문자 그대로 죽어나가면서 마치 공무원처럼 생계를 위해 복무한다. 미키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괴롭히는 존재는 니플하임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이끄는 함장, 즉 대통령이다. 여기까지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흔히 봐왔던 노동 계급과 기득권의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기득권을 묘사하는 대목이 심상치 않다. 이 영화 속의 대통령은 케네스 마샬이다. 케네스는 무능하고 멍청한 데다 자신의 이익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뚱뚱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췄다.
그런 케네스의 곁에는 일파라는 아내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부부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가 대통령인 남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통제한다. 심지어 대머리 부하 캐릭터가 한 명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뿔테안경을 썼다. 봉준호 감독은 특정 누군가를 모티브로 삼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이렇게 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노골적인 상징성 때문에 <미키 17>은 2054년이라는 근미래를 다루지만 오히려 2022년부터 현재까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겨냥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는 권력자들을 대놓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칫 익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치 풍자가 현실과 만나니 굉장히 시의적절해졌다. (물론 촬영은 2022년 12월에 끝났기 때문에 완전히 의도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이 이렇게나 절묘하게 맞닿은 건 우연을 넘어선 무언가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좋았던 점은 이전의 봉준호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낙관주의다. 낙관주의는 자칫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비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결말부에 미키는 상상으로 추정되는 케네스와 일파의 부활을 목도한다. 다시 프린트된 케네스와 그었던 손목이 다시 회복되어 나타난 일파. 이는 마샬 부부로 대표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언제든지 사회를 이끄는 높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미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 설령 그 불안이 현실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것이라는, 그러한 따뜻한 메시지를 뭉클하게 남기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와 비슷하면서 상반되는 결말이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에 있다. 바로 <괴물>이다. <괴물>에서 어둠 속을 응시하던 강두는 시선을 거두고 소년과 함께 밥을 먹는다. 카메라는 이러한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어둠이 잠식한 공간 속 희미한 불빛에 의존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매점을 비추면서. 반면에 <미키 17>은 드넓은 대지 아래 빛을 받고 있는 미키에게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끝난다. <괴물>은 어둠이 다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지만 <미키 17>은 낙관적이고 뭉클한 희망을 준다. 마마 크리퍼가 말하는 평화, 미키가 말하는 행복,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들이지만 이제 그러한 것들이 없어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를 외치는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다. <미키 17>의 낙관주의는 그래서 좋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이 빼앗아간 당연한 것들을 다시 되찾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미키 17>은 가장 실망스러운 봉준호 영화인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봉준호 영화다. 그래서 실망을 했는데도 비판을 하기 망설여진다. 2022년부터 시작된 지난 정치 과정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불안에 떨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참담한 심정을 안은 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라는 단어와 멀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단어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작금의 현실을 유쾌하게 조롱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거기서 나온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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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영화는 엔딩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아들이 본다면 어쩔 수 없지. 아빠는 넷플릭스를 껐다. 난 지금 <오징어 게임>을 보고 있다. 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도 이건 보고 있다. 난 범죄물이나 스릴러물을 좋아한다. 예고에서 내 취향의 느낌이 나서 넷플릭스를 켜 재생을 시작했다. 나는 어쩔 때 취향이 넓은 사람인 척 하지만 사실 등장인물끼리 피 튀기는 걸 좋아한다. 단적으로 피 튀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기 좋은 작품들을 좋아한다. 내가 평소에 산만한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도 영상편집하다 느닷없이 FM을 켜서 게임을 하다가 <오징어 게임>을 동시에 보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산만함. 이건 누가 와도 못 고칠 습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습관. 습관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우리 엄마도 내 습관 전부를 고치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나 스스로도 내 습관을 고치지는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밤에 뭘 먹는 습관은 무슨 짓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소화기약을 먹고 자면 잠에 일찍 들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잘 보일 사람이 있다면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글 쓰다 말고 밤새 딴짓을 하는 뭐 같은 습관도, 언제부턴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습관도 다 고쳐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랬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독히 산만한 인간이라 습관과 싸우는 게 유독 힘들다. 이런 나에게도 나를 바꾼 에피소드가 있다. 난 잘 보일 사람이 있었다. 무의식에 욕지거리를 한 두 마디 하던 나는 비속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고마웠다. 이 말 빼고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렇게 고맙다는 말 많이 했었는데도 말이다. 이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도 아닌데, 사실 걸핏 보기엔 우연에 불과한데도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얻은 셈이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운명과 우연을 빗댄 영화다. 올해 <랑종>이 핫할 때 같이 상영관이 걸렸었던 작품이다. 일본 내에서는 <귀멸의 칼날>을 누르고 얼마 동안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그렇게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산 로맨스 영화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나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같은 영화 나는 좀 별로였다. 몰입이 안 되는 느낌? 그런데 <아사코>는 좋았다. 그런데 난 솔직히 아사코는 로맨스 영화긴 한데 그것보다 철학적인 색이 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일본의 로맨스 영화에 대해서는 취향이 확실했던 셈이다. 이건 필연이었다. 내가 그만큼 일본 영화에 실패를 해 봤으니 이런 판단이 들어간 것이겠지?
내 확실했던 취향만큼이나 영화는 분명한 설정을 보여준다. 아직도 이 영화를 처음 볼 때가 생각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우연처럼 취향이 비슷한 동갑내기 둘이 만나게 된다. 막차가 끊겨 처음 만나게 된 주인공. 카페에서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서로 같이 전시회와 노래방을 가며 서로 잘 맞는다는 걸 확인한다. 단기간에 깊게 친해진 둘은 언제 고백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결국 사랑에 성공한다. 스물하나라는 나이에 가슴 뛰는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극 중 안에는 평범남, 녀로 나오는 듯 하지만) 스다 미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훈훈한 비주얼이 이 고백하는 장면에서의 두근거림을 더 키운다. 달달한 로맨스를 살릴 수 있는 배우들의 캐스팅이 빛난 셈이다. 영화로 돌아가서, 취향이 맞는 걸 확인한 두 주인공은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 고양이도 키우고 동거도 하며 일상을 즐겁게 보냈다.
근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두 가지의 사건이 분기점이 돼서 둘은 소원해진다. 처음은 남자 주인공 무기의 일러스트레이터 일이었다. 벌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자 회사에 취업하게 된 무기. 야근에 야근이 겁쳐 XBOX로 게임도 못하고 미라 전시회도 못 가며 그림 그릴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해 둘의 사이는 소원해진다. 다른 사건은 키누의 '하고 싶은 일'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벤트 기획업체에 취업하게 된 키누. 안정적인 원 직장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곳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키누를 무기는 못마땅해한다.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첫사랑이 이어지고 4년이 지나자 둘은 이별을 결심한다. 우연처럼 시작했던 두 사람이지만 필연을 피하지 못하고 현실에 부딪혔다. 헤어진 둘은 서로를 저주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축복한다. 우연과 운명으로 시작했던 사랑이 결국 이를 부정하며 끝났다. 원래 영원한 건 없다.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는 것이다. 무슨 달콤한 말을 해도 영화의 엔딩은 정해져 있었다. 난 이 둘이 실존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시원섭섭함이었다. 가령 영화의 한 장소에서 둘이 껴안는 엔딩신이 있다. 이 영화에 300% 몰입하며 본 나는 무기의 관점에서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느꼈다. 난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질 않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그런데 끝났다. 무기는 키누와 마주치지 않는 손인사를 건네고 그렇게 각자의 새로운 연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러닝타임도 끝났다. 마지막 막이 내려가는 순간에도 사실 상영관 밖을 못 나왔던 것 같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당연한 사랑이야기에 참 깊게도 몰입했다. 영화는 러닝타임이란 게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간관계도 그렇다. 취향이 같다고 해서 영원한 사랑이 될리는 없으며 결국 둘 중 한 명은 서로를 떠나야 한다. 내가 이 영화 상영관에서 버틴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딱 붙잡고 일어섰다. 그래. 영화건 소설이건 드라마건 좋다고 생각한 것에 여운이 오래 남을 수도 있지. 문을 열어서 밖을 나섰다. 길거리에 마스크 낀 수많은 커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턱을 괴고 땅바닥에 앉아 가만히 바라봤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봤던 CGV 옆에는 꽃집이 없다. 이발소와 옷가게가 있다. 어차피 나는 저기서 평소에 머리 안 자른다. 그리고 저기 옷가게들은 여자 옷을 판다. 맞은편에는 피부과가 있다. 바라보기 좋은 공간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바라봤다. 어차피 내 인생에서 시작과 끝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인생은 꽃다발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확 아름답게 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쳐온 개화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알았다. 갑자기 드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느낀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것? 나에게 꽃다발이 되어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난 정말 많이 변했다. 피고 지는 걸 반복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N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정신상태가 비슷하길 원한단 말인가. 이건 다들 똑같을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나는 항상 끝이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꽃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많은걸 받으면서 살았다. 이 과정이 아름다웠냐. 아니다. 나는 추해지고 멍청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세게 찰 만큼 창피한 뭐 그런 기억 말이다. 심지어 무엇이든 끝이 있으니 우리 인생은 참으로 심심한 셈이다. 그래도 정말 중요한 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즐겁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무기와 키누가 정말 매일매일 행복했을까. 아닐 것이다. 언제는 싸우기도 했겠지. 당연한 사실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남는 건 꽃다발같이 아름다웠던 시간이다. 질 때도 필 때도 있는 게 사람이다.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면 편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느낌이다. 꽃을 이쁘게 전시하려고 화분을 직접 만들어 낸 느낌인 셈이다. 시들면 어때. 난 여기서 풍기는 향기 때문에 언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는걸. 잘 보이고 싶어 비속어를 섞지 않게 됐는걸.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걸 위해서 사람은 물도 주고 햇빛도 줘야 한다. 끝이 있지만 나와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건 이렇게 꽃이 피고 지는것처럼 아름다운 시간이다. 어차피 이거 이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독자들이라면 다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구하고 유념해야 하는 건, 분명한 끝이 있다면 이들에게 웃는 모습으로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라는, 뭐 그런 거다. 웃으며 기억하자. 그리고 보내주며 스스로에게 되뇌자.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아름답게 활짝 피어날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난 과거의 내 사진을 보며 기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변했다. 이런 나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며 산 셈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어준 이들이 이 글을 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의 해피엔딩이 되어줘 참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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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러 vs 액션, 익숙한 것들의 집합체 <스위트홈>
1. 신체능력 5점: 이 배우에 이 무기, 낯설지 않아
2. 판단력 5점: 검술은 거들뿐
3. 정신력 5점: 소주 한 잔으로 몇 모금까지 가능?
4. 필터링 2점: 생각을 그대로 뱉는 편
5. 포커페이스 5점: 비현실적인 초연함, 하지만 사실은....
신체능력, 이 배우에 이 무기, 낯설지 않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모리 역할을 맡은 김남희 배우가 해당 캐릭터 정재헌으로 분했기 때문에 검을 든 모습을 보자마자 친근함을 느꼈다.
"돌잡이에서 칼을 잡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납득이 갈 정도로 멋진 검술 실력을 보여준다.
판단력, 검술은 거들뿐
아무리 검술 실력이 좋다고 해도, 갖가지 능력을 가진 괴물들을 칼 한 자루로 상대하기엔 버거워 보인다.
그런데, 정재헌은 칼 한 자루로도 대체로 문제를 잘 해결한다.
관찰 결과, 그 비결은 상황 판단력!
감상의 재미를 위해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그래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상황을 판단하여 치고 빠지기를 잘한다.
정신력, 소주 한 잔으로 몇 모금까지 가능?
과거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대사 한 마디, 그리고 빨리 마시고 가라는 식료품 담당의 핀잔을 들어가며 소주 한 잔을 몇 모금에 걸쳐 마시는 장면. 이 장면이 정재헌이라는 캐릭터의 정신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잠깐 동안 비친 인물의 성향이 훗날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도 드러난다.
필터링, 생각을 그대로 뱉는 편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도 '방이 더럽다'는 말을 툭 내뱉는다.
목소리와 말투만 들어보면 무척 다정하고 사려 깊을 것 같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뼈 때리는 소리이다.
생각을 말로 옮길 때 필터링이 잘 안 되는 편.
예상치 못한 갭이 캐릭터의 매력도를 더 높여준다.
포커페이스, 비현실적인 초연함, 하지만 사실은....
괴물의 위협을 받고 나서, 중요한 행동을 결정하기에 앞서서도 차분해 보인다.
시청자 눈에도, 옆에 있는 인물의 시선으로도 "떨고 있다고? 하나도 안 그래 보이는데?"라고 생각게 되지만, 정작 정재헌은 '굉장히 떨린다'라고 말한다.
의도치 않은 포커페이스의 달인.
배우 개그 또는 스포일러
존재 자체로도 스포일러가 되는 배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한 캐릭터로 분하신 김갑수 배우. "언제 어떻게 돌아가시는 걸까?" 사망 전문 배우로 유명하신 터라, 해당 배우의 캐릭터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드라마<미스터션샤인>과 영화 <박열>에서 악랄한 연기를 선보여준 이정현 배우는 "여기에서는 또 얼마나 나쁜 놈일까?" 비교하며 감상케 된다.
또, 연기 잘하는 조승우 배우가 극찬한 한 배우도 극 중에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 스쳐가는 조연으로 나온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감상했다.작품 자체 스토리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배우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며 전개를 유추하게 된다.
그 예측이 뒤집어지든, 그대로 이뤄지든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더해져 좋다.
호러가 우선일까, 액션이 우선일까?
한때 재밌게 감상하던 만화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장르를 설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sf, 역사, 액션, 개그, 모험 등 잡다한 주제들을 모두 포괄하는 만화였기 때문에 그냥 '장르는 짬뽕이야'라고 소개하곤 했다.이 드라마 <스위트홈>도 그렇다. 장르는 짬뽕 같다. 감상하다 보면 익숙한 요소들이 이것저것 보인다.
돌연변이와 인류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할 법한 고민은 영화 <엑스맨> 시리즈와 게임 <메트로>에서 먼저 들었다.
조용하던 주인공 소년이 돌연변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장면은 굉장히 만화 <도쿄 구울>과 닮았다.
생존자들이 괴물과 괴물보다 무서운 인간들에 대항해 살아남으려는 투쟁은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에서.
캐릭터들에게 함부로 정 주면 매우 가슴앓이하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리즈가 떠올랐다.
거기에 의사 드라마에서도, 법정 드라마에서도 연애하듯이 세상이 망조 드라마여도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오마주한 듯,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도 보였다.이런 '짬뽕'콘텐츠 중에서도 내가 선호하는 작품들은, 아무리 잡다한 특징을 포괄하고 있더라도 명확한 한 주제가 이끌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은 쭉 끌고 나가는 주 특징이 없는 듯하다.특히, 배경음악과 화면이 조화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E-sport 관람은 하지 않아서 이 드라마의 주 배경음악으로 쓰인 Warriors라는 곡을 몰랐다.
하지만, 화면은 호러가 강조되고 있는데 음악은 액션에 힘을 주고 있으니 어색했다.
이 작품은 분명 호러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왜 굳이 액션을 강조하는 음악을 주로 썼을까? 이 점이 아쉽다.
원작과 다른 캐릭터 구성과 전개
N웹툰에서 유료로 전체 스토리를 감상하기는 부담스러워서 서핑을 통해 정보를 찾아봤다.
원작 웹툰의 설정과 드라마를 비교해둔 정보들을 읽다 보니, 원작 그대로의 실사화를 기대하던 팬들에겐 아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서 괴물과의 싸움, 생존을 위한 갈등을 다룰 뿐 아니라 아파트 밖의 상황을 전해줄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추가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해당 요소들로 인해 시즌2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쉬운 면도 분명 존재하지만, 원작과 다르게 전개되면서
새로 등장할 인물이나 에피소드들을 기대하며 시즌2를 바라고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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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한 얼간이와 지독한 소음기
줄거리
천재들만 모인다는 명문대 ICE에 이상한 녀석이 떴다! 그의 이름은 란초.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찍소리 하지 못하고 끌려오다시피 학교에 온 파르한과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을 단 라주. 두 사람은 란초와 함께 방을 쓰며 친한 친구가 되고, 과하게 자유분방한 그의 방식에 점점 빠져드는데...
감상 포인트
1. 노래 많다, 잊지 마라, 이 영화, 인도 영화.
2. 설마 아직까지 결말 모르는 사람... 없죠?
3. 나는 얼간이인가, 소음기인가?
감상평
인도 영화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 세 얼간이. 나도 몇 번이나 봤지만, 인생이 지치고 무료할 때 보면 나름대로 힐링도 되고 동기부여도 된다. 몇 번이나 보고 나니 학생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나 할까. 둘리를 보면서 고길동이 불쌍하면 어른이 된 거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보며 바이러스의 말이 이해된다면 어른이 된 걸까. 조금 슬프네.
"너는 틀렸어!
네가 항상 옳을 수는 없어!"
바이러스 총장은 입학 첫날 란초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육방식에 대한 의문과 수동적인 태도를 거부하는 란초는 학교를 4년간 바이러스의 눈엣가시였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발전기를 만들어내 무사히 출산을 도운 란초를 인정한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기성세대와 신 세대는 영화 내내 앙숙처럼 대립하다가 결국 손을 맞잡고 서로를 인정한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쌓아온 것들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이것 역시 삶에 있어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우주 펜을 통해 입증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신 세대가 나아갈 수 있게 길을 비켜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오로지 젊은 청춘들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도 한 걸음 나아가 그들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어른은 드물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두고 말도 안 되는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이 영화는 과장되어 있고, 무책임할 정도로 긍정적이다. 평생 반항 한 번 못했던 파르한이 아버지를 그렇게 단시간에 설득시킨다는 것도, 면접관에게 필요 이상의 TMI를 방출한 라주가 합격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란초 같은 사람이 실제 한다는 것도. 영화는 그냥 모두 거짓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주기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밝고 호탕한 웃음 뒤로 슬픈 젊음의 그림자가 어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세 친구들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너무 어렵고 힘겨운 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파르한과 라주가 자기 내면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간 것처럼. 그래서 청춘은 짠맛이 난다, 이 영화처럼.
"너의 재능을 따라가 봐.
그럼 성공은 뒤따라 올 거야."
인생에 회의적일 때는 이 대사를 듣다가 울컥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아니, 너는 성공했다고 그렇게 말하기냐? 나는 잘 하는 것, 좋아하는 것 따라가는데도 이 모양 이 꼴로 살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를 보며 란초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차투르는 커다란 집, 최신형 차, 고연봉의 직장까지 자신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성공인이라고 자부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공의 기준이니까. 하지만 란초는 400개가 넘는 특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심 속 높은 빌딩에 살기보다는 시골 마을에서 작은 학교를 차려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해 보인다.
"돈은 덜 벌겠죠. 차도 더 작을 거고 집도 더 작겠죠.
하지만 전 행복할 거예요, 아빠."
그럼 란초가 성공을 못한 걸까? 파르한은 사진작가로 유명해졌으니까 성공한 걸까? 라주는 이제 집이 넉넉하게 사니까 성공한 걸까? 란초가 말한 '성공'이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돈 많이 벌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걸 넘어서,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만족하며 꾸려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란초가 말하는 성공인 셈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단순히 '성공하기 위해' 집착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발칙한 얼간이, 지독한 소음기,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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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 2021
미국, 그리스, 드라마, 122분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러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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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너무 멋지고 또 이상하게도 보이기도 해요.
과거 영화와는 다르게 악녀의 길을 가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조금은 다른 길을 가려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크루엘라의 머리가 흑과 백으로 딱 나뉘어 있는 것처럼 기묘하게 균형감이 살아있는 영화에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 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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